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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2/28
    아프다(2)
    꿈꾸는나비
  2. 2007/02/26
    [요약]아름다운 노.농연대-자급.자치의 관점으로
    꿈꾸는나비
  3. 2007/02/22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에 부쳐
    꿈꾸는나비
  4. 2007/02/20
    사진 정리하다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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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 예감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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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 예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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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7/02/08
    할머니의 눈물이 희망의 씨앗이 되어
    꿈꾸는나비
  8. 2007/02/07
    포기하자 -05.03.16을 회상하다
    꿈꾸는나비
  9. 2007/02/04
    세계화와 싸운다 중에서(1)
    꿈꾸는나비

아프다

연애는 자전거를 타고 온다!!

그 기쁜 마음으로 페달을 밟았고, 그 눈으로 찾아낸 봄.

별꽃, 산수유꽃, 매화..... 망울져 있던 목련

설렘

 

그것도 잠시

이제는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 째려본다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살해하고 싶은 봄날

내 삶하고는 너무 먼 평행선 같은 봄날

2007년 봄날은 갔다.

 

아프다.

가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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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아름다운 노.농연대-자급.자치의 관점으로

[요약]아름다운 노.농연대-자급.자치의 관점으로
(천규석/ 녹색평론 통권 91호)

 

-노.농연대의 직거래가 대안이다
1. 도농 직거래: 지역 농민단체 또는 마을 공동체와 도시공장의 노동조합이 연대하여 농어촌마을의 농축수산물로 직거래로 지역적이고,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차원의 노농연대사업으로서의 직거래
2.학교급식: ‘친환경 우수농산물’에서 ‘친환경 지역농산물의 직거래’로 조례 개정운동.

 

-전북 정농의 실패, 교훈
1. 학교측과 생산자 측의 사전 논의나 통보없이 임의로 이루어짐, 사전계약재배가 아니였다는 사실. (도의 재정지원으로도 되는 것이 아니며, 재고의 문제, 농산물 때깔의 문제가 있으며, 조례 개정이 된다고 해도 불안정한 문제가 여전히 존재한다.)
2. 사후 일들에 대한 문제점에 대한 사전 대비없이 전북도 보조금 3억 5천만원, 농민들의 쌈지돈 1억 5천을 보태어 5억 짜리 물류센터를 지은 것부터 망조. (비근한 예는 많다. 안동가농의 ‘우리농한생명 운동’ : 확고한 비전, 전망도 없이 ‘물량화와 규모화의 경제’에 빠져 단명했다.)
반대로 한 살림은 20년이 다 되어서야 물류센터를 지었다: 오랜 활동기간에 쌓여온 절실한 내부적 요구와 자기능력의 축적에 따라 거의 자력갱생을 이뤄냈다.(일단 ‘하자’가 아니라 ‘하다가 하자’)

 

-재정지원 받는 물량주의 운동은 반드시 망한다
1. 사회문제의 궁극적인 책임을 정부에 묻고 재정보조의 문제해결이 최종 열쇠인냥 주장한다. 다시 말해 재정지원 받는 사회운동은 이미 운동이 아니다.(모든 운동의 총망라, 물론 한계와 결론을 지어 놓고 우리의 역할은 여기까지 라며 자기 스스로 해산한 거의 단체는 없었다. 사업 전환만 있을 뿐이지)
2. 어떤 사회단체는 정부가 마땅희 해야 할 일을 정부가 안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대신 해주고 최소한으로 받는 재정수령이 왜 나쁘냐고 반문할 것이다. 정부에 기생하는 관변단체의 변명 또는 곧 그렇게 될 단체의 자기합리화다.
3. 재정지원이 없다고 우리가 하던 일이나 해야 할 일들을 자꾸 정부에게 하나하나씩 떠넘기고 정부가 해주기를 요구 하니까. 우리의 자주와 자치는 사라지고 수탈기구로서의 정부는 날로 막강해진다. 정부에 요구, 의존하는 운동은 국가주의의 체 바퀴를 못 벗어난다.
4. 정부에 대해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고 가능한 세금도 안 내는데 있다.

