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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은 붉은 구렁을 / 온다 리쿠

 

'이야기가 열리는 나무' 밑에 앉아 입을 벌리고 누워있는거야. 주구장창 그냥. 이야기가 뚝 떨어져서 목이 멕히든, 이야기가 부스스스 떨어져 내려서 얼굴을 가리든, 그저 '이야기가 열리는 나무' 밑에 있다는 게 그저 행복한 거지. 온다 리쿠는 '이야기가 열리는 나무'를 믿는 사람. 나는 이야기 자체 보다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어 '이야기'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표현하는 작가가 참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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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 조영아

+ 진득한 촛농이 머릿속 가득 들어찼다. p.286

 

 

for no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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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 온다 리쿠

 

그러니까 말이지,타이밍이야.

...
하지만 잡음 역시 너를 만드는 거야.
잡음은 시끄럽지만 역시 들어두어야 할때가 있는거야. 네게는 소음으로 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이 잡음이 들리는 건 지금 뿐이니까
나중에 테이프를 되감아 들으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들리지 않아.
...

세상은 정말 타이밍이야. 순서라고 해도 좋겠지만.


 

나는 말하자면 사생아지.

...

러브차일드라고 하는 거야. 그렇구나, 다카코는 러브차일드구나.

그래서 그런 얼굴을 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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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 / 오영욱


 

from. 행복한 오기사 블로그



매일매일 들르는 오기사 블로그를 통해 책이 나온다는 사실은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구입하겠다는 생각까진 없었는데 막상 내가 좋아하는 작은 판형의 똥똥한 책이라는 걸 알고 나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예쁜 그림과 정감 어린 사진들, 바르셀로나 뒷골목에 대한 안내 정도로도 대만족이다.

 

여행과 삶의 중간적인 일상은, 나 역시 꿈꾸는 것.

이제는 좀더 구체적 현실로 그리고 있는.

영화과에 갈 거라고 처음 내 입으로 말했을 때, 그건 꿈이거나 바람이었다.

실제로 그럴 의지를 나 스스로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런 것.

하지만 어느 순간, 머릿 속에 전구가 켜지는 느낌을 받고 나면, 그건 꿈이 아닌 현실이 된다.

 

- 서른 살엔 남미에 갈 거야.

- 1년쯤 남미를 여행할 거야.

- 남미에 잠깐 살다 올 거야.

 

남미와 관련해서 내가 떠들었던 건 위의 대략 세 가지 정돈데,

꿈이었던 것이 현실로 바뀌는 것을 몇 번쯤 경험해 본 지금,

저 셋은 현실 가능성을 상당히 내포한다. 행복하게도~

 

- 서른 살엔 남미에 가서 1년쯤 살다 올 거야.

 

꿈이 있다면 1년이 2년이 되고 2년이 2년 반쯤 되는 것. 그 이상은 나도 힘들 것 같다.

 

문제는 엄만데,

자취는 죽어도 안 된다고 했던 엄마가 불과 1년 만에 자취방을 구해줬던 전력을 생각한다면, 그리 문제라고도 볼 수 없을 듯. 쿄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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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 에르네스토 사바토

나를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이 하나 존재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바로 내가 죽인 사람이었다.> p.17

 

이 문장은 다시 길게 서술된다.

 

나는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밤이 되면 나는 낡고 쓸쓸한 어느 집을 방문했다. 이 집은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고, 또 무한히 갈망한 곳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 집에 들어서면 몇 가지 추억이 나를 인도했다. 하지만 이따금 나는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기도 했고, 또는 몰래 숨어 있던 적들이 내 뒤를 공격하거나 사람들이 나를 두고, 나의 순진성을 두고 속닥거리거나 조롱한다는 느낌을 갖기도 했다. 그들은 누구였으며, 또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지? 하지만 그리고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집에 있게 되면, 사춘기 시절에 품었던 옛사랑이, 그 사랑으로 인한 떨림과 더불어,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 특유의 가벼운 광기, 두려움, 환희 같은 감정과 더불어 내게서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꿈속에 나타났던 그 집이 바로 마리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p.104

 

시작과 끝의 간격이 까마득히 멀어 빛이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공간은 터널이되 터널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집요한 광기는 점점 터널의 길이를 늘여 종국에는 밀폐된다.

 

그리고 이 지옥의 벽들은 날이 갈수록 더 밀폐된 상태가 될 것이다.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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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수프 / 야마다 에이미

이 섬에서 욕망은 늘 공기 속으로 녹아든다. p.88

 

그러고보니 <캔버스관>은 굉장히 화려한 축에 속했던 듯싶다. 자신이 밝혔다시피, 분명히 그 묘사에는 열대의 원색이 스며 있었으니.

