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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09/15
    사무실에서 든 생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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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4/09/10
    또다시 주말이로군~(6)
    자일리톨
  3. 2004/09/06
    주말 후유증인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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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4/09/01
    버스를 타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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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4/09/01
    허~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지 모른다더니...(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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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4/08/28
    치과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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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4/08/24
    KBS1 덩샤오핑 특집프로그램을 보고 난 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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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4/08/22
    "레닌의혁명으로가는열차" - EBS세계명작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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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4/08/09
    버마이주노동자 마웅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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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든 생각...

아.. 자본주의보다 더 짜증나는 관료주의, 권위주의라니.

오늘 갑자기 그렇게 느껴버렸다. 이거 제도권 교육을 너무 충실히 받아서 그렇나. 세련된 모습을 한 자본주의가 더 친근하게 느껴질 줄이야. 솔직히 말해서 겁나 파시스트들은 나를 좋아한다. 왜? 내가 그들 앞에서는 가만히 있는 소시민(?)이거덩. 그들의 썰렁한 농담에 박자맞춰 미소지어주는 미덕까지 가지고 있음이야 두말해서 무엇하리 -_-;;;

아.. 이런 내가 싫군. 비겁하기는...

 

주절주절 써놓고 보니 "아.."가 두운을 이루는 수미쌍관법일쎄.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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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주말이로군~

또다시 금요일 오후군. 이 시간 때만 되면 야릇한 흥분을 느낀다.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고 이틀간은 늘어질 수 있겠다는 안도감도 밀려든다.

일요일 오후에 밀려들 약간의 두통은 잠시 접어두자.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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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후유증인가?

일하기가 넘넘 싫다.

그래도 지난 금요일에 왠만한 일을 끝내놓았기에 매주 일욜 저녁무렵에 느끼던 두통은 없었거늘..  오늘 아침은 이상하게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내내 진보네에서 사네 그려..-_-a

여름 내내 매지 않던 넥타이와 긴팔 와이셔츠 때문일까? 다시 넥타이로의 복귀. 올해도 다 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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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자

이 글은 난타님의 버스를타자에 대한 트랙백입니다.

 

언제 봤던 다큐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떨결에 친구한테 끌려가서 본 기억이 있다. 사실 그 다큐를 보기전에는 부끄럽게도 장애우들의 이동권 문제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내 이종사촌 누나의 경우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옆에서나마 누나의 일상을 꾸준히(?) 볼 수 있었다. 지금 정신연령이 6살 정도인 누나는 걸을 수는 있지만 오래 걷지는 못한다. 발이 선천적으로 너무 작은데다 비만이 심해서 다리가 오래 견뎌줄 수 없는 탓이다. 누나는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성당에서 운영하는 쉼터 혹은 집에서 보낸다. 외출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그것은 누나의 다리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다.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이 누나와 함께 걷고 있는 나로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언제였던지... 어느 피자집에서 자리에 앉아 피자를 주문했는데 종업원이 그러더라. 홀 중앙에 앉지 마시고 조금 구석진 자리로 가 달라고... 나는 그러자고 했지만 이모는 끝까지 홀 중앙에서 피자를 드셨다. 마치 오기를 부리시는 것 마냥...

 

솔직히 그때 난 ... 창피했다. 그냥 조용하게 구석자리에서 먹고 가면 될 것을 왜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기어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지 난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때부터 난 누나나 이모를 만나는 걸 피해왔고 아직도 그렇다. 마치 이모가 누나 때문에 내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까봐 그게 두려웠었던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머리로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인간이고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종로3가에서 이동권쟁취를 위한 서명운동이 있을 때 "폼나게" 서명도 했다. 하지만 내 주변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는 건 나로서는 숨겨야 할 부끄러움으로, 그리고 누나는 시혜적인 동정만으로 평생을 감사하며 살아야 할 착한 존재로 인식되어왔던 것 같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충격을 먹었다. 그들은 더이상 시혜적인 동정을 구걸하고 떡고물이 떨어질 때 "아이구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는 "착한 존재"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뻔뻔함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정당한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모습이 뻔뻔스러움으로 느껴진다는 건 항상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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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지 모른다더니...