 

-기아차 노조와 구례농민회의 연대
1. 05년 11월 11일 광주 기아자동차 노조와 전남 구례농민회 노농연대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자. 더디게 가더라도 그렇게 하자. 쌀 1000포 구입과 설 특판 사업, 노농경작단 출범 등등.
2. 노농연대의 궁극적인 목적은 산업문명체제의 대안을 전망하는 데 있다. 그 전망은 ‘자급적 관점’ 스스로 주인되는 자급적이고 지속가능한 삶의 관점은 귀농적 삶뿐이다. 귀농적 비전 없는 노농연대는 성공해봐야 지금의 현상을 유지, 개선 정도이다.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확실히 하자. 열가지 밍숭맹숭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대구․경북지역 노․농연대 직거래운동의 현주소
1. 센터라는 이름의 집중과 규모의 경제와 효율을 추구하겠다면 기존 시장의 유통에 맡기면 될 것이지 우리가 새삼 직거래 운동의 이름으로 또 하나의 시장 기구를 복제해 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학교의 직거래 실무자, 책임자들과 함께 농민의 살림과 그 직거래 의미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인식 공유의 선행이 먼저다.
2. 학교 또는 사내식당의 짜여진 식단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식단에 따라 식재료를 구입하지 말고 생산 공동체의 공급가능 품목에 따라 식단을 꾸리는 자기 변화, 혁신없이는 직거래 운동의 성공은 어렵다. 노농연대의 진정한 새로운 공동체 혁명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철저한 문제 인식과 고민 그리고 대안은 아니더라도 자존심은 지키는 운동의 원칙을 가지고 있는가 묻게 된다.)

 

-‘기구’보다는 사람의 사이의 관계변화가 먼저다
1. 지역물류체계의 구축에서 벗어나 쌀부터 시작해서 축적하여 품목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지역물류체계의 구축이란 지역에 사는 인간관계의 새로운 구축의 다른 말이다.
2. 물량조절의 어려움→ 개인이나 작은 공동체 당사자 간의 계약으로 생산한 물량은 과부족의 폭은 그리 크지 않다. 스스로 조절이 가능하다.(소규모화) *계약, 협약은 물량의 계약아 아니라 농산물을 수확한 만큼 소비한다는 ‘소비약속’이다.
3. 지역식량기구의 대안은 시장과 국가를 동시에 넘어서는 민중 스스로의 자치와 자율로 서는 자립적인 지역공동체 세상이다→ 상품에 종속된 소비가 아닌 그러니까 제도로 통한 일방적 계획보다는 협동적 인간관계 변화운동으로 서야 한다. 작은 실천과 동시에 인간관계 변화와 자급자치적 관점에 서지 않고서는 결코 노농연대 운동은 성공을 기약하지 못한다.
4. 권력투쟁이나 계급투쟁에 대한 미련이 조금이라도 남은 사람들은 이 운동으로부터 일찌감치 떠나야 한다. 공동체에 그런 기득권은 없다. 만일 없던 기득권이 다시 생기면 그것은 이미 공동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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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에 부쳐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에 부쳐

(( 오늘은 대구시,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매일신문> 등 일부 언론에서 공식적인 기념행사를 열고 있는 국채보상운동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

한반도에서 영국과 미국의 후원으로 중국 및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 뒤,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한 일제의 침략과 수탈이 고조되던 1907년, 그 이전부터 멸망해가는 나라를 걱정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활동하던 사회운동가들 중 일부에서 제안하고 미동이 있던 “ 국채를 자주적으로 갚자”는 뜻이, 2월에 들어서 대구 광문사의 대표인 김광제 선생과 서상돈 등 대구의 유지들이 발의하여, 전국적으로 마른 들의 불길처럼 번져나가 일정한 성과를 거둔 국채보상운동을 돌아보고, 오늘 또다시 미국의 식민지로 완전히 전락하고야 말 한·미 FTA 협정 저지 운동을 하며 그 때의 의미를 헤아리고, 오늘의 활동을 성찰하며, 투쟁의 방향을 가늠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오전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기념식처럼 박제가 되고, 왜곡되는 역사 읽기와 쓰기가 아닌, 민중의 입장과 전망이 살아있는 역사가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입니다. 그것도 특히 자랑스러운 민중항쟁의 땅으로 기억되어야 할 대구에서 말입니다.

일제가 한반도와 중국 등 동아시아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조선으로 침략하여 수탈하는 기반이 되는 것에 사용된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주로 도입된 차관 등 국채를 민중이 스스로 갚고 경제적 자주와 정치적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이 모아져 상당한 정도의 성금이 모였습니다만, 일제와 친일파의 방해와 탄압으로 인해 결국 성사되지는 못하였고, 여러 다양한 애국계몽운동으로 발전한 중대 계기가 되었습니다.

