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시간 2009/04/19 22:55

고백록

'아버지여, 내가 진리를 찾고 있사오나 그것을 확인하지 못하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시며 다스려 주소서. 우리가 소년시절 배웠으며 또한 아이들을 가르쳤던 대로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 즉 세 가지 시간이 있지 않다고 가르칠 자가 누구옵나이까? 다른 두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현재의 시간만 존재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나이까? 아니면 그것들이 존재하나이까? 그러나 시간이 미래로부터 현재가 될 때, 어떤 은밀한 곳에서 나오며 현재의 시간으로부터 그것이 과거가 될 때 어떤 은밀한 곳으로 물러가는 것이옵나이까? 미래를 예언하던 사람들은 아직 현존하지 않는 예언한 사물들을 대체 어디서 보았나이까? 존재하지 않는 것은 볼 수 없음이니이다. 그리고 지나간 사물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에서 그것들을 보지 않는다면 마치 그것이 참된 것인 양 말할 수 없었나이다. 이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어떤 식으로든 식별될 수 없나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존재하나이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신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존재의 근본 구조를 해명한 '삼위일체론', 교회와 로마 제국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종말론적 역사 철학의 기초를 확립한 '신의 나라'를 저술했고, '시편 강해' '요한복음서 강해'를 비롯해 이단에 대한 논박을 다룬 책 등을 펴내 서방 교회의 아버지로서 가톨릭 신학의 버팀목이 된 인물이다. 특히 '참회록'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 '고백록'은 단순한 회고록이라기 보다는 신에게 이르는 자신의 내적 영혼에 관한 심오한 상념들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내용상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1단락은 제 1권으로부터 제9권가지 이른바 자서전적 회상 부분으로서, 출생에서부터 회심에 이를 때까지 방종한 생활을 하며 지었던 최를 고백하고, 이것을 통해 주어진 신의 은총을 찬미하는 부분이다. 제2단락은 제10권 부분으로, 현재 히포의 주교로서 신에게 감사함을 고백하면서 자서전적인 앞부분과 철학적인 뒷부분의 내용을 이어 주는 부분이다. 그리고 제3단락은 제11권으로부터 제13권까지로서, 내용적으로는 '창세기' 제1장에 대한 주해를 통해 창조자로서의 신을 찬미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주제적으로는 기억과 시간,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심오한 시간론 사상이 담겨 있는 부분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 사상을 깊이 있게 음미해 볼 수 있다.

 

주님에 대한 끊임없는 찬양이 이어지는 기독교 서적을 종교적 신념이 없는 자가 읽기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특히 중간중간 언급되는 그의 여성관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헌신적인 어머니상과  유혹적인 창녀, 단 두 종류로 분류될 뿐이니 아무리 시대를 감안해도 살짝 짜증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 잘못을 솔직하게 돌아보고 참회하는 모습은 종교적 입장과 시대를 떠나 감동을 안겨 준다. 또한 한 인간의 성장과정을 통해 구체적인 생활과 인식의 내용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변화하게 되는지 엿볼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 독자 또한 자신의 삶과 인식의 틀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한번쯤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모든 것은 신에게 환원된다. '신이 무엇을 만들지 않았을 때 시간이란 없었으며 신이 이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신과 영원히 공존하는 시간은 없습니다.  신은 영원히 계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단언할 수 있다면 세계에 대한 복잡한 해석과 고민은 필요치 않을지도 모르겠다. 신이 이 모든 것을 창조했으므로 그 뜻에 따라 살면 그만일 것이다. 신의 영역, 그곳은 아직 내가 알 수 없는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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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9 22:55 2009/04/19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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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순간 2009/04/18 20:14

왜 슬픈가?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 고정희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 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 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 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는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둘 수는 없습니다.

.........................................................................................................................................................................................

 

왜 슬픈가?

목까지 차오르는 슬픔을 짓누르며 한번 물어나 보자 

왜?

도대체 왜?

