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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 근데 이건 그렇게 힘든 작업은 아니지만 극도의 성실성이 필요한 작업이임엔 분명하다. 고로 매일 매일 블로그에 업데이트 시킬 수 없다는건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얼마나 오래 갈지, 얼마나 자주 뺴먹을진 모르겠지만...하여튼 오늘 이 작업을 시작해본다." 라며 이 디릭토리를 8월 22일에 시작했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마이클 콜린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와 정말 대조적인 삶은 산 프란시스 프랑코에 대해 쓴 10월 1일 이후로 일주일 째 못쓰고 있다.
41일 동안 지속한 것에 대해 내 자신을 칭찬 해줘야 할까 아니면 비웃어 줘야 할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현재는 이 디렉토리를 지속할 만할 정신적 여유가 내게는 없다는 것이다. 신나서 쓸 땐 한 사십분 정도 그냥 재미없이 때우는 기분으로 쓸땐 이십분 소요되는 이 디렉토리를 매일 채워낼 시간이 없다고 말하면 뻥일게다.
어쩌면 '오늘은'을 안 쓰는 대신 다른 디렉토리에 더 많은 갯수의 글을 더 많은 분량으로 올릴지도 모른다.
아마 문제는 이런게 아닐까 싶다. '오늘은' 을 쓰기 위해선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뉴스에 대한 검색-> 그 중에 하나를 취사 선택-> 맥락을 잡음 -> 아는데로 쓰다가 관계된 팩트들을 검색해서 확인-> 글 작성
즉 '기획'이라는게 필요한 작업이란거다. 노력은 덜 들긴 하지만 기사 쓰는거랑 거의 비슷한 경로를 통해서 작성된다는거지... 사실 여기 정신 쏟느지 기사 똑 바로 쓰는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이 정도 각오 못했었냐는 생각도 들고...아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 동안은 컴퓨터가 안 되니까..하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댓었는데 이젠 핑곗거리도 없고 솔직해 져야 하지 싶다.
결론적으로 당분간(언제까지가 될 지 모른다) 이 디렉토리는 중단하던지 아니면 부정기 적으로(주 2회 정도?) 진행하던지 해야 할 것 같다. 뭐가 맞는건지 모르겠다. 고견들 있으면 들려들 주시라.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오늘같이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진 적이 없는 것 같다.
1936년 10월 1일 스페인 왕당파 파시스트 반란군 지도자 프란시스 프랑코가 내전 와중에 왕당파 정부 수반 자리에 올랐다. 1936년 7월 17일 모로코 주둔 스페인군은 인민전선 정부에 반대하며 봉기를 선언했고 그 다음날 스페인 본토 각지에서도 군부의 반란이 연이었다. 프란시스 프랑코는 역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카나리아 제도에서 쿠테타를 선언하는 방송을 했다.
프랑코는 북아프리카 침공에 혁혁한 공훈을 세워 34세의 나이로 1926년 장군에 진급할 정도로 명성을 떨친 ‘나름대로’ 스페인에서 알아주는 장군이었다. 1931년 스페인 왕정이 무너지고 부르주아지와 사민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공화국이 선포되었을 때부터 군부의 젊은 야심가 프랑코를 중심으로한 쿠테타 가능성은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1936년 2월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의 연합인 인민전선이 집권하자 쿠테타에 대한 경고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 출신의 인민전선 수반인 마누엘 아자냐는 그 경고를 무시했고 군부내 파시스트들에 대한 숙청 제안도 묵살했다. 심지어 쿠테타가 일어난 후 스페인 카톨릭 교회와 대부분의 부르주아지들이 공개적으로 쿠테타 지지 선언을 했는데도 아자냐는 그들에게 유화 제스쳐를 보낸 반면 스스로 무장하여 파시스트들을 진압하려는 노동자들을 통제했다.(이거 참.. 4.19와 5.16 막간에 있었던 민주당 정부 생각나게 하지 않나?)
결국 인민들은 노동자들이 무장하면 정부의 권위에 금이 간다는 인민전선 정부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반군 병사들을 설득해 무장을 해제 시키기도 했고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발렌시아등 대도시의 파시스트 병기고를 습격 무기를 탈취했다. 공화국 군대가 파시스트 반란을 일으킨 반면 인민들이 그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 경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듯 하다. 프랑코를 중심으로 좀 더 이야기 해보자. 스페인 내전에서 인민전선 측이 다양한 정치세력으로 구성된 것과 마찬가지로 파시스트 측도 한지붕 여러 수십 가족으로 구성됐었다. 예컨대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추종하는 자들과 단순히 왕정복고를 꿈꾸는 복고주의자들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 극우들은 정파간의 이견을 접어두고 ‘반사회주의’라는 기치아래 프랑코를 중심으로 대동단결--;; 했던 것이다. 나는 독일, 이탈리아의 지원이나 트로츠키 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에 대한 스페인 공산당의 어이없는 탄압(심지어 내전이 한참이던 1937년 5월에 인민전선 정부군-스페인 공산당-은 아나키스트 계열인 전국노동자연합(CNT)이 파시스트로부터 사수하고 있던 바르셀로나 전화국을 공격하기도 했다.)에도 책임이 돌아가겠지만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스트가 승리한 원인의 많은 부분은 바로 우파의 ‘통 큰 단결ㅠㅠ’ 이 차지 하는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하여간에 내전을 승리로 이끈 프랑코는 2차대전이 벌어지자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한(게르니카 폭격을 생각해 보라구!) 파시스트 동지들인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뒷통수를 쳤다. 히틀러의 참전요구에 대해 파시스트 의용군을 동부전선(대소련 전선)에 참전시켰다가 바로 철수시키고 연합국 측에 철광석 같은 군수물자를 수출해 환심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의 반파시스트 정서 때문에 고립되기도 했으나 그를 구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냉전이다. 1953년 프랑코는 미군의 스페인 주둔을 허용하여 관계 개선을 했고 1955년에 파시스트 스페인은 유엔에 가입하기에 이른다. 이런 걸 보면 우파들은 대단하다. 정말 잘 뭉친다.