 

글쎄다, 판단유보. 네 말마따나 끈적끈적하긴 한데, 뱀이 올라올 정도인지는 모르겠고, 그보다는 묽은 땀이 흘러내리기 일보직전으로 맺혀있는 정도? 그 매끈한 땀을 쓸어보면 끈적임없이 손도 함께 흘러내릴 것 같은. 종종 눈에 띄는 빼어난 묘사력을 제외한다면 그다지 흥미없다. 나는 이미 나대로 살고 있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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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식모들 / 박진규

현재는 폭로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과거 진실한 비밀이 차지했던 자리를 지금은 진실의 겉옷을 입은 거짓말이 대신한다. 언어와 이미지 모두 믿을 수 없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살아간다. 사람들은 구강만이 아니라 안구에도 메가폰을 설치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이제 이미지들은 조작되고 왜곡되지만 아름다운 곡선을 지니게 된다. (p.108)

 

얌전히 쑥과 마늘을 먹은 곰은 여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뛰쳐나간 호랑이는? 호랑이도 제스스로 여자가 되었지만, 이 호랑아낙과 그의 후예들은 체제에 편입된 것이 아니라 전복을 도모하는 존재들로 묘사된다. 호랑아낙의 계보를 어슷하게 잇고 있는 수상한 식모들은 적극적으로 부르주아 가정의 균열을 만들어내게 되고.

 

가설이 참 뻔뻔하고 재미나다. 김기영의 <하녀>와 모딜리아니의 <하녀>를 이렇게 만나게 하는 재기라니. 엉뚱한 서사를 그 자체로는 완벽한 우주로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천명관의 <고래>와도 닮은 소설. 재미는 있으나......

 



나는 여전히 남자 작가들의 성애에 대한 표현이 불편하고 불쾌하다. 여성들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음으로 인해 상상의 여지를 많이 가지고 있고, 작가는 그 미지의 공간을 무대로 남성 화자를 앞세워 맘껏 뛰놀고 있다. '하녀'와 '식모'는 전복적 인물로 끊임없이 설명되지만, 남성의 욕망이 반영된 환상/대상이라는 위치로부터는 한치도 벗어나지 못 한다. 그녀들이 스스로의 그러한 위치를 이용하고 있음에도 뭔가 통쾌하거나 기분 좋게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없는 걸로 봐서는, 결국은 그렇고 그랬던 것 같기도...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뭐가 중요하고 뭐가 진짜 문제인지 헷갈린다. 여성이 남성을 조롱하고 유린하는 방식과 남성이 여성을 조롱하고 유린하는 방식은 분명, 다르다. 그리고 남성작가들이 묘사하는 '여성이 남성을 조롱하고 유린하는 방식'은 남성 일반의 성적 환상과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찝찝하기 짝이 없다. 성적 환상을 가지지 말라고 할 수야 없으나, 왜 그런 식인지들 모르겠다 정말. --;;

 

분명히 다르다. 완벽한 화해는 불가능하다. 다만 용납할 수 있는 선에서 공존할 뿐. 그런데 때로 그 '선'이라는 게 널뛰기를 할 때가 있다.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

 

뭐, 기발한 아이디어만으로도 후한 점수를 줄 수 있고 사실 꽤나 재미있게 읽었는데, 결국 쓰잘데기 없는 소리만 늘어놓은 것인가? 음.. 그건 아닌 것 같다. 오늘만 해도 전경 4명이 여성 한 명을 윤간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런 세상이고, 그런 뉴스를 들으면 난 즉각적으로 '씨발놈들 죽여버렸으면 좋겠다'는 소리를 한다. 그리고 울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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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 마운틴 이야기 / 존 에이브램스

사우스 마운틴사의 창립멤버이자 이 책의 저자인 존 에이브램스는, 지역밀착형 기업 공동체가 어떻게 가능할지 지난 30년 동안 실험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작정이다. 지금까지 소소한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그의 회사가 갖추게 된 여덟 가지 원칙 - 민주적인 직장 만들기, 성장이라는 불문율에 도전하기, 다양한 가치를 실현하기, 마서즈 비니어드 섬에 전념하기, 장인 정신을 지키기, 지역 주민을 보호하기, 지역 기업가 정신을 실천하기, 성당을 짓는 사람처럼 생각하기 - 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상당하다.

 

우리는 지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면서,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하고,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과 실험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은' 세상과 '다른' 세상은 상당 부분 겹치기도 한다.



 

사우스마운틴사 건축물의 특성 중 하나. 나무의 형태를 그대로 활용한 기둥. 심지어는 강에서 떠내려온 목재를 활용하기도 한다.

