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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10
    홍기빈,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 2,3,4장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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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췌] 김종철,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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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현, <장애학 함께 읽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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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9/10/06
    김대중, <대중참여경제론>
    구르는돌

홍기빈,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 2,3,4장 요약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는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가

 

1. 현대판 상인법


1) 중세 상인법 성립의 배경

- 중세 유럽은 법적 제도의 일관성이 없는 파편화된 사회. 이는 12세기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상업의 발달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감당할 수 없었음. 그래서 중세 상인들은 스스로 상인법을 만듦.

- 유럽의 주요 교역로와 상업 중심지 곳곳에 상인법을 시행할만한 재판소를 세우고, 신속하게 분쟁을 해결하는 장치를 만듦. 여기서 판사는 오랜 장사꾼 경험 속에서 상업의 온갖 관행과 실제 사례에 정통해 있고 상인들 사이에서 신용과 명망을 쌓은 사람. 그는 ‘정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양쪽이 조속히 합의에 도달할 수 있도록 중재함.

- 상인법 재판의 특징 : ①재판소의 선택, 증거의 종류나 제출방식, 사용되는 법적 원천은 전적으로 분쟁 당사자에 의해 결정됨 ②판결이 강제력을 통해 집행될 수 없음. 영주 등 당시 물리력을 보유한 이들이 상인법에 관여하지 않음. 다만 판결에 복종하지 않는 상인은 상인 공동체에서 ‘왕따’가 됨.


2) 주권국가 등장 이후

- 베스트팔리아 체제 등장 이후 근대적 영토-주권국가의 등장. 이 국가들은 자국 영토 안에서는 오로지 자국만이 법을 정할수 있는 권력인 주권을 가지며 그 밖의 다른 어던 법적 권위도 인정하지 않음. 이에 따라 이전 상인법은 국가의 법제화를 거쳐 각국에서 통일적으로 시행되는 민법과 상법으로 흡수.

- 국가간 법체계 수립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 이에 20세기에 들어 일정한 구속력을 갖는 국제법 체계가 성립됨. 이 국제법 체계 하에서 의미있는 구성원은 오로지 국가. 국가를 제외한 주체(ex: 투자자)는 국제법적으로 국가의 상대가 될 수 없음.

- 이런 경직된 국제법 체계는 세계적 차원에서 상거래를 펼치는 이들에게 인기 없는 것. 그래서 19세기 들어 공식적인 국제법 체계의 가장자리에서 옛날 ‘상인법’의 정신이나 관행에 따라 국제상거래 관계에서 상인들 스스로가 분쟁을 해결하는 중재절차에 호소하는 일이 많아짐.


3) 국제 중재절차의 제도화

- 1923년 국제상공회의소 주도로 유럽 17개국 대표들이 제네바에 모여 민간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쟁의 해결을 구속력 있는 중재심판에 넘기기로 합의하고 이를 각국이 법적으로 인정. 중세 상인법 관행의 부활. 그러나 국제상공회의소는 중재심판의 대상이 민간인들 사이의 상업적 사안으로 제한돼 있다는 것에 불만.

- 1965년 투자분쟁조정회의 : 기존의 사적인 국제중재절차제도를 국가와 외국 투자자 간의 분쟁에까지 적용하기로 함. 세계은행 산하에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라는 포럼을 설립하여 국가와 외국 투자자들 사이의 분쟁에서 투자자의 이익을 보호하고 중재심판을 하는 역할을 맡김.

- ICSID의 한계 : ICSID의 심판이 개별 국가에 국제법적 효력이 있는 구속력을 가지려면, 그 국가가 “이 건은 우리나라의 법적 권한에 속하지 않으며 ICSID의 중재심판 대상이 된다.”는 식의 명시적인 의사표명을 해야 함. 외국 투자자는 해당 국가와 계약 당시 이 조항에 합의를 해야 ICSID 중재심판에 대한 구속력을 갖게 할 수 있음.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투자협정(BIT)이나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한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



2. 국제법 체계를 뒤엎은 자본의 공세


1) 잠에서 깨어난 국제 중재절차

- 특정 국가가 어떤 특정한 외국 투자자와 계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특정 국가와 협정을 맺는다면, 그 협정은 국가와 국가간에 맺은 조약이니 흠결 없는 국제법적 효력을 갖는다.(BIT) 이 경우 ICSID는 투자협정의 양 당사국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외국 타자자 대 국가의 분쟁에 대해 구속력 있는 중재심판을 할 수 있게 됨.

- 이런 투자협정은 국가 주권을 침해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간헐적으로만 이루어져 왔을 뿐. 그런데 1980년대 말부터 지구화가 본격화 되면서 양자간 또는 다자간 투자협정이 봇물처럼 터져나와 ICSID의 중재심판 건수도 증가.


2) 2차 대전 이후 ‘지구화’ 3단계

- 1단계(70년대 초) : 고정환율제 붕괴와 오일쇼크. 영미권에서의 보수화와 제3세계 외채 증가.

- 2단계(80년대) : 통화주의자들의 금리인상에 따른 제3세계 국가들의 외채위기. 제3세계 시장개방과 구조조정.

- 3단계 : 워싱턴 컨센서스에 후속하는 지구화의 단계


3) 전세계에 강제되고 있는 ‘신헌정주의’

- 타자자의 권리와 이익이 제일의 우선성을 가진다는 신헌정주의는 투자협정과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도를 통해 몇백년 동안 유지되어 온 국제법의 체계를 무너뜨린다. 투자 수익성에 장애가 되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장벽들에 따로따로 싸울 필요 없이 국가를 책임자로 몰아 소송으로 국제법정에 불러낼 수 있게 된 것.


 

 

 

■‘투자자의 보호’란 무슨 의미인가



1. 보호용 방패가 공격용 창으로 변하다


1) ‘물건’이 아닌 ‘자산’이 사적 소유의 대상이 되다

- 미국 헌법상의 ‘사적 소유 보호’ 개념 : “정부는 개인의 사적 소유물을 가져 갈 수 있지만 공공의 목적을 위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고, 적절한 절차를 거쳐야 하며, 그 개인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소유의 대상은 ‘토지’와 같은 가시적인 물건에만 해당.

- 미국 남북전쟁을 거쳐 1870년대부터는 소유의 대상이 사물이 아닌 온갖 자산, 즉 소득을 창출해주는 모든 것으로 전환. 땅투기와 온갖 신종 금융기법들의 출현으로 사적 소유의 법적 정의는 ‘화폐가치’쪽으로 기울게 됨.

- 1890년 미네소타 주정부의 철도건설 과정에서 토지의 가치변동을 겪은 땅주인에게 보상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문제. 주정부 입장 “정부에서 토지 소유권을 가져간 것이 아니며 단지 토지의 가치 삭감만 일어났으니 사적 소유가 침해된 것이 아니고, 따라서 이 문제는 헌법적 사안이 아니라 주정부의 재량 아래 있는 것” 땅주인 입장 “정부에서 소유권을 가져가지 않았다 해도 토지의 화폐가치가 떨어졌으니 주정부가 사적 소유물을 수용한 것이나 마찬가지” ==> 대법원 판결은 땅주인 입장 승소. 소유개념이 20년만에 단순한 사물에서 ‘소득창출능력’으로 바뀐 것.


2) 레이건 시대의 ‘규제에서 파생된 수용’

- 1930년대 뉴딜 정부의 등장으로 사적 소유의 의미가 ‘국가가 허용하는 만큼의 소득을 취득할 권리’로 축소.

- 1980년대 레이건 정부의 등장으로 ‘규제에서 파생된 수용’(regulatory expropriation)개념 등장. 1992년 판례에서 행정 규제라 하더라도 일정한 경우 토지에 대한 수용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것을 법원이 인정.

