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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26
    타인의 정리해고(5)
    구르는돌
  2. 2009/06/23
    월러스틴, <유토피스틱스> 3장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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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9/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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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06/23
    월러스틴, <유토피스틱스> 1장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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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기완 선생님의 <장산곶매 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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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르원틴, <DNA 독트린>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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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9/06/10
    서사연,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발전> (새길, 19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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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9/06/01
    [발췌독] <에코페미니즘>(반다나시바 & 마리아 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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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9/06/01
    이명원, <말과 사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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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9/05/31
    고바야시 다키지, <게공선> 중에서
    구르는돌

타인의 정리해고

어제 인터넷으로 MBC스페셜 <타인의 정리해고>편을 봤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와 이를 둘러싼 해고 대상 노동자와 명단에서 제외된 '살아남은' 노동자들의 갈등을 섬세하게 다룬 다큐멘터리의 수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참... 기분이 그렇다.

왜냐하면 해고 대상자 명단이 발표되고 나서 '한솥밥' 먹던 노동자들이

둘로 갈라지고 나서, 그들은 순식간에 극한 대립 관계로 돌변했다.

그런데 파업하는 노동자들의 주장과 그것에 반대하는 쪽으로 '내몰린' 노동자들의 논리가

사실상 똑같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놀라고 말았다.

 

사측은 해고 명단에서 제외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파업반대 결의대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이에 불참시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했다.

파업투쟁 가족대책위는 결의대회가 열리는 운동장 앞에서 바로 어제까지 '동료'였던 사람들을 향해

울분을 토한다.

 

"여러분들도 처자식이 있으시다면, 우리 맘 이해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이러실수가 있어요? 어떻게 여길 와요?"

 

한편 결의대회가 끝나고 인터뷰에 응한 결의대회 참가 노동자는 말한다.

 

"처자식이 있는데 어떻게 안와요. 불이익 준다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어쩔 수 없죠."

 

해고자 명단이라는 종이쪼가리에 의해서 갈린 두 집단의 운명이지만, 어찌되었건 양쪽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하나다. '처자식'. 아니  이건 논리라고 할 수 없겠지. '처자식'이라는 한마디로 모든것을 압도하는 이 한국사회의 집단적 심리구조. 쌍용차 파업투쟁에 지지를 보내면서도 왠지 허전한 마음을 달랠길이 없다. 파업중인 노동자들이 명단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들도 지금 그들이 비난하고 있는 이들이 한 행동과 다르지 않은 행동을 했을 테니까... 그게 우리 모두를 둘러싼 단일한 논리이니까...

 

 

______________________

덧붙임) 오늘 사측에서 공장진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외친 구호가 '비폭력, 파업중단' 이랜다. 절묘하게도 당시 공장을 점거하고 있던 노조는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중이었다고 하고... 공중파를 타고 시시각각 날라드는 시각이미지에 중독되어버린 이나라 국민들은 비장한 각오로 스크럼을 짜고 비폭력을 외치며 행진해 들어온 사측 직원들에게 동정표를 던지겠지? 아, 머리가 지끈지끈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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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틴, <유토피스틱스> 3장 요약

 

■ 명실상부한 합리적 세계, 또는 낙원의 회복은 가능한가?



우리가 그 결과가 불확실한 길고 어려운 이행과정을 겪는 중이라면, 우리 앞에는 두 개의 커다란 질문이 놓여 있다. 우리는 실제로 어떤 종류의 세계를 원하는가? 그리고 어떤 수단 혹은 경로를 통할 때 거기 도달할 가능성이 가장 클까? 나는 이에 대해 유토피스틱스 즉 역사적 대안에 대해 진지하게 평가하는 동시에 가능한 대안적인 역사적 체제들의 실질적 합리성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수행한다는 관점에서, 그리고 확실성의 종언(다시 말해 진보의 필연성이 아닌 가능성)의 관점에서 문제를 던지고자 한다.


1. 근대 세계체제 내의 역사적 사회주의


역사적 사회주의에 적용되는 주된 죄목은 다음 세 가지이다. ①국가 및 당 권력의 자의적 사용 또는 공포정치 ②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에 베풀어진 온갖 특권 ③국가의 개입으로부터 기인하는 광범위한 경제적 비효율성. 그러나 이러한 특성은 이들 당의 휘하에 있지 않았던 체제의 경우에도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렇다면 실제로 자신의 원만한 작동을 위하여 이러한 종류의 정권을 필요로 했던 것은 바로 전체로서의 체제 그 자체 아닐까?

물론 혹자는 모든 국가체제가 이와 같지는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나라들도 세계체제의 매우 좁은 한 구석(일부 부유한 지역)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매우 커다란 중간계층이 거주하고 있으며, 전지구의 파이 가운데 자신들의 몫에 대해 이들 집단이 상대적인 만족감을 느끼고, 이들을 보호해주는 ‘법치’가 제도화된 점을 꼽을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한번도 자율적인 전체였던 적이 없으며, 언제나 국가간체제의 작용에 의해 제한을 받아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틀 안에서 움직였을 분만 아니라 대안적 역사체제의 활동을 뜻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2.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체제를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삶의 질을 극대화시켜주는 데 우선권을 주면서, 동시에 집단적인 폭력수단들을 제한하고 통제하여, 모든 사람이 대체로 그리고 평등하게 신변의 안전을 느끼고 타인들의 생존이나 평등권을 위협함이 없이 가장 폭넓은 범위의 개인적인 선택권을 누릴 수 있는 구조를 고안해내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이는 기만적이게도 민주적 체제라 불려온 수정되고 변형되고 은폐된 전제정치 대신에, 자유주의의 이상을 평등주의적 체제 혹은 이론 그대로의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세계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것만으로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 체제라는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쩌구 저쩌구~~~)


3. 끊임없는 자본축적의 우선성의 극복을 위한 제언


일반적으로 금전적 보상은 질 높은 노동을 위한 유인책이라고 주장된다. 그러나 질 높은 공예품에 대해 장인에게 보상을 주는 것과 회사를 위해 특단의 이익을 올린 데 대해 경영자에게 보상을 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일을 더 잘하게 되는 일차적 자극이, 상대적으로 조금 더 늘어나는 물질적 보상보다는 오히려 명예와 자신의 노동시간에 대한 통제력의 증대 등의 결합에서 오는 대학교수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전문직의 뚜렷한 예가 있다.

효율성은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이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자본의 축적을 증가시키는 데 따르는 보상은 주어지지 않고 다만 실질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 분배를 확대하는 데 대해서만 보상을 받는 경우라고 해서, 그 주체가 덜 효율적으로 일할 것이라는 예상은 전적으로 타당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늘날 대기업가들이 소도시의 건축가나 정비공장 기술자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큰 조직은 작은 조직보다 효율적인가? 비영리기관들이 영리기관에 비해 항상 능률면에서 떨어지는가? 이와 같은 문제에서도 확실한 증거는 없다. 따라서 대안적 체제의 가능한 기초로서 내가 제안하는 첫 번째 구조적 요소는 체제 내 생산의 기초양식으로서 탈집중화된 비영리 단위들을 설립하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가가진 독점적으로 통제되는 세계시장이 아니라 진정한 시장, 즉 번잡한 도로의 신호등과 흡사한 종류의 규제를 갖춘 시장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4. 인종․성․민족의 평등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능력주의(meritocracy)는 민주화의 압력을 대변하는 것도 사실이고, 동시에 현체제에서는 손에 쥔 팻장이 (인종․성․민족이라는 기준에 의해) 부당하게 조작되었다는 말도 맞다. 이에 우리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개인간의 능력차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공평한 사회적 ‘자리’의 배분에 대한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1)

우리는 계급없는 사회를 맞이하게 될까? 양극화의 종식이 모든 사회적 편차를 종식시키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의문스럽지만, 인간적 필요에 관한 부분을 모두 비영리기구가 제공하고 그 비용을 집단적으로 부담하도록 하여 상품화의 외부에 놓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노멘클라투라의 형성을 막을 수 있을까? 교육과 의료 및 평생에 걸친 최소한의 임금에 대한 접근이 오로지 공직을 통해서만 보장받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리고 이윤추구적 경제구조를 위한 판로가 없다면, 노멘클라투라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여기에는 물론 보수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민주적 정치기구가 필요할 것이다.

생태계 보존에 있어서도 우리는 모든 생산조직으로 하여금 그들의 생산활동이 생태계 자원을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비용을 내부화하도록 요구해야만 한다. 특정한 생산적 활동이 생태계에 미치는 결과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들이 존재할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정치적 선택으로 귀결될 것이다. 근원적인 쟁점은 사회적 비용의 측정 평가를 둘러싼 것이며, 문제는 어떻게 그러한 결정이 진정으로 집단적인 것이 되도록 하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가 결정의 장을 보통사람들의 참여와 통제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으면서도 세계적인 수준에서 이를 가장 잘 제도화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점에서 한 가지 우리 편인 것은 인간의 창조성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필연적인 지노라는 개념을 슬쩍 끌어넣고 싶지는 않은데, 왜냐하면 창조성이라는 것이 반드시 그리고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갈 수 있을지에 대한 정치적 문제에 이르게 된다.


5. 디 람뻬두자 원칙 -- 변화를 통한 불변의 유지전략


이는 죽느냐 사느냐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투쟁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다음 500년간의 역사적 체제의 기초를 놓는 일에 대하여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살펴야 할 점은 현재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 것이며 실제로 헌재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이다. 그들은 현재 구조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다. 특권층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체제의 위기를 의식했을 때 일어난다. 즉 그들이 위기의식을 실제로 느끼고, 그들의 활동과정에 이러한 예상을 완전히 통합시킬 때 말이다. 그 시점에서 그들이 아무것도 변화히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자 (아니면 그렇게 하려는 듯이 보이고자) ‘디 람뻬두자 원칙’2)(di Lampedusa principle)을 도입하려 할 가능성이 쾌 크다. 첫 번째 문제는 변화를 고안하는 일이다. 두 번째는 자기 진영의 대부분을 속이는 일이요, 세 번째는 적들을 속이는 일이다.

반평등주의적 결과를, 그것도 많은 경우 바로 같은 계층에게, 적어도 처음 몇 백년 동안 보장해준 결정적 성과를 빼놓으면 거의 모든 면에서 봉건체제와는 다른 것이 자본주의체제인 것이다. 앞으로 특권층은 현재 불만을 가진 자들의 어법을 많이 끌어들여 자본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 했던 것과 같은 행위를 할 것이다. 그것은 환경이라든가 다문화주의 혹은 여성의 권리라는 명목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운동 자체가 흡수를 거부하는 경우에도 수사법은 흡수 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서 세 가지 문제가 나타난다.3) 첫째는 세계적인 차원의 집단 전체에는 이득이 되는 일이 특권층 내의 하위집단들에게는 전혀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손해를 보는 하위집단들은 물론 동조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그리하여 그 조치의 정치적 생존가능성을 뒤흔들어놓을 것이다. 둘째는 특권층 가운데 일부가 생각해 낸 ‘디 람뻬두자’ 전략이 있다고 할 때, 특권층의 다른 일부는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해 이를 정치적으로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전략의 옹호자들은 모든 것을 낱낱이 까발려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디 람뻬두자 저략의 목적 자체를 짓밟는 것이 된다. 이는 세 번째 문제로 직결된다. ‘디 람뻬두자’ 전략의 핵심 요소는 실제 전략에 대해서는 결코 너무 공개적으로 선포하지 않으면서 표면적 전략만을 고수하는 것이다. 즉 자신들 쪽에 인력을 동원하기에는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편에게 맹렬한 반대의 증거나 동기를 제공하지는 않을 만큼의 설명만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반대편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행동은 어떠할 것인가? 그들의 내부는 특권층보다 이질적이며 무정형적이기 때문에 더욱 예측하기 힘들다. 나는 이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어떤 강령이 아니라 단지 강령에 대한 토론이 포함해야 할 몇가지 요소들, 즉 실질적으로 더욱 합리적인 역사적 체제를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 그리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이행의 시기를 헤쳐나갈 것인가 하는 점들을 제시했다.


