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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고함(孤喊)] 숭례문 화재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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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제안하면 그게 무슨 국민모금인가

대통령이 제안하면 그게 무슨 국민모금인가

[[오마이뉴스 고태진 기자]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등 인수위 위원들이 11일 오전 서울 숭례문 화재현장을 방문해 정정기 서울소방재난본부장으로 부터 상황 설명을 듣고 대책 등을 지시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10일 밤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 복원을 위한 국민모금운동을 제안했다. "정부 예산보다는 국민이 십시일반으로 참여하는 성금으로 복원하는 것이 국민들에게도 위안이 되고 의미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취지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한푼 두푼 모아 우리 국보1호를 복원한다는 것은, '태안의 기적'에서 보듯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인이 이러한 국민모금운동을 제안한 순간, 이러한 아름다움은 이제 볼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이것은 이명박 당선인이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다.

모금운동 의미 실종시키는 대통령 당선인의 부적절한 제안

일단 대통령 당선인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자. 국민모금운동이라는 것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부나 대통령이 제안하는 운동은 이미 국민모금운동이 아니다. 이명박 당선인은 크게 착각하고 있다. 이 당선인은 앞으로 이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직도 국정을 책임질 자세가 되어있지 않은 것 같다.

앞으로 10여일 후면 대통령으로서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될 사람이 제안하는 국민모금운동이 과연 순수하게 국민들의 자발적 모금운동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관이 나서서 주도하고, '친박신문'들의 대대적인 여론몰이를 통해 이 운동이 전개되지 않을까? 흡사 '제2의 금강산댐 모금운동'이 될 것이다. 이미 이명박 당선인의 입에서 국민모금운동이라는 말이 떨어진 순간 국민모금운동은 실종된 것이나 다름없다.

한나라당은 이번 숭례문 화재 사건이 발생하자. 예의 그 '노무현 탓'을 하고야 말았다.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는 “노무현 정권이 그 동안 안전 업무에 관해 얼마나 허술했는지 엉뚱한데 신경을 쓴 결과가 결국 이런 비극으로까지 가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제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하고 나면 모든 정치권력을 가지게 되는 한나라당은 누구 탓을 하게 될 지 궁금하다.

물론 이번 숭례문 화재사건에 있어 현 정부의 책임도 적지는 않겠으나, 현재 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숭례문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한 이명박 당선인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에 검거된 숭례문 방화용의자는 숭례문을 방화 대상으로 정한 이유를 "숭례문이 종묘 등 다른 문화재에 비해 경비시스템이 느슨하고, 접근이 용이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평소에도 밤에 일반인이 몰래 들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허술한 안전대책이 결국 이런 일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이명박 당선인이 숭례문을 개방할 당시, 좀더 숭례문에 대한 안전 대책을 철저히 강구했더라면 막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는 말이다. 아무리 대통령에 곧 취임할 사람이지만 과거의 잘못과 책임에 대해서는 먼저 반성부터 하고 볼 일이다.

그런데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제안하는 국민모금운동이라니? 이것은 정부 예산을 줄이는 동시에, 국민모금이라는 감동적 사건으로 국민의 관심을 돌림으로써 과거의 책임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희한한 실용주의가 아닐 수 없다. 국민이 무슨 '봉'인가?

삼성중공업이 국민들에게 기름제거 자원봉사를 제안한다면?

또한 이것은 비유하자면 삼성중공업의 크레인선이 원유유출사고를 내고는 국민들에게 자원봉사를 제안하면서 "우리가 돈 들여 할 수도 있지만, 서해안에 가서 자발적으로 기름 좀 닦으면 위안도 되고 의미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국민이 무슨 '바보'인가?

이명박 당선인은 이제 자신의 지위와 책임을 명확히 깨달아야 한다. 정부나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모금운동이나 자원봉사를 제안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국민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이미 이 당선인은 국민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 모금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것이다.