흐름도 아니고 의미보다 덜 중요하지만, 금액으로 비교해 보면, 그 때의 외채는 대략 2조 5천억 정도인데, 지금은 얼마일까요 ? 대략 250조인데, 외환 보유고를 텅 비우면 한 30조 쯤 모자라겠습니다.

우리 민중에게 외채에 대한 최악의 기억은 1997년 IMF 환란입니다.
환란이란 한마디로 외채를 못갚을 정도가 되어 국가부도 사태로 이어질 뻔 할 때, 다시 외채를 더 빌려 갚고, 다음 세대에 떠넘기는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외채란 결국 민중이 세금으로, 피땀으로 갚는 것이지, 노무현이나 이건희가 대신 갚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

국채보상운동이 편협하게 일부 조선 상공인들의 이익을 비호하는 데 있지 않은 것처럼,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올바름을 왜곡하는 <서상돈 상> 수여 따위에 의미가 있지 않으며, 더욱이 “ 소수 부자들의 나라인 경제대국 건설 ” 방향과는 전혀 다른 취지입니다.
지금 수출이 3,000억불이 넘는 데도 한반도의 절대다수 민중들은 생존 그 자체를 위협받고 있습니다. 사실 위협의 장본인들이 오늘 오전에 백주년 기념식을 연 작자들입니다.
이렇게 역사는 늘 민중의 애환과 기본권을 빼앗은 자들의 일방적인 잔치로 끝나야 합니까 ?

국채보상운동이 국가주의, 제국주의, 식민지 경영으로 나아가는 한국판 신자유주의 원조라도 된다는 것인지요? 정말 허탈한 역사왜곡이 아닐 수 없으며, 이웃 나라들의 역사 왜곡과 날조를 비판할 자격 없는 자들의 모략일 뿐입니다.
국채보상운동의 진정한 취지와 확산은 식민지를 만들고 착취하려는 외세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한 자립경제 추구였습니다. 이후 물산장려운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립경제라야 민중에게 기여하는 생산과 소비가 되고, 민중이 통제 가능한 경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식민지와 전쟁 시기를 지나면서, 우리 경제는 필연 일제와 미제의 부속물로 변질하였고, 이제 한·미 FTA를 통하여 완전한 소모품으로 바쳐질 위험한 운명과 마주하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식민지 경제로, 그리하여 식민지의 풍경이 가득찬 사회로 그려지는 파국을 맞이하기 전에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 민중이 일군 불멸의 사회운동들이 역사 속에서 왜곡되지 않도록 기억하는 겁니다. 지금처럼 민중의 생존을 말살하는 자들이 도리어 자축하고 기념하는 행태는 과거와 미래를 잃어버리는 역사의 미아로 버려지는 삶이 됩니다.

둘째, 국채보상운동의 미완성(국채는 여전히 우리에게, 그리고 또다른 이웃 나라의 민중에게 완강히 남아 있습니다)을 오늘에 되새기는 뜻은, 대외의존 심화의 개방경제에 있지 않고, 민중이 주인되는 경제, 곧 자립경제를 다시 만들어가는 데 있음을 환기하는 데 있습니다.

한국 자립경제의 기본은 시장자유로부터 발생하는 삶에 필수적인 것들의 상품화, 산업화를 막아내는 데 있으며, 이것은 농업의 부활과 함께,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자급을 어는 정도까지 달성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을 통하여 식민지 전락을 막고자 온 민중이 거국적으로 동참하였듯이,
지금 온 민중이 함께 나서서 한·미 FTA를 확실히 이겨내는 저항으로써 자급과 자치에 한 걸음씩 다가서야 합니다.

휴대폰과 자동차 장사로, 중국 가서 컨설팅 파는 것으로 온 국민이 배터지게 먹고 쓰는 일은 망상입니다.
그런 경제활동은 다른 나라 민중들에게 국채보상운동 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아무리 해도 다 갚을 수 없는 국채를 더 이상 남기지 않은 길은 절대적인 자립경제를 구축하는 것이며, 그 근간은 민중이 식량과 에너지를 대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급하고 서로 나누어 쓰며, 고르게 가난함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2007. 2. 21. 땅과자유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및 한·미 자유무역협정 저지를 위한 수요촛불집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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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정리하다가

게으름으로 인해 2006년의 상반기 나의 모든 것이었던 '텃밭 농사'를 이제사 정리를 하게 되었다. 백수로 시작된 2006년 봄, 서툴지만 소꿉장난 같은 텃밭을 가꾸고 싶어 수소문하다가 참여연대 동구주민회에서 팔공산 자락에 텃밭 농사를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동구주민회에 있는 선배를 찾아갔다.

