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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드락-또드락] “KTX 여승무원, 하는 일이 없다?”

 

 

 

또드락-또드락] “KTX 여승무원, 하는 일이 없다?”
[가상 토론] KTX 여승무원을 바라보는 누리꾼들의 관점의 차이
입력 :2006-03-29 09:02   이응탁 (et-lee@dailyseop.com)기자
온라인에서 뉴스 기사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습니다. 기사는 누리꾼들의 ‘펌’이란 행위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댓글’이 붙으면서 몸집을 키워가니까요.

‘또드락-또드락’은 바로 기사에 달린 댓글에 관한 뉴스입니다. ‘작고 단단한 물건이 율동적으로 잇달아 부딪쳐 내는 소리’라는 말뜻처럼 댓글은 기사와 유쾌·상쾌·통쾌한 소통을 이뤄내기도 합니다.

화제의 기사에 달리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댓글을 통해 기사가 담고 있는 현상을 또 다른 시각에 바라보고자 합니다.[편집자주]


▲ 27일째 파업을 계속해오고 있는 KTX 승무원들이 지난 27일 용산구 철도공사 서울사옥에서 이철 공사 사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다 경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된 뒤 한 승무원이 울먹이는 동료를 위로하고 있다. ⓒ2006 데일리서프라이즈 민원기 기자 

지난 27일 이철 철도공사 사장과 면담을 요구하며 서울 동자동 철도공사 서울지역본부 사옥 1층을 점거하며 농성을 벌이던 KTX 여승무원들이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됐습니다.

철도노조 서울/부산 KTX열차승무지부 소속 150여명의 조합원은 이날 오전 8시 40분께부터 농성을 벌였지만 오후 1시께 경찰 병력에 의해 전원이 청사 밖으로 끌려났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KTX 여승무원들은 지난 1일부터 20여일 넘게 ‘KTX 여승무원 외주화 철회’를 요구해 왔지만 시간이 갈수록 귀 기울이는 사람이 적어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온라인 상에서도 그들을 대변해 주는 누리꾼들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수의 누리꾼들이 비난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현실이죠.

나이도 어리고, 여성인데다가, 비정규직인 그들의 절규가 누리꾼들에겐 이미 공허한 외침이 된 듯합니다.

이에 이번 ‘또드락’에서는 KTX 여승무원들의 파업에 관한 누리꾼들의 댓글과 관련 기사 및 칼럼을 엮어 가상 토론(인터뷰?)을 마련해 봤습니다.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화 인터뷰도 병행했습니다. 부득이 하게 관련 기사와 칼럼을 가져다 썼음을 지면을 통해 양해를 구하겠습니다.(인용 출처는 기사 끝에)^^;

질문 1. KTX에 여승무원이 필요한가?

누리꾼 ‘lily811’: 저도 지지난주에 KTX를 탔는데, 뭐 불편함 하나도 없었습니다.

누리꾼 ‘flzl337’: 3월에만 ktx 4번 타봤는데 승무원들이 얼마나 불필요한 인력인지 깨달았습니다. 차라리 청소하는 아줌마를 하나 더 두는게 낫을 것 같은데….




김현미 데일리서프라이즈 기자: 여승무원들이 열차 안에서 하는 업무는 많습니다. △출발 전 객차 점검 △영접 및 환송 인사 △특실 깨우기 서비스 △방송기기 및 영상 수신장치 점검 △어린이가 혼자 여행하는 경우 내리는 역에서 안전하게 인계 △열차 안 방송 △특실 음료 서비스 △정차역 및 종착역 승강문 개폐 및 발판 확인 △장애인 승하차 도우미 △노약자 보살피기 △유실물 인계 △환자 구호 △순회 서비스 △테러 발생에 대비한 의심물품 점검 △차내 편의시설 이용 안내 등 열차 운행에 필요한 거의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누리꾼 ‘comeng’: 여성 승무원 필요 없습니다. 안전운행을 위해 남성안전요원이나 정비기술직원 더 많이 고용하는게 좋다고 봅니다.



민세원 서울KTX열차승무지부장: 항공사에서 승무원으로 5년 동안 일했습니다. 항공사 승무원들은 기본적으로 안전 교육을 받습니다. 만에 하나 사고가 날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이죠. KTX도 중요한 운송교통 수단이고 사고 예방이 중요합니다. 승객이 갑자기 탈이 날 수도 있고 달리는 객차 안에서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만일의 경우에 승무원들이 대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항공기와 비교하면 KTX는 안전 무방비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승무원에게 아무런 안전교육도 하지 않고 탑승시키는 것을 보고 충격이 컸죠. 철도노조가 ‘KTX 여승무원 외주화 철회’를 요구하는 것은 승객의 안전과도 밀접히 관련돼 있습니다.

김현미 기자: 그간 KTX 여승무원들에 대해 취재를 한 바에 따르면 현재 KTX여승무원을 운영하는 한국철도유통(구 홍익회)은 열차 내 식품을 판매해온 곳으로 승무원 운영에 대해선 경험이 전무해 승무스케줄하나 제대로 짜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이들을 고용한 뒤 승무교육을 담당한 곳도 철도공사였고요.


누리꾼 ‘foreverlovei’: 승무원들 문제는 정규직, 비정규직문제가 아닙니다 .소속 철도유통에서 정규직 전환 해준다고 했는데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손지혜 KTX열차승무지부 상황실장: 철도유통이 아니고요, KTX관광레저입니다. 그런데 이 회사는 부실한 운영으로 감사원으로부터 매각ㆍ청산 대상으로 지목된 회사입니다. 아울러 승무원에 대한 운영 능력이 없기는 철도 유통 보다 더하고요.

김현미 기자: 철도공사는 정부의 정규직을 줄이라는 방침에 따라 직제를 외주 형태로 쓸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승무원들이고요. 따라서 이 같은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어도 승무원들을 정규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그 대신 내놓은 카드가 다른 자회사 정규직 채용이죠.

그러나 KTX관광레저 또한 한 번도 승무서비스 경험이 없는 회사로 철도유통이 저지른 시행착오를 고스란히 반복할 가능성이 명백합니다. 철도공사 역시 이 점 인정하고 교육을 담당할 몇몇 임원만을 관광레저에 파견한다는 방침이구요. 아울러 기존 승무원들을 전부 정규직으로 받아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입사지원서를 내도록 하고 있습니다. 노조활동을 해온 승무원들을 걸러내겠다는 의도죠.


질문 2. 2004년 입사 때 홍익회 소속, 1년 단위 계약직임을 몰랐는가?

누리꾼 ‘judyoh55’: 처음부터 비정규직인줄 알고 승무원에 지원했잖아요? 아닌가?.....정규직인줄 알았나?....그럼 안되지 이럴거면 비정규직에 입사 안했어야죠. 그만 합시다. 틈만나면 단체로 시위하니.....조용히 삽시다......쉬~



민세원 승무지부장: 2004년 1월에 채용돼 3월 말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입사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철도청에서 철도청 간부들이 교육을 했는데 ‘정부가 운영하는 철도청인 만큼, 일단 계약직으로 입사하지만 2005년엔 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이다, 준공무원 신분으로 정년도 보장받을 것이다, 항공사 스튜어디스 수준으로 대우하겠다’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당시 홍익회 사장도 ‘KTX가 성장하면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정년이 보장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부심을 느꼈죠. 그런데 그런 기대가 무너지는 데에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입사일인 3월4일에 계약서를 썼는데 명시돼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20대 초·중반에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이들이 위탁이 뭔지, 계약직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죠. 어디서도 배울 수 없었죠. 노조를 결성한 뒤에 법전을 뒤지고 노무사에게 자문을 구하면서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서야 위탁이 뭔지, 자회사의 비정규직인 우리가 철도공사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명시했다고는 하나 확실하게 인지시키지는 않았고, 구두로는 허풍을 떨었습니다.


