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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평등, 박애의 맑스적 역설

                                                                                  에티엔 발리바르 씨 
                                          (http://myhome.naver.net/skreds/images/Balibar(100x98)89.gif)

 
 발리바르에게는 맑스주의적 사유의 전통을 철학의 언어를 경유해 정리해 내는 정말로 뛰어난 재능이 있는 듯 하다.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처럼 기존의 철학적 전통과 대별되는 맑스의 주장을 진리인 양 서술하거나, '포스트 모던'하게 반전과 아이러니의 지점을 포착해 내는 데 치중하지 않는다. 발리바르의 서술 스타일은, 맑스의 주장들이 어떻게 새로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데 있고, 기존의 지평을 넘어서는 그 새로운 것들이 그 자체 속에서 어떻게 갈등하고 있는지를 그려내는 것이다. 맑스의 전복적인 주장들은 한 편으론 마치 진리를 잡은 듯한 생생한 경험을 제공하면서도, 그 서술의 맥락에서 벗어나 사고할 때는 이내 여러 가지 모순들로 가득 찬 것으로 경험되고는 한다. 발리바르의 글에는 논리적 궁지(aporie)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표현을 통해 그는 모순적 경험들을 통일해 내기 보다는 열어둔 채로 놓아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맑스주의에 관하여 최소한 현존하는 최고의 교사라는 평가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 정리해 놓은 글은 1989년에 쓰인 <맑스라는 이름의 자코뱅?>이라는 짧은 글로, 19C 혁명의 표어였으며, 근대 정치에 그 이념적 지평을 제공하는 것인 자유, 평등, 박애와 맑스의 사유의 관계는 무엇인지, 맑스가 무엇을 새롭게 도입했으며, 그것이 그 개념들 속에 어떤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를 설명하는 글이다. 읽은 것을 정리해 볼 요량으로 본문을 거의 긁은 것이라 거칠고 재미도 없지만, 어느 정도는 최근에 이글루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페미니즘에서 시작하여 이제 인권과 윤리의 문제로 나아간-의 맥락과도 닿아 있지 않나 싶다. 



 <맑스라는 이름의 자코뱅?>, 에티엔 발리바르

 발리바르는 프랑스 혁명을 역사적 단절의 순간으로 이해한다. 혁명은 그것을 "낳았던" 원인들의 축적을 그 효과들 속에서 넘어서는, 역사라는 직물의 단절이다. 이 단절이 제공한 사유와 가능성들의 개방이 닫힌 것은 19C 후반, 제국주의, "사회적 문제"의 제도화의 시작, 일반화된 학교교육 등이 도입되고 나서이다. 이 때가 되어서야 자유, 평등, 박애라는 표현은 안정되고 일의적인 의미를 소급적으로 부여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맑스는 아직 혁명이 열어 놓은 개방성, "단절의 칼날"위에서 사유하고 있다. 그 가능성 속에서 맑스에게(물론 승리할 부르주아들이 아닌 다른 혁명의 세력들에게도), 자유, 평등, 박애는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박애

 박애라는 논쟁적 표어의 채택은, 노동에 대한 권리(droit au travail)가 인간의 권리들과 헌법상의 원칙들에 끼어드는 것(그렇게 되면 그 형식적 안정성은 완전히 흔들리게 될 것이다. 최소한 소유권이라는 쟁점에 있어서도)을 "박애주의적" 시각에서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노동에 대한 권리가 불러 일으킨 쟁점에 대해서는 조앤 W. 스콧의 <페미니즘 위대한 역설>을 참조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9세기 프랑스 혁명의 전개와 더불어 그 속에서 여성의 권리라고 하는 개념이 어떻게 얽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글이다.  이 책은 여성의 권리라고 하는, 층위의 다양성은 있겠지만, 지금 많은 사람들이 사고하는 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주제가, 얼마나 논쟁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박애는 또한 그것의 수행자로서 국가나 한 사회를 상정하는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맑스의 구호는, 박애의 실천적 지평인 국가를 뛰어넘는 것이며, 소유라는 개념이 갖는 균열을 통해 국민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둘로 분할하는 혁명적 주체성을 정초한다. 여기서 인간의 인류애라고 하는 관념이 그 정치적 기능의 폭로 속에서 해체됨과 더불어 여전히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는 역설이 출현하고 있다.