이유는, 

생각 못해

말 안하고 싶어

그냥 그래

젠장,  슬픈대로 내버려 둬

지금 필요한 건 약간의 술과 시간일 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꺼야

난 원래 이성적인 인간이 못 돼

오랫동안 강철같은 인간을 꿈꿨지만

단지 꾸며낸 허상일 뿐이지

소심하고 나약하고 겁많은 인간,

그게 나야

그래서 견디기 버거운 거야

좀 더 뻔뻔해지면 좋을 텐데

좀 더 단단해지면 좋을 텐데

끝도 없이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지고 싶은,

서글픈 봄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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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8 20:14 2009/04/1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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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순간 2009/04/12 22:06

술 먹고 우는 여자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 <출처>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

 

이 좋은 봄날, 강의실에서 하루를 보냈다. 긴 그림자처럼 축 늘어져 집으로 돌아와 빈 잔에 잔뜩 술을 붓는다. 괜시리 슬프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날인데 술이 고프고 허겁지겁 그러나 쉽게 취하고 만다. 아마 울고 싶었나 보다. 옛날 노래를 흥얼거리며 눈물을 쏟는다. 문득 외롭다는 생각, 지나간 시간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을 감당하지 못하고 심장은 이내 젖어들고 만다.

 

술먹고 우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예전에 술만 먹으면 훌쩍이는 여자 선배가 있었는데, 술을 거의 안마시고 못마시는 나는 '왜 그럴까' 의아하게 여기곤 했었다. 하지만 차츰 살면서 혼자 질질 짜는 일이 많아졌고 벗삼아 술도 한잔씩 기울이게 되면서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태연한 척 살아보지만 슬픔을 주체할 수 없는 날엔 결국 한두잔쯤 마시게 되는 것이다. 그쯤이면 충분하다. 차곡차곡 쟁여둔 외로움과 슬픔을 시뻘건 얼굴로 꺼이꺼이 토해내기 위해선 말이지.

 

슬픔아, 날 내버려두렴

그냥 이대로 두렴

시간속에  비켜가겠지

내 아픈 기억들

이제 빛바래 소멸될거야

차라리 얼른 늙어 버릴까

평안을 얻을 수 있다면

술병을 내던지고

로켓처럼 밤하늘로 날고 싶다

더럽게 욱신거리는, 이 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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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2 22:06 2009/04/12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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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순간 2009/04/09 23:03

내가 돈 벌러 간 사이

 
                           우리들의 죽음 
 
                                                              - 정태춘
 
(낭송)맞벌이 영세 서민 부부가 방문을 잠그고 일을 나간 사이, 지
하셋방에서 불이나 방 안에서 놀던 어린 자녀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
하고 질식해 숨졌다.
불이 났을 때 아버지 권씨는 경기도 부천의 직장으로 어머니 이씨
는 합정동으로 파출부 일을 나가 있었으며, 아이들이 방 밖으로 나
가지 못하도록 방문을 밖에서 자물쇠로 잠그고, 바깥 현관문도 잠
가 둔 상태였다. 연락을 받은 이씨가 달려와 문을 열였을 때, 다섯
살 혜영양은 방 바닥에 엎드린 채, 세살 영철군은 옷더미 속에 코
를 붙은 채 숨져 있었다. 두 어린이가 숨진 방은 3평 크기로 바닥
에 흩어진 옷가지와 비키니 옷장 등 가구류가 타다만 성냥과 함께
불에 그을려 있었다.
이들 부부는 충남 계룡면 금대2리에서 논 900평에 농사를 짓다가 가
난에 못이겨 지난 88년 서울로 올라왔으며, 지난해 10월 현재의 지
하방을 전세 4백만원에 얻어 살아왔다. 어머니 이씨는 경찰에서 "평
소 파출부로 나가면서 부엌에는 부엌칼과 연탄불이 있어 위험스럽
고 밖으로 나가면 길을 잃거나 유괴라도 당할 것 같아 방문을 채울
수 밖에 없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평소 이씨는 아이들이 먹을 점심상과 요강을 준비해 놓고 나가 일
해 왔다고 말했다. 이들이 사는 주택에는 모두 6개의 지하방이 있으
며, 각각 독립 구조로 돼 있다.

