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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원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된다.. 그 두번째

제천, 광양 등지에 두부를 만드는 풀무원의 하청공장이 있다고 한다.

충북 음성공장에서 4조3교대가 시작되었다고

한겨레 신문이 법석을 떨고

노동자들은 긴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작년에 9개월이 넘는 근골격계 투쟁을 하느라

살림도 곤궁해지고

투쟁기금도 말랐는데

오로지 노동자들의 단결된 의지와

굳건한 연대만 믿고

투쟁을 약속한다.

 

풀무원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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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원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된다.

투쟁조끼를 입는 일도

팔뚝을 흔들며 노래부르는 일도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그들,

생명을 하늘처럼 섬긴다는 풀무원의 노동자들은

어깨의 부기가 볼까지 밀려올라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쉴 새 없는 작업 공정에 재빠른 손을 놀리면서도 

노예같은 시간을 눈치채지 못했다.

일요일도 없이 맞교대 근무로

벌어들이는 돈이 목숨값인지도 모르고

한 몸 놀리지않고 일하니

살림에 보탬이 된다는 사실에 그저 흐뭇해했다.

 

MSG무첨가, 무공해 청정식품

풀무원 두부, 풀무원 메밀국수, 풀무원 냉면, 풀무원 스파게티, 풀무원 콩나물, 풀무원 우엉, 풀무원 단무지, 풀무원 떡볶이...

두부공장 기계가 멈춘 지 보름이 지났는데도

할인점에서는 여전히 풀무원 두부가 락앤락을 경품으로 제공하며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10년동안 노동자들이 어깨,허리 문드러져가며 찍어내 얻은 풀무원 두부의 명성을

어느 하청공장에선가 빌어쓰고 있겠지.

어느 하청공장 노동자들도 한 10년 이들처럼 일하다 보면

평생 근골격계 질병에 시달리게 되겠지.

 

사람 병신만드는 거 일도 아니다.

풀무원 자본가들에게는...

 

병들지 않고 일하기 위해선 결국

단결의 무기로 투쟁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풀무원노동자들의 단결로

1300만 노동자들의 단결로

자본의 횡포를 끝장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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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애즈 포크2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따로 시간을 내지 못해 부족하나마 케이블TV 통해 욕구를 충족하던 어느 날엔가 퀴어 애즈 포크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평소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누구보다 진보적이었다고 자부했는데 그 드라마는 내 그런 시각이 단지 머리 속에 갇혀있는 죽은 것이었음을 알게 해 주었다.

처음 본 느낌은 혐오감.. 역겨움..

이성애를 다룬 영화에서도 성교 장면은 역겨움의 대상이 되곤 했지만 이건 좀 다른 느낌이었다. 괴상한 역겨움. 뭐 저런 영화가 다 있어? 하며 채널을 돌려버렸다. 내용없는 에로영화들 중 하나겠지.. 하는 선입견(그 채널에서 밤늦게 그런 영화를 많이 보여주곤 한다)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 영화가 재방영되는 거다. 그것도 몇번씩이나.. 연속극인데도 제대로 보지않아 내용이 다르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시리즈가 2편까지 방송되는 걸 보면 뭔가 있나 보다.. 하는 생각으로 드라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직 몇 편 보지는 못했지만 볼 때마다 내가 가슴속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그들의 세계에 조금씩 다가서고 있음을 느낀다.  

남자 배우들이 서로 진한 키스를 나누는 순간에 "저 배우들도 동성애자들일까?"라는 호기심으로 바라보던 내가 이젠 그들을 이성애자들의 편견 속에서 아픈 사랑을 나누고 있는 연인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드라마는 남성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동성애도 담고 있는데 두 여주인공이 사랑과 모성,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기를 응원한다. 드라마에서 뿐만아니라 현실에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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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힘

일리는 있다. 그러나

- 사회주의정치연합 건설제안서에 대하여

 

오세철 교수가 주장하는 문제는 현실과 상당히 맞닿아 있다.

민주노총이 사회변혁의 주체로 우뚝 서지도 못하고 있고 민주노동당이 민중들의 자생적인 투쟁을 지원하기 보다 선거법에 목매달고 있고(대표가 목숨건다고 했다) 노동자의 힘은 현장정치를 실현하기 보다 같은 구호만을 되풀이하고 있고, 사회당은 선거와 조직확대를 위해 이벤트성 투쟁에 몰두하고 있다.

