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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2/19
    소련의 붉은 파시즘 - 라이히 자료 인용.
    자유인
  2. 2012/01/04
    비주류 경제이론 동향- 신희영
    자유인

소련의 붉은 파시즘 - 라이히 자료 인용.

 

[레프트119 소개글]
『레프트119 준비위 결성을 위한 모임』(레프트119)은 정파·소속·입장의 차이를 넘어 변혁활동가들의 정신건강에 대한 문제점을 함께 깊이 고민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주체를 건설 중에 있다. 

레프트119는 그간 활동가들의 경제적·심리적 요인에 기인한 트라우마 등 질환과 이와 유관한 죽음이 기본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에 기인한 것이지만, 특히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파시즘의 자장(磁場) 아래 놓인 활동가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 작용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레프트119는 파시즘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이룬 빌헬름 라이히 자료를 통해 이에 대한 해법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레프트119 운영위원 오세철 선생은 좌파진영에서는 매우 드물게 사회심리학을 공부한 특별한 이력의 사회학자이며 독보적인 빌헬름 라이히 연구가로, 지금도 변혁운동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혁명가이다. 다음은 지난 시기 소련에서의 파시즘 현상을 연구한 오세철 선생의 글 『소련에서의 계급의식과 붉은 파시즘』전문이다. 



[레프트119 온라인 강좌]
소련에서의 계급의식과 붉은 파시즘 

오세철


  이 연재 글을 꿰뚫는 문제의식은 세계혁명의 실패가 자본주의의 객관적 모순의 불충분한 축적뿐만 아니라 혁명지도자들과 혁명주체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체적 조건의 불충분성에도 있음을 강조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계급의식의 형성을 가로막는 객관적 조건이 자본주의의 가치법칙 때문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억압의 역사적 구조로서의 계급무의식에도 그 근본적 원인이 있다는 점이다. 

<연재1>은 이를 뒷받침하는 맑스주의 이론의 총체적 점검을 통하여 압축적으로 정리하였고, <연재2>는 독일 파시즘의 분석을 통해 노동자 대중의 억압 구조와 그 결과물로서 반동적 파시즘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연재3>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어떻게 세계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반혁명인 스탈린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는가를 분석하는 데 있다. 이를 나는 「붉은 파시즘」으로 부르기로 한다. <연재4>는 마오주의를, <연재5>는 제3세계 민중주의를, <연재6>은 김일성주의를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연재7>이후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계급의식과 파시즘의 반혁명 구조를 더 구체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물질적 필요성으로서의 공산주의 운동이 실패하고 반혁명으로 전복된 역사를 올바로 규명하지 않고서는 세계혁명의 미래는 암담하기 때문이다.


1. 볼셰비즘과 계급의식, 그리고 붉은 파시즘

러시아 혁명이 프롤레타리아혁명이었다는 데는 혁명적 맑스주의 진영 내에 큰 이견이 없다. 물론 평의회공산주의 내에서는 부르주아 혁명으로 이해하는 경향들이 있기는 하다. 소련은 무엇이었는가의 객관적 분석에서는 자본주의로 보는 입장이 타락한 노동자 국가론이나 관료적 집산주의론보다는 우세하다. 그러나 스탈린주의로의 반혁명이 왜 형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볼셰비즘과 레닌주의와의 연속성을 파헤치는 논거는 적다. 이는 뜨거운 감자, 아킬레스 힘줄이기 때문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1년을 깊은 애정을 가지고 기록한 빅토르 세르쥬는 “모든 스탈린주의 세균은 처음부터 볼셰비즘에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소비에트 정권의 노동계급 기반이 약해지는 과정을 솔직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노동계급 속에서 소비에트 정부의 인기가 떨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소비에트 정부의 생존을 위해 헌신했고, 그 정부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계속 옹호했다. 

그것이 러시아 노동계급 다수의 능동적 지지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국가를 이룬 수천 명의 볼셰비키 핵심활동가들이 보여준 맑스주의 시각과 혁명적 단호함이라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붉은 파시즘」이라는 말은 오토 륄레가 나치를 「갈색 파시즘」이라 칭한 것을 대칭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개념은 라이히도 사용했고 특히 스탈린주의와 동의어가 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대중의 심리구조 문제가 아니라 혁명 이후 몇 년 사이의 역사적 과정에서 반혁명적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 문제였다. 

