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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며칠전에 서점에 가서 잠깐 고종석씨의 <경계긋기의 어려움>이라는 책을 봤다.
거기 한 꼭지의 제목이 "정동영 생각"인데, 아주 인상깊었다.
지난 대선 전에 정동영이 광주를 찾아 "민주화의 성지 광주에서 이명박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단다. 그런데 고종석씨는 그에게 징징거리지 말라고 훈계한다. 사실 정동영이 주도해서 창당한 열린우리당의 기본 모토가 "호남표 절반을 버리고 영남표 절반을 가져온다" 였다는 거다. 결국 그런식으로 지역주의 깨자는 거였고... 지들이 호남표 버리겠다고 선언해 놓고는 어디서 또 징징거리냐... 뭐 요런 말씀이시다...
아, 요걸 보고 있자니 왜케 웃기는지??
요런 방식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 노무현의 '업적'이라고 칭송되고 있는
지역주의 타파라는 것도 전혀 대단할 것 없는 정치수작일 뿐인 거다.
노무현이 떨어질 것 알면서도 부산을 끊임없이 찔러본 것은, 당장엔 실패해도
결국 그게 자신의 주가를 올리는 것이라는 점을 그 자신은 알았다는 거다.
지금 식으로 생각하면 이것이 곧 '민주당 외연확장'인 셈이고....
한 마디로 노무현은 이 전략을 수행하는데 있어 선봉장에 섰던거다.
그게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거랑 아무 상관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거고...
결국, 진중권 스토커 변희재의 승리인가?
아, 세상의 일반적 시선으로 보자면 나는 변희재의 승리에 안타까워해야 하지만
왜 "고것 참 쌤통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까?
소위 진보 지식인이라는 인간들이 이번 노무현 사망 사태를 두고
보여준 신앙고백의 최종 결말이 어떤 것인지 진중권은 가감없이 보여줬다.
그리고 결국 뒷통수를 맞았다.
그 동안 진보신당 게시판에 노무현의 지난 행적들을 비판하면서 추모 분위기에 일정
거리를 두려는 사람들에 대해 독설을 퍼붓더니 결국 지는 이미 몇해 전에
스러져간 목숨들을 향해 자살세를 걷어야 한다느니 아주 막되먹은 소리를 했구나...
난 진정, 진보신당이 진중권 같은 자를 빨리 퇴출시켜야 한다고 본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지 못한자가 진보의 탈을 쓰고 춤추는 꼴을 어떻게 더 봐줘야 하나?
여하간에 변희재나 진중권이나 똑같은 '적대적 공범자'일 뿐이다.
어제 내가 노무현 대통령 사망 이후 진보적 인사, 지식인들이 보이는 신앙고백 행태에 대해 비판한 글을 프레시안 독자 기고에 보냈다. ("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
그 전날에 썼던 글("노무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법")도 보냈는데, 안 실렸다. 글이 너무 길어서 그랬나 싶어 이것의 약 5분의 3 분량으로 다시 써서 보내니 내 글이 '당첨' 된 것이다.
아, 근데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가끔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시는 분들이 자기 글이 신문 편집진에 의해서 아무렇게나 편집되어 글의 의도가 훼손되었다고 불평하는 글들을 좀 본 적이 있는데, 그 기분이 뭔지 알 것 같다.
아, 솔직히 글의 제목까지 바꿀 필요는 없지 않냐? "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라는 제목은 "나는 똑같이 슬퍼할 것이다"라는 뭔 소린지 알 수 없는 제목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프레시안 글 보러가기)
게다가 소위 노무현 지지자들의 심기를 건드릴만한 내용들은 다 짤려있었다. 내가 욕쓴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잘려 나가야 할 이유를 당췌 모르겠다. 인터넷 신문 기사라 분량 맞출 필요도 없을 텐데, 이렇게 편집권을 남용하나?