(노래)젊은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고
어머니도 돈 벌러 파출부 나가고
지하실 단칸방에 어린 우리 둘이서
아침 햇살 드는 높은 창문 아래 앉아
방문은 밖으로 자물쇠 잠겨있고 윗목에는 싸늘한 밥상과 요강이
엄마, 아빠가 돌아올 밤까지 우린 심심해도 할게 없었네
낮엔 테레비도 안 하고 우린 켤줄도 몰라
밤에 보는 테레비도 남의 나라 세상
엄마, 아빠는 한 번도 안 나와 우리 집도 우리 동네도 안 나와
조그만 창문의 햇볕도 스러지고 우린 종일 누워 천정만 바라보다
잠이 들다 깨다 꿈인지도 모르게 또 성냥불 장난을 했었어

배가 고프기도 전에 밥은 다 먹어치우고
오줌이 안 마려운데도 요강으로
우린 그런 것 밖엔 또 할 게 없었네 동생은 아직 말을 잘 못하니까
후미진 계단엔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고 도둑이라도 강도라도 말야
옆방에는 누가 사는지도 몰라 어쩌면 거긴 낭떠러인지도 몰라

성냥불은 그만 내 옷에 옮겨 붙고 내 눈썹, 내 머리카락도 태우고
여기저기 옮겨 붙고 훨~ 훨~타올라 우리 놀란 가슴 두 눈에도 훨~훨
~
(엄마, 아빠! 우리가 그렇게 놀랐을 때
엄마, 아빠가 우리와 함께 거기 있었다면...)
방문은 꼭 꼭 잠겨서 안 열리고 하얀 연기는 방 안에 꽉 차고
우린 서로 부퉁켜 안고 눈물만 흘렸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낭송) 우리 그렇게 죽었어
그 때 엄마 아빠가 거기 함께 있었다면..
아니, 엄마만이라도 함께만 있었다면..
아니, 우리가 방 안의 연기와 불길 속에서 부둥켜 안고 떨기전에
엄마, 아빠가 보고싶어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기 전에
손톱에서 피가 나게 방 바닥을 긁어대기 전에
그러다가 동생이 먼저 숨이 막혀 어푸러지기 전에
그 때 엄마, 아빠가 거기에 함께만 있었다면..
아니야, 우리가 어느 날 도망치듯 빠져나온 시골의 고향 마을에서도
우리 네 식구 단란하게 살아 갈 수만 있었다면..
아니, 여기가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축복을 내리는 그런 나라였다면...
아니, 여기가 엄마, 아빠도 주인인 그런 세상이었다면..
엄마, 아빠! 너무 슬퍼하지마
이건 엄마, 아빠의 잘못이 아냐
여기, 불에 그을린 옷자락의 작은 몸둥이, 몸둥이를 두고 떠나지만
엄마, 아빠! 우린 이제 천사가 되어 하늘 나라로 가는 거야
그런데 그 천사들은 이렇게 슬픈 세상에는 다시 내려 올 수가 없어
언젠가 우린 다시 하늘나라에서 만나겠지
엄마, 아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운 가장 예쁜 말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이제, 안녕... 안녕...
 
....................................................................................................................................................................................
 
아이가 아팠다.. 이른 아침 분주하게 출근해서 일을 시작하는 동안, 혼자서 학교갈 준비를 하던 아이는 머리와 배가 아파왔고 마침내 아침으로 먹은 죽을 고스란히 토했다. 울먹이는 아이의 목소리에도 이미 시외 밖에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저 얼른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말하고 보건실에 누워있으라는 것 뿐.  그러나 알았다며 전화를 끊는 아이의 목소리에는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조용히 밀려드는 무기력함 -  얼마 후 상태를 알고 싶어 학교 보건실로 전화해봤지만 아픈 아이만 눕혀둔 채 보건교사는 내내 자리에 없었다. 결국 시간여유가 있는 친구에게 병원으로 데려가 줄 것을 부탁했고 다행히 두통 외에는 상태가 호전되어 집에서 쉬게 됐다. 물론 혼자서 말이다.
 