6. 새로운 질서의 성격은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달렸다.


체제의 마지막 시기 즉 이행기는 예측 불가능하지만 또한 특히나 개인과 집단의 참여에 좌우되는데, 이를 나는 자유의지 요소의 증대라 부른 바 있다. 우리는 당면한 구조적 위기의 성격과 나아가 21세기를 위한 우리의 역사적 선택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식의 틀을 재구축해야 한다. 일단 우리가 선택의 여지들에 대해 이해하고 난 후, 우리는 승리하리라는 아무런 보장 없이도 투쟁에 참가할 태세가 되어야 한다. 이는 긴요하다. 왜냐하면 환상은 오직 환멸을 낳을 뿐이며, 그에 따라 탈정치화를 낳기 때문이다.

현존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의 끊임없는 축적과정에 구조적인 한계가 존재하며, 이러한 한계들이 체제의 작동을 막는 제동장치로서 현재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 내가 작동 메커니즘의 점근선이라 부른 이러한 구조적 한계들은 겪어내기에 불쾌하며 그 궤적을 결코 예측할 수 없는 구조적인 혼돈의 상황을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혼돈으로부터 약 50년간에 걸쳐 새로운 질서가 떠오를 것이며, 이 새로운 질서는 그 사이 모두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형성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가 더 나아질지 더 나빠질지를 예측하지도 않으며 또 할 수도 없다는 의미에서 나의 분석은 낙관적인 것도 비관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 우리 모두에게 훨씬 더 이로운 종류의 구조와, 그러한 방향으로 우리를 움직여줄 종류의 전략에 대한 논의를 고무하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현실적이다. 그러므로 동아프리카에서 쓰는 말대로 하람비(harambee)!4)







 

1) ex) 100명에게 시험을 치게 해서 50명에게 자리를 나눠준다고 했을 때, 상위 10명에게는 일단 자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위 10명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시킬 수 있다. 그러면 가운데 80명은? 사실 이 80명이 그야말로 ‘중간’의 실력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그 내부에서도 차이가 있겠지만, 이들은 대개 100명 중에 평균적 능력을 갖춘 이들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나머지 40개의 자리는 80명의 추첨을 통해서 배정하는 것은 어떨까? 물론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월러스틴)

 

2) 『살쾡이』(1958)의 작가인 이탈리아의 소설가 주제뻬 디 람뻬두자에서 따온 것으로, 19세기 중엽 씨칠리아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한 귀족이 다른 귀적에게 “만사를 전과 같이 유지하려면 모든 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3) 책에는 두 가지라 말하지만, 첫 번째 문제가 두 개로 나뉘기 때문에 실제로는 세 가지.

 

4) 1950~60년대 케냐 민족운동의 구호로서, “힘을 모아 해보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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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틴, <유토피스틱스> 2장 요약

 

■ 어려운 이행기, 지상의 생지옥?



1. 거대이윤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자본주의는 자본의 끊임없는 축적을 허용하며 긍정하는 체제이다. 하지만 거대 이윤을 내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닌데, 왜냐면 경쟁자들은 가격과 그에 따른 이윤폭을 낮추기 때문이다.

수요와 공급을 결정하는 ‘손’인 가격과 비용은 안 보이는 것도 아니지만, 완전히 보이는 것도 아니며, 페르낭 브로델이 자본주의의 ‘불투명한 지역’이라 부르는 어렴풋한 중간세계에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시장에 불가피하게 개입하는 국가와 관련된다. 전통적으로 자본주의 이론가들은 애덤 스미스를 따라 국가의 시장 ‘개입’을 개탄해왔다. 그러나 나는 무제한적 자유방임주의가 자본주의의 대들보라는 주장은 속임수일 뿐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고 믿는다.

자본주의 생산자들은 임금지출액과 세금부담액을 줄이는 데 많은 힘을 쏟는다. 우리는 이를 딜레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임금지출액이 거의 제로인 경우, 물론 이윤의 즉각적인 폭은 치솟을 것은 분명하지만, 유효수요에 미칠 중기적 영향은 참혹할 것이다. 마찬가지의 경우가 세금부담액에도 해당된다. 세금은 생산자들이 필요로 하는 봉사에 대한 대가이며, 여기에는 특정한 생산자들이 시장을 부분적으로 독점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국가의 노력이 포함된다. 따라서 지나치게 낮은 세율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세금부담액과 임금지출액이 각기 늘어날 때마다 이윤의 폭은 잠식된다. 실제로 이것이야말로 자본가들 사이에서 성공의 시험대이며, 가장 잽싸고 정치적인 연줄이 가장 좋은 사람이 이기는 경기이다.


2. 생산자 부담의 증대와 생태계의 위기


임금과 봉급의 형태로 개별 피고용자들에게 사회적으로 규정된 재생산 비용보다 더 많이 이전되는 잉여가치의 일부는 작업장과 정치적인 장에서 이루어지는 계급투쟁의 결과이다. 국지적인 노동자집단이 작업장이나 정치적 영역에서, 혹은 좀더 흔히는 양쪽 모두에서 조직화됨으로써,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생산자가 실질임금의 상승을 거부하는 데 드는 비용이 이를 받아들이는 데 드는 비용보다 더 높게 만들 수도 있다. 물론 임금지출액의 상승은 또한 유효수요의 상승이며 따라서 어느 집단의 생산자들에게는 이득이지만, 상승된 임금을 지불하는 집단에게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한 상승이 일정한 집단의 생산자들에게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그런데도 이들이 그곳의 정치적 장에서는 이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없을 때, 그들은 자기네 생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노동자들의 임금이 역사적으로 낮은 곳으로 재배치함으로써 해결책을 찾고자 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약한 노동자집단은 화폐화가 덜 된 농촌지대를 벗어나서 도시의 생산지대로 처음 옮겨온 사람들이다. 이렇게 정치적 약점을 지녔던 어떤 노동자집단도 그런 약점들을 30-50년 내에  극복했고, 오늘날에는 훨씬 더 짧은 기간 안에 그렇게 되리라 장담할 수 있다. 즉 생산의 재배치라는 것은 그것에 따른 이득이 다분히 일시적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제 지구에서 재배치가 가능한 지대가 존재하는 비율을 가리키는 곡선은 점차 점근선에 도달해가고 있다. 세계의 탈농촌화가 가속화되면서 노동자들의 교섭력은 증대하고 있다.

점근선은 세금부담액에서도 나타난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본가까지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국가가 더 많은 지출을 하기를 바라왔는데, 만약 국가가 더 많은 지출을 하려면 더 많은 세금을 걷어야 한다. 국가로 하여금 더 많이 지출하되 동시에 더 적게 과세하라는 모순적 압력이 작동하는 것이다.

세 번째 점근선은 생존조건의 고갈이라는 곡선이다. 점점 더 많은 발전과 그에 따른 더 많은 파괴가 점근선에 다다르게 만든다. 이렇게 된 이유는 파괴에 의해 이득을 보는 생산자들이 대부분 그러한 파괴를 생산비용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비용의 절감으로서 기록해왔기 때문이다. 신고전경제학에서는 이를 비용의 외부화(externalization of costs)라고 부른다. 국가는 점차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재정지출을 늘리라는 요구에 직면해 있고, 이는 생산자에 대한 이윤압박과 기업의 재정위기를 초래할 것이다.


3. 신자유주의는 성공할 것인가?


현재의 상황에서 자본가들마저도 강한 국가를 요구한다. 강한 국가가 없다면 상대적인 독점이란 있을 수 없으며, 자본가들은 경쟁적 시장의 부정적인 면들을 겪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국가는 왜 약해졌는가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초국가적인 기업체들이 제 진정으로 전지구적이 되어서 국가 규제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오류다.

우리는 주변에서 온통 반국가주의적 목소리들을 듣는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반국가주의적 목소리들은 세계 노동인구 그 자체로부터 나오고 잇는데, 이들은 모두 서방세계의 조절된 ‘사회 경제’ 모델이건, 이제 신용을 잃은 쏘비에뜨 모델이건, 혹은 제3세계의 ‘개발주의적’ 모델이건 간에 자유주의 국가들의 개혁주의적 과제에 대한 환멸의 결과이다.

신자유주의에 덧붙여 이윤압박에 대응할 수 있는 두 번째 계획은 마피아 원칙의 확대이다. 여기서 마피아란, 법적 제약을 어기고 탈세를 하거나 보호비용을 갈취함으로써 상당한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 또 이를 위하여 사적인 물리력이나 엄청난 뇌물, 국가 공식과정의 부패를 동원할 태세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약한 국가들의 관료와 정치가는 많은 경우, 점점 더 약해지고 대중적 정당성을 상실하게 되면서, 국가기구 외부의 마피아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키곤 해왔다. 몇몇 경우에는 그 두 집단을 구분하는 것이 유용하지도 않고 무의미할는지도 모른다. 이는 점점 더 국가의 정당성을 박탈하는 결과가 된다.


4. 국가의 쇠퇴와 국가외적 자기방어 증가의 악순환


권력의 바깥에 있는 ‘보통사람’들은 국가의 행동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효과적으로 봉사해줄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환상을 버리면서 국가에 대하여 적대적으로 돌아서게 되고, 그 결과 자신들의 요구에 응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을 약화시킨다. 이는 결국 보통사람들이 국가의 결정들을 바꾸는 대신에 피호관계나 국가외적인 자기방어, 혹은 이 두 가지의 복합물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임을 뜻한다. 이는 거의 500년간 보통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피호관계나 국가외적인 자기방어의 역할이 줄어왔다는 근대 세계체제의 장기적 추세가 역전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1)

국가 정당성 하락의 가장 크고 즉각적인 결과는 두려움, 즉 범죄와 인종갈등과 관련된 것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두려움이다. 사람들은 범죄가 빈발한다고 생각되는 지역을 피하게 되며, 또한 국가에 징벌적 구조를 증가시키도록 압력을 넣는다. 이는 정당성의 관점에서건 재정적 자원의 관점에서건 궁극적으로 체제에 과부하를 가져온다.

경찰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형성된 19세기 초엽에는 개인적 치안과 자경단을 만들어냈던 공포스러운 환경을 끝장내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 개념은 세계체제 전역으로 확산되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25년 동안 최고치의 효율성에 도달했다. 이제 그 추세가 눈에 띄게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범죄의 확산에 대해 국가의 대처능력이 명백히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사람들은 커다란 초조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범죄율 증가에 따라 경찰력은 점점 더 강력하고 무절제한 힘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미연방수사국(FBI)은 한때는 갱단을 소탕하는 영웅으로 우상화되고,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는 없어서는 안 될 수호자로 간주되어 왔지만 최근 들어 그 자신의 무법성과 무능력으로 욕을 먹는 조직이 되었으며, 이는 우파 쪽에서 주로 제기되기 십상이었다.


