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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변증법과 그 불만들
1부에서 지젝은, 보편성이란 자기 자신과의 모순에 다름 아니란 사실을 밝히고 이러한 보편성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세계(상징적 측면과 상상적 측면을 갖는)로부터 도출되는 과정을 해명하고 있다. 2부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헤겔과 비트겐슈타인을 경유한 보충적 설명을 통해 반복된다. 하지만, 1부가 여럿으로부터 하나를 도출시키는 이야기라면, 2부에서는 강조점이 하나에서 여럿으로 옮겨 간다. 1부를 정리하며 적었듯이 지젝의 라캉과 헤겔 독해는 보편성을 해체하는 것, 그리고 세계의 모순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으로서의 보편과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히는 것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자에서 세계로의 이런 무게중심의 이동은 보편에서 특수로의, 즉 타자로의 이동으로 볼 수 있을 텐데,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지젝의 타자 개념은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타자의 개념(보편에 외재하는 특수, 그를 위한 발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주체, 성소주자들과 슬럼의 주민들 등)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4장의 제목은 <타자에 대해서>인데, 여기서 그는 라캉의 상징계 만을 다룬다. 상징계의 외부가 타자가 아니라 상징계 그 자체가 (대)타자인 것이다. 이렇게 지젝은 일반적인 타자 개념을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보편에 대립하는 것은 타자라는 통속적인 생각과는 달리 실제로 보편에 대립하는 것은 보편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1부 기표의 논리에서 등장한, 기표들의 장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차이를 표지하는 기표, 즉 주인기표에 대립하는 것은 다른 여러 기표들이 아니라 주인기표 그 자신이다. 순수차이라는 공백無이 어떤 형식으로 표지된다는 이 모순이 보편(일자)에 대립하는 것이며, 타자의 타자는 다른 타자일 뿐이다. 이것이 라캉주의자들의 근본적인 논리적 에토스이며, 들뢰즈주의자들과 그토록 불화를 빚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라캉의, 지젝의 타자란 무엇인가?
지젝은 칸트적 사유에서 헤겔적 사유로의 이행에서 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오성이 구성해 낸 것 외부에, 우리의 오성이 결코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 실체인 ‘물자체’를 상정한다. 그리고 여기서 헤겔로의 이행은 아주 단순한 절차, 즉 이 ‘물자체’에 대한 믿음을 빼 버리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자체의 초월적 외관, 주체가 자신과 물자체를 가르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라고 느꼈던 것은 사실은 주체의 시각적 환영이었을 따름이다. 이러한 환영은 그가 바라보는 화면 속에 주체의 응시(행위)가 반영되어 있음을 망각한 데서 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왕이 왕인 것은 신하들이 그들을 왕으로 대해 주고 있기 때문이지, 왕 자신의 카리스마 때문이 아니다. 신비하고 카리스마적인 왕의 모습은 이러한 관계를 망각할 때 발생한다. 역사의 발전을 이끄는 필연적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다. 프롤레타리아가 이렇게 보이는 것은 오직 주체가 프롤레타리아의 편에 서서 투쟁하고 있을 때뿐이다. 이러한 예들이 보여 주는 것은 객관적인 외적 대상은 필연적으로 어떤 환영 속에서만 등장한다는 것이다. 주체에게 그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사회 속에서 그의 위치를 결정짓는 것처럼 보이는 상징계, 대타자 역시 이러한 환영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러한 환영은 근본적으로 1부에서 전개된 보편자의 근본적인 모순에 대한 회피에 복무한다. 대타자의 진실은 이 보편자의 근본적인 모순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실의 경험을 회피하기 위해 초월적 실체(의미의 보증자인 대타자)의 외관이 필요한 것이다. 라캉 정신분석학에는 이를 잘 설명해 주는 논리가 있다. 상징계에 의해 거세된 인간은 거세당하기 전 자신에게 완벽한 만족을 주었다고 상정된 대상을 찾아 헤매지만, 사실은 거세 자체가 이러한 대상을 만들어 낸 것이며, 이러한 상실의 경험은 상실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자체를 감추기 위한 환영일 뿐이다. 내적 불가능성을 외적 한계로 전치하는 것을 통해 보편자의 내적 모순, 욕망의 불가능성을 은폐한다. 주인기표의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주인기표가 기표의 불가능성을 떠맡음으로써, 다른 모든 기표들이 안정적으로 의미를 표현할 수 있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환영은 소급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공백, 불가능성은 환영이 성립하는 순간, 소급적으로 사라진다(즉, 일관된 의미로 누벼진다). 이를테면, 러시아 혁명에 참여하는 주체들에게 혁명의 과정은 그때그때 주체들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우연성의 소용돌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혁명이 성공하고 난 뒤에는 모든 사건들이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일관된 의미 속에서 정립된다.
이와 같은 논리는 타자 개념과 관련하여 중요한 전도를 포함하고 있다. 데리다적인 타자는 보편성의 (불)가능성의 조건, 그 구성적 외부를 의미한다. 하지만 지젝에게는 보편성에 외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특수자는 보편성 내부의 자기모순을 감추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자는 “실재적”이다. [...] 특수자가 자기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을 가로 막는 한계로서 말이다.”(287)
이러한 전도는 지젝의 정치적 지평을 특징 짓는다. 보편성의 자기 모순에 대한 이와 같은 치열한 강조는, 보편성에 대한 끝없는 해체의 몸짓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보편성의 수립을 향한 행위에의 요청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말의 실천에 대한 이야기는 3부에서 다루어진다.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역,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5
1부. 여럿으로부터 나온 하나
1장(하나에 대해)을 일관되게 꿰뚫고 있는 주제는 기표의 논리에 대한 해명이다. 보통 라캉의 기표의 논리는, 언어는 의미와 관련 없이 기표라는 질료 그 자체의 끝없는 차이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기표 망이 보지하는 의미의 체계는 결코 일관되게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지젝은 기표의 논리에 대한 정교한 분석을 통해 이와 같은 기본적인 서술에 수정을 가한다. 그에 따르면 기표의 논리란 하나의 기표와 다른 기표 사이의 변별적 차이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표의 논리를 특징짓는 근본적 차이는 기표와 그 자신 간의 차이, 기표와 그것이 기입되는 공백 사이의 차이이다. 지젝이 인용하는 자크 알랭 밀레는 세미나에서 기표의 장이 구성되려면, 우선 하나의 기표가 그 자신과 변별되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즉, 기표의 결여가 표현되어야 한다. 이 결여가 바로 순수차이이다. 이것은 차이가 모든 것에, 즉 일체의 실체나 동일성에 선행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기표의 장은 이 순수차이가 표현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 순수 차이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기의 없는 기표, 기표의 결여의 기표인 주인 기표이다. 그러나 순수 차이와 주인 기표 간의 궁극적 일치는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기표의 환유적 미끄러짐이 완결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양자 사이에는 해소되지 않는 모순이 존재한다. 지젝은 이 상황을 “어떤 것의 형식을 가진 無(214)"라고 표현한다. 이는 내용과 형식 간의 순수한 불일치를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긴장과 진동은 계속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지젝은 몇 가지 예시를 통해 이 논리를 해명한다. ‘신은 신이다’라는 동어반복, 따라서 동일성을 표상하는 이 명제는, 동일성이 사실은 근본적 차이, 절대적 모순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하지만 이런 공백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적은 것처럼, 이 공백은 그 자신의 공백을 표현하는 불가능한 기표와 함께 존재한다. 공백은 섬광처럼 사라지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공백의 자리에는 공백을 메우는 기표가 남고, 이로써 기표의 계열이 존재하게 된다. 이를 보편자와 특수자의 관계를 통해 설명해 볼 수 있다. 보편자는 어떻게 그 규정 속에 온갖 특수자를 포함한 완결된 것으로 구성되는가? ‘신은 신이다’라는 명제에서처럼, 보편자의 동일성이란 궁극적으로 모순이며, 규정성의 결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모순, 공백은 모순과 공백 그 자체를 표지하는 기표에 의해서 메워진다. ‘왕정주의자는 공화주의자다’라는 명제처럼, 보편은 자신의 규정들 속에 전도된 형태의 그 자신-즉, 아무런 규정도 갖지 않는 그 반대물로서의 그 자신-을 지님으로써, 비로소 개념적으로 완성된다(헤겔식으로, 대자 존재가 된다). ‘신은 신이다’를 분석해 보자. 첫 항의 신은 그 온갖 규정성으로 충만한 신이다. 두 번째 항은, 이 신에 속하는 여러 가지 규정성들을 위한 자리로 마련되어 있다. 첫 항과 두 항의 관계는 유와 종의 자리, 보편과 특수의 자리의 관계이다. 이 두 번째 항에 온 신은 순수한 동어반복, 첫 항의 신에 대해 아무런 추가적 규정도 지니지 않는 대립물이다. 이처럼 보편적 개념은 언제나 자신의 대립물을 공제하고, 또 공제는 바로 예외로의 정립이라는 의미에서, 예외로 삼음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은 라캉의 성차 공식에서 남성 논리에도 적용된다. 남성이라는 전체는 남근 기능에 종속되지 않는 하나의 예외-프로이트에 의하면, 아들들에 의해 살해된 시원적 아버지-를 통해서만 구성가능하다. 이 예외적 존재가 개념적 규정이 전체가 아님을, 따라서 일관되게 구성될 수 없음을 메우는 것이다.