  자유
 
 자유는 한 편으론, 특권계급을 쳐부수어 주권을 집단적으로 쟁취하고 그리하여 "시민"이 되는 "주체"들의 운동(능동적)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공리주의, 자유경쟁, 그리고 그 결과 노동력으로서의, "상품"으로서의 개인(수동적)이다. 맑스는 <자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가 그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품 유통 또는 교환의 영역은 사실 천부인권의 진정한 낙원이었다. 
     여기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유, 평등, 소유, 그리고 벤담이다. 

 
이 문장을 통해 맑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권의 법적 형식들(자유와 "형식상의" 평등)을 밑받침하는 이데올로기는 상품의 일반적 유통의 형식들 그 자체, 특히 그 나름으로 인간의 "노동"을 합리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 수 있게 하는 형식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단순히 자유라고 하는 것을 이데올로기로 환원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다. 임노동 착취가 억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봉건적 군주, 주인은 아니다. 부르주아는 자본의 축적을 방해하는 봉건적 착취의 족쇄를 끊어 버렸으며, 바로 그 자리에 새로운 착취 관계를 집어 넣었다. 자유란, 한 편으로는 능동적이며 임노동 관계가 강요하는 불평등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할 수 있고, 한 편으로는 봉건적 관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상품이 '될' 권리를 의미한다.   


  평등 

 따라서 맑스의 눈에 '평등한 권리'란 실제적 불평등을 하나의 공통의 척도로, 형식적 평등으로 환원시키는 속성일 따름이며, 평등은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법적 이데올로기 바로 그것으로서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적 시니피앙이다. 이 맥락에서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란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착취를 위해 피착취자인 노동자를 동원하는 장치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맑스는 공산주의 사회로의 계기적 단계들을 규정하며, "평등 노동, 평등 임금", "능력에 따른 노동과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엥엘스는 평등을 프롤레타리아적인 것과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분할하였다. "프롤레타리아들의 평등에 대한 요구는 계급의 진정한 폐지를 그 내용으로 갖는다. 모든 평등의 요구는 필연적으로 부조리 속에서 죽어가게 된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선, 이것은 정치 투쟁으로서의 계급 투쟁은 정치의 보편적 언어(시민성의 언어) 속에서만 정식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언어란 단순히 환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다음으로 근대의 정치 속에서 맑스주의적 운동이 갖는 긴장을 형상화 한다고 할 수 있다.
한 편으로 평등의 요구가 계급의 폐지를 위한 집단적 투쟁이 아닌 형태로 나타난다면, 이는 계급투쟁의 현실을 은폐하는 것으로써 비난받는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평등의 요구가 작업장에서의 착취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축소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개인의 상품으로의 환원을 수긍한다는 비난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갈등은 맑스주의 정치의 역사에서 형태를 달리해서 계속 되풀이 되어 왔으며, 미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엥엘스의 인용문은 평등개념의 역설을 잘 보여준다. 한 편으로는 개인들의 동일화의 극단들이 있으며, 다른 한 편에는 그들의 차이화의 극단들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맑스주의의 모든 것은 근대 정치에서 대두되었던 이 개념들의 역설적인 해석의 지평 속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맑스주의 뿐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획을 어떤 식으로든 이어나가고 있는 지금의 정치 현실에도 마찬가지다. 브레히트가 <임시야간숙소>에서 자선 행위를 씁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박애의 정신에 대한 맑스주의적 사유의 결과물이지만, 항공회사에서 스튜어디스를 채용할 때 외모의 조건을 묻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에 대한 공방이 일어나는 것은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의 정치 현실에서도 상이한 개념 속에서 기능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모순은 사실 도처에 널려 있다. 맑스는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개방했을 뿐이다. 지금 권리들이 너무나 '쉽게' 운위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개념에 내재한 모순을 은폐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권력을 갖는 해석의 결과물일 뿐이다.  


 ( 에티엔 발리바르, 윤소영 엮음, <맑스라는 이름의 자코뱅?>, [루이 알튀세르 1918-1990], 민맥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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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SF- 에덴과 창공의 상투스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 만화방에 다니게 되었다. 예전엔 느끼지 못했었는데 만화방의 매력은, 푹신한 소파에 파묻혀서 아무 거나 머리에 떠 오르는 데로 뽑아 볼 수 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라면 한 그릇도 덤으로 들어가면 금상첨화. 새로운 즐거움을 자축하는 의미로 어제 만화방에서 재/발견한 매력적인 만화들에 대해서 몇 자 적어 보자.