5. 근대 세계체제의 창조물로서의 인종갈등


최근 레바논, 보스니아,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르완다, 등에서 일어난 종교적, 언어적 공동체에 기반한 전쟁에 대한 통상적인 분석은 이들이 원시적인 분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해주지 않는다.

‘인종적’ 정체성은 어디까지나 근대 국가구조의 틀 안에서 주장되는 정체성인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행동의 양식이며, 기존 정치구조가 최소 수준의 공정한 경기도 보장해줄 수 없는 것으로 탈정당화된 바로 그때, 그리고 다른 분할선들, 다시 말해 좀더 납득이 갈 수도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정치적 분할선들이 정치적으로 가당찮아 보이게 된 바로 그 때 더욱 격렬해진다. 인종분규의 증가는 국가 정당성 상실의 가장 큰 지표이다.

19세기 초부터 인류가 경험한 민족주의는 스스로 근대주의적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프랑스나 러시아 혁명의 전통에 호소했다. 오늘날 인종정화의 지지자들은 바로 이 전통을 거부하며 행동한다. 상대적으로 문명화되었다고 주장하는 부유한 나라들에서 이러한 종류의 절망적인 인종분규가 출현하는 것 또한 목격할 수 있다.


6. 세계체제의 해체를 가져올 몇가지 형태의 분출


앞으로 다가올 콘드라티예프 A국면은 틀림없이 양극화의 격차를 더욱 벌려놓을 것이다. 이에 따라 세 가지 분출 형태가 나타날 것이다. 하나는 적어도 지난 2세기 동안 세계 안정성의 중요한 대들보였던 필연적 진보의 이데올로기가 정당성을 잃은 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비중심 지역에서 자본축적의 근본 원리를 전면 부정하는 강력한 운동들을 보게 될 것인데, 이는 기존 맑스주의의 거부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다. 우리가 마구잡이로 ‘근본주의적’이라고 부르는 운동의 다수가 이러한 태도를 반영하고 있으며, 종종 종교적인 색채를 띤다. 여기에는 유대교, 기독교, 힌두교, 불교 기타 등등의 다양한 변종들이 존재하는데, 이는 현존 세계체제에 내재한 양극화를 극복할 능력이 자신들에게 없다는 자각으로 인해 자신들이 세운 국가구조나 고전적인 반체제운동들에 대해 느끼는 대중의 환멸에서 나온다. 이 운동들은 아마 그 자체로서는 근본적인 변화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넘어서는 (전지구적인 이윤압박이나 개혁주의적 자유주의의 대한 전지구적인 환멸과 같은) 요소들의 맥락에서 보면, 전체 구조에 심각한 파탄을 초래하게 된다.

그보다 더 큰 해체의 힘은 세계 군비의 민주화이다. 이제 핵의 확산은 막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게다가 일부 무기는 국가가 아닌 집단들의 손에 이미 들어가 있을 지도 (혹은 곧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옴진리교는 비국가집단이 화학무기를 통해 끼칠 수 있는 해악을 보여준 바 있다. 이에 따라 비중심지대에서 강대국들에 군사적으로 도전하는 싸담 후세인같은 이들이 등장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미국은 그를 물리치는데 매우 힘든 정치적 동원을 했는데, 앞으로 그런 동원이 또 다시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도전은 가난한 나라로부터 부자 나라로의 개인적인 이민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중심지대는 얼마간의 이민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지만 오려는 사람을 모두 받아들이고자 하지는 않는다. 경기하강국면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그리하여 그들은 장벽을 세우지만, 시간이 갈수록 장벽의 효과는 희미해진다. 이에 따라 범유럽권국가는 점점 덜 백인적이게 된다. 이에 따라 그들은 이민자들에게서 시민권을 박탈한다. 그런데 이민자 집단이 일정 비율 이상에 도달하면 국내 분규의 조건이 갖춰지게 된다. 그리고 그야말로 모든 개별 국가들이 나름대로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을 것이기에, 어떠한 충돌이든 촉발되기만 하면 마치 번지는 산불처럼 쉽게 국경을 넘을수 있을 것이다.


7. 위기에 처한 체제와 자유의지 요소의 부상


체젲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구조적 결정력은 개인과 집단의 자유의지를 능가한다. 그러나 위기와 이행의 시기에는 자유의지의 요소가 중심적이 된다. 2050년의 세계는 우리가 만드는 대로 될 것이다. 이는 우리의 주체성과 우리의 헌신 그리고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 전적인 권한을 부여하게 된다. 이는 또한 이 시기가 끔찍한 정치투쟁의 시기가 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데, 이른바 정상적인 시기에 비하여 훨씬 더 많은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1) ‘봉건제적 정치양식의 부활’ 가능성에 대한 암시라고 보여짐. (요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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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틴, <유토피스틱스> 1장 요약

 

■ 꿈들의 실패, 또는 낙원의 상실?



1. 유토피스틱스 -- 가능한 역사적 대안의 탐구


유토피아는 종교적인 기능이 있으며, 때로는 정치적인 동원을 위해 활용되기도 한다. 또 그것은 환상을 길러내며, 환멸을 낳는다. 내가 대체 용어로 고안해 낸 유토피스틱스라는 단어의 취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 대안들에 대한 진지한 평가이며, 가능한 대안적 역사체제의 실질적인 합리성에 대한 우리의 판단 행위이다. 이는 인간의 사회적 체제들과, 이 체제들이 지닌 가능성의 한계, 그리고 인간의 창조성이 발휘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냉철하고 합리적이며 현실주의적인 평가이다.

유토피스틱스는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수단이라 불리는 부차적이고 부수적인 목표가 아니라 우리의 전반적인 목표-- 에 대해서 과학과 도덕 그리고 정치학으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바를 조화시키는 일이다. 수단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은 역사적 체제가 정상적인 삶을 누릴 때 지속되는 문제들의 일부이다. 내가 변혁적 시공간(TimeSpace)이라 부르는 바로 이러한 순간들에 이르러서야 유토피스틱스는 그저 타당한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최대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집단적 지식의 타당성과, 특히 이 지식으로부터 우리의 역사적 체제들에 대해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들의 타당성은 무엇이 실질적 합리성을 구성하는가에 관한 투쟁에서 중심 쟁점이 된다. 따라서 유토피스틱스는 지식의 구조에 대해서, 그리고 사회적 세계의 작동방식에 관해 실제로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 면밀하게 재검토하는 작업을 포함한다.


2. 근대세계의 혁명은 왜 환멸만을 낳았는가?


인간이 정치적 혁명의 꿈을 가져온 이래 언제나 환멸을 겪어온 듯 하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그 좋은 예이다. 보수주의 사상가들은 이것이 사회공학의 결과로서 필연적으로 벌어지게 마련인 사태일 뿐이라고 한다.

근대세계의 혁명적 격변들의 대부분은 피억압 대중의 자발적 봉기라기보다는 (적어도 초기에는) 특정 집단이 국가질서의 붕괴 순간에 기회를 장악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대중들의 지지는 사후적인 것이었다. 보수주의가 대중에게 강요하는 인내심은 결코 폭넓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하층집단들은 이를 그저 감내해 왔을 뿐이다. 하층집단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혁명에 지지를 보낸다.

진정한 혁명적 변화를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논란이 많지만,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사실은 기본적 변혁은 국가 수준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근대 세계체계를 구성하는 국가들에서 혁명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혁명이라는 말이 그 근저에 놓인 사회구조나 혁명을 겪었다는 국가의 작동양식을 뒤바꾸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혁명은 있을 수도 없었다.

국가간체제의 제약 내에서 작동하는 이른바 주권국가들의 창출은 자본주의 세계경제 창출의 요체였으며, 그 구조화에서 필수적인 요소였다. 국가는 결코 자율적인 실체였던 적이 없으며 세계체제의 주요한 제도적 특성에 불과하다. 생산양식을 가졌다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전체로서의 세계체제였다. 이러한 체제 안에서 국가는 체제의 제도이며, 따라서 그 특정한 형태에 관계없이 이러한 자본주의적 추진력의 우선성에 어떤 방식으로건 부응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이라는 용어가 이전에는 봉건적이었던 국가가 자본주의적으로 되었다거나, 이전에 자본주의적이었던 국가가 사회주의적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는 현재 적용 가능한 의미를 갖지 못하며 현실의 기만적 묘사일 뿐이다.

사회주의 국가도 이러한 세계체제의 일부였는데, 이런 주장에 대한 주요한 반박 중 하나는 바로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순수하지 못했고 제대로 사회주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혁명가들은 충분히 혁명적이었다. 그들은 개인으로서 그리고 체제로서 자신들이 세계체제의 구조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그리고 특정한 매개변수 내에서 움직이도록 제약받고 있으며, 이를 무시할 경우 세계체제 내에서 중요한 행위자가 될 모든 능력을 상실하게 되리라는 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시기의 이르고 늦음은 있을지언정 자신들의 의도를 현실에 맞춰 굽히게 된다.

프랑스와 러시아 등 대부분의 혁명들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정상적이고 지속적인 삶 가운데서 일어났다. 일부 사람들이 보여준 혁명에 대한 열광과 또 다른 사람들이 보여준 엄청난 적대감은 그 체제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의 일부였다. 열광이 누적된다는 사실이 한 가지 메커니즘이며, 열광이 환멸에 자리를 내주었다는 사실이 또 하나의 메커니즘이다. 혁명은 결코 그 옹호자들이 바란 방식이나, 그 반대자들이 두려워한 방식대로 작동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혁명이 있으나마나 한 것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상 그러한 격변의 거듭된 패턴은 체제의 어떠한 장기적 추세를 수립하는 중대한 요소였으며, 그 장기적 추세들의 영향은 오늘날 1945년 이후에 와서야 그리고 1989년 이후에 더욱더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3. 프랑스혁명 이후 -- 민중의 열말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누군가가 이들 나라에서 혁명 20년 전의 어느 한 순간과 일반적으로 혁명이 종결되었다고 생각되는 시점으로부터 20년 후의 어느한 순간을 비교한다면, 형편은 비슷하되 이른바 혁명을 겪지 않은 나라들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그 변화가 과연 클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세계체제 전체를 본다면 결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들 두 혁명의 결과로서 세게체제의 지구문화(geo culture)에서는 커다란 변화들을 추적할 수 있으며, 이는 세계체제 전체의 장기적 추세에 반영되는 변화인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 개념은 세 가지가 있다. ①정치적인 변화가 예외적이며 본질적으로 부당하다기보다는 항상적이며 정상적이라는 개념. ②주권이 군주나 귀족집단체가 아닌 인민에게 있다는 것. ③국가 안에 거주하는 인민이 민족을 구성하며 그들은 그 민족 내지 국민공동체의 시민이라는 점. 이에 대해 프랑스혁명에 대한 거부로서 보수주의 이념이 등장했고, 프랑스 혁명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지만 기본개념들은 승인하는 자유주의가 등장했다.

보수주의자들은 법제화를 통한 변화가 사회질서에 끼칠 수 있는 손상에 주목하면서, 전통적 기구들과 상징적 지도자들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희망을 걸었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민중이 요구하는 이론적 정상성, 민중주권, 시민권을 허용하되 이들 원칙에 따라 일어날지도 모르는 변화를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들은 통제된 변화를 원했다.


