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닮았다

분류없음 2016/07/06 12:20

 

올해 프라이드 행사도 끝났다. 일요일 퍼레이드를 마지막으로. 올해에도 밤근무 준비를 하느라 참석하지 못했고 짝꿍은 노동자행동센터 (WAC) 와 함께 참여. 이곳저곳에 최저임금인상 피켓을 든 짝의 얼굴이 실려 대만족 + 뿌듯. 대단한 나의 짝꿍. 

 

총리 저스틴 트루도가 캐나다 역사상 처음으로 프라이드퍼레이드에 참여. 분홍빛 플란넬 셔츠와 하얀 바지를 입고 행진하던 저스틴 트루도는 물총을 얼마나 맞았는지 나중엔 홀딱 다 젖은 모양. 소셜미디어 피드에 계속 나오는 그 양반의 사진을 보자니 참 섹시하다는 생각이 들긴 든다. 그냥 그렇다고. 

 

블랙라이브스매터 (BlackLivesMatter) 그룹과 연대세력은 행진 도중 연좌시위 감행. 결국 주최측으로부터 내년엔 경찰이 참여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답을 받았다. 아싸!

 

이 나라 프라이드퍼레이드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행진에 참여한다. 교회도 종파별로 다양하게 참여하고 교직원노조, 소방공무원들, 군인, 심지어 경찰도 제복을 변형한 야시시한 옷을 입고 함께 걷는다. 세 차례 연속 참여했을 때에는 가장 맨 뒤에서 "옷을 입는 문화에 반대하는 그룹"이 정말로 실오라기 하나 거치지 않고 주렁주렁 뱃살과 고환과 페니스를 늘어뜨린 채 걷는 것을 본 적도 있다. 대개 그들은 중년 이상의 남성들이다. 올해에도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나왔다한들 외관에서 풍기는 이미지 때문인지 별로 큰 관심을 받지는 못하는 편. 

 

어쨌든 블랙라이브스매터 그룹과 연대세력이 큰 반향을 일으키긴 한 모양이다. 벌써 소셜미디어엔 난리가 났다. 로컬 신문, 방송들도 벌써부터 본질을 왜곡하며 마타도어를 양산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경찰의 프라이드 참여를 막으면 나중엔 소방관도, 군인도, 선생도 다 참여하지 못하게 막을 수도 있다면서 경찰을 옹호하고 나서는 무리들도 있다. 경찰 개개인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게 아니라 경찰시스템, 흑인 등 비백인에게 폭력을 일삼고, 정신질환그룹/ 소수자들에게 이중잣대를 적용하는 공권력의 부당성을 제기하는 것인데 - 그것을 뻔히 알만한 사람들이 경찰도 우리의 "커뮤니티" 라면서 뻔뻔하게 옹호한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흑인들 생명만 중요하냐! 빼애엑, 하면서 "올라이스브매터 (AllLivesMatter)" 라는 본질을 감추는 짝뚱카피도 퍼뜨린다. 당연히 대부분 백인이다. 황인도, 흑인도 간혹 있다.

 

강남역살인사건 뒤로 여성 스스로 존재를 확인하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이른바 "한남" 들이 남과 여로 편가르지 말고 우리 모두 사이좋게 지내자며 리프레임하려던 찌질한 일들이 기억났다. 일각에선 "한국 남자들의 종특" 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한데 무엇보다 기득권 (privilage) 을 지닌 사람들이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다만 그거라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쓸 때 나타나는 동서고금남여노소만국공통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발로 꾹꾹 눌러 후려치면 영영 감출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여성들이 한 목소리를 내자 깜짝 놀란 한남이들. 흑인들 생명만 중요하냐 빼애엑 하며 올라이브스매터/ 우리가 경찰을 지키자는 하얀이들. 이들은 너무너무 서로서로 닮았다.   

 

 

 

2016/07/06 12:20 2016/07/06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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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의잡기

분류없음 2016/06/30 09:53

 

베드버그 

 

일터 한 곳에 베드버그 (Bedbugs, 빈대) 아웃브레이크가 일어나 하루에도 대여섯 번 관련 이메일을 받는다. 많아야 일주일에 두어 번 가는 곳이라 크게 신경쓰고 있진 않지만 어쩐지 이 정도로 회사에서 같은 주제로 이메일을 받으면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처음에 이 나라에 와서, 아니 이 도시로 옮긴 뒤 베드버그베드버그 하는 뉴스를 듣고 막연히 나쁜 벌레 (Bad bug) 이야긴줄 알았다. 한국에서는 옛날옛적 한국전쟁 뒤의 시대면 모를까 아니면 70년대 이야기라면 모를까 "빈대" 가 사람사는 아파트나 호스텔 같은 데에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금시초문. 아,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 는 속담은 들어봤다. 이 나라에서 얻은 첫 직장 (그리고 여전히 일하고 있는 참 좋은 곳) 에서 베드버그 인스펙션을 한다고 하길래 그게 무슨 벌레야? 어떻게 생겼어? 했더니 한 번도 못봤냐면서 모두들 의아해했다. 응, 본 적이 없어. 나쁜 벌레지? 했더니만 다들 뜨악 --- 너네 나라엔 베드버그가 없어? 응, 한 번도 못 봤어. 했더니 못믿겠다는 눈치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오신 한 분의 이민자 동료께서는 너희처럼 못사는 나라에 베드버그가 없다니 믿을 수 없어, 라는 듯 피식 웃었다. 이 곳은 거의 정신병원 수준의 인스펙션을 강조하는 데라 한 번 베드버그 리포트가 나오면 당장 모든 것을 갖다버린다. 매니저의 지침이 그렇다. 그리고 베드버그 냄새를 맡아 디텍팅하는 래브라도강아지와 전문가가 나타난다. 케미컬 트리트먼트 등등 프로시져에 맞춰 일을 진행한다. 그래서인지 아웃브레이크 수준으로 일이 번진 적은 없다. 다른 한 곳의 일터는 약간 지침이 다르다. 그곳은 아무래도 사람들이 일 년 이상 살고있는 "집" 인지라 모든 것을 갖다버릴 순 없다. 하지만 역시 래브라도강아지와 전문가 출동, 케미컬 트리트먼트 등 다음 절차는 비슷하다. 

