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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늘(9.24) 에드워드 사이드 영면

2001년 9월 24일 팔레스타인 출신 비교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백혈병으로 투병 끝에 6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영국의 식민지이던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다.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집중 이주, 팔레스타인 인들과 갈등을 일으키던 1947년 가족들과 함께 이집트 카이로로 이주했다. 상류층이었던 부모 덕택에 십대후반에 미국으로 이주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에서 공부했으며 그 이후 평생을 미국 시민권자로 살았다. 몇 년전에 출간된 에드워드 사이드의 자서전 제목은  Out of place 이다.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카이로에서 성장하면서 부유한 부모 덕택에 탈아랍식 정통 영국 식민 교육을 받은데다가 십대후반부터는 미국 동부에서 교육을 받은 사이드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팔레스타인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그 정체성이 바로 1978년 오리엔털리즘의 출간으로 연결된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20세기 후반 문화, 정치, 사회 모든 분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중에 한 명이다. 그의 책 '오리엔털리즘'과 그 개념은 너무나 큰 영향을 미쳤다. 오리엔털리즘자체에 대한 설명이나 언급은 다음 기회로 돌리겠다. 그러나 오리엔털리즘이 얼마나 대중화 된 개념이냐면 심지어" 올 가을의 패션트렌드는 과감한 오리엔털리즘 풍의 실버체인과 가죽 재킷의 미스매치 불라불라" 하는 식으로 여성지의 패션란에서도 언급될 정도다. 그리고 '오리엔털리즘' 한국어 번역판은 영남대 박홍규 교수의 성실한 작업에 힘입어 참으로 괜찮은 역서중의 하나다.오리엔털리즘의 출간 이후, 컬럼비아 대학 교수로서 에드워드 사이드는 학문으로서만이 아니라 항상 실천하는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하워드 진, 노암 촘스키와 더불어 미국의 삼대 양심(?)적 지식인으로 꼽힐 정도였으니..

 

참 지난 2000년 에드워드 사이드는 심각하다면 심각할 수 있는 정치적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단체 관광객의 일원으로 레바논-이스라엘 접경지역을 돌아보던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스라엘 경비 초소에 돌팔매질을 했고 그 광경이 이스라엘 측 CCTV에 찍혔던 것이다. 당연히 이스라엘 측은 대대적으로 그 장면을 선전했고 팔레스타인 인들의 폭력성을 증명하는 행위라고 입에 게거품들을 물었다.

당시 사이드는 사진에 찍힌 사람이 자신임을 인정했으며 '레바논 접경 지역에서 이스라엘 군의 점령이 끝난 것을 기뻐한 나머지 환희의 제츠처로서 투석을 했다'며 또한 '철책선에 도착하기전 과거 점령지에서 발생한 인권유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보았다. 지난 35년간 정의와 평화에 반해 행해졌던 만행이 자신이 던진 돌의 무게에 비해 너무 무겁다'며 기회가 생기면 또 돌을 던지겠노라고--;; 당당히 밝혔다.

당시 미 주류 유태계에서는 난리가 났고 컬럼비아 대학에도 압력이 갔다고 한다. 그러나 석좌교수 에드워드 사이드의 무게 또한 만만치 않았던 법 컬럼비아에서는 그 압력들에 대해 가비얍게 일축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회가 닿으면 '평행과 역설'이라는 책을 일독해보길 권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와 대표적 유태계 음악인 다니엘 바렌보임의 대화를 묶어낸 책이다. 바렌보임은 나찌의 상징이자 이스라엘에서는 터부시 되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바그너 작)을 01년 이스라엘에서 최초로 연주해서 화제를 일으킨 적이 있는데 이 책에서도 역시 리하르트 바그너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갑론을박을 벌이는데 그 대화들이 너무나 아름답다. 물론 오슬로 협정(지난 9월 13일자 오늘은 -http://blog.jinbo.net/Profintern/?cid=2&pid=49 참고)을 두고선 날 선 대화들이 오고가기도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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