                                        마음에 드는 이미지 찾기가 참 힘들다. 출처는 (http://blog.naver.com/holyslayer

 에덴 1-15
 
 오랜 만에 다시 읽었다. 1권을 처음 손에 쥐었던 것이 99년 무렵이었던 것 같으니 근 8년 만에 다시 보는 셈이다. -물론 그 동안 나오던 신간은 꼬박꼬박 챙겨 보고 있었다- 8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멋진 프롤로그에 가슴이 뛴다. 싸이버 펑크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근미래 세계에서,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인간이 죽어버린 섬에서 살아가는 소년과 소녀. 이 섬의 소년과 소녀는 인류가 살아남아 있는 세계로 나가고, 본 편은 이들의 아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전개된다. 


 인류 최초의 낙원에서 소년과 소녀는 살인을 통해 세계로 나아가고, 이들의 아이들은 잔인한 세계에서 삶을 헤쳐 나간다.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이라는 모티브를 가지고, 작가는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하지만 어떤 해답을 설정하고 그에 맞춘 이야기를 전개하기 보다는 잘 짜여진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이 점에서 엔도 히로키는 정말로 창의적인 크리에이터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는 계급, 인종, 민족, 종교 간의 갈등과 이를 이용하는 강대국들의 이권다툼 등 현재 사회 속에 존재하고 있는 비극에 싸이버 펑크적인 의상을 탁월하게 입혀 낸다. SF 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현실감이 있는 이 세계가 에덴이 갖는 최대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그려진 세계는 철저하게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바로 그 철저함이 이 세계를 설득력 있게 만든다. 이는 인간에 대한 온갖 만행이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세계에서, 인물들이 하는 경험에 공감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부잣집 도련님으로 처음에는 그저 착하기만 했던 주인공이 이 세계에 말 그대로 '적응'해 가면서 던지는 질문들은 참 진부하지만 깊은 무게로 다가 온다. - '왜 그저 행복해 질 수는 없는지' '세계 모든 사람들이 그냥 행복할 수는 없는 건지' 


 물론 엔도 히로키는 지금의 세계에 그저 사이버 펑크를 덧붙인 것 만은 아닌데, 작가는 초기에 세계를 위기에 처하게 했던 '클로저 바이러스'를 삶에 대한 질문을 풀기 위한 나름의 실마리로써 제시하고 있다. 아직 만화가 진행 중이라 어떻게 진행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불안한 것은 이 클로저 바이러스라는 게, 통합을 통한 갈등의 해소, 통합으로써의 진화라고 하는 굉장히 지겨운 모티브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엔도 히로키는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고, 그래서 이렇게 커다란 주제를 들이대는 와중에도 결코 전개의 긴박감을 줄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에반게리온 이래 너무나 진부한 모티브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앞으로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될 것 같다. 엔도 히로키는 1권 날개에 "에반게리온을 봤을 때 에반게리온이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해 버렸다고 생각했다"라고 적고 있는데 그는 혹시 아직도 그 뒤를 쫓고 있는 것일까?



 여담. 엔도 히로키가 에덴을 그리기 시작한 게 거의 데뷔 때 일이라고 하는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 일찍 이런 원숙한 스타일을 완성해 냈는지 정말 놀랍기 그지 없다. 1권과 15권 사이에 그림체의 차이가 거의 없다니.









 창공의 상투스 1-4

 역시 꽤 괜찮은 SF. 약간의 미래에 우주에서 온 뭔가의 영향으로 인해 변화해 버린 바다를 탐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SF 라고 해봐야 무늬 뿐인 액션 만화가 많은 상황에서 꽤 괜찮은 정통파라고 생각한다. 에덴이나 문 라이트 마일과 같은 만화들이 현실 세계의 갈등을 SF 세계에 반영하는 데 비교적 충실하다면, 창공의 상투스는 이런 반영보다는 '모험심'이라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렇다고 이 만화에서 현실적인 알력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알력들을 그리는 데 힘을 쏟기 보다는, 세계의 복잡한 이해 갈등과는 상관 없이 미지의 것에 매료되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모험심'이라는 테마는 비록 현실의 두터운 벽 앞에 가려져 낭만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진지하게 다뤄진다.

 그리고 창공의 상투스의 한 가지 큰 미덕은, 이렇게 그릴 것을 정해 놓고 그것에 전적으로 매진한다는 것이다. 창공의 상투스는 전개가 비교적 빠른 편인데, 이것은 배경 세계를 설명하거나 캐릭터의 디테일을 묘사하는 데 시간을 뺏기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많은 만화들이 서사보다는 캐릭터 포장에 더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뚝심 있는 전개는 무척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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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 중에서...