오세철 교수는 이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노동자계급정당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정치연합(가칭)을 제시한다. 그럴듯해 보이는 이 주장은 그러나 현실인식의 부재를 드러내면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첫째, 민주노총 문제를 보자.

민주노총은 출범과 동시에 전노협과는 다른 성격을 갖게 되었다. 불법을 각오한 변혁세력(혹은 활동가) 중심의 전노협은 그 투쟁의 성과로 합법적 공간의 대중조직으로 변모했다. 대중조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장 중요한 특성은 구성원의 다양성이다. 그 속에는 변혁적 활동가도 있을 수 있고 출세주의자, 합리주의자, 의회주의자도 있을 수 있다. 조직이 확대되면 될수록 구성원은 더욱 다양해지지 않겠는가?

민주노총의 문제는 다양성의 틈바구니에서 변혁세력이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데서부터 비롯되는 것이고 이는 활동가 역량의 취약함을 반영하고 있다. 정치연합을 건설한다고 해서 당장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민주노동당의 문제 노힘 회원 상당수가 거론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 문제일 것이므로 길게 다루지는 않겠다. 그러나 오교수가 단정한 것처럼 민주노동당이 개혁적 국민정당으로 자신의 성격을 규정한 적이 없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겠다.

세째, 노동자의 힘 비록 노힘이 노동자계급정당을 지향하고 있기는 하나 또다른 의미의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안다. 민주노동당, 사회당에 속해있는 회원과 심지어는 정당 이라는 조직체계를 부정하는 회원도 있지 않은가?(내가 잘못 알았더라도 너무 나무라지 말기를.. 내가 아는 몇몇 노힘 회원이 그렇기에) 굳이 6개조직이 모 여 만드는 활동가 정치조직이 아니더라도 다양성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강을 건너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배를 타고 갈 수도 있고 비행기를 탈 수 도 있다. 모두 한가지 방법으로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의 토론과 설 득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뚜렷한 정치방침을 내세우지 못하고 독자적인 정치활 동을 하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조직내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노힘에게 너희 는 왜 패권주의라는 좋은 처방을 외면하느냐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사회당. 그들의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합법 공간 속에 서의 정치활동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필요로 하는 지 안다면 그들의 투쟁 에 '립서비스'라는 굴레를 씌우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너무 일찍 패권주의에 물들어 '통일좌파'라는 문건을 내놓기는 했어도 말이다. 그럼 오교수가 주장하는 바, 노동계급운동과 결합하는 사회주의정치연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 헤쳐모여서 정치연합으로 단결하면 이 조직들이 안고있는 문제가 해결되는가?

결국은 또 선거 얘기로 귀결된다. 정치연합으로 모여서 후보를 내자고 한다. 그러면 노동자투쟁과 결합하는 선거운동이 될 것이라 한다. 양대 의료원의 공권력 침탈로 사활을 건 투쟁이 시작되고 있고, 철거민, 농민, 장애인들이 쉼없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이 때, 활동가들은 모여서 조직을 만들고 후보를 선출하자고 한다. 20억이나 되는 기탁금을 준비하고 30만명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 선거에 도대체 무슨 수로 대중투쟁을 결합하겠다는 것인가?

6개 조직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활동가 정치조직의 건설을 환영하는 것은 그들의 행보가 대선에 맞추어져 있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느린 행보 속에서도 후보는 선출될 수 있을 것이다. 현실 투쟁에 결합하면서 가능하다면 말이다. 이런 경우 후보 선출은 최소한의 합의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서둘러 조직을 세우고, 정치방침을 통일하는 그런 과정 속에서가 아니라.. 요상한 제안들로 활동가들의 발목을 붙잡는 선거증후군이 이제는 치료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진정으로 안타까운 것은 왜 선거라는 환상이 이토록 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머리 속을 어지럽히는가 하는 것이다.

****************************2002.9.14

 

 

진화의 의미와 새로운 몬스터의 출현

 

- "사회민주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최원)"에 대한 의견 성실한 답변 감사합니다. 아마도 뉴옥에서는 몬스터게임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가 봅니다. 하지만 최원님! 우리가 일반적으로 진화를 이야기할 때에도 그것은 나이가 들거나 늙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가 같은 종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최원님의 카드게임을 몬스터게임으로 굳이 바꾸어본 것은 최원님의 게임에서는 인과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게임이 청산되고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죽은, 게임]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이미 새로운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있습니다. 최원님의 글에서 역사는 단절되어 버립니다.