보기를 들면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볼셰비키 당-국가의 폭력, 제국주의 국가와의 조약(라팔로 조약), 사적자본과 해외자본에의 러시아 경제 개방, 적색 테러 등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반혁명적 사건을 언급하기 전에 혁명 이후 몇 달 안에 이루어진 소비에트의 제도적 성과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 

1917년 11월 10일 신분제 폐지, 12월 11일 철도노동자 노동시간 1일 8시간 실시, 12월 16일 군대 계급 폐지, 12월 17일 1,886개 전략회사 몰수, 12월 18일 종교의식을 하지 않는 결혼제도 실시, 12월 19일 낙태법 제정, 12월 21일 러시아어 철자 간소화, 12월 29일 이자 지급과 채권 배당 지급 중단, 12월 31일 모자보호 연구소 개소, 1918년 1월 3일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공화국 선포, 사회주의 적군의 창설을 위한 법령 선포 등이 그것이다.

  위와 같은 법적, 제도적인 혁명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노동계급은 소비에트 생산의 주체, 권력의 주체였는가? 제국주의에의 포위, 독일 혁명의 실패 같은 외적 조건이나 내전과 같은 내부적 조건 때문이었다는 불가피론이 아닌 노동계급의 소외에 대한 진지한 분석과 성찰이 있었는가에 대해 레닌을 포함한 볼셰비키 지도자들 누구도 그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사무엘 파버는 레닌과 볼셰비키당 주류 누구도 사회주의 성취전략을 위해 소비에트, 공장위원회, 그리고 노동조합 사이의 관계와 그들 각각의 이론 정립에 대해 시도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레닌의 유사 쟈코뱅주의에 기인한 것으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혼란과 경제의 관료화를 피하기 위해 노동계급의 자발적 주도권에 대한 초기의 강조점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레닌과 대다수 볼셰비키가 사회주의의 본질과 그 가능한 내적 모순과 문제에 대해 고도의 도식적 견해를 가졌다고 평가하면서 노동자가 “그들 자신의 국가에 반대하여 그들 자신을 방어하는 독립 노조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결론짓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노동이 모든 시민의 사회적 의무라는 초기 개념과는 반대로 강제 노동이 벌어졌다. 이를 볼셰비키 좌파인 오신스키는 생산성 증진에 대해 레닌의 견해에 동조했지만, 레닌이 노동생산성과 노동강도를 혼동하는 것을 비판했는데, 이는 노동의 군사화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러면 당과 노동계급의 관계는 무엇이었나? 당과 노동계급은 한편으로는 혁명에 대한 열정과 대외적 군사투쟁, 사유재산 몰수운동 및 과거 유산자층에 대한 계급적인 배척운동에서는 일치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해석과 권력 집중, 노동 군사화 정책, 강제 노동, 임금차별, 식량 문제, 지역 간의 차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호불신과 불편한 관계를 드러냈다. 

헝가리 역사학자 자무엘리(Szamuely)는 전시공산주의의 대원칙이 전쟁의 승리뿐만 아니라 국유화, 노동의 의무, 중앙집권적 생산관계, 계급간의 평등 분배의 원칙, 화폐와 시장경제의 소멸 등 사회주의 이념을 추구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문제는 시장경제를 폐지하고 국유화를 시행하려는 노력이 피상적인 결과, 즉 소유와 분배 면에서의 불평등을 형식적으로 없앴으나 생산에서의 경쟁과 물신숭배의 원리를 고수했다고 보았다.

  노동조합에 대해 온건하게 동조하거나 중립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비율이 노동조합에 반대하는 볼셰비키에 동조하는 비율보다 훨씬 컸다. 1917년 36.4%에서 1920년 4월 3차 노동자대회 때 84%로 늘어났다. 