 사실 우리 서구인은 우리의 문화를 하나의 거대한 가상적인 박물관처럼 생각하며 거기서는 모든 삶의 형태와 모든 지적 입장이, 그것이 관조만으로 접할 수 있는 한, 동등하게 환영받는다고 여긴다. 따라서 여러 철학체계 중 하나에 불과한 마르크스주의라면, 기독교 신비주의자와 19세기 무정부주의자, 초현실주의자 및 문예부흥기의 인문주의자들과 더불어 그것에도 자리가 마련될 것이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가 이런 식으로 동화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 절대적인 믿음을 일정하게 요구하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종교들 자체도 이미지로 변형되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절충적인 전통 속에 쉽게 병존하고 있는 실정이니까. 그렇다. 사적 유물론의 구조적 독특함은 그것이 사유의 자율성 자체를 부정하는 데, 즉 자기 자신도 하나의 사상이면서도 순수사유가 사회적 행위의 위장된 양태로 기능하는 방식에 역점을 두며 정신의 물질적·역사적 현실을 거추장스럽도록 자꾸 상기시키는 데 있다. 이처럼 하나의 문화적 대상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문화 활동 일반에 적의를 품고 달려들어 그것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그것을 향수하는 데 전제되는 계급적 특권과 여가를 여지없이 폭로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스스로의 정신적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없애버리며 서구의 맥락에서 자신이 참여하였던 문화소비 과정을 파탄시킨다. 그러므로 순수이성이나 관조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것이란 바로 사적 유물론의 구조 자체-사유와 행동의 통일, 혹은 사상의 사회적 결정 등의 학설-이며, 서구 중산계급의 철학적 전통은 이를 마르크스주의 체계의 결함으로밖에 보지 못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우리가 그것을 거부한다고 여기는 바로 그 순간 오히려 그편에서 우리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데릭 제임슨,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 창비, 170p)

 




 예전에 이 문장에 매료되었을 때, 나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지적 호사가들을 위한 박물관의 한 자리에 놓여지는 것을 거부한다.' 지금 다시 원문과 비교해보니, 처음 부분과 마지막 부분만을 연결시켜 놓은, 논점을 미묘하게 벗어나버린 기억이었다는 것을 알겠다. 나는 이 문장을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11번에 대한 최고의 다시쓰기라고 평가하고는 감동을 받아서 '그래! 나도 마르크스주의를 소비할 게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뭔가를 해야지!'라고 결심까지 했던 것이다. 나는 당시에 공부를 계속하면 닥치게 될 현실적 어려움과 더불어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 어떤 사회적 가치를 가질까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당시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나도 맑스를 소비할 것이 아니라, 맑스를 갖고 뭔가를 하자! 교양 삼아, 재미 삼아 책을 읽는 녀석들 따위에게 지지 않겠어!'라고 두 주먹을 불끈 쥘 정도로 불타 올랐었다. 결국 그 때의 결의의 소박한 실천의 일환으로 블로그를 열 마음까지 갖게 되었던 것이다-_-;; 조금 시간이 흐른 지금은... 일단 '교양'으로라도 뭔가를 나불거릴 수 있을 만큼이라도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늘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을 따름이다-_-


 하여간 좀 어긋난 독해긴 했지만, 저 멋진 구절들은 분명히 마르크스주의가 품고 있는 오래된 정서들을 불러일으킨다. 마르크스주의가 철학의 물적인 조건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면서 낳는 효과는 단지 철학의 자율성과 완결성이라는 환상의 해체에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시에 그 물적 조건을 가능하게 만드는 경제적 구조, 현재 절대적으로 차별적인 경제 구조를 보여주면서 철학에 그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적어도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을 불가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에 대해, 그리고 문화에 대해 분노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이 유려한 문장이 제기하는 문제를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장이 갖는 호소력은 사고의 자율성이란 개념과 부르주아적인 '교양' 개념을 연결시키는 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과 사상의 자율성과 독립적인 가치는 그것을 삶과 분리시켜 향유할 수 있는 유한 계급에게나 가능했던 것이고, 이러한 교양은 계급을 가르는 중요한 정신적 기초로서 작용해 왔기 때문에 분노와 거부의 대상이 된다. 프레데릭 제임슨이 적은 것처럼, 이런 교양은 이미 '그 편에서' 거부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프레데릭 제임슨이 동일시하고 있는 대상이 거부하는 편이 아니라 거부 당하는 교양, 유한 계급이라는 것이 재밌게 생각된다. 그것은 이 글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독자가, '교양'의 개념 자체를 사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현대적 상황의 새로운 '교양 계층'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사적 유물론적 사고으로부터 초래되는 어떤 악순환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11번이 갖는 선언적(선동적) 효과는 그것이 실현되자 마자 그 역으로 전도된다. <<마르크스의 철학>>에서 발리바르는 11번을 논하며 "앞 문에서 쫓겨 난 철학이 됫 문으로 다시 들어 온다"라고 적고 있는데(불확실;), 제임슨의 문장은 선언이 아니라, 이 문제를 그 자체로 증거하고, 치밀하게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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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리꾀르의 발견!