어디까지나 추측이긴 하나, 이건 내 글이 요즘 프레시안의 편집방향과 배치되기 때문인 점도 있는 것 같다. 실제 내 글은 오늘 12시부터 2시 반 정도까지 초기화면에 떴다가 사라져버렸다. 내 글에 이상한 댓글 단 노무현 지지자로 보이는 이상한 사람 빼고는 거의 본 사람이 없다는 거다. ㅋㅋㅋㅋ
대신 프레시안 초기화면은 노무현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자는 결의를 담은 격문들로 가득차 있다. 그래도 프레시안은 괜찮은 언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된장찌개!!!! 완전 속았다. 프레시안은 제발 2006년에 노무현 정권이 FTA추진할때 어떤 기사를 썼는지 한번 찾아보길 바란다. 이렇게 앞뒤 안 맞는 짓들을 하다니....
갈수록 내 독설이 늘어만 간다.
어쩐담. 나 이런 성격 버릴려고 했는데, 우리 전능하신 노짱께서 내 의지를 또 꺾어놓으셨다.
아, 노짱 탓만 할 것은 아니지.... 노무현이 아이스크림 먹는 사진까지 뿌려대며
그를 신화화하는 언론도 한 몫 하고 있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아이스크림 먹고, 봉하마을서 자전거타는 노무현이 소탈해 보이고
탈 권위주의적으로 보인다면, 그것과 아주 같은 방식, 똑같은 의미로
청와대 사저에서 출퇴근할때 자전거 이용하고, 대선광고에서 시장 아줌마랑 뜨거운 포옹
을 나누었던 이명박도 그에 못지않게 소탈하고 탈 권위주의적으로 보인다.
내 말이 틀렸나? 얼마 전 어린이날에 이명박도 초딩들 앞에 모아놓고 퇴임 후 환경운동
하고싶다고 말했단다. 이명박이 환경운동 한다면 개구라고, 노무현이 한다고 하면 진심어린
서민적인 면모인가? 엎어치나 매치나 이명박은 4대강 갈아엎으려는 놈이고, 노무현은 이미
새만금 갈아 엎은 놈인데...
아, 그리고 요즘 방송 보니까 노무현 생전 모습을 보여주는데 기가막힌 장면이 있었다.
1. 노무현이 모 연설장에서 주머니에 손넣고 약간 불량한 자세로 말하는 사진. 그 장면 나도 기억하는데 당시 언론에서는 대통령 품위에 맞지 않는 자세와 언행이라고 비난의 화살을 날렸었다. 그런데 요새 언론에서는 이게 탈권위주의적인 카리스마를 나타내는 모습이란다. 아, 앞으로 나도 사람 많은데서 말할 기회 있으면 주머니에 손 넣고 고개 쭉 빼고 다녀야 겠다. 카리스마 있어 보이게.
2. 어제 밤 집에 오는길에 동네 호프집 밖에 설치된 뉴스에서 나온 장면. 노무현 임기 당시 서민 대통령으로서의 면모를 모아서 보여준단다. 김선일씨 이라크에서 피랍되었을 때, 자국민의 안위를 고민하며 고뇌하는 모습이 나온다. 소파에 앉아서 턱을 괴고 한껏 인상을 찌푸리면서. 아, 그랬던 그가 내렸던 결정은 무엇인가? 그의 결정으로 김선일씨는 처참한 시체로 돌아왔는데, 얼굴 한번 찌푸린 사진 한방에 노무현은 서민적인 대통령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노무현 그 보다 먼저간 영령들이 다시 한번 기절하실 노릇이다.
이놈의 대한민국, 전부 다 집단 환각에 빠진 것이 틀림 없다.
mj921028 (116.41.XXX.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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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e (218.150.XXX.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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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narde (125.131.XXX.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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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kcsp (210.103.XXX.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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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kcsp (210.103.XXX.21) |
맨 밑에 두개가 내가 단 댓글이다.
그 위에는 대부분 나의 댓글에 대한 공격.
아무래도 저 사람들의 댓글로 봐선 아무래도 김상봉 교수의 글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위안이 되었나 보다.