- 나프타 11장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도에서는 이 ‘규제적 수용’ 개념이 이상적으로 펼쳐져 있음.



2. 나프타 11장에 나타난 ‘투자’와 ‘수용’의 의미


1) ‘투자’의 넓은 범위

- 나프타 1139조의 정의 : ‘투자’는 기업은 물론 각종 유가증권, 부동산, 유형 및 무형의 재산 등 사실상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자산’ 취득을 포괄하고, 더 나아가 각종의 이익을 낳는 자본기탁과 투자대상국 내의 각종 허가 및 특허권을 포함한 모든 경제활동 자원의 취득도 포함.

- 나프타 1101조의 11장 규정이 적용되는 대상 : 투자자 및 투자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투자대상국이 취하고 유지하는 ‘조치들’. 여기서 ‘조치들’이란 ‘모든 종류의 법, 규제, 절차, 요건 및 관행’.(201조 1항)

- 1110조에서 수용의 의미 : ‘간접적 수용’(indirect expropriation)과 ‘수용에 맞먹는 조치’(measures tantamount to expropriation).

┖→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의 설명에 의하면 이것은 곧 ①‘점진적 수용’(creeping expropriation). 즉 소유자의 소유권에는 아무런 직접적 영향이 없지만, 국가의 개입과 조치로 인해 조금씩 장기간에 걸쳐 투자의 가치가 잠식되는 상황. ②‘규제에서 파생된 수용’(regulatory expropriation). 소유권의 화폐가치에 영향을 주는 법적 규제. 경찰력까지도 문제 삼을 수 있음.



3. ‘공공이익’은 어떻게 되는가


1) 매탈클래드 사건의 경우

- 각각의 국제 중재재판소는 서로 독립적으로 심사하고 판결하며, 사건 유형별로 구속력 있는 판례가 쌓이지 않음. 따라서 분쟁의 구체적인 경우에 따라 서로 다른 판결이 나오게 마련.

- 매탈클래드 사건에 대한 중재재판소의 판결문 : “본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된 환경보호 조치와 같은 동기라든가 의도 등은 고려하거나 결정할 필요가 없다.” 고려해야 할 문제는 오로지 “투자에 어떠한 영향이 있는가” 하나뿐.


2) 정부를 쫄아들게 만드는 된서리 효과

- 투자자는 제소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만으로도 투자대상국을 쫄아들게 해 어떤 입법이나 행정조치도 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음. 제소 절차를 밟기 이전에 투자대상국 관청에 ‘의도 통지’를 보내는데 여기서 제소의 논리와 배상금의 크기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면 중재재판으로 가지 않고도 해당 국가를 굴복시킬 수 있음. (캐나다 필립 모리스 사건과 공공자동차보험 사건)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1. 국제 중재절차의 성격


- 국제 중재절차는 일정한 법적 효력의 근거와 원천이 명확하게 규정된 법체계 내에서 그 법체계가 정해놓은 절차와 규칙을 따라 행해지는 일반 법정의 재판과는 성격, 절차과 완전 다름.

- 상인법의 심판과정은 두 명의 분쟁 당사자들간에 ‘쇼부’치는 과정.



2. 소송은 누가 제기하는가


- 간접투자자, 소수 주주, 채권 보유자 또는 주식 이외의 투자자, 소유 구조가 외국 투자가들에게 넘어간 현지 법인 모두 소송의 주체가 될 수 있음. 게다가 투자자에 따라서는 원하는 국적의 나라로 가서 자회사를 세우든가 아니면 그 나라의 회사를 인수해 ‘투자협정 쇼핑’을 할 수 있음. 즉 한미FTA 협정 하에서는 중국회사가 미국에 자회사를 만들거나 그 나라 회사를 인수하여 한국에 투자를 하고, 여기서 손해를 입었다고 판단하면 한국 정부를 제소할 수 있음.

- 이 많은 주체가 개별적으로 소송을 걸면 한국 정부는 하나의 동일한 사건을 놓고 여러 다른 주체들과 다른 곳에서 여러 다른 소송에 휘말리게 될 수 있음.



3. 국제 중재절차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1) 규칙과 절차는 양쪽 당사자들이 결정한다.

- 국제 심판소송을 주관하는 국제기구와 틀 : ICSID, 국제상공회의소의 중재법정 규칙(ICC Rule), 스톡홀름 상업회의소 중재 제도, 유엔 산하 국제연합국제무역법위원회의 중재규칙(UNCITRAL) 등.

- 그런데 투자협정은 대부분 투자자들이 이 가운데 몇 개를 동시 선택할 수 있는 ‘메뉴’로 제시. 그래서 투자자들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제도를 선택하여 투자대상국 정부를 공격하는 ‘규칙 쇼핑’을 감행할 수 있음.


2) 중재심판 과정은 철저한 비공개로 진행된다.

- 규칙과 절차가 결정되면 양쪽은 각자의 변호사를 내세우고 중재인을 결정하여, 세 주체로 중재심판소를 구성. 중재인은 ICSID의 경우 ICSID기관에서 미리 작성해둔 명단에서 한 사람을 지명하여 선임. 그런데 이 과정은 철저하게 세 주체만 참여. 양쪽 당사자는 자신들의 문서나 의견을 공개할 의무가 없고, 변호사와 중재인이 누구인지, 심지어 판결문 자체도 비공개.

- 중재심판에서는 장사와 투자를 하는 사람들의 사업 기밀과 평판만이 중요할 뿐 공공의 이익은 전혀 논의대상이 아님.

- 단 투자자와 투자대상국 정부가 모두 동의할 경우 당사자 이외의 이해 집단들에게 심판소에 자신들의 의견과 입장을 전달할 기회를 줌.


3) 변호사는 물론 중재인도 경제적 보상을 받는다

- 보통의 재판에서는 분쟁의 양쪽 당사자가 그 재판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됨. 판사가 분쟁의 양쪽 당사자와 금전적 관계로 얽혀있다면 완전 상식 밖의 일. 그러나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에서는 변호사는 물론 중재인도 보상을 받음. 상인법의 전통에서는 오히려 당연한 일. 법률 서비스에 대한 대가.

- 누구를 중재인으로 선정하느냐는 심판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침. 실제 국제 중재 관련 경험이 있는 법률가가 극 소수여서 일종의 ‘클럽’이 형성되어 있고, 이들에 대한 인적정보는 초국적기업이 더 많이 가지고 있음. 법률가의 입장에선 이 중재심판 시장에서 인정과 평판을 쌓아 계속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기업 쪽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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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부 10년의 유산!!

석돌이는 임용고시 준비생이다. 얼마전에 1차 시험을 봤고, 이달 말에 있을 2차 시험을 준비중이다. 그래서 석돌이는 어제 대구에 2차 시험 모의고사 및 문제풀이 강의를 들으러 갔다왔다. 이 초등임용계에도 사교육이 매우 활성화되어 있는다고 하는데 그 실태에 대해서 좀 폭로하고자 한다. 물론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어제 있었던 강의에도 모 고시학원에 500여명의 수강생이 몰렸단다. 이 강의는 11월 한달간 매주 한번씩만 진행되는데 수강료가 12만원이다. 그렇다면 대구에서만 6000만원을 버는거다. 그런데 이 강의를 진행하는 강사가 전국 팔도 유랑을 해서 서울 대구 부산 광주 등지에서도 매주 이런 강의를 하는데 일단 4군데에서 모두 대구 수준의 수강생이 몰린다고 가정하면 한 달 동안 2억 4천만원을 버는 셈이다. 물론 서울은 이보다 수강생이 많고, 넘쳐나는 수강생을 감당하기 위해서 교실을 몇개씩 나눠서 강사는 한 교실에서만 강의를 하고 나머지 교실에서는 강사의 수업을 생방송으로 찍어 빔 프로젝터로 수업을 '시청'하도록 한댄다. 게다가 그걸로도 감당 안되는 인원은 녹화분으로 해결하기도 하고....