자기 이해란 '현재의 현존' 그 자체에 제한되는 존재탐구가 아니라 타자로서 존재하고 있는
'나'를 위치짓게 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관심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는 현존의 형이상학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만약 '나'의 본질이 부재와도 같다면 '나'는 결국 타자로서 존재하는 것 외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이것은 '부재의 현존'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에 있어 존재가 죽음을 본질적으로 숨기고 있듯이
리꾀르가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존재의 형태들은 부재를 숨기고 있다. 

(윤대선: 레비나스와 리꾀르의 시간 이해-타자성과 재현- , 해석학 연구 Vol 18. 48쪽)


글에 살을 붙이려고 리꾀르에 대한 논문들을 뒤적여 보다가 발견한 구절.
상호주관적 네트워크가 설립되는 지점에서, 불가능을 체현하는 것으로서의 주체라는 이미지.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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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브레히트, 임시야간숙소die Nachtlager

브레히트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  이미 진부해 져 버린 브레히트의 시 한 편을 인용하고 싶다.
진부한, 하지만 그 진부함이 어디선가 가라타니 고진이 인용했던 것처럼 '사상이 진부해 졌다면 그 책임은 바로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성찰을 불러 일으키는 한에서 진부한 시. 한국 사회의 담론은 이런 진부함 마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척박하며, 이런 배경 하에서 한국의 브레히트 공연은 진부한 것을 진부한 것으로도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드러낸다. 

          Die Nachtlager

Ich höre, daß in New York

An der Ecke der 26.Straße und des Broadway

Während der Wintermonate jeden Abend ein Mann steht

Und den Obdachlosen, die sich ansammeln

Durch Bitten an Vorübergehende ein Nachtlager verschafft.

Die Welt wird dadurch nicht anders

Die Beziehungen zwischen den Menschen bessern sich nicht

Das Zeitalter der Ausbeutung wird dadurch nicht verkürzt

Aber einige Männer haben ein Nachtlager

Der Wind wird von ihnen eine Nacht lang abgehalten

Der ihnen zugedachte Schnee fällt auf die Straße.

Leg das Buch nicht nieder, der du das liesest, Mensch.

Einige Menschen haben ein Nachtlager

Der Wind wird von ihnen eine Nacht lang abgehalten

Der ihnen zugedachte Schnee fällt auf die Straße

Aber die Welt wird dadurch nicht anders

Die Beziehungen zwischen den Menschen bessern sich dadurch nicht

Das Zeitalter der Ausbeutung wird dadurch nicht verkürzt.

 

                                                         B. Brecht, 1931

 
           임시 야간 숙소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의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철이면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동냥을 받아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 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 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김광규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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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달수의 저지 가능한 상승> - 한국의 브레히트 수용에 대한 씁쓸한 소고

 

 브레히트 사후 50 주년을 맞이 했던 작년에 몇 개의 브레히트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베를린 앙상블에서 온 연출가에 의해 예술의 전당에 올려졌던 '서푼짜리 오페라'는 이 기념할 만한 극작가의 사후 50 주년에 걸맞은 '성대한' 잔치 였다고 할 수 있을 테고, 이보다 조금 앞서 이윤택의 연출로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 공연되어 흥행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탓인지 올해에도 브레히트의 작품의 공연은 이어지고 있다. 대학로의 극단 아리랑이 브레히트의 <아르투어 우이의 저지 가능한 상승>을 <달수의 저지 가능한 상승>이라는 이름으로 번안한 것이다.