 

언젠가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누군가 베드버그를 리포트했다. 이웃들이 덜덜 떨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사랑스런 아파트매니저 왈, 북미대륙 베드버그는 동아시안은 안 물어. 너네 피가 맛이 없나봐. 으하하하하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베드버그도 인종차별하냐. 다행히 우리 둘은 아직까지 물린 적이 없다. 우리 유닛엔 없다는 말씀. (아니면 진짜 우리 피가 맛이 없나) 그런데 네이버에 찾아보면 물린 사람들 이야기가 아주 많다. 그러니 베드버그가 동아시안은 안 문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사람사는 곳이니 벌레도 당연히 있기 마련이고 지하철, 버스 같은 데에도 있을 것이다.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기는 하는데 여간 찜찜한 게 아니다. 내일 일하러 갈 때 조심조심해야겠다. 

 

 

엄마 

 

이디오피아에서 이민오신 한 분의 동료. (이 분은 이디오피아에서 사실 적에 상류층이었는데 이민온 뒤 상황이 급전직하했다) 이 양반은 한국을 아주 잘 알고 계시다. 관심도 많다. 왜 그런가 했더니 친척 중에 한 분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한국이 자신들의 도움으로 기적처럼 일어나 부흥을 일궜다고 믿고 계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공교롭게도 지난 6월 25일 함께 일하게 됐다. 자연스레 한국 이야기가 나왔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그 분이 물으셨다. "너네 나라엔 김씨들이 참 많잖아. 듣기엔 백만 명도 넘는다는데 그럼 다 어떻게 구별해? Mr. Kim 혹은 Ms. Kim 이런 식으론 절대 구별하지 못할 것 같은데?" 생각해보지 않았던, 들어본 적조차 없는 질문이다. 생각해보니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진짜 많긴 많다.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김씨가 얻어맞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어이 김씨, 이렇게 부르면 모든 김씨들이 다 대답하느라 헷갈릴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국에선-직장에선 다들 포지션으로 사람을 부르는 것 같다. 사장님, 부장님, 대리, 계장 등등 그리고 맥락이 있기 때문에 큰 무리가 없지 않나 싶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처음엔 대부분 성을 따서 사람을 부르고 한두 번 교류가 생기면 이름을 부른다. 패밀리네임 (성) 이 겹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민자들도 거의 마찬가지다. 아마도 이렇게 소수의 (김, 이, 박 등) 성씨가 지배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는 아무래도 한국 (북한 포함) 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Singh, Gupta, Khan 등의 패밀리네임이 흔한 인도/ 파키스탄 출신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김씨 만큼은 아니다. ㅠㅠ 지못미 김씨. 

 

 

그런데, 이디오피안 그 동료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부족/씨족 문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기네 나라에서는 삼촌도 아버지, 동네 아저씨도 삼촌/ 아버지, 사돈의 팔촌 아저씨도 아버지/ 삼촌으로 부르고 이모든 고모든 크게 구별하지 않는다고. 다만 엄마는 확실히 한 명이고 엄마만큼 소중한 존재가 있으면 그 사람도 엄마로 부르기는 하나 원래 엄마를 지칭하는 말은 엄밀히 따로 있다고. 얼마나 그들과 가깝고 친한지 여부에 따라 가족 개념이 확장된다. 딱히 일촌/삼촌/사촌 관계의 혈연을 명확하게 따지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민절차를 밟을 때 이런 전통이 종종 문제로 된다고. 이민 어플리케이션에 써넣은 아버지 이름이 그 때 당시엔 아버지만큼이나 가까웠으므로 써넣었는데 나중에 이민국 심사에서 친부가 아닌 탓에 거짓정보를 써넣은 것으로 발각 (?) 되는 일이 왕왕 있다고 한다. 이 사람이 나의 아버지요, 하고 우겨도 소용없다고. 서유럽의 전통을 계승한 캐나다 이민국 방침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고 따라서 "거짓말을 했다" 고 기각/ 반려당하는 것 같다. 아마도 출생신고서 같은 행정절차가 서구사회와 다르고 딱히 또 그것을 분명히 할 이유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낳은 엄마 한 명은 엄밀히 존재하고 확실히 따로 구별하다는 데에서 깊은 감탄과 존경의 마음이 우러나왔다. 그렇지. 암만. 

 

아! 생각해보니 이 나라에서도 무언가 굉장히 은밀하고 당사자만 알 수 있는 확실한 것을 따질 때, 가령 사회보장번호를 발행할 때 반드시 엄마의 메이든네임 (maiden name), 그러니까 결혼하기 전 이름을 기록하는 게 있기는 있다. 사람의 혈연 (리니지) 을 부계로 구별하는 것의 한계를 초절정가부장체제도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암만. 

 

2016/06/30 09:53 2016/06/30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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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진고양이

분류없음 2016/06/29 14:20

 

퇴근길에 잠깐 들여다본 뉴스피드에서 발견한 것 - "살찐고양이"법 by 심상정 의원.

 

취지는 잘 알겠는데 

일단 나는 이해하기 힘들다.

우선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했는데 최저임금은 "시간제" 를 기본으로 상정하여 계산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1) 시간제 임금 (사실 시간제 "임금"이라는 말도 어패가 상당히 많다. "노임; 임금"은 엄밀히 따진다면 시간단위로 나누어 계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은 자본이 고안한 노동력지불방식에서 열정페이만큼이나 고약한 아주 치졸한 방식이다. 공부를 많이 하신 심의원이 이것을 모를 리 없지만 어쨌든 법안을 발의하셨다. 2) 시간제 임금제도가 마치 노말한 것인양 굳어질 경향이 더욱 농후해졌다. 

 

노동조합이 앞에 나서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협상하고 그것을 결정하여 반영, 월급으로 수령하거나 아니면 일대일 계약 (연봉협상) 을 통해 결정하는 임금 (샐러리; salary) 까지도 시간노동으로 쪼개는, 쪼갤 수 있다고 믿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실재로 그러한 일들이 벌써 일어나고 있다. 