주인기표의 탄생과정은 <<자본론>>의 가치형식절에 대한 독해를 통해 설명되고 있다. 이 설명을 통해 내려야 하는 결론은, 지젝에게 있어 차이란 결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정성이 아니란 것이다. 차이는 이미 주인 기표에 의해 점유되어 있으며, 차이는 공백을 내용으로 하는 형식이라는 주인 기표의 모순으로부터 발생하는 상징계의 균열, 결여의 형태로만 드러난다. 따라서 기표의 장에 대한 분석은 차이와 주인 기표의 모순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순으로, 일반적인 기표들 사이의 관계에서 시작해서 차이를 대리 표상함으로써 기표의 장을 성립시키는 주인 기표로 진행된다. 차이와 모순은 결코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상의 부재는, 부재 자체가 상징적 가치를 갖는 변별적 질서에서만 그 자체로 인식될 수 있다."(338)고 지젝은 쓰고 있다. 즉, 순수차이를 표지하는 주인기표를 상징계의 근원(일관된 의미의 장으로 봉합한다는 의미에서)으로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징계 내적 질서 안에서, 그 모순의 형상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가치형식에 대한 분석이 이미 가치를 전제하고 시작되는, 맑스의 가치형식절의 자기 모순과도 일치한다. 이는 <<자본론>>이라는 체제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자본주의는 자기 안에서 그 전화를 위한 조건을 산출한다는 맑스주의의 상식은, 다른 말로 하면 체제 외부의 관점에서의 비판은 불가능하다는 것, "이데올로기에 외부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의 사용 가치와 가치의 구분은 각각 기표와 그것이 기입되는 공백에 대응한다. 하나의 상품(상대적 가치 형태)이 다른 상품(등가 형태)의 사용 가치를 통해서 그 가치를 표현한다는 생각은, 하나의 기표가 다른 기표의 현존을 통해서 그 자신의 공백을 표현한다는 논리와 일치한다. 하지만 이런 논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치가, 그리고 공백 그 자체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가치 형식의 끝에서 다른 모든 상품들은 화폐 속에 포함된, 즉 화폐가 표현하는 가치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주인 기표를 대신해서 다른 모든 기표들이 공백을 표현한다. 즉, 다른 모든 기표들은 주인 기표의 존재를 통해서 서로의 변별적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지젝에게 있어 주인 기표의 공백 표현은 모순, 즉 불가능성이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기표들은 주인 기표를 대신해서 공백을 표현하지만, 주인 기표는 다른 모든 기표들을 대신해서 공백을 표현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표현한다. 이 관계는 그대로 화폐에도 적용될 수 있다. 화폐는 다른 모든 상품들을 대신해서 가치 표현의 불가능성을 표현한다. 이러한 관계는 라캉에게서 은유와 환유의 관계와 일치한다. 궁극적으로 은유란 이처럼 공백, 무를 하나로 세는 행위이며, 환유는 이로써 실체적 대상이 발생하고, 하나와 관계 맺는 것을 의미한다. 가치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공백,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지만 화폐를 통해서 세어지고, 즉 정립되며, 화폐는 따라서 가치 그 자체를 대표한다. 이처럼 화폐를 통해 가치가 정립된 한에서, 상품들 간의 관계가 정립되는 것이다.
