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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노래- 꽃다지>에 대해

 http://www.hopesong.com/ 에서 발췌

 


박향미가 활동했던 노래패 <희망의 노래, 꽃다지>



1. 꽃다지가 태어나기까지 (88년부터 92년까지)

 

  87년 7,8,9월 전국을 뒤흔든 역사적인 노동자들의 함성으로 운동의 중심축이 학생과 지식인에서 노동자로 바뀌었다. 노동자들은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 부를 자신들의 노래를 원했다. 이 때 노동자노래단(이하 노노단)과 삶의 노래 예울림(이하 예울림)이라는 두 단체가 노동자들의 시각에서 노래를 창작하고 보급하기 위해 창립되었다.

 

2. 꽃다지 창립! (꽃다지 원년 1992년)

 

  노노단과 예울림 두 단체는 <희망의 노래 꽃다지>라는 이름으로 통합, 창립 후  92년 8월초 <민들레처럼><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고귀한 생명의 손기로><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등이 수록된 1집 음반(비합법)을 제작하고, 9월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좌표 1992"라는 제목으로 올리게 되었다.



 

3. 시련의 고개를 넘어 (92년 대선부터 93년까지)

 

  92년 겨울, 대선 후의 패배감과 조직의 분열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동지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에 대한 반성, 그리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심정을 노래로 만들어 비합법 2집을 준비했다. <전화카드 한 장><바위처럼><창살 아래 사랑아><통일이 그리워><꽃다지3> 등이 수록. 93년 9월에 음반발매기념공연 "동지"를 올렸다. 이때까지도 공연의 형식은 대형무대에서의 집체극 형식.


4. 노동가요의 지평을 넓히며 (93년 가을부터 94년 봄까지)

 

  노동가요로는 최초의 합법음반 제작을 시도했다. 설문을 통해 15곡 가량을 심의에 넣었는데, 공윤은 <고귀한 생명의 손길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가사 내용을 문제삼아 반려처리를 해버렸다.이런 과정 중에 사단법인화된 민예총의 세종문화회관 입성투쟁의 성공과 세종문화회관에서의 공연 등이 같이 이루어지면서 공윤은 끝내 모든 노래를 한 글자의 수정도 없이 모두 통과시켰고, 94년 5월 31일 시청앞 마당세실극장에서 합법음반 발매기념콘서트 "민들레처럼'을 올리면서 문화관련 제도개선투쟁은 1단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5. 창작의 어려움에 봉착하다.(94년 가을에서 95년까지)

 

  94년 10월, 세종문화회관에서 노래판굿 꽃다지 공연과 95년 3월 연대노천극장의 노래판굿 꽃다지 재공연, 그리고 95년 4월 말 노동가요 공식음반 발매와 민주노총 출범을 기념하는 꽃다지 콘서트 "한 걸음씩"을 하면서 박향미, 윤미진, 김미정 등이 결합하게 되었다. 꽃다지는 창작의 문제가 엄청난 질곡이었다. 그간의 꽃다지 음악을 정리하고 또 재평가하고 새로운 음악장르에 대한 연구도 하면서 공동작업을 1년간 진행, 그 성과로 95년 12월 신촌 창무포스트 극장에서 17일간의 장기공연을 올렸다.

 

6. 누가 뭐래도 (96년)

 

96년부터 솔로가수도 배출하고 총괄 관리하는 구조로써의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 그러나  96년 사업의 세부계획이 수립되기도 전에 대표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민중가요 노래책에 북한을 찬양하는 노래를 수록했다는 이유로 출판사 사장과 꽃다지 대표를 구속한 것. 탑골 공원 앞에서 50일간 "국가보안법 철폐! 구속문화예술인 석방! 완전한 예술창작표현의 자유 쟁취!" 라는 구호를 내걸고 선전공연을 했고, 밤에는 민예총 사무실에서 농성을 했다. 그 결과 대표는 50일만에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7.우리는 지금보다 강하게 (97년부터 지금까지)

 

97년의 노동법 개정을 위한 총파업을 발로 뛰어다니며 시작. 3년만에 2집 음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발매하고, 음반발매기념 콘서트를 하였습니다. 노동가요계 최초의 싱글음반 "세상을 바꾸자"룰 제작하고 또 대선투쟁에 결합했다. 98년 11월에 새로운 체계로 정리. 가창팀, 연주팀, 기획실로 구성되었던 팀체계와 대표제와 직급제를 폐지하고 업무담당체계로 바꾸고 9명이 남았다. 99년 가을, 합법3집음반 "진주"를 발매. 이후 꽃다지 역사상 가장 단촐한 식구들이 남았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지속적인 음악작업을 한 결과, 2000년 가을에 두번째 싱글인 통일테마음반 "오라"를, 2001년 봄에는 세번째 싱글음반 "반격"을 발표했다. 지금 이들은 세 명의 기획자와 네 명의 가수가 새로운 꽃다지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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