그런데 어쩌나.... 저렇게 한 번 위안 받고 나면 하룻밤 잠은 편히 잘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현실은 전혀 바뀌지 않는데... 노무현이 남기고 간 파괴적인 유산은 그대로인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인을 추앙의 대상으로 만들어 자신들을
토닥토닥 어루만져주는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죽은 노무현과 산 이명박, 두 괴물의 쌍두마차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한국 사회의 정치를 질식시키고 말 것이다.
포스터 사진이 큼직한 것이 마음에 든다.
왜 난 저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윤도현의 <이 땅에 살기 위하여>라는 노래 제목이 생각났을까?
전혀 느낌이 다른 노래는 아니긴 하지만... 뭐 그건 그렇고...
지난 16일(벌써 2주나 되었네ㅋㅋㅋㅋ)에 돌돌이와 해장국집딸과 함께 대전아트시네마에서 본 다큐다.
게다가 덤으로 '살짝 부담스러운' 감독과의 대화까지 ㅋㅋㅋㅋㅋ
다큐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새만금의 끝물막이 공사를 진행하려는 정부에 맞서 (이제는 육지가 되어버린) 섬마을 사람들은 삶을 건 투쟁을 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건'들에 부딪치게 된다.
사건1) 새만금을 죽이는 노무현은 개XX라는 선정적인 언술로 매스컴을 탄 도올 김용옥이 주민들의 농성장에 찾아와 3일간 단식투쟁을 한다. 그 3일동안 농성장은 언론들로 북적였고, 새만금의 이야기는 공중파를 타고 좀 알려지나 싶었다. 그러나 도올은 3일 뒤 빠이빠이했고, 그 일 때문에 괜히 지역 유지들과 주민들과의 마찰만 더 심해졌다.
사건2) 끝물막이 공사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투쟁 방향을 놓고 주민들 사이의 격론이 벌어진다.
주민대책위에서 요직을 맡고 있는 분들(대부분 남성)은 보상을 더 받아내는 쪽을 요구사항을
돌리자고 했고, 이에 반대하는 분들(대부분 여성)은 끝까지 해수유통을 고집했다.
여기서 굳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표식을 단 것은 그만큼 이 다큐에서 이 여성어민들의 존재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이 다큐에서 가장 인상적인 명대사를 남기신 이순금 이모님(이모님이라는 표현은 이강길 감독이 쓰는 표현. 이런 표현이 맞나 싶으면서도 딱히 다른걸 못찾겠어서 일단 패스)을 비롯하여 많은 여성농민들은 누구보다 비타협적인 투쟁을 요구한다. 왜냐면 해수유통만이 자연과 함께하며 살아온 자신들의 삶을 지키는 것이고, 그것이 아닌 이상 다른 어떤 곳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뭐 요약도 아니고 정리도 아니고 글이 아주 요상하게 되어버렸는데,
여튼 이순금 이모님의 명대사는 이렇다. "갯벌에서 일할 때 나는 날아다니는 새들 조그만 낙지들 하고 노느라고 남들의 2/3밖에 못잡아, 그래도 난 일하는게 너무 즐거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내가 일하고 싶은 만큼 일하면서 부자는 아니지만 가난하지 않게 살 수 있으니..."
아, 진짜... 글로 옮겨놓으니 느낌이 팍 죽어버리네... 여튼 궁금하면 다큐를 직접 보시고...
이 분들이야말로 에코페미니즘을 온 몸으로 실천하시는 분들이다.
!@#$%^&*
에잇, 진짜 글이 너무 허접한 걸.... 난 왜 맘먹고 쓰질 않으면 항상 이렇게 막가는 글을 쓰는 걸까?