2장(방탕한 동일성)에서 지젝은 이 논리를 헤겔의 변증법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그는 헤겔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 즉 변증법적 과정은 그 전개를 통해 온갖 차이를 지양하고, 동일성에 다다른다는 생각은 완전한 오해라고 말한다. 반대로, 변증법적 과정의 마지막 순간, 즉 차이의 지양은, 어떻게 그 차이들이 ‘언제나 이미’ 지양되었는지에 대한, 즉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의 경험이다. 변증법적 지양은 소급적 철회의 형태를 갖는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성립하는 동일성의 위상은, 헤겔에게 있어 그 실정적 내용은 無일 따름인 순수한 형식이며 따라서 절대적 모순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변증법적 소급 철회란, 차이에 대한 동일성의 궁극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자와 그 특수한 부정들인 차이와의 관계는 보편자 자신이 이미 극단적으로 모순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그 성격이 변화한다. 이를테면, 법과 그 부정인 범죄와의 외재적 대립 관계는 법은 그 자체 범죄에 다름 아니라는 인식을 통해, 존재론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변화한다. 특수한 범죄들이 자각되는 것은 오직 법을 모순 없는 보편적 개념으로 인식할 때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를 부르주아 독재 사회로 인식하는 맑스주의자들이 범죄와 맺는 애매한 관계와 연결되는 것 같다. 이 사회의 많은 범죄는 부르주아의 폭력적 지배 체제, 즉 법의 탈을 뒤집어 쓴 그들의 범죄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기에, 사실은 범죄가 아니다 또는 그렇게 단정적으로 도덕적 비난을 가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법은 범죄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바탕 삼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나아가 이런 동일성의 불가능성을 불가능성으로서의 동일성으로 뒤집는다. 범죄가 지양되는 것은 순수한 관점의 전도만을 수반한다. 범죄의 구체적 내용은 전혀 변하지 않지만, 그것이 상징적 장에 기입되는 양태가 변화할 따름이다. 이는 누빔의 효과, 주인 기표가 일관된 상징적 장을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헤겔의 동일성은 라캉의 주인 기표와 동일한 것이다. 한 편에서 그것은 순수한 모순이며, 순수 차이를 표지하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편과 차이(특수)라는 관계가 성립하는 공간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데리다가 보편의 (불)가능성인 이러한 잉여가 작동하는 논리에 대한 면밀한 파악에 실패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문제는 보편의 해체가 아니라, 어떻게 모순이 보편으로 ‘필연적’으로 기능하는지에 대해 밝혀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 차원에서 동일성의 근본적 불가능성은, 개념과 내용, 그리고 개념과 대상 간에는 근본적인 불일치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즉, 개념은 필연적으로 대상과의 어긋남 속에서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영혼의 역설(240)은 이런 논리에서 해석된다. 아름다운 영혼은 그 상상적 자기 인식 차원에서, 즉 내용의 차원에서는 가혹한 세상의 조건들에 대한 희생자이다. 하지만 그의 상징적 진실에서, 즉 개념의 차원에서 세상을 향한 그의 절망의 몸짓은, 자신의 (상상적) 존재론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몸짓일 뿐이다. 아름다운 영혼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 여기서 또한 변증법적 소급 철회의 논리가 작동하는 데, 그의 이전까지의 저항의 몸짓은 완전히 무의미했던 것으로 변화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용이 자신의 개념에 도달하는 순간, 이미 개념 자체가 변화해 있다는 것이다. "예술의 형식이 예술의 개념과 일치할 때-관념이 감각을 매개로 하여 절단되지 않은 것처럼 나타날 때-그것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 종교이다."(237) 자신의 진실에 도달한 아름다운 영혼은 더 이상 아름다운 영혼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다. 그는 또 다른 상상적 자기 인식을 필요로 할 테고, 마찬가지로 그의 상징적 진실 또한 변화한다.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역,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5
타자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나는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통해 결론을 이야기하고 싶다. 거기서의 물음은, 민주주의를 그 자신에 대립시키는 패러독스를 어떻게 이해할까란 것이었다. 이름의 불확심함과 현실의 모순에 대한 계속해서 반복되는 언명으로부터 민주주의의 자기-차이에 대한 더 근본적인 해석으로,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자유 민주주의'의 자신만만한 자기-만족의 토대에 다시 균열을 여는 것을 목표로, 자유 민주주의의 역사적 성취에 대한 후쿠야마의 테제에 주석을 가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자유 민주주의의 이상理想의 이름으로 새로운 복음을 설파하려 하고 있을 때-그들은, 자유 민주주의는 인간 역사의 이상으로서의 그 자신을 드디어 실현했다고 주장한다-, 외치지 않으면 안 된다. 폭력, 불평등, 배제, 기아, 따라서 경제적 압박이 세계사와 인류사 속에서 이 정도로 많은 인간 존재에 피해를 끼친 적은 없다고(주1).' 다시 균열을 열기 위해서, 데리다는 그 자신에 도달했던 또는 그 자기에 도달했던 민주주의에, 도래할 민주주의를 대립시킨다. 도래할 민주주의는 장래 도착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것은 상이한 시간 내부에서 구상된 민주주의이다. '도래할 민주주의'의 시간은, 결코 완수될 수 없지만-그리고 완수될 수 없기 때문에-지켜지지 않으면 안 되는 약속의 시간인 것이다. 도래할 민주주의는, 도래할 것에의 무한한 열림-그리고 '타자' 또는 '신참자'에의 무한의 열림-을 포함하기 때문에, 결코 '그 자신에 도달'하는 것, 그 자신을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한 민주주의이다.
데리다는 다름 아닌 민주주의를 이른바 '자유 민주주의'와 대립시켜, 두 개의 시간성을 같은 시간 속에 놓고, 두 개의 공간을 같은 공간 속에 놓는다-나는 이 원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두 개의 민주주의 사이의 대립이라고 불리는 것 속에 문제가 있다. 데리다는 한 편에는 통치형식으로서의 자유 민주주의를, 다른 편에는 신참자에의 무한의 열림을, 또 온갖 기대를 벗어나는 사건에의 무한한 기대를 놓는다. 내가 보기에 제도와 초월론적 지평 사이의 이 대립 속에서 소멸하는 것은,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이다. 이 실천은 '타자' 또는 헤테론의 정치적 발명에 다다른다. '신참자'-누구의 것이든 평등한 권력을 제정하고, 소여所與의 공동세계 속에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언어를 구축하는 새로운 주체-를 계속해서 창조하는 정치적인 주체화의 과정이다. 헤테롤로지heterology(타자성, 이타적 논리)의 정치적인 권력을 무시하는 것은, 한 편에 '자유 민주주의'-이것은 실제로는, 자기의 법을 구현하는 과두제를 의미한다-, 다른 편에 '도래할 민주주의'-사건과 타자성에의 무조건적 열림의 시간과 공간이라 보여진다-라는 단순한 대립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정치의 방기와 타자성의 실체화 형식과 같다. 민주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자기의 실체화의 거부가, 대칭적인 방식으로 '타자'의 실체화-이것은 현대의 윤리적 풍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상징이다-에 이르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자율과 대비되는, 사건과 '타자성의 무한한 존중'의 참조는 현재의 윤리적 풍조에 있어서 빈번히 사용되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 참조는 상이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고, 굉장히 다른 결론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암네스티 인터네셔널Amnesty International의 인권에 관한 강연(주2)에서 장=프랑소와 리오타르가 제시한 '타자'의 권리 해석에 대해 생각해 보자. 리오타르에게 '타자성의 무한한 존중'이란 인간존재가 그 인질 또는 노예가 되는 '타자'-프로이트적인 사물 또는 유대의 율법으로서의-의 권력에의 복종을 의미한다. 계몽과 해방의 꿈은, 타율의 법을 부정하려 하는 유해한 의지, 전체주의와 나치에 의한 대량학살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 가능할 의지가 된다. 따라서, '타자'의 권리는, 궁극적으로는, 악의 축에 대한 군사작전의 정당화에 이른다. 윤리, 타자성, 타자성의 무한한 존중은 일종의 '새로운 복음'이 되어, '자유 민주주의'의 실천과 이데올로기를 정통화한다.
확실히 데리다는 레비나스적인 '타자'에 대한 그와 같은 해석으로부터, 윤리적 풍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리오타르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형태로 데리다는 윤리적인 명령을 해방의 지평과 결합시킨다. 그는 명백히 메시아적인 약속을 '법'에의 복종에 대비시키고 있다. 그러나 사건, 타자 또는 무한자에 관한 어떠한 선-취적인 동정同定도 피하려 하는 시도 속에서 그는, 탈구축, 말소선抹消線, 아포파시스apophasis의 끝없는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자성에 관한 이 윤리적 과대언명은 두 가지 문제의 어느 해석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탈구축은 궁극적으로 신의 병사에 의한 군사작전을 지탱하는 근저적인 타율의 법을 주장하던가, '타자'의 모든 선-취적 동정同定을 말소하는 무한의 임무를 강조하던가, 그 어느 것인가이다.