누리꾼 ‘gibbgun’: 도대체 고용의 안정성이라는게 뭐죠?-_-;;; 평생 그 회사에서 붙어먹을 수 있도록 해주는 걸 말하는 건가요?-_-;;; 요즘회사치고 고용안정 되는 데가 어디 있다고.... 이런 땡깡을. 그래서 다들 고용안전 보장받으려고 공사 공무원 준비하지 않습니까? 근데 어디서 무임승차야~

김선우 시인: 제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애초에 ‘여승무원’이라는 직제를 따로 둘 생각을 한 것부터가 잘못됐습니다. 여승무원이라는 직제를 따로 두고 이들만 외주 위탁 방식의 비정규직으로 뽑는 행위에는 이 사회에 만연한 뿌리깊은 모순들이 얽혀 있습니다.

남성승무원은 철도공사 정규직으로 채용하면서 여성승무원은 파견직으로, 그것도 ‘여승무원’이라는 직제를 만들어 채용하는 행태는 도대체 뭡니까? 국민이 낸 세금과 나랏돈으로 운영되는 공기업에서조차 상시적 업무에 비정규직 고용이 조장되고 성차별 행태가 남발된다면, 시장과 이윤의 논리가 무소불위의 빅브라더인 사기업들에서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아울러 ‘여승무원’이 열차에서 하는 일은 검표부터 시작해 정규직 승무원과 거의 동일한 업무들입니다. 그런데 그중 ‘여승무원의 몫’으로 암묵적으로 명시된게 몇 개 있죠. 장애인 승하차 도우미, 노약자 보살피기, 혼자 여행하는 어린이의 안전한 인계, 환자 구호… 혹시 철도공사에서 ‘여승무원’만 위탁계약직으로 임시직 고용을 하겠다는 발상을 한 이면에는 장애인의 승하차를 돕고 어린이와 노약자를 보살피는 일들이 정규직 노동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사소한 일들이라는 무의식적 가치체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질문 3. 철도공사 입사에 대한 형평성 문제, 면접만 보고 비정규직으로 들어가서 정규직이 되려고 ‘떼(?)를 쓴다’는 비판이 있다.

누리꾼 ‘qqqq1234ee’: 여승무원님들 정말 화가 난다. 지금 대학 도서관에 가보시오. 철도공사 들어가려고 공부하는 사람 보세요 . 시험 쳐서 들어 가세요. 자신없으면 다른 길 찾으세요 . 부탁합니다.



손지혜 상황실장: 어떤분들은 저희가 시험을 보지 않았다고 하는데 저희가 처음 입사할 때 서류전형과 면접을 거쳤습니다. 물론 당시 철도청이 KTX사업을 급하게 진행한 면은 있습니다. 그러나 입사 시험을 치뤘고, 당시 철도청이 운영하는 부곡의 철도서비스 아카데미에서 10일간 숙박교육을 했습니다. 철도청은 그러한 교육 역시 면접의 일종이라면서 그 이후에 최종 합격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울러 KTX 승무원이라는 신규직종에 일하면서 시설 및 설비, 교육면에서 굉장히 부족한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런 것을 몸으로 체용하면서 이 직종의 일을 해냈습니다.


사실 2004년 당시 언론보도만 보더라도 KTX는 ‘속도·생활혁명’ ‘첨단기술의 총아’ 등의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땅위의 스튜어디스’로 불리던 KTX 여승무원이 되기 위해 4500여명이 시험에 응시했고, 그가운데 350여명이 선발됐습니다.

대략 1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공채 시험에 합격한 것이죠. 그렇기에 필기 시험과 같은 과목이 없었다면서 입사 시험의 전형 방법을 가지고 문제 삼는 것은 이번 사태의 본질과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한편 누리꾼들은 “불법 파업은 안된다”는 등의 의견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KTX여직원님들, 남자와 여자이기를 떠나서 법과 절차를 존중하는 태도부터 가지시길 바랍니다. 불리하면 여자고 노동자이고 비정규직이고 합니까. 나는 남자여도 여직원님들보다 적은 봉급받고 살고 있습니다. 참고로 아내와 아이도 두명이나 있구요. - dietman



승무원들아., 전략을 짜야지 어린애도 아니고 떼를 쓴다고 일이 해결되나., 여성부와 여론만 니네 편으로 만들면 99.99%는 성공이다. 일단 여론부터 수습해봐! 아래 사람들 봐라., 요즘에는 언론플레이 없으면 일이 안된다니까,. - kearory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한국학 교수는 ‘한겨레’에 실린 칼럼에서 “여승무원들에게 절을 바친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해고 위협을 무릅쓰고 거의 한 달 가까이 반대하여 싸워온 KTX 여승무원들을 보면, 미래의 대한민국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의 장이 아닌 연대·복지 사회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며 “회사가 그들이 개별적으로 투항한다면 ‘시혜’를 베풀어준다고 유혹해도 끝까지 위탁업체 아래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의 노예 생활을 거부하는 그들은 수백만 명의 불안정한 노동자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KTX 여승무원의 파업이 전적으로 정당하다고만은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달 가까이 파업과 시위를 하면서 그토록 절박하게 외치는 소리가 무엇인지에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인용 출처

-한겨레, [박노자칼럼] 여승무원들에게 절을 바친다, 2006. 3. 27
-한겨레, [세설] ‘여승무원’이라는 이름의 기이한 직제, 김선우 시인, 2006. 3. 24
-한겨레21,[김보협의 도전인터뷰]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2006. 3. 8 제600호

박노자칼럼] 여승무원들에게 절을 바친다
박노자칼럼
한겨레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지는 자는 비참하다!’(Vae victis!) 이 라틴어 속담은 우리 현실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윤 저하 위기에 빠져 비용절감 경쟁을 벌이는 각국 자본이 잉여가치 수취의 폭을 넓히기 위해 노동자들을 원자화한 개체로 만들려고 총공세를 펴는 상황에서는 ‘밀리면 죽는다’는 것이 철칙처럼 보인다. 신자유주의의 ‘게임 룰’을 한번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본은 곧 노동을 고립시켜 박멸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한편, 끈질긴 진지전을 편다면 이미 확보된 ‘영토’(예컨대 유럽의 경우 1945년 이후에 구축된 복지 시스템)를 지킬 뿐만 아니라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를 보자. 노동계의 전위를 담당했던 2만명의 광산 노동자들을 해고시키고 광업을 다시 구조조정하겠다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에 맞서 1984년 3월 광산 노동자들은 총파업에 들어갔다. 약 1년 지속된 파업에서 몇몇 노동자들이 죽고 1만1천여명이 검거되는 등 치열하기로 전례가 없었지만, 정부에 포섭당한 다른 산업별 노련들이 연대를 거부한 탓에 광산 노동자들은 패배했다. 그 패배로 광산 지역이 세습적 빈곤의 지대로 변한 것은 물론, 신자유주의에 영국 노동계가 저항할 능력을 당분간 잃기도 했다. 또한 노동자들이 70년대까지 확보해 온 많은 혜택들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무상 교육권을 잃은 영국 대학생들이 내야 하는 연간 약 500만원까지의 등록금이 한국에 비하면 싸지만 추세로 보아 몇 해 뒤 한국만큼이나 대학생들을 수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우파 정권의 복지제도 개악 시도에 맞서 95년 약 200만명의 노동자들이 나선 총파업 투쟁을 비롯하여 계속 크고 작은 충돌을 통해 복지 모델을 지키려고 힘을 쏟은 결과, 2000년부터는 주당 35시간 근무제 시행 등 새로운 성과까지 올렸다. 유럽 최장의 노동 시간에 시달리는 영국에 견주면 행복한 노릇이라 하겠다. ‘목소리를 내는 만큼 복지를 얻게 된다’는 법칙을 믿기에 현재 프랑스의 청년과 노동자들이 청년노동을 비정규화하는 악법에 맞서 길거리로 나가는 것일 거다.