 

<주말농사 텃밭가꾸기> 새책도 들고와서 선배랑 함께 하기로 했다. 불로시장에서 상추씨, 쑥갓씨, 고추모종, 오이모종, 호박모종, 가지모종을 사들고는 밭을 일구고는 심었다. 처음 시작하는 농사 치고는 욕심을 부렸다. 땅은 무한정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뭔가를 계속 심고 싶었다.  고구마, 자두가 챙겨준 대추리산 옥수수씨, 동현선배가 챙겨준 검은 콩, 자취방 주인 어머니께서 챙쳐주신 파, 정구지를 얻어서 무작정 심었다. 물 주고 김 맬 것을 생각도 못하고는 욕심껏 심었다.

 

팔공산 자락에 있지만 차를 가지고 가지 않으면 불편하다. 그만큼 깊은 산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생동물로 인해 농사를 짓기에는 힘들다는 점도 있다. 고구마, 콩은 심는 그 순간 동물들의 먹잇감인 것이다. 한여름 땡볕에도 자전거로 왔다갔다 했다. 1시간 거리를. 근데 문제는 그렇게 준비를 하고 가지만 가는 동안 힘을 소진한 터라 물주고 김매다 보면 지쳐서 그만하고는 김밥 까먹고 돌아왔다. 텃밭농사 보다는 소풍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 때도 그랬지만 자전거를 타고 밭에 애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페달을 힘껏 밟는 것, 즐거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행복했다.

 

장마철이 지나고는 밭을 찾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작정하고 함께 농사를 짓던 선배들과 찾았다. 그 새 달맞이꽃 밭으로 변신해 있었다. 한숨 크게 함 쉬고는 낫질 반쯤하다가 힘들어서 그만하고 맛있는 밥 먹었다. 손바닥만 했던 나의 밭에서 상추, 쑥갓, 고추는 여러번 거둬 주위 사람들과 나눠 먹었고, 끝에 얻은 수확물은 오이 몇 개, 단호박 1개, 가지 몇 개를 땅과자유 식구들에게 자랑했다^^;;

 

올해도 이 기분을 이어가기 위해, 좀 더 가깝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밭을 구하고 있는 중이다. 작년에 행복했는데 올해도 행복하려고 한다. 작년 보다는 어설프고 서툰 밭 가꾸기가 줄어 들길~

 

-머리 털 나고 처음 내 입으로 들어갈 작물을 심었다.



 -씨부리기를 하며 반신반의 했는데 이렇게 고개를 내밀었다. 쑥갓

 

 -뭐지?

 

 -주인집 어머니께서 주셨던 씨앗으로 이렇게 자랐다. 파

 

 -단호박, 거름을 듬뿍 주지 못했지만 이렇게 자랐다.

 

 -장마 지나고 나서 달맞이꽃 밭으로 변신해 있었다. 누가 몰래 와서 씨앗을 뿌렸나보다.

 

-달맞이꽃 밭에서 찾아낸 달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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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예감2

오늘은 울고 싶다
근데 울지 않고 있다
오늘은 취하고 싶다
근데 아무리 마셔도 말똥말똥

 

어제 문자메세지에 반신반의 했지만 그 말에 취했다
오늘이 발렌타인데이란다, 그래서 만나는 거라
선배가 웃음기 띄며 궁금해 했다
등달아 나도 그랬다

 

친절한 그대는 저녁밥을 찜닭으로 같이 먹으면서
많이 먹지 않는다고 타박했고
맛있는 커피를 마셨다
주춤거리며 잇지 못 한 말,
단박에 느낌이 왔다

 

간만에 찾아온 추위 속을 걸었다
체념 모드로 말했다
충격 흡수 된다며

 

수많은 말들
기억한다
각인,
웃었다
그리고 씩씩했다

 

현실, 그게 지금의 스물 아홉, 여덟
내 삶이다

끝이 아니라고
내 모든 열정을 쏟아 붓고자 다짐했지만
오늘은 무너진다, 끝내 소통의 부재

 

그 동안의 불면증이 오늘로써
증명된다
불안한 그 예감은, 어김없었다
오늘은 푹 자고 싶다

 

평택 지킴이들은 깡소주에 권주가를 부른다는데
난, 너무 간사하며 개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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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예감1

온종일 그것도 모자라 잠자리에서도 그대를 생각했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깨고는 욕들어 먹을 각오하고 방에 쳐박혀 있으면서도,

유쾌하지 못한 뉴스를 접하면서도,

불확실한 내 삶 앞에서라도 그대를 생각했다.