데리다에 의한 개념화는 민주주의에 충분한 것을 부여하지 않음과 동시에, 너무나 많은 것을 부여하고 있다. 충분하지 않은 것은, 민주주의는 국가에 의한 '자유 민주주의'의 실천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것은, 민주주의는 '타자'에의 무한한 열림 이하의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성에의 한 가지 무한한 열림 같은 것은 없으며, 타자의 분할(=열할)parts을 기재하는 많은 방식이 있다. 나는 민주주의의 실천을 어떠한 분할도 갖지 않는 자-이것은 '배제된 자'가 아니라, 누군가 또는 누구라도를 의미한다-의 분할을 기재記載하는 것으로 개념화하려고 시도했다. 그런 기재는 '신참자'인 주체에 의해, 즉, 새로운 객체가 나타나 공통의 관심사가 되도록 하고, 새로운 목소리가 나타나고 받아 들여질 수 있도록 하는 주체에 의해 행해진다. 이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타자성을 다루는 많은 방식의 하나이다. 민주주의에 의한 주체와 객체의 발명은 부서진 시간이자 해방의 단속적斷續的인 계수繼受인 특수한 시간을 창조한다. 내가 보기에 우리들은 메시아적인 시간에 호소하는 대신, 이 부서진 시간 속에서 계속 사고하고 행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우리의 입장의 이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데리다는 '파괴'의 본성 그 자체가 내기에 걸리고, 다음과 같은 물음이 싹 트는 시기에, 또 그런 시대를 위해 말하고 있다. 즉, 국민국가의 내부에서 오래도록 연기되어 온 데모스의 형상은 코스모폴리탄적인 정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국민국가의 '소멸'은 논쟁의 대상일 수 있지만, 오늘 민주주의가 코스모폴리탄적 질서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데리다의 대답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형식은 분명하지 않다. 주요한 물음은, 그것을 정치적인 관점에서 개념화할 것인가, '윤리적인' 관점에서 개념화할 것인가이다. 그것을 정치적인 방식으로 행하기 위해서는 '타자에 대한 무한한 존중'은, '사건' 또는 메시아에의 무한한 기대라는 형식 대신에 타자성을 기재하는 다수의 형식, 변경 또는 부동의不同意의 형식이라는 민주주의적인 외형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주(1) Jacques derrida, Specters of Marx (New York: Routledge, 1994), p. 85
(주2) Jean-Francois Lyotard, 'The Other's Rights', in Stephen Shute and Susan Hurley (eds.), On Human Rights (New York: Basic Book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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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끝났다. 쉽게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혼자서 대충 보는 것과 남에게 보여 줄 만한 글로 옮기는 것은 정말 다른 일이란 걸 알았다. 일본식 문장과 단어가 가득해서 한국에서 읽는 사람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도 잘 모르겠다. 이런 게 중역의 폐해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재밌는 글이었고, 또 마지막의 데리다 비판을 포함해서 맥락과 내용이 잘 이해가 안 가기도 해서 사람들과 공유하고, 코멘트를 얻고자 하는 마음에 옮겼는데, 조회수와 댓글수로 반영되지는 않는 듯 하다ㅎ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뭔가 그럴 듯한 평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만한 깜냥은 없고, 요즘 그의 <<불화>>를 영어와 독어로 찔끔찔끔 읽기 시작했으니 도래할 완독의 순간을 기약하며 미뤄 둬야 겠다. 랑시에르가 글의 말미에서 언급하고 있는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내가 한국을 떠나 온 직후 진태원 선생의 번역으로 재출간 되었다. 데리다의 민주주의론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질테니, 언젠가 랑시에르와 관련한 비판적 해석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이제 개강이다. 한 달도 넘는 지루한 휴가가 이제야 끝이 났다. 물론 지루했어도 휴가는 휴가였으니, 끝난다니 아쉽기만 하다. 언제 또 이렇게 막장으로 퍼져 보리. 게임과 만화와 영화가 함께 했던 그 수많은 낮과(!) 밤들. 아직 수업을 듣기에는 독일어가 형편없이 부족해서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여기서는 어학 코스도 학점을 인정해 준다고 한다. 독일어 강좌를 세 개 듣고, 강의는 두 개만 들을 작정이다.
이곳의 대학 강의는 크게 세 가지, Vorlesung, Pro Seminar, Seminar 로 나뉘어 있는데, Seminar 가 들어간 것은 강의와 학생들의 발표, 토론이 병행되는 것이고, Vorlesung 은 말 그대로 (fore+reading) 강사가 강의만 하는 것이다. 당연히 Vorlesung 이 더 쉽고, 취득할 수 있는 학점도 더 적다. 물론 나는 발표는 커녕 당장 강의 듣는 것도 큰 일이기 때문에 Vorlesung 밖에 선택지가 없다.
지금 있는 대학은 다름슈타트 공과 대학으로, 공과 중심의 종합 대학이긴 하지만 강의 커리큘럼을 살펴 보니 인문학 강의들도 썩 나쁜 것 같지는 않다. 이곳이 이 정도인데, 인문학으로 유명한 대학의 강의들은 어떨까 생각하면 좀 속이 타기도 하지만...어차피 지금이야 들어도 못 알아들을테니..
하여간 이번 학기에 선택한 것은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 강독과, <서술의 학Das Wissen der Darstellung>이라는, 이름을 봐서는 정체를 짐작하기 어려운 강의이다. <<파르메니데스>> 를 강의하는 사람은 Hassan Givsan 인데, 지지난 학기와 지난 학기에 연이어 <헤겔의 형이상학> 과 <마르크스의 형이상학>을 강의해서 눈여겨 보았던 사람이다. 헤겔과 마르크스에서 플라톤으로의 전환이 좀 쌩뚱맞지만(전공은 하이데거인 것 같고), 나름 재미있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그러니까 알아 들으면ㅠ.ㅠ
<서술의 학>은 Gerhard Gamm 이 강의하는 것인데, 철학적 지와 그 서술 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다. <<파르메니데스>> 한 권만 문헌 목록에 있던 Givsan 의 강의와는 달리, 헤겔은 물론이고, 노발리스나 비트겐슈타인까지 포함한 목록이 겁을 잔뜩 집어 먹게 하고 있다. 한국 대학의 스타일처럼 목록은 그저 목록일 뿐이라면 좋으련만, 유럽 대학생들은 공부 열심히 한다는 풍문을 들어 온 터라...
+ 개강과 더불어 지역 주민과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스포츠 강좌들도 시작했다. 독일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이 생활 스포츠의 탄탄한 기반인데(두 번째로 놀란 건, 여기서 나한테 장학금을 준다는 사실이다-_-; 덕분에 아르바이트에 대한 열정이 시들해졌다. 이런 게 바로 '복지병'이란 걸까ㄷㄷㄷ), 5-60 개에 달하는 다양한 스포츠 프로그램이, 거의 대부분 무료로, 유로 더라도 한 학기 비용이 한국 한달 헬쓰클럽 보다도 싸게 제공되고 있었다. 신청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라, 시간과 의지만 있으면 일주일 내내 각종 스포츠를 경험할 수 있다. ...운동하고는 애저녁에 담을 쌓은 나도, 호기심에 함기도라는 일본 무술을 하러 가 봤는데(한국에 들어와 있는 그거랑은 다르다, 그건 중국건가?), 덕분에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근육통으로 고생하고 있다. 지난 한 달 동안 운동이라곤 걸어서 마트가기 밖에 하질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 이것이 고수가 되기 위한 시련이리.
