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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UT-23]어떻게 구성할까

쇼킹 패밀리 뒤풀이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줄줄이 이어갈 때

향미가 '나루 언니가 저를 찍고 있는데 왜 찍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해서

충격받았다...^^;;;;

 

그래서 다같이 왕창 술 한번 먹고 엎어지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내가 늘 허겁지겁 살아와서 기회를 만들지 못했으니 할말은 없다

반성하면서 지금이라도 몇 자 적어놔야겠다



 

1. 이 나라에서 예술하는 거 쉽지 않다

   그것도 여자들이, 게다가 돈도 없도 빽도 없는 여자들이 모여서

   같이 예술을 한다는 건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때문에 W라는 모임은 이 사회에서 아주 소중한 존재다

   이런 사람들을 안찍으면 대체 뭘 찍어?

 

2. 처음에 나는 가수 박향미를 주목했다

   개인적인 인연도 있었지만 그녀가 억척스럽게 활동하는 모습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자극이 되리라고 믿었다

   언젠가 '일다'에서 '그 많던 여자선배들은 다 어디로 갔나'고 되묻는 요지의 기사를 읽었는데

   80년대에서 90년대를 거치는 동안 앞장서서 사회변혁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여성들이

   연애와 결혼, 출산과 육아로 인해 서서히 퇴장하고 이제는 만날 길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길을 가던 동지를 만나 함께 생활하면서 남편은 계속 그 일을 하고 있는데

   자신은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가족의 틀내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느라 분주하고

   때로는 돈 못버는 남편을 대신해서 '실질적 가장'으로 일하느라 사라진 그녀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다른 세상으로 옮겨간 많은 여자들 중에 내가 있었고

   내가 좋아하던 많은 선배들과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따로 몸따로 힘겹게 살아가는 숱한 나/여자들과 달리

   여전히, 꾸준히, 아직도! 그 길에서 활동하는 여자들이 있다는 건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 놀라운 현장에 가수 박향미가 있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아이와 함께 말이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그녀는 도와주는 사람들도 많고 그렇게 힘든 상황은 아니야'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야, 누가 연영석 다큐한다니까 너는 박향미냐?'라고 해서 낙담하기도 했지만

   나는 남들이 누구나 공인하는

   '진흙(최악의 상황?)에서 피어나는 한떨기 연꽃(그래서 더 감동적인 결말?)'에는 관심없다

   사람은 누구나 힘겨운 상황에 놓여있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지옥을 딛고 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뉴스에 나옴직한, 인간극장에 나옴직한, 눈이 확 떠지는 획기적인 이야기는

   거기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가서 찍으면 되겠고

   나는 가수 박향미를 보고 눈이 확 떠졌으니 이걸 열심히 찍으면 되는 일이다

   분명히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나면 당신도 왜 내가 왜 그녀를 주목했는지 알게 될거다

   기다려 보시라

 

3. 그런데 박향미를 만나보니 W라는 모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고

    그 이후의 상황은 제작일지를 하나 하나 읽어보면서 대충 감을 잡으면 된다

    내가 처음 박향미를 주목했던 그 이유, 여전히 그 길을 가는 여자들이

    W에 여럿 모여있었고 그들 모두가 너무나 이뻤다

    그들의 고민과 활동하는 모습과 살아가는 이야기가 다 좋았다

    그래서 박향미와 W, W와 박향미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려고 한다

    사실 나는 아직 박향미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못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할만한 여러 가지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보이는 대로 찍고 시간이 허락하면 만났을 뿐이다

    그러니 금례나 연수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 사람들에게 '내가 지금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소'라고 해놓고

    별로 해놓은 게 없어서 좀 미안하긴 하지만 초조하진 않다

    내가 그들을 좋아하고, 그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됐다

    큰 기대없이 큰 실망없이 자꾸 만나다보면 뭔가 결과가 나오겠지, 그렇게 생각한다

 

4. 제작비지원을 아직 받지 못했고 후원자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돈을 벌어가며 다큐를 만들려니 늘 시간에 쫓긴다

   공연마치고 뒤풀이하는 자리에서 한 시간 이상 같이 앉아있어보질 못했다

   슬프다, 엄청 슬프다

   아르바이트라는 것을 올 2월에는 다 정리해버리고 인천에 이사갈 생각도 있었는데

   3월부터 덜컥 고정적인 일거리를 맡게 되는 바람에 그것도 물 건너 갔다

   게다가 감독이라는 사람이 프로젝트니 뭐니 해서 자꾸 일을 벌이는 바람에

   날마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다행히 프로젝트는 4월말이면 끝난다

   5월, 그 한달만이라도 W 멤버들한테 딱 달라붙어 있으려고 생각해보니

   중요한 공연은 4월말로 확정되었고 정들면 곧 이별이겠다, 난감하다

 

5. 우쨋든, 3월 울산공연 이후 사진도 동영상도 못올리고 좌충우돌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카메라는 돌아갈 것이고 다큐멘터리는 결국 완성될 것이다

    어떡하든 결론을 내보려고 하니까 4월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한번

    맘 편하게 밤늦도록 이야기 나눌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더 늦어지기 전에, 더 늦어져서 누군가가 또 내게 '근데 왜 찍어요?'라고 묻기 전에...

    만나자, 인천도 좋고 서울도 좋으니 새벽이 올때까지 떠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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