또한 이 당선인이나 한나라당은 이제 남 탓이나 하고 비판에만 몰두하는 그 간의 관성을 버리고 스스로의 책임과 의무를 무겁게 생각하는 사고와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취임 이후 구체적 방안을 논의할 것은 국민모금을 어떻게 할 것이냐가 아니고, 이런 사건의 재발을 막을 수 있는  예방 대책과 구체적 시스템의 재정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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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기업은 반민주, 반자본주의이다&quot;

 

 

친기업은 반민주, 반자본주의이다"
  [기고] 이명박 당선인의 친기업 행보를 바라보며
 
  2008-02-12 오전 12:33:47
 
   
 
 
  '실용'에 이어 이명박 정부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친기업'(pro-business)이다. 듣기에 그럴싸하다. 그러나 차기 정부가 내세우는 실용주의가 낮은 수준의 구호에 머무르면서 무분별한 개발 정책의 추진, 각종 사안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배제하는 '초단기 실적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아니다 다를까, 대운하 건설, 통신비 인하, 영어 교육 등 차기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주요 정책 과제에서 벌써 그런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그럼 친기업은? 이명박 당선인은 스스로 친기업 대통령임을 자랑스럽게 외치고 있다. '반기업' 정서가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해온 전국경제인연합회 같은 단체와 조·중·동 같은 신문들은 쌍수를 들어 친기업 이명박 정부를 환영하고 있다. 정부가 고용과 가치 창출 같은 경제의 핵심 역할을 하는 기업과 친한 게 문제없어 보인다. 더군다나 경제만 살리면 무엇이 일어나도 괜찮다는 쓰나미 같은 여론이 있는 판에 친기업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함직도 하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친기업은 반민주주의적이며 반자본주의적 생각이다.
  
  친기업은 왜 반민주주의적인가? 정치적 불평등과 정부에 대한 신뢰의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특정 기업/기업 집단은 보유하고 있는 자원, 사회적 위상, 법적 특전 등의 측면에서 개개 시민들보다, 또 상대적으로 취약한 기업/기업 집단보다 훨씬 큰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하면 더 많은 부는 곧 더 많은 권력과 이어지기 때문에 친기업은 정치적 불평등의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물론 권력과 부의 불평등은 일정하게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정부는 공평한 조정자이며 따라서 강력한 힘을 소유한 사적 집단에 대한 제어자로서 기능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친기업이라는 이름으로 특정 기업/기업 집단이나 부유한 계급 일반에 편향된 정책을 편다면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와 정부에 대한 공공적 신뢰의 위기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친기업은 왜 반자본주의적인가? 경쟁과 선택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부는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도록 공평한 심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사실 자유시장주의자는 기업을 보호하는 정책 수단를 지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평등을 조장하는 왜곡된 형태의 보호주의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와 기업은 경제 성장, 고용 창출 등의 주역이라는 점에서 상호 밀접할 수밖에 없지만 이는 대체로 특정 기업/기업 집단의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통로로 왜곡되기 십상이다. 한편 정부는 경제를 제대로 이끌기 위해 요구되는 지식이나 역량에서 기업보다 상대적으로 뒤쳐지기 때문에 기업의 논리에 포획되기 쉽다. 따라서 정부의 결정은 특정 기업 또는 기업 집단에 유리하게 작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요소들은 공정한 경쟁과 선택의 자유를 해치는 반자본주의적 결과를 낳는 것이다.
  
  친기업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친시장'(pro-market)이 그 답이다.
  
  친시장은 무엇인가? 친시장의 근본은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다. 자유주의 정치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경제는 권력에는 한계가 있고 남용되는 권력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 견제되어야 한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대기업에 대한 특혜 폐지, 강한 반독점 정책, 기업의 로비에 단호한 정치, 기업과 관료들의 부패에 대한 엄격한 법적 조치, 조세정의의 실현 등등이 친시장 정책의 핵심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개혁적인 주장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지난 2003년 6월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제일의 가치로 내세우는, 국제적 권위와 신뢰를 인정받는 <이코노미스트>가 창간 160주년을 맞아 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특집기사의 핵심내용이다. 그 기사는 친기업적 사고와 정책이 불러일으키는 오늘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위기를 짚어보는 취지의 특집이었다.
  