위의 말은 지금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거의 컴맹수준으로 지내오다가 블로그 하나 만들어서 써 보니 신기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트랙백이니 RSS니 처음 대할 때에는 어려웠는데 막상 써 보니 아무것도 아니다. 항상 어딘가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는 빅브러더로부터 RSS가 뭔지 대충 얘기만 듣고 오늘 abilon을 깔아서 사용해 봤는데.. 오호~라 이거 보통 물건이 아니다. 관심블로그를 지정해 놓으면 자동으로 업데이트가 되서 모든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한시간동안 삽질(?)했더니 관심등록 블로그가 화면가득 차버렸다. 오른손이 저리네 ... -_-;; 암튼 회사에서 앞으로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다. 냐하하하하~

 

참,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느긋하게 EBS 다큐멘터리를 보려고 했는데, <시간의 수레바퀴>라는 별 거지같은 다큐가 해서 컴퓨터앞에 앉았던 거다. 유명한 다큐감독의 작품이라고 꼴에 "다큐멘터리 거장을 만나다" 섹션에 있다. 서양애들은 왜 되도 않은 오리엔탈리즘에 빠져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전파가 아깝다. 전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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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에 갔다

목요일에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들어와 커피를 한잔 마시는데 입 속에서 왠 덩어리(?)가 느껴져서 뱉어보니 이빨의 일부분이다. 어릴 적 윗쪽 사랑니를 때운 적이 있었는데 일년 전쯤인가 아말감이 떨어져 나간 걸 가만히 두었더니 썩어서 부숴져 버렸나보다.

 

모든 병원에 가는 게 다 두려운 일이지만 내겐 치과 가는 게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어렸을 때 너무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어서 치과하면 고통, 아픔 이런 단어가 연상 되더라. 일전에 치과의사가 주인공을 효과적으로(?) 고문하는 영화가 있었는데 치과의사는 환자를 아프게 하려면 엄청 아프게 할 수 있는 무서운 사람들인 것 같다. 올드보이에서도 장도리로 이빨 뽑는 거 보면 살벌하쟎어...?-_-;;

 

근데 사랑니가 부숴져 떨어져 나간 부분이 예리해져서 자꾸 혀하고 부딪쳐서 아프길래 오늘 오전에 큰 맘 먹고 치과에 갔다. 그냥 집앞의 지하철역으로 가니 왠 치과가 그리도 많은지... 눈 앞에 보이는 것만 4군데더라. 야~ 이 많은 치과들이 다 영업이 된다는 게 신기하다.

 

규모나 업력이 중간쯤 되는 곳을 골라서 들어갔다. 중후한 분위기(?)의 대머리 의사 선생님이었는데 신문을 보고 있다가 대뜸

 

-진료받을 거에요? 

=네

-여기 누워요. 어디가 아파서 왔어요?

=사랑니가 부숴져서 떨어져 나갔고요, 충치도 있는 것 같아요.

-충치? 아.. 여기? 어차피 아래에 있는 사랑니는 잘 썩기도 하고 언젠가는 뽑아야 하니, 좀 더 두었다가 아프면 와요. 오늘은 위에 부숴진 것만 뽑으면 되겠네.

=아, 네~

 

마취주사를 놓고 한 10분 쯤 누워서 기다리다가 의사 선생님이 들어와 이빨을 뽑는다. 끌같은 걸 입속에 넣더니 이빨과 이빨 사이에 넣고 누른다. '우지직'하는 소리가 들려와 흠칫 놀랐다. 내가 몸을 부르르 떠는 걸 느꼈는지 선생님이 묻는다.

 

-아파요?

=아니요.