4. 1848년 혁명 -- 지구문화로서의 자유주의의 확립


1848년 혁명은 좌파 이념이 중도파 자유주의로 간주되던 것과 결별하여 우파 보수주의와 중도파인 자유주의 모두에 대립하는 제3의 이념으로서 출현한 순간을 이른다. 이를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이 혁명은 매우 빨리 불타올랐으며, 그만큼이나 빨리 소진되었다. 그럼에도 당국자들은 이 때문에 크게 겁먹었고, 이 두려움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이 함께 기성의 질서를 수호하는데 협력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48년 실패는 좌파에 정치적 현실주의라는 각성을 강요했는데, 이는 주권국가에서 권력의 획득과 국가사회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게끔 했다. 이러한 전략은 장기적으로 볼 때 전문가들에 의하여 관리되는 합리적인 변화라는 자유주의의 전략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거의 어디서나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라는 3대 이념이 정치적으로 경합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중도파인 자유주의가 세계적인 이념이 되었는데, 이는 보수주의와 사회주의가 결국 관리된 개혁을 기초로 하는 자유주의적 주제의 변형에 불과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로서 대중의 압력이 정당화된 상황에서 이를 억제할 방법에 관해 한 조를 이루는 세가지 이념이 등장하자, 한 세기 넘게 모든 사회적 행동이 그 안에서만 일어나도록 할 매개변수가 수립되었다. 그 결과로 참정권과 복지국가가 등장했다. 결국 자유주의적 양보들은 더욱 근본적인 변화들에 대한 압력을 낮추게 되었다.


5. 민족주의․인종주의․성차별주의의 대두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억압자에 대한 피억압자의 저항이지만, 그 반대이기도 하다. 민족주의에 이러한 특성을 부여한 것은 바로 민족주의와 시민권의 연계이다. 무엇을 포함시킨다는 것은 또한 무엇을 제외시킨다는 뜻이다. 시민권이 한 일은 배제가 공개적인 계급장벽이 아니고 민족적인, 혹은 숨겨진 계급적 장벽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바꿔놓는 것이다.

백인종의, 혹은 아리안족의 우월성에 대한 노골적인 이론화인 인종주의는 19세기에 북부와 서부 유럽에서, 그리고 유럽의 정착자들에 의해 지배되는 다른 지역의 국가들에서 흥성하였다. 자유주의적 정치체에 소속된다는 것은 강대국 집단의 공통 시민권이라 할 일종의 특급시민권을 수반하는 것으로서, 현재는 강대국에 거주하고 있더라도 인종적으로 세계의 나머지 부분에 기원을 둔 사람들이나, 백인들이 정착한 국가의 토착민을 포함한 세계의 나머지사람들이 거기서 배제되었음을 뜻했다.

성차별주의는 주부(housewife)의 개념을 창조하고 신성화하는 것을 필요로 했다. '단독임금 가정'의 남성 생계담당자와 주부는 한 짝이 되는 위치에 자리매김 되었다. 이는 다음의 세 가지 효과를 낳았다. ①얼마만큼의 잉여가치가 노동계급에 실제로 재배당되고 있는지를 흐리게 했다. 단독임금의 남성 임노동자의 늘어난 임금은 노동시장에서 여성과 어린이 경쟁자가 배제됨으로서 얻어진 결과일 뿐이다. ②커다란 집단이 배제된 현실에서 편입의 가치는 올라갔다. 백인 여성들은 비백인 세계에 간단히 추가되었고, 남성 노동계급의 지위는 덜 모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③시민권의 부대조건으로 군복무라는 것이 강조되었다.


6. 러시아 혁명 -- 민중적 열망의 비유럽세계로의 확산


러시아혁명은 볼셰비끼들에 의한 계획된 봉기의 결과라기보다는, 혹독한 군사적 패배에 더하여 주민 사이의 기아가 확산됨으로써 러시아의 정치질서가 완전히 붕괴되었을 때, 볼셰비끼가 상대적으로 더 잘 조직화되어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었던 사실의 결과였다. 또한 볼셰비끼는 러시아혁명 완수를 위해서는 독일혁명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독일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 결과는 스탈린주의, 그리고 91년 소련의 붕괴다.

러시아혁명은 범유럽의 강대국들에게는 노동계급을 무마하기 위해 자유주의가 나눠주는 꾸러미에 담아야 할 분담금을 상당히 증액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유럽세계의 경우에는 이보다 효과가 더 크다. 러시아혁명 이후 민족주의의 세균은 유럽의 경계 바깥으로까지 확산되어갔다. 이는 비유럽 국가가 유럽의 통제로부터 해방되어 산업화를 이루고 군사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프랑스혁명이 범유럽세계의 위험한 계급들에게 희망과 기대, 그리고 더욱 커진 열망을 불어넣었다면, 러시아혁명은 이를 비유럽세계의 위험한 계급들에게 불어넣은 것이다. 비유럽세계의 민족해방운동은 자유주의 이념이 전지구적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으며 그들의 양보에는 전지구적인 내용이 담겨야만 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7. 1968년 혁명 -- 자유주의의 퇴출과 구좌파에 대한 환멸


1848년 세계혁명의 변이는 세계체제의 지구문화의 토대로서 자유주의가 수립되는 것으로 이어졌다면, 1968년 세계혁명은 바로 이 역할로부터 자유주의를 퇴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들은 바로 지구문화에서 지닌 자유주의의 지배적 역할 자체를 과녁으로 삼았으며, 갖은 수단으로 자유주의를 이 위치에서 끌어내리고자 했다.

68이후 세계는 지정으로 삼분법적인 이념상의 분열상태가 되었다. ①보수주의. 가부장적 전통주의와 극단적 반복지주의를 강화했다. ②자유주의. 이 이념의 대표주자는 이제 사민주의 정당으로 넘어갔는데, 이들은 전문가에 의해 관리되는 개혁이라는 벤섬과 밀의 전통을 공개적으로 수용했고, 여기에 적당히 ‘사회적인’ 경제를 가미하는 정도였다. ③급진주의. 마오주의 분파들이 등장했다 희미해지고, 묵시론적 변혁을 추구하는 세력과 개혁주의적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이제 대중들이 전통적인 반체제운동들(이른바 구좌파)을 외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의 본질적인 요소는 환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환멸은 이들 정당이  했던 역사적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다는 의식에 다름아니었다. 이는 특정한 정부팀의 업무수행에 대한 일시적인 실망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런 대중적 감정은 구소련의 붕괴에서 정점에 도달했다.


8. 국가에 대한 희망의 상실 -- 역사적 이행기의 시작


이러한 희망 상실은 반국가주의(antistatism)의 확산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국가구조의 전반적인 정당성 상실이자, 도덕적 연대와 실질적 자기보호를 위한 비국가 기구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돌아섬을 의미했다. 부활한 보수주의 운동은 복지국가의 장치들을 폐기하는데 이러한 정서를 이용했다. 이렇게 만연한 반국가주의는 (국가간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자유주의 승리가 아님은 물론이다. 이른바 전지구화의 이데올로기 찬양이란 우리의 역사적 체제가 죽어가면서 부르는 마지막 노래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이상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현재에 대해 참을성있다고 해서, 그 사실이 곧바로 그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열망을 버렸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욕망은 그 어느때보다도 강하며, 이 사실이 희망과 믿음의 상실을 더더욱 절망하게 만든다. 이는 우리가 역사적 이행기에 돌입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이는 또한 역사적 이행이 고난의시기, 그리고 이행이 계속되는 동안 내내 지속될 암흑의시기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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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님의 <장산곶매 이야기>

오늘 낮에 잠깐 아트앤스터디에서 무료강좌로 제공하는 백기완 선생님의 <장산곶매 이야기> 강의를 들었다. 언젠가 학교앞, 지금은 철거된 로터리 앞을 지날 때, 우연히 까만 한복 정장(?)을 입고 지나가는 그 분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때도 느낀 거지만 백 선생님은 여기저기 깊이 패인 주름들 사이로 왠지 불기운 같은게 느껴지는 사람이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오늘 들은 강연에서도 점잖게 얘기하다가 잡자기 불호령같은 목소리를 질러대신다. 가히 한편의 연극을 보는 듯.

 

이 강연은 그야말로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 전해주는 시간이었다. 백기완 선생님도 장산곶매 설화를 어렸을 때 할머니를 통해 들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구전설화'인 것이다. 일전에 대충 줏어들은게 있어서 장산곶매에 대해서는 대강 알고 있기는 했지만, 구월산 마을 사람들을 돕는 것부터 시작해서 중원의 천자와도 맞섰던 장산곶매의 이야기의 스펙터클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그런데 강의를 듣다가 갑자기 내가 찌그러드는 기분이 드는 부분이 있었다. 장산곶매는 수리라는 적과 싸움에 나가기 전에 자신의 둥지를 부순다. 결연한 싸움에 나서는데 두고가는 미련때문에 망설여지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이 때 둥지를 부수는 매의 부리 쪼는 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퍼지는데, 마을사람들도 함께 둥지를 부순다고 한다. (사람들이 둥지를 부순다는 게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는 설명을 안 해 주셨다.)

 

그리곤 장산곶매는 날카롭게 솟은 발톱으로 둥지터를 박차고 날아, 작두같은 날개를 편다. 미련없이 싸운다.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버릴 수 있는 존재인지. 장산곶매처럼 둥지를 박차고 오를 '준비'라도 되어 있는지... 나는 이미 한번 그 기회를 날려버리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 다음은 가능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미치자 갑자기 몸이 바르르 하고 움츠러 들었다.

 

갑자기 밀려온 부끄러움 때문에 대낮부터 소금기 낀 액체가 얼굴에 번질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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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르원틴, <DNA 독트린> (궁리)

그러나 다윈 자신은 생존을 위한 투쟁에 대한 생각의 원천이 무엇인지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자연선책에 의한 진화의 개념이라는 착상을 18세기 말의 경제학자인 토마스 맬서스의 유명한 저서 <인구론>을 읽으면서 얻었다고 말했다. 이 저서는 과거 영국에서 시행되던 빈민구제법(Poor Law)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맬서스는 그 법이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생각했고, 빈민들이 아이를 낳을 수 없도록 좀더 엄격하게 통재해서 사회적 불안을 일으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자연선택을 기초로 한 다윈의 이론은 전체적으로 스코틀랜드 경제학자들에 의해 수립된 초기 자본주의의 정치경제학 이론과 놀랄 만큼 흡사하다.

다윈은 매일같이 신문을 읽으면서 주식투자로 생계를 꾸렸기 때문에 경제학적인 적자생존에 대해 얼마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다윈이 한 일은 19세기 '정치' 경제학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자연이라는' 경제의 모든 것을 포괄하도록 확장시킨 것이었다. 나아가 그는 진화의 성선택 이론을 발전시켰느데, 여기에서 작용하는 주요한 힘은 수컷을 선택하는 암컷들에게 좀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는 수컷들 사이의 경쟁이다. (25-26쪽)

 

 

 

서로 다른 인종들은 공격성이나 창조성, 그리고 음악성에서 유전적 차이를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문화 전체가 문화적 고물(古物)의 작은 부분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일부 사회생물학자들은 그것을 '문화유전자(culturgens)'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문화는 미학적 선호, 짝짓기 선호, 노동과 여가의 선호와 같은 파편과 조각을 그러모은 푸대 자루인 셈이다. 그 푸대를 쏟아놓으면 당신 앞에 문화가 펼쳐질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위계 체계가 완성된다.