노동계급과 그들의 조직인 노동조합의 자율성에 대한 볼셰비키의 태도에 영합하는 당 간부들은 중앙의 지시를 기다리거나 할당된 물자의 징발이나 생산에 관한 명령을 수행하는 데에 몰두하는 요원들로서 매우 출세지향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더 이상 노동자들의 생산 개입을 옹호하거나 노조의 선거제를 주장하던 과거의 지하운동가나 투사들처럼 저항적이거나 반항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강제노동은 내전에서 불리한 시기에 실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가 확실시 되는 순간에 더욱 강화되었다. 볼셰비키의 투쟁 대상이 반혁명 세력이 아니라 노동이탈자나 소극적인 노동대중에게로 옮겨졌다. 노동 군사화 정책이 시행된 후 노동자들 사이에 혁명의식은 더욱 퇴조하고 당원수도 격감하였다. 이에 볼셰비키 정부는 불안해져서 인위적으로 백군의 위협을 더욱 과장하거나 혁명을 사수해야 한다고 강조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전시 공산주의 정책은 사기업의 몰수와 강제적 국유화, 일반 노동자・농민층의 희생, 배급제와 교환경제의 혼용, ‘노동자 통제’의 억압과 중앙집권적 국가관리의 채택, 곡물의 강제적 징수와 차등 임금제의 시행, 그리고 기계화와 기술자 우대 등 복합적 양상을 띠었다. 이 때문에 말레는 전시 공산주의 정책들은 사회주의 이념보다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유산에 근거한 억압적인 국가주의적 정책이라고 보았다.

  혁명 이후 격동적 이행기에서 권력의 주체가 되어야 할 노동계급은 점점 배제되었고 대상화되었으며, 생산과 권력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은 소멸되어 갔다. 노동자 반대파의 쉴라쁘니고프는 1919년 당 계획의 기초에 따라 ‘노동자 통제’의 회복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노동자 반대파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조직의 모든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진보적인 자들이다. 노동조합내의 인물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혁명의 선봉대로서 아직도 소비에트 국가 기구 속으로 통합되지 않은 노동자들이다. 또 이들은 아직도 인민과 긴밀한 유대를 유지하고 있는 가장 의식적이고 진보적인 인물이다. ・・・ 당은 예전에는 대중이 원하는 바를 지도하고 반성하였으나 이제는 대중을 불신하고 있으며, 복종과 권위, 차별의식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적 의식에 젖어있는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기술자들을 기용함으로써 경영과 조직 면에서 노동자들의 참여를 차단하고 있다. 이는 맑스주의적 실천이 아니다.”

  소비에트 권력의 두 가지 기반은 노동자의 능동적이고 대대적인 참여와 토론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노동자 대중이다. 1917년 10월부터 1918년 4월까지가 소비에트가 부상하는 시기였다면, 1918년 4월부터 12월까지는 소비에트 권력이 위기를 맞고 쇠퇴하는 시기였다. 

1918년 5월 소비에트 정책에 대한 비판이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 사이에 널리 퍼졌으며 1918년 공장위원회가 사라졌으며 소비에트 조직의 끊임없는 재생도 자취를 감추었다. 1918년 4월 페트로그라드에 기반한 799개 주요 기업 중 265개가 사라지고 노동자 절반의 일자리가 없어졌으며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와 식량을 구하고자 도시에서 농촌으로 빠져 나갔다.

  물론 노동자평의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활력소는 세계혁명이었지만 내전과 기근, 그리고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었고, 볼셰비키의 노동 정책이 더욱 숨통을 틀어막았다. 러시아 부르주아지와 영・불・미・일 등 제국주의 열강과 동맹을 맺은 백군은 러시아를 초토화시키면서 6백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소비에트를 억압하면서 그 구성원을 학살하였다. 

이에 맞서기 위해 적군과 첵카가 창설되었으나 소비에트 집행위의 토론 없이 결정되었다. 적군은 지원제였고 주로 노동자였기 때문에 노동자평의회가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적군과 첵카가 소비에트를 통제함으로써 노동자계급에게는 양날의 칼이 되었다.