-근데, 왜 떨어요? 난 또 마취가 제대로 안 된 줄 알았네.

 

끌로 이 사이를 벌리는 것 같더니 조그만 뻰찌를 넣더니 이빨을 쑥 뽑는다. 대단한 기술이다. 역시 나이든 치과 선생님이 훨씬 믿을만 하다니깐...-_-;;

 

진료비는 칠천원이다. 약값까지 합치면 8천4백원이네. 난 또 대형사고 터질 줄 알았더니만, 이만해서 다행이다. 근데, 이빨 뽑고 2시간 반이 지났는데도 왼쪽 볼에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게 영 이상하다.

 

오늘은 방에서 누워서 좀 쉬어야지. 못 보던 책도 좀 보고 영화도 좀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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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 덩샤오핑 특집프로그램을 보고 난 후

지난 주 KBS일요스페셜에서 덩샤오핑에 대한 특집 프로그램을 하더라. 부제는 "가난은 사회주의가 아니다."였는데 보는 도중에 눈물이 조금 나기도 했고 뒤로는 짜증이 나기도 하고 쫌 그랬다.

KBS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사회과학원의 연구원은 현재의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개거품을 물고 말했지만, 그건 어불성설이고... 설사 70년대 후반 덩샤오핑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를 계승한다는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노선이 과연 그러한지 의구심이 들더라.

 

근데 나도 어쩔 수 없는 제도교육의 희생자(?)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의 지도자들 중 내가 가장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저우언라이다. 그를 기회주의자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평생 그가 사랑한 중국인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그야말로 중국의 혁명1세대중 가장 올바른 혁명가이자 정치가의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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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레닌의혁명으로가는열차&quot; - EBS세계명작드라마

저녁밥을 먹다가 EBS를 봤는데 우연히 아래와 같은 드라마를 해 줬다. 다음주에도 계속 해준단다. 마지막 부분 밖에는 못 봐서 아쉬웠다. EBS는 심심할 때 시간 때우기 좋은 채널이다. 수능방송만 빼고.-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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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 미국 / TV용
감독 : 데미아노 데미아니
주연 : 벤 킹슬리(레닌), 레슬리 캐론(나디아) 도미니크 산다(이네사) 티모시 웨스트(파르부스), 피터 휘트먼(라데크), 자비에르 엘로리아가(라데크)

봉인열차를 타고 취리히에서 페트로그라드로 가는 레닌의 짧은 여정을 그린 영화로, 1917년 혁명 전야의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내용

때는 바야흐로 1917년. 1차 대전 중인 독일은 양쪽 전선에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미국이 연합국 측에 동조해 참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해지자 독일은 점차 불안해진다. 독일 수뇌부에선 만일 러시아를 전쟁으로부터 몰아낼 수만 있다면 독일은 서부 전선에 집중할 수 있을 거란 예상을 한다.

이런 시점에서 헬판트 박사가 독일 사령부에 작전 계획을 들고 나타난다. 만일 독일이 한 인물로 하여금 러시아에서의 혁명을 성공시키게끔 할 수 있다면 러시아는 약해질 거란 내용이었다. 그 인물이란 다른 아닌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일명 레닌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를 안전하게 고국 러시아로 돌려보내자는 계획이 드디어 시작된다.

파르부스란 별칭의 헬판트 박사는 망명한 러시아인으로, 레닌의 편에서 함께 싸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업 수완이 좋은 그는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레닌과 그의 추종자들은 파르부스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있다. 독일 수뇌부는 그의 계획에 열렬히 찬성하고 스위스 취리히에 망명생활 중인 레닌에게 접촉하도록 한다.