초과 착취의 대상이 된 비정규직의 조합화 시도들이 곳곳에서 가혹한 탄압을 받고 있는 한국의 경우에는 그래도 암흑 속에서 빛이 보인다. 계속되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많은 비정규직 사업장에서는 70년대의 전설적인 동일방직 투쟁과 비견될 만한 끈질긴 저항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만들고 이중 착취를 가능케 하는 외주화를, 해고 위협을 무릅쓰고 거의 한 달 가까이 반대하여 싸워온 한국고속철도(KTX) 여승무원들을 보면, 미래의 대한민국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의 장이 아닌 연대·복지 사회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회사가 그들이 개별적으로 투항한다면 ‘시혜’를 베풀어준다고 유혹해도 끝까지 위탁업체 아래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의 노예 생활을 거부하는 그들은 수백만 명의 불안정한 노동자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러한 현장의 투쟁들이 전국적인 비정규직의 조합화·정규직화 운동으로 확산된다면 자본의 비인간적인 공세가 결국은 역전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일제하 ‘불령선인’들이 지금은 독립투사로 불러지듯이, 지금 투쟁으로 쓰러지고 ‘업무방해’와 같은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고, 해고·가압류로 생계 곤란자가 되는 비정규직 운동가들이 미래에는 우리를 경쟁의 지옥으로부터 한 걸음 나아가게 한 노동계의 영웅으로 불릴 수 있기를 바란다.

아제아제바라아제
박노자 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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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 2006-03-27 오후 06:30:50 기사수정 : 2006-03-28 오후 02:3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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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박성준 교수 “순수·무욕이 한명숙의 장점”

 

 

 

남편 박성준 교수 “순수·무욕이 한명숙의 장점”
“외유 내강형, 겸허하게 국민의 말 경청해주길”
입력 :2006-03-24 20:11   연합뉴스 김병규 장하나 기자
한명숙 총리 지명자의 남편인 박성준(65) 성공회대 겸임교수는 24일 "(아내는) 진실하고 순수한 외유내강형이다. 정치쪽에서 아내의 이런 덕목이 소중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자신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아름다운가게'의 이사회에 참석한 박 교수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아내가 총리 지명자가 된 소감을 이처럼 밝혔다. 아름다운가게는 재활용품으로 나눔과 순환을 실천하는 시민단체이다.

박 교수는 "아직 인준 절차가 남아서 소감을 언급하기 부담스럽다"면서도 "장관직을 두번(환경부.여성부)이나 수행한 것과 국회의원에 당선된 과정을 살펴보면 사람에 대한 검증은 거친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총리 인준에 대한 자신감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일각에서 한 총리 지명자의 운동 전력 등을 문제삼는 것에 대해서도 박 교수는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고 단점도 뒤집어보면 장점이 될 수도 있다"며 "(아내의) 진실한 성품과 경험이 사회 양극화를 비롯한 갈등을 아우르며 화합을 일궈내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내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만한 안정감 있고 또 욕심이 없는 사람인 데다 타고난 인내력 덕분에 총리직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며 믿음을 보였다.

박 교수는 "앞으로 여러모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텐데 외조자며 동반자로서 격려하고 건강하도록 보살펴 줄 것"이라고 밝혔다.

성공회대 NGO(비정부기구)학과의 겸임교수이며 '비폭력평화물결'과 '아름다운 가게' 등 시민단체에서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박 교수는 한 총리 지명자와는 대학 재학 시절 '경제복지회'라는 기독교 학생연합단체에서 처음 만났다.

4년 간의 열애 끝에 1967년 결혼한 두 사람은 이후 여섯 달 만에 박 교수가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13년 간 떨어져 살아야 했다. 이 기간 한 교수는 여성운동에 전념하면서 옥중에 있던 박 교수를 뒷바라지했다.

한 지명자는 대전교도소에 수감된 남편이 출감할 때까지 교도소 규정대로 일주일에 한번씩 봉함엽서 한 장에 깨알 같은 글씨로 편지를 보냈고 한달에 한 번씩 면회를 갔다.

한 지명자는 당시 상황에 대해 "우린 편지만으로도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었으며 서로에 대한 믿음과 철학까지 공유할 수 있었다"며 "나는 남편의 편지를 먹고 사는 새댁이었고 점점 더 강하고 맹렬한 투사가 돼 갔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박 교수는 이런 한 지명자에 대해 "누군가 나에게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진심에서 '나의 아내 한명숙'이라고 대답해왔고 이 마음은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아내' 한명숙에 대해 "따뜻한 사람이라서 함께 있으면 편안한 아내"라며 "내면에서 나오는 이런 힘이 여태껏 내게도 큰 힘이 돼줬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침에 잠깐 만났을 때에는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를 아내에게서 들었지만 아직 직접 통화를 하지는 못했다"며 "'정말 국민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겸허한 자세로 경청하는 사람이 되어달라'고 아내에게 부탁하고 싶다"고 말했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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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과 남편 박성준 교수와의 옥중 13년 러브스토리 화제

 

 

 

한명숙과 남편 박성준 교수와의 옥중 13년 러브스토리 화제
대학 동아리서 만나 사회 운동하며 믿음으로 이어온 내조와 외조
입력 :2006-03-24 14:29   김세옥 (okokida@dailyseop.com)기자
▲ 한명숙 국무총리 내정자(자료사진) ⓒ2006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로 기록될 한명숙 열린우리당 의원이 무려 13년 동안 ‘바보같은 새댁’으로 살았었던 사실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한명숙 총리 내정자를 ‘바보같은 새댁’으로 만든 이는 다름 아닌 그의 남편 박성준(65) 성공회대 겸임교수.

이들이 대학 시절 ‘경제복지회’라는 동아리의 회장과 부회장으로 만나 4년여의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지만, 박 교수가 결혼 6개월 만에 남한 내 북한 노동당 지하조직인 ‘통일혁명당’의 산하조직 ‘경제복지회’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끌려가 15년형을 선고받고, 13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한 내정자의 나이는 24살이었다.

그가 정치에 입문한 뒤 이 같은 사실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어떻게 13년이란 긴 세월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냐’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이때마다 한 내정자는 “그리 길어질 줄 몰랐다”며 웃음으로 당시의 기억을 술회한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이 기간 동안 부부로서의 신뢰와 믿음 그리고 서로 어깨를 부비고 살았으면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끈끈한 동지애를 쌓아갔다. 16대 총선에서 민주당 비례대표로 정계에 입문한 한 장관은 국민의정부 시절인 2001년 1월 초대 여성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김대중 대통령이 70년대부터 재야 여성운동에 헌신한 그를 높이 산 것이다.

한 내정자는 이처럼 자신이 ‘여성’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자 행정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해 준 인물로 ‘남편 박성준’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한 내정자는 박 교수가 옥살이를 하는 13년 동안 매일같이 편지를 주고받았고 매주 면회를 갔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사회운동에 눈을 뜨게 됐다”고 말한다.

이렇게 남편의 신념을 알아가고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 한 내정자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사회운동 기관인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간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 내정자는 “나는 이 곳 교육과정의 하나였던 중간집단교육을 통해 의식화가 되기 시작했고, 여성운동가로 훈련받았다. 이후 나는 한국사회의 가장 맹렬한 여성운동가 중 한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고 술회한다.

▲ 한명숙 국무총리 내정자의 남편인 박성준 성공회대 겸임교수(자료사진) ⓒ2006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이 기간 동안 한 내정자는 남편과의 편지에서 박정희 독재 체제 아래 벌어지는 사회현상들에 대해 열띤 토론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남편의 옥살이가 11년째 되던 해인 1979년 한 내정자도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에 연루돼 2년6개월간 징역을 살았다.

이들 부부가 정상적인 부부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 것은 결혼 15년만인 1981년. 뒤늦은 신혼을 즐기던 와중에도 이들은 신념에 따르는 삶을 사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 이미 여성운동을 대표할만한 인물로 거듭난 한 내정자는 가족법·남녀고용평등법·성폭력처벌법 등의 제정에 앞장섰으며, 90년대에 들어선 대표적인 여성단체인 여성민우회와 여성단체연합을 이끌었다.

한 내정자를 여성계의 거목으로 거듭나게 한 박 교수 역시 그간의 삶 동안 자신이 쌓아온 철학을 발전시키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옥살이를 하던 시절 아내인 한 내정자가 넣어준 책과 북돋워준 용기로 신학에 눈뜨게 된 박 교수는 일본 릿쿄대 신학박사로 일본 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며, 지난 2001년 3월부턴 성공회대 NGO대학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결혼 19년만인 1985년에 본 늦둥이 아들의 육아와 살림은 박 교수 몫이었다.