 

그런데 이런 전문 초등임용 강의를 하는 사람이 전국적으로 손을 꼽아도 3명 정도 밖에 안된단다. 어제 대구에서 강의를 했다던 배모 강사는 교육과정과목 전문인데, 이 '초등' 교육과정이라는게 사람들은 초등이라 우습게 보겠지만 '강의'를 할 정도의 수준이 되려면 거의 만물박사가 되어야 한다. 어제 내가 들은 문제 예시.

 

   이 수식을 어떻게 초등학생이 풀 수 있도록 가르칠 것인가?

우리는 물론 알고 있다. 4/5의 역수를 곱한다. 그런데 이 때 우리의 초딩이 '왜'라고 묻는다면? 왜 역수를 곱해야 하는지를 초등학생이 알아듣게 설명하는 것, 그 방법을 주관식으로 쓰는게 2차 시험 문제의 유형이란다.

 

이런 문제가 수학에만 있을까? 여하튼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상식을 초딩들이 이해하도록 체계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그걸 수험생이 단기간에 습득하도록 정리해내는 작업은 거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고난이도 작업인데, 이걸 해내는데 성공한 이들이 저 3인의 초등임용 사교육 재벌들이라는 거다.

 

(물론 위 문제처럼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자신이 지도하는 담임으로 있는 반에 학습부진아가 있을 때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고, 이를 1200자 내에 답해야 한다. 답은 그냥 딴거 다 필요없고 요새 교과부에서 나오는 온갖 브리핑 자료를 딸딸 외워서 쓰면 만점이란다. ㅋㅋㅋㅋ 위의 유형이 더 많은지, 이런 '정치적인' 유형이 더 많은지 해당 수험생이 아닌 나로서는 알길이 없지만....ㅋㅋㅋㅋ)

 

어쨌든 근래들어 급상승한 초등임용 경쟁률 덕분에 위 3인을 비롯한 초등임용 사교육 종사자들은 완전 대박을 쳤댄다. 그런데 여기서 '근래들어'라는 말에 주의를 해야 하는데, 이것은 비단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1-2년 사이를 지칭하는 말이 아닌거다. 임용경쟁률이 이상조짐을 보인 것은 실제 2000년대 초반부터였고, 06년에 노무현 정부에서 학급총량제인지 뭔지 실시한다고 하면서 전국 교대가 한번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었다.

 

여튼 유재석 버금가는 일당벌이를 하고 계신 이들은 지난 민주정부 10년에 감사해야 한다. 어쩌면 이들이 김대중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신지식인'의 전형적인 유형이 아닐까 생각해보면서 어제는 정말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어쨌든 이로 인하여 매년 배출되는 수천명의 초등교사들은 모교 교수들에 의해서도 아니고, 3인의 임용전문 강사들에 의해 양성되고 있는 셈이다. 교과부 브리핑 자료 따위나 읽으면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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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탄생>으로 나를 돌아보다.

 

 

가끔 책을 읽고 안타깝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대부분 책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깊이가 너무 깊고 울림이 커서 나의 앎의 그릇으로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경우이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입장은 무엇이며, 동의할 수 있는 바와 그럴 수 없는 바에 대해 밝히면서 나름 쭈뼛거리며 '비판적 독해'를 펼쳐보이고 싶은데도 그럴 수 없는 책이 가끔 있다. 어제 다 읽게 된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이 그런 경우이다.

 

이 책에 관해서는 안타까운 점은 단지 이것 뿐만이 아니다. 간혹 책의 내용과 관련해서 더 궁금한 점이 있거나 하면 저자에게 메일이라도 보내서 물어보곤 하는데, 이 책은 저자가 이미 고인이 되신 관계로 그럴 수도 없다. 57년생. 우리 아버지가 50년생이신데, 동년배들에 비해서 결혼을 늦게 하신 것을 감안하면 저자를 정확히 내 아버지 뻘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 같은 분이 자신의 유년기에 동안, 자신어 어떻게 '남자'로 만들어졌는지를, 개인의 은밀한  속살까지 낱낱이 드러내보이면서 말한다는 것은 사실 독자로 하여금 좀 낯 뜨거우면서도 호기심 가는 대목이다. 난 그렇게 남의 과거 사생활을 엿보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그러면서 또 깊이 울었다.

 

이 책의 초반에서는 주로 저자 자신과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한 회고가 주를 이룬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컴플렉스에 대한 개념을 수용하는 듯 하면서도 거꾸로 뒤집어 버린다. 외디푸스 컴플렉스에서는 어머니와 결혼하고자 하는 아들의 욕망은 아버지 살해에 대한 충동으로 이어지지만 결국엔 아버지의 법을 수용하고야 만다는 좌절을 표현한다. 그러나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드러내는 한국 가족에서는 오히려 아버지 살해를 이루지 않고도 아들의 어머니와 결혼하고자 하는 욕망은 실현된다. 실제 내 경험에만 비춰봐도 아버지-어머니 사이보다 나와 어머니 사이가 백배는 더 가깝다. 심지어 예전부터 아버지는 나와 같이 있을 때는 어머니와 직접으로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버릇처럼 나를 대변인 삼아서 자신의 말을 전달할 것을 요구했다. 셋이서 밥을 같이 먹고 있을 때 조차도. 저자의 말대로 그것이 마치 아버지다운 행동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내 사생활 깊은 곳에 들어와 있었다. 어머니는 나의 대부분의 일상과 하나로 묶여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저자의 말대로 아버지는 자신이 아버지라는 것을 나에게 확인시키려 할 때에만 나의 사생활에 등장했다. 학교 성적표가 나왔을 때, 용돈기입장을 썼는지를 확인 할 때(아버지는 용돈을 정기적으로 주는 것도 아니면서 항상 용돈 기입장을 써는지를 확인하려 했다. 바로 최근에 까지 내일모래면 서른이 다 되어가는 누나에게까지도!), 평일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자는 것을 야단칠 때... 어쩌면 아버지는 그렇게 교도관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 이외에 나와 어떤 관계도 맺지 않았던 것만 같다.

 

그런데 책의 후반으로 갈수록 결국 '나'라는 주체 안에 아버지의 법이 관철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대한 설명으로 나아간다. 저자 자신이 회고하듯이 나 또한 집에 아버지만 혼자 계실 때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경우 그 반대다.) 이는 아버지가 법과 질서의 상징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법과 질서는 역설적으로 내 안에 '진선미의 구조'를 만들어내고,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계세제적 구조 속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인 가족 내에서 내가 따라야 할 가장 기본적인 롤 모델이 되었다. 저자의 말대로 나는 아버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사회 또는 국가와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경우와 나의 경우는 약간 다른 것 같다. 저자는 아버지를 통해서 그 위의 또다른 아버지를 상정하여 '학교 선생님 - 파출소장 - 지역 군부대 소대장 - ... - 김종필 국무총리 - 박정희 대통령 - 존슨 미국대통령 - 우 탄트 UN사무총장'으로 나아갔다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적어도 우리 아버지는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에게 아버지는 항상 우울한 존재였다. 예전부터 아버지가 나에게 아버지로서 들려줬던 이야기는, 언제나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였는지에 관해서였다. 국민학교 때 3일을 굶어서 학교에서 시름시름 앓았는데 딱하게 여긴 선생님이 일찍 귀가시켰다는 얘기. 집안 형편 때문에 국민학교를 5학년 1학기 까지 밖에 못다녔는데 학교에서 어찌어찌 졸업장은 만들어 줘서 국졸 학력을 갖게 되었다는 얘기. 기타 다른 이야기들도 이와 비슷한 내러티브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미제 포탄에서 나온 부속을 재떨이로 쓰는 아버지를 보고 상상했던 것처럼 행동할 수 없었다. 나에겐 아버지를 무작정 부정하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런 식이다. 이런 식으로...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성격, 말투, 대인관계를 형성하게 된 모든 배경에 대해 하나하나 캐물어 나가야만 했다. 결국 나 또한 저자의 말대로 '동굴 속의 황제' 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어쩌면 난 아버지를 그토록 부정했던 만큼 내 세계 안에서 황제가 되고 싶어했을 지도 모른다. 그다지 붙임성이 좋지도, 말주변이 좋지도 못했던 내가 학교 선생님들에게 그렇게 잘 보이려 노력하고 발표라도 하나 하라고 하면 기를 쓰고 손을 들어 댔던 것도 그래서 일 것이다. 저자의 경우와 전적으로 다른 경우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난 가족을 건너뛰고 학교를 나의 직접적인 아버지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지금껏 내가 다른 욕심은 별로 없으면서도 허영심에 가득찬 지적 욕구로만 똘똘 뭉쳐있는 것도 그래서 일 것이다.