 

 

국회에서 일하시는 분이니까, 영향력 있는 당에서 활동하시는 분이니까 이런 구질구질한 것보다는 세금을 더 합리적이고 평등한 방향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걷어내고 사회안전망 등 복지 영역에 더 많이 쓸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꽃개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는 의사든, 노동자든, 임직원이든 2015년 기준 연 $200,000 을 벌면 연방제-주정부세 합쳐 47.97% 의 세율을 적용받는다. 즉, $95,940 의 소득세를 낸다. 물론 기부나 여타 다른 행위를 통해 크레딧을 적용받을 수 있지만 세율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와 별도로 부동산소득이나 은행이자 등의 소득이 있으면 23.98% 의 세율을 따로 적용받는다. 환율을 일대일로 적용해서 연간 2억 원을 버는 한국인은 어떨까. 38% 의 세율에 무조건 천구백사십만 원의 크레딧을 받는다. 즉, 200000000 * 38% - 19400000 = 56,600,000 원을 종합소득세로 낸다. 같은 방식으로 계산해서 연간 $150,000 을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벌었다면 $69,615 의 세금을 내고 일억오천만원(150000000원) 을 한국에서 벌면 37,600,000 원을 종합소득세로 낸다. 둘을 절대적으로 비교할 순 없지만 따라서 뭐가 더 낫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누진세적용비율을 표로 만들어 그래프를 그리면 캐나다의 경우 완만상승하다가 치솟는 양상이라면 한국의 경우 균일하게 상승하다가 연간 수입 일억 원 근방에서 상승경사가 현격하게 완만해지며 수평으로 가는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링크한 한국-캐나다의 텍스 브라켓과 비율을 같이 보고난 뒤 그래도 한국에선 연간 소득 12,000,000 원이면 6% 의 세금만 내지만 캐나다에선 20.5% 의 세금을 내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혼자 사는 싱글의 경우 연소득 $11,525 까지, 가족의 경우 $15,925 까지 세금 환급을 받을 수 있다. 그냥 쉽게 말해 연소득 $12,000 이면 세금을 내긴 내되 역으로 소득 보조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세금을 내지 않는 건 아니다.

 

공기업 임직원이든, 대기업오너든, 누구든 월급-시간제임금-샐러리 뭐가 됐든지간에 돈을 많이 벌만하면 벌도록 장려하는 게 낫다. 그대신 너그들이 돈을 그만큼 많이 벌어들이는 건 너그 개인들이 잘나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사회적공공자산이 뒷받침되었으니 그런 것이다. 자, 이제 벌어들인만큼 내거라, 는 취지로 소득세를 더 걷어들여 올바르고 균형있게 쓰는 게 맞지 않나 그런 생각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중산층 이상에, 특히 고소득층에 적용하는 세율이 너무나 형편없이 낮고 담배따위에 적용하는 간접세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다. 

 

 

심의원이 그리고 정의당이 정말로 저 법안을 밀어붙일 요량으로 발의한 것인지 아니면 최저임금이 너무 낮아서 올려야 한다는 취지의 캠페인을 할 요량으로 발의한 것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전자든 후자든 후지긴 매한가지다. 첫째로 저 법안이 만들어지면 추후 소득누진세율을 올리고 구간을 촘촘하게 짜내는 세금구조재편에 대한 저항을 막아낼 명분이 희박해지고 둘째, 캠페인을 통해 국민적 공감을 올린다한들 앞에서 언급한 "시간제임금의 늪"에서 벗어날 명분 또한 사라지기 때문이다. 

 

 

* 날적이를 너무 거칠게 썼다. 추후 추적한 뒤에 더 정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 6/29/2016 

2016/06/29 14:20 2016/06/29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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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있다

분류없음 2016/06/27 23:12

 

 

정신질환자-형사범죄자-집없는사람-생활보조금지원자-저학력 등등 전부는 아니지만 클라이언트들이 대부분 이런 어려움을 겪는다. 클라이언트-서비스유저들이 놓인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일해야 한다고 나는 "배웠다", 학교에서 그리고 일터에서. 그러나 간혹 만나는 동료들은, 특히 그 가운데 이민자들은 이런 배움을 실천하는 데에 인색하다. "니디 (needy)" 하거나 "디멘딩 (demanding)" 하다고 "귀찮게 한다고 (bugging on)" 표현한다. 그런데 그들, 서비스유저들이 놓인 상황에선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같은 사람들이 일하는 이유, 일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물론 모든 요구를 다 들어줄 순 없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줄 순 있다. 들어줘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폭증시켜야 한다 (microphoning; amplifying). 서비스유저들의 요구를 더 받아안도록 사회에 널리 알려야 이 분야의 서비스 질이 더 좋아지고 펀딩도 더 받을 수 있고 결국엔 그 문제적 동료들이 목놓아 부르짖는대로  "더 많은 임금/혜택" 을 받을 수 있다. 

 

의자에 앉아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움직이지 않으려하고 클라이언트들 개인에 대해 이런 저질스러운 "비평" 만 늘어놓으며 이런저런 공자님 껌씹는 말만 번지르르한 몇몇 동료들을 보면 울화가 치민다. 마치 내가 당하는 것 같아서 그렇다. 그렇다고 그들의 문제적 행위를 대놓고 나무랄 순 없다. 나는 그들의 보스도 아니고 그들 또한 그들만이 갖고있는 "맥락"이 있다. 있을 것이다. 매일매일 같이 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할 판국이다. 마야 안젤루의 말 (People will forget what you said, People will forget what you did, But people will never forget how you made them feel) 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더욱 원통한 것은 이렇게 못배워먹은 티를 내는 -하지만 그들은 또 대부분 학사 학위 이상을 소지하고 있다- 사람들이 대부분 이민자라는 데에 있다. 그들은 그들이 겪어낸 차별과 답답함을 자기보다 더 낮은 계층에 있는 "약자" 들에게 쏟아붓는다. 차라리 백인은, 특히 고학력-중산층 백인남성은 겉으로 대놓고 이런 짓을 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그들은 적어도 그들이 비백인보다 우월 (superiority) 하다고 여기며 이것을 치밀하게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놓고 타인을 차별하거나 타인을 깔아뭉갤 이유가 없다. 하지만 보다 내밀한 관계로 들어가면 금새 본질 (substance) 이 드러난다. 비백인인 우리들이 그들을 능가한다고 느낄 때, 바로 그 때에 그들의 본질이 드러난다. 물론 모든 백인들이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이 일에 얼마나 더 적응해야 이런 거지같은 일에 초연해질 수 있을까. 살이 빠지는 데엔, 아니 살이 붙지 않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스트레스. 쓸데없는 잔신경. 내가 어찌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2016/06/27 23:12 2016/06/27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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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외