 

불면증,

오늘은 편히 잠을 자고 싶다.

잠을 잘 수 없다.

그대 때문에 잘 수 없다면 믿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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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눈물이 희망의 씨앗이 되어

할머니의 눈물이 희망의 씨앗이 되어


히로시마행 비행기를 타며
작년 12월 4일 “전국 동시 증언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김순악 할머니와 함께 히로시마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2005년, 올해도 할머니들께서는 일분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령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힘든 발걸음을 하셨다. 10월 22일에 있을 “일본군‘성노예’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일본 전국 동시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예천에 살고 계시는 김옥선 할머니와 함께 히로시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작년에는 10개 도시였지만, 올해는 9개 도시에서 열리게 되었다. 도쿄, 카나가와, 미에, 쿄토, 오사카, 히로시마, 토치, 후코오카, 오키나와에서 개최되었으며, 한국, 대만, 필리핀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께서 참석하셨고, 한국에서 다섯 분의 할머니들께서 참석을 하셨다.이용수 할머니께서도 ‘미에’에서 증언집회를 가졌다. 이렇게 동시 집회가 가능했던 것은 ‘나눔의 집’에 방문했던 일본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서, 살아 계시는 동안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지로 뭉쳐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이렇게 전국 동시 집회가 이뤄졌다.

 

히로시마에서 머물며
10월 20일 새벽부터 서둘러 예천 터미널에서 할머니를 만나 서울행 버스를 타고 두 시간 반을 달려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은 후 리무진버스로 1시간 반을 달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탑승까지 몇 시간의 여유가 생기니 할머니께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셨다. 7시 10분, 히로시마 공항에 도착해서 마중 나오신 분들의 배웅을 받으며 숙소로 향했다. 피곤하셨는지 숙소에 도착해 씻으시고는 바로 주무셨다.
21일은 저녁 6시에 히로시마 시내에 있는 가톨릭회관에서 증언 집회가 있었다. 아침 식사가 양식이어서 할머니 입맛에는 맞지 않으셨나보다. 그래서 점심은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한식집에서 먹었다. 오전에는 히로시마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가로 산책을 했으며, 오후에는 민족학교를 방문하였다. 오늘 통역을 맡으실 서석희 선생님은 민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친다고 했다. 증언 집회 전에 서석희 선생님께서는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나서는 통역에는 문제가 없다며 자신을 하셨다. 서석희 선생님께서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는 증언이 시작되기 전부터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할머니와 통역자가 같이 울먹이다
김옥선 할머니께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시는 게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가슴에 묻어 두었던 한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증언을 시작하셨다. 차분한 목소리로 16세 때 끌려갔던 정황을 이야기했다. “벌써 트럭 안에는 15명이 타고 있었다. 나랑 정님이라는 친구가 타서 17명이 트럭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10명은 남양군도에, 나를 포함해서 7명은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을 울분을 참으시면서 차근히 이야기를 하셨다. 100명이 넘는 군인들이 줄을 서 있었다. 라는 말에 통역자인 서석희 선생님께서는 자주 눈을 감으셨고, 목소리를 가다듬기도 했다. “100명을 받고 죽고, 목 메달에 죽고, 매 맞아 죽고..........” 할머니께서도 차마 말을 잊지 못하셨다. 결국 할머니와 정님이라는 친구 두 명 살았다. 그 곳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할머니의 기억은 선명했다.
할머니께서는 연신 물을 마셨다. 또 얼마 전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한 것에 대해 일갈을 가했다. “난 당신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잘못을 모르는 일본정부를 미워할 뿐입니다.” 그리고 몇 분간의 침묵을 거쳐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한국에서 몇 번의 대수술과 어머니께서는 눈을 못 감으시고 돌아 가셨다며 할머니께서 몸짓으로도 표현하셨고, 통역 하시는 선생님께서는 그만 눈물 보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좌석에서도 연신 훌쩍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 시간 반가량의 증언시간을 예상했으나, 50분가량의 증언을 하셨다. “8년 동안 당한 걸 생각하면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못한다.” 죽도록 고생해서 끌려갔다 왔는데 주의의 곱지 않은 시선 속에 있다. 너무 분해서 까무라친 적도 있다. 가톨릭 회관을 가득 채운 시민들의 힘찬 박수를 받으며 퇴장하셨다. 억누르지 못한 감정 때문에 할머니께서는 밖에서도 눈물을 보이셨다.