거의 40년간을 독재자로 군림한 프랑코는 천수를 누린 끝에 1975년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세간에서는 프랑코를 가장 행복한 독재자로 부른다고 한다--;; 프랑코는 죽기 전부터 철저히 사후를 대비했다. 축출된 왕가의 왕자를 후계자로 지목해놓았다. 뿐만 아니다. 그는 현재판 피라미드인 ‘사자의 계곡’ 에 묻혔는데 암반지역에 255m의 길이와 150m 높이의 대형터널을 뚫어서 만든 그 구조물은 1940년 착공해서 20년만에 완공됐다고 한다. 프랑코는 스페인 내전에서 전사한 5만의 파시스트 군인들과 함께 묻혔다. 이건 뭐 거의 진시황의 무덤에 부장된 수천기의 병마토용 수준이잖아....
가장 행복한 독재자 프랑코를 닮길 꿈꿨던 작자들은 꽤 된다. 칠레의 피노체트가 거의 근접할 뻔 했는데 피노체트는 면책특권을 박탈당했고 피노체트의 사법처리 수순을 밟기 위한 의료검진이 진행중이다. 88살이나 먹었으니 콩밥 먹어봤자 얼마나 먹겠으며 실질적으로 콩밥 먹을 가능성 보단 상징적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많지만 행복하게 눈 감은 독재자는 프랑코 하나로 족하다. 자연사 하기 전에 제발 피노체트에 대한 사법적 단죄가 내려지길 바랄 뿐이다.
Spanish Loyalist at the instead of Death(1936) : Robert Kapa (1913-1954)
어느 인민전선 병사의 죽음: 보도사진 집단 매그넘의 창시자 이며 전설적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를 유명하게 만든 사진이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글이 나올때면 거의 90퍼센트 자료사진으로 사용된다. 이 글도 그 90퍼센트에 속하나 보다--;;
1946년 9월 30일 이차대전 패전국 독일의 책임을 묻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11개월의 심리 끝에 선고공판이 이루어졌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는 45년 8월 8일 미,영, 소, 불의 대표가 조인한 런던 협정에 기반한 것이다. 그 이후 19개국이 추가로 협정에 참가했다. 45년 11월에 시작된 뉘른베르크 재판은 앞서 말한 런던 협정에 기반한 것인데 반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동경 전범 재판은 포츠담 선언 제10항 ‘우리들의 포로를 학대한 자를 포함한 일체의 전범에 대하여 엄중한 처벌을 가한다’ 에 기반한 것이다.
기소된 24명이 나치 고위관료와 장군들 가운데 12명이 사형을 선고받았고 3명은 종신형 6명은 10~20년의 유기형 그리고 3명은 무죄 방면을 선고받았다. 24명의 열혈 나찌스들에 대한 기소이유는 1. 평화에 관한 죄:국제조약과 협정을 위반하고 침략전쟁을 계획, 준비, 실행한 죄 2. 인도에 관한 죄: 대량 학살, 추방, 집단 살해 3. 전쟁범죄: 국제 전쟁법의 위반 4. 이상의 세가지 범죄행위를 계획, 공모한 죄 의 네가지이다. 10월 16일에 나치스의 외무장관을 지낸 폰 리벤트롭을 시작으로 첫 사형이 집행됐다. 교수대 계단은 13개. 독일 군부의 원수를 지냈던 빌헬름 카이텔은 교수형이 집행될 때 '독일을 위해'를 외치고 목이 달렸단다. 히틀러의 두뇌 괴링은 사형집행 직전에 자살했고...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만, 승자의 입장에서만 말해도 뉘른베르크 재판은 복잡하고 중첩된 의미를 지닌다. 독일의 패망이 확실했던 45년 4월 29일 제3제국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그 다음날 동반 자살해버렸다. 여기서부터 승전국들의 고민은 시작됐다. 특히 미국은 반인류적 죄행을 저지르는 독일과 일본을 응징한다면서(요즘도 이런 소리 많이 나오지...여전히 미국은 악랄한 독재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전쟁하고 있지않나) 참전했기 때문에 고민은 더했다. 결국 나치와 일제의 잔혹성에 대한 기록을 전하기 위한 명분으로 전범재판이 시작된 것이다.
주범 히틀러는 자살을 했고 또 하나의 주범 히로히토 천황은 살려주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재판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정책적 악행을 죄로 명시한 현행법도 부족했고 나치스들은 죄상을 총통에게로 떠넘겼다. 죄형법정주의 원칙과 불소급원칙을 적용할 경우 처벌할 만한 죄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뉘른베르크 법정은 명령에 따랐다 할 지라도 범죄의 궁극적 책임은 개인에게 존재함을 확인했고 홀로코스트 같은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선 국경과 공소시효가 없다는 전례를 남겼다. 결국 뉘른베르크 재판의 결과물은 유엔이나 다른 국제 기구들을 통해 성문화되고 전례로 남았다. 최근에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에 대한 특별 법정이 그 비근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98년 로마협약으로 국제형사재판소의 설립이 가시화되고 있지만 미국의 특례요청(미군의 작전 수행과정에 이루어진 행위는 형사재판소의 소추 대상이 아니어야 한다는 등. 우웩!)으로 지지부진한 상태다.