유전자는 개인을 만들고 개인은 특정한 선호와 행위를 나타내고, 이러한 선호와 행위의 집적이 문화를 만든다. 따라서 결국 유전자가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분자 유전학자들이 우리에게 인간의 DNA 배열을 찾아내는 데 들어가는 많은 돈을 내놓으라고 채근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의 모든 유전자를 구성하는 분자들의 배열을 알아내면 인간의 본질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33-34쪽)

 

 

 

우리는 우리 유전자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결정되지는 않는다 .발생은 부모로부터 유전받은 물질에 --유전자, 그리고 정자와 난자-- 의존할 뿐 아니라 발생하는 개체에 영향을 주는 특정한 온도, 습도, 영양분, 냄새, 시각, 소리(우리가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해서) 등에도 의존한다. 설령 내가 한 유기체 내의 모든 유전자의 완전한 분자적 세부사항을 남김없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 유기체가 어떤 모습이 될지 예측할 수 없다. 물론 사자와 새끼양의 차이는 거의 전적으로 그들의 유전자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같은 종(種) 내의 개체 사이에서 나타나는 편차는 유전자와 발생환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고유한 결과이다. 게다가, 매우 기이하게도, 설령 내가 발생하는 유기체의 유전자와 그 발생환경의 완전한 배열을 남김엇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 유기체의 특성을 모두 예측할 수 없다.

거기에는 또 하나의 요인이 작동하고 있다.  가령 우리가 초파리 날개 아래쪽에 나 있는 털의 숫자를 센다고 하자. 그리고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에 나 있는 털의 숫자가 다르나든 사실을 발견했다고 하자. 어떤 파리는 왼쪽에 털이 더 많이 났고, 어떤 파리는 오른쪽에 더 많이 나 있고 평균적인 차이는 없다. 그렇다면거기에는 계속 변동하는 비대칭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러나 초파리 개체는 몸의 왼쪽이나 오른쪽이나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발생하는 초파리와 초파리가 발생하는 장소의 지극히 작은 크기로 미루어볼 때 초파리의 왼편과 오른편의 습도, 산소, 오도는 동일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왼족과 오른쪽의 차이는 유전적인 것도 환경적 차이에 의한 것도 아니며, 발생이 진행되는 동안 세포의 성장과 분화에서 나타난 임의적인 변이, 즉 발생 잡음(developmetal noise)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발생에 개입되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변이의 중요한 원천이 된다. 실제로 초파리의 날개털의 경우 유전적, 환경적 변이만큼이나 많은 발생 잡음에 의한 변이가 있다. 사람의 경우에는 개인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차이가 배아(胚芽) 시기와 유아 시절의 신경세포의 성장 과정에서 나타난 임의적인 차이에 기인하는지 알지 못한다. (...)   (54-56쪽)

 

 

 

현대의 과학적 의학이 이익을 가져단준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분명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에 비해 훨씬 오래 산다. 1800년대에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태어난 백인 아동의 평균 기대 수명은 45세에 불과했지만 오늘날에는 75세로 늘어났다. 그러나 그 이유가 현대 의학이 성인과 환자들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었기 때문은 아니다. 평균 기대 수명의 변화를 일으킨 가장 큰 요인은 유아 사망률의 급격한 감소이다.

20세기 이전, 특히 19세기 전반기와 중반기까지 신생아가 첫 돌이 되기 저에 죽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1860년대에 미국의 유아 사망률은 무려 13퍼센트나 되었다 .따라서 이처럼 높은 유아 사망률로 인해 인구 전체의 평균 수명이 크게 낮아진 것이다. 19세기 중엽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묘비는 그들 중 괄목할 정도로 많은 숫자가 아주 오래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과학적 의학은 이미 성년에 도달한 사람들의 수명을 늘리는 데에는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 지난 50년 동안 이미 60세가 된 사람들의 기대 수명은 고작 몇 개월이 늘어났을 뿐이다.  (79-80쪽)

 

 

 

실제로 개인들의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배열은 정상적인 개인과 다른 정상적인 개인 사이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특정 단백질이 그 기능에 아무런 손상도 가져오지 않으면서 다양한 아미노산 구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가령 3천 개의 뉴클레오티드로 이루어진 평균적인 유전자 하나에서 보통의 성인 두 사람이 약 20개의 다른 뉴클레오티드를 갖는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의 뉴클레오티드 배열을 위한 카탈로그를 만들기 위해서 누구의 게놈을 이용해야 하는 것인가?

나아가 모든 정상인들은 한쪽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속에 많은 슛자의 결함을 가진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 이 결함 유전자들은 다른 쪽 부모에게서 받은 정상적인 유전자에 의해 가려져서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염기서열이 해석된 DNA의 모든 부분들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결함을 가진 특정 숫자의 유전자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결함이 결국 카탈로그에 포함되는 셈이다. 질병을 가진 사람의 DNA와 정상적인 DNA 염기서열을 비교했을 대, 두 DNA 사이에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중 어느 것이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DNA 사이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차이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정산인과 질병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상당히 큰 집단을 조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더욱이 문제의 질병이 복수의 유전적 원인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마다 그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다른 경우에는 그런 방법으로도 효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설령 그런 원인들이 유전자 변화의 결과라 할지라도 말이다.  (92-94쪽)

 

 

 

그러나 불행하게도 살아있는 유기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DNA보다 훨씬 많은 것이 필요하다. 언젠가 나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분자유전학자 중 한 사람이 과학학술회의의 개막 연설에서 만약 자신이 충분한 용량의 컴퓨터와 어떤 생물의 완전한 DNA 염기서열을 가지고 있다면 그 생물을 계산(compute)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기에서 '계산한다'는 말의 의미는 그 생물의 해부학, 생리학, 그리고 행동을 완전히 기술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틀린 것이다. 그 생물조차도 자신의 DNA를 통해 스스로를 계산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동안 특정 시기의 유기체는 내부적인 힘과 외부적인 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과 결정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발생적인 역사의 고유한 결과이다. 여기에서 외부적인 힘들 자체도 -- 흔히 '환경'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들 -- 부분적으로는 그 생물이 자신의 존재 조건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수행하는 활동의 결과이다. 생물은 자신이 그 속에서 발생하는 세계를 발견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부적 힘들도 자율적인 것이 아니며, 외부에 상응한다. 세포 내부의 화학적 기구들 중 일부는 외부 조건들이 그것을 필요로 할 때에만 만들어진다.  (...)

어떤 파리는 왼쪽에 털이 많고, 다른 파리는 오른쪽에 더 많다. 게다가 파리 몸체의 양편에서 나타나는 변이는 파리 개체들 사이의 평균적인 변이보다도 더 크다. 그러나 파리의 몸 양쪽은 모두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며, 동일한 환경에서 발생 과정을 거쳤다. 몸 양쪽의 변이는 임의적인 세포 운동의 결과이며, 이른바 '발생잡음(developmental noise)'이라 불리는 발생 과정에서 세포 속에서 일어나는 우연한 분자적 사건들의 산물이다. 일란성 쌍둥이의 지문이 서로 다르고, 모든 사람들의 왼손과 오른손의 지문이 다른 까닭도 이러한 발생 잡음에 의해 설명된다. 발생중인 생물과 마찬가지로 실내 온도에 민감하고 내부 회로에 잡음의 여지가 있는 컴퓨터가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113-115쪽)

 

 

 

DNA 메시지로부터 인과적 정보를 어더내기가 어려운 깊은 이유는 동일한 '단어(word)'들이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며, 주어진 문맥에서도 복수의 기능을 갖기 때문이다. 그것은 복잡한 언어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영어에서 어떤 단어도 'do'처럼 행위를 강력하게 함축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가령 "지금 당장 해!(Do it Now!)"와 같은 경우가 그런 예이다. 그러나 "나는 모른다(I do not know)"의 사례처럼 대부분의 문맥에서 'do'는 조동사로서 기능할 뿐 그 자체로서는 아무른 의미도 갖지 않는다. 조동사 'do'는 스스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지만 문장의 배열에서 일정한 자리를 지키고 간격을 띄워주는 어간 요소로서 언어적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의문의 여지가 없다. 만약 이런 기능이 없었다면 'do'는 원래 영국 중부에서 기원한 16세기 일반적인 영어 용법 속으로 스며들어가서 도처에서 "나는 알지 않는다(I know not)"와  같은 고어체를 대체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유전자 메시지 속에 들어있는 요소들은 스스로 의미를 가질 수도 있고 조동사와 같은 기능을 할 수도 있다. 유전부호의 염기서열 GTAAGT는 때로는 세포에 의해 단백질 속에 아미노산 발린(valine)과 세린(serine)을 삽입시키라는 명령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때로는 세포기구가 그 부분을 잘라 메시지를 편집하라는 장소라는 신호를 뜻하기도 하며, 때로는 조동사 'do'처럼 단순한 사이띄개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세포가 가능한 여러가지 해석 중에서 어떤 쪽을 선택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따금씩 사람의 건가을 위해 인간게놈의 염기서열을 밝히는 프로젝트가 중요하다는 주장이 생물학적 성서의 해석학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기 위한 교묘한 광고전략이 아닌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120-121쪽)

 

 

 

최근 이른바 '은밀한 우생학(back-door eugenics)'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기 이루어지면서, 개인들에게 강요된 선택으로 인한 뜻밖의 결과로 우생학이 새롭게 등장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것은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나타나거나 특정 정부가 소수민족이나 특정 집단을 미래 세대의 대열에서 배제시키려는 정책을 수립하는 것과 같은 실현 불가능한 사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아이들의 류를 스스로 선택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고 아무도 명시적으로 우생학적 지침을 제시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미래 세대를 선별(select)하게 되는 사태에 대한 것이다. 이 새로운 우생학은 복수(複數)의 자발적인 결정에 의한 결과이며, 표면적으로는 어떤 외부적인 강제나 정책도 개입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132쪽 주석)

 

 

 

DNA에 대한 지식의 집중은 결정론적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정도를 넘어 도로시 넬킨과 로렌스 탄크레디가 '생물정보의 사회적 권력'이라고 부른 보다 직접적인 실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결과를 야기시키고 있다. 자신들의 소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스스로의 장미빛 환상을 부채질하고 있는 지식인들은 이러한 지식이 힘일하고 말하지만, 오히려 지식은 그 지식을 가진 자, 그리고 그 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에게만 권력을 부여할 뿐이라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

한 여성이 자신의 태아가 낭포성 섬유증에 걸릴 확률이 50퍼센트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대, 또는 남편이 간절히 아들을 원하는데 태아가 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대, 그녀가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 이전보다 더 많은 힘을 얻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 지식 때문에 그녀가 국가나 남편과 맺고 있는 관계가 행사하는 제약의 볌위 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도록 강요받을 뿐이다. 그녀의 남편은 낙태를 허용할 것인가, 또는 요구할 것인가? 국가는 낙태 비용을 대 줄 것인가? 그녀의 의사는 낙태 수술을 시술할 것인가?  (138-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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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연,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발전> (새길, 1991)

나 대학 1학년 때 교양과목으로 <한국역사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때 선생님이 해방이후 여성사 연구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던 이임하 선생님이었다. (그 쪽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는 말임.) 물론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 때 나는 매일 아침과 저녁 꼬박꼬박 학교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다니는 곳에 서서 이라크 파병 반대 선전전에 빠져 있었다. (아, 그 때는 왜 그렇게 선전전이 재밌었는지... ㅋㅋㅋㅋ)

 

여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그 때 선생님이 내 준 과제가 좀 두루뭉실하게 역사에 관한 책 한권 골라서 읽고 서평 쓰라는 거였는데, 나는 당최 뭘 읽어야 할지 몰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아리 선배 한명을 붙잡고 책 한권 추천해 달라고 했는데, 그 선배가 추천해 준 책이 소위 '한자발'로 통하던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책이었다.