  따라서 1921년 초 크론슈타트 반란은 광범위하게 벌어진 노동자들의 파업만큼 중요하다. 페트로그라드 20마일 서쪽에 있는 크론슈타트는 5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반은 시민, 반은 군인이었다. 당 고위 지도부의 선전과 달리 지역부대는 공산주의자가 다수였고 크론슈타트 강령에 찬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권력이 당이 아닌 소비에트로 가야 한다는 원칙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들 강령의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현재의 소비에트는 노동자와 농민 요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던 비밀 투표에 의한 선거와 모든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선언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2. 노조와 농민조직에게 집회의 자유를 허용할 것

  7. 지역별로 공산주의적 첵카를 설치하는 규정을 취소할 것

  9. 모든 노동자들에게 동등한 식량 배급권을 줄 것

  혁명과 혁명 후 사회 건설의 주체로서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 대상화, 그리고 그들의 소외를 조금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기로 하자. 이는 적색 테러와 관련된 문제이다. 백색 테러는 죄악시하면서 적색 테러는 정당화되는가? 그것은 부르주아지나 반혁명 세력에 한정된 것인가, 노동자계급에도 해당되는 것인가? 이 문제 역시 볼셰비즘과 레닌주의와 분리될 수 있는가? 왜 스탈린주의만 문제되는가? 

소련 붕괴 이후 비공개 문서고가 열리면서 수많은 문건들이 연구 자료가 되고 그것에 근거한 연구 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다. 그 중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책은『공산주의 흑서: 범죄, 테러, 억압』(1999년)이다.

  서론에서 이 책은 이른바 공산주의 국가에서의 사망 인원을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소련(2천만), 중국(6천5백만), 베트남(100만), 북한(200만), 동유럽(110만), 라틴아메리카(150만), 아프리카(170만), 아프가니스탄(150만) 등이다. 

그리고 소련에서는 
① 1918-1922년: 재판 없이 수만 명의 포로와 죄수의 처형, 
② 1922년의 기근: 5백만 명의 죽음, 
③ 1920년: 코사크족의 몰살과 추방, 
④ 1918-1930년: 수용소에서 9만 명 살해, 
⑤ 1937-38년: 대숙청에서 69만 명 처형, 
⑥ 1930-32년: 쿨락 2백만 명 추방, 
⑦ 1932-33년: 인위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속된 기근으로 우크라이나인 400만 명과 기타 2백만 명의 죽음 
⑧ 1939-41년과 1944-45년: 수만 명의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발트인, 몰도비아인, 베사라비아인의 추방, 
⑨ 1941년: 볼가 지역 독일인 추방, 
⑩ 1943년: 타타르인의 대대적 추방, 
⑪ 1944년: 체첸인의 대대적 추방, 
⑫ 1944년: 잉구시(Ingush) (러시아 지방에 거주하는 이슬람교 수니파의 민족) 대대적 추방 등이다.

  소련을 분석한 Werth는 볼셰비키 당과 모든 자발적 사회구조(공장위원회, 노조, 사회주의 정당, 주민조직, 적위대, 소비에트) 사이에 갈등이 존재했으며 몇 주 사이에 이러한 자발적 사회조직은 볼셰비키 당에 종속되었거나 억압당했다고 보면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는 소비에트 위에 있는 볼셰비키 당의 권력을 숨기는 용어였으며, “노동자 통제”는 기업과 작업장 위에 있는 노동자의 이름이 국가통제의 목적으로 옆으로 밀려났기 때문에 몇 주 사이에 볼셰비키는 1917년 동안 노동자로부터 조심스럽게 형성시켜온 신뢰를 대부분 상실했다고 평가한다.

  1918년 9월 3일 공식적인 적색 테러 시기가 시작되기 전인 8월에 볼셰비키 지도자들, 특히 레닌과 제르진스키(Dzerzhinsky)는 어떠한 봉기 기도도 막기 위해 “예비 조치”를 취할 것을 지시하면서 지역 첵카와 당 지도자들에게 엄청난 양의 전보를 보냈다. 