그런데 이런 것 외에도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해 생각해 볼 점은 정말 부지기수다. 전쟁 과정에 벌어진 연합군의 범죄(문화재 파괴, 인구밀집지역에 대한 무차별 폭격)은 승자의 정의라는 원칙에 의거해 전혀 언급되지 조차 않았고 소련인민에 대한 전쟁범죄들도 별다른 이슈로 떠오르지 못했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인권'이란 것이 미국 맘에 들지 않는 정부에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준 강력한 무기로 등장했다. 또한 수정주의 사관의 대두에 따라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나치스, 일제의 범죄에 대한 논란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아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 반인륜적 국가범죄에 대해 개개인의 책임을 묻는다고 해결이 안된다는 것까진 이해하겠는데 집단 전체의 광기나 구성원 모두의 책임으로 돌린다면 그건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 말자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게다가 이런건 극우파들이 악용하고 있다. 남경 대학살은 실제하지 않았다던가 전쟁시 성노예의 문제에 대해 일반적 성착취의 관점에서 접근해 물타기를 벌이고 있는 일본 후쇼사의 교과서나 산케이 신문을 보라!)
전후 일본에서 일억총참회론을 내세워 천황과 전범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던 것처럼 최근의 수정주의 역사학은 결국 아무의 책임도 묻지 못하고 허울 좋은 성찰만 강조하게 되는건 아닐런지? 고민과 공부가 더 필요한 지점인 것 같다.
처형당한 나치스 수뇌부들
1902년 9월 29일 프랑스의 문필가이자 소설가 에밀 졸라(1840-1902)가 영면했다. 그리고 에밀 졸라는 파리의 판테온에 묻혔다. 판테온은 정말 프랑스 사람 특유의 자존심이나 허풍에 걸맞는 공동묘지 이름이 아닌가? 만신전이라니... 사실 에밀 졸라는 한국 사람들에게 친숙한 소설가이다. 그의 소설을 한편도 안 읽어본 사람 조차 이 세상에서 제일 불효자로 에밀 졸라를 많이 기억하는 편이다. 비근한 예로는 세상에서 가장 마른 ‘비사이로 막가’ 일본의 최고 대머리 ‘도끼로 이마까라’ 등이 있다.
또한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는 염상섭과 더불어 에밀 졸라는 자연주의 소설가로 각인되어있다. 에밀 졸라는 발자크의 인간희극 시리즈에 맞서기 위해 루공 마카르 총서를 썼다. 루공 마카르 총서는 이십권으로 이루어진 연작(?)성격의 종합 소설이다. 루공과 마카르 두 집안의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통해 제2제정 프랑스 사회를 묘사한 작품이라고 하더라(물론 난 이걸 다 읽어보진 않았다.) 일찍이 맑스가 ‘서점의 잡다한 경제학 책을 뒤적이는 것보다 발자크 소설을 읽는 것이 경제학 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상찬할 정도로 발자크는 리얼리즘의 대명사로 불리지만 발자크의 인간희극은 자본주의 사회의 상승기를 그린 것이다. 이에 반해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는 그 이면을 그려낸 것이다. 철도와 해운의 발달 이면에 있는 이촌향도 현상, 도시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 노동쟁의등이 졸라의 소설에 잘 나타나 있다. 모파상 또한 졸라의 문하에서 컸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졸라의 작품으로는 제르미날(대혁명 이후 프랑스는 자체적으로 달력을 만들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달 이름들을 거부하고 알아서 만든 것이란다. 제르미날의 의미는 ‘싹트는 달’이다.) 이 있다. 기회가 되면 다들 읽어보시길...제르미날에서 그려지는 광부들은 굳건한 의지와 도덕적 우월성을 자랑하는 순결한 노동전사들이 아니다. 온갖 패덕과 성적 문란상을 저지르고 있으며 부르주아지들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지저분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노조는 결성되고 그들은 일어서서 맞선다. 정말 싹트는 달인게다(이렇게 써놓고 보니 그렇고 그런 뻔한 소설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물론 인터내셔널 깃발이 등장하는 장면은 좀 뜬금없긴 하다) 158분짜리 대작으로 제작된 영화 ‘제르미날’도 참으로 볼만한 영화다. 프랑스의 안성기 쯤 되는 제라르 드 빠르디유가 나온다.
마농의 샘의 감독이기도 한 클로드 베리가 역시 감독을 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클로드 베리의 아버지는 평생을 직공으로 살다간 노동자였다고 하고 베리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노동계급의 비애와 소망을 동시에 엿보았단다. 광부 마외 역의 제라르 드 빠르디유와 그의 아내 역을 맡은 미유 미유의 아버지들도 노동자였고 그들은 이 영화를 통해 부모를 추모했단다. 주인공 에티엔느 역의 르노 도 프랑스에선 대강 안치환 쯤 된다나?
영화를 보면 참 가슴 찡한 장면들이 많다. 과묵한 가부장 노동자에서 전사로 변신한 마외(제라르 드 파르디유)는 파업 대열을 막아선 군인들 앞에서 외친다. “쏴바라. 어서 쏴봐! 이 개자식들아” 파업과 갱도 붕괴 과정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었으면서도 조업재개에 끝까지 반대하던 마외의 아내 마유드(미유 미유)는 사십이 넘은 나이에 수백미터 지하 갱도로 다시 내려가면서 “남편도 없다, 자식도 없다, 희망도 없다,그러나 살기 위해 나는 내려간다”고 되뇌인다. 약간 유치하지만 영화로 보면 감동스러운 에티엔의 발언 “파업은 실패다. 그러나 빵을 쥐고 주인행세를 하는 몇 안되는 무리들과 수천만의 노동자들이 대면할 그날은 반드시 온다”ㅠㅠ
이 영화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가 몇가지 더 있다. 헐리우드 영화가 그야말로 몰아치던 94년 미국영화에 대응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에서는 당시 수백만 달러의 예산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노동계, 문화계, 좌파 정당들이 발 벗고 나서 이 영화를 홍보했었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자면 예전에 민주노총 공식 후원 영화가 하나 있긴 했다. ‘생과부 위자료 청구 소송’ 이거 연극은 정말 재밌었는데 영화로는 완전 쉣이었지. 안성기, 문성근, 황신혜, 심혜진등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했지만)
내 기억에 이 영화는 한국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주라기 공원’이랑 정면 대결했었다. 무모하나 용감한 배급이었는데 결과는 말안해도 알겠지 ㅠㅠ 보름만에 극장에서 내려왔다.