자, 그럼 몬스터게임으로 들어가 봅시다. 자유주의는 사민주의, 사회주의와의 겨루기를 통해 성장기에서 성숙기로, 다시 완전체로 모습을 바꿉니다. 이 게임에서 완전체란 더이상 진화할 여지가 없는, 그 모습에서도 위력에서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생명체입니다. 모든 몬스터가 그렇듯이 "신자유주의"라는 완전체도 여기에 대적할 수 있는 상대는 "하나" 뿐입니다. 비록 싸움에서 지고 죽어버리기는 했지만 가장 유력한 상대였던 "사회주의"라는 몬스터 말입니다.

새롭게 태어난 이 몬스터는 "신자유주의"라는 완전체에 대적하기 위하여 이전과는 다른 성장기를 거쳐야 합니다. 이미 국경을 초월한 자본의 횡포에 대항하기 위하여 "민족주의"내지는"국가사회주의"와 겨루기를 해야 하고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사민주의"와도 싸워야 합니다. 이러한 크고 작은 겨루기에서 이길 때만 몬스터는 성숙기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신자유주의"라는 완전체를 쓰러뜨리고 스스로 완전체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원님!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최원님이 주장하시는 바, 민주노동당과 노힘의 공동투쟁의 필요성을 반박하기 위해 카드게임을 몬스터게임으로 대체한 것은 아닙니다. "신자유주의"라는 완전체에 대항하기 위해 성장기의 몬스터들은 때로 동맹해야 하고, 지금이 그 시기라는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아니, 강력히 희망합니다. 다만 저는 최원님의 정세인식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어떤 주장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 근거가 명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원님의 건필을 기대하면서...........................자연인 ***************************2002.10.1 

 

[이른바 좌파..]를 올린 진군 동지들께

 

- 긴 글 잘 읽었습니다. 동지들(글의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개인의 의견이라 기 보다는 조직의 공식 문건인 것 같아 이렇게 부릅니다)의 변함없는 혁명의지 와 진지한 고민, 체계적인 주장을 접하니 절로 숙연해 집니다. 아, 이런 분들 이 아직 있구나.

동지들의 주장은 대체로 진실에 근접해 보입니다. 사회당의 한계와 오류, 노동 자의 힘과 현장연대 등에 대한 비판, 좌파 통합의 비현실성 등. 그러나 또한 상당한 부분에서 현실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도 그것 은 "전위정당"과 "PT독재"를 골간으로 하는 사회주의라는 결론에 맞추어 현실을 분석한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긴 글을 써올릴 여유도 없거니와 제가 가진 취약한 이론으로는 길게 답하기도 어려우므로 간단히 몇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

첫째,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했다."는데 대한 동지들의 반박입니다. 동지들은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붕괴했을 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스탈린 이후의 체제가 자본주의이건 사회주의이건 상관없이 레닌의 사회주의는 실패했습니다. 스탈린에 의해 전복된 그 순간 말입니다.

소련의 역사에서 우리는 "PT독재"로도 지켜내지 못했던 노동자국가, 즉 사회주의 국가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런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사회주의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라고 칩시다)의 붕괴를 보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은 건 붕괴된 것이 자본주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회 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모순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서 사회주의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를 고민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민들 속에서 "PT독재"나 "전위정당"에 대한 재고, "노동자권력"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활동가 정치조직에 대한 편견과 오해입니다. 저도 처음 활동가 조직을 접했을 때 80년대 '선진노동자조직'을 떠올렸습니다. 그야말로 선진노동자들의 대중조직이었던 그것을 다시 답습하려고 하는가? 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오해는 제 좌파들간 벌어진 몇달간의 논의를 보면서 불식되었습니다. 80년대의 그것이 전국적인 노동자 대중조직이 없던 상황에서 전투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조직된 대오라면 현실의 그것은 조합주의적인 한계를 노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민주노총"이라는 전국적 대중조직이 마련되어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단결을 도모하는 정치조직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정치조직이라면 당연히 "전위정당"이라야 하는데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이러한 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 다. 당적 체계가 갖는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세째,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입니다. 동지들은 부르조아 민주주의와 현장연대의 민주주의를 등치시켰습니다. 동지들께 묻습니다.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는 어떻게 실현됩니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합니까? 역사는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이고 그 최고의 형태가 공산주의 아닙니까? 물론 계급사회에서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한에서의 자유여야 하며, 좌파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민주집중제를 대체할 만한 것으로서의 "민주주의 강화"를 이야기했던 것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민주집중제는 직접 만나지 않으면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기에 내놓은 최고의 민주주의적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어떠합니까? 과학기술과 정보화의 발전으로 개인의 의사를 마음껏 표출 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고, 이러한 진전은 앞으로 더 가속화될 것입 니다. "대의"하지 않고, 직접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 직하지 않겠습니까? 훌륭하지만 낡은 잣대를 들고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의미있는 세력들을 재단 하지 말아주십시오. ***************************2002.10.9