이러한 조치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부르주아지에게 부과된 예외적 세금에 대해 만든 리스트에 근거하여 부르주아지 중에서 볼모를 잡는 것이다. ・・・그리고 집단수용소에 모든 볼모와 혐의자를 체포하고 감금하는 것이다” 등이 있다. 그리고 8월 23일 제르진스키의 협력자인 마틴 라트시스는 “내전에는 성문법이 없다 ・・・내전에서는 적에 대해 법정이 있어서는 안 된다. 죽을 때까지 투쟁이다. 당신이 죽이지 않으면 당신이 죽을 것이다. 죽기 싫으면 죽여라”라고 『이즈베스티야』(Izvestiya)지에 썼다. 

노동수용소와 집단수용소에 수감된 인원은 1919년 5월 1만 6천명에서 1921년 9월 7만 명까지 늘었다.

  스탈린 체제가 들어선 뒤 강제 집산화 과정에서 2백만 이상의 농민이 추방되었고, 6백만이 굶어죽었다. 스탈린 시대 테러의 결정적 단계는 농민에 대한 폭력이었다. 1929년 12월 27일 스탈린은 “모든 쿨락 경향의 박멸과 계급으로서의 쿨락의 제거”였다. 

1936년-38년 사이의 대테러 시기는 이른바 ‘예조프 치하’(The Reign of Ezhov) 시기로서 억압이 당 서기국으로부터, 거리에서 체포된 단순한 시민에 이르기까지 소련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수십 년간 대테러의 비극은 침묵 속에 흘러갔다. 서방은 세 번의 공개재판 (1936년 8월, 1937년 1월, 1938년 3월)만 알고 있었다. 

레닌의 동지들이었던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니콜라이 크레틴스키, 리코프, 피야타코프, 라데크, 부하린이 트로츠키와 함께 소련 정부 전복을 기도하는 테러 중심부를 조직한 것을 인정하고 숙청됨으로써 스탈린주의 테미도르 관료층 대 혁명적 약속에 충실했던 레닌주의 고참 사이의 권력투쟁이 막을 내린다. 지금 접근 가능한 모든 문서에 의하면 스탈린이 예조프의 모든 움직임을 통제하고 지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책은 소련에서의 폭력과 억압의 싸이클을 네 가지로 본다. 첫 번째는 1917년부터 1922년 말까지로 레닌이 권력 장악과 함께 폭력과 억압을 내전의 필요한 부분으로 본 시기이다. 자발적 사회폭력이 공식적 구조를 가지면서 농민에 대한 정교한 공격이 1918년 봄에 일어났는데 이는 적군과 백군 사이의 군사적 충돌보다 더욱 수십 년의 테러의 모델이 되었다고 본다. 

크론슈타트 반란은 앞으로 올 사건의 명백한 신호였고 이 첫 번째 싸이클은 백군의 패배나 NEP의 시작으로 끝나지 않았고 마지막 농민 저항을 진압한 1922년 기근으로 끝났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의 짧은 유지기를 지나 두 번째 싸이클에서는 농민에 대한 스탈린주의의 집단적 공격이 일어나고 폭력은 일상화된다. 집산화는 농민에 대한 군사적, 봉건적 착취이며 1933년 대기근에서는 스탈린 체제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기록한다.

  대테러(1936-38년)시기인 세 번째 싸이클에서는 스탈린 시대 사형선고의 85% 이상이 이루어졌고 1941년 이후 네 번째 싸이클에서는 새로운 지역에서의 소비에트화를 통한 “위대한 애국전쟁”의 시기로 조선인 추방 같은 새로운 희생자가 생겨난다.

맑스가 ‘역사에서의 폭력의 역할’을 강조하고 방어했지만,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폭력의 체계적 계획보다는 일반적 전제로서 보았다. 물론 맑스의 저작에도 모호함이 있다. 그러나 맑스는 2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죽은 파리 코뮨과 유혈억압의 결과에 대한 재앙적 경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에 반대하는 제1차 인터내셔널의 논쟁 동안 맑스가 우위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전야에 사회주의와 노동자운동 내의 테러적 폭력에 대한 논쟁은 거의 중단된 것처럼 보였다. 1872년 맑스는 혁명이 미국, 영국, 네덜란드에서 평화적 형태를 띨 것이라고 바랐다. 이러한 견해는 1895년 출간된 맑스의『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2판에 엥겔스가 쓴「서문」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그런데 볼셰비키는 유럽의 맑스주의 전통을 계승했지만 러시아의 혁명적 토지 운동에 강한 뿌리를 두고 있다. 19세기 동안 이러한 혁명 운동의 한 부분이 폭력 활동과 연결되어 있다. 이 운동에서 폭력의 가장 급진적인 주창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악령』에서 혁명가의 모델로 삼은 세르게이 네카에프였다. 