에밀 졸라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드레퓌스 사건을 빼놓을 수 없겠지만 그건 다음기회로...
나세르는 아랍 민족주의의 상징적 인물이다. 사담 후세인 조차 제2의 나세르를 꿈꿨었고 리비아의 최고지도자 카다피의 벤치마킹 대상 또한 나세르이다. 뿐만 아니라 제3세계 국가들에 영향을 매우 크게 끼친바 심지어 박정희 조차도 나세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나세르는 이집트 사관학교 출신의 장교로서 48년 1차 중동전쟁 이후 국내변혁의 필요성을 의식하여 비밀조직 자유장교단을 결성하여 중심 역할을 맡았다. 52년 7월 자유장교단은 마침내 민족주의적 쿠테타를 일으켰다.
이 쿠테타로 인해 이집트의 친영, 친미, 반민중적 무하마드 알리 왕조(마지막 왕은 파루크)는 종지부를 찍었다. 또한 이 쿠테타로 인해 2,300년만에 이집트 인에 의한(물론 이집트 인의 실체가 머냐고 물으신다면 할말은 없다--;;) 통합적 민족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세르의 쿠테타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아랍’ 이라는 코드의 제기였다. 이는 제국주의자들하고 짝짜꿍이 맞는 사우디 왕조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나세르는 영국, 프랑스 이후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복잡하게 얽힌기도 하고 마음대로 국경선이 그어져버린 아랍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물론 이것이 성공했다면 역시 제국주의적 성격을 띄게 되었을런지도 모르지만)
나세르는 시리아와 예멘과 함께 아랍연합을 만들기도 했다. 1956년 수에즈 운하에 대한 국유화를 전격적으로 선언했을 때만 해도 나세르는 전 아랍의 영웅이었다. 영국, 프랑스에 의해 한세기 동안 지배당한 수에즈 운하(이 가치를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와 아랍의 진정한 독립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이집트가 다른 국가들 위에 군림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시리아가 61년 탈퇴하고 즉각 아랍연합은 붕괴하고 말았다.
나세르는 50년대 말부터 계획경제를 실시하고 이집트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띄기 시작했다. 61년에는 사회주의 선언을 하고 사기업을 국유화하기 까지 했다. 당연한 결과로 미국-이스라엘이라는 축과 대립각을 격하게 세우기 시작했고 수차례의 중동전쟁에서 연전연패ㅠㅠ 했으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패배가 연속될수록 아랍권에서 나세르의 인기는 높아가기만 했다.
그러나 연속된 패전은 역시 경제적, 정치적 부담을 낳는 법. 67년의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불과 6일(!)만에 패전하고 당시 이집트 영토였던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엘에게 점령되기도 했다. 결국 군사적 해결로 돌파구를 찾지 못한 나세르는 정치적, 외교적 해결방안을 찾기 시작했고 70년 6월에는 미국의 중동평화안을 수락했다.
이 와중에 요르단에서 일어난 요르단 정규군과 PLO게릴라 간의 충돌사건을 수습하려다가 과로로 죽고 말았다. 일설에 따르면 요르단 국왕을 독살하고자 홍차에 독을 탔는데 실수로 자신이 그 홍차를 마셔서 사망했다고도 한다.(근데 난 이건 못믿겠다. 무슨 삼국지 연의도 아니고 말야..)
나세르의 후계자는 혁명동지이자 부통령이었던 안와르 사다트 이다. 사다트는 나세르의 노선을 계승할 것을 대내외에 천명하면서 냉전구도에서 미국의 편에 섰다. 78년에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미국 대통령 카터와 회담을 하기도 하고 81년에는 이스라엘을 방문하기도 했다. 점입가경으로 이집트는 아랍동맹에서 제명까지 당했다. 아랍권내에서 이집트의 지도적 위치는 상실 당했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런 걸 만회하기 위해 사다트는 더 강한 친미적 경제, 외교 정책을 펼쳤고 외자도입과 투자 증대정책을 펼쳤으나 이집트는 인플레이션, 주거, 교통, 실업 문제에 점점 더 시달리게 됐다. 결국 사다트는 82년 암살당하고 말았다. 사다트와 나세르에 얽힌 재밌는 일화가 있다. 대통령 전용차를 타고 카이로 시내를 달리고 있던 사다트가 교차로를 만났다고 한다. 운전사가 ‘각하 어디로 갈까요’ 라고 물으니 사다트는 ‘전임 나세르 대통령은 어떻게 했나’ 고 되물었단다. 운전사는 ‘나세르 대통령께선 좌회전 하셨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사다트 왈 ‘그러면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 하게나’ 라고 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소싯적에 아버지가 사온 사다트 자서전-중앙일보사 간-을 읽었는데 그 땐 사다트가 정말 훌륭한 사람이고 나세르는 이상한 독재자 인줄 알았었다. 돌이켜 보니 참 열 받는다--;;)
1946년 제1차 국제통화기금(IMF)가 워싱턴에서 개최됐다.
예전에는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이름이나 들어봤던 IMF, IBRD, GATT등등 이지만 외환위기 이후엔 이런 국제기관이나 기구들이 한층 가깝게 느껴지는게 사실이다^^ 이런 것도 다 우리나라가 OECD회원국에 걸맞는 선진국이라 그런건가 싶다.