레닌과 아내인 나디아는 당시 취리히에서 가난하고 힘든 생활을 꾸려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러시아로 돌아갈 방법만 강구하고 있던 그들 앞에, 감자기 두 명의 스위스 사회주의자들이 독일 사령부의 놀라운 계획을 들고 나타난다. 힘든 협상 과정이 끝나고 드디어 레닌은 독일이 마련한 특별 열차에 타고 스위스를 떠나 독일을 거쳐 스웨덴, 최종적으로 러시아의 페트로그라드로 향하는 여정에 오른다. 혼자 갈 경우, 체포되거나 반역자, 배신자로 몰릴 것을 염려한 레닌은 외국에 망명 중인 모든 러시아인들에게 함께 러시아로 돌아갈 것을 청한다. 그러나 멘셰비키측과 무정부주의자들은 이 제안을 거절한다. 그리고 레닌과 정치적 동지 이상이라고 소문난 매력적이고 지적인 여성 혁명가 이네사 아르만트와 제네바에 망명 중인 유태인 그룹, 그리고 그루지야 출신의 젊은 혁명가 데이비드도 열차에 몸을 싣는다.

이들의 출발을 앞두고 취리히의 기차역엔 멘셰비키와 다양한 사회주의자들이 이들을 비난하기 위해 모여든다. 비난의 함성을 뒤로 하고 기차는 마침내 출발하고 레닌의 옆에는 라데크와 지노비에프 등의 동지들이 함께 한다. 한편 독일에선 이들을 안전하게 호위할 두 명의 장교, 버링과 플라네츠가 기차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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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이주노동자 마웅저 씨

작년 8월부터 <만원계>라는 모임에 나가게 됐다. 버마-태국접경지역에서 버마정치범을 위해 일하는 현지 활동가(부찌氏)를 후원하는 조그만 모임인데, 한달에 만원씩을 내고 한달에 한번 정기모임을 갖는 그다지 큰 부담이 없는(?) 모임이다. 거기서 마웅저씨를 처음 만났다. 94년 한국에 들어왔다는데, 한국말이 참 유창해서 놀랐다. 그리고 한달에 한번씩 우리는 만났다.

 

한국내에는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의 경제적인 생활의 문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모국의 민주화 문제같은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는 그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마웅저의 경우는 자신이 불법체류자라는 현행법적 지위에 있음에도, 아시아지역의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주노동자문제, 버마의 민주화문제, 버마-태국국경지역의 난민촌문제 해결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활동가의 길을 걷고 있다.

 

벌써 5번이상 얼굴을 대했지만 아직 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오히려 인터넷 웹서핑을 하며 우연히 읽게 된 다음의 글을 보고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을 정도다. 그리고 전업활동가로 살아가겠다는 마웅저를 지원하기 위한 모임이 결성되었다는 사실도 최근에서야 알았다. 그걸 생각하면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의 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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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계 http://www.10usd.net

*마웅저를 지지하는 사람들 http://people.action.or.kr/zaw

 

 

1. 외국인 이주마웅저의 노동자 생활

1988년부터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학생활동가로 해왔던 저는 1994년10월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입국할 때 브로커를 통해서 비지니 비자로 큰 빚을 지고 들어왔습니다. 한국에 들어와 어느 아는 사람을 통해서 한 사출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야간/주간으로 공장에 열심히 일을 하면서 한국에 입국할 때 빌린 돈을 조금씩 갚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회사에 7개월째 일하고 있는 중에 공장이 말없이 이사가고 사장님이 우리 외국인들을 피해 도망갔습니다.그래서 그 회사에서 7개월 동안 야/추간 (주72시간)근무한 2달치 월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회사가 저희 외국인 노동자들의 월급을 주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사갈 때 저는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되었고 한국말도 하지 못한 상태여서 갈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때 제가 가장 고민한 것은 한국에 입국할 때 빌린 돈과 높은 이자입니다. 저는 정신이 나가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이 하였습니다.

미얀마의 민주화 활동가인 저는 코리안 드림을 잘못 꿈꾸고 한국에 들어왔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버마의 민주화 문제 생각만 해왔던 저는 그때부터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한국말과 한국문화를 열심히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후에 어느 미얀마 친구를 통해서 새로운 일 자리를 구했습니다.