+ 며칠 전부터 라면이, 속이 얼얼해질 만큼 매운 칼칼한 라면이 먹고 싶었다. 평소 한국 음식이 딱히 그리웠던 적은 없는데, 이놈은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깊숙히 들어와서 심지어 꿈에까지 등장해 버렸다. 게다가 요즘 날씨가 부쩍 차가워져 얼큰한 라면 국물 생각이 또 어찌나 간절하던지.. 그래서 처음으로 아시아 푸드 마켓에 가 봤다. 라면 하나에 무려 0.89유로 orz 그래도 밀려 오는 유혹과 향수를 참을 수 없어서 신라면과 짜파게티를 두 봉씩 사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날듯이 집으로 돌아 왔다. 결과는 뭐... '이게 아니야!' 였다(사실 라면이 욕망의 기표가 된 데는, 다른, 더 그럴 듯 하고, 더 재밌는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한국에서 자취할 때는 주식 삼아 먹던 것들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어떻게 저런 걸 먹고 살았나 싶다. 어쩌면 스스로의 요리에 대한 자신감의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든 것들을 별로 맛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먹질 않았는데, 요즘 학교 식당에서 밥 먹을 때도 그렇고, 라면과 짜파게티도 그렇고, 비교를 해 보니 내가 만든 음식이 훨씬 낫더라. 후후.
+ 심심한가 보다. ..공부하기가 너무 싫어서 그만....
두 가지 정체성의 간극에서
말할 것도 없이 이 실천은 도시나 국가의 통치가 단일하고 다의적일 수 없는 공동체 원리를 근거로 할 것을 원하는 자에게는 받아 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민주주의의 이중 구속dobule bind, 이중성, 또는 허위에 대한 끝 없는 지탄, 플라톤에서 사무엘 헌팅턴에 이르는, 민주주의의 현실이 그 이름과 모순됨을 증명하려고 하는 지속적인 시도가 행해져 왔던 것이다. 이 지탄의 가장 잘 알려진 정식은 실질적 민주주의와 형식적 민주주의 사이의 대립에서 보여진다. 이 대립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의해 강조되었지만, 훨씬 오랜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것은 쓰여진 법의 지배로서의 민주주의와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인 생활 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 사이의, 플라톤의 구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차이도 있다. 플라톤의 모델에서는 민주주의자의 개인주의적 생활은 법의 엄격함에 겉보기로 참가commitment하는 것의 진짜 내용이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실질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이면, 즉 착취와 불평등의 '현실 생활'을 은폐하는 형식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대립한다. 그러나 결론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논의의 구조는 동일하다. 형식적 민주주의는 불평등한 현실에 대립하는 평등의 외관이다. 이 '현실'은 다양한 형태를 취할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것은 쾌고快苦의 계산에 종속되는 민주주의적 개인의 전적인 쾌락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그것은 사적소유와 사적이해의 현실일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한 것처럼, 정치적인 나타남의 영역의 반짝임, 빛남, 을 '단순한 소여성의 어두운 배경'에 대치하는 것에 의해 그 관계를 역으로 하는 것조차 가능하다.
이상의 어느 경우에서든, 민주주의는 나타남(=외견)과 현실 사이의 대립이라는 필터를 통해 접근된다. 이 대립을 통해 민주주의는 묘사되고, 위장 당하고, 궁극적으로는 밀쳐내진다. 겉보기에는 대립적인 해석이 등가라는 사실의 가장 인상적인 사례는, 혁명적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비판 속에서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그런 권리는 '인권'으로 발전했다. 우리들이 인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2세기 이상에 걸쳐, 버크, 마르크스, 아렌트 처럼 다양한 저자들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는 무언가 그릇된 것, 즉 이중성이 있음을 가리켜 왔기 때문이다. 독립한 두 개의 주체가 있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이며, 거기에는 무언가 착오가 숨어 들었을 것이다. 이런 논의가 이들 저자들에 의해 행해져 왔던 것이며, 최근에도 <<호모 사케르>>(주1) 속에서 죠르지오 아감벤에 의해 거론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기술한 것처럼, 시민의 권리라는 것은 실제로는 재산 소유자인 '인간'의 권리이다. 버크와 아렌트에 의하면 그런 권리는 우리들에게 딜레마를 제시한다. 그런 권리는, 시민의 권리이거나 인간의 권리이거나, 그 어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권리는 비정치적인 개인의 권리이다. 이 개인은 그 자신의 어떠한 권리도 갖지 않기 때문에, 그런 권리는 어떠한 권리도 갖지 않는 자의 권리인 것이 되며, 이것은 무와 같다. 또는 인간의 권리는 시민의 권리, 즉 시민이 기존의 입헌국가에 귀속하기 때문에 소유하는 권리이다. 그런 권리는 권리를 갖는 자의 권리이며, 이것은 동어반복이다.
이런 언설이 우리들에게 두개의 주체를 제시한다면, 그 하나는 위장용 껍데기일 것이다-이 논의의 핵심은 그런 것이다.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정치 주체는 하나이며 또한 동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것이다. '인간'과 '시민' 중 어느 것이 '진짜' 주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치가 신기루이던가, 정치 주체가 헌법의 텍스트가 정의하는 것과 같은 것이던가, 그 어느 것인가인 것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의 주체 따위는 없다, 라는 것이다. 정치 주체는 상이한 아이덴티티 사이, 특별히 인간과 시민 사이의 간극에 존재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주체화의 과정은, 인간의 권력도 시민의 권력도 고정하지 않고, 인간과 시민 사이의 결합과 분리의 형식을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과 시민은 정치적인 이름으로서 사용되는 것이며, 이 이름의 법적인 기재가 정치적인 과정의 소산인 것이다. 인간과 시민은 또, 분쟁적인 이름, 그 외연과 내포가 경합적이며, 시험 또는 검증의 공간을 여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인간과 시민이라는 정치적인 이름은 민주주의의 투쟁에 있어서 사용되어 왔던 것이며, 사용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한편에서는 시민성citizenhip이란 인간으로서-즉, 소유주와 사회적 지배층의 권력에 종속하는 사적인 개인으로서-열등하거나 우수하거나 한 사람들 사이의 평등의 지배를 의미한다. 다른 한편에서, '인간'이란 누구라도 갖는 평등한 수용력의 긍정을 의미하고, 이것은 시민성의 제한, 즉 인민의 많은 범주를 시민성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또는 다양한 문제를 시민의 범위 밖에 두는 제한과 대립한다. 인간과 시민은 함께 배제원리에 대한 포함원리의 역할, 개별적인 것에 대한 보편적인 것의 역할을 연기한다. 민주주의가 이해의 개별성에 대한 법의 보편적인 권력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폴리스의 논리 그 자체가 보편적인 것은 지속적으로 개인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적인 것은 항상 상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것은 새롭게 분할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시험 삼아, 프랑스 혁명기의 페미니즘의 저항운동의 형식에 주석을 다는 것을 통해 이를 지적했다(주2). 