IMF가 우리 삶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지 말해주는 이야기들이 몇가지 있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애들이 울면 IMF가 잡아간다고 겁주는 엄마들이 있었을 정도이며 자랑스러운 신지식인 심형래가 감독하고 영구아트무비에서 제작한 한국 SF의 신기원을 연 작품 '용가리'에서 우리의 호프 용개뤼(영화를 보면 용개뤼로 발음 난다)가 불을 뿜으며 때려부수는 건물을 보면 큼지막하게 IMF라고 간판을 달고 있기까지 하다--;; 심지어 톰 크루즈 주연의 Mission Impossible에서 톰 크루즈를 비롯한 비밀 공작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비밀 기관의 이름도 IMF다.
하여튼 간에 IMF는 브래턴 우즈 체제의 산물이다. 1944년 이차세계대전의 승리가 눈 앞에 보이게 되자 케인즈등의 주창에 의해 연합국측 44개국 대표가 미국 브래턴 우즈에 모여 기축통화로서의 은( silver)문제, 국제결제은행 문제들을 협의하다가 협정을 맺고 국제통화기금(IMF)와 세계은행(World Bank) 설치를 합의했다. 뒤이어 GATT와 국제 금융공사 또한 브래턴 우즈 협정을 통해 설립되었다.
사실 케인즈가 꿈꾼 IMF 는 오늘날 미국의 앞잡이 역할을 하는 IMF 와는 좀 달랐다. 물론 케인즈가 꿈꾼데로 그 당시에 IMF를 만든 것도 아니지만...하여튼 케인즈는 브래턴 우즈 회의가 끝나고 4개월이 지나서 사망하는데 브래턴 우즈 회의에서 케인즈는 마지막 정열을 다 쏟았다고 전해진다. 1930년대 대공황을 비롯한 경제적 혼란이 결국 세계대전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경제학자 뿐 아니라 정치가들도 그때는 깨달았고 케인즈는 국제금융청산연합을 제안했고 그것의 결과물이 브래턴우즈 체제인것이다.
자본주의의 영속을 위해서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냐는 입장에서 만든 것인데...케인즈는 브래턴 우즈 체제 내에서 미국의 입김을 최소화 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다고 한다. 물론 대영제국의 영광을 보존하고자 하는 속셈도 있었겠지만...그래서 IMF도 워싱턴이 아닌 딴 곳에 설치하고자 그렇게 애를 썼다고 하건만 이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는 그 즈음에 이미 미국은 슈퍼파워로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케인즈에 비해 네임밸류에서 한 참 떨어지는 미국의 경제학자 화이트가 내어놓은 안을 중심으로 브래턴 우즈 체제는 성립되었다.케인즈는 외환결제의 중심기관을 통한 국제통화를 창출하여 미국과 영국이 함께 관리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화이트는 미국이 주축이 되어 기관이 아닌 기금을 설립하여 달러화를 중심으로 미국이 관리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 외에 케인즈의 초점은 외환시세의 자유화였는데 반해 화이트안은 고정환율 제도를 중심으로 한 외환시세의 안정에 초점을 두었던 것이다.
케인즈고 화이트고 간에..이 체제는 겨우 이십몇년 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결국 60년대 이후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 증대와 화폐발행증가로 인해 유동성 가치를 유지하기 힘들었던 미국 재무성은 금거래를 막기 위해 (브래턴 우즈체제의 핵심적 특징의 하나는 달러의 금태환이다.(당시엔 1온스당 35$, 한마디로 금들고 오면 달러로 바꿔주고 달러 들고 가면 금으로 바꿔준다는 것)금시장 개입, 한시적인 이중 금가격제(중앙은행 거래가와 실제 시장 거래가를 이중으로 맞춘것)을 적용한 끝에 마침내 전 세계를 상대로 배를 째버렸다.
1970년 71년 2년간 미국의 국제수지는 대폭으로 확대됐고 이에 따라 전세계에 달러공급은 과잉 됏으며 금부족 현상이 당연하게 야기 됐다. 금가격 폭등, 달러화의 신뢰도 붕괴에 시달린 닉슨은 1971년 8월 금태환 정지 명령을 내렸고 브래튼 우즈 체제는 붕괴하게 된 것이고 킹스턴 체제가 출범하게 되었다. 만일 다른 나라 통화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지고 국제적 결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면 바로 그 나라는 작살이 났을 것이며 IMF관리 체제에 돌입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미국을 건드릴 수 있으랴? 달러를 국제통화수단으로 쓰기로 암묵적으로 약속한 바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전세계가 벌벌 떨면서 미국 재무성 국채를 매입해야 할 지경이니...똥배짱 부리는 빚쟁이의 대표적 예가 아닐수 없는 것이다.
IMF가 자유무역 자체도 똑바로 뒷받침 하지 못하고 미국 재무성 출장소 정도의 역할 밖에 못하고 있는 지경이지만 전세계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 무역과 투자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브래턴 우즈 시스템의 정신은 대강 지금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이 경제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나라를 찾기는 힘들다(북한 정도가 아마 자유롭겠지--;;) 그러나 이 시스템 그리고 이 시스템이 금과 옥조처럼 받드는 비교우위라 지상 최고의 법칙 하에서 세계 경제는 점점 더 불평등하게 고착되고 있다.(구구한 설명을 여기서 할 필요는 없지 싶다) 브래턴 우즈 시스템이 낳은 세 자녀 IMF, World Bank, WTO가 강요하는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는 가난한 나라는 더욱 가난하게, 지구환경은 더욱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몰아 붙이고 있다.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낸 스티글리츠 같은 미국 주류경제학자들도 인정하지 않나? 정말 이대로 가면 다 망한다. 제발 정신 좀 차리자!!
1974년 9월 26 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결성됐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던 카톨릭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유신헌법 무효를 선언하는 양심선언 이후 구속되자 그해 9월 명동성당에서 김승훈, 함세웅, 김병상등 300여명의 젊은 사제들이 모여 정의구현 사제단을 결성한 것이다.