분류없음 2016/06/27 03:53

 

건강검진 

 

아침 아홉시 반 약속 시간에 맞춰 짝꿍과 클리닉 도착. 아마도 오늘의 첫손님이지 싶다. 패밀리닥터를 만나기 전 어시스턴트와 함께 혈압, 몸무게, 키 따위의 기본적인 것과 흡연 여부 및 금연 동기와 스케일 등 대화를 나눴다. 몸무게가 48kg 이니 많이 줄었다. 키는 조금 컸다. 아싸 여전히 자라고 있어! 아임스틸그로잉업! 환호를 했더니 깔깔깔 웃는다. 몸무게가 적당하지 않으니 의사와 얘기를 나누라고 했다. 의사를 만나도 딱히 특별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프로틴/단백질을 섭취하라는 얘기. 고기를 먹으라는 얘기. 고기는 냄새 때문에 힘들다고 했더니 단백질보조제를 먹으란다. 내 나이에 단백질이 부족하면 위험하다면서. 의사들은 원래 다 이렇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저렇게 신기할 정도로 진지하게 말한다. 응 알았어. 시도해볼께. 사실은 가끔 단백질 파우더를 먹고 있기는 하다. 지난 육개월 생리주기를 기록한 노트를 가져가보여줬다. 똥은 잘 싸고 있지. 홀딱 벗고 몹시 거친 가운을 입고 누웠더니 몸을 전체적으로 관찰하고 만진다. 괜찮단다. 자궁경부암 검사 (pap smear) 생검을 하긴 했는데 나중에 짝꿍에게 인터코스 성관계 (intercourse sex) 를 하지 않으면 반드시 할 필요없다는 얘길 했다고. 왜 나한텐 그 말을 안한겨. 만지고 들여다보신 김에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건강하단다. 감사. 피검사/ 소변검사를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는데 주에서 발행한 건강보험증 (OHIP health card) 을 달란다. 짝꿍과 나는 아직 그게 없다. 대신 짝꿍의 학교에서 지원하는 보험을 쓴다. 돈을 내란다. 돈을 냈다. 지불하면서 패밀리닥터에서 받은 패키지를 건네 주었다. 기다리는데 이름을 부른다. 갔더니 내 피를 뽑을 어시스턴트가 패키지를 달란다. 이미 네 동료에게 줬어. 잠깐 리셉션에 다녀오더니 없단다. 순간 성질이 나는 걸 꾹 참고 네가 괜찮으면 리셉션에 가서 직접 물어보고 싶어. 괜찮겠지? 했더니 마뜩찮은 표정으로 응, 그래. 뚜벅뚜벅 리셉션으로 걸어가는 나를 졸졸졸 따라온다. 내 패키지 어디 있지? 하고 물었더니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너네들은 돈 받는 것만 열심이고 사람을 케어하는 데엔 관심이 없구나 (You people are only interested in taking money not taking care of customers) 매우 드라이하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다섯 명이 모두 뜨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동안 피를 뽑기로 한 그 직원이 찾았다고 말한다. 사실은 정말 찾았는지, 남의 패키지를 들고 찾았다고 하는 건지 그것도 잘 모르겠지만 고맙다고 말한 뒤 다시 피를 뽑는 곳으로 돌아가 앉았다. 바바라라는 이름의 그 직원은 계속 눈치를 살핀다. 미안해. 네 잘못이 아니니 괜찮아라고 했더니 그래도 우리는 팀으로 일하는 거니까 미안해. 알았어. 아침부터 열을 내고 나니 기운이 쪽 빠진다. 나만 손해다. 화내지 말아야지. 결과는 6주 후에나 알 수 있다. 젠장. 참으로 빠르구나. 

 

 

브렉시트 

 

영국이 결국 유럽연합에서 나가시겠다고. 국민투표 결과가 나왔다. 결과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말이 많은 가운데 신기한 것은 탈퇴에 동의한 좌파가 많았다는 거. 뭐 이유는 좌파들이 늘 그러하듯이 쌀로 밥짓는 소리 - 유럽연합은 신자유주의의 한 축일 뿐이고 신자유주의 아래 핍박받는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유럽연합 그것은 전혀 복무하지 못한다... 따위의 이야기. 예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깔대기. 맞는 말이긴 한데 뭐랄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마치 몇년 전 17대 대통령 선거 운동 당시 금민 후보의 벽보를 보면서 어머니께서 하셨던  "참 좋은 소린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던 말씀에 빙의한 느낌적 느낌. 당장 파운드화는 급락했다. 국민투표 결과의 소소한 영향 가운데 하나인 이 사실을 탈퇴에 적극 동의한 노령층-노동자계급들은 예상하셨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그들의 연금은 대부분 주식에 들어가 있다 (어느 나라나 그러하듯이). 연금운용탄력성 또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아랍-러시아 부호들은 이 기회에 런던에 부동산이나 사야겠다, 얼씨구나 덤벼들겠구나. 당장 영국본토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 영국을 떠나 유럽에서 일할 이주노동자들에겐 위기감이 들 것 같다. 나라도 그럴 것 같다. 유럽연합이 신자유주의의 한 축인 것은 명백한 진실이다. 그것을 부정할 이는 없다. 아마 없을 것이다. 다만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가, 그래서 유럽연합이 그들 스스로 판 무덤이라면 그래서 폐절해야만 할 어떤 것이라면 그래도 우리는 거기에서 그 무덤에서 시작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그 무덤조차 우리에겐 자산이다. 나는 생산수단도, 돈도, 부동산도,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평범한 노동자다. 하지만 나의 현실, 박봉과 삶의 우울함에서 벗어나려해도 그 현실에서, 박봉에서, 우울함에서 시작해야 한다. 하늘에서 뭔가 뚝 떨어지기를, 복권에 당첨되기를, 혹은 그 암흑같은 무덤을 없앨 취지로 핵폭탄을 떨어뜨릴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어차피 노동자계급의 팔자란 단 한 번 그 승리 이전까지는 자본주의가 싸대는 똥을 잘 치우고 문제적인 시스템을 잘 갈고 닦아서 나중에 전취했을 그 때에 우리의 도덕에 맞게 잘 쓸 준비를 하는 그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빈체제에 버금가는 반동, 신고립주의가 활개를 치는 이 마당에 넋놓고 있다가는 다음 손님이 분명한 "전쟁" 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건 분명한 수순이다. 짝꿍의 본인의 페이스북에 공유하신 한 장의 사진으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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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b-an