 

얼마나 더 많이 성장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적절하게 성장하는가. 회사를 유지하고 구성원들과 나누는데 적절한 이윤인지, 모두에게 충분한 급여인지, 일의 중요성에 걸맞게 시간이 주어지고 있는지,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규제와 고민거리가 지나치지는 않는지... p.33

 

아마도 사회단체들로서는 일상적으로 고민하는 문제들일 터. 새로운 문제의식은 아니지만, 정리된 누군가의 경험이 진행중이긴 하지만 일종의 성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게 즐거웠다고나 할까. '자본주의'의 대안이 뭐냐? 라는 공격적인 질문들에 대해, 자본주의 안에 존재하지만 '더 나은' 세상이자 '다른' 세상일 수 있도록 하는 이러한 사례들을 얘기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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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

나는 걸었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나는 걸었다. 나는 천천히 가로등이 밝아오던 거리를 정처없이 쏘다녔다. 나는 모든 걸음이 어딘가를 향해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걸음은 언어의 심연, 내가 유일하게 안전하다고 느끼는 그곳으로 나를 데려다 줄 뿐이었다. p.143

 

언어는 매우 자의적인 것으로 때로 그것은 함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희의 수단이기도 하다.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에게 언어는 그러하다. 그녀는 끊임없이 은유와 의인법을 사용하는데, 특히 관념어에 신체성을 부여한다. '삶' '현실' '마지막 순간' 같은 것. 탁자 아래로 떨어진 '현실'을 부여잡으려 하는 구체적인 행위는, 우습게도 '실존'하는 것이다. 내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사랑'으로 인해 갈비뼈가 눌리고 내장을 찌른다는 상상. 잠들기 위해 불러낸 하얀 양떼의 첫 번째 양이, 죽어도 울타리를 뛰어넘으려 하지 않아 그것을 몽둥이로 내려쳐 죽이고야 잠에 드는 주인공.. 아이러니하게도 상상으로 가득찬 그녀의 표현들은, 때로 섬뜩하게 우리의 삶을 묘사해 낸다.

 

그것이 페리 로시가 생각하는 단편소설의 책무이며 묘미인 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인용해 둔 독일의 소설가 노발리스의 잠언, 진정한 단편소설은 예언적, 즉 이상적인 동시에 전적으로 필수적인 재현이어야 한다.

 

p.s 책날개를 보니 작가는 여성이며 좌파고 동성애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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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후에 오는 것들 / 공지영

제목을 알지 못 하는 그 음악은,

빛이 바래고 비가 계속 내리는 오래된 필름 같다.

그 끝에 웅성이는 대사는 알아듣지 못 해도 정겨운 느낌이 묻어나는.

 

 



난 언제나 촌스러웠지만, 얇은 줄이 볼록했던 그 청바지를 예쁘네, 했을 때 대책없이 기분이 좋아지던 순간들, 그러다가도 나는 그만 놓여지고 버려지고 기껏해야 혼자 영화관에 들어가 대여섯 관객 밖에 없는, 지금은 사라진 영화관에서 그렇게 일요일 이른 오후를 보내야만 했을 때, 그렇다한들 아쉬움 하나 없었던.

 

세상에는 '너는 모르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아서, 나는 늘 나쁜 아이가 되고 말았는데, 그게 억울해서 한 번 울 거 두 번 울고, 사람 앞에서 화 내는 법을 오래도록 배우지 못 했던 내가, 나도 놀랄만큼 크게 소리를 지르고 돌아서던 날 내 주변에서 떨리던 공기의 흐름.

 

둘이 지내기엔 좁아터진 그 방에 어쩌면 혼자가 더 편했을텐데 기어코 반만 펼쳐두었던 이부자리와 원하기만 하면 금세 유리잔에 내어져왔던 달큰한 칵테일향. 타는 듯한 그 거리를 걸어 이제는 건너지 않는 낡은 철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서양도라지꽃, 그 예쁜 보랏빛은 기껏해야 일주일, 그 일주일이라도 물을 잘 주라고, 하지만 곧 죽을 거야, 그러면 그냥 내다버려.

 

-. 우연히 눈앞에 뚝 떨어지지 않았으면 부러 찾아읽지는 않았을 공지영 소설. 츠지 히토나리의 '준고' 편을 읽어야겠단 생각도 안 든다. 한일관계를 남녀간의 사랑으로 풀어보자는 의도라니. 어쩐지 어색한, 구석들이 많더라만. 사랑 이야기 읽으면 내내 소소한 기억들만 떠올린다. 하도 울었더니 열이 다 나네. 바보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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