한국의 절차적 민주주의는 기독교 성직자들 특히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에 빚진바가 많다. 사제단은 76년 3월 1일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하며 반독재 운동에 앞장섰다. 김지하 구명 운동, 인혁당 진상규명운동등에 나서며 때때로 로마교황청이라는 우산을 쓰면서 박정희 독재정권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80년대 들어선 은폐된 광주항쟁의 진실을 밝히는데 애썼으며 특히 87년에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축소조작 은폐된 것을 폭로하여 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독재정권에 맞서 십자가를 들고 조용히 서 계시던 사제들과 수녀들의 모습을 보고선 무신론자들이라 할지라도 순간적으로 가슴이 찡해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1972년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해방신학'을 출간한 이래 라틴아메리카의 신부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한 '프락시스'를 위해 때로는 기관총을 들기도 했다. 프레이리의 교육학과 체 게바라의 소총 그리고 신부들의 해방신학이 남미에서는 해방을 위한 세로운 삼위일체로 불릴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정의구현 사제단은 좀 모자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 싶다. 그러나 대한민국 땅에서 지난 삼십년 동안 어느 조직이 그렇게 지속적으로 꺾이지 않은체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한 목소리를 내왔겠나?
물론 정의구현 사제단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은 카톨릭 교회 특유의 수직적 구조를 혁파해내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못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신부들이 신학적으로 그들의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증명해냈던 반면에 한국의 신부들은 학문적이나 철학적 토대를 쌓아내지 못했다. 단지 정의감 만으로 수직적이고 보수적인 카톨릭 교회의 구조와 기득권에 구멍을 낼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신교와 유기적 연결 고리를 가지지 못했다. 물론 권호경등 실천, 노동사목을 하는 개신교 목사, 전도사들과 카톨릭 노동사목이 연대활동들을 펼치기는 했지만 장공 김재준으로부터 시작된 기장(기독교 장로회)의 학문적 실천적 성과들과 상호 침투하지 못한 것 또한 큰 문제점으로 지적 될 수 있을 것이다.(이것은 기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장공 김재준 이래 서남동, 안병무, 문익환등 실천과 이론을 겸비한 개신교 목사들이나 한신을 중심으로한 개신교계의 실천과 정의구현사제단은 그냥 별개로 흘러온게 아닌가 싶다는거다.
그러나 이런 저런 췌언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정의구현 사제단은 한국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참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보다 적적한 표현이 있을까) 가장 필요할 때 정의를 구현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02년부터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대표를 맡고 있는 부안천주교회 문규현 신부와 형인 문정현 신부는 부안 방폐장 반대 싸움에서 항상 앞자리에 서있었다. 지금 용산 미군들이 옮겨간다는 평택에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이야기하며 미군기지를 거부하는 평택 민중들과 두 문 신부는 항상 함께 하고 있다. 노조와 농민들과 신부님들이 손을 잡고 평화를 이야기 하는 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파병반대 국민행동 내의 이른바 메이저 시민 단체들이 현정권에 대해 쓴소리를 하기를 주저하고 자신들 머릿속으로 만든 거대 개혁 전선에 얽매여 있을 때 과감하게 파병 강행이면 정권 퇴진이라며 현 정권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 민중운동 진영에 힘을 실어준 단체 역시 정의구현사제단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얼마전 국가보안법 존치 입장을 밝혔을 때 정의구현 사제단 평신부께서 자신의 신분을 무릎쓰고 추기경에게 정면으로 맞서 쓴소리를 내어놓았다. 이런 실천들 앞에 창백한 이론들은 때론 설자리를 잃고 만다.
2001년 9월 25일 항일투사이자 혁명가인면서 또한 소설가인 김학철이 85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20세기 한반도에서 태어난 인물 가운데. 그리고 요절하지 않고 천수를 누린 인물가운데 김학철(본명 홍성걸) 보다 더 당당한 삶을 살아낸 사람을 찾기는 흔치 않을 것이다. 김학철의 평생 이력을 간략하게 짚어보겠다.
원산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남-보성고보 재학중 중국으로 망명- 약산 김원봉의 휘하로 상해에서 의열단 활동-중국공산당 가입-황포 군관학교 입학- 황포군관학교 졸업후 국민당군 장교- 팔로군 조선의용대 군관 활동- 태항산 전투에 분대장으로 참가 부상 입고 일본군에 포로로 잡힘- 나가사키 형무소 투옥, 다리 절단- 해방과 더불어 출옥, 소설가로 생활 시작- 조선정판사 사건 이후 월북- 연변 조선족 자치주 정착- 인민공사, 대약진 운동 비판하는 소설 출간으로 투옥- 문화혁명기에 다시 십년간 투옥, 당적 박탈- 모택동 사망 이후 당권회복
정률성과 정설송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http://blog.jinbo.net/Profintern/?cid=1&pid=16) 김학철을 약간 언급한 적 이 있었다. 그 때 꼭 독립적으로 다시 다루겠다고 약속했는데 오늘 기회가 왔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책을 하나라도 꼭 읽기를 권하고 싶다. 한 권만 권해준자면 (최후의 분대장, 문학과 지성사 간)
김학철은 무슨 뛰어난 혁명이론을 내어놓은 사람도 아니고 조직 활동에서 거대한 성과를 거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평생을 인민과 역사 그리고 자신 앞에 당당하게 살아간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해방 이후 한 때 혁명 영웅 칭호를 받았건만 역시 항일, 중국공산당 동지 출신으로 이북의 최초 공군참모총장이던 매제는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 당시 처형 당하고 여동생 역시 노동수용소 생활... 그 자신은 띵링의 사사를 받을 정도고 중국 건국 주역들과 허물없는 사이였을 정도지만 마오의 극좌적 노선과 일인지배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이차에 걸쳐 투옥당하고 인민재판을 받았다. 그 재판을 회고하는 글을 읽어보면 눈물이 날 정도다. 인민학습당을 가득 채운 수천명의 군중 앞에서 친일분자, 우익분자로 비판받으면서 맑스, 레닌주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당당하게 토해내며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다리 하나 없는 노혁명가의 모습을 보고 누구의 눈과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있으랴?