 

히로시마대학교에서
그렇게 할머니의 생애 첫 번째의 공개 증언이 마무리 되었다. 저녁을 드시고는 곧장 숙소로 향했다. 피곤하실 텐데도 다 하지 못하신 이야기를 새벽이 다 가도록 가이드를 맡은 다니구찌 교꼬와 저에게 쉴새없이 하셨다. 어느 정도 속이 풀렸는지 곤히 주무셨다.
22일 토요일 2시, 히로시마대학교  중앙 도서관 라이브러리 홀에서 개최되는 “일본군 ‘성노예’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일본 전국 동시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히로시마 대학교로 출발하였다. 이날 9개 일본 도시에서 동시에 열린다. 도쿄, 카나가와, 미에, 쿄토, 오사카, 히로시마, 코치, 후쿠오카, 오키나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피를 토하며 외칠 것이다. 망언을 일삼는 그 땅에서 거짓의 실상이 낱낱이 증언으로 밝혀 질 것이다. 비록 지상파 방송사의 카메라나 지역 신문사 기자의 플래시가 없다 하여도 진실은 묻혀지지 않을 것이다. 일당백의 각오로 앉아서 묵묵히 듣고 있는 일본의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잊지 않을 것이다. 가슴을 치며, 울음을 참으며 증언을 하셨던 김옥선 할머니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작넌에 이어 올해도 기획과 총괄을 맡았던 히로시마 대학생인 가도다 나오꼬씨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할머니 증언 전에 저희 단체 소식지에 일본에서 보내는 편지라고 해서 고정연재를 하고 계시는 츠즈키 스미에 선생님의 기조 강연이 있었다. 2시를 조금 넘겨 할머니의 증언은 전날보다 안정된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중국에서 유학 온 김춘미씨의 통역으로 진행되었다. 어제 했던 증언하고 다르지 않았다. 다를 수가 없다. 어찌 다를 수가 있겠는가.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끔찍한 각인텐데. “못 받는다고 모진 매타작에 죽더라도 한마디 하고 죽어야지 하는 심정으로 우리나라 빼고 우리를 끌고 와서 노예로 부려먹어도 한계가 있지 않느냐 너는 도독놈이다.”라고 하니 더 때렸다며 끝끝내 울먹이는 목소리로 분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리고 이 말도 잊지 않으시고 하셨다. “일본이 이렇게 부자나라가 된 가치가 뭐 있나?, 우리 때문에 이렇게 사는 데 사과도 없고, 배상도 없이 말이지.” 할머니께서는 참지 못한 서러움과 분통 때문이신지 결국 탁자에 엎드려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렇게 증언을 마치시고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어제는 안 드셨던 우황청심환을 마셨다. 그제서야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슬픔은 흘러야 한다
할머니께서는 증언이 끝나고 도서관 의자에 앉아 계셨는데 할머니의 증언을 들었던 유학생 두 명이 할머니 곁으로 왔다. 경북대에서 교환학생으로 온지 얼마 안 된 여학생이었다. 할머니 손을 잡고는 눈시울 붉어질 때까지 울었다. 왜 진작 알지 못 했던가 제 가슴을 치듯이 말했다. “할머니 죄송해요” 그렇게 10분을 있었다. 할머니께서 학생들이 이렇게 일본까지 공부하러 왔으니 열심해라며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꼭 잊지 않겠다며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약속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 집회를 준비했던 히로시마 대학생이 직접 장만한 음식이 차려진 뒷풀이 장소로 옮겼다. 정성껏 차려 준 음식을 먹고는 홈스테이를 하게 된 숙소로 옮겼다. 다음 날 차려주신 아침밥을 먹고 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할머니와 동행을 하면서 틈틈이 읽을 요량으로 최근에 나온 책을 챙겨갔다. 분쟁지역을 다니며 피스저널리즘에 고민을 하고 있는 윤정은 기자의 책이다. 106일간 이라크 지역의 슬픔을 담담히 담아 낸 “슬픔은 흘러야 한다”이다. 할머니가 겪어야만 했던 태평양 전쟁이나 현재 이라크 전쟁이나 전쟁은 모든 걸 파괴한다. 그 파괴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이런 구절이 있었다. 이 두장을 끝으로 남기고 싶다.
“어쩌면 그 친구가 너에게 기대했던 것은 고통을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런 자리에 함께 있어 주는 것, 그것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의 고통을 고치겠다고 덤벼들지 않는 일, 그냥 그 사람의 고통의 가장자리에 공손하게 가만히 서있는 일.”
“우리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이 현실 앞에서 진정으로 슬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고통당하는 데도 고개를 돌려버리고, 슬픈 것을 보고도 슬퍼하지 않는 우리의 잔인한 모습에 진정 슬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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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자 -05.03.16을 회상하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왜 그리 당당하게 보이고,부러워보이고, 의미가 있어보이지는 스스로가 의문이다. ㅋㅋ