  이명박 정부와 조ㆍ중ㆍ동 등이 친기업 찬가를 부를 때 시중에는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라는 절망적인 농담이 횡행하고 있다. 그리고 친기업하면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는 무지막지한 기대가 나라를 뒤엎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면서 사회의 양극화가 더욱더 확대되는 형태의 극히 왜곡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말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런 것이 제대로 안 될 경우 정부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도 종래에는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족 하나. "기업이 자본의 힘을 이용해 일종의 특권 체제를 만들어 정부와 법, 즉 국가에 도전하려는 시도는 애초에 분쇄되어야 한다." 이미 200여 년 전쯤에 미국의 3대 대통령 제퍼슨이 기업의 사회적 지배력 확대를 우려하며 한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부가 나서서 기업의, 그것도 대기업의 특권 체제를 더욱 강화하려 애쓰고 있다.
   
 
  김평호/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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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고함(孤喊)] 숭례문 화재현장에서

 

 

도올고함(孤喊)] 숭례문 화재현장에서


[중앙일보 김용옥.임진권] 예부터 회록지재(回祿之災)라는 말이 있다. “받은 녹(祿)을 되돌리는 재난”이라는 뜻인데, 재난 중에 최악의 재난이라 하겠다. 천지자연으로부터 받은 녹을 천지자연으로 되돌리는 재난이니 문명을 향유하려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재난일 수밖에 없다. 도둑맞은 물건은 어딘가 뒹굴고 있어 되찾을 수도 있다. 회록지재란 예부터 화재(火災)를 일컫는 아언(雅言)이었다.

 


어젯밤 TV 뉴스 속보를 볼 때만 해도 연기만 뿌옇게 올라온다 했고, 그다지 큰 불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다리차를 탄 소방관들이 물을 뿜어대고 있어 그슬리는 차원에서 끝나버리면 그래도 상량(上樑)의 묵서(墨書)라도 보존되어 복원의 명분이라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국보 1호 숭례문 전소.”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소식이었다.

11일 아침 나는 숭례문으로 달려가 보았다. 너무도 참담한 모습이었다. 불세출의 서성(書聖),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도 과천에서 내왕할 때면 해 저무는 줄 모르고 우뚝 선 채 황홀하게 쳐다보았다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현판 글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에겐 그것이 일차적 관심이었다. 현판이라도 우선 떼어냈어야 했거늘… 쳐다보니 현판이 보이지 않아 우선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탐문해 보니 그것조차 떼어내는 과정에서 떨어뜨려 손상이 되었다고 한다. 하여튼 개판이다.

국보 1호라는 하중감 때문에 소방관들의 대처가 본격적이지 못했고, 또 문화재청의 안일한 상황 판단이 결국 전소라는 수치스러운 참사를 지어낸 것이다. 국민들이 빤히 쳐다보는 가운데 진화 장비를 완벽하게 갖춘 50여 대의 소방차가 출동해 있으면서도 그냥 훨훨 태워버린 것이다. 오호라!

“기분이 나빠요.” 친구에게 전화 거는 어느 어린 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그리 기분이 나쁜가?

나를 쳐다보더니 재빨리 휴대전화를 접고 정중하게 답변한다.

“어찌 되었든 국보 1호잖아요. 그런데 저렇게 처참하게 무너진 꼴로 우리 눈앞에 놓여있는 모습이 뭔가 불길한 국운을 상징한다는 느낌도 들어요. 국민 누구든 가슴이 아플 거예요. 아니, 부끄럽겠죠.” 중앙대학교 약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란다. 이름은 신동호.

―국운? 좀 거창한 얘기지만 일리가 있군. 저렇게 처참하게 무너진 꼴이 노무현 정권의 마지막 모습일까, 이명박 정권의 시작하는 모습일까?