현대의 의료가 민중의 건강에 가하는 위협은, 교통량과 그 강도가 민중의 기동성에 가하는 위협, 교육과 미디어가 민중의 배움에 가하는 위협, 도시화가 민중의 자기 집을 짓는 능력에 가하는 위협과 유사하다. 어떠한 경우에도 주요한 제도적 노력은 반생산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교통에 있어서 시간을 소비하는 가속화,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커뮤니케이션,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높은 수준의 기술적 능력을 몸에 익히도록 하여 전체적으로는 무능력한 전문가 바보가 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교육, 이 모든 것들은 의료에 의한 병원병의 생산과 지극히 닮은 현상들이다. 각각의 경우에 주요 제도적 분야는 그것을 만들고 기술적으로수단화하기 위한 특정한 목적으로부터 사회의 방향을 돌려놓고 있다. (17쪽)
보르네오에 역설적인 질병통제의 좋은 예가 있다. 말라리아 제압을 위하여 촌에서 사용된 살충제가 바퀴벌레에 축적되어 대부분의 바퀴벌레가 저항성을 갖게 되었다. 이 바퀴벌레를 도마뱀붙이가 잡아먹고 혼수상태에 빠져 고양이의 먹이가 되었다. 그 결과 고양이는 죽고 쥐들이 불어났다. 그리고 쥐들이 페스트를 전염시켰다. 그래서 군대는 고양이를 낙하산으로 정글의 마을에 투하해야 했다. (30쪽)
의사에 의해 가해지는 고통과 질병은 언제나 의료 행위의 한 부분이었다. 전문가의 무감각, 태만, 완전한 무능력 등은 낡은 형태의 이료 과오이다. 의사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에게 그 기술을 행사하는 기능인에서 과학적 법칙을 다양한 환자들에게 적용하는 전문가로 변모함에 따라, 의료 과오는 의사 개인의이름에 오점을 남기지도 않고, 거의 존중받다시피 하는 일이 되었다. 옛날에는 신뢰의 남용과 도덕적 결함이었던 것이, 현재에는 장치나 수술자의 우연적 사고라고 합리화되고 말았다. 복잡하게 기술화된 병원에서 태만은 '우연한 인간적 오류' 또는 '시스템의 고장'으로 미화되고, 무감각은 '과학적인 냉정함'으로 호도되며, 무능은 '전문적 장치의 부족'으로 합리화되고 있다. 진단과 치료의 비인간화는 의료 과오를 윤리적 문제에서 단순한 기술적 문제로 변모시켜 왔다. (39-40쪽)
나는 스스로 강해져 가는 이 제도적인 부정적 피드백의 고리를 고전 그리스어의 동의어에 따라 '의료의 네메시스(nemesis)'로 부르고자 한다. 그리스인은 자연의 힘 중에서 신들을 보았다. 그들에게 네메시스는, 신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특별히 지키고 있는 특권을 침략한 사람들을 습격하는 신들의 복수이다. 네메시스는 인간이기보다는 영웅이고자 하는 인간의 비인간적인 시도에 대하여 반드시 가해지는 벌이다. 수많은 그리스어의 추상명사와 같이 네메시스는 신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는 '교만', 곧 신의 속성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뻔뻔스러움에 대한 대자연의 반응을 상징한다. 현대의 위생상의 교만함이 새로운 의료 네메시스의 병상(病狀) 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44쪽)
근원적 독점은 하나의 단체, 또는 정부에 의한 독점 이상으로 뿌리 깊은 것이 된다. 그것은 수많은 형태를 갖는다. 교통 수단으로 붐비는 도시가 건설되면, 인간의 다리에 대한 평가는 낮아진다. 학교가 학습을 점유하게 되면 독학자의 가치는 낮아진다. 위기의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병원이 맡게 되면 병원은 사회에 새로운 죽음의 형식을 강요한다. 독점은 보통 시장을 매점하나 근원적 독점은 사람들이 스스로 행위하고 스스로 만드는 능력을 빼앗아 버린다. 상업상의 독점은 상품의 유통을 제한한다. 그리고 독점이 집요하게 되는 만큼, 비시장적인 사용가치는 마비된다. 근원적 독점은 나아가 자유와 독립을 침범한다. 그것은 환경의 형태를 바꾸고, 사람들에게 스스로 싸우는 힘을 주었던 환경의 여러 특징을 '전유하는' 것에 의해, 사회 전체에 사용가치를 상품으로 바꿔치기 할 것을 강요한다. 집약적 교육의 결과 독학자는 고용되지 않고, 집약적 농업은 자작 농부를 파괴하며 ,경찰의 배치는 지역 사회의 자기 통제를 좀먹는다. 의료의 유해한 확대도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곧 상호치료, 자기 투약을 경범죄나 때로는 중죄로까지 만들어 버린다. 임상적 병원병이 위기적인 강도에 도달하여 그 사업 자체의 몰락에 의해서만 역전될 수 있을 때 의학적으로 불치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병원병은 전문가의 지배를 없애는 정치적 행동에 의해서만 역전될 수 있다. (51-52쪽)