그 새로운 회사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은 오전 8시30분부터 저녁 6시30분까지, 외국인 노동자들은 오전 8시30분부터 저녁 9시30분까지 일했습니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저녁 6시30분 후에 근무하면 (특히) 초과 근무 수당이 받았습니다. 이 회사에서 근무하기 힘들고 장시간 노동이지만 좋은 한국인 노동자들을 만났고 그 선배들에게서 한국말, 한국문화를 많이 배웠습니다. 한국인과 외국인 관계에 있는 문제는 언어와 문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회사에서 저의 행복이 시작되었고 한국어 공부도 시작했습니다.

저는 미얀마에 있을 때 한국어 공부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맨 처음에 배운 말이 "안녕하세요"가 아니고 "빨리 빨리" 였습니다. 맨 처음에 회사에서 그 말이 하루에 여러 번 들었고 어디 갈 때도 그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빨리 빨리 문화가 강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빨리 빨리 문화와 김치는 저한테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 회사에서 저희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한 만큼 임금과 권리를 제대로 받고 싶어서 사장님에게 부탁하는데 안되지만 같이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사장님에게 이야기하며 100%는 안되었지만 얼마 정도 성공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으로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를 해결 운동 할 때 한국 국민과 한국 노동자들의 이해와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얀마 민주화 문제, 외국인 노동자 인권문제에 오랫동안 관여 해왔습니다. 97/98년 IMF 문제 있을 때 외국인 노동자들도 많이 힘들고 1993년 9월 (외국인근로자고용등에관한법률)에 따라 지난해 11월17일부터 자진출국을 거부한 불법체류 10만명 넘는 외국인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간 것이 외국인 노동자들은 가장 힘듭니다.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쓰다버리는 소모품처럼 생각한다고 보았습니다. 불법체류자들을 단속하고 고국으로 보낼 것으로 외국인노동자 문제를 완벽한 해결한 방식으로 생각했으며 이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9년 내내 회사에 열심히 근무를 해왔습니다만, 상여금, 퇴직금, (특히) 초과 근무 수당과 2달치 월급을 받지 못하였습니다만 다른 6-8개월 임금을 받았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산재를 당한 외국인 노동자들, 치료와 보상을 받지 못한 외국인 노동자친구들은 한국에 많이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온 이유가 대부분 고국에서 보다 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내국인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생각합니다만 그 외국인 노동자들의 마음속에는 또 하나 훤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사랑과 이해 입니다. 지금 한국 국민들이 마음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열려있지만 좀 더 크게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2. 국가의 인사말

가깝고도 먼 나라 버마, 버마라는 나라 이름이 여러분에게 생소해도 아웅산 수지에 대해서는 모두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버마에는 많은 자랑거리가 있지만 저는 버마의 가장 큰 재산과 자랑은 아웅산 수지로 대표 할 수 있는 민주화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버마는 매우 가까운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씨가 대통령을 할 때 박스컵의 우승은 아시아의 축구 강국 버마와 한국의 몫이었습니다. 또한 전두환씨가 대통령을 할 때 아웅산 장군 묘소에서 있었던 폭파 사건으로 한국민들에게 강하게 인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아웅산 수지 여사는 민주화운동의 오랜 친구입니다. 버마는 한국과 비슷한 현대사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세(영국, 일본)에 의한 침략과 점령, 독립, 군사독재, 민주화운동 등 매우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인들에게 버마는 너무 먼 나라입니다. 세계 최빈국, 불법체류자를 많이 보내는 나라로 인식되어 있지는 않은지…