“서로가 서로에게 덮어씌우겠죠.”

젊은이들의 지나치는 이 한마디가 오늘날 우리나라 세태의 전부를 말해준다.

“부끄럽다”는 그 한마디에 더 첨삭할 언어가 어디 있겠느뇨?

맹자의 혁명사상을 접한 신진유생 삼봉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고루한 친원파들과 대결, 나주 소재동 등지로 귀양을 다니면서도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와 결탁해 혁명을 모의하고 결국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다. 1392년 7월 17일 신왕조를 개창하고 태조 3년(1394) 10월 25일에는 한양 천도를 감행한다. 개성의 지세가 쇠하였다고는 하나 개성 문벌 귀족의 틈바구니 속에서는 도저히 새로운 국가,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궁궐을 조성할 때도 하륜(河崙)은 무악을 주산으로 삼자 했고, 무학대사는 인왕을 주산으로 삼자 했지만, 오늘날의 백악현무(白岳玄武), 인왕백호(仁王白虎), 낙산청룡(駱山靑龍)의 모습으로 궁궐과 도성의 모습을 결정한 것은 삼봉 정도전이었다. 삼봉이 꿈꾼 것은 불교라는 고려의 낡은 이데올로기를 불식할 수 있는 새로운 유교이념! 그 유교이념을 형이상학으로서가 아니라 형이하학으로서 도시에 구현하고자 했다.

태조 4년(1395) 삼봉은 새 궁궐의 전각 이름을 지었고, 5년에는 도성 8대문의 이름을 지었는데 『시경』과 『서경』에서 그 아름다운 뜻을 취하였다. 특히 4대문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오행(五行)에 배정시켜 그 이름을 결정하였다. 인(仁)은 동방(東方)이므로 동대문에 배속되고, 의(義)는 서방(西方)이므로 서대문에 배속되고, 예(禮)는 남방(南方)이므로 남대문에 배속되고, 지(智)는 북방(北方)이므로 북대문에 배속된다. 이렇게 해서 동대문의 이름이 흥인지문(興仁之門)이 되고,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 되고, 북대문은 소지문(炤智門)이 되었다. 그리고 오행 중 중앙에 해당하는 신(信)은 종로 중앙의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중 유독 동대문만 갈 지(之) 자가 들어갔는데 그것은 그 지역이 타 지역에 비해 낮고 지세가 꺼져 있어 땅 기운을 돋우어 주자는 의도로 갈 지를 더하여 넉 자 현액을 걸어주었다 한다. 그런데 숭례문 현액이 특이한 점은 타 현액이 모두 횡으로 쓰여 있는데, 이 숭례문 현액만 위에서 아래로 써 있는 종액(縱額)이라는 것이다. 일설에는 서울 도성의 정문인 남대문은 귀한 백성이 드나들게 되므로 서서 맞이함이 예절에 합당하다 하여 세워 달았다 한다. 타설에는 남방 화(火)에 해당되는 글씨인 까닭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으로 세워 달았는데, 그것은 한강 건너 남쪽 조산(朝山)인 관악산의 불길을 불로 막아, 그 관악의 화기가 서울 도성을 범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숭례문은 자신이 불길에 휩싸임이 없이 기적적으로, 600여 년의 성상을 견디었다. 서울에 남아 있는 건물로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화려한 다포(多包)양식을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목조였다. 나머지는 모두 임란 이후에 재건된 것이다.

1962년 남대문을 중수(重修)할 때 3개의 대들보가 발견되어 그 정확한 건축연도를 알 수 있는데, 남대문은 도성의 제2차 공사를 완료한 후 12일 뒤인 태조 5년 10월 6일에 상량하고, 그 2년 후인 1398년 2월 8일에 준공하였다. 그러나 남대문 자체가 도성의 연속된 성로(城路) 위에 지은 것인데 이 도성을 짓기 위하여 지반을 돋울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가라앉으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세종조에 영의정 황희(黃喜) 이하 여러 대신이 건의하여 근본적으로 남대문을 신축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세종 30년(1448) 3월 17일 상량하였고 5월에 준공하였다. 그 뒤 성종 10년(1478)에 한 번 더 개축한 사실이 대들보로 확인된다.