여성의 활동은 가정생활의 개별성에 귀속하지만 시민성은 보편성의 영역이다, 라는 이른바 공화제 원리에 따라, 여성들은 시민의 권리를 부정당해 왔다. 개별적인 것의 영역에 있었던 결과, 여성은 보편적인 것에는 포함될 수 없었다, 라는 것이다. 여성은 여성 자신의 어떠한 의지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정치 주체일 수 없었다, 라는 것이다. 이 '자-명'한 언명에 대해, 올랭 드 구즈는 여성들은 단두대에 올라갈 자격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집회'의 연단에 올라갈 자격도 똑같이 부여 받은 것이다, 라는 잘 알려진 이론異論을 제기했다. 그녀의 논증은 이른바 벌거벗은(裸形) 생의 개별성에 수반되는 보편성을 제기하는 것에 의해, 영역의 분할을 애매하게 한 것이다. 여성들은 혁명의 적으로써 죽음을 선고당해 왔으니까, 여성의 벌거벗은 생은 정치적이었다. 단두대에서, 여성들은 남성과 평등했다. 죽음의 선고의 보편성은 정치생활과 가정생활 사이의 '자-명한' 구별을 던져 버렸다. 따라서, 여성은 스스로의 권리를 '시민으로서'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성들에 의한 권리의 긍정은, 버크 또는 아렌트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스스로가 갖는 권리를 갖지 않으며, 스스로가 갖지 않았던 권리를 갖고 있었음을 증명했다. 한편에서, 여성들은 모든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에 귀속하는-권리(인권) 선언에 따르면- 권리를 빼앗겼었던 것이며, 그녀들에게 부정당했던 권리를 요구했다. 다른 한편으로, 여성들은 스스로의 항의 운동에 의해 그 정치 능력을 증명했다. 여성들은 스스로 그런 권리를 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두 개의 아이덴티티 사이의 간극에서 주체화 형식을 창조하는 것,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사이의 이중의 관계에 변화를 가함으로써 보편성의 사례를 창조하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 과정이 동반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단순히 법의 보편성에 기초하는 것일 수만은 없는 것은, 법의 보편성은 통치행동의 논리에 의해 부단히 개인화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은 공적생활의 끊임없는 개인화에 저항하는 주체화의 형식과 검증의 사례에 의해 대리보충되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화는 두 가지 형식을 갖는다. 그 명료한 형식은 성적, 사회적 또는 민족적인 근거에 기초하여, 인구의 어느 부분에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다. 그 암묵적 형식은, 일련의 일정한 제도, 문제, 행위자, 절차에 시민성의 영역을 제한한다. 전자가 서양에서는 시대 착오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반대로, 후자는 현대의 중요한 문제이다. 근대화라는 부드러운 이름 또는 신-보수주의 혁명이라는 솔직한 이름이, 30년 이상에 걸쳐 노동이나 건강이나 연금과 같은 '사적 생활'의 문제를 평등한 시민성과 관련한 공공의 관심사로 바꾸는 것을 통해 공공역역을 넓혀 온 민주주의의 과정을 역전시키기 위해 이용되어 왔다. '사회' 국가 또는 '복지' 국가 개혁의 배후에서 내기에 걸린 것은, 국가가 개인에게 공적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나 효용과 개인이 사적으로 손에 넣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사이의 균충均衝보다도 훨씬 큰 문제이다. 노동과 건강의 조정의 배후에서 내기에 걸려 있는 것은, 공동체의 '공동성common'에 관한 이해이다. 시민성의 정치적 영역과 사적인 약속이 지배하는 사회적 영역을 나누는 선은, 누가 공적인 일에 참가할 수 있으며 누가 할 수 없는가를 결정한다.
1995년 겨울 프랑스에서 공공운송기관의 노동자들이 행한 상당히 긴 파업 동안, 사적이고 재정적인 이해와, 공통선共通善의 정치적인 추구와 장래 세대를 배려하는 능력을 대비하는, 많은 아렌트적이고 슈트라우스적인 논의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파업이 진행되는 사이에 점점 분명해진 것은, 파업의 주요한 목적은 특정한 인간집단과 제도가 공동체의 장래를 결정하는 배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이란 사실이다.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규범적인 구별은 실제로는 공통의 문제와 장래에 대처하는 능력이 있다고 간주된 자와, 사적이고 직접적인 관심사를 넘을 수 없다고 간주된 자 사이의 구별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과정 전체는 이 경계선의 이동을 둘러싼 것이다.
주1 : Giorgio Agamben, Homo Sacer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8)
주2 : Cf. Jacques Ranciere, 'Who is the Subject of rhe Rights of Man', 103/2 South Atlantic Quarterly, spring/summer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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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랑시에르의 정치론에 대해 소개한 글을 찾았다. 진태원 선생이 아감벤, 호네트, 랑시에르를 현대 유럽 정치철학 3인방으로 묶어 소개한 글인데, 랑시에르의 police, politics, the political 의 구분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진태원 선생은 police 를 '치안/통치'로 옮겼는데, 원어를 그대로 쓰는 것보다 의미를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것 같다.
진태원, <마르크스주의 이후 정치의 모험-현대 유럽의 정치철학> 읽어보기: http://blog.aladdin.co.kr/balmas/1114429
성차공식의 또 다른 측면, 즉 "여성적" 측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의 개념이 어떻게 역사적 유물론 속에 작동하는지 상기하기만 하면 된다.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의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딱 맞는) 구좌파의 슬로건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는 "모든 것(총체로서의 사회)은 정치적이다"는 보편 판단이 아니라 전부는-아닌 집합의 "여성적" 논리의 차원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서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는 정확히 사회적 장은 불가피하게 정치적 분열에 의해 표지되어 있음을, 즉 사회를 단일한 전체로 인식할 수 있는 중립적 "제로-지점"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달리 말해,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는 정치적 장에서 "메타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를 뜻한다. 즉, 어떤 종류의 사회적 기술이나 이해라도 당파적인 언표행위의 위치를 함축하고 있다. 극단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이미 "정치적"이며, 우리는 언제나 이미 어떤 "편에 서 있다." 계급투쟁이란 객관화될 수 없는, 즉 사회적 총체 안에 자리매김될 수 없는 이 불가해한 한계, 또는 분열에 붙여진 이름이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사회 일반을 단일한 총체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는 바로 그 점이 사회를 단일한 총체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치적"이라는 술어를 통해 이 총체를 "모든 것은 정치적이다"고 규정하더라도 말이다.