군사독재가 시작되기 이전인 1948년부터 1962년까지 버마는 아시아에서 교육, 보건, 삶의 질에서 앞서가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1962년 군사독재가 들어선 이후 버마는 세계 최빈국이라는 멍에를 쓰게 되었습니다. 버마는 공식적으로 사회주의체제를 지향하고 있지만. 버마의 사회주의는 군사독재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특히 사회주의체제 이후 교육과 보건에 대한 많은 부분이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군사독재의 관심은 국민을,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보다는 철저히 군사독재만을 위한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 있어야 할 아이들은 군사독재에 의해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으며, 무료로 운영된다는 병원의 환자들은 낙후한 의료체제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기대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부탁 드립니다. 버마는 먼 이국의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버마의 지식인들에게 한국은 아시아 민주화의 선배 나라이며, 친구의 나라입니다. 지금 버마에게 절실한 것은 국제적 관심과 연대 그리고 인도주의적 지원입니다.

3. 마웅저(Maung Zaw)의 인사말

한국의 광주 5·18민중항쟁 같은 버마의 8888항쟁(88년8월8일에 일어난 미얀마민중항쟁)때 저는 학생운동 활동가였습니다.

89년엔 선배, 90년엔 친구 두 명, 이후 매년 한 두 명씩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믿을만한 친구는 모두 체포되었고, 92년 이후는 저는 어떠한 활동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얀마를 떠나서 자유롭게 활동 할 수 있게,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의 준비 끝에 한국에 갈 수 있는 비자를 얻었습니다. (당시 체포되었던 선배와 친구들을 태국, 미국, 미얀마(버마)에서 아직도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94년에 한국에 오게된 저는 다른 이주노동자들과 같은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불법체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민지위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의 있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와 미얀마의 민주화 문제를 위해 활동하면서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을 방문했고, 미얀마의 민주화 문제 관심을 두고 활동하는 한국인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점차 제 생각은 조금씩 변화되었습니다. 처음 이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군사독재에 대한 미움과 증오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 그들을 몰아 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오래 기간 한국의 친구들을 통해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국의 민주화라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많은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관심이 있고 잘 할 수 있는 일이 정치활동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아이들의 교육과 건강 그리고 인권과 평화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돈버는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온 이유가 돈을 벌어 본국에 송금해 제 개인과 가족의 안위를 지키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랜 고민과 망설임 끝에 저는 제가 처음 한국이란 나라를 고민했던 시기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지금은 제가 미얀마로 돌아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준비중입니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시민단체를 방문하고, 미얀마의 상황을 한국의 시민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태국·버마 국경지역에 아이들을 지원하는 모임이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글로 저를 다 설명 드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관심과 애정으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신영복 교수님의 글에서 이런 문구를 봤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갑니다’라는 글을 말입니다.

4. 한국과 외국인 노동자(이주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들은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 땅에 들어와 일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80년대 말 정도입니다. 그 수가 점차 늘어나고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침해가 극에 달해 표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994년경입니다.

1994년에 산재를 당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치료와 보상을 요구하며 농성 하였고, 이 농성을 시작으로 한국사회는 외국인 노동자의 존재에 대하여 미미하나마 시선을 두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 95년 1월 현대판 노예제도라고 일컬어지는 연수제도를 개선하여 연수생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라는 네팔인 연수생들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연수제도: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라는 이름(명목)으로 네팔, 버마를 비롯한 여러나라에서 노동자를 데려오는 제도입니다.) 하지만 외국인 기술연수생들은 기술을 배우기는 커녕 적은 임금으로 매일 어렵고 힘든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 "때리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월급주세요" "여권주세요"

이 말들은 95년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농성을 할 때 울며 외쳤던 말입니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지역의 뜻을 모아 대략 1992년부터 상담소(외국인 노동자 상담소)들이 속속 개설되었습니다.