 

 

 

 

너무 옛날책이라 딱히 땡기진 않았지만 선배의 성의를 봐서 며칠을 붙잡고 있긴 했었다. 그러나... 나는 선배의 성의를 괜히 고려했다는 생각을 하고야 말았다. ㅋㅋㅋ 앞으로 대학을 다니면서 나는 이렇게 재미없는 책들만 봐야 한단 말인가? 절망끝에 책을 집어 던졌고, 대신 나는 박노자의 <나를 배반한 역사>를 읽고 어찌어찌 과제를 해결하긴 했다.

 

그리고 원래 동아리방에 있던 저 책은 여차저차해서 '의도치 않게' 내 소유가 되어 내 책꽂이에 꽂혀 있다. 당시 선배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이 소위 PD론의 정수를 담은 책인데, 고런 책을 읽다가 GG쳐버렸다는게 못내 굴욕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여튼 나는 이 책을 처음 접한지 6년만에 다시 펼쳐보게 되었다.

 

한국사회성격논쟁에 대한 PD진영의 결과물로서 그리고 식반론(식민지반(半)봉건사회론?)과의 대결속에서 한국자본주의가 식민지자본주의에서 신식민지자본주의로, 그리고 80년대를 경유하면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로 성장전화해 가는 과정을 분석한 책이다.

 

책을 다시 손에 쥔 지는 6년째지만 이러저런 필요에 의해서 이 책의 서문은 여러번 읽은 적이 있어서 대충 맥락은 머리에 박혀 있는 상황. 그래서인지 다시 봐도 재미는 없다. 내가 요즘에 나오는 세련된 문체의 글들에 매혹되어 있어서 그런지 이런 누르스름해진 종이 위에 건조하기 짝이 없는 문장을 읽는게 여간 힘든게 아니다. ㅠ.ㅠ

 

근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게 옛날 책이고, 재미없고의 문제를 떠나서 요즘 나의 관점에서 이 책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좀 거시기한데가 있어서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책은 한일합방 이전 시기부터 진행된 조선사회의 본원적 축적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그 당시 조선사회의 특수성에 대한 분석이 가미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책 이곳저곳에서 보편과 특수의 변증법을 강조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여기서는 레닌의 제국주의 분석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해 식민지적 '특수'에 따른 한국사회의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분석하는데, 왠지 나는 이 부분에서 레닌적 방법론을 한국사회 분석에 좀 억지스럽게 끼워맞춘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닌의 분석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사실 나에게는 그게 맞는지 틀린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 ㅋㅋㅋ) 적어도 조선에서 자본주의 초기 발전과정을 분석하는데에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다. 조선 초기 자본주의 발전이 지체된 이유를 식민지 모국으로부터 이식된 자본주의의 특수성만으로 설명하기에는 공백이 너무 많이 남는다. 왠지 이런 이론은 당시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일반이론 같다는 느낌? (그래서 어느 나라의 사례에도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 실제로 조선에서의 본원적 축적을 논의하려면 조선 내부의 시장경제의 발전 상황은 어땠는지(별 볼일 없었겠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이 외부에서의 자본유입에 어떻게 반작용했는지를 따지는 것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도 유일하게 봉건적 성리학 국가로 남아 있었던 조선이 개화에 대처하는 자세가 자본주의화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는지 등이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얼마간 경제주의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이 든다. 다른 적합한 용어가 생각이 나질 않아서 '경제주의'라고 한 것인데, 내가 말하는 '경제주의'는 딴게 아니라, 이 책에서 다루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발전과 이에 따르는 계급투쟁 분석이 19세기말-20세기초의 조선이라는 희한한 나라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다. 조선은 경제보다는 정치, 그것도 사대부 당파간의 정말 쓰잘데기 없는 말싸움이 지배하던 사회였으니까....

 

요런 생각은 얼마전에 독파한 남경태의 <종횡무진 한국사>(그린비)의 하권 말미를 보면서 느낀거다. 남경태는 이 책을 통해 조선 역사를 설명하면서 철저히 '정치주의'적인 방식을 택하는데, 뭔 말이냐면 조선의 사회-경제적 환경에 근거해 역사를 서술하기보다는 중국보다 더 중국적인 중화사상을 무려 600년동안이나 간직한 성리학 국가라는 점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그게 실상 실학, 북학, 서학 등이 횡횡하던 조선말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진실'이라는 거다.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던 20세기 초에도 여전히 그러했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조선 말 자본 축적을 위한 제조건을 밝히는데 이런 부분이 고려됐어야 했다.

 

앞에서 밝힌 이 책에 대한 감상은 사실 책 전반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책의 초반, 그러니까 1905년을 전후한 개항시기에 대한 분석에 대한 감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사회의 봉건적 요소가 폭력적으로 파괴되는 과정을 겪는 20세기 중후반부에 대해서는 나의 이런 불만이 적용되진 않을 거다. 게다가 한국사회성격논쟁이라는 특수한 지형에서 탄생한, 그래서 맑스-레닌주의라는 토양에 강하게 결박되어 있는 이 책에 많은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책의 한계점은 분명해 보인다. 나는 김상봉 교수가 5.18에 대해 분석하면서 기존의 맑스주의적인 계급투쟁론에 근거해서는 5.18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에 일정부분 동의한다. (그렇다고 계급투쟁적 시각을 폐기해야 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최소한 조선 말부터 생겨난 조선 민중과 국가간의 대립은 서구의 근대 시민의 탄생과정과는 사뭇 다른 것이고, 그렇기때문에 개인의 '권리 침해'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한 계급투쟁적 시각에 일정한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김상봉 교수는 그래서 5.18을 절대적 공동체를 향한 투쟁이었다고 말하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의 논문을 아직 읽어보진 않아서 잘 모르겠으니 일단 패스. 여튼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과 이에 맞서는 민중 저항의 동학이 앞으로 좀 더 '한국적으로' 분석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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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에코페미니즘>(반다나시바 & 마리아 미스)

예전에는 산모 그리고 산모와 아기 간의 유기적 통일성에 있던 초점이 이제는 의사가 통제하는 '태아라는 결과물'에 맞추어진다. 여성은 자궁은 활동력 없는 용기로 환원되었고 여성의 무지와 더불어 여성의 수동성이라는 관념도 조작되었다. 태아와 여성 간의 직접적인 유기적 결속은 여성을 훌륭한 어머니로 교육시킬 전문지식을 독점적으로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남성과 기계에 의해 매개되는 지식으로 대체된다.  (42-43쪽)

 

 

노동이 비노동으로 정의될 때, 가치는 무가치로, 권리는 무권리로, 그리고 침략은 개량으로 정의된다. '개량된 종자'와 '개량된 태아'는 사실상 '점령된' 종자와 태아이다. 사회적 노동을 자연상태로 규정하는 것이 이 '개량'의 본질적 요소이다. 이것은 다음의 세 가지를 동시에 획득한다. 1)그들이 착취하는 생상물의 원소유자의 공헌은 모두 버정하며, 그들의 활동을 수동적이라 치부함으로써 이미 사용되고 개바된 자원을 '사용되지 않고' '개발되지 않은' '버려진' 자원으로 변모시킨다. 2)착취를 '개발'과 '개량'으로 해석함으로써 '개량'했다는 주장에 근거하여 절도를 소유권으로 바꾼다. 3)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이전의 사회적 노동을 자연으로 정의하고 따라서 아무런 권리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민중들의 관습적, 집단적 용익권을 '해적행위'와 '절도'로 바꾼다.

아메리카 땅을 원주민들에게서 뺏는 것에 대해 토머스 모어 경이 적용한 논리에 따르며, "누구라도 쓸모없이 비어 있는 땅을 취할" 때 그 몰수는 정당화된다ㅏ. 1889년 로우즈벨트(Theodore Roosevelt)는 "정착민과 개척자는 그들 편에서 보면 기본적으로 저당성을 갖는다. 그들이 없었던들 이 거대한 대륙은 오로지 지저분한 야만인들을 위한 사냥금지구역밖에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49쪽)

 

 

 

"배의 맛을 알려면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 즉 입에 넣고 씹어봐야 한다." (마오쩌뚱, 1968)

 

 

 

최근의 생식기술과 유전공학은 지금까지 인간 개체, 한 사람 한 사람을 폭력적인 침략으로부터 지켜주고 한갓 연구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던 최후의 경계까지도 무너뜨렸다. 이것은 특히 생식기술의 주된 연구대상인 여성들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주체와 대상, 인간과 비(非)인간을 가르는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이냐는 질문은 과학 내부에서는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적 패러다임은 과학적인 충동에는 한계가 없으며 추상적 지식에의 탐구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리라는 신조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연구과정 안에서는 어떠한 도덕적 간섭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스스로 윤리적인 질문에 답변할 수 없다. 하지만 과학자들 도한 보통의 시민이요 남편,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실험실에서 하는 작업에 관한 윤리적인 질문들과 갈수록 더 많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그들은 대개 이 문제를 과학적인 방법에 따라, 즉 허용된 것과 허용되지 않은 것을 가르는 선을 어딘가에 새로인 그음으로써 해결한다. 이는 곧 무엇이 주체디고 무엇이 객체인가에 대하여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비인간인가에 대하여 그리고 무엇이 허용된 것이고 무엇이 허용되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그들이 새로운 정의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방법의 한 예가 새로운 생명윤리학자들이 태아연구라는 까다로운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태아연구는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태아연구를 금지할 것을 요구한다. 영국에서는 워녹위원회와 자원검열국이 이 문제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발견했다. 그들은 임신한지 2주 후 생명의 시작으로 보았다. 2주 이전에는 태아가 아니라 전-태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전-태아 시기에는 연구가 가능해진다. 명백히, 그저 어떻게 정의를 내리는가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럭저럭 하는 사이에 이 정의는 생식기술을 규제하려는 여러 나라에서 받아들여졌다. 과학자들과 의료재단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태는 명백하다. 즉 생식기술, 특히 IVF공학이 성공하려면 더 많은 태아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모나시 대학의 생명윤리학자 헬가 쿠제와 피터 싱어는 정의를 내리는 능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들에게 2주 된 태아는 단지 '양상추'(lettuce)일 뿐이다. 그들은 호모 싸피엔스 종과 인간 개체 사이에 구별을 짓거나 선을 긋는다. (...)

쿠제와 싱어에게 2주된 태아는 "고려할 필요가 잇는 주체"가 아니며, 다라서 연구가 허용될 뿐만 아니라 남아도는 태아는 폐기하거나 인공적으로 낙태시킬 수도 있다. 그들은 경계선을 인간개체에 더 가깝게 설정하여 태아가 고통을 느낄수 있는 시기, 즉 중추신경계가 발달할 이후의 시기를 자신들의 정의로서 택하고자 했다. 그들은 이 시기가 18~20주경이 될 것이라 본다 .그리하여 그들은 제한시간을 워녹위원회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월러위원회가 설정한  현재 14일보다 한참 더 늦추어 잡을 것을 주장한다. 그들은 태아란 여성의 일부이며 여성과의 공생관걔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점은 어디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최초의 분리는 여성과 태아의 분리이다.