남긴 글을 보면 이 노혁명가 조차도 가슴 아린 적이 한 번 있었다고 한다. 반당분자로 몰리고 당적을 박탈당했을 때 인민학교를 다니던 외아들이 학교에 갔다가 소년단의 상징인 스카프를 뺐기고 울면서 돌아왔다고 한다. 반동의 자식은 소년단에 가입할 자격이 없다고 ㅠㅠ
김학철은 곧은 필봉으로 석정 윤세주, 정률성, 호일화(이상조), 김학무를 비롯한 조선의용대를 우리의 역사로 남겨주었다. 그렇다고 김학철의 글들의 재미없고 딱딱한건 절대 아니다. 시인 고은은 김학철을 "벽초 홍명희 이래로 우리 민족어를 진정으로 계승했으며 가장 신명나는 문학을 이루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 한가지를 언급하자면 김학철이 우리에게 소개되는데 가장 공헌을 한 것은 '노태우 정권'이다 --;; 1989년 1회 세계한민족 체육대회에 공식 초청 받음으로 43년 만에 서울 땅을 밟았다. 아마 그 당시의 북방정책등과 관련이 있는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김학철은 94년 KBS 해외동포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이런거 보면 노태우나 김영삼 같은 대통령들도 가끔 미친척 하고 기특한 짓을 하긴 했다)
내 한 때 김학철을 너무나 존경(혹은 흠모)한 나머지 나도 저렇게 살았으면 한 적이 있었는데 포기했다--;; 그 이유가 뭐냐면 어릴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나서 김학철의 어머니께서 '너는 아버지도 없으니 술 담배 하면 후레자식이라고 욕먹는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김학철은 ' 내가 항일운동, 탄압받는 작가 생활을 해서 불효를 할 지언정 어머니의 저 말은 지켜야 겠다'고 생각해서 죽을 때 까지 술,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았단다. 심지어 항일 무장 투쟁기간에도--;;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가고 쓰러진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
-김학철 작사 류신 작곡 조선의용대 추도가
2001년 9월 24일 팔레스타인 출신 비교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백혈병으로 투병 끝에 6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영국의 식민지이던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다.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집중 이주, 팔레스타인 인들과 갈등을 일으키던 1947년 가족들과 함께 이집트 카이로로 이주했다. 상류층이었던 부모 덕택에 십대후반에 미국으로 이주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에서 공부했으며 그 이후 평생을 미국 시민권자로 살았다. 몇 년전에 출간된 에드워드 사이드의 자서전 제목은 Out of place 이다.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카이로에서 성장하면서 부유한 부모 덕택에 탈아랍식 정통 영국 식민 교육을 받은데다가 십대후반부터는 미국 동부에서 교육을 받은 사이드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팔레스타인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그 정체성이 바로 1978년 오리엔털리즘의 출간으로 연결된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20세기 후반 문화, 정치, 사회 모든 분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중에 한 명이다. 그의 책 '오리엔털리즘'과 그 개념은 너무나 큰 영향을 미쳤다. 오리엔털리즘자체에 대한 설명이나 언급은 다음 기회로 돌리겠다. 그러나 오리엔털리즘이 얼마나 대중화 된 개념이냐면 심지어" 올 가을의 패션트렌드는 과감한 오리엔털리즘 풍의 실버체인과 가죽 재킷의 미스매치 불라불라" 하는 식으로 여성지의 패션란에서도 언급될 정도다. 그리고 '오리엔털리즘' 한국어 번역판은 영남대 박홍규 교수의 성실한 작업에 힘입어 참으로 괜찮은 역서중의 하나다.오리엔털리즘의 출간 이후, 컬럼비아 대학 교수로서 에드워드 사이드는 학문으로서만이 아니라 항상 실천하는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하워드 진, 노암 촘스키와 더불어 미국의 삼대 양심(?)적 지식인으로 꼽힐 정도였으니..
참 지난 2000년 에드워드 사이드는 심각하다면 심각할 수 있는 정치적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단체 관광객의 일원으로 레바논-이스라엘 접경지역을 돌아보던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스라엘 경비 초소에 돌팔매질을 했고 그 광경이 이스라엘 측 CCTV에 찍혔던 것이다. 당연히 이스라엘 측은 대대적으로 그 장면을 선전했고 팔레스타인 인들의 폭력성을 증명하는 행위라고 입에 게거품들을 물었다.
당시 사이드는 사진에 찍힌 사람이 자신임을 인정했으며 '레바논 접경 지역에서 이스라엘 군의 점령이 끝난 것을 기뻐한 나머지 환희의 제츠처로서 투석을 했다'며 또한 '철책선에 도착하기전 과거 점령지에서 발생한 인권유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보았다. 지난 35년간 정의와 평화에 반해 행해졌던 만행이 자신이 던진 돌의 무게에 비해 너무 무겁다'며 기회가 생기면 또 돌을 던지겠노라고--;; 당당히 밝혔다.
당시 미 주류 유태계에서는 난리가 났고 컬럼비아 대학에도 압력이 갔다고 한다. 그러나 석좌교수 에드워드 사이드의 무게 또한 만만치 않았던 법 컬럼비아에서는 그 압력들에 대해 가비얍게 일축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회가 닿으면 '평행과 역설'이라는 책을 일독해보길 권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와 대표적 유태계 음악인 다니엘 바렌보임의 대화를 묶어낸 책이다. 바렌보임은 나찌의 상징이자 이스라엘에서는 터부시 되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바그너 작)을 01년 이스라엘에서 최초로 연주해서 화제를 일으킨 적이 있는데 이 책에서도 역시 리하르트 바그너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갑론을박을 벌이는데 그 대화들이 너무나 아름답다. 물론 오슬로 협정(지난 9월 13일자 오늘은 -http://blog.jinbo.net/Profintern/?cid=2&pid=49 참고)을 두고선 날 선 대화들이 오고가기도 하더라.