1887년 3월 1일 알렉산더 3세 암살에 실패했지만 체포된 사람 가운데 레닌의 형 일리치 울리아노프가 있었다. 체제에 대한 레닌의 증오는 당 서기국의 인지 없이 1918년 로마노프 일가의 살해를 결정하고 조직하게 하는 데 깊은 뿌리가 되었다. 

이는 1789년부터 1871년까지의 서구의 혁명적 전통이 제공한 초기의 폭력의 정당화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정치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러시아 볼셰비즘의 특성을 만든다. 다시 말해 아래로부터의 대중봉기라는 민중주의적 전략과 위로부터의 엘리트 테러와의 결합이 러시아에서 일어나게 된 배경이다.

  레닌과 볼셰비키가 이러한 결합으로 네카에프 모델을 채택하고 발전시킨 구체적 배경을 쿠르토아는 『공산주의 흑서』의 결론에서 몇 가지 덧붙이고 있다.

  볼셰비키 지도부 누구도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레닌, 트로츠키, 지노비예프는 망명 중이었고 스탈린, 카메네프는 시베리아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관료제 내에서 일하거나 대중 집회에서 연설을 했다. 대부분 군대 경험이 없었고 전쟁을 보거나 전사자를 본 적도 없다. 권력을 잡을 때까지 그들이 안 것은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말의 전쟁이었다. 그들의 것은 죽음, 학살, 인간 재앙에 대한 순수한 추상적 전망이었다.

  또한 20세기 초 러시아 경제는 엄청난 성장의 시기였고, 사회는 점차 자율적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에 의한 민중과 생산수단에 부과된 예외적인 제약은 정치체제에 제약을 주어 상황을 헤쳐 나갈 에너지와 전망을 소진시켰다. 1917년 2월 혁명은 이러한 재앙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고, 고전적 경로, 즉 노동자, 농민의 사회혁명과 함께하는 제헌의회의 선거를 통한 “부르주아” 민주혁명의 길이었다.

  세계대전과 러시아에서의 폭력 전통이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의 맥락을 이해하게 하지만 볼셰비키의 극단적 폭력 경향성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이 폭력은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2월 혁명과 비교하면 처음부터 분명했고, 이는 당과 레닌에 의해 부과되었다.

  1914년 전의 맑스주의가 1917년 이후 레닌주의로 변화되었다. 레닌은 맑스주의 원칙인 계급투쟁, 역사에서 폭력의 필요성,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요성을 알았지만 1902년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군사 규율의 지하조직과 연관된 직업혁명가로 구성된 혁명당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고, 이 목적을 위해 독일, 영국, 프랑스의 위대한 사회주의 조직과 다른 네카에프 모델을 채택하고 발전시켰다.

  제11차 당 대회에서 쉴리야프니코프는 직접 레닌에게 말한다. “일리치는 어제 맑스주의 의미에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러시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인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계급에 대해 독재를 행사하도록 하는 동지에게 축하하게 해주게.”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 상징 조작은 유럽과 제3세계뿐만 아니라 중국, 쿠바에서 공통적이다.

  1937-38년의 대숙청으로 나타난 광범위한 테러는 1953년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는 전체로서의 사회뿐만 아니라 국가와 당 기구까지 목표로 하는 제거 대상을 발견한다. 히틀러는 억압에서 개인적인 역할을 거의 하지 않았고, 히믈러 같은 부하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반대로 스탈린은 스스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37-38년 사이 14개월 동안 180만 명이 42회에 걸친 거대하고 세세한 준비된 작전으로 체포되었다. 그 중에서 69만 명이 살해되었다. “계급투쟁” 대신 “계급전쟁”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사실은 특정 반대자가 적 계급이 아니라 전체 사회였다. 스탈린 아래에서 처형자는 희생자가 되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처형한 부하린은 공개적으로 “그들이 개처럼 총살되어 매우 행복하다”고 했다. 그런 그가 개처럼 총살되었다.