비극적인 노랫말에 눈물 흘리며, 그러나 내가 아이를 키울 때쯤이면 설마 이런 일은 없겠지,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인가. 나는 알 수 없었다. 불과 십수년 후에 내 현실로 닥쳐올 것을. 지금의 모습을 그때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런 인간의 무지몽매함이 현실보다 비참한 미래를 빚어내는 거겠지. 막연한 환상 따위, 가차없이 버려야 하는 걸. 
 
퇴근후에 돌아와보니 아이의 상태는 좋아져 있었다. 다행이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 있지만 한켠에 접어둔다. 우리 둘다 현실을 인정하고 극복하면서 함께 성장해가야 한다. 아이는 아이라서 힘들겠지만 그 또한 어떤 식으로든 감당해야 하리라. 하지만 슬픈 일이다. 아이가 아플 때 당장 병원에 데려갈 수 있는 부모가 과연 얼마나 될까? 절박한 상황이었다면 직장이고 뭐고 포기해야 가능했을 것이다. 엄마 아빠 또는 양육자가 직장에 가 있는 동안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 걸까? 우리 아이는?? 현실도 대안도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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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9 23:03 2009/04/09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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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순간 2009/04/08 22:09

신문엔 날마다 꽃잔치인데

                                            길


                                                                   - 박영근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

 

신문엔 날마다 꽃잔치인데 현실은 삭막하다. 아이 손을 잡고 근처 공원 바람이라도 쐬고 싶은데 통 시간을 낼 수 없다. 온종일 노동으로 지친 몸은 주말 공부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숙제며 발표 준비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말도 쉴 수 없는데, 피로감에 덜컥 겁이 난다. 이런이런- 하고 싶은 일은 많지만, 정작 할 수 있는 일은 적은 걸. 나머지는 내 과한 욕심이었을까. 올해는 너무 바쁘지 않게, 아이와 함께 삶의 순간순간들을 즐기면서 살고 싶었는데 내 선택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분간은 어쩔 수 없는 걸. 힘들게 직장을 구했고 적지만 열심히 돈을 벌어야 생존할 수 있다. 게다가 후배에게 엄청난 돈을 빌렸다. 몇년째 대출금 이자를 감당하기 버거워 이참에 집을 팔고 이사할까 고민 해봤지만 마땅한 전세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농담 비슷하게 건넨 말을 빌미로 돈을 빌려 일단 은행 대출금을 갚았고 이제 매달 원금만 조금씩 갚으면 된다. 근데 기분이 묘하다. 왠지 삶을 저당잡힌 기분 - '돈을 꼭 벌면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그동안 난 무책임하게도 돈을 버는 것에서 늘 조금씩 자유로왔다. 사실 능력도 안 됐고 의지도 부족했다. 조금 일하고 많이 놀고 싶은, 계획적인 경제 생활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달라져야 한다. '집' 때문에 말이다. 대체 이깟 집이 뭐라고. 하지만 필요하다. 돈 모아서 여행이나 가면 좋을텐데~ㅋ 아쉽다..

 

험난한 인생길 어디쯤

나를 기다리는 사람 있을까

있으면 좋겠다

울음 터뜨리며 와락 안겨들

그 사람

꼬부랑 할머니가 되서도

함께일 수 있는

내가 기다리는 것처럼

나를 기다리는

꼭 한 명

정말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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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8 22:09 2009/04/08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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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09/03/22 16:51