 브레히트의 작품은 일단 길이 면에서, 그리고 주제면에서 다루기가 만만치가 않은 만큼,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문제의식이 반세기라는 시간의 장벽과 더불어 현대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의 변화로 인해 자칫 낡고 고루한 문제의식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에 무대에 오르기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만큼 이렇게 브레히트의 작품을 무대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일단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작년에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공연에서 맛본 실망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기대를 품고 극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달수>는 정확히 <억척어멈>이 보여줬던 바로 그 실망을 안겨주었다. 역설적이게도 <달수>의 연극 팜플렛에 실려 있던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말처럼, <달수>나 <억척어멈>은 브레히트의 ‘낯설게하기(Verfremdungseffekt)’가 그 본래의 비판적 맥락을 상실한 채 일종의 재치 코너로 전락해 버린 추세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달수>에서는 브레히트적인 비판의 맥락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연극적으로 훌륭히 형상화 해 낸 진부한 이야기만이 남아 있었다.  




 

 이 작품은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의 성공 신화와 히틀러의 집권 과정에서 모티브를 얻어 쓰여진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주인공에게 달수라는 이름을 붙이고, 배경을 한국의 60년대를 연상시키는 시공간으로 설정했다. 폭력배 달수는 자본가들이 정치인과 결탁해 자신들의 부를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모든 것이 탄로날 위기에 처한 이들을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지켜준다. 그리고 결국에는 폭력을 이용하여 정치인과 자본가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까지 손에 쥐고 주무르는 지배자가 된다. 플롯이 보여주는 것처럼, 원작은 파시즘이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비열한 결탁이 만들어 낸 틈새에서 출현하였음을 풍자하고 있다. 제목에 들어간 '저지 가능한'이라는 표현은,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저지 가능한 것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공연은 독재자가 된 달수의 외로운 모습과 더불어 이 사실을 강변하며 끝을 맺는다.


 그런데 문제는, 극의 마지막에 부각시킨 이 주제가 한 없이 어색하다는 데에 있다. 이 공연에서는 부하들 간에 암투가 벌어지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따르던 부하를 배신해야 만 하는 집권의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주면서 한국 조폭영화의 상투어를 충실히 묘사되고 있다. 조폭영화에서 갓 튀어 나온 듯한 외모의 배우들과 이들의 건들건들한 몸동작, 그리고 각 지방의 사투리가 섞인 '양아치'들의 대화들에 이르기까지 익숙한 장면들이 관객의 눈 앞에 펼쳐 지고, 이는 당연히 연극을 무척 '재미나게' 만든다. 이미 익숙한 장면들이 연극투의 과장된 연기를 통해 눈 앞에서 박력 넘치게 펼쳐지니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조폭영화에 대한 참조는 후반에 가서는 그저 행동이나 대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차원에서도 이루어 진다. 초반에는 희극적이었던 극의 분위기가

충직하지만 거친 부하들과 교활하고 유들유들한 부하들 사이에서 고립되어 있는 지배자의 고뇌, 충직했던 '아우'를 배신해야만 하는 갈등을 묘사하면서, 조폭영화의 그 익숙한 비극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공연의 마지막, 달수의 상승이 저지가능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이야기되는 가운데 무대에 홀로 '쓸쓸하게' 앉아 있는 달수의 모습은 비판적 의식이 아니라 비극적 정서를 불러 일으킨다. <비열한 거리>나 <하류인생>에 등장하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모습.


 이렇게 해서 원작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특정한 정치체제가 만들어 낸 역사적 결과물로서의 파시즘 비판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 나가는 한 '인간'에 대한 성찰로 옮아 간 것이다. 사회의 구조와 그 구조가 갖는 역사성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인간이 들어섰다. 이것은 브레히트가 말하려는 바의 정확히 반대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의 변화는 연출의 변에서 직접 언급되고 있는데, 연출가 김수진은 푸코의 '모든 인간은 크고 작은 권력 관계로 엮여 있다.'는 말을 인용하며, 자신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권력욕의 이야기를 그렸다고 쓰고 있다. 연출가는 정반대로 해석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구조에 선행하여 구조를 결정짓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테마는 푸코에게서는 말할 것도 없고, 브레히트에 있어서도 결코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정치의 문제를, 그리고 권력의 문제를 인간 개인의 차원으로 환원시키지 않는 것, 오히려 그 반대를 설명하는 것, 브레히트에게 있서는 악의 존재는 본성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의 효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파시즘이 광기일 따름이라는 상투적인 설명에 맞서,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브레히트의 목적이며, 후자 또한 상투적인 지금에 와서 우리가 간취해 내야 할 주제의식은 연출가가 의도한 것의 정확히 반대, 즉 주체의 우위에 서는 역사적 구조의 존재이다.  