아내의 바쁜 활동에 원망은 아니더라도 아쉬움은 있었을 법한데, 박 교수는 한 내정자에 대한 무한의 신뢰와 존경을 보내는데 거리낌이 없다. 누군가 자신에게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어렵다’고 대답하겠지만, 그래도 대답하라고 하면 나의 아내 ‘한명숙’을 선택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이니 말이다.

서로를 향해 “내 인생을 바꾼 멋진 남편(아내)이자 동지”라고 말하는 이들은 앞으로도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로 그리고 전쟁만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제도와 구조부터 평화롭게 만들 때 연두빛의 진정한 평화가 우리 사회에 내려앉을 것이라 말하며 새로운 방식의 평화운동을 실천하는 활동가로 멋진 화음을 내며 살아갈 것이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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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과 메르켈, 닮았지만 다르다

 

 

 

한명숙과 메르켈, 닮았지만 다르다
여성·환경부장관 이어 첫 여성총리 공통점... 성격·정치노선은 '판이'
텍스트만보기   김당(dangk) 기자   
▲ 한명숙(왼쪽) 국무총리 지명자와 메르켈 독일 총리.
ⓒ 오마이뉴스 이종호·연합뉴스/AP
노무현 대통령이 24일 한명숙 열린우리당 의원(62·고양 일산갑)을 총리후보로 지명함에 따라 정치권에서는 그가 첫 여성총리로서 어떤 리더십을 보여줄지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 관심을 끄는 인물은 지난해 10월 보수적인 독일정치사에서 첫 여성총리 시대를 연 앙겔라 메르켈 총리(52)이다. 한명숙 의원실의 박영민 정책보좌관도 "한 의원의 총리지명은 남성 중심의 정치문화에서 첫 여성총리가 된 메르켈 독일총리와 비견된다"면서 '한국판 메르켈'에 대한 기대감을 강조했다.

물론 두 사람의 성격과 정치 역정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컬러'는 비슷하기보다는 오히려 판이하게 대비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분단 국가라는 경험과 첫 여성총리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청소년부장관과 환경부장관에 이어 총리가 된 점이 같다.

성격, 정치 역정, 정치인으로서 '컬러'는 판이하게 달라

메르켈 독일 총리 - 한명숙 총리 지명자

 

메르켈

성명

한명숙

1954년

출생연도

1944년

동독에서 성장

출생지

북한 평양시

라이프치히대 물리학

전공

이화여대 불문학·여성학

동베를린 물리화학연구소 연구원

경력

크리스찬 아카데미 간사, 여성민우회 회장 등
기독민주당(CDU)

정당활동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연방의원, 여성청소년부장관, 경부장관, 연방총리

정치경력

국회의원, 여성부장관,

환경부장관, 총리지명자

헬무트 콜 전 총리

정치적 후견인

김대중 전 대통령

냉철한 '독일판 철의 여성'

성격

온화한 '부드러운 카리스마'

 

ⓒ 오마이뉴스 김당
우선 두 사람은 모두 분단국가의 공산권에서 성장한 공통점이 있다.

메르켈은 1954년 서독 지역의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으나 개신교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동독지역 브란덴부르크주의 템플린에서 자랐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 졸업후 동베를린 물리화학연구소에서 연구원(1978∼1990년)으로 일했다.

메르켈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당시에도 동베를린의 과학원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뉴욕타임스>지는 지난해 10월 프로필 기사에서 당시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9일, 앙겔라 메르켈은 다른 때와 마찬 가지로 매주 가던 사우나에 들렸다. 몇 시간 후 그녀는 환호성을 지르며 서독으로 밀려가는 수천 명의 동독 시민들 대열에 뒤따라 뛰어들었다. 이처럼 그녀의 독일 역사와의 만남이 약간 뒤쳐지는 일은 그날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베를린 장벽 붕괴 한 달 후에 민주화를 지지하는 정당들의 연합체인 '민주개벽'에 가입해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90년 8월 '민주개벽'이 기독민주당(CDU)에 흡수통합됨으로써 그녀는 기민당원이 되었다. 그리고 90년 통독 이후 치러진 첫 번째 선거에서 메르켈은 의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메르켈은 90년 12월에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이후 당시 헬무트 콜 총리의 발탁으로 1991년 여성청소년부장관, 1994년 환경부장관을 거쳐 1998년 기민당 첫 여성 사무총장을 맡으며 거침없이 성장했다. 언론에서는 콜 총리의 도움을 많이 받은 그를 '콜의 양녀(養女)'라고 불렀다. 또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처럼 뚝심을 갖춰 '독일의 대처'로도 통했다.

그리고 실제로 콜 수상이 1999년 금융 스캔들에 연루되자 메르켈은 자신의 오랜 정치적 스승과 결별했다. 특히 그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짜이퉁>지와의 인터뷰에서 "기민당은 스스로 걷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기민당은 노(老)전사들이 없이도 정적들과 싸울수 있기 위하여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상 후견인을 걷어찬 것이다.

마침내 그는 2000년 4월 기민당 당수에 선출됐으며, 비자금 추문으로 휘청거릴 때는 정치적 은인인 콜 전 총리의 정계 은퇴를 주장하며 정면돌파해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남성 중심의 보수 정당에서 정치 입문 15년 만에 첫 독일 여성 총리라는 자리에 올랐다.

메르켈, 베를린장벽 붕괴로 현실참여... 한명숙, 남편 만남 계기로 현실참여

메르켈보다 10살 위인 한명숙 지명자는 1944년 평안남도 평양시에서 태어났으나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모와 함께 월남해 서울에서 자랐다. 기독교학교인 정신여고와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한 그는 이화여대 사감을 거쳐 강원룡 목사가 설립한 한국크리스챤 아카데미의 간사(1974∼1979)로서 사회생활을 첫발을 내딛었다.

그는 평양에서 여섯 살 때까지밖에 살지 않았으나 고향이 평양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부모님이 평생토록 가슴에 저미고 살아온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곁에서 50여년 동안 지켜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정사 때문에 한 의원은 이후 자연스럽게 여성과 평화 그리고 통일운동에 헌신하게 되었다. 한 의원도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통해 분단의 한을 보고 느끼며 자라 온 내가 이후 통일과 평화운동에 참여하게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고 기술하고 있다.

평범한 연구원이었던 메르켈이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격변기에 현실참여에 눈을 떴다면, 한 의원은 실향민인 부모님과 민주화운동가인 남편 박성준씨(66·성공회대 겸임교수)와의 만남을 계기로 현실참여에 몸담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행로를 바꾼 첫 번째 계기였다.

한 의원이 남편 박성준을 만난 것은 대학 3학년 때이다. 한 의원은 당시 이화여대와 서울대의 기독교 학생연합 단체 '경제복지회'에서 마르고 껑충한 서울대생 박성준을 처음 만났다. '경제복지회'는 성서를 통해 현실과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하는 대학생 연합단체였는데 두 사람은 각각 회장과 부회장이었다. 다음은 한 의원의 '고백'이다.

▲ 이화여대 불문학도 시절에 교정에서 친구와 함께.
ⓒ 한명숙 홈페이지
"고백하거니와 난 대학을 졸업하기 이전까지 현실과 세상물정에 까마득하게 눈먼 청맹과니였다. 나는 보들레르와 베를렌을 읊조리는 불문학도였으며 아름다운 생을 노래하는 작가가 되고픈 여리디 여린 감성을 지닌 너무도 평범한 문학소녀였다. 적어도 그를 만나기전까지...