남대문은 이상하게도 임진왜란 때도, 병자호란 때도 화를 면했다. 경복궁이 임란으로 송두리째 잿더미로 화하여 대원군이 재건하기까지 273년 동안을 인왕산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는 공궐(空闕)로 남아 있었던 사실에 비한다면 숭례문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흥망성쇠를 기억하고 있는 혼이요 얼굴이었다. 지금 우리는 서울이 다 터져 있어 도성팔문의 의미를 망각했지만, 과거에는 저녁 10시경 인정(人定)에 8문을 다 닫고 새벽 4시경 파루(罷漏)에 일제히 여는 통금 제도가 정확히 유지된 성곽 도시, 한성(漢城)이었기 때문에 남대문의 의미는 막중한 것이었다. 여기를 통과치 않고서는 한성 진입이 불가능했다.

1905년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한 후, 1906년 황태자(훗날 大正天皇)가 한국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때 남대문을 통해 들어올 수 없다고 강짜를 부리며 남대문을 대포로 분쇄해 버리겠다고 제의했다. 이에 민중의 여론이 들끓자 그들은 융희 원년(1907) 남대문에 연결된 북쪽 성벽을 헐어 길을 내었고 이듬해에 남쪽으로 연결된 성벽을 헐어 달랑 남대문만 남겨놓았던 것이다.

왜놈들이 헤이그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을 때도 우리 민족은 이 남대문 주변으로 치열한 항쟁을 벌였다. 일본군은 남대문 성벽에 대포와 기관총을 설치하고 마구 쏘아댔다. 상인, 노동자, 남녀 학생, 부녀자들까지 용감무쌍하게 항전을 계속했으나 결국 피를 흘리며 압제의 굴레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6·25전쟁 통에도 광화문은 무참히 파손되었지만 남대문만은 그 원형이 훼손되지 않았다. 억센 운명을 타고난 우리 민족의 600년 유물, 국보 1호, 그 숭례문이 덧없이 하룻밤 사이의 회록지재로 사라진 것이다.

웬 일일까?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방화를 의심하거나 문화재 관리소홀을 탓하여 부질없는 경비 예산이나 늘리는 호들갑일랑 이제 되풀이하지 말자! 근원적으로 문제되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죄악의 반성이요, 우리 사회의 신뢰의 부족이요, 이 민족 혼백의 타락이다.

세종대왕은 이 민족의 구원한 미래를 위해 우리 민족의 독창적 문자인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2년 후에 남대문을 신축하여 오가는 백성들에게 위용과 믿음을 주었다. 그런데 지금 새 정권은 기껏 생각한다 하는 것이 “영어몰입교육”이요, 회록지재보다 더 무서운 재앙인 대운하 강행에 혈안이 되고 있다. 정부 기구 통폐합 운운도 어떤 합리적 원칙이나 철학이 엿보이지 않는다. 대선 전의 민생 공약은 실종되어만 가고 있다. 과연 남대문의 무너진 흉측한 모습을 과연 우발적 사건으로만 돌릴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떠나가는 그 젊은이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여보게! 부끄러워 말게. 문화재는 이제 자네 머릿속에서 솟아나와야 할 것이 아닌가? 자네들이 컸을 때 삼봉이 구상한 코스모스보다 더 위대한 작품들로 이 땅을 수놓기 바라네.”

5시간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해 완전히 무너져 내릴 때까지 걸린 시간. 불은 10일 오후 8시40~50분쯤 났다. 10일 자정쯤 건물 천장에서 화염이 치솟았고, 11일 오전 1시쯤 2층 누각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불이 난 지 5시간 뒤인 오전 1시50분부터 석반을 제외한 2층 누각 전체와 1층 누각 대부분이 무너졌다.

글=도올 김용옥 기자, 사진=임진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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