 

그렇게 동굴 속에 철저히 갇힌 나는 대인 관계에 문제가 생길 때면 항상 나의 동굴을 이렇게 왜소하게 만든 가족을 원망했다. 그럴 수록 난 더 깊은 동굴을 파댔다. 아...

 

 

* * *

 

얼마 전에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보면서 그처럼 내 자신에 대한 정신분석학 적인 해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은 알튀세르의 그것보다 내 지금 욕망에 더 적합한 정신분석학적인 해부의 모형을 제시해 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만큼 그의 책은 사람을 더 울렁거리게 만드는 데가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

 

 

일부 발췌

 

 

순수한 사랑이 자신이 도달해야 할 성스러운 성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것이라면, 음담패설적 성 관념은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를 필요로 하는 동굴 속 황제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다.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성은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권위적인 사회일수록 여성은 '성녀 아니면 창녀'의 양극적인 이미지로만 나타난다더니, 나야말로 그런 성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 같은 성 관념은 음란서적을 탐독하고 못된 그림책을 본 데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 뿌리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 집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여자 또는 남자로 행동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결코 서로 성적 표현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일을 하고 아버지는 직장에 다니는 사라밍란 의미에서 부부유별의 성적 표현은 많았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고 질투하며 싸우고 다시 화해하고 기뻐하는 성적 표현은 하지 않았다. 두 분은 하나의 사랑이 시작되고 유지, 발전되어 기쁨을 얻기까지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햇빛과 영양이 필요한지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남녀로서 상호작용하기보다는 각자에게 주어진 길, 여자의 길과 남자의 길을 분담해서 걸었다.
지금도 두 사람은 그렇게 다툰다. 특히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당신은 왜 나를 좀 더 사랑하지 않느냐?"라고 항의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당신은 여자가 그게 뭐냐?"라거나 "니 아버지는 그게 틀렸다."라고 비난한다. 마치 선생님이나 목사님이 말하는 것 같다. 두 사람은 남녀로 맺어진 사람들이라기보다는, 그것보다 더 숭고한 목적이 있다는 듯이 살아왔다.
한마디로 우리 집은 성의 무풍지대였다. 우리 국토의 허리를 가로질러 남북한의 대결을 피하기 위한 비무장지대(DMZ)가 있듯이, 우리 집은 마치 그곳에 성적 접촉을 하면 안된다는 '성의 비무장지대(DSZ)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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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천 생태하천?

내가 일하는 곳 앞에는 대전천이라는 하천이 흐른다.

요즘 이 곳을 생태하천으로 만든다고 공사가 한창인데, 그래서 밖으로 나가면 가는 곳곳 마다

포크레인이 즐비해 있어서 통행 자체가 불편할 지경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이 하천공사에 관한 뉴스가 나왔다.

대강 공사에 차질이 있다는 얘기인것 같던데...

아침 밥을 먹다가 봤는데, 공사 방법에 대한 얘기를 듣다가 밥알을 뿜을 뻔 했다.

이 대전천이라는 데가 워낙 수량이 적어서, 풍부한 수량이 확보되어야

생태하천의 모양새가 갖춰지는데, 그래서 택한 방법이

하류에 있는 물을 상류로 끌어오는 거란다.

 

청계천에서 MB씨께서 했던 그대로

또 빰뿌질로 '생태'하천을 만들겠다는 거다.

내가 환경공학에 무지해서 하는 헛소리일 수도 있겠으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하류에 있는 물을 빰뿌질 해서 상류로 끌어올린다고

수량이 늘어나나?

 

하석상대, 조삼모사...

아 뭐 더 없나? 요딴 빈곤한 사자성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건

그저 내가 '환경공학'에 무지해서일까?

 

이 뉴스를 듣고 있던 우리 아버지께서도 오랜만에 나에게 한 마디 거드셨다.

옛날엔 다 그냥 흙바닥이어서 비가 오면 땅으로 스며들어서 물이 자연스럽게

하천으로 보내지고, 그래서 수량이 어느정도 잘 유지가 되었는데,

요새는 다 시멘트에 아스팔트여서 물이 그냥 하수구로 빠져나가서

수량이 보존이 안된다고....

 

이런 아주 당연한 진리도 모르고

하천 복원한다고 지금 천변을 싸그리 세멘 공구리칠을 하고 자빠졌다.

그러면서 공사 홍보 플랑에는

"멱감고 물장구치던 대전천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요지랄 하고 있다.

 

나 초등학교때만해도 대전천에서 몇번 물장구 치고 놀았던 기억이 나긴 하는데,

요즘엔 그 주변을 자전거 도로 만든다고 다 세멘 칠 해놔서

들어갈 맘도 안나고

그나마 있는 자전거 도로도 날파리들만 잔뜩해서

자전거 타고 달리다보면 입속으로 날파리들이 다 들어온다.

 

요딴 짓거리를 전국적으로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으니

난 그저 썩소를 날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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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김종철,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중

피상적인 물질주의적 시각으로 볼 때는 짐작도 할수 없을 만큼 인간이란 깊고 복잡한 존재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총체성을 말하면서 단순히 경제적 이해 관계에 기초한 사회 역사적 구조에 대한 인식에 머문다면,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문학이 충분히 철저한 인간 이해를 수행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고, 따라서 크게 감동적일 수 는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 현대의 위대한 지적 업적 중의 하나는 인간 행동을 근원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표피적인의식의 수준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심층의 심리 구조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정신분석학의 성과가 아닌가 싶은데요.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환자들이나 노이로제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경우에 그러한 질환은 환자 자신의 유아기의 어떤 경험, 프로이트가 대체로 그런 질환의 원인을 개인차원에서만 탐구하였고, 그런 점에서 철저히 서구 부르주아 과학의 기본 가정을 초월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음에 반하여, 프로이트의 후학이면서 프로이트와는 상당히 다른 길을 간 융의 경우는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다시피, 융은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한 사람이지요.

융이 쓴 <땅과 마음>이라는 글을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현대 미국 백인들의 심층 심리를 면밀히 분석해 보면, 뜻밖에도 그들이 내심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 하면 인디언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네가 사람 이하로 보면서 야만적인  폭력으로 거의 멸종시키다시피 해 온 바로 그 인간 종족이 백인들 자신도 모르게 심층 심리의 가장 내밀한 고셍서는 외경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거지요.  백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 백인들의 무자비한 무력 행사 앞에서 죽어가거나 쫓겨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지만, 거의 완전한 패배속에서도 의연히 위엄을 잃지 않았던 인디언들에게 백인들은 어쩌면 심한 열등감을 느겼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것은 깊은 심층 심리의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백인들 자신이 이것을 인정할 리는 없겠지요. (...)