방법서설

한 개인이 국가를 그 밑바닥으로부터 모두 변화시키거나 올바로 재건하기 위해 전복시키거나 개조하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고 또 마찬가지로 학문의 전 체계나, 그 교육을 위해 학교에서 확립하고 있는 질서를 변혁시키려고 하는 것도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그렇지만 내가 그때까지 받아들여 믿어온 여러 견해는 모두 '자신의 신념'에서 일단 단호히 제거해 보는 게 최선의 길이다 라고 말이다. 나중에 다른 더 좋은 견해를 다시 받아들이고, 전과 같은 것이라도 이성의 기준에 비추어 올바르게 해서 받아들이기 위해서이다. 낡은 기초 위에만 건설하고 젊은 시절에 믿어버린 여러 원리에만, 그것이 참됨인지 어떤지 검증해 보지도 않고 의거하기보다는, 이런 방식에 의해 훨씬 더 잘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데 성공하리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도 여러가지의 어려움은 있더라도 대응책도 있고, 공공의 아주 작은 일을 개혁할 때에도 볼 수 있는 어려움과는 비교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공의 커다란 조직은 일단 쓰러지면 재건하기가 매우 어렵고, 단지 동요되었을 경우라도 계속 유지하기조차 곤란하기 짝이 없으며, 더구나 그 붕괴는 매우 가혹한 상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큰 조직의 불완전한 점에 대해 말하자면, 이것들이 여러 가지의 다른 형태로 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결점이 많은 걸 충분히 확인할 수 있지만, 이런 결점이 있어도 습관이 그러한 결점들을 크게 완화시켜 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습관은 부지불식 간에 결점의 대부분을 피하거나 교정시켜 왔다. 사려 분별만으로는 이 결점들에 이토록 잘 대처할 수는 없으리라.

 

- 데카르트 '방법서설' 중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는 바로 '방법서설'에서 제시된다. '나'가 무엇인지에 대한 검토 끝에 '생각하는 것(사유)'이 본질임을 밝히고, 그 '생각하는 것'은 존재하기 위해 어떤 장소도 어떤 물질적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하나의 '실체'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선언은 확실성의 기초가 인간 자신 그리고 주체적 자아 의식으로서 인간의 이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사상사에 있어서 혁명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또한 그의 합리주의적 사상은  인간의 자연 정복에 대한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현재의 생태학적 세계관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으며, 물심 이원론적 사상은 아직도 비중 있는 논쟁중의 하나이다.

이 책의 정확한 제목은 '이성을 바르게 인도하고 여러 학문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에 관한 서설'이며 철학적 자서전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의 '양식 내지 이성은 만인에게 갖춰져 있다'는 이성주의적 신념 아래, 여성들을 포함한 대중들도 이해할 수 있는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씌어졌다. '방법서설'은 당시 학문의 혁신을 위한 방법론적 반성인 동시에 명증적인 이성의 인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데카르트 자신의 삶의 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 전체는 6부로 나뉘어 있으며 1부는 자선전적 고백으로 전통적인 학문에 대한 비판, 2부는 학문 방법의 주요 규칙, 3부는 잠정적 도덕의 규칙, 4부는 형이상학 - 하나님 및 인간 영혼의 존재 증명, 5부는 자연학, 6부는 장래 학문의 구성등의 내용으로 정리되어 있다.

 

우선 이 책은 가볍다. 지금까지의 책들과는 달리 양적으로 짧아서 읽기 편해진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철학적 삶의 자세와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은 그것이 단지 위대한 철학자만의 것이 아닌 시대를 한참 뛰어넘은 현재 우리의 것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나 역시 현실의 오류속에서 사상은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했다. 하지만 짧은 인식속에서 마치 절대신앙처럼 굳어버린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그런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과 불꽃처럼 부딪히게 될 때 그만 쉽게 절망하게 된다. 완전한 인간, 완전한 세계, 완전한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데도 말이지. (비록 데카르트는 완전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했지만.)

 

'내 의견에 대한 비판자로서 나 자신보다 더 엄격하고 공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학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토론이라는 방식을 통해 지금까지 몰랐던 진리를 뭔가 하나라도 발견했다는 것도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상대에게 이기려고 애쓰는 동안은 쌍방의 논거를 고찰하기보다는 진실다워보이는 것을 강조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순간이 많다. 토론이랍시고 모였지만 서로가 자기 주장의 나열 외엔 아무것도 아닌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들 말이다. 현실에서 이성적 존재로서 합리적인 또는 과학적으로 사고하기란 멀고 힘들지만 습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란 간편하고 쉬운 것이다. 진실다워보이는 것, 어찌 연연하지 않을 수 있겠나. 자본주의를 살아가면서 내용보다 껍데기에 취할 때가 많은 걸. 인간에 대해서조차도. 한 때는 내가 그런 시선의 피해자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제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부분에서 소수자이지만 어떤 부분에선 그렇지 않고, 자본주의를 반대하지만 동화되는 순간, 앞과 뒤가 맞지 않는 의견과 선택이 종종 존재한다. 결국 자기 모순 속에서의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 이것만이 변치 않는 진리겠지. 그리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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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2 16:51 2009/03/22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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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09/03/15 21:22