  대체로 이런 내용으로 되어 있는『흑서』의 저자들은 프랑스의 연구자들이고, 특히 소련 연구의 경우 스탈린 시대보다는 러시아 혁명 후 5년 정도의 시기(내전) 동안의 폭력과 테러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스탈린주의보다는 그 원형으로서의 볼셰비즘과 레닌주의의 본질과 맑스주의에 대비되는 러시아 혁명운동의 특성에 착목하고 있다. 

이 연구에 대한 혁명적 맑스주의 진영의 반응과 평가는 폭넓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지만 좌익공산주의 계열의『국제주의자 전망』이 내놓은 간략한 문제의식을 전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이 책의 몇 가지 쟁점을 지적하는데, 첫째는 볼셰비키를 위한 모델로서 프랑스 혁명의 역할이다. 프랑스 혁명에서의 쟈코뱅(당통, 로베스피에르)이 1917년 볼셰비키의 모델이 된 것은 분명하다고 보면서, 당시 프랑스에서 쟈코뱅을 노동계급의 모델로 보는 것을 거부한 혁명적 생디칼리스트 소렐을 언급하고 있다. 소렐은 쟈코뱅과 테러가 구체제의 가장 순수한 전통이라고 보았고, 폭력의 본질, 그것의 계급적 기원, 그리고 국가와 법체계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했다고 본다. 

두 번째는 볼셰비키 당내의 프락치키(Praktiki)의 역할로서 그들에게는 맑스주의의 이론과 실천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오직 권력만이 문제였고, 첵카의 지도부 같은 인자는 맑스주의 실천가로서의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고 본다. 또한 내전기간 동안 혁명가, 노동자, 농민에 대한 폭력에 레닌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고 보면서 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4월 테제에 보인 레닌의 입장과는 다르며 레닌의 지지와 주도권 없이 프락치키가 책카에서 권력 기반을 가질 수 없었다는 데 동의한다. 

세 번째는 당 지도자로서의 레닌의 역할인데, 여기서 볼셰비키가 규정한 적 개념에 혁명가, 굶는 농민, 파업하는 노동자까지 포함시키는 문제를 제기한다. 굶는 농민은 쿨락이 되고, 파업하는 노동자는 기생충이 되며, 무정부주의자와 사회혁명당 좌파는 벌레가 된다면, 이미 10월 혁명의 자궁 속에 붉은 파시즘이 자라고 있지 않았는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소련 연구자인 Werth가 붉은 파시즘에로의 길이 스탈린 집권 10년 전인가, 크론슈타트 반란 전인가, NEP 전인가, 라팔로 조약 전인가를 따지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2. 대중, 지도자, 그리고 붉은 파시즘


   <연재1>에서 나는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올바른 결합이 혁명 이론의 정립과 실천에 열쇠임을 밝힌바 있다. 왜 정신분석이 사회주의에서만 미래를 가지는가?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적 부르주아지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지배계급이 자신의 고유한 생활과 이윤을 추구하는 사회정책적인 조치들을 취하고 “복지”를 실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경제는 지성과 성생활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바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라이히는 말한다.

“소련에서 정신분석은 발전할 수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소련 지도자들이 성혁명과 문화혁명이 처해있는 모순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어쨌든 아직은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내가 들은 것처럼 스탈린이 경제 계획과는 반대로 소련에서 인간 계획이 성공적이라고 묘사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모든 자료들과 발견들에 따르면 성적 재구조화가 없는 탓이라고 해야 한다”