융이 말하는 지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조금 더 밀고 나가면 하나의 종(種)으로서의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겪어 온 생명 진화의 전체 역사가 각 개인의 심층 심리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러니까 인간으로서 이렇게 직립하기 이전에 하나의 포유류로서, 또 그 이전에는  파충류, 그 이전에는 단순한 세포...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맨 처음 이 지구상에 생명이 싹틀때의 기억, 또는 좀 더 뿌리까지 간다면 생명을 잉태시켜 온 흙이나 물, 바람, 핷빛,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우주 생성의 근원적 기운과 같은 것이 내 기억의 까마득한 심층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고, 그렇게 본다면 나의 자아라는 것과 자아 아닌 것은 엄격히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 불교의 유식학에서는 서양에서첢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로 간단하게  구분하는 수준이 아니고 제1식에서 제8식까지 나누어 이야기해 왔는데요. 대개 우리의 외관을 통한 감각적 체험이 제5식까지의 내용이라면, 그 다음 단계가 우리의 의지적 작용, 감정 생활, 이지적 체험을 관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 다음의 제7식부터가 이른바 무의식이나 잠재 의식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재미있는데, 같은 무의식의 차원이지만 정도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정하는 7,8식으로 구분해 놓았다는 점입니다.

제7식의 범위는 말이지요, 이를테면 생존 본능의 심리라 할까요. 여러분이 잘 아는 죠지 오웰이 쓴 어떤 글에 보면 어느 사형수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요, 이것은 아마 오웰이 젊은 시절 버마에서 영국 식민지 경찰 노릇을 할 때 실제 체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사형수 한 사람이 사형 집행을 당하기 위해서 간수들을 따라 교수대로 가는데, 전날 내린 빗물로 땅이 질퍽해여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사형수는 될수 있는대로 그런 곳을 피해서 마름 땅을 골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쌩각해 보면, 곧 목숨이 끊어질 처지에 있는 사람이 빗가랑이나 신발에 흙물이 투지 않도록 조심한다는 것은 우수운 행동이지만,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취하는 그런 행동이말로 진실한 행동인 셈이지요. 어떻든 불교에서 말하는 제7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식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드러나는 생존 본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본능의 단계보다 더 지독한 차원이 있다고 유식학에서는 보고 있어요. 그것이 제8식, 다른 말로는 알라야식이라고도 하고 또는 종자식이라고도 하는 모양인데요.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 각자의 전생, 금생을 통틀어서 내가 사념으로나 실제 행동으로나 지었던 모든 업이 씨앗이 되어 지금의 내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윤회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고,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자아 개념으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인간과과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는데요. 우리가 보통 갖고 있는 자아 개념, 즉 나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은 이 육신을 경계로 하여 나와 나 아닌것의 분별을 기초로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보면, 이런 식의 분별심에 기초한 자아 개념이 가장 철저하게 지배하는 것은 서구 근대 부르주아 문화의 개인주의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늘상 들어 왔듯이 자기라고 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연기의 법칙에 따라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 생멸한다는 것이지요. 저 자신 옳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연기법이라는 것은 결국 나와 세계와의 불가분리성을 뜻하고 근원적인 일체화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해요. 내 마음 가운데 우주가 있고, 우주는 내 몸, 내 마음이라는 생각도 거기서 비롯하는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하여튼 융의 관점이든 불교적 생각이든 어느 쪽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의 총체적 인격의 구조를 간단히 어떤 결단이라든가 양심이라든가 정의감이라든가하는 이지적, 의지적, 합리적 언어에 의해 다 통제하고 포착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상당히 우직한 착각인것 같아요. 인간성의 구조의 깊이와 복잡성에 대한 탐구가 깊어짐에 따라 "세계의 합리적 조직화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융은 술회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삶의 이성적 기획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인간 능력의 한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보아야겠지요. (93-6쪽)

 

 

 

 

 

아인슈타인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신비적인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모든 참다운 예술과 과학의 원천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을 조금 더 인용해 볼까요? "신비의 감정에 낯선 인간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은 가장 높은 지혜와 가장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며, 우리의 둔한 능력으로는 그것을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느끼는 것 -- 그것은 모든 종교성의 중심을 이룬다. 이런 의미에서만이 나는 경건하게 종교적인 인간에 속하고 있다. 인간 존재는 전체의 일부이다. 자기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서 생각하고 느끼는 경험은 일종의 의식의 광학적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착각은 일종의 감옥인데, 거기서 우리는 개인적 욕망의 세계로만 제한되고, 우리 주변 가장 가까운 몇 사람에게만 애정을 갖게 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과제는 우리 자신을 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비심의 권역을 넓혀서 살아 있는 모든 것, 모든 자연을 그 아름다움 속에 포용해야 한다. 누구도 이것을 완전히 성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취를 위한 노력은 그 자체로 해방의 일부가 되며, 내면적 안전의 토대가 된다."  (87-8쪽)

 

 

 

 

그런데, 그런 문명 사회를 이루는 데 여러 가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빠뜨릴 수 없는 게 바로 문자란 말이에요. 문자가 나옴으로 해서 평등 사회가 무너진 것이에요. 동양에서도 가량 도가 사상은 문자나 지식 행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거부감을 끊임없이 표현해 왔는데, 이것도 그냥 관념적인 문명 비판이라고는 볼 수 없어요. (...) 지금 우리가 당장 문자 없는 삶을 구상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지만, 궁극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상적인 인간 질서, 인간 공동체에 있어서 우리가 누릴 수 잇는 문학 형태는 아마 문자를 벗어난 문학 생활일 거예요.

인도 사람들은 서구 지식인들이 인도의 문맹률이 높은 것에 대해 걱정으 하면, 아니 인도 사람들이 전부 글자를 깨쳐서 신문을 다 보기를 원한다면 히말라야의 나무가 한 그루인들 살아 남겠느냐고 반문한다고 하잖아요. 이런 이야기는 터무니 없는 듯하지만, 앞으로 지구 사회가 나아갸야 할 근본적인 방향에 대해 깊이 시사하는 게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사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종래의 방식대로 지식 생활을 한다면, 지구가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거든요. 집집마다 책이 수백 권씩 있고, 매일 몇 십 페이지나 되는 신문을 잠깐 보고 버리고, 또 매일 같이 수십 장의 종이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면, 지금 인류의 10분의 1이 이렇게 해도 지구가 못 견뎌 하느데, 그런 생활이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겠어요? 조만간 생태계가 붕괴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해요. 그런 점에서 나는 새로운 차워의 구비 문학에 대해, 지금은 공상에 가까운 생각일지 모르나,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생태학적 사고라는 것은 문명화 이후 인류가 당연지사로 여겨온 관습과 가치 전부를 뿌리로부터 다시 검증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문자 중심의 문명 생활의 문제도 근본적인 각도에서 새로이 짚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128-9쪽)

 

 

 

 

그런데, 요즘 어디서 읽은 내용입니다만, 독일 튀빙겐 대학의 심리학 연구팀이 20년 동안 조사를 하고 연구 결과를 발표한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연평균 1퍼센트의 비율로 청소년들의 감각 능력이 퇴화해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난 20년에 걸쳐 그 이전에 비해 20퍼센트나 감각이 둔화되었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미세한 소리도 잘 들을 수 있었는데, 요즈 세대는 어지간한 고함을 지르지  않으면 대뇌를 뚫고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뇌간에 망상 구조라는 것이 있는데 그게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반응하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해요. 예전 청소년들에게는 조그마한 소리도 그 망상 구조에 반응을 일으켰는데, 지금은 작은 소리들은 아예 거기를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충격적인 큰 소리들만 들리는 것이죠. 시각 능력도 그래요. 전에는 가령 붉은 색 계통이라면 360개나 가려 볼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붉은 색 중 분간할 수 있는 것은 100개 정도로 줄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뻘건 색깔이 아니면 식별하지 못한다는 얘기에요. 이런 보고 내용을 보고 새삼 놀랐습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모양을 보면서, 전자 오락실의 굉장한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든지, 늘상 소음에 가까운 음악을 즐겨 듣는 것을 보면서 대충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이게 과학적으로 증명된 거예요. 이미 감각이 둔화디어 아주 충격적인 것들에만 반응할 수 밖에 없게 된었다면, 그 심성은 자연히 거칠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사실이 게 제일 문제란 말이죠. 하기는 20년 전의 사람들도 그 보다 훨씬 옛날 사람들에 비하면 무척 감각이 둔화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지난 20년이 인간 역사 전체를 통해서도 가장 급격하고 가장 심각하게 환경이 변화하고 손상되어 온 시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시기에 아마 감각 능력에 가장 급격한 쇠퇴가 일어났다고 볼수 있겠지요.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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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소멸

지난 일요일엔 오랜만에 녹색평론 대전독자모임에 참석했다.