 <억척어멈> 역시 브레히트의 작품을 <달수>와 꼭 같은 정도로 손상시켜 놓았다. 공연을 보고 난 후 연출가 이윤택과 잠시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그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억척어멈은 한국에서 더 잘 표현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몽골리안 여성에게는 한의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이윤택은 사회주의자 브레히트와 초월적 실체로서의 한민족을 성공적으로-정말로 성공적이었다. 공연은 정말로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결합시킨 것이 퍽이나 자랑스러운 듯 했다. 그에게는 억척어멈이 자본주의적인 욕망을 구현하는 인물이며, 그녀에게 일어나는 비극은 자본주의의 욕망에 대한 그녀의 순응에서 기인하는 것이란 사실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이처럼 지금 한국의 브레히트 수용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인간을 정치 속에서 사유하는 것에 대한 무능, 국회에서 벌어지고, 그 이름으로 신문의 카테고리가 꾸려지는 '정치'에 대한 냉소와 등가적인 무능이다. 이러한 무능 속에서 브레히트가 말하고자 한 것, 현재의 정치 체제 속에서의 인간의 결정과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한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구, 그리고 그것을 위해 현재를 '낯설게' 만드는 것, 사회관계를 바라보는 광범위하게 소비되는 방식, 즉 인간의 권력에 대한 무한한 욕망이라는 테마를 '낯설게'하는 것은 모두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문제는 이러한 무능이 단지 연출가들 개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지금 사회의 총체적인 무기력의 증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소위 '포스트 모던'을 소비하는 방식들 역시 이와 유사한 무기력의 표출이 아닐까?-