 

나의 힘이 뭘까
기형도가 질투는 나의 힘이라 했지만,
난 무엇이 힘일까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피해의식으로 시작되어서 피해의식으로 끝나는 힘이랄까
그래서 나름의 미화와 적개심이 적당히 힘이겠지

 

설레는 봄날이라서 그런지 조그만한 것도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스스로의 감정에 있어서 예민한 것도 분명있겠지만, 그것보다 스스로 생각 해보면 신경인 날카로워진 것 같다.

 

각설하고 이야기 하자.
처음이다. 그런 문자메세지를 받은 게.
누군지고 모른다. 번호가 없었다.
"꽃인 그대와 함께 피어 아픈 그늘있어요. 잘자요. 기홍"
몇 날 며칠 밤을 설쳤다.
왠지 가분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오늘만은 설중매를 마셨다.
아껴두었던 설중매였다. 분선할매가 좋아했고, 난 분선할매를 좋아했다.

 

그런데, 오늘 난 느꼈다.
난, 어쩔 수 없구나.
내가 자라온 환경과 피붙이의 환경과는 다르다고 몸부림치며 도망가고 싶고 잠적하고도 싶은데, 피는 속일 수 없구나를 느꼈다.
이런 나의 장애를 이해한다고 해도 충돌은 당연할 것인데.
어찌 연애를 꿈꾸는가.(그렇다고 완벽주의는 결코 아닌데)

 

결코 그 문자의 주인공이 나의 상상력으로 밝혀지지 않을께 분명하니 괜히 설레고 망상에 젖지 말고,스스로에게 부탁하고 싶다.
현재 삶에 있어 허덕이고 있는 문제에 좀 더 치열하게 살자.
그게 더 현실적이고, 기홍이 답지 않은가ㅋㅋ

 

꼭 그런 기분이다.
윤동주의 시에 보면 침전하는 뭐라고 하는 싯구에 많은 고민했다고 했는데, 기홍주의에 왠지 침몰되는 기분이다.

 

어차피 이 마당이 극히 자기중심인게 당연하겠지.

 

혼자 사무실에서 피켓을 만들면서 생각했다.

 

결국 혼자 살아가고, 혼자 해결하고, 혼자 행동 할 것인데,
무엇에 그리 기댈려고 하는가.
그래, 맞다.

 

그래서
술김에 지랄하고 싶다.

 

C발
무슨 내 주제에
어차피, 안 되는 연애를 구질구질하게
껄떡거리지 말고,
내 삶을 제대로나 살아보자.

 

그래서 포기하자.
감히, 이 봄날에

 

포기하며,
더 좋은 세상에서
나의 연애는 이루지리라
믿는다.

 

어떤 이유로도
내 앞에서 연애를 설득하지 마라.

 

이 말이 비록 술김이라도.
C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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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싸운다 중에서

세계화와 싸운다(폴 킹스노스/ 창비) 중에서
 -‘제 4장 쇼핑중단파 교회’ 사례요약 중심으로


자기문화를 ‘펩시’나 ‘코카’로 양자 택일할 수 밖에 없는 문화식민지에 살고 있다. 문화 전쟁은 진행 중이다. 무섭게. (본문 중에서)

 

1. 빌리목사
-불꽃 같은 근사한 머리모양을 하고 치아를 빛내며 개목걸이와 흰색 턱시도를 입고 설교.
-‘휴대전화 오페라’ 신도들이 가게 안을 돌며 전화기에 대고 노예노동에서 저임금까지 무엇이든 큰소리 침
-‘말다툼연극’ 화장실에서 섹스하자고 큰소리치는 대본, 출소자가 감옥에서 칠했던 종이컵을 알아본다는 대본.