그러나 상담소(외국인 노동자 상담소)들이 문을 열고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권리보호에 나서고 있는 지금도 이주노동자가 처한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단지 외국인 노동자라는 이유로 임금체불, 감금은 물론 폭행과 성희롱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외국인노동자 관련단체들이 현재는 전국적으로 대략 250여개 단체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지원단체의 활동 영역은 첫째, 각 종교 고유의 종교활동 둘째, 생활 문화 복지 지원활동 셋째, 인권향상 및 법적 제도적 개선을 통한 외국인 노동자 지위 개선을 위한 활동 넷째, 외국인 노동자 공동체 형성 및 노동조합 조직 지원 활동 등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세계에는 약 2억 명의 이주민이 고향을 떠나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1억6천만 명 이상은 세계 각국의 3D(dangerous, dirty, difficult) 업종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들입니다. 한국 땅에서도 약 40만 명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은 3D 업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12월18일은 UN이 정한 '세계 이주민의 날'입니다. 1990년 유엔총회가 제69차 본회의에서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를 위한 국제협약(이하 이주노동자 권리협약)'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날을 기념하여 2000년부터 제정된 날 입니다. '이주노동자 국제협약'은 채택된 지 13년이 지난 올해, 기본 비준국 수인 20개국을 넘어 국제사회에서 정식으로 발효되었습니다. 이 협약은 이주노동자들과 그의 가족들을 위한 생존권 보장, 가혹행위 금지, 강제노동 금지, 생각과 표현의 자유, 법에 의해 평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 사생활의 권리, 노동조건, 사회 보장, 의료서비스에 있어 고용국의 국민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 등을 포괄적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즉, 법적 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이 기본적 인권을 동등하게 누려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 있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의 인권은 심하게 침해받고 있습니다.

2002년 1월 21일 중앙일보에 외국인 의문사 수사 '어물쩍'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바로 미얀마인 묘테테인(29)의 죽음에 대한 보도였는데 이처럼 전국의 외국인 노동자 집 등에 접수된 사인 규명 요구 사건만도 2000년 6월부터 2002년1월까지 70여건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코리안 드림을 이루어 좋은 추억을 갖고 귀국할 수 있으며, 외국인 노동자들과 한국 사회의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인지는 자명하지 않습니까?

현재 기술연수생 제도를 철폐하고, 노동허가제를 실시하는데, 한국 정부가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대한 해결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고용허가제는 고용되어 있는 직장을 외국인 노동자 자유 의지에 따라 옮기지 못하는 등 문제가 있어 완벽한 제도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위 협약에 비준은 커녕 아직도 현대판 노예제라고 일컫는 산업기술연수생제도와 편법적으로 운영되는 현지법인 연수생제도를 버젓이 운영하고 근로자 신분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용허가제는 2004년 8월부터 실시 예정입니다. 1993년9월 (외국인 근로자고용등에관한법률)에 따라 4년 이상 10만 명이 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었고, 법무부는 지난해 11월17일부터 자진출국을 거부한 불법체류 10만명 넘는 외국인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간다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10만 명이 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숨어살고 있거나, 강제출국 정책을 반대하며 농성장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강제추방을 당하기보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보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입니다.

지난해 11월11일에 성남에서 스리랑카 노동자 치란 다라까 자살부터 김포, 인천, 수원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의 자살과 죽음이 2003년 12월까지 8명에 이르렀습니다.

1000여명이 외국인 노동자들이 몇 개월 내내 농성하고 있습니다.

강제추방 중단하라!,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하라!, 연수제도 철폐하라!,
노동 3권 보장하라!, 사업장 이동의 자유 보장하라!,노동비자 발급하라!,
연행동지 석방하라! 등 농성투쟁단 결의문에는 이들의 절규가 담겨 있습니다.

집회, 단식농성등 여러 활동을 외국인 노동자들이 열심히 하지만 지금까지 정부의 정책은 옳게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농성, 집회 등 할 때마다 외국인 노동자의 지원단체들과 한국 국민,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고 같이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 문제는 남에 인권 문제 아니며 모든 사람들의 인권문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이 계속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가는 정부의 정책은 올바르게 하고 한국 땅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 땅에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드림을 이루어 좋은 추억을 갖고 귀국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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