의료화된 사회에서는 의사의 영향력이 지갑이나 약상자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분하는 분류에까지 미친다. 의료 관료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곧 자동차 운전이 가능한 자, 일을 하여서는 안 되는 자, 감금되어야 하는 자, 군인이 될 수 있는 자, 국경을 넘어도 되는 자, 요리해도 되는자, 매춘해도 되는 자, 미국 부통령에 출마할 수 없는 자, 사망자, 범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자, 범죄를 범할 경향이 있는 자 등이다. 1766년 11월 5일,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명령을 내려, 궁정의 의사들에게 건전한, 곧 '정확한' 증언을 보장하도록 하기 위하여 피의자가 고문에 이길 수 있는가 어떤가를 증명할 것을 요청했다. 이것은 명령에 의해 의학적 증명서를 설정한 최초의 법이었다. 그 후 형식을 충족시킨 보고서를 작성하고 진술서에 서명하는 것이 점점 다수의 의사로부터 시간을 뺏게 되었다. (86-87쪽)
일정한 제한은 있으나 유효한 의학적 치료의 엄밀한 한계는 오랫동안 질병으로 인정되어온 상태--류머티즘, 맹장염, 심장마비, 퇴행성질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더욱 최근에 의학적 치료에 대한 수요를 창출시킨 상태에 적용되고 있다. 예컨대 노년은 불안한 특권, 또는 비참한 종말이라고는 생각되었지만 결코 질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의사의 지시 하에 놓여직 ㅔ되고 말았다. 노인 치료에 대한 요구는 증가되고 있으나 그것은 생존하는 노인이 더욱 많다는 이유에서보다는, 노년은 치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인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91쪽)
전문가의 서비스에 의존하는 노인이 증가함에 따라, 노인을 위한 특별한 시설에 가두어지는 노인의 수도 증가된다. 반면 이웃 사람은 짐이 되는 사람들에게 더욱 냉담하게 된다. 이러한 시설은 노인 처리를 위한 현대적 전략으로 생각되고, 노인은 다른 사회에 의한 것보다는 공명정대하게, 덜 지독한 형식으로 수용된다. 입소 후 1년간의 사망률은 본래의 환경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의 사망률에 비하여 훨씬 높다. 가정으로부터 단절됨에 따라 다수의 중병이 나타나고 사망률도 오른다.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시설 입소를 희망하는 노인도 있다. 의존하는 것은 언제나 가혹한 것이고, 노인에게 있어서는 특히 그러하다. 젊은 시절의 특권이나 빈곤도 현대에는 노년기에 정점에 도달한다. 엄청난 부자와 확실한 독립성을 가진 인간만이 의료화되지 않은 자기 인생의 끝을 선택할 수 있다. 곧 빈민은 의료화에 굴종하지 않을 수 없고, 그들이 사는 사회가 풍부하게 되면 될수록 의료화는 극단 또는 보편적인 것이 된다. 노년을 전문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상태로 변모시킴에 따라, 노인은 세금으로 지탱되는 특권과 관련된 어떤 차원에서 자신이 수탈되고 있음을 통절히 느끼는 소수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때로는 비참하고 무시에 의해 크게 낙담하는 노인으로부터 가장 슬픈 소비자 그룹에 속할 자격이 있는 구성원으로 변모하는 것까지, 결코 충분한 것을 획득할 수 있도록 계획되고 있지는 않다. (94쪽)