이얘기 저얘기 하다보니 6.25와 월남전을 겪은 한국사회 극우파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그 때 한분이 이런 얘기를 했다.

 

"그런 분들은 스스로 몸에 각인된 트라우마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정치적 설득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는것 같아요. 그래서 레드 컴플렉스같은 문제는 오히려 이런 나이 드신 분들이 생물학적으로 소멸되는 시점 이후에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하네요."

 

즉 반공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솔까말'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들을 둘러싼 정치적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즉 이런 분들이 죽기 전에는 레드 컴플렉스가 해결될 수 없다는 말이라기 보다는 6.25를 통해 형성된 냉전적 사고방식은 사실상 '생물학적으로' 소멸되고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되겠다.

 

이것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 진보신당 제2창당대회에서 강령문제를 토론했을 때이다. 김상봉 교수가 주축이 되어 작성된 강령에는 통일문제에 대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한다'라고 다소 원론적인 입장이 담겨 있었다. (이것저것 부연설명이 더 있긴 했는데 뭐 지금 중요한 내용은 아니고...) 그런데 이 내용에 대해 한 대의원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며 수정 안건을 냈다. 지금 기억으로는 '민족공동체 지향'이라는 표현을 '인류공동체 지향'으로 고치자고 했던 것 같다. 표결에서 수정 안건이 부결되긴 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찬성표를 던진 대의원들 대부분은 예전 사회당 출신이었다더라.

 

어찌하다보니 최초 수정안건을 냈던 대의원과 얘기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분의 생각은 대충 이랬다. 분단이라는 문제가 아픈 역사의 기억이긴 하지만 그것이 한국사회의 모순이라고 볼 수는 없다. 분단 이후 60년이 넘는 기간동안 서로 다른 체제를 살아오면서 남과 북은 사실상 남이 되지 않았느냐? 이런 상황에서 통일을 지향한다는 것 자체가 억지스러운 민족주의일 뿐이다. 이산가족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 분들도 몇 십년 안에 이 땅에 안 계실 분들이다. 그분들의 후손들은 사실상 분단의 아픔 같은 것을 모르는, 아니 그것과 이질적인 경험을 겪어왔던 세대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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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강제체취법, 국무회의 통과

조두순, 강호순 DNA 보관된다 (연합뉴스, 10.20)

 

 

또 이렇게 은근슬쩍 법 하나를 날치기 하려 한다. 아직 국무회의에서만 통과된 것이라고는 하나 국회에서는 어떨까? 요새 하도 싸울 일이 많아서 이런 것 정도는 여론에 묻어가는 흐름으로 그냥 가뿐하게 통과될 것 같은데... 실제로 국회의원들도 이런 사안에 별로 관심이 없을 것도 같고...

 

이런걸 보면 명박 정부는 더도 덜도 말고 정확히 포퓰리즘 정권인듯 하다. 그들은 정확히 대중의 정념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 연쇄살인범, 아동성폭행범을 때려잡아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니까 이들을 때려잡을 쇠몽둥이를 준비해 주시니, 국민들이 박수치고 지지율을 올라가고... 뭐 요딴 나라가 다 있나?

 

대체 강력범죄 잡는 거랑 DNA 보관하는 거랑 무슨 상관일까? 이런식으로 점점 DNA정보를 국가기관이 독점하기 시작하면 DNA를 통한 계급분할이 벌어질 것이다. 강호순, 조두순과 DNA가 비슷하면 범죄 가능성이 높다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까 두렵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였던가? 영화에서도 가끔 이런 상황이 다뤄지는 것 같던데... 어쨌든 (좀 수그러든 쟁점이긴 하지만) 사형제 폐지 문제보다 이런 사안이 더 시급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언론에서도 이런 걸 보도할꺼면 보관된 DNA가 어떻게 사용되며, DNA 정보에 따른 피의자 처리 여부는 어떻게 되는 건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야 할 거 아닌가?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것이라면 법안 초안은 다 있을 텐데... 그런 정보도 못 얻나? 이 나라 언론에게 심층보도 따위를 주문하는 내가 바보지... 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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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관료를 위한 힘찬 응원가,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

 

 

 

요즘은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말이 진보라는 말 만큼이나 진부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그 재구성의 내용들이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것보다 못한 것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바람을 타고 고개를 내미는 사민주의 논의와 함께 주목받고 있는 장하준의 경제학도 비슷한 케이스란 생각이 든다. 아니 어떤 면에선 경악스럽기까지 한 측면도 많다.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은 '진보의 재구성'의 요소들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경악스러운 논의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의 전체적인 논의 속에서 계속 눈에 걸리는 것은 사실상 그가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다른 목소리를 통해 같은 말을 한다'. 그러면 우선 그의 논리 구조를 따라가 보자. 그는 순수한 의미의 '자유시장'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상 모든 '시장'의 형성에 있어서 어떤 사회에서도 국가의 개입을 배제하고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난 여기까지는 전혀 색다를 것이 없는, 진보학계에서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란 생각이 드는데, 왜냐면 이런 사실은 장하준이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칼 폴라니가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라는 허상을 공격하면서, 그리고 쉬잔느 브뤼노프가 국가와 자본이라는 머리 두개 달린 독수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미 깨뜨린 논리이다. 물론 폴라니나 브뤼노프를 굳이 언급하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어찌되었건 이 정도로 뭐 대단한 사상적 진전을 본 것마냥 오바할 거 하나 없다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가 '자유시장'이라는 베일에 감춰진 '국가'라는 마피아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이 국가를 미화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보통 신자유주의의 선봉장들은 국가를 시장경제의 해가 되는 존재로 인식한다.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장하준은 폴라니나 브뤼노프처럼 사회의 파멸을 초래하는 시장경제의 성장에 동조한 국가의 역할을 폭로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전에 국가가 엄청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고전파 경제학이 경제성장을 위해선 국가의 역할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장하준은 같은 이유로 국가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국가가 암암리에 시장경제 활성화를 위해 해 왔던 '긍정적인 역할'들을 인정하고 이를 확대하자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간간히 심지어 구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계획경제에도 긍정성을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마치 허무개그를 보는 것만 같다. 장하준은 초국적 기업에 대한 전통적 신자유주의자들(신고전파, 오스트리아학파, 후생경제학 등)의 주장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자랑하는 외국인 직접투자는 사실 선진국 내부에서만 발생했고 실제 개도국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고 말한다. 실제 신자유주의가 관철되는 과정에서 산업부문에서의 직접투자보다는 금융에서의 포트폴리오 투자 같은 간접투자가 증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내가 장하준에게 묻고 싶은 말은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이다. 그는 줄곧 강조하는 산업정책의 발전을 위해서 이런 부문에까지 해외 자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산업부문에도 외국자본이 직접개입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자? 뭐 이런건가?