니코마코스 윤리학

...그러나 연애하는 사람들의 친애에 있어서는 가끔 사랑하는 사람이(사실 자기에게는 사랑받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자기가 무척 사랑하고 있는 그만큼 상대방은 자기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사랑받는 사람이 "그 전에는 모든 것을 약속했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이행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일이 자주 있다. 이러한 일은 사랑하는 사람이 상대방을 쾌락 때문에 사랑하는 반면, 사랑받는 사람은 상대방을 유용성 때문에 사랑하며, 또 둘 다 자기에게 기대되었던 여러 가지 자질을 소유하지 못할 때에 생긴다. 어떤 것들이 그 친애의 목적이었으므로, 그들의 사랑의 동기가 되었던 이런 것들을 얻지 못할 때에 생긴다. 어떤 것들이 그 친애의 목적이었으므로, 그들의 사랑의 동기가 되었던 이런 것들을 얻지 못할 때 그 친애도 없어지고 만다. 각자가 상대방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자질을 사랑했던 것인데, 이런 것들은 영속적인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들의 친애도 일시적이다...

 

...누구나 살기를 바라는 까닭에 또한 쾌락을 욕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활동이요, 또 사람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에 관해서 가장 사랑하는 능력을 가지고 활동한다. 가령 음악가는 여러 가지 음률에 관해서 자신의 청각을 가지고 활동하고,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론적인 문제에 관해서 자신의 이지를 가지는 등등으로 활동한다. 그런데 쾌락은 이러한 활동을 완전하게 하므로 또한 사람들이 욕구하는 삶도 완전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쾌락을 찾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쾌락은 모든 사람의 삶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고, 또 삶은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쾌락 때문에 삶을 택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산다는 것 때문에 쾌락을 택하는가 하는 것은 여기서 문제 삼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산다는 것과 쾌락은, 사실 활동이 없으며 쾌락이 생기지 않으며, 또 모든 활동은 거기 따르는 쾌락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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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권은 '인간을 위한 선'이란 제목으로 윤리학적 탐구의 과제와 성격 및 선과 행복의 정의, 덕의 종류가 서론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제2권에서 6권까지는 이 책의 중심 부분으로 윤리적인 덕과 지적인 덕에 구체적인 덕목을 들어 가면서 세부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그리고 제7권에서 9권까지는 후반부로서 쾌락과 우애의 문제를, 마지막 10권에서는 서두에서 다루었던 행복의 문제를 다시 논의하면서 관조적 삶이 최상의 행복임을 논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지나 힘겹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르렀다. 읽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차이를 절감하며 그러나 과감하게 지나치며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종종 그렇듯 내게 흥미있는 구절은 늘 따로 존재한다. 바로 저명한 철학자들의 사랑과 연애에 대한 이론이 그것이다. 그들의 시선은 놀랍고도 신기하다. 이천년 전의 연애 양상이 지금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점과 '한갓' 사랑이 이들의 중요한 주제로 다뤄진다는 것이다. 사랑과 연애에 대한 논의 자체가 관념적이고 유치하게 치부될 때가 많은 현실속에서 말이다. 그것은 단지 개인의 영역이며 각자 알아서 잘(!)하면 될 뿐이다. 단 조직에 피해가 가지 않게.  나 역시 그렇게 가볍게 규정했지만 막상 연애과정속에서 앞뒤로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생각은 바뀌었다. 모든 문제에서 드러나듯 신념은 너무나 단순하면서 빈곤했고 사랑과 연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했다더라'식의 뒷담화 수준에서 벗어나 담론으로까지 확장하고 싶었던 내게, 그래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같은 이들의 논의 자체가 그 이해 여부를 떠나 놀라운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무엇 때문에 사랑한 것일까. 유용성 때문일까, 쾌락 때문일까. 어쩌면 둘 다인지도 모른다.  어는 순간부터인가 그 사람이 대책없이 좋았고 실제로 함께 있으면 편리한 점이 많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했을까. 통속적인 사랑의 결말처럼, 동기가 되었던 쾌락이 사라지는 순간 나의 의미 또한 상실되었던 것일까. 상대방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므로 말이지. 하여튼 일정한 시간이 지났고 우리는 공통된 활동영역 속에서 다시 마주치게 됐다. 나는 아직 그 사람을 사랑한다. 그리고 다시 조직 활동을 시작한다. 단지 나를 위해서. 내가 꿈꾸는 세상을 위해서.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 또한 다시 보고 싶다. 나는 결코 겉모습에 반하지 않는다. 그의 열정과 풍부한 인식, 따뜻함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가 아무리 멋져도 활동가가 아니었다면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런 인간이다. 그리고 지금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분발하기를 바란다. 그의 모습에 여전히 가슴이 뛴다면 나는 멍청이겠지만 어쨌든 과거의 상처는 틀림없이 회복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냥 놓아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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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5 21:22 2009/03/15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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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순간 2009/03/08 22:20