 

 

 

 

 

 

 

사람을 대하는 노동

 

마야 안젤루 (Maya Angelou) 의 한 말씀으로 시작. 

 

People will forget what you said
People will forget what you did
But people will never forget how you made them feel.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을 신나고 즐겁고 기분 좋게 만들 것까지는 없다. 그건 나의 일이 아니니까. 나는 엔터테이너가 아니니까. 하지만 상대로 하여금 "하찮은 취급"을 받았다는 그런 느낌을 줄 것까지는 없다. 우리는 로봇이나 식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끝. 

2016/06/27 03:53 2016/06/27 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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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씨의교훈

분류없음 2016/06/18 03:09

 

 

아주 오래 옛날부터 있었던 한반도와 왜(倭)의 빈번한 교류, 조선시대에 있었던 전쟁, 그리고 일제의 한반도 병탄에 이르기까지 가장 가까운 타인, 일본에 대해 한국인 (꽃개를 포함해) 이 품는 감정은 상당히 복잡하다. 어릴 때만해도 가장 저주스러운 욕이 "빨갱이"와 "일본놈; 쪽바리" 같은 거였다. 한일 축구경기가 열리면 그날은 거의 닥치고 애국의 날로 된다. 일본에겐 밀리면 안되고 당연히 패배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 우겨도 독도는 우리땅" 이라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폭력적인 노래를 밥먹듯이 들었고 불렀다. 네 말은 아예 듣지 않겠다는 소리니 그 얼마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가. 왜구와 일제, 그리고 현대 일본의 재무장에 이르기까지 국가로서 일본이 이웃인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일들은 이루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하지만 그것이 "일본"이라는 집단을 싸잡아 저주하고 배격해야 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일본인을 만날 일이 별로 없었다. 왜색이 짙게 배인 문화를 소비하고 언어를 쓰고 일본문학을 읽고 접하는 게 일상이었어도 "일본사람"을 만날 일은 별반 없었다. 그러다가 이 나라에 와서 제법 적지 않은 수의 일본인을 만난다. 다양한 연령대의 일본인을 접하면서 일반적으로 서구 사람들이 일본인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 가령 절대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예의바르다 따위가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도 알게 됐다.  ("상대적으로" 한국인에 비해 "얌전하다" 정도는 인정할 수 있으므니다) 컬리지에서 만난 한 일본인 중년 여성과는 상당히 가까워져 따로 만나 차도 마시고 이런저런 정보도 나누곤 했는데 어느날 어느 만남 뒤로 그게 어렵게 됐다. 감자탕을 한국 전통 음식 (궁중 음식) 으로 알고 있던 그이에게 감자탕이 어떤 경로로 탄생했는지 아는대로 얘기해줬더니 경악했다.  막걸리가 먹고 싶다고 해서 한국마트에서 막걸리키트를 판다는 정보도 알려줬더니 아주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날, 왜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독도" 이야기가 나왔다. 선빵은 그 쪽에서 먼저 날렸다. 너네 한국인들은 왜 독도를 너네 꺼라고 얘기해? 너네 한국인들은 왜 국제분쟁해결 절차를 싫어해? 정말 너네 땅이면 국제적인 문제로 해결하면 되잖아? 유엔사무총장도 너네 사람이잖아, 그 사람을 잘 활용하면 되잖아? 

 

 

사실 나는 저런 주제의 이야기를 저런 방식으로 하고 싶지 않다. 일부의 일본인들은 친해지면 바운더리를 너무 빨리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침범한다. 애초 처음부터 대놓고 막말하는 일부 남아시안들, 동유럽사람들, 중국인들, 한국인들이 어쩌면 더 솔직할는지도 모르겠다.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데 당황했던 것 같고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던 것 같고 독도는 한국 영토인 게 맞다고 했고 (맙소사) 그리고 반기문따위의 사람이나 국제영토분쟁해결절차 같은 건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에게 너 무정부주의자야? 하고 대뜸 묻는 게 아닌가. 맘대로 생각해. 라고 답했고 대화하는 내내 나는 결단코 일본인들은 왜 그렇게 못생겼어 따위의 집단을 싸잡아 일컫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하고싶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다. 헤어지는 길에 나중에 또 만나, 라며 요식적인 인사는 했는데 더 이상 그이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스멀스멀 올라왔고 전차를 타고 집에 오면서 치밀어오르는 부아를 다스리느라 괴로웠던 기억이 난다.