 

나의 이런 의문은 뒷부분으로 가면 말끔히 정리된다. 그는 초국적 기업  투자를 촉진하는 것은 규제완화 조치들이 아니라 국내정치적 안정성이라 주장한다. 왜냐면 실제 규제완화 여부와 상관없이 개도국의 기업투자 유치 실적은 늘지 않았고, 오히려 선진국에서만 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171쪽)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주도하는 '전략적 산업정책'을 통해 국제적 조건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앞에서 그의 주장이 '다른 목소리로 같은 말하기'일 뿐이라고 일갈한 이유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가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자나 장하준 자신이나 모두 초국적 기업 투자 자체는 '선'이라는 인식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신자유주의자는 규제완화를 주장하고 장하준은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주장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식이라면 사실상 세계적으로 '순수한 의미의' 신자유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20세기 말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진기지라고 할 수 있는 남미에서도 워싱턴 컨센서스를 수용하는 친미세력의 정권 장악이라는 국내정치적 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NAFTA도 체결하고, 아옌데도 때려잡았던거 아닌가? 물론 이 당시 남미의 정치 상황이 매우 불안정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하준이 박정희 정권 당시 한국 정치 상황을 안정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면 당췌 이 양반이 생각하는 '안정'이 뭔지 아리송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 신자유주의자들도, 장하준도 국가주의자이다. 다만 장하준이 좀 더 솔직할 뿐이다. 여기서 장하준이 어떤 국가주의자인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기술관료 즉, 테크노라트에 대한 비판이 주되게 제기되고 있는데, 장하준은 정확히 이런 테크노라트들의 치어리더다. "선별적 산업, 무역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경제학자로서의 능력보다는 오히려 관리자로서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229쪽) 이딴 식이라면 어떻게 박정희 신드롬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 장하준은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에겐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장하준의 테크노라트를 위한 응원가는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는 중국, 한국, 폴란드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초국적 기업은 매몰비용의 문제 때문에 정부의 정책전환에 불만을 가지고 자금을 회수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초국적 기업을 상대로 해당 국가 정부가 다양한 협상 카드를 제시할수 있고, 협상 과정에서 초국적 기업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165-167쪽) "그러니 이 땅의 모든 기술관료들이여! 두려움을 버리고 당당히 나아가라! 전 세계 자본에게 당당히 호객행위를 하라!"

 

한 학생단체에서 낸 팜플렛을 보니까 장하준을 비판하면서 그의 입장이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하던데, 솔직히 난 이런 비판도 좀 오버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가 만약 현시기 자본주의가 위기라고 생각한다면 그 의미가 이 단체가 생각하는 '위기'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일테고, 그렇기 때문에 장하준은 (이 단체가 생각하는) 위기를 극복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단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극복의 방향은 '대안세계화'인데, 장하준은 대안세계화 정도되는 대안 논의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거다.

 

정확히 이런 수준에서, 노무현은 장하준의 책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결국 그놈의 '진보의 재구성'을 이루기 위해선 장하준도 노무현도 넘어서는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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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장애학 함께 읽기>

 

 

약간의 변명

 

내가 그의 책에 논평하는 것은 적절한 것일까? 장애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사실상 전무한 국내 좌파의 토양 위에서 그나마 장애와 관련해서 의미있는 글들을 써왔던 수유+너머의 고병권마저도 이 책의 추천사를 통해 "사실 내가 김도현의 책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장애 문제에 관한 한 그는 내 교육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차후 문제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고병권의 말을 기준으로 하자면 내가 '서평'이라는 큰 타이틀을 걸고 '낙서' 수준으로라도 글을 찌끄리는 것은 상당히 발칙한 생각이겠지만, 버스비 천원이 아까워 3-40분 거리 정도는 가뿐하게 걸어다니는 내가 만원이 넘는 돈을 투자해 이 책을 샀으니 인터넷 쇼핑몰에 상품평 올리는 사람들마냥 몇 마디 코멘트 할 자격은 있는 것 같다.

 

일단 뭔가 평을 하려면 해당 주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다른 문헌들, 특히 논평하려는 책과 다른 관점을 가진 문헌들과 비교하는 것 정도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더군다나 나 같은 풋내기 독자가 이 책을 평하는 글을, 심지어 낙서수준으로라도 쓴다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사실상 국내에서 장애문제를 자기 학문적 과제로 다루는 사회복지학이나 특수교육학 전문서적을 제외하고 대중적으로 읽을 수 있는 장애(학) 관련 서적은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내가 봤을 때 (물론 공부를 전혀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장애복지 어쩌구 하는 이름을 달고 있는 책들은 그냥 '장애'라는 단어를 '노인'이나 '아동' 등으로 바꿔놓으면 또 아주 새롭고(?) '훌륭한'(??) 이론서가 될 만큼, 장애문제 자체에 대한 고민은 전무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사정이다보니 김도현의 <장애학 함께 읽기>의 참고문헌 목록에도 (국내출판 문헌만 봤을 때) 전공서적스러운 몇 개의 문헌과 저자 자신이 이전에 쓴 다른 책을 제외하고는 장애문제 자체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결국 이 책은 전문 연구자도 아닌 저자가 거의 맨땅에 해딩하는 식으로 해외 원문서적 찾아가며 읽어낸 장애학의 정수를 그의 말마따나 소화한 만큼 보여주는, 그래서 완전 알짜배기로만 뭉쳐있는 그런 책이다.

 

 

 

내가 읽은 <장애학 함께 읽기>

 

이 책의 1부는 주로 '장애' 자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와 이 중에서 특히 주로 사회적 생성주의 모형에 따르는 '사회적 장애이론'에 대한 소개에 할애하고 있다. 이에 근거한 관점은 그의 전작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메이데이, 2007)에서도 얼마간 제시되고 있는 것인데, 이 책에서는 주로 영국 리즈대학 장애학연구센터의 연구성과들을 중심으로 이해를 돕고 있다. 하지만 이론에 대한 소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다양한 운동세력들(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몸의 사회학 등)간의 논쟁을 덧붙이면서 저자 자신이 생각하는 장애학의 지평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나아가 2부에서는 장애학이 사회운동 속에서 실현되기 위한 다양한 논의들을 엮어놓는데, 이 부분에서는 특히나 저자의 폭넓은 독서편력이 돋보인다. 그는 최근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대안사회체제에 대한 논쟁에 장애문제가 논의될 수 있는 방식, 그 중에서도 특히 장애와 노동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폴 애벌리의 '노동거부'와 '기본소득'론, 그리고 이에 대한 우회적 비판의 경로로서 울리히 벡의 '새로운 노동세계'건설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며 이 둘을 경쟁시킨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서는 제도정치와 비제도정치의 결합 또는 정당운동과 사회운동의 결합이라는 오래된 논쟁을 장애인운동의 시각에서 다시 읽어내고 있다.

 

노회찬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여성학을 읽고 젠더가 배제된 정치는 진보일 수 없음을 깨우쳤듯이, 이제 우리는 장애학을 함께 읽고 장애가 배제된 정치 또한 진보일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나는 이 책이 노회찬의 이 말을 더 근원적인 물음에 닿게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장애인운동을 전체 사회운동에 어떤 자리에,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라는 물음. 젠더가 배제된 정치여서는 안된다고 이해했다면, 이는 곧 여성운동이 사회운동의 단순한 '부분집합'이 아니라 사회운동 자체의 성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핵심'임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페미니즘을 우리 운동의 전략적 심급으로 사고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장애인운동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운동사회 전반적으로 이런 시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저자가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말미에서 발리바르가 제기했던 '노동과 자본의 모순으로 포섭할 수 없는 인간학적 차이'라는 시각을 환기시키면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장애를 인간학적 차이로 이해하고 이로 인한 모순들이 다른 어떤것으로 전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구조를 이해하는 노력이 아직 많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일전에 나는 어떤 활동가가 여성운동이 왜 전략적 심급을 갖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이유를 장애인운동과 다르게 여성운동은 보편적일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즉, 장애인운동은 특수한 사례이기 때문에 전체운동의 질을 결정할 수 있는 전략적 심급이 아니라는 것이고, 여성운동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하나하나 반박하고 따지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기에 넘어가긴 하겠지만, 어쨌든 <장애학 함께 읽기>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전체 사회운동 내에서 장애인운동의 근원적 위치를 물을 수 있는 통로를 만났다고 할 수 있겠다.