 물론 우리가 파시즘을 철폐하고, 따라서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길인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이라는 브레히트의 공식적인 주제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어쩌면 우리는 그가 제시했던 대안 뿐만 아니라 그를 움직였던 근본적인 문제의식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도 있고, 그리고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극에 있어서 진정으로 혁명적이었으며, 정치에 있어서 혁명적 사유의 유산을 이어받은 이 작가로부터, 그 모든 혁명성을 박탈하는 지금과 같은 해석을 인정할 수는 없다. 브레히트가 아니라면 좋다. 하지만 브레히트라면, 이미 익숙해져버린 그의 몇몇 기법을 사용하는 것을 넘어서 최소한 그의 진정한 혁명성, 따라서 영원히 낯 설 그의 무언가를 표현하는 예의는 베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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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걸스와 소녀시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놓고 여성의 성에 대한 상품화가 확대되었다거나, 어린 소녀에 대한 로리타 컴플렉스가 인기의 원인이라거나 하는 비판 또는 걱정어린 이야기들을 듣고는 한다. 현상을 놓고 보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게는 그다지 생산성 없는 접근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멤버들이 나이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십대 소녀들이 아이돌 가수로 데뷔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이들이 나오기 전에도 노골적으로 섹시 컨셉으로 활동했던 그룹들도 있지 않은가? 로리타 컴플렉스도 마찬가지다. 한국 남성들의 십대 소녀들에 대한 욕망은 이미 원조교제가 사회 문제가 되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 있는데, 이제 와서 심각한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고 있다는 듯이 호들갑을 떠는 건 새삼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시청자들의 guilty pleasure 에 그럴 듯한 이유를 하나 붙여 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10대 소녀들의 성이 상품화되는 (우려할 만한) 사회 현상'이라는 틀로 바라 보면 성적 욕망과 그 실현의 문제를 도덕의 잣대를 통해서 바라 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보수적인 도덕적 훈계나 얄팍한 자기 변명 만을 낳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 남성들의 로리타 컴플렉스가 처음으로 공식적인 욕망의 기호로 사회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원조교제는 불법이고 심각한 도덕적 일탈로 여겨지지만, 이들 그룹에 대한 욕망은 인정되고 장려되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억압되었던 욕망이 사회적인 인정을 얻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인정이란 말은 기존에 존재했지만 억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분명하고, 비-의식적인 형태로 존재하던 모호한 그 '무언가'가 최근에 와서야 의식적인 추구가 가능한 분명한 욕망으로 규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원조교제의 형태로 표출된 이 '무언가'는 당시에는 그저 심각한 사회적 일탈로 취급되었지만,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서 비로소 이것은 구체적이고, 사회적으로 공인된 형상을 부여 받아, 그러니까 개념을 부여 받아, '욕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게는 이 사실이 무척 중요하게 생각되는데, 이 욕망이 그저 남성의 다양한 성적 욕망들 중 하나로서의 '로리타 컴플렉스'인 것 뿐만 아니라, 모종의 대표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로 나타난 이 욕망을 한국 사회의 남성 욕망 패러다임의 커다란 전환점이나 심지어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욕망이 (의식적으로) 표현된 최초의 사례로 읽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군대에 가 있는 친구와 군인들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TV-Angels 라는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이 새로운 시도를 했는데, 출연하는 여자 연예인들의 반을 일본 여자 연예인으로 하여 일종의 국가 대항전 컨셉으로 연출을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친구의 반응은 "확실히 일본 여자애들이 '제대로' 할 줄 알더라"라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그가 말한 '제대로'는 성적 욕망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 기호들을 잘 표현할 줄 안다는 의미였다. 한국 여자 연예인들이 성적인 행위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강한 행위를 연출하는 반면에 일본 여자 연예인들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와 관련된 사회적 의미를 부여 받은 기호들을 잘 활용한다는 것이다(안경, 고양이 귀와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된다). 대상과의 유사성에 따라 기호를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을 구분했던 퍼스Peirce의 기호론에 적용해 보면 한국의 것은 도상에 가깝고, 일본의 것은 상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상과 지표가 대상과의 경험적 유사성 및 연결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상징은 의미와 기호의 결합이 사회적 규범과 약속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경험적이라는 사실은 또한 상징이 개념적인 것임을 의미하는데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경험적 다양성에 상관 없이 무언가를 '그 자체로' 논할 수 있다(의자라는 개념을 의자의 무한한 경험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아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퍼스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 인간에게 있어 무언가가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좌우하는 것은 그것이 개념으로 정립되어 있느냐 아니냐에 있다는 것이고, TV-Angels는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남성의 욕망이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고, 또는 일본 사회와는 달리 한국에는 남성의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하나의 징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와 비근한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영화 <<조폭마누라2>>에는 기억을 잃은 전 조폭 보스인 신은경이 다방 종업원에게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법을 배우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다방 종업원이 신은경에게 가르친 것은, 가슴을 흔들며 끈적한 코맹맹이 소리로 "오빠~"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일본의 영상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일본 영화라면 결코 이렇게 표현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 흔쾌히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남자의 유형에 따라 다른 다양한 상징들의 사용법을 가르치지 않았을까? 한국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코스프레 플레이'와 같은 일본에서 발달한 성매매 시스템도 이의 한 예로 보인다. 한국이나 유럽에서, 성매매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반쯤 벗은 여성들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본의 '변태' 문화를 그저 나열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내게는 이게 욕망이라는, 극히 경험적이라 간주되는 그 무언가가, 경험의 구속을 벗어나 자립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예들로 보인다. 그리고 내게는 개념화 또는 상징화를 통한 자립은 일반적으론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를 통해 경험적 한계를 벗어나 보다 풍부한 내용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안경 만세, 하악하악" 이러는 오타쿠들이나 성행위에 관련된 얘기를 하며 낄낄대는 사람들이나 음담패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같은 음담패설이라도 오타쿠의 그것이 더 큰 문화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성적 욕망이 이런 식으로 변해가는 것이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양상을 지켜 보며 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을 이런 욕망의 상징화(개념화)가 대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아주 간략하게 윤곽이라도 그려 보는 것이다. 


 남성중심으로 짜여져 왔고, 짜여져 있는 이 사회에서 언제나 긍정되고, 장려되는 것이 남성의 욕망이라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받아 들일 만한 것이다. 남성의 자위는 공공연하게 이야기되는 반면에 여성의 자위는 여전히 금기시되는 대화 주제이고(자위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로 화제를 모았던, 구성애의 아우성도 여자의 자위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았었다), 이성 연애에서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먼저 하도록 기대되는 것은 주로 남자이다. 이런 식의 예는 일상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성적 욕망의 주체로서의 남성의 이면은 주체적인 욕망을 전혀 갖지 않는, 단순히 욕망하는 기계이기도 하다. 남성적인 욕망의 판타지에서 여성은 남성의 유혹자로, 그러니까 그의 욕망을 추동해서 그를 일탈하게 하고, 파멸시키는 팜므 파탈로 그려진다. 이것을 단순히 다양한 남성의 성적 판타지들 중의 하나라고 가볍게 보아 넘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판타지가 현실에 직접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팜므 파탈이 아니더라도,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강간의 책임을 뒤집어 쓸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혁명 의회에서 여성의 참정권에 관해 논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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