1937년 9월 23일 장개석이 2차 국공합작과 공산당 합법화를 선언했다. 2만 5천리 대장정을 겨우 마치고 연안에서 허덕이고 있던 중국공산당으로선 항일전선에 복무하고 또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장개석이 왜 갑자기 국공합작을 선언했을까? 중국공산당의 영웅적 투쟁에 감복해서? 아니면 항일의 대의 앞에 뭉쳐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어서? 둘다 아니고 실은 장학량이라는 인물이 일으킨 서안사변 때문이다. 삼년전에 101세를 일기로 하와이에서 영면한 장학량은 봉천 군벌 장작림의 아들이다. 흔히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을 쓰는데 장학량이야 말로 은수저와 은젓가락을 한꺼번에 물고 태어난 인물이다. 동북지역을 장악한 군벌 아들로 태어난 덕택에 아버지가 죽자마자 동북지역과 수십만의 대군을 한손에 넣을 수 있었다.
주색잡기와 아편으로 소일하던 장학량은 아버지가 죽고 나선 백팔십도 달라졌다고 한다. 일본 육참본부 대본영의 공작으로 만주철도에서 아버지가 폭사하자 장하량은 일본과 가까웠던 아버지와 달리 항일의지에 불타게 된다. 그래서 자기 휘하 병력과 영토를 그대로 국민당에 헌납하고 국민당군 동북 사령관의 자리에 취임했다. 그런데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는 일본하고 싸우는데는 별 관심없고 현상유지 하는 수준에 그치며 십여년동안 공산당 때려잡는 일에만 열중하는게 아닌가? 열받은 장학량은 장개석을 서안으로 불러 잔치를 벌이다가 그냥 감금해버렸다. 공산당의 합법화와 국공합작을 안 받아 들이면 장개석도 죽이고 자기도 같이 죽을 것이며 받아들이면 그대로 풀어서 총통직과 총사령관직을 계속 맡도로 하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결국 장개석은 장학량의 요구를 받아였다. 장개석도 그나마 대인의 풍모가 엿보이는 것이 서안을 빠져나온 후에도 자기 말을 뒤짚지 않고 그대로 실행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홍군(중국공산당군)은 국민당군 팔로군으로 재편된다. 팔로군 팔로군 말은 많이 들어봤겠지만 정확한 명칭은 국민당군 팔로군이다.( 전에 정률성 이야기를 하면서 http://blog.jinbo.net/Profintern/?cid=1&pid=15 팔로군 행진곡을 한 번 언급한적이 있다. 다시 찾아가보던지 아니면 기억해보라. )
하여튼 국공합작을 통해 중국인민은 항일전선에서 일치되어 싸우게 된다. 참 서안사변이 잠잠해진 후 장개석은 장학량을 재판에 회부하고 49년 대만으로 도망치면서 데려갔다.(죽이거나 육체적 폭력을 가한적이 없이 장학량을 데리고 갔다. 대만 데리고 가선 40년동안 가택연금을 시켰고...왜 그랬을까? 두고 두고 괴롭힐 심산이었을까?) 1990년대에 들면서 고령임을 감안해 대만 정부는 장학량이 자기 맘대로 살 수 있게 했고 장학량은 하와이로 이주해서 십년간 살다 죽었다.
혁명동지를 제외하곤 중화인민공화국 건설과 중국공산당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장학량이 죽었을 때 당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은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장선생의 서거 소식에 비통한 심정을 금치 못하겠으며 중국 공산당과 인민을 대표해 삼가 애도한다. 장 선생은 65년전 애국의 심정으로 서안사변을 일으켜 민족 존망의 위기에서 중국을 구했다.” 대만 총통 첸수이벤 조차도 “공과를 떠나 장선생은 중화민국(대만)의 자산이었다” 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1949년 내전에서 장개석이 공산당에게 패배해 광활한 대륙을 뒤로한 채 배 타고 대만으로 도망칠 때 장학량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혹시 전해지지는 않지만 귀싸대기라도 한 대 때린건 아닐까?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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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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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페이스를 찾게 되지 않을까요? 부끄럽긴요..여지껏 한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언젠가는 보다 적어도 얼마동안 몇회로 정해놓는게 좋지 않을까요?
조금씩이라도 이어갈 수 있도록.힘내요.
그리고 이 컨텐츠는 잘 모아두면 요긴할 것 이라는 확신이 들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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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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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이게 일이 되면 가능할텐데..하는 생각이 드네요. 페이스(매일 매일 쓰기)를 찾는게 가능할까 싶네요. 역시 주 2회 정도로 못을 박아야 그나마 강박이 되지 싶네요.(근데 공개적으론 안 박을랍니다.--;;)부가 정보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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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관념이 들 정도라면 독자로서의 강한 압박이 불가능하겠군요... 암튼 생각 나실 때, 글빨이 돌아오실 때 더 멋진 글 부탁 해요~~!!(이덕화 버전)부가 정보
mo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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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관념이 든다는게 아니라 달군 말처럼 얼마동안 몇회로 정해놓는게 저를 강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제가 되겠다는 뜻이었어요--;; 강박관념이라니까 뭔가 무섭게 느껴지는군요.부가 정보
e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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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라고 말하면 좀 섭섭하겠지? 그동안 수고했네. 하지만 나도 뭔가 실마리가 마련돼서 계속 볼 수 있음 좋겄구만... 뉴저로 가입한 나랑 번갈아서 쓸까나? ㅎㅎㅎ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