나는 남편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사회의 현실에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믿음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어 왔던 나에게 남편은 내가 미처 몰랐던 성서의 참의미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나는 비로소 참 신앙은 개인의 영적체험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며 사회참여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 실현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난 점점 남편의 철학과 삶의 태도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메르켈과 달리, 한 의원 현실참여는 고난과 시련의 연속

그러나 냉전의 종식과 '진영으로서의 공산주의'의 붕괴와 함께 평범한 연구원에서 '손쉽게' 정치인이 된 메르켈과 달리, 한 의원의 현실참여의 삶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한 의원은 1967년 박성준과 결혼했다. 그러나 박씨는 이듬해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되는 바람에 6개월의 짧은 신혼생활의 추억만을 남겨둔 채 그의 곁을 떠났다. 한 의원은 남편을 구명하기 위해서라도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0년 이화여대 사감을 지낸 그는 학생들의 시위를 지원하다가 직장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새롭게 직장을 옮긴 곳은 크리스챤 아카데미였다. 그리고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남편 박성준과의 만남에 이어 그의 인생을 뒤바꾼 두 번째 계기가 되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당시 한국사회에 산재해 있던 갈등과 사회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창설되었지만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중간자적 중재자를 양성하는 데 그 실질적인 목표를 두고 있었다. 노동자, 농민, 여성, 학생, 종교를 다섯 계층으로 나누어 집중적인 중간집단 교육을 실시했는데 그는 당시 여성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중간집단 여성교육 과정에서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은 교육생보다는 오히려 나 스스로였다"면서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교육과정에서 나는 너무도 소중한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여성노동자, 여성농민 등 가난하고 소외 받는 여성들과의 만남을 통해 얻은 감동은 나를 지금까지 지탱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 중 하나다. 그때 만난 분들은 지식인 여성들과 더불어 한국 진보 여성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그 시절은 그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배가 고플 정도로 가난했으며 남편이 출옥될 가능성은 단 1%도 없었고, 서슬 퍼런 독재정권은 살벌한 감시의 눈길을 한시라도 거두어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79년 박정희 독재정권은 그를 포함한 8명의 동지들을 이른바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으로 구속해 버렸다.

여성운동 1세대로서 활동가들의 대모(代母) 역할

▲ 13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뒤에 전공을 경제학에서 신학으로 바꾼 남편 박성준씨의 학위수여식에 참석한 한명숙 의원.
ⓒ 한명숙 홈페이지
2년 6개월 동안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온 그는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하고 본격적으로 여성운동가가 되었다. 13년간의 수형생활을 마치고 비슷한 시기에 출감한 남편 박성준도 전공을 경제학에서 신학으로 바꾸었다.

전두환 군사정권 말기 87년 2월에 그는 민주화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국 21개 민주여성단체가 연합한 '한국여성단체연합'의 결성을 주도했다. 여성연합은 이후 진보적 여성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며 민주화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고, 그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여성운동 1세대로서 여성운동 활동가들의 대모(代母)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국여성민우회 회장(1989∼1994년)과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1993∼1996)를 맡으면서도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 감사원 부정방지대책위원회 위원, 환경부 환경보전실무대책위원회 위원, 방송개혁국민회의 공동대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는 이후 1997년부터 2년간 미국 유니온신학대 객원연구원을 마치고 돌아와 남편과 함께 성공회대 시민사회복지대학원 NGO학과 객원교수로 활동하게 된다.

미국에서 돌아온 그에게 정치참여를 권유한 것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물론 그는 YWCA 총무 출신의 이희호 여사와도 가까운 관계였다. 김 전 대통령은 그를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기용한 데 이어 2001년에는 그를 초대 여성부장관에 발탁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 출범 당시 그를 환경부장관으로 기용했으며, 그는 환경부장관으로서 정부의 기관평가와 언론사의 국무위원 평가에서 모두 '톱'을 차지하는 역량을 과시했다. 이어 그는 2004년 총선에서 지역구(고양 일산갑)에 출마해 5선 의원인 한나라당 홍사덕 전 원내총무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해 대중정치인으로 변신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얘기할 때 빼놓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고 원활한 업무 스타일과 온화한 성품이다. 결국 30년 동안 여성·민간부문에서 활동한 경험과 재선 의원 및 두 번의 장관 경력 그리고 온화한 성품이 건국 이후 첫 여성총리로 만든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그가 과연 '사회 양극화' 해소와 대선을 앞두고 '정치 양극화' 조정이라는 과제를 함께 안은 정권 후반기에 메르켈 같은 추진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이다.

다만, 메르켈보다 그에게 더 큰 기대를 걸 수 있는 점은 메르켈의 독일 역사와의 만남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날 동독 시민들 대열에 뒤따라 뛰어든 것처럼 '약간 뒤처지는 일'이었던 데 반해, 그의 한국 역사와의 만남은 87년 6월항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늘 앞장서는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그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늘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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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4 16:29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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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학생에 전학 강요한 학교, 처벌 대상 아니다?

 

 

 

장애학생에 전학 강요한 학교, 처벌 대상 아니다?
교육권연대 단식농성 11일째, 10개 지역 181개 차별사례 인권위에 진정
텍스트만보기   김지숙(mjs0413) 기자   
"우리 아이에게 장애가 있음을 사전에 학교 측에 알리고 경남에 있는 한 초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그런데 담임교사로부터 교육이 어렵다는 이유로 강제 전학 명령을 받았다. 학교를 찾아가 사정하고 빌기까지 했으나 끝내 거부당했고 결국 우리 아이는 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 장애인교육권연대가 23일 인권위에서 장애인교육차별사례발표 기자회견을 가졌다.
ⓒ 김지숙
이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된 내용으로, 경남의 한 초등학교가 타 학교에서 전학 온 장애학생의 교육이 어렵다는 이유로 장애학생 부모에게 전학을 강요해, 해당 학생이 또다시 전학을 가게 되었다는 사연이다.

이외에도 지체 2급 장애 자녀를 둔 울산의 한 부모는 학군내 초등학교에 입학하려 하였으나 해당 학교에서 특수학급이 설치되어 있는 초등학교로 입학할 것을 강요했으며, 입학하고자 하는 학교에 다닐시 아이의 통합교육을 위해 부모가 상주할 것을 학교 측은 요구했다.

전국장애인교육권연대(공동대표 윤종술, 아래 장애인교육권연대)는 23일 오전 11시 국가인권위원회 11층 배움터에서 각 학교현장에서 발생한 장애인교육차별사례를 발표하고 전국 10개 지역에서 나타난 181건의 차별 내용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했다.

"특수교육진흥법, 법적 강제력 없어 실효성 부족"

특수교육진흥법에서는 '특수교육대상자에게 장애를 이유로 입학의 지원을 거부하거나 입학전형합격자의 입학을 거부하는 등의 불이익한 처분을 한 각급학교의 장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5장 28조)'고 규정되어 있다.

▲ 전국 10개 지역 181건의 차별사례
ⓒ 김지숙
현행 특수교육진흥법에는 장애학생 입학을 거부한 학교에 대한 벌금 규정은 명시되어 있지만, 입학 후 교육을 거부하거나 전학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처벌 조항은 명시되어 있지 않아 현행법으로는 장애 학생의 교육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 장애인교육권연대의 주장이다.

장애인교육권연대는 지난 13일 인권위를 점거하고 23일 현재(단식농성 11일째)까지 장애 학생 부모 20여명이 인권위 배움터(11층)에서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촉구하는 무기한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법적 강제력 부족과 지원 체계 부족 등의 문제점을 지닌 현행 특수교육진흥법으로는 장애학생의 교육권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법을 폐기하고 장애인교육권연대가 마련한 장애인교육지원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교육권연대 "인권위에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 권고 요구"

이날 기자회견에서 장애인교육권연대는 장애인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강조하며, 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차별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장애인교육지원법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 장애인교육권연대가 181건의 차별사례를 인권위에 진정했다.
ⓒ 김지숙
장애인교육권연대 도경만 집행위원장은 "언론의 관심을 갖지 못하는 수많은 차별은 묻혀 있을 수밖에 없고 가족과 장애인 당사자의 문제로 치부되고 있다"며 "4월 20일 장애인의 날에만 반짝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차별의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도 집행위원장은 "지난 2주간 접수된 10개 지역 181건의 차별사례 중 대부분이 초·중·고등학교에서 발생하는 문제"라며 "이것은 우리 사회가 가장 기본적인 교육단계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차별에 대해 눈감고 있다는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도 집행위원장은 또 "특수교육진흥법이 제정된 1977년에도 차별은 존재했고 전면 개정된 1992년에도 차별은 존재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장애인의 교육권은 지켜지지 못하고 차별은 오히려 더 증가하고 있다"며 "인권위가 진정된 내용을 조사해 교육부를 상대로 장애인 교육차별 관련 시정권고 및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권고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 후 장애인교육권연대는 181건의 진정 내용을 인권위에 접수했으며 단식농성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향후 지속적으로 교육차별 사례를 수집하여 정기적으로 집단 진정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또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위한 온라인(http://www.eduright.or.kr) 서명 운동을 진행하고 있으며 향후 전국부모결의대회 등을 개최해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의 필요성을 집중적으로 전개해나갈 계획이다.
장애인인터넷신문 위드뉴스에도 실렸습니다. www.with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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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사유제가 시장원리라는 엉터리 학자들