 

 

지금 같은 때에 그이를 만났다면, 그리고 저런 대화를 했다면 아마도 나는 좀 더 근사하고 여유있게 반기문처럼 미꾸라지처럼 살살 잘 빠져나갈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단정적인 말은 하지 않을 것 같다. 좀 더 그이의 생각을 끌어내기 위해 애쓸 것 같고 그이의 생각을 더 경청하려 노력했을 것 같다. 이런 사람을 더 만나야하나 말아야하나 그런 결정은 그 뒤에 천천히 해도 상관없다. 이태 전 쯤에 일어난 일인데 아무래도 그때엔 혈기가 왕성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혈기가 너무나 왕성방자한 나머지 독도가 왜 한국땅인지, 한국땅이면 뭐가 좋은지, 나와 같은 흙수저 삶들에게 독도가 한국땅이어서 뭐가 이롭고 행복한건지 그런 생각을 좀 더 진지하게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에게 무정부주의자냐고 그이가 물었었지. 아마도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2016/06/18 03:09 2016/06/18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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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며칠의일

분류없음 2016/06/17 13:38

첫째. 

파트너가 친구의 부고를 듣다. 얼마간 파트너 눈치를 살피느라 얘기를 하지 못하다가 장례식에 가는 날, 이런저런 준비를 하며 농담을 하고 그리고 다녀온 그날 뒤로 얘기를 나눴다. 파트너는 많이 울었던 것 같았다. 

 

둘째. 

올란도 학살. 49명의 목숨을 단 한 사람이 빼앗다. 그리고 그 곳 학살의 현장은 "게이 클럽"이었다. 며칠 기운이 쪽 빠져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날들의 연속. 어제, 교회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 한사람 한사람, 희생자들의 이름과 사진이 나오는데 눈물을 쏙 참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눈물을 계속 흘렸다. 곁에 파트너가 없었다면 아마도 쓰러졌을 것 같았다. 

 

셋째. 

이틀 연속 열린 워크샵 (Harm Reduction) 에 다녀왔다. 사회자 가운데 한 명은 이 도시에서 잘 알려진 성노동자 운동가. "성노동 (Sex Work)" 하면 대번 "인신매매 (Human Trafficking)" 를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그게 자발적으로는 도대체가 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 "맨 정신"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아무래도 부지불식간에 인식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일부 사람들은 성노동에 "돈을 쉽게 벌려고" 라는 레테르를 아무 생각없이 쉽게 붙인다. 무슨 일이든 여성이 하는 일은 쉽게 보이는 모양이다. 바라보는 이들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다. 여성은 -그리고 여성의 노동은- 그만큼 대상화되어 있다. 

 

넷째. 

박유하 선생 생각을 계속 하고 있다. 아무래도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양반, 반도를 넘어 전지구적 발상을 하는 양반, 더리버벌리스트오브리버럴이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 안타깝기도 하고 연구자로서 홀로 자유로운 연구를 지속하는 와중에 저런 급진성을 띨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어메이징하다 할 수밖에. 그토록 급진적이고 맑스주의적이던 남성 연구자들은 대체 지금 뭘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독도공유론"은 아무리 생각해도 탁월한 것 같다. 탈근대적, 초인류적, 비국가적인 그리하여 따라서 가장 평화적인 훌륭한 발상이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해봤을까. 시간을 되돌려 생각해도 나에겐 그 지경에 닿을만한 그럴만한 계기가 없었다. 생각의 자유로움. 학자에게, 운동가에게, 그리고 "자유로운 개인"에게 필요한 덕목. 그 덕목을 나도 지니고 싶다.

 

다섯째. 

일터 한 곳은 가난한 흑인과 중국인들/베트남인들이 모여사는 동네에 있다. 퇴근길 버스를 기다릴 때마다 담배와 동전을 구걸하는 이들을 두어 명 반드시 만난다. 오늘도 역시... 퇴근길 버스 정거장으로 걸어가는데 한 사내가 졸졸졸 시가렛, 체인지 하며 따라온다. 미안해. 정류장 근처를 배회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가렛, 체인지... 그이가 벤치에 던져놓은 더플백이 살짝 열렸는데 그 틈으로 시크교도들이 지니고 다니는 칼 (Kirpan) 이 보인다. 아, 이런... 나는 커뮤니티가디언도 아니고 카우보이 보안관도 아닌데 괜한 걱정이 든다. 어쩌지... 그이의 동정을 살피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동시에 "나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그런 다짐을 한다. 사랑하는 파트너를 만나야 하고 그이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해야 한다. 나는 그래야 한다. 정거장에 도착한 버스를 타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돌아와 이 이야기를 하며 박장대소했다. 내가 웃는 게 - 그게 사실은 웃는 게 아니다. 

 

 

2016/06/17 13:38 2016/06/17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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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나는밤

분류없음 2016/06/10 07:32

 

 

침실에 누우면 벽에 걸린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 의 그림, "별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 1889)" 이 보인다. 파트너가 사온 이 그림을 액자에 넣어 예쁘게 잘 걸어놨어야 했는데 그건 그저 바람 뿐이고... 이 그림을 볼 때마다 그가 바라본 세상, 특히 고갱과 이별 뒤 죽기 전까지 시간을 보낸 생레미 요양원 창밖으로 보이던 그의 세상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리고 간혹 조현병 (Schizopgrenia) 진단을 받은 클라이언트들이 머리가 아프다고 하거나 환청이 들린다고 할 때마다 이 그림과 함께 고흐가 그려낸 다른 그림들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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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는 중학생 때 서양미술을 처음으로 배우면서 알게 된 화가. 그의 삶을 다룬 책도 읽고 특히 르누와르 (Pierre-Auguste Renoir, 1841-1919) 를 좋아하던 한 친구 녀석 때문에 함께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집을 읽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여러 작가들을 읽고 그림을 보면서도 가장 기억에 깊이 남은 빈센트. 우연인지 (혹은 필연인지) 한참 뒤에 나의 파트너도 빈센트를 좋아하는 걸 알고 참 반가웠다. 이 나라에 와서 파트너와 함께 사귄 친구 가운데 종종 만나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는 K 와 종종 들르는 카페에 가면 빈센트의 그 유명한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1889)" 가 걸려 있다. 그 자화상 바로 아래 테이블에 앉아 신세한탄을 하면 조금 덜 불행한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엊그제 출퇴근길에 빈센트 반 고흐의 정신질환을 다룬 에세이 하나를 읽었다. 요즘 말로 뇌전증 (간질) 진단을 받은 빈센트. 원인이 밝혀지진 않았지만 여러 근거를 유추할 수 있다. 당시 유럽 아티스트 사이에서 엄청나게 유행했던 독주 엡센트 (absinthe) 중독, 유전적 원인 (나중에 여동생이 조현병 진단을 받는다), 스트레스 등등. 뭐라 딱 부러지게 원인이 무엇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없다. 다만 그의 어린 시절, 성장과 생활, 대여섯 번의 요양원 입원 기록, 가족력 등을 종합해서 추론하는 것 뿐이다. 뇌전증은 현대 정신의학에서도 공히 동의하는 진단인 것 같고 여타 다른 의견으로 양극성 정동장애 (Bipolar Disorder), 우울증 (Depression), 인격장애 (PO), 조현증 (Schizophrenia) 등이 있다.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남긴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지독한 환청과 환각 (auditory hallucination, delusion) 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다. 