뜨거운 안녕

   뜨거운 안녕

                                 

                                     - 김은경

목욕탕에서 때를 밀다 속옷을 갈아입다
상처에 눈 머무는 순간이 있지
훔쳐봄을 의식하지 않은 맨몸일 때 가령 상처는
가시라기보다는 빨강 도드라진 꽃눈일 텐데
눈물로 돋을새김 한 천년의 미소래도 무방할 텐데

어디에 박혔건 내력이야 한결같을 테지만
죽지 않았으니 상처도 남은 것 그리 믿으면
더 억울할 일도 없을까

오래전 당신은 내게 상처를 주었고 나는 또 이름 모를
그대에게 교환될 수 없는 상처를 보냈네
403호로 배달된 상처 한 상자를 대신 받은 기억 있고
쓰레기 더미 속 상처를 기쁘게 주워 입기도 했네

지나갔으니 이유는 묻지 않겠어 당신
왜 하필 내게 상처를 주었는지
하지만 얇은 유리 파편으로 만든 그 옷
내게는 꽉 끼었지 그래 나는 아팠었지
천진한 햇살마저 나는 조금 아팠겠지

이제 그때만큼 아프지 않아
난 다 자랐으니까 폴리백처럼 가벼워졌으니까
(껴안고 사랑할 순 없어도
버릴 수도 없는 일이잖아!)

이제 난 눈물 없는 노래도 부를 줄 알아

生이 너무 즐거운 비명 같은 날이면 바람 부는
구름 속을 홀로 산책하겠어
새로 산 티베트풍 모자를 덮어쓰고 경쾌한
도트 무늬 스커트를 허리에 걸치고
한번쯤은 기꺼이, 가벼운 외투 같은 상처를
장롱에서 꺼내 입어볼게 옛날 옛적
당신에게 받은 상처를
선물인 듯 간직할게

세세만년 전 당신이여
그러면 정말 안녕

<출처> 김은경, 『실천문학』, 2009년 봄호(통권 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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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당신을 보지 못했어

옆사람옆사람 근처쯤

더듬더듬 당신의 모습, 목소리도 들렸지만

난 더 크게 말하고 웃어댔지

설레이고 싶지 않았어

잠 못들고 싶지 않았어

쿨하게 인사할 용기같은 건

애당초 없었던 거야

마음은 참 이상하지

안녕이라고 인사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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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8 22:20 2009/03/08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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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순간 2009/02/24 22:42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