슬라보예 지젝,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4, 314쪽
(그리고 위 문장에 대한 지젝의 주석) :
오늘날 우파와 좌파의 차이는 진부한 문제틀이라는 얘기가 많다. 이런 이야기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이 두 개념의 비대칭성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좌파는 "나는 좌익이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즉 좌와 우의 구분과 분열을 인식하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우파는 그 변덕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스스로를 중심에 두고서 "극단주의"를 "한물 간 것"으로 비난한다. 달리 말해 좌/우의 구분은 오직 좌파적 관점에서만 그 자체로 인지(헤겔식으로, 정립)된다. 이에 반해, 우파는 스스로를 "중심"에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들은 "전체"의 이름으로 말한다. 그들은 분열을 거부한다. 그래서 정치적 공간의 분절은 성차sexuation에서처럼 역설적이다. 그것은 단순히 전체가 두 편으로 분절되는 것이 아니라 한쪽 편(좌파)이 분열 그 자체를 대리표상한다. 그리고 다른 편(우파)은 그런 분열을 부정한다. 그래서 좌우의 정치적 분열은 필연적으로 "좌파"와 "중심"의 대립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거기서 "우파"의 자리는 비어 있다. 우파는 자기 자신을 일인칭 화법으로 "나는 우익이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에 의해 정의된다. 그들은 오직 좌파의 관점에 의해서만 그 자체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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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만 다 읽고 나가서 과일 먹으면서 담배나 피자고, 이미 온 몸에 퍼져 버린 지겨움과 끙끙거리며 싸우고 있을 때, 저 구절이 눈에 말 그대로 번쩍하고 들어 왔다. 자본론의 가치형식절에 대한 재독해에 이어, 마르크스주의와 라캉을 연결시키려는 지젝의 또 다른 시도라는 점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도 일상적인 경험으로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저 설명의 예리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맛에 지젝을 읽는다(그리고 견딘다-.-)
요컨대, 좌파가 보기에 우파는 우파지만, 우파가 보기에 좌파는 그냥 미쳤다는 거다. 그리고 좀 지나친 해석인지도 모르겠지만, 지젝은 좌파란 본래 사회 내부에서 '광기'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급진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사회적 인식으로는 소화할 수 없는 의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광기일 수 밖에 없다. 사육되는 동물들에 대한 끔찍한(즉, 비인간적인) 조치에 대한 거부감으로 채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처럼, 고용이나 임금 등에서의 산술적 양성 평등의 달성만을 목표로 삼지 않고, 그런 통계에서 결코 잡히지 않을 문제들을 고민하는 사람들처럼. 그러니까 진보적 정치를 일련의 합리적 정책으로 환원시키는 이른바 '합리적 진보'나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며 훈계조로 말하는 절충주의자들은, 완전히 틀렸다. 정책은 오직 좌파를 배제했을 경우에만 합리적일 수 있고, 좌파는 잘 날고 있는 새에 달라 붙어 간지럽히는 벼룩과 같은 것이다. 좌파라는 말은, 그 역사 때문에 역으로 다양한 급진적 정치를 포함하지 못하는 개념으로 배척당하기도 하지만, 지젝의 해석을 통해 새롭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간 이제 정말로 담배 한 대 태우러 나가야 겠다. 낮에 마트에서 처음 보는 과일을 하나 사 왔는데, 담배와 맛이 꽤 잘 어울릴 것 같다. 평소 요리랍시고 해 먹는게 워낙 시원찮아서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지만, 독일 과일은 한국보다 대체로 맛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일본은 서양 철학의 수입에서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서점의 철학 코너를 놀라워 하면서 돌아 보다가 집어 든 책은 05년 런던대학에서 열린 연속 강연회 의 원고를 묶어 출판한 책, <<도래할 데리다>> 였다. 지젝, 바디우, 발리바르, 스피박 등 쟁쟁한 사람들의 원고로 가득한 이 책은 놀랍게도 영국보다 약 열흘 먼저 발매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지 않았을까 싶은데, 번역의 질이야 내가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 속도에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비도 오고, 돌아다니는 일에도 질려서 호텔에 틀어 박혀 발리바르의 글을 한글로 옮겨 가며 읽었는데, 헤겔과 구조주의 언어학과 데리다의 관계를 다룬 흥미로운 글이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본어에도 철학 개념에도 서툴기 때문에 그저 아리송할 뿐이었다). 일본에서 얼추 다 끝내서 조금 손본 다음 블로그에 올리려고 했으나, 같은 책의 자크 랑시에르의 글이 너무너무 재밌어서 랑시에르의 글을 먼저 옮기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랑시에르의 글은 민주주의를 둘러싼 다양한, 그리고 상충되는 입장들이 민주주의의 개념 속에 이미 들어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을 통해서 그의 글은, 한국에 빗대어 말하자면, 박정희의 '한국식 민주주의'가 성립 가능성,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혁명적 요구(주류 언론이 언제나 망각케 하려는 것이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혁명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요즘의 '과잉 민주주의'에 대한 '공허한' 걱정이나 법의 보편적 지배에 대한 긍정 속에서의 자유의 추구라는 역설 까지를 아우르고 있다(마지막 항목을 쓰면서 이글루스에 쓴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에 대한글에, '헌법이 설립하는 인권'을 얘기하며 날 선 리플을 달았던 사람을 떠올렸다. 의미심장하게도 그 사람의 아이디는 하루키의 소설에서 차용된 것이었고, 나는 하루키의 소설이 어떤 자유의 형식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고 있다).
내게 랑시에르의 글이 흥미로웠던 것은, 내가 저 위에 열거된 그 어느 것인가에 머물러 왔으며, 저 모두가 혼재된 상태에서 사고를 해 왔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에 대한 시덥잖은 농담 -20대에 맑스주의가 아닌 사람은 바보지만, 20대가 지나서도 맑스주의자인 사람은 더 바보다(이게 맞던가? 그보다 이게 농담이긴 한가??)-은 그 나름대로 핵심을 찔러서, 이 뒤엉킴을 겪는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님을 말해주는 것 같다. 농담이 말하고 있는 것은 맑스주의자가 되고, 안 되고가 결국 민주주의 속에서의 '사고思考'의 문제, 즉 사고가 곤궁에 부딪혔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20대가 지나서는 사고의 곤궁이 아니라 생활의 곤궁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좋은 글에 들어 가기 전에 사언이 너무 많았다. 비록 질은 썩 좋지는 않겠지만 내 번역이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하고, 나처럼 조금만 생각하려고 하면 머리가 아픈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번역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본어 문형 그대로 옮길 것이며(일본어 번역은 꽤 직역에 가까운 듯), 내가 원 저자가 다루는 철학 용어들은 물론이고, 그것에 대한 일본쪽 수입의 맥락도 잘 모르는 탓에(흑흑) 어지간하면 손 안 대고 그대로 옮기기로 했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명기하여 설명을 달 생각이고, 일본어판에서 역자가 첨부한 번역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명기하여 옮길 것이다. 번역은 딱히 계획은 없으니 시간이 나는대로 슬금슬금- 기회가 닿는대로 영어판이나 독어판(있으면)을 구해 수정할 생각이지만, 이곳 생활이 맘 먹은 대로 되질 않아서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 어쨌든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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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가? Does democracy mean something?