위기의 의식화(그것은 병적인 사회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나)는 의료 담당자에게 세 가지를 부여한다. 그것은 보통으로는 군인만이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의료 담당자에게 부여한다. 위기라고 하는 압력 밑에서, 지휘관이라고 믿어지는 전문가는 쉽게 정의와 예의범절이라고 하는 일반적 규범으로부터 면제된다. 죽음을 통제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전상자를 치료하는 우선 순위를 선택할 수 있는 지휘자로, 그의 살인은 정책적으로 은폐되고 만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모든 행위가 위기의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매혹적인 변경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의료 기업에 의해 요구되는 시간의 폭과 지역 사회의 공간은, 종교적 또는 군사적 시공간과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것이 된다. 임종 관리의 의료화는 단지 불길한 꿈을 의식화하고 지겨운 노력에 대한 전문적 면허 확대하는 것만은 아니다. 곧 임종의 치료가 확대되는 것은 의사로 하여금 그가 요구하는 수단의 기술적 유효성을 증명할 필요를 없애버린다. 더욱 많은 것을 요구하는 그의 힘에는 어떤 제한도 없다. 마지막으로 환자의 죽음은 의사를 잠재적 통제와 비판의 피안에 방치한다. 환자의 마지막 시선과 '죽어 가는 자'의 일생의 전망 중에는 희망이란 없고 단지 의사의 마지막 기대가 있을 뿐이다. '위기'를 향한 어떠한 시설의 방향이라도, 거대한 일상적 무효를 정당화한다. (110-111쪽)
의료 처치가 '흑마술'이 되는 것은, 그것이 환자에게 스스로 치유하는 힘을 부여하는 대신에, 병자를 불구자로 만들어 자시에게 가해지는 치료를 훔쳐보는 자로 신비화시키는 때이다. 의료 처치가 '병든 종교'로 변하는 것은, 그것이 병자의 모든 기대를 과학과 그 기능에 집중시키고, 병자가 자신의 곤경에 관한 시적 해석을 구하거나, 고통을 당해본 사람--고인이든, 이웃사람이든--중에 존경할 만한 모범을 발견하는 것을 잊게 하는 의식으로서 나타날 대이다. 의료 처치는 그것이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 관용을 증가시키는 동기와 훈련을 사회에 부여가힉 보다는, 환자를 전문적인 환경 속에 격리시키고 말았을 때에 '도덕적 퇴폐'에 의해 질병을 증가시킨다. 생의학의 이름 아래 생겨난 마술적 파괴, 종교적 상해, 그리고 도덕적 퇴폐는 사회적 병원병을 만들어 내는 결정적인 장치이다. 그것은 죽음의 의료화와 혼합되고 있다. (126-127쪽)
전통문화와 기술 문명은 정반대의 가정에서 출발한다. 모든 전통 문화에서 정신요법과 신앙 체계 그리고 고통을 참기 위해 필요로 하는 약은 일상생활 속의 행동에 포함되고, 현실은 냉엄하고 죽음은 회피될 수 없다고 하는 확신을 반영하고 있다. 20세기의 디스토피아, 반 유토피아에서 내부 및 외부의 고통스런 현실을 인내할 필요성은 사회 경제 시스템의 실패로 해석되고, 고통으 비정상적인 개입에 의해 처리되어야 할 긴급한 우발적 사건으로 다루어진다. (148쪽)
치유하는 자의 에토스는 종교, 민간 전승, 진통제의 용이한 이용이 일반인을 훈련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과 마찬가지의 위엄을 갖춘 실패에 대한 수용력을 의사에게도 부여했다. 현대 의료의 종사자들은 다른 위치에 놓여 있다. 곧 그의 제 1의 방향 설정은 치료이지 치유가 아니다. 그는 인내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고통이 환기하는 의문 부호를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한 건의 서류 속에 모을 수 있는 불평의 목록 속에 떨어뜨리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고통의 메커니즘을 알고 있음을 과시하고, 그리하여 환자의 동정으로의 초대를 뿌리치고 만다.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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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것 뿐만이 아니라 일련의 정치개혁이라는것들이 정권이 바뀔때마다 행해지는 '정당화' 사업이라는 점에서 노무현 정부더러 개혁세력이라는거 하는것이야말로 우스운 것이지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