 

 

 

토지사유제가 시장원리라는 엉터리 학자들
[주장] 자유기업원 김정호·최승노 박사의 시장경제 옹호론 비판
텍스트만보기   남기업(namgiup) 기자   
자기모순적인 김정호ㆍ최승노 박사의 주장

자유기업원의 김정호ㆍ최승노 박사는 3월 13일과 20일 <한국경제신문>과 <문화일보>에 각각 토지(부동산)에 관한 내용의 칼럼을 기고했다. 이들의 주장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시장경제는 사유재산제라는 터 위에서만 제 기능을 할 수 있는데, 토지도 당연히 이 범주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사유재산제의 인정은 희소한 자원을 아껴 쓰도록 견인하는데, 토지사유제가 토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한다. ▲부동산 가격이 오른다는 것은 시장경제의 메커니즘 상 공급을 늘리라는 신호이므로, 이럴 때 정부는 공급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정책을 써야한다. 따라서 투기를 잡으려고 하는 보유세와 양도세 강화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런 주장을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대단히 잘못되었고, 논리적으로 '자기모순적'이다. 즉, 자신들이 앞에서 한 말을 뒤에서 뒤집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이런 주장을 아무 거리낌 없이 계속하는 것이 학자적 소신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어서인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 주장이 잘못된 여론을 형성하는 데에 일조하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진정한 사유재산제는 토지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공유하라고 명령한다.

김정호 박사가 옳게 지적하듯이 사유재산제는 인간의 노력과 기여의 산물을 그 사람의 것이라고 하는 제도를 말한다. 그래야 이기심에서 출발하든 자아실현 욕구에서 출발하든, 시장참가자는 더 싸고 질 좋은 상품을 만들고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사회 전체는 유익을 보게 된다. 아담스미스도 말했듯이 사유재산제가 사익과 공익을 결합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인 것이다.

필자도 위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뿐 아니라 개인이 노력한 것에 대한 소유를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에겐 자유가 없다. 다시 말해, 자유를 인정하려면 소유를 보장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토지가 아닌 일반 상품에서만 적용된다. 왜 그런지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토지는 인간의 노력의 산물 아니기 때문이다. 토지는 천부적인 자원으로서 인간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 양을 늘릴 수 없다. 토지가 절약의 산물인 자본, 필요하면 만들 수 있는 상품과 근본적으로 다른 면이 바로 이것이다.

또한 토지는 다른 것과 달리 우리 삶에서 필수불가결하다. 자본이 없으면 불편하지만 토지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출생으로 보나, 그 성격으로 보나 토지는 모든 사람(미래세대도 포함)의 재산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관점이다.

토지를 배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

▲ 정부의 강력한 단속과 아파트 분양권 전매금지 조치 등으로 화성 동탄신도시 주변 부동산중개업소들이 사무실 건물을 `임대'로 내놓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하지만 인간이 토지위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려면 배타적으로 이용ㆍ처분할 수 있어야 한다. 토지가 모든 사람의 것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함께 사용하면 엄청난 비효율과 낭비만 초래될 뿐이기 때문이다.

토지에 대한 평등권을 담보하면서 토지의 배타적 이용권과 처분권을 보장하는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토지에 대한 배타적 이용ㆍ처분권을 가진 자가, 그 토지가치에 비례하는 사용료를 내고 사용하도록 하면 된다. 즉, 토지 자체를 공동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에서 발생하는 '가치'만을 공유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토지는 낭비 없이 사용되고 토지 사용에서 배제된 사람도 토지가치를 공유하기 때문에 불만이 없어진다.

그런데, 놀랍게도 토지의 이익을 공유하는 것은 사유재산제에도 정확히 부합한다. 왜냐하면 토지에서 발생하는 이익(지대)은 개별토지소유자의 노력과 아무 관계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토지에서 이익이 발생하는 것은 자연적ㆍ정부적ㆍ사회경제적 원인에 기인한다. 즉, 경관이 수려하다던가, 정부가 도로나 학교 기차역을 세운다던가, 아니면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면서 모여 살게 되면서 토지가치는 발생ㆍ상승한다. 따라서 사회 전체가 생산한 토지가치를 사회전체가 공유하는 것이 노력과 기여의 대가를 보장하는 사유재산제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토지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사유화하는 것을 가리켜 불로(不勞)소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토지불로소득의 사유화를 인정하게 되면 토지투기가 일상적으로 발생해서, 국민총생산에서 토지소유자가 가져가는 비율을 커지게 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진정한 사유재산제의 항목인 사업소득이나 근로소득의 양을 줄이는 것으로, 명백한 사유재산제의 침해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져오는 사회 경제적인 피해는 얼마나 막대한가.

그런데, 김정호ㆍ최승노 박사는 토지는 사유재이며 토지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당연히 개별토지소유자가 소유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사유재산제를 '노력한 사람에게 그 사람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제도'라고 정의해놓고 말이다. 이 얼마나 자기모순적 주장인가.

토지불로소득의 사유화 인정은 명백한 사유재산제 침해

▲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회원들이 지난 2월 6일 오전 청와대 합동청사 앞에서 로또와 같은 판교분양을 앞두고 집값 폭등과 투기과열이 재현되는 있다며 판교 분양중단과 공영개발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사실 이런 것을 이해하는 데 무슨 대단한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토지와 다른 상품이 다르다는 간단한 사실을 인정하고 땅값이 어떻게 오르는지만 관찰하면 될 뿐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왜 그런 주장을 반복적으로 주장하는지, 필자로서는 정말로 이해하기 어렵다.

토지불로소득을 환수하는 것이 토지를 아껴 쓰도록, 즉 효율적으로 이용하도록 한다.

김정호 박사는 토지사유제, 즉 토지불로소득을 개인이 사유화하면 토지는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에게 배분된다고 말한다. 내집, 내차라야 잘 관리하고 아껴 쓰듯이, 내 토지라야, 즉 토지불로소득을 사유화할 수 있어야 토지를 잘 관리하고 효율적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정말 과연 그럴까? 정답은 "아니오!"이다.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양질의 토지가 유휴화ㆍ저사용되고 있거나 혹은 도시와 뚝 떨어진 곳에 난개발되는 것이 쉽게 발견된다. 다시 말해서, 도시 내의 토지가 유휴화 내지 저사용 되니까 도시가 자꾸 외곽으로 무질서하게 팽창한다. 이것이 바로 토지라는 생산자원이 효율적으로 사용되지 못한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반면에 토지불로소득을 환수하면 어떻게 되나. 앞의 것과 정반대의 현상이 발생한다. 토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소유한다. 도시안의 유휴지ㆍ저사용되는 토지가 모두 효율적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도시를 기형적으로 확대시키는 난개발의 가능성은 줄어든다. 또한 환경보존에 꼭 필요한 녹지와 개방지도 보존할 수 있게 된다.

토지와 코끼리와 다르다.

김정호 박사는 코끼리의 예를 들어가면서 토지사유제를 옹호한다. 즉, 코끼리의 사유재산제를 인정하는 태국에서는 코끼리의 숫자가 늘어났지만, 그렇지 않은 아프리카는 코끼리의 숫자가 줄어들었듯이, 토지불로소득의 사유화를 인정하면 이런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정호 원장은 정말로 토지불로소득을 사유화하면 토지가 코끼리처럼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정녕, 코끼리와 토지가 다르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아니면 알면서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인가.