 

빈센트의 그림과 그림을 통해 들여다보는 그의 정신질환, 마음의 병을 다룬 텍스트가 있는지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 만약 있다면 인상주의 미슬과 당시 유럽의 역사/종교를 일반인 이상으로 이해하고 게다가 정신병/정신질환/약물의 역사에 대한 것도 전문가에 준하는 수준으로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할텐데 -- 그리고 지식 수준을 넘어 글을 아주 쉽게 잘 쓰는 사람이어야 할텐데 그런 사람이 있기는 있을까 싶다.  

 

종종 빈센트 생각에 들어보는 노래 

 

가사와 번역은 어떤 분이 훌륭하게 해내신 것을 보자. 

 

 

올 가을에 꽃개가 머무는 도시의 아트갤러리에 빈센트와 당대 화가들 작품이 온다. 고갱의 그림이 같이 걸려 있는 걸 보면 살짝 비위가 상할 것 같기도 한데 그건 과다한 감정이입 탓이지 고갱의 열정적인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 그런 이유는 전혀 아니다. 그 때까지 건강하게 잘 살아있자꾸나. 

 

 

 

2016/06/10 07:32 2016/06/10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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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의슬픔

분류없음 2016/06/08 05:23

 

동안 (童顔) 의 슬픔 외 

 

 

클라이언트 한 명이 기분이 별로 안 좋다며 얘기를 하자길래 그러마, 하고 대화 시작. 자신의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이야기. 그래 너의 상황이 어떠한대. 들려줄 수 있겠니. 얘기를 하던 도중에  "내가 너 나이때에는 괜찮았어. 젊었을 땐 괜찮았는데 이젠 잘 모르겠어" 라고 한다. 클라이언트 파일을 열어보면 나이를 알아내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대화 도중에 그럴 순 없고 살짝 물어봤다. 꽤 어려보였기 때문이다.

 

- 미안하지만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 

= 응, 스물여섯이야. 

- 어렸을 때라면 십대 후반이나 이십대 초반 얘기하는거야? 좋았던 때가 어땠는지 얘기해 줄 수 있어? 

(한창 대화를 함) 

- 그런데 너 내가 몇 살로 보여? 혹시... 

= 응. 너 스물 한 살 정도로 보이는데? 아니야? 

- 그렇구나. 이거 정말 고마운데? 너도 너 나이를 알려줬으니까 나도 내 나이를 알려줄께. 

 

사실대로 몇 살인지 알려줬더니 깜짝 놀란다.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뭐 사과할 것까지야. 

 

- 몇 년 전에 다닌 대학에선 교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봐 꼬마 (Hey kid)" 라고 부르기도 했어. 아직도 지하철에선 종종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 별로 기분은 안 좋은데 뭐 어쩌겠어. 

=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런데 너 정말 어리게 보여.

- 응 알았어. 괜찮아. 그리고 솔직히 나이가 뭐가 중요하니. 뭘 하겠다는 그 의지가 중요한 거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내가 만약 그 클라이언트의 나이라면 (스물여섯) 돌도 씹어먹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슬프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어쨌든 그 사람은 대화를 나눈 뒤 기분이 한결 괜찮아진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영화 곡성 

 

 

화요일 특선 요금 ($7.90) 으로 한국 영화 "곡성 (The Wailing, 2016)" 을 봤다. 요즘 한국에서는 영화관람료가 얼마인지 잘 모르겠지만 같이 간 파트너께서 $7.90 이상이라고 하시는 것으로 보아 대략 만 원 안팎인 것 같다. 조조할인은 아직도 있겠지. 

 

영화는 누가복음 24장의 한 구절로 시작한다.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나타나 그의 실존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잔소리하는 내용. 

 

 

"Why are you troubled, and why do doubts rise in your minds? Look at my hands and my feet. It is I myself! Touch me and see; a ghost does not have flesh and bones, as you see I have." 

- Luke 24:38-39 (NIV)

 

"느네 왜 믿지 못하고 의심을 하고들 지랄이냐. 내 손이랑 발을 봐라. 나다 나! 영 못 믿겠으면 만져봐. 귀신은 살과 뼈가 없지만 보다시피 나는 이렇게 있다고." 

- 누가복음 24:38-39 (꽃개버전) 

 

 

영화는 그냥 딱 현재 한국사회를 보여주는 것 같다. 공권력은 유명무실하고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 추측과 루머가 횡행하고 이에 따른 사적 응징이 버젓이 판을 친다. 사람 여럿이 죽어나가는 동안 행정권력, 경찰력, 언론 등 자기 일을 해야 할 공적 역할자들 (authorities) 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공적 권력과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는지 (혹은 죽어가는지) 아주 잘 보여준다. 지옥이 따로 없다. 다만 간간이 독버섯을 섭취한 환각 상태에서 사건이 벌어졌다는 방송뉴스 화면을 보여주는데 뭔 일만 생기면 개인(들)의 일탈로 원인을 돌리는 이 나라 정부와 똑닮았다. "독버섯=일탈". 게다가 무능력하기 그지없는 남주께서는 마지막까지 혼잣말을 한다. 아빠가 다 해결할께 (Dad will). 이 말도 안되는 무능력한 무정부적 정부의 수장이신 유사가부장께서 다 해결해주실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도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을 그냥 듣고만 있어야 하는 현실. 아ㅡ 제발 그냥 아무 것도 하지 말아주세요.   