생명윤리학자들에게 유전공학 및 생식기술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는 다만 정의(定義)의 문제에 불과하다. 과학자들은 주로 정의내리는 행위를 통해 폭력을 행사한다. 그것은 직접적인 폭력에서 겉보기에는 깨끗하고 순수해 보이는 구조적 폭력으로 변모했다.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이러한 정의의 힘이야말로 바로 나찌수용소에 갇힌 사람들 특히 정신장애자들을 상대로 연구를 행한 과학자들이 도덕적 제약을 무시할 수 있게 한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사람들은 대상으로 기본연구를 행한 과하갖들은 정신장애자들이 비인간이거나 인간 이하라는 정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누가 인간이고 누가 비인간으로 정의되느냐는 것은 권력의 문제이므로 쿠제와 싱어가 내린 인간의 정의(이성적, 자기인식적, 자율적임)는 권력의 조작에 전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성 역시 오랫동안 이성적이며 자기인식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간주되지 않았음을 떠올리게 된다. (67-69쪽)

 

 

 

 

착취를 바탕으로 하는 세계체제에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평등한 것이다." (91쪽)

 

 

 

경영자, 기술관료층이 최근 들어 자주 사용하는 언어는 여성을 아동의 수동적인 '환경'으로 묘사하거나 '인구폭발'의 주범인 '폭탄'으로 묘사한다. 이 두 경우에서 자녀의 생명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의 생명은 어린이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통제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어머니의 자궁은 아이의 '환경'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상대적으로 보호받는 환경에서조차 태아는 완전히 보호받지 못한다. 아기의 건강상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잇는 어머니의 건강이 '태아환경 내의 한 요소'로 환원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아기 관계를 해체 하는 비슷한 관점이 작업장의 환경위험에 대처하는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태아보호 정책'은 임신한 (혹은 임신을 원하는) 여성을 위험지역에서 내보냄으로써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보호'한다는 것으로, 고용주들은 위험한 생산에서 초점을 옮길 수단으로 이를 활용한다.

극단적인 경우, 여서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고 식탁에 올릴 음식을 얻기 위해 불임수술에 동의하기도 한다. 더 전형적인 사례에는 여성들의 생리주기를 감독하거나 고용하기 전에 유산을 하게 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린 넬슨이 말한 대로 "'오염을 가정하고' 작업장 재배치와 산부인과적 처치를 받기란 너무 쉬운 일이지만, 이것들은 병 자체가 아니라 증상에 대한 대응일 뿐"인 것이다. (114-115쪽)

 

 

 

 

독일에서 열린 유전공학에 대한 공개토론회에서 유전공학 분야의 한 선도적인 연구자는 이렇게 말햇다. "나는 그러한 한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특정 기술이 위험한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개발하고 응용해보아야죠. 그런 다음에야 민주적인 원칙에 따라 이 기술을 사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관해 공적인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원자력의 어ㅟ험을 알기 위해서는 원자폭탄을 만들어서 폭파시켜봐야 한다는 얘기이다. 유전공학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펼 수 있다. 많은 과학자들의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연구가 도덕적인 고려나 사람들의 우려와 정서, 특히 정치가들의 자금규제로 인해 방해받고 있으니, 윤리와 도덕은 연구가 완료된 후 그것을 응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생겨날 때나 되어서야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거이다. 실제로 윤리위원회는 그후에느 생겨난다. 하지만 최종결정을 내리는 것은 정치가들이다. 다른 한편 이들은 오염허용치 등의 어려운 윤리적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 과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한다. 사실상 과학자나 정치가는 특정 기술에 투자할 돈이; 있고 이윤을 위해 그것을 개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122쪽)

 

 

 

 

오리싸의 해안지대에서는 발리아빨(Balliapal) 부족이 7만명의 부족민을 그들의 비옥한 고향당에서 몰아낼, 국립 로켓시험지구 설정에 저항하고 있다. 반대자들은 되풀이해서 그들과 땅의 유대가 시험지구에 대한 저항의 근거라고 밝히고 있다. "땅과 바다는 우리 것이다. 목숨은 내줄 수 있어도 신성한 어머니 대지는 내줄 수 없다." 그들은 보상금 제안도 거절했는데, 보상금으로 발리아빨 농민들을 수세대애 걸쳐 보살피고 먹여살린 땅과의 깨어진 유대를 보상할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리야(Oriya)의 시인 브라즈나트 라이(Brajnath Rai)가 쓴 대로이다.

 

수마일이나 펼쳐진

코코아와 캐슈 농장.

헤아릴 수 없이 풍성한

비틀 덩굴이

갈색 모래카펫 위에

녹색의 예술적인 무늬를 그렸다.

고구마, 땅콩

머스크 멜론 덩굴이

당신의 먼지 낀 땅을

변치 않는 녹색으로 장식했다.

이것들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번창한 삶에 대한  기운찬 희망을 주었다.

읠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삶의 영원한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오늘, 갑자기

권력에 미친 사냥꾼의 탐욕스러운 눈이

당신의 녹색 몸을 발견하고는

조각조각내고

신선한 붉은 피를 맘껏 마셔버렸다.

저주받은 사냥꾼은

내키는 대로

당신의 가슴을 겨냥하여

불타는 미사일을 발사했다.

 

(133-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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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 <말과 사람>

얼마 전에 YES24에서 벌인 이벤트 <사회과학 출판사 응원하기>에 당첨되었다.

사실 내가 응원한 책은 직접 읽어보지도 않은 책(김원의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인데, 재수도 좋게 YES24측에서 잘 속아주셔서 ㅋㅋㅋㅋ 이매진 출판사의 책을 공짜로 5권을 받게 되었다. (물론 이 책을 읽어보려고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방대한 분량이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서 집 근처 도서관에서 2번이나 빌려놨는데도 한번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반납했다.)

 

뭐 여튼간 그렇게 해서 받게 된 책은

1.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2. 우기동 외, <행복한 인문학>

3.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

4. 이명원, <말과 사람>

5. 여러 만화가들(ㅋㅋ), <악! 법이라고?>

 

우선 1번 책이 가격이 2만원을 넘어가는 대작인지라, 거의 감계무량 수준... ㅋㅋㅋ 그러나 지금 당장 읽기에는 부담되고... 일단 4번부터 건드려 봤다.

 

 

이명원씨는 풍선인형이 맨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송하던 사람이라 대체 어떤 인물인가 했는데, 얼마전에 문화과학에서 <바리데기>에 관한 평론도 그렇고, 여러 글들이 참 매력적인 사람이라 생각해서 <말과 사람>에도 쉽게 손이 갔다.

 

물론 이명원씨의 개인저작이 아니라 이문열, 조정래, 백낙청, 김민수, 김상봉, 김종철 등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을 만나 인터뷰 한 내용을 담은 거라 이명원씨 개인의 생각뿐만 아니라 이들 지식인의 삶과 사상에 대해 더욱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튼 그래서, 여기다가는 인터뷰 내용 중 인상깊은 부분만 좀 담아본다.

아, 그러기 전에 이들 6명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을 밝혀보자면....

 

1) 이문열 : 역시 구제불능인 것 같긴 하지만, 그의 불평대로 나도 그의 최근작들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으니, 인터뷰에서 주로 언급된 <호모 엑세쿠탄스>라는 책 부터 읽어보고 제대로 평가해 봐야 겠다. 그의 말대로 한 사람의 작가를 '이미지'로 작살내는것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으니....

 

2) 조정래 : 인터뷰 내용이 너무 싱거웠다. 신자유주의가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탈하는 행위라니... 별로 대단한 얘기도 아닌 것을 너무 심각하게 얘기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3) 백낙청 : '진보가 통일문제에 너무 지적으로 태만하다는 데에는 동의하나, 그의 방식으로 통일을 고민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변혁적 중도주의'라니... 이건 뭐 좌파 신자유주의도 아니고...

 

4) 김민수 : 이 사람은 잘 몰랐는데, 아주 매력적인 지식인이란 생각이 든다. 도시 디자인을 통해 근대 철학적 문제를 사유하는 그의 통찰력은 오랜만에 나의 뒷통수를 '뻑'하고 때려주셨다. 한국사회가 '이미지맹'에 빠졌다는데 한 표!!!

 

5) 김상봉 : 이 분은 최근 황석영, 노무현 관련 논의에서 다소 실망스러운 발언으로 좀 미워졌지만, 그래도 한국사회에서 보기드문 사유를 하고 있는 뛰어난 분이란 생각이다. (특히 그가 주축이 되어 작성된 진보신당 강령 전문(前文)은 후대에 기리기리 남을 명문이라 생각한다.) 특히 5.18을 '계급투쟁'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절대 공동체'를 지향한 씨알들의 투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인상깊었는데, 숙고해볼 가치가 있는 주장이라 생각한다.

 

6) 김종철 : 가라타니 고진은 김종철이 문학비평계를 떠나면서 한국에서는 근대문학이 종언되었다고 말했다는데, 이와 관련된 발언들은 좀 신선했다. 갑자기 그의 <시적인간과 생태적 인간>이란 책을 찾아 읽어봐야 겠다는 욕구가 불쑥 불쑥!!! "근대 문학의 핵심은 야생의 정신 유무의 문제다"

 

총평을 하자면 1,2,3번은 탈락, 4,5,6번은 합격 ㅋㅋㅋㅋ

 

마지막으로 인상깊었던 부분을 옮겨 적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36-138쪽 김민수의 발언 내용)

 

C.P.스노우가 1959년 <두 문화와 과학혁명>이라는 강연 제목에서 발의한 두 문화 논쟁은 인문학과 과학 사이의 심화된 단절 현상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시각예술과 인문학 사이에 그러한 단절이 존재하는 것인데, 사실은 시각예술과 인문학의 관계는 스노우의 두 문화 논쟁과 좀 다른 특수한 한국적 맥락이 있다고 본다.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시각예술은 어떤 의미에서 17세기 이래 근대 인문정신과 불가분의 관계에서 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의 봉건적 길드에 속한 일개 장인에 불과했던 미술가들이 인문적 성찰을 통해 미술 아카데미를 성립시켰고, 바로 여기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정신 활동으로서 시각예술이 출현했던 것이다. 즉 시각예술은 인문적 성찰을 통해 예술의 지위를 획득했다. 따라서 시각예술은 인문학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한국의 경우는 이러한 역사적 전통이 일제에 의해 서구 학문이 이식되는 과정에서 오독된 것이고, 어떤 점에서는 과거 조선 시대보다 퇴화된 인식틀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옛날 조선 시대에 문인들은 예술을 겸비하고 있었다. 글을 쓰면서도 그림을 그렸던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했던 고산 윤선도 선생은 <산중신곡>과 <고산유고>같은 문집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직접 거문고를 제작해 사용한 악기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거문고 제작과 사용법을 수록한 책 <회명정측>과 악보를 기록해놓은 <낭옹신보>를 남기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전통을 유실하고 마치 시각예술과 인문학이 두 문화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서구 학문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전통마저 잃어버린 이상한 학문 세계에 갇혀 있는 꼴인 셈이다.

글을 못 읽는 것을 문맹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이미지를 읽지 못하는 것을 '이미지맹'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시대에는 이미지를 읽어내지 못하는 것을 문맹과 같은 차원에서 취급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문자에 익숙해 있기 대문에 이미지 언어에 대해서는 독해가 거의 안 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예를 들어 청계천 복원 사업에서도 잘 드러났다. 실제로 청계천에서 복원된 것은 별로 없다. 다만 한강물 펌프로 퍼올려 분수대처럼 물 흘려 내보내고 풀을 심어 '짝퉁' 녹지 공간을 조성한 것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마치 인형공장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조립되는 인형들처럼 청계천을 구경하러 가는 것은 일종의 도시적 강박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현대 사회에서 이미지는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포섭하고 있다. 일상 속의 광고의 진실은 무엇인지에 대해 소비자들의 이미지 독해가 충분하지 못하니 과장, 사기성 광고에 속는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이미지 독해력이라는 차원에서 디자인이 중요하다. 단순히 환경미화 차원의 장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읽어내는 이미지 독해력의 차원에서 일반인도 디장인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관리해 나갈 수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에게는 디자이너 교육만큼이나 소비자 교육도 중요하다.