토지는 이용의 대상이지 생산의 대상이 아니다. 토지불로소득을 아무리 사유화해도 토지가 더 늘어나지 않는다. 물론 토지불로소득을 사유화하면 투기가 발생하여 불로소득의 규모가 더 커진다. 하지만 이것은 생산의 대가, 혹은 서비스 제공에 대한 대가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번 소득을 열심히 펌프질해서 가져가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한다. 토지와 코끼리는 다르다. 코끼리를 사유하면 코끼리의 개체수가 증가하지만, 토지는 아니다. 사용의 대상인 토지는 배타적인 이용권과 처분권만 확실하게 보장하면 된다. 개인소유의 화장실을 개인이 깨끗하게 관리하듯이, 토지불로소득을 환수하면 토지는 효율적으로 이용되고 관리된다.

투기적 가수요, 교과서에 안 나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 재건축으로 조합원 등 입주자들이 막대한 시세차익을 본 서울 강남구 도곡동 렉슬아파트가 지난달 재건축을 끝내고 현재 입주가 한창이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최승노 박사는 지금 수요의 상당부분이 투기적 가수요라는 것을 진정 모른단 말인가?

김정호ㆍ최승노 박사는 말한다. 가격이 오른다는 것은 공급에 비해서 수요가 많다는 것이니 보유세나 양도세를 높여서 수요를 억제하지 말고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시장경제라고.

이 말은 기본적으로 맞다. 가격이 올라가면 공급을 늘려야한다. 그런데, 이것은 토지가 아닌 일반상품에만 맞는 말이다. 토지불로소득이 만연한 토지주택 시장에는 실수요라고 보기 어려운 토지불로소득을 노린 투기적 가수요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주로 강남대체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주택의 획기적 공급을 언급하기 때문에, 강남의 데이터들을 사용해서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살펴보자.

투기적 가수요의 증거는 넘쳐난다.

첫째, 이른바 '강남벨트'에 주택 소유 편중 현상이 극심한데서 잘 나타난다. 지난 2003년 11월 24일 행자부가 발표한 '전국 가구별 주택소유 현황'을 보면 강남(강남, 서초, 송파구)은 5만5000여 가구가 20만여 채(평균 3.67채) 주택을 소유하고 있고, 4만2000여 가구가 전국에 집을 세 채 이상(평균 5.1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가운데 8000여 가구는 아파트만 3채 이상(평균 3.8채)을 소유하고 있다.

둘째, 이른바 '강남벨트' 등에는 대출 등을 통한 투기적 가수요가 넘쳐나고 있는 데서 잘 나타난다. 작년에 한국은행이 열린우리당 오제세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 강남권과 경기도 분당, 용인 지역의 작년 주택담보 대출은 재작년 말과 비교할 때 7.9% 늘어난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다른 지역의 증가율보다 무려 세 배에 가깝다. 또한 작년에 강남, 분당, 용인의 주택 담보대출증가액이 전국 증가분의 43%를 차지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기할 만한 것은 같은 기간 전국 평균 집값 상승률이 1.6%였는데 비해 이 지역 집값은 8.4%나 올랐다는 사실이다.

셋째, 전세가격의 안정이 두드러진다는 데에서 잘 나타난다. <중앙일보> '조인스랜드'와 '부동산114'에 따르면 서울 강남구의 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은 2001년 51.4%에서 작년 6월 현재 31.7%로 떨어졌으며 분당은 34.4%, 용인도 32.6%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들 지역에 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이 전국 최저 수준에 해당할 만큼 낮다는 것은 투기적 가수요에 의해서 주택을 여러 채 사놓은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인 것이다.

자 어떤가? 강남벨트에 존재하는 수요의 대다수가 '실수요'가 아니라, '투기적 가수요'인 것이 확실하지 않은가? 실상이 이렇다면 최승노 박사는 1가구 다주택을 소유한 사람들이 집을 내놓게 해서 주택시장을 실수요자 중심으로 재편해야한다고 주장해야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시장경제 아닌가?

이렇게 하려면 토지보유세, 양도소득세, 개발부담금의 지속적인 강화를 통해서 토지불로소득을 더 많이 환수해야 한다. 그러면서 경제에 부담을 주는 다른 세금을 감면해야 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 사유재산원리에 정확히 부합한다.

그런데 정부의 작년 8ㆍ31대책은 이런 것과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지금도 집값이 잡히지 않고 투기가 자꾸 발생할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토지불로소득 옹호는 자승자박의 결과만 초래할 뿐

이렇게 말하면 두 사람은 '투기적 가수요'라는 말이 경제학 교과서에 안 나온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현실은 현실이 아니냐고.

그리고 이들의 주장대로 투기적 가수요를 문제 삼지 않고 공급을 획기적으로 늘리면 나중에 공급과잉이 되어 경기 침체로 이어지게 되면 그 후유증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시장경제는 상품과 서비스의 자유로운 교환이다. 사유재산권을 인정해주어야지 자원을 더 아끼고 더 많이 생산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토지는 다르다. 토지는 코끼리도 아니고 상품도 아니다. 토지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사회 전체의 노력의 결과이고 그것을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그것이 시장경제와 사유재산권에 정확히 부합한다.

자유기업원의 김정호ㆍ최승노 박사는 시장경제의 장점을 널리 알리려는 목표에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토지불로소득을 옹호하는 잘못된 지식을 유포시키면 국민들의 시장경제에 대한 혐오감만 더 커질 뿐임을, 다시 말해서 '자승자박'의 결과를 초래할 뿐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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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업기자는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의 사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뉴스앤조이와 대자보에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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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영 가슴은 달걀 프라이?

 

 

 

현영 가슴은 달걀 프라이?
2006-03-21 13:43:22

최근 드라마와 영화를 넘어 MC 등의 다양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현영의 과거 모델시절 사진이 네티즌 사이에서 시선을 끌고 있다.

현영과 또 다른 모델의 상반신 누드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은 달걀 프라이 모양의 판자. 다소 색다른 광고와 함께 최근 방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환한 웃음과 달리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현영의 모습이 낯설다는 평가다.

네티즌들은 "현영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군요", "광고가 참 자극적이네요"라는 등의 평을 전하고 있다.


김윤미 naki@dcinsi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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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노당펌 성추행

 

 

 

   

2006. 3. 22. 수요일
남로당 정세위

최근 한나라당 최연희 의원의 성추행 파문, 혹은 성추행을 벌이고서도 의원직을 계속 유지하겠다고 하는 뻣대기 파문으로 공직자의 성윤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만큼 그동안 있었던 국내외 정치권의 성추문 사건들을 모아 봤습니다.

굳이 애써 예전 기사들을 검색해 가며 정치권의 성추문 사건들을 들추는 이유는 고위 공직자들의 다채로운 성적 취향을 음미해 보기 위함도 아니고, 특정 정당에 대해 총체적 비난을 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도 아닙니다. 그저 성추문에 연루된 국내외 정치인들이 결국에는 어떤 사법적 심판 혹은 도덕적 비난으로 그 거취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던 제 개인적 호기심으로 자료를 취합하게 되었습니다.

▷ 장원 '팔베개 사건'

지난 2000년에는 장원 전 총선연대 대변인의 미성년 여대생에 대한 강제 성추행 사건이 있었지요. 장 씨는 2000년 5월 부산의 한 호텔에서 당시 18세의 여대생을 2시간여 동안 성추행한 혐의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습니다.

사실 국회의원들이야 평소에도 뇌물수수, 특혜비리, 재벌과의 결탁 등 각종의 다양한 불법행위와 친숙했기에 이번 최연희 성추행 사건도 어찌 보면 그리 놀랍지 않았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세칭 '장원 팔베개' 사건으로 불렸던 이 사건은 성추행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는 것을 보여줘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 해양수산부 고위 공무원의 20대 여성 성추행 사건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일입니다. 지난 2006년 2월, 해양수산부 고위 공무원이었던 47살의 유 모 씨가 술에 취해 강남역 출입구 앞에서 전단지를 돌리던 24살의 정 모 씨의 신체를 만지는 등 성추행을 벌인 것으로 밝혀진 사건이죠.

이 사건으로 유 모씨는 불구속 입건되었습니다. 사실 확인은 어려우나 당 사건의 피해자인 정 모 씨가 이때 줄무늬 스타킹을 입고 있어 유 모 씨가 생선 비늘로 착각을 해 투철한 직업정신에 입각한 성추행이었다는 후문이 있었습니다만... 물론 농담이겠죠.