 

민주집중제에 대하여

 

- 민주집중제에 관해 깊이있는 고민의 결과를 제출하지 못하였으므로 답글을 올리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 역시 이렇다할 이론을 가지지 못하고 있고, 다만 고민의 과정에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제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민주집중제는 오랫동안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가장 올바른 조직운영의 방법으로 채택되었습니다. 그들은 민주집중제를 통하여 민주주의적 이상을 실현함과 동시에 효율적으로 사업을 집행하고자 했고,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관철하면서 조직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집중의 과정은 그것이 아무리 민주적이라 하더라도 "소외"를 동반하게 된다는 점에서, 집중을 통해 형성된 강력한 권력이 오히려 구성원들을 억압하 게 된다는 점에서 "민주집중제"는 이미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조금 더 풀어봅시다. 어떤 사람들이 모여 대표자를 선출하고 그들이 모여 다시 대표자를 선출합니다. 그렇게 몇개의 층이 형성되고 때로는 상향식으로 또 때로는 하향식으로 논의되고 집행됩니다. 상향식으로 논의될 때에도 최종 단계에 이르면 이미 어떤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른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표자들의 주관이 개입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에 어떤 사람들의 생각보다 대표자들의 생각이 더 올바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동의를 얻기 보다는 대 표자들의 생각을 강요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향식의 경우에는 더 문제가 됩니다. 효율적인 집행을 위해 민주집중제는 많 은 경우 대표자들의 결정으로 운영됩니다만 이런 경우 대표자들과 어떤 사람들 이 분리될 가능성은 더 높아집니다. 사업내용을 체득하지 못한 어떤 사람들이 조직으로부터 자유로와지거나 수동적인 대상으로 전락할 위험이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럼 대안은 직접민주주의인가? 저는 직접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더 민주적이라고 했을 뿐 현실에서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물적 토대(정보화의 진전 등)도 더 성숙되어야 겠지만 직접민주주의가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관철할 수 있는 조직운영방식으로 충분할 것인가하는 고민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당수의 노동자들이 자본가 이데올로기 영향 아래 있고, 노동자들의 계급적 자각은 아직 요원하기만 한 현실에서 직접민주주의 실현은 단지 이상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한편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단계에서는 자본가계급과의 투쟁을 위해 "강력한 조직"이 필요할 것이므로 '민주집중제'가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민주집중제'가 강력한 조직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강력한 조직은 개개인의 강력한 의지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광범위한 노동대중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라도 직접민주주의는 더 강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분권화'라는 대안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더 작은 단위로의 집중이 '분권화'의 내용이고, 이는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 다. '분권화'가 진전되려면 노동자계급의 정치의식이 제고되어야 하고, 이런 점에서 '분권화'의 수준은 현실에 의해 규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정당 혹은 활동가 정치조직이라면 직접민주주의를 실험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이 역시 현실에 의해 규정되지 않겠습니까? 동지의 질문에 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진전된 고민을 제출해 주시기 를 기대하면서.... ***************************200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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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클리프의 한계

토니 클리프가 새천년의 맑스주의에서 구소련이 국가자본주의였다고 주장하는 대목을 보자.

1. 만일 소련이 사회주의 국가였거나 스탈린주의 정권이 노동자국가였다면-비록 그것이 타락하거나 변질됐다 하더라도-스탈린주의가 붕괴했다는 것은 곧 반혁명이 일어났음을 뜻한다.