 

2. 소규모 문화게릴라들
-미국: 캘포니아교도부(CDC), 광고판해방전선(BLF)→ 말보로 광고판이 말보로 담배꽁초로 바뀌고 등등
-영국: 반광고세판 세뇌행동(ABB), 신광고수준당국(NASA)
-팬클럽회원들: 나이키타운에 들어가 운동복을 엄청나게 구입후 ‘더러운 것이 묻었다’고 환불을 받았다. 더러운 것은 나이키 로그였다.
-휠마트(Whirl-Mart): 햐얀색 낙하복을 입고 월마트 통로에서 빈수레로 한시간 동안 오간다. ‘소비를 깨닫는 예배’ 중이라 답한다.
-감시카메라 배우들(SCP): 맨해튼의 3,000개 cctv 앞에서 거리무언극을 공연함으로 cctv 반감 표출.
-런던 활동가들은 가짜신문을 나눠준다.
-RT마크: 전복적인 아이디어 교환하는 온라인체
 ①‘바비해방전선’-미군병사인형을 바비인형으로 교체.
 ②2002년 가짜 죠지 부시지지 사이트 제작. 폐쇄 조치됨. 부시 왈 “자유에도 제한이 었어야 한다.
 ③수천명의 히피들과 노숙자들을 모아 같은 날 전국의 월마트 주차장에서 자게 한다.


소비자사회에 대한 저항도 상품이 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우리의 정신을 파괴한다. 그런데 기업이 아무리 애를 써도 문화훼방은 예상을 뒤엎으며 계속되고, 발전 부활한다. 문화훼방을 요점이다. (본문 중에서)

 

3.생체제빵부대(BBB)
-유기농 코코넛크림파이를 서류가방에 넣고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대부 밀턴 프리드먼 얼굴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이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우리에게 하늘에 떠 있는 파이를 먹으라고 합니다. 나는 다만 그 파이를 따다가 그에게 돌려준 것뿐입니다.” ‘파이로 파워에 맞서기’ 보도자료를 자료 작성시 제빵용어를 절묘하게 사용 말장난과 정치를 조합한다. 또 ‘체리파이 삼인조 사건’는 도시노숙자 정책에 반대 시위 일환으로 샌프란시스코 시장에게 가격, 결국 징역 6개월 선고, 이 사건을 두고 ‘전세계 빵봉기’라 부른다. 전세계 빵봉기는 사빠띠스타에서 영감을 얻음. 권력층에 디저트를 배달하는 제빵투사들의 지하네트워크‘라 자칭함. 파이세례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 직접행동이다. 눈에 보이는 에스페란토다.

문화훼방은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점을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하는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다. (전적으로 동의를 하지는 않지만) 미래의 투쟁은 머리와 가슴의 투쟁이라 생각한다. 무장투쟁, 대중저항은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무력 투쟁은 국가의 파상공격을 초래할 뿐 아리라 사람들의 파상혐오를 초래한다. (본문 중에서)

 

○땅과자유
-반소비주의에 대한 운동 차원을 벗어나 전방위적인 전략과 전술로 활용해야한다. 예를 들어서 오아시스 프로젝트 예술인 회관 문제 해결을 위해 문광부 앞에서의 문화노동자들의 기발한 시위(라면 먹기, 서서 잠자기, 낚시하기, 체조하기 등)
-대구 중앙로 반월당 횡단보도 삭제에 대한 분노로 ‘횡단보도 프로젝트’ 실시
- 이런 행동이 좀 더 활발해져서 우리의 분노를 제대로 표출하면서 살자. 지역에서 지하철․버스요금 인상은 원칙과 기준도 없이 인상하며 우리의 분노는 며칠 뿐이고, 표출은 없다.

 

<본문 중에서>
*경찰은 자본주의의 폭력적 얼굴이다. 다시 말해, 경찰은 부자들을 지키는 개다. 따라서 무정부주의자들이 부자들과 한판 계급전쟁을 시작할 때, 최전선은 경찰이다.

*투쟁이란 남과 싸우는 것도 아니고 폭력적인 것도 아닙니다. 투쟁이란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자기 손으로 해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투쟁할 수 없습니다. 연대하는 법을 배우고 함께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모든 것을 요구하자. 있는 힘껏 외치자. 손에 넣을 때까지 멈추지 말자. 우리도 놀랄 만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우리가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지금 아니면 언제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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