▷ 우근민 전 제주도지사 여성단체 지부장 성희롱 사건

지난 2002년 1월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당시 우 전 지사는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여성 표심을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서 여성단체 지부장을 자신의 집무실로 초대했다가 상식 이하의 스킨십을 감행해 불거졌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우 전 지사는 성희롱 피해 여성에게 1천만원의 손해배상금을 물라는 법원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재선이 걸려 있는 중요한 상황에서 어떻게 여성단체의 장을 불러 성희롱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분들 많을 텐데요. 어쩌면 우리나라의 성추행 사건과 관련된 근본 핵심을 이 사건이 잘 말해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남성들 혹은 권력자들은 상대 여성 혹은 피권력자에게 마치 우리는 원래 친했지 않냐는 듯 스킨십을 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특별한 애정표현이요, ‘일종의 시혜다’ 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서 우 전 지사도 사건이 불거진 후 "자신은 친근감을 표시했을 뿐이다. 정치인으로서의 제스처였을 뿐이다."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정말 억울한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 억울함은 남성들에게, 혹은 권력자에게 상대는 나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존재다라고 하는 평등의 개념이 아예 존재치 않았기 때문에 억울해 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 김성호 전 국회의원과 교포여성의 성추문 사건

지난 2000년 국정감사 차 미국을 방문했던 당시 민주당의 김성호 의원이 재미 교포였던 차 모 여인과 있었던 성추문 사건입니다.

당시 차 모 여인은 김 전 의원이 자신을 2차례 강간했다며 피해보상으로 1천만 달러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 했었고 김 전 의원도 사실무근이라며 차 모 씨를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하며 불거졌던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이후 차 모 여인이 자살하면서 당 사건의 사실관계는 확인할 길이 묘연해져 버렸지요. 이 사건에 대해 김 전 의원은 월간조선이 사실확인도 없이 무책임한 보도를 했다며 이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 정두언 의원의 경향신문 여기자 성추행 사건

지난 2003년 10월28일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이 서울시 정무부시장이었던 시절, 서울시청 출입기자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경향신문 여기자를 뒤에서 껴안는 성추행을 저지른 바 있습니다. 다음 날 그는 기자실을 찾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술기운에 실수한 것 같다,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머리를 숙였었죠. 그리고 이 사건으로 정 의원은 총선시민연대에 의해 낙천 대상자로 지목되었지만 결국 '배지'를 달았습니다.

이번 최연희 의원 사건과 형태상, 성격상 가장 유사한 사건이라 하겠습니다만... 뭐랄까요. 시대를 앞섰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던 행운아라 해야 할까요. 아니면 성추행 후에도 국회의원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특정 정당의 전통이라고 할까요.

▷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의 '가슴이 탱탱' 발언

지난 2000년 10월 23일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은 출입기자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폭탄주를 마신 뒤 "올브라이트(당시 미국 국무장관)와 서로 포옹한 적이 있었는데 안아보니 가슴이 탱탱하더라"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성희롱의 무대를 국제무대로까지 확대했던 사건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당 사건 이후 이 장관은 시민단체와 여성계의 사퇴 압력을 받았지만 2001년 3월까지 장관직을 유지했습니다.

▷ 이경재 의원의 성희롱 발언

2003년 12월 23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정개특위 한나라당 간사였던 이경재 의원은 정개특위의 일방적 의사 진행을 막기 위해 위원장석에 버티고 있던 김희선 열린우리당 의원에게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습니다.

"다른 여자가 우리 집 안방(위원장석)에 누워 있으면 주물러 달라는 거지."

글쎄요.. 가끔은 장모님이나 부인 친구들이 놀러 와 안방에 누울 수도 있을 텐데요.

아무튼 이 사건으로 김 의원 측은 여성부에 성희롱 발언에 대한 조사를 요구해 여성부로부터 '남녀차별행위'라는 결정문을 받긴 했습니다만 이 의원은 현재 3선 의원이 되었죠.

언젠가는 정치인의 성추행 전력이 재임, 혹은 재선에 가산점으로 작용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 본 기사는 남로당(www.namrodang.com)에서 제공합니다. 퍼가실 때는 출처를 명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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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 &quot;9년만에 보니 팬들 많이 삭았군요&quot;

 

 

 

신해철 "9년만에 보니 팬들 많이 삭았군요"
[머니투데이 스타뉴스 유순호 기자]


1990년대를 대표하던 록그룹 넥스트(N.EX.T)가 9년만에 원년멤버들을 다시 모아 가요계에 컴백했다.

넥스트는 24일 오후 8시 서울 홍익대 인근 한 클럽에서 새 리메이크 앨범인 5.5집 '리게임(Regame)'의 발매 기념 쇼케이스를 열고 본격 활동을 알렸다.

이번 앨범을 위해 1993년 넥스트 창단 멤버인 신해철 김세황 김영석 이수용이 9년만에 다시 뭉쳤고, 5기 멤버 데빈 리와 새 키보디스트 지현수가 합류 6인조 그룹으로 재탄생했다.

이날 넥스트는 1집 수록곡 '영원히'의 리메이크 버전으로 무대를 열며 쇼케이스에 모인 500여 팬들을 열광시켰다.

신해철은 오프닝 곡을 마친 후 "9년만에 보니 (팬들이) 많이 삭았다. 넥스트의 팬 확보 전략은 우리끼리 새끼를 치는 것이다. 이렇게 새끼를 쳐서 많이 모여준 팬들이 장하다"는 농담으로 9년만에 팬들을 만난 뿌듯한 감정을 표현했다.

이어 '프렌즈' '인형의 기사' '더 드리머'의 리메이크 버전, 그리고 신곡 '라스트 러브 송'을 선보였으며 신해철의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곡 '그대에게'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마지막 무대 인사에서 신해철은 "넥스트는 2006년 6월 6일 6시 6분 666앨범으 작업에 들어갈 것이고, 5월중에는 다년간 계획해 왔던 심포니 넥스트 공연인 넥스트와 로얄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열 것이다"라고 활발한 컴백활동을 예고했다.<사진=박성기기자 musict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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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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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억소녀

 

 

4억소녀 몸매노출
2006-03-23 17:19 | VIEW : 5,299

4억소녀, 김예진 글래머몸매 노출…
-3월 24일부터 SK텔레콤 통해 ….
-필리핀 세부 막탄 국제공항, 에메랄드빛 해변에서의 과감한 포즈 단연 압권


휴대폰으로 올 봄-여름 유행 패션 아이템을 미리 볼까? SBS 진실게임을 통해 알려진 4억소녀 ‘김예진’이 숨겨진 글래머 몸매를 공개했다.


웬만한 연예인보다 더 인기있는 ‘4억소녀 김예진’은 현재 의류 쇼핑몰 CEO 답게 올 봄-여름 유행할 패션 아이템을 소품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체크하면서 연예인 화보집 이상의 섹시화보집을 제작했다. 3박 4일 동안 진행된 촬영은 전문 패션기자와 패션 전문 사진작가에 의한 기획 화보집으로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만큼 완벽한 화보집을 제작하였다.

더불어 큐트(CUTE), 로맨틱(ROMANTIC), 섹시(SEXY)의 컨셉에 맞는 3개 세트를 제작하여 촬영이 진행되었으며, 총 의상 벌 수만 50벌에, 촬영분량만 10,000여장에 가깝다.
  

의상은 밀리터리 룩과 핫팬츠와 탱크탑, 실크 원피스, 비키니, 란제리 룩으로 올 봄과 여름 유행 패션을 미리 감상할 수 있고, 김예진 만의 풋풋함이 배어나오는 순수함과 과감하고 도발적인 포즈의 섹시함을 감상할 수 있다.


3월 24일부터 SK텔레콤 섹시화보집을 통해 서비스되는 이번 모바일 화보집은 1차분으로 총 300여장의 사진이 서비스 되며 현재 2차 서비스를 위해 추가 촬영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4억 소녀? “이젠 24억 숙녀랍니다”
SBS “‘4억 소녀’ 수익이 아니라 매출액”
연간수익 4억원(?) '부가세 간이과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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