 

반면 2부를 읽으면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장 '장애 정치' 부분은 장애정치를 다룬다기 보다는 일반적인 사회운동론을 다룬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도 그럴것이 여기서는 주로 20세기 사회주의 운동 탄생 이후 끊임없이 제기되는 논쟁인, 당이냐 사회운동이냐라는 쟁점을 환기시키고 여기에 장애문제를 살짝 얹어놓는 듯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아쉽다'라는 느낌이 책 자체에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책의 논의를 둘러싼 장애정치의 발전 수준에 대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장애정치에 대한 논의가 이런식으로밖에 갈 수 없는 것은 저자 자신의 논의력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장애운동이 세계 어디에서도 정치무대의 제대로된 논의 테이블에 올라온 적이 없는 척박한 환경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자 자신도 불가피하게(?) 장애운동 외부의 이론적 자원들을 동원했던 것일테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렇게 다양한 이론적 자원에 근거를 둔 논의 방식이 장애인운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밑거름으로 기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활동가의 롤모델

 

어쩌다보니 난 지금까지 김도현씨가 낸 3권의 책을 다 사보게 되었다. 근데 좀 씁쓸한 것은 그의 책 세권이 내가 지금까지 본 장애운동 관련된 책 중에 한권 빼고 나머지 다 라는 사실이다. (그 한권은 삼인출판사에서 나온 <나는 나쁜 장애인이고 싶다>이다) 내가 그 동안 책을 많이 본 편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장애문제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관심을 두고 있던 편이다. (그냥 '관심'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런데 내가 본 4권에 장애문제 관련된 책 중에 3권을 김도현씨가 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장애운동의 이론화, 대중화를 위해서 그 혼자 독고다이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공부하고 투쟁하는 사회운동가의 전형적인 롤모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참 그런 의미에서 김진균상 같은 것은 정말 아무한테나 주는 상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여하간에 이 허섭스러운 서평, 아니 낙서를 보시는 분들에게 <장애학 함께 읽기>라는 양서를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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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중참여경제론>

구르는돌님의 [DJ 경제학] 에 관련된 글.
 

 

 

책을 읽은지는 한달이 다 되어가는데, 이제서야 후기를 남긴다. 사실 그냥 김대중의 경제학이기 때문에 관심이 간 것도 있지만, 하버드대학에서 교재로 쓰인다는 책이라길래 "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라는 생각을 갖고 책을 펼쳤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나서야 대학에서 교재로 쓰는 책들이 항상 다 좋은 책은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하버드라고해서 별 수 있겠나...

 

본문의 내용에 왈가왈부하기 전에 고인에게 괜히 몇 가지 따지자면,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의 바탕이 된 논문을 미국의 교수들이 읽고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책으로 출판하자고 제의했다는데, 그 교수들이 대체 누구인지 전혀 얘기를 안한다. 그냥 '저명한 교수'라고만 말한다. 뭐야? 이름이 '저명한'이야? 게다가 남의 말을 인용한 부분들에서 한 번도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처음에 논문으로 쓰여졌던 것을 대중적 출판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부러 뺀 건가 싶으면서도, 아무리 그래도 이게 뭐 신변잡기 농담따먹는 책이 아닌 이상 기본적인 것은 지켜야 하지 않나 싶다. 그가 책 전체에서 출처를 밝힌 부분은 오직 숫자와 표로 이루어진 통계자료들 뿐이다.

 

<대중참여경제론>에 담긴 김대중의 경제사상을 몇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한국경제는 지금껏 정부주도의 관치경제의 심각한 폐해를 겪어왔다. 관치경제는 자유로운 경제주체의 활동을 제약하고 독재정권과 유착된 일부 재벌에게만 편향적으로 재정분배가 이뤄지도록 했다.  2) 정부에 의해 인위적으로 금리가 낮게 유지됨으로 인해서 은행으로 돈이 모이질 않고, 게다가 부족한 은행자금의 기업 대출과정에 정치권력이 개입함으로써 대출을 통해 사회적 부가 대거 재벌로 이전된다. 은행을 통한 자산증식의 경로를 찾지 못한 돈들은 대부분 부동산 투기로 몰려 인플레이션을 조장한다.  3) 결국 이런 정부주도 경제성장 정책은 일부재벌과 대토지소유자의 이익만을 보장하고 중소기업과 근로자의 이익을 배제한다.  4) 한국이 기존의 경제성장의 성과를 이어받아 '세계 8대 선진국에 들려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대토지 소유자에게 중과세를 매겨 불로소득을 차단함과 동시에, 금리 자유화-한국은행 독립, 그리고 법인세 인하 등을 통해 시장경제를 원활히 작동케 해, 금융시장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이런 논의 속에서 얼마간 정치적인 결론도 도출되는데, 이는 어느정도 87년 이후 정세에서 김대중이 생각하는 한국사회의 대립전선의 재구축에 대한 주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편에는 권위주의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일부 재벌과 대토지 소유자가 한 편에 있고, 다른 한편엔 건전한 기업가(중소기업)과 근로자, 그리고 민주화 세력이 버티고 있다. 후자의 세력은 지금껏 관치경제의 폐해로 인해 성장이 발목잡힌 이들로서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경제주체이다. 이들은 성장된 금융시장에 동등한 투자자로서 활동할 수 있으며, 특히 근로자들은 소규모 다수조합으로 활동하여 국민경제에 제동을 걸기보다는 광범위한 전국적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국가적 단위의 협상에 참여해 자신들의 법적 권익을 지키고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요로한 책의 내용에 근거하여, 나는 김대중이 정말 준비된 대통령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저런 내용은 IMF가 남한에 요구했던 경제개혁 조치의 주요 내용과 거의 흡사하다. 그리하여, 김대중이 IMF를 통해 신자유주의를 도입했던 것이, IMF의 강요때문이었다고 항변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아주 중요한 증거자료가 될 것이다. 니들이 김대중을 그렇게 떠받들고 싶으면 최소한 선상님이 쓰신 책 정도는 읽어보고 떠들어야지...

 

이 책을 읽으면 김대중이 추진했던 일련의 경제개혁 조치들이 IMF 사태에 의해 우발적으로, 자기 의도와는 다르게 추진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전국단위 노동조합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실제 파견법, 정리해고법과 맞거래된 민주노총의 합법화로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그의 사상과 정치적 실천 사이에 놓인 잘 뻗은 고속도로가 참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항간에는 김대중이 2000년도에 생산적 복지를 내걸고 기초생활보장법 도입한 때에 정권 초반 신자유주의 정책과 단절하고, 그의 원래 경제사상이라 할 수 있는 대중경제론을 실현해 보려는 시도였다고 말하는 놈도 있더라. 그러나 이 말을 김대중이 대선 첫 도전 때 낸 <대중경제 100문 100답> 집필을 막후에서 지원했다는, 심지어 요즘엔 그 때문에 대필 논란까지 제기되고 있는 박현채 선상님께서 듣는다면 저승문을 박차고 뛰쳐나오고 싶으실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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