 

시작과 끝이 상당히 일관됐다. 누가복음의 저 구절이 다시 끝무렵에 반복된다는 말씀. 영화관에서 나오면서 "이성적으로 따지면 영화에서 주는 실마리로서는 독버섯밖에는 원인이 없는데 대체 원인이 뭘까요" 라고 물었더니  "원인이 무엇이다는 것조차 열어놓고 만든 영화같아요. 나홍진 감독이 전작들에 비해서 많이 열어놓은 것 같네요." 라고 말씀하시는 나의 짝꿍. 

 

 

- "아가씨"는 정말정말 보고싶은데 이 도시에서 개봉할지 그건 잘 모르겠다. 아직은. 

- 한국인 유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들이 혼자 영화관을 많이 찾았다. 한결같이 성시경 안경을 쓰고 있어서 눈에 확 띄었고 혼자서도 영화를 보러오는 남학생들이 많은 것 같아 보기 좋았다. 

2016/06/08 05:23 2016/06/08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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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ay's Work

분류없음 2016/06/02 10:11

 

* 어린이 그림동화 "하루" 와 아무 관련 없는 포스팅임

 

 

4월 28일은 세계 100여 나라에서 함께 참여하는 "국제산업재해사망노동자추모의 날"이다. 전세계가 다같이 희생당한 노동자를 기억하는 날로 이 날을 삼은 것은 채 몇 년 되지 않았지만 캐나다에서는 (각각 주 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1984년부터 기념해왔다.  1914년 4월 28일 산재보상법 (Workers Compensation Act) 제정을 기념하자는 취지이다.  한국에서는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수은중독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문송면 군을 추모하는 취지로 한여름에 치렀다가 국제자유노련 (the International Confederation of Free Trade Unions) 의 제안 뒤로  4월에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꽃개가 살고 있는 온타리오에서는 4월 28일도 4월 28일 나름대로 치르지만 산재노동자의 날 (Injured Workers Day) 을 별도로 6월 1일에 더욱 의미있게 치러낸다. 오늘 주 의사당 앞에서 집회가 있었고 오후 2시엔 일터에서 희생당한 한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상영이 있었다. 함께 살고 있는 명민한 짝, 파트너의 제안으로 함께 참여하기로 하였고 낮에 같이 의사당에 도착했을 땐 너무 늦어 다시 발걸음을 영화상영 장소인 금속노동조합회관 (Steelwokers Union Hall) 으로 돌렸다.

 

 

20세 청년 로렌스 데이퀴언 "데이" 데이비스 (Lawrence Daquan "Day" Davis; "데이"는 가족들과 친구들 사이에는 불리우던 애칭이다) 는 고교를 졸업하고 갖가지 자격증을 땄지만 여전히 일자리를 구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용역회사에 지원서를 낸 뒤 플로리다 잭슨빌에 있는 바카디보틀링 (Bacardi Bottling) 회사에서 잡오퍼를 받아 첫 출근을 한다. 영화의 스틸 사진으로 쓰인 데이의 사진은 그가 첫출근 뒤 화장실에서 찍은 셀카 (selfie). 여자친구에게 셀카 사진을 보내 첫 근무의 설렘과 미래에 대한 벅찬 기대를 함께 나눴다. 그리고 90분 뒤, 그는 현장에서 적재화 기계 (palletizer machine) 에 깔려 죽었다. 데이는 여느 바카디보틀링 정규직들처럼 같은 라인에서 일하는 것으로 고용됐지만 그는 "정규직이 아니었다". 심지어 바카디보틀링 회사는 그에게 직접 업무지시를 했어도 데이의 고용주 (employer) 가 아니었다.  데이의 고용주는 레미디스태핑 (Remedy Staffing) 이라는 용역회사 (Temporary agency) 였다. 사건 초기부터 과실을 인정하지 않던 바카디보틀링은 추후 데이의 어머니에게 $250,000의 정산 (settlement fund) 을 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영화 제목인 "A Day's Work" 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데이는 근무 첫 날 변을 당했다. 그리고 그게 데이의 일 전부였다. "하루품" 을 뜻하는 이 말처럼 수많은 임시직노동자들 (temporary employees) 이 하루살이처럼 내일의 스케쥴도 모레의 스케쥴도 모르고 일한다. 오늘 하루 일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전부다. 데이도 그날 아침 전화를 받고 (on-call) 시프트를 받았다. 아마도 정규직노동자 한 명이 시프트를 취소했거나 그날따라 물량이 밀렸을 가능성이 높다.

 

 

영화상영 뒤 토론에 참여한 영화제작자 가운데 하나인 데이브 드사리오 (Dave DeSario) 는 그 역시 임시직노동자 출신이다. 데이브는 토론자들 가운데 한 명인 산재노동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놓자마자 가장 큰 박수와 격려를 보냈다. 이 영화는 오늘 6월 1일, 캐나다에서는 처음으로 상영되었고 미국 내에서는 2015년 몇 군데 노동영화제를 비롯해 전역에서 상영됐다. 한국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을지, 상영을 할 수 있을지 그건 잘 모르겠다.

 

 

며칠 전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고치던 19살 젊은 청년 "김군"이 사고를 당해 현장에서 숨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김군"의 삶과 노동의 맥락은 "데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기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용역회사 은성메트로에 취직한 김군.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이 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면 어머니를 모시고 잘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월급 144만 원 가운데 백만 원을 떼어 적금을 부었다. 그 적금은 오백만 원에서 멈췄다. 밥먹을 시간조차 빠듯해 작업가방에 컵라면을 넣어다니던 한 청년. 그랬던 그가 지난 3월부터 쉬는 날마다 메트로 본사 앞 피켓 시위를 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제 산 자들의 몫이 되었다. 김군의 명복을, 데이의 명복을 빈다. 

 

2016/06/02 10:11 2016/06/0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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