자크 랑시에르 Jacques Ranciere
나는 데리다에게 바쳐진 연속강연에의 나의 개입에 대한 예비적 언명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데리다의 제자였거나 그의 사상의 전문가였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가 나의 교사였던 때-아주 옛날의 일이다-부터, 나에게는 그와 철학적인 문제를 논할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내가 그에게 표현할 경의는 그의 저작에 대한 주석이 아니다. 그를 기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90년대에 점점 그의 사고의 전경을 점하게 된 개념과 문제-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무엇이 의미되고 있는가-를 다루는 나 자신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란 무엇인가
데리다는 <<우애의 정치학The politics of friendship>>에서, 페리클레스의 것으로 여겨지고, 플라톤의 <<메넥세노스>>에서 부연되어 있는 잘 알려진 명제-'아테나이 인의 통치는, 이름은 민주주의이지만, 현실에서는 귀족제, 즉 다수자의 찬성을 얻은 최고로 뛰어난 자의 통치이다'(*주1)-에 주석을 다는 것에 의해, 이 쟁점을 전개한다. 데리다는 이 언명의 기묘함을 지적한다.(*주2) '민주주의적' 통치라는 수사 그 자체가, 이 형태의 통치에 두 개의 대립하는 이름이 부여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불리지만, 그러나 사실상 귀족제이다. 이 '그러나'를, 이름과 사물 사이의 이 이접離接을,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들은 그것을 수사修辭 상의, 또는 통치를 위한 허위라고 보거나, 이름과 '사물' 사이의 차이에 의해, 무언가 좀 더 근본적인 것이, 민주주의를 다른 어떤 형태의 통치와도 다른 무언가로 만드는 내적인 차이가 가리켜지고 있다고 상정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이 물음은, 데리다에 의한 민주주의의 아포리아적 구조의 탐구와, 내가 오히려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라고 부르기를 선호하는 것에 대한 나 자신의 탐구에 공통의 근거를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라는 것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이름과 현실을 다루는 현대의 두 가지 논쟁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첫 번째 논쟁은 중동에 민주주의를 전파하기 위한 미국의 군사작전에 관한 중요한 불일치를 품고 있다. 이라크의 선거와 레바논에서 일어난 반 시리아 저항운동 직후, <<이코노미스트>> 지의 표지에 '중동에서 민주주의가 시작'이라는 말이 춤을 췄다. 민주주의의 시작에 대한 자기-만족은, 이름과 현실 사이의 차이에 대한 두 갈래의 논증구조- '.....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는 시작된다' 또는 '민주주의는 시작되지만, 그러나 .....'-에 따라 정식화된 것이다.
'.....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는 시작된다'는 어떤 이상주의자들의 논의였다-그들에게 민주주의는 인민의 자기-통치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힘에 의해 다른 민족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언하면,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즉, 민주주의에 대한 실용주의적인pragmatic 견해를 취하여, 민주주의는 '인민의 권력'이라고 하는 유토피아적인 견해를 치워 버린다면, '민주주의는 시작된다'라고. 두 번째 논의는, 민주주의는 시작되지만, 그러나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는 것은 법의 지배, 자유로운 선거 등을 가져다 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선 혼란을, 민주주의적 생활의 혼돈을 가져다 주는 것을 의미한다. 도널드 럼스펠드가 사담이 실각한 후 일어난 약탈에 관해 말한 것처럼-우리들은 이라크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 것이며, 자유라는 것은 그런 종류의 일을 행할 가능성 또한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도 론과 그러나 론은 요컨대 일관된 논리인 셈이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기-통치의 목가 등이 아니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혼란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초대국의 병기에 의해 외부에서 야기되는 것이 가능하며, 또 아마도 야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초대국super power(=초권력)'은 절대적인 군사적 우위를 가진 나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민주주의에 의한 혼란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민주주의를 넓히기 위한 군사작전을 지지하는 논의는, 우리들에게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것에 대한, 지금만큼 열광적이지는 않았던 훨씬 오래된 논의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그런 논의는 30년 정도 전 삼극위원회(*일역주1)에서 행해진,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두 개의 주요한 논의를 끊임 없이 바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삼극위원회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몽상가들이 민주주의를 인민의 자기-통치와 동일시함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시작된다. 이런 몽상가들은 삼극위원회에서 비난된 '가치지향의 지식인'과 같은 종류의 등장인물이다. '가치지향의 지식인'은 '정책지향의 지식인'의 실용주의pragmatism에 대립하는 '적대적문화'를 조장하고 지도자와 권위에 도전하는 과잉의 민주주의적 활동을 촉진하고 있다고 비난받은 것이다.
민주주의는 시작되지만, 그러나 그것과 함께 혼란도 시작된다.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약탈에 대해 도날드 럼스펠드가 한 농담은 30년 전에 사무엘 헌팅턴이 행한 논의를 그대로 반복한 것처럼 들린다. 헌팅턴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정부에 압력을 가해 권위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개인이나 집단을 자기-지배와 연결된 규율과 희생의 필요성에 저항하게 하는, 그런 요구의 증대에 다다르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새로운 영토로 넓히기 위한 군사작전이, 현재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서 이해되고 있는 패러독스를 전경화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민주주의적 통치'라고 하는 것은 좋은 정책을 위협하는 과잉을 통제할 수 있는 통치형식을 의미한다. 이 과잉은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것으로써, 그 이름이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의 통치능력>>(*주3) 에 기술되어 있듯이 민주주의적 통치를 위협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생활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이 위협은 완전한 이중 구속double bind으로써 나타난다. 한편, 민주주의적 생활은 인민에 의한 '자기-통치'라는 이상주의적 관점의 실시를 의미한다. 그것은, 좋은 정책의 원리와 절차, 권위, 과학적 전문지식, 실용적인pragmatic 경험을 침식하는 정치활동의 과잉을 동반한다. 그 때문에, 좋은 민주주의는 정치적 과잉의 억제를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치활동의 억제는 요망과 요구를 증대시켜, 정치권위와 시민으로서의 행동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사적생활' 또는 '행복의 추구'에의 권력부여에 다다른다. 그 결과로서, '좋은 민주주의'란, 민주주의적 생활의 본질에 내재한 정치에의 참가와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이중의 과잉을 순치할 수 있는 통치형식을 의미한다. 현대의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즉,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인 생활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는 통치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며, 후자에 의해 억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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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Plato, Menexenus, 238c-238d
주2) Jacques Derrida, Polittics of Friendship (London: Verso, 1997), p93-113
일역주1) 삼극위원회: 1973년 10월에 미국, 일본, 유럽 세 지역의 민간조직으로서 발족. 상호의존의 심화라는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이해관계의 조정에 기울기 쉬운 정부간 관계를 보완하고, 더 넓은 시야에서 국제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75년에 도쿄와 교토에서 열린 연차총회에서는 중동평화 등과 함께 민주주의의 위기가 논의되었다. 본문에서 나오는 <<민주주의의 통치능력>>은 그 때 제출된 문서이며, 사무엘 헌팅턴, 미셸 크로졔, 죠지 와타누키 삼인이 각각 미국, 유럽, 일본의 민주주의 상황(정권담당자가 피치자의 요구에 얼마나 응하는 것이 가능하며, 또 피치자에게 얼만큼 정부의 권위와 정통성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보고했다.
주3) Michel Crozier, Samuel P. Huntington, Joji Watanuki, The Crisis of Democracy - Trilateral Commission Task Force Report n. 8(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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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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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케, 잠시 미뤄두었다가 읽으려고 생각중이었는데-다들 읽고는 있지만 차마 덧글을 못달고 있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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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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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네요. 번역에 고생하셨네요. 저는 이글루스에서 이 글을 보고 퍼 날랐습니다(사이트는 문화연구 시월www.siwall.net입니다). 캐즘님의 블로그에서 타고 왔는데 여기에도 있네요. 늦게나마 허락을 바랍니다. 그 외 랑시에르 논문 중 한글로 옮겨진 것은 2-3편 정도 돼는데 시월홈피에 모아두었습니다. 방문하시려면 회원가입을 해야하는데(귀찮게시리) simppo@empal.com으로 메일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2008년 연초계획으로 랑시에르 읽기 모임을 모으고 있는데요 역시 관심있으신 분들은 연락주세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