2. 스탈린주의 체제의 붕괴가 반혁명이었다면 사회 상층 인사들이 축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체제의 붕괴에서 드러난 특징은 옛 체제 하에서 경제·사회·정치를 주무르던 인물들, 즉 노멘클라투라가 여전히 상층에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3. 그러므로 옛 스탈린주의 체제와 현재 러시아와 동유럽의 체제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없음이 명백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반혁명의 증거가 "사회 상층 인사들의 축출이다?" 그럼 혁명의 증거는 무엇인가? 역시 "사회 상층 인사들의 축출인가?" 만약 그렇다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상층 인사들이 축출되는 한국정부는 늘 혁명과 반혁명을 반복해왔단 말인가? 노멘클라투라가 여전히 상층에 남아 있기 때문에 구소련과 현재의 러시아 사이에 질적 차이가 없단 말인가?

"국가자본주의"를 주장하는 그의 논거는 엉뚱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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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

친구가 언젠가 내게 해 준 말이 있다.

결혼한 사람에게 사랑이 찾아 왔을 때 그 사랑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가정(현실)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할 자신이 없으면 결혼한 사람은 사랑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 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 온 2년동안 난 현실을 부정했다. 현실에 불평하고 자신을 원망하고..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그런 심정으로 2년을 지냈다. 그동안 난 심하게 피폐해져갔다.

정말 내가 사회주의를 온전히 지켜온 것일까? 사상은 내 현실을 분석하는 도구로 작동하지 못했고, 현실의 무게감은 내 숨통을 조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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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어디로 갈 것인가?

앞의 글에서 당을 "혁명정당"과 철저하게 분리시킨 것은
그 성격을 명확히 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당과 나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나는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책임감만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너무 오래 해석없이 지내왔던 것이다!)

99년 발기인으로 당에 들어섰을 때
나는 (새로운-이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가?)"사회주의"적 강령에 의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계급으로서)"노동"이라는 명칭을 선택했다.
2000년 이후 당의 성격을 의심할 만한 일들이 웹상에서 발견되곤 했지만 역시 강령에 의존하여 스스로 위로하곤 하였다.
2002년 선거를 전후한 시기에도 
당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주장하는 토론을 벌이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내 꿈은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첫번째 징후는 당선자수련회에서 발견되었다.
그 날 만난 울산 당선자들의 면면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결국 그들 중 한 명은 당선되자마자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사상의 부재, 실천의 부재, 노동조합 지도부의 관료주의화, 출세주의 등등..
게다가 당에 만연하고 있는 종파주의는 정파간의 사상대결과 검증의 기회를 앗아가고 그 자리에 정치적 야합과 권모술수를 밀어넣고 있다.
당은 이미 오래 전에 "사회주의적" 성격을 잃어버린 것이다.



"개량"을 할 수는 있지 않을까?
내 기대는 이렇게 소박해졌다. (그 결정체로서 기능하고 있는 내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개량을 수행했는지는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을 참고하시길..)
하여간 그렇게 마음을 잡아가고 있던 중 어느날 느닷없이 "당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강화한다."는 거다.
성격이라는 것은 선언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역사적 배경과 구성원들의 의지, 실천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폐쇄된 비밀조직에서는 지도부의 의지가 곧 조직의 의지가 되기도 했지만(물론 그마저도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개방된 대중조직에서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말이다.
당에 과연 사회주의자가 얼마나 있는가?
사회민주주의자들, 주체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사회주의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거의 "없지!!"않은가?


이제 당은 정체를 밝힐 때가 되었다.

당의 사회민주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말이다.