                                                                -  김남주


서른에서 마흔몇 살까지
황금의 내 청춘은 패배와 투옥의 긴 터널이었다
이에 나는 불만이 없다
자본과의 싸움에서 내가 이겨
금방 이겨
혁명의 과일을 따먹으리라고는
꿈에도 생시에도 상상한 적 없었고
살아 남아 다시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밥상을 대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나 또한 혁명의 길에서
옛 싸움터의 전사들처럼 가게 될 것이라고
그쯤 다짐했던 것이다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 조직도 파괴되고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 부끄럽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징역만 잔뜩 살았으니
이것이 나의 불만이다
그러나 아무튼 나는 싸웠다! 잘 싸웠거나 못 싸웠거나
승리 아니면 죽음!
양자택일만이 허용되는 해방투쟁의 최전선에서
자유의 적과 싸웠다 압제와
노동의 적과 싸웠다 자본과
펜을 들고 싸웠다 칼을 들고 싸웠다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들고 나는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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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회사의 어리버리 초짜 경리사원에 불과헸던 내가 스스로 운동단체를 찾아나섰던 건

순전히 김남주의 시 때문이었다

사립대학 등록금은 감당 못한다며 돌아선 부모님이 원망스러워,

날마다 매캐한 최루탄 연기속을 뛰어다니는 대학생들조차 얄밉기 그지없던 시절

우연찮게 손이 간 그의 시집 '나의 칼 나의 피'를 읽으며

그 뜨거운 한구절 한구절에 그만

내 심장까지 후끈 달아오르고 만 것이다

그렇게 열에 들뜬 채 나의 투쟁은 시작됐고

벌써 이십년 전의 일이 되버렸다.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들고 나는 싸웠다'는 구절이

내 가슴을 친다

나는?

그러면 나는?

'나름 최선을 다해 싸웠다' 고

말할 수 있다 단, 속삭이듯

혁명은 단칼 승부가 아닌 걸

전술은 변화해야 하며

무엇보다 자신을 추스릴 시간도 필요하다

고문과 단식으로 병들기도 하지만,

자본주의시대를 살아가는 자체가 병듦인 걸

다만 그뿐이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혁명은 시작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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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4 22:42 2009/02/24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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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순간 2009/02/19 22:57

두렵다 가난

가난하다는 것

 

                          - 안도현

가난은
가난한 사람을 울리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보다
오직 한 움큼만 덜 가졌다는 뜻이므로
늘 가슴 한쪽이 비어 있어
거기에
사랑을 채울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므로

사랑하는 이들은
가난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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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던 2월말이 다되가는데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날마다 구인난을 열심히 들여다보지만 애초에 생각했던 시간제 근무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 '아르바이트'라면서 정규직과 근무시간이 같은 얌체같은 경우나 야간당직만 간간히 눈에 띌 뿐이니 요며칠간은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스스로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있다. 오늘은 시외이지만 근무시간이 그나마 좀 맞는 곳으로 이력서를 보내봤다. 몇 번 전화통화 후 나중에 연락 주겠다고 한다. 하긴 된다고 해도 당장 걱정인 걸. 종일 근무하게 되면 도무지 뭘 할 수가 없다. 아이와 함께 하기에도, 공부를 하기에도, 뭔가 다른 활동을 하려 해도 늘 시간이 부족하고 체력이 달린다. 직종을 바꿔볼까. 그러기엔 공부했던 것도 아깝고 경력도 더 쌓고 싶으니 텅빈 머리만 굴려볼 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아 이런- 계획대로 안되니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만 깊어진다.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다. 두달이나 쉬는 것은 애초부터 경제적으로 큰 무리였지만 아이와의 관계회복을 위해 꼭 필요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제 아이는 주변사람들이 느낄만큼 안정을 되찾았고 나또한 그렇다. 그것만으로 만족하자. 조금 더 가난해지면 어떤가. 그동안 내뜻대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차츰 달라져야 한다. 조금 더 천천히 걷고 조금 더 넓은 시선으로 아이와 함께 가야 한다. 함께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러니 좀 더 힘들어져도 울지는 말자. 아직 2월은 끝나지 않았고, 아직 돈도 조금 남아있고, 아직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다. 정말 안도현시인의 따뜻한 싯구절처럼 가난이 사람을 울리지 않기를.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되뇌어본다. 세상에 삿대질하는 대신, 집착을 조금 버려야 하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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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9 22:57 2009/02/19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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