 

 

 

 

(139-140쪽 김민수 발언 내용)

 

과학기술은 여전히 일상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신비화되고, 인문학은 위기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과 담을 쌓고 있고, 예술은 여전히 예술의 전당과 미술관에서나 하는 것으로 생각해 일상과 거리가 있고, 디자인은 세상과 너무나 가까운 공간, 제품, 이미지를 다루고 있는데도 우리들의 삶의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고 판타지만을 부추기고 있는 점이 그렇다.

 

 

 

 

(214-215쪽 김종철의 대답을 듣고 이명원이 정리한 내용)

 

요컨대 오늘날 지배적으로 돼가고 있는 경제성장 지상주의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 김종철의 근본적 문제의식이다. 그런데 녹색당조차 제도 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주장을 내놓고 제기하기 힘들다. 대의제 민주주의 구조 아래서, 녹색당이 제도 정당의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결국 '여론'에 편승해야 할 텐데, 그랬을 때 경제성장 지상주의를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당의 존립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비관이 앞선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김종철의 현실에 대한 비관주의는 매우 뿌리깊은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김종철은 비관적 상황에 대한 어설픈 희망보다는, 비관적 상황 그 자체를 냉철하게 사유하는 시각이야말로 오늘의 시민들에게 오히려 더 필요한 가치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러한 반문은 현재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서경식 교수 역시 동일하게 제기한 바 있다. 서경식은 이른바 민주화 시기에 자신의 두 형인 서승과 서준식 형제가  한국의 감옥에 수감 중일 때, 이탈리아계 유대인인 프리모 레비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녔다고 한다.,

이 이탈리아 작가는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전쟁 뒤 이탈리아에 돌아와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작품 등을 통해서, 우리가 인간에게서 찾고 있는 통념적인 인간성이라는 것이 실상에 있어서는 얼마나 허구적이고 절망적인 가치인가를 되물었다. 프리모 레비는 증언하는 문학을 추구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느 날 돌연 자살을 했다. 서경식 교수는 이 증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절망에 전율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식인은 정작 뿌리 깊게 절망해야 할 때 그 절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헛된 낙관주의보다는 정직하고 근원적인 절망이 때로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 절망을 회피하려는 의식이 강한 것 같다.

어쩌면 희망을 만들어내려는 인간의 욕망보다, 절망을 좀 더 투명하게 투시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김종철의 절망은 그런 점에서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근본적 절망과 비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절망과 비관을 통해서, 우리는 근대를 틀 지우고 있는 반인간주의와 반생명주의의 무서운 발전주의를 상대화할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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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다키지, <게공선> 중에서

얼마 전에 읽은 소설 <게공선>에서 인상깊은 구절이 있어서 고대로 옮겨온다.

 

이 소설은 20세기 초 제국주의 침략에 앞장서고 있던 일본의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학인데, 최근 경제위기 상황에서 다시금 일본 국민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책의 표지에도 이것을 의도한 듯한 느낌이 드는

문구가 실려있다.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양극화, 워킹 푸어(Working Poor)... 혹시 이 현상이 게공선 아닌가요?"

 

정작 나는 게공선과 이런 최근의 현상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다는 건지 잘 이해는 안되었지만, (게공선은 게를 잡아 배안에서 바로 통조림으로 가공하는 공장형 배인데, 거기에서 벌어지는 노동탄압은 가히 강제수용소 수준이어서 대량의 산업예비군을 양산하면서 팽창하는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상황에 직접적으로 대입하는 것은 좀 무리이지 않나 싶다.) 어쨌든 이 부분은 언어와 얼굴 생김새가 달라도 노동자는 연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있는 힘껏 보여주는 구절이라 생각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쓰코호가 제자리로 돌아온 지 사흘째 되었을 때, 갑자기(!) 행방불명됐던 똑딱선의 어어업노동자들이,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선장실에서 '똥통'으로 돌아오자,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한테 소용돌이처럼 둘러싸였다. 그들은 '거대한 폭풍우' 때문에,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똑딱선을 조종할 수 없게 되었다. 목덜미를 붙잡힌 아이보다 더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장 멀리 나와 있었고, 거기에 바람은 정반대 방향이었다. 다들 이제 죽었다고 ㅅ애각했다. 어업노동자는 언제라도 '편안하게' 죽음을 각오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튿날 아침, 그 똑딱선은 반쯤 물에 잠긴 채 파도에 밀려서 캄차카 해안가에 닿았다. 그리고 모두는 근처의 러시아인에게 구조됐다. 그 러시아인의 가족은 다 합쳐서 네 식구였다. 여자가 있거나,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는 것에 목말라 있던 그들에게 , 저기근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친절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보살펴주었다. 하지만 처음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거나, 머리와 눈 색깔이 다른 외국인이라는 사실에 어쩐지 불안했다.

그러나 자기들하고 별다르지 않은, 똑같은 인간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난파당한 사실이 알려지자,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곳은 일본 어촌과는 많은것이 달랐다.

그들은 거기서 이틀간 머물면서 몸을 치료하고 돌아왔다.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누가 이런 지옥에 돌아가고 싶겠어!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는 이쯤해서 끝나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다른 데 감춰져 있었다.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들이 난롯가에서 옷가지를 챙기며 이야기하고 있을 때, 러시아인 네다섯명이 들어왔다. 그중엔 중국인도 한 사람 섞여 있었다. 커다란 얼굴에 붉고 짧은 수염이 많이 난, 등이 조금 구부정한 러시아 남자는 갑자기 뭐라 큰 소리로 손짓을 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똑딱선의 최고참 어업노동자가 자신들을 러시아어를 모른다는 사실을알리기 위해 그눈앞에서 손을흔들어 보였다. 러시안이 한마디 하자, 그 입가를 보고 있던 중국인은 일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듣는 사람의 머리가 오히려 엉망진창이 되버린 듯한, 어순이 뒤바뀐 일본어였다. 말과 말은 술주정뱅이처럼 뿔불이 흩어지며 비틀거렸다.

"당신들, 돈 정말 가지고 있지 않아."

"그렇다."

"당신들, 가난한 사람."

"그렇다."

"그러니까, 당신들, 노동자. 알아?"

"응."

러시아인이 웃으면서, 그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그리곤 때때로 멈춰 서서 그들을 보았다.

"부자들, 당신들을 이거 한다. (목을 조르는 시늉을 했다.) 부자들 점점 커진다. (배가 불러오는 흉내.) 당신들 무슨 짓을 해도 안 돼, 가난한 사람이 된다. 알아? 일본이라는 나라, 안 돼. 일하는 사람, 이거 (얼굴을 찡그리며, 아픈 사람 같은 표정.) 일하지 않는 사람, 이거. 에헴, 에헴. (뽐내면서 걷는 걸음을 보인다.)"

그 말은 젊은 노동자들에겐 재미있었다. 그들은 '그렇다, 그렇다!'고 맞장구치면서 웃었다.

"일하는 사람, 이거. 일하지 않는 사람, 이거. (앞서 했던 동작을 되풀이한다.) 그런거 안 돼. 일하는 사람, 이거. (이번에는 거꾸로, 가슴을 펴고 뽐내는 못을 보인다.) 일하지 않는 사람, 이거. (늙다리 거지 같은 흉내.) 이거 좋아. 알아? 러시아라나는 나라는, 이런 나라. 일하는 사람들만이. 일하는 사람들만이, 이거. (뽐낸다.) 러시아, 일하지 않는 사람 없다. 교활한 사람 없다. 사람 목 조르는 사람 없다. 알아? 러시아 조금도 무섭지 않은나라. 전부, 전부 거짓말만 하고 다닌다."

그들은 막연하게, 이것이 '무서운' 빨갱이물'이라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빨갱이물'이라면 너무 '당연한' 것이라는 기분이 한편으로 들었다. 더군다나 무엇보다도 그 말에 줄곧 이끌려 들어갔다.

"알아, 정말. 알아!"

러시아인 두세 명이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중국인은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말더듬이처럼 일본말을 하나, 하나 주워가며 말했다.

"일하지 않고, 돈 버는 사람이 있다. 노동자, 언제나 이거. (목이 졸리는 시늉.) 이거, 안 돼! 노동자, 당신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백명, 천명, 오만 명, 십만명, 모두, 모두, 이거 (아이들의 손에 손을 잡는 시늉을 한다.) 강해진다. 괜찮아. (팔을 두드리며) 안 진다, 누구에게도. 알아?"

"응, 응!"

"일하지 않는 사람, 도망간다. (일제히 도망하는 시늉) 괜찮아, 정말. 일하는 사람, 노동자, 뽐낸다. (당당하게 걷는 걸음을 보인다.) 노동자, 제일 위대하다. 노동자 없으면. 모두, 빵 없다. 모두 죽는다. 알아?"

"응, 응!"

"일본, 아직, 아직 안 돼. 일하는 사람, 이거. (허리를 구부리며 움츠리는 모습을 보인다.) 일하지 않는 사람, 이거. (으스대며, 상대를 때려눕히는 시늉.) 그거, 전부 안 돼! 일하는 사람, 이거. (얼굴 모습 무섭게 바뀌며, 덤벼드는 시늉. 상대를 넘어 뜨려 짓밟는 흉내.) 일하지 않는 사람, 이거. (도망가는 시늉) 일본, 일하는 사람만, 좋은 나라. 노동자의 나라! 알아!"

"응, 응, 알아!"

러시아인은 괴성을 지르며, 춤을 출 때 처럼 발을 굴렀다.

"일본, 일하는 사람, 한다. (일어서서 칼을 들이대는 시늉.) 기쁘다. 러시아, 모두들 기쁘다. 만세. 당신들 배로 돌아간다. 당신들의 배, 일하지 않는 사람, 이거. (뽐낸다) 당신들, 노동자, 이거 한다! (권투를 흉내 내는 모습, 그리고 손에 손을 잡고, 다시 덤벼드는 시늉) 괜찮아. 이긴다! 알아?"

"알아!"

어느 틈에 흥분한 젊은 어업노동자는, 갑자기 중국인의 손을 잡았다.

"할 거야, 꼭 할 거야!"

최고참 어업노동자는, 이것이 '빨갱이물'이라곳 ㅐㅇ각했다. 너무나 무서운 일을 시킨다. 이걸로, 이런 식으로, 러시아가 일본을 감쪽같이 속인다고 생각했다.

러시아인들은 이야기가 끝나자, 무슨 소리를 지르며, 그들의 손을 힘껏 쥐고 흔들었다. 부둥켜 안고 뻣뻣한 털로 덮인 얼굴을 비벼대기도 했다. 당황한 일본인은, 목을 뒤로 빼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모두는 '똥통'의 입구에 가끔씩 눈길을 부며, 그 이야기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재촉했다. 그들ㅇ, 지금까지 보고 온 러시아인에 대해 많은 것을 말했다. 그 어느 것도, 흡수지에 빨려드는 것처럼, 모두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어이, 이제 그만해,"

최고참은, 다들 이상하게 진지한 얼굴로 그 이야기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고, 열심히 떠들고 있는 젊은 어업노동자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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