늦은 밤의 글쓰기가 혼돈스러운 머리를 조금은 차분하게 빗질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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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의 학교

새로운 세계를 일구어낼 조직으로서
민주노동당은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변질을 이야기하지만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제도권 진입을 목표로 할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대중의 정치교육의 장은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내 판단은 확실히 빗나갔다.
노동자들이 민주노동당에서 가장 쉽게 접하는 것은
출세주의와 의회주의이고
그 한계를 벗어나기에 민주노동당은 너무 국민적이다.
국민승리21의 연속으로서 민주노동당을 봤어야 했다.
양자를 억지로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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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반에 내가 노동자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에서 일한 건
순전히 내 선택이었다.
물론 내가 선택한 단체는 아니었지만
난 교육의 전문성을 획득할 필요가 있었고
그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단체의 위상은 내 생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해갔다.
끝까지 싸웠다면 변했을까?
천번 만번 생각해도 천만의 말씀이다.
정보기관의 공격으로 허겁지겁 합법공간으로 뛰쳐나온 무리들에겐
그들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을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아무리 정당한 논리로 대적하더라도 결론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왜 그렇게 간절히 노동자전문교육기관을 원했는가?
바로 일상적 교육의 필요성 때문이다.
강연회나 일회적 교육으로는 아무것도 바꾸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난 교육으로 노동자들의 생활 전반을 바꿀 수 있기를 기대했다.
혁명정당이라는 무기가 아직 노동자들의 것이 아닐 때에는 단체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노동자들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도 노동계급의 관점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속에서도 정치적 이슈를 찾아내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해석할 뿐만아니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계급의 정당에서는 당 활동 자체가 이런 교육의 과정이 될 것이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민주노동당 안에서 계급적 관점을 체득할 수 있는가? 노동조합에서 얻는 것 보다 높은 수준의 것을, 혹은 더 다양한 경험을 얻을 수 있는가?

몇몇의 지역조직에서는 그런 실천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몇몇의 부서에서는 그런 실천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직이란 부분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 조직이 역사적으로 부여받은 임무가 무엇인지, 구성원들의 의지가 어떠한지에 따라 규정될 뿐이다.
당에 가입한 노동자들의 의지는 어떠한가?
민주노총 간부들의 의지는 어떠한가?
그들이 당 속에서 정치적으로 단련될 수 있는가?

어떤 이들은 말한다.
조금 밖에 전진할 수 없으니 앞으로 안 나가는 게 낫다고 말하는 건 머리로만 혁명을 그리는 몽상가들의 태도라고..
점진적 변화라고?
예끼 여보슈~
돈이 인간성을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점진적으로 변해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거라는 거유?
새로운 사회는 안 만들어도 좋으니 지금보다 조금 나은 세상으로 만들자는 말씀이슈?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노동자니 뭐니 그딴 소리는 집어치우슈.
영국의 노동당처럼 노동자들을 이용해 권력을 잡을 생각이 아니라면..
괜히 노동자들 머리 속에 자본가의식이나 집어넣지 말고..
만약 당신이 진심으로 자본에 분노한다면 자나깨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생각만 해야 된다우.
그게 진짜 노동자의식이라우.
혁명과 개량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활동가들이 결국 당의 미래를 말아먹고 말 거라는 사실을 기억하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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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괴롭히는 문제들

나를 괴롭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나 자신이 개량의 결정체라는 것이다.
내가 의원이 아니었을 때에는
'개량'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회변혁의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은 일상적 시기에
노동자, 민중의 삶을 자본의 미친 회오리 속에 마냥 던져둘 수는 없으므로..
그러나 내가 막상 개량의 시술자가 되고보니
미칠 노릇인 거다.
특히 대중투쟁이(심지어는 소박한 운동조차) 없는 지점(무풍지대)을 개량하는 일은 더욱 그렇다.
2년가까이 관심을 가져달라고 그렇게 매달렸던 "학교급식조례"를 거들떠도 보지않던 이해당사자들이

성명서라도 발표한 건
타협적 개량의 산물로서 조례안이 발의되고 난 뒤였다.
조례 건은 비교적 큰 사건이었지만
내가 의회에서 다루고 있는 (수십 건이 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의 대부분이

이해당사자들의 무관심(혹은 무반응)속에 진행되고 있다.
- 예를 들면 대중교통수단 확충 문제, 도청 내 비정규직 문제, 기금 개혁문제 등등..
단체와 개인들에게 문제제기하는 일만으로도 난 녹초가 되곤 했다.
지금은 그로기 상태..

나도 가끔은 대중투쟁을 지원하는 개량을 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 일이라 하더라도 고민없이 매달리지는 못한다.
특히 주체적 역량에 의지하기 보다
의원의 영웅적 개량에 기대려는 분위기가 느껴질 때마다 심각한 고민에 빠지곤 한다.
"내가 정말 이 일을 해야 하는 걸까?"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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