  정신분석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지녔던 공산주의자들은 흔히 레닌과 클라라 체트킨 사이의 대담을 인용하는데 이 대담에서 레닌은 노동자 모임과 청년집단에서 일어나는 성에 대한 논의와 논쟁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말했다. 라이히는 레닌의 관점에 동의하는데 이는 ‘성 논의’가 일반적으로 성 활동에 대한 대체물, 가장 흔한 지적 자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레닌이 클라라 제트킨과 나눈 같은 대담 과정에서 우리가 두 번째 지적을 따온다면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즉각 이해할 것이다. ‘공산주의는 금욕주의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며, 삶의 즐거움, 삶의 힘, 만족스러운 애정 생활은 공산주의를 실현하도록 도울 것이다’. 공산주의가 성생활의 즐거움을 가져올 수 있다면 확실히 이것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라이히는 1917년 이후 소련의 대중심리학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917년 러시아의 사회적 격변으로부터 출발한 문화가 타도된 차르 치하의 권위주의적 사회질서와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 공동체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러시아 사회의 새로운 사회-경제 질서가 인간의 성격구조에 재생산될 것인가? 새로운 ‘소련인’은 자유롭고 권위주의적이 아니며 합리적이며 스스로를 규제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구조 속에 이러한 방식으로 발전된 자유는 모든 형태의 권위주의적인 사회적 지도력을 불필요한 것으로 혹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국가가 소멸되는 것만큼 그로부터 자유로운 조직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맑스가 가정하였듯이 그 조직에서는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의 기본조건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소련에서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첫째, ‘자유로운 자기 관리적 공동체에 있어서 자유로운 세대의 조직’은 창조될 수 없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부터 발생해야 하며, 이와 같은 과도기 상태에서 발전과 성숙의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이 1930년과 1934년 사이에 일어났는가? 그렇다면 ‘국가 소멸’의 본질은 무엇이었으며 또한 새로운 시대의 발전을 시사해주는 구체적이며, 눈에 보이고, 길잡이가 될 만한 징후는 무엇이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국가는 소멸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목표를 위한 전제조건은 자연스러운 일-조직, 일-민주주의를 위한 생물학적, 사회학적 전제조건에 관한 지식인데, 사회주의의 창시자들은 생물학적 전제조건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라이히는 말한다. 

사회적 전제조건은 자본주의적 사기업과 임금노동자 대중만이 존재했던 시기(1840년부터 1920년까지)와 연관되어 있는데, 그 때까지 정치지향적인 중간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가자본주의의 발전이 없었으며 국가사회주의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반동적으로 함께 뭉친 대중들도 없었다는 것이다.

  레닌은 거짓된 형식적인 민주주의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인민들이 생산, 생산물의 분배, 사회적 규제, 인구 증가, 교육, 성 등을 활기차게 구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의회가 아닌 소비에트가 무엇을 어떻게 대표하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소비에트가 혁명적 기능을 수행하는가 아니면 형식주의적 국가행정조직으로 전락하는가는 다음과 같은 기준에 달려있다.


  첫째,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이 점진적으로 스스로를 제거하는 기능에 충실한지의 여부, 

둘째, 소비에트가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의 협력자이며 집행기관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감독자로서 그리고 사회적 리더십의 기능을 점차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으로부터 사회 전체로 전환시키는 제도로서 스스로를 간주하는지의 여부, 

셋째, 소비에트가 대중들의 대표자인 이상, 대중들 각 개개인이 소비에트의 기능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운용 중인 국가기구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인수해야할 자신의 과업에 들어맞게 되는지의 여부이다.

  그런데 레닌은 ‘관료주의의 폐지’가 왜 유토피아적 열망이 아닌지에 관해, 그리고 어떻게 관료주의가 없는 또한 위로부터의 리더쉽이 없는 생활이 가능하고 필요할 뿐만 아니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즉각적 과업인지에 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 

파시즘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 관리’, ‘자치’, ‘비권위주의적 훈련’ 등과 같은 새로운 개념은 단지 경멸에 가득한 너그러운 웃음만을 자아낼 뿐이며, 무정부주의자의 꿈이며 유토피아적 공상일 뿐이다. 이는 국가의 폐지는 불가능하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은 강화되고 확장되어야 한다는 스탈린의 주장을 지지하게 만든다. 

1937년 이후의 소비에트 문헌들을 보면 다른 모든 노력보다 우선성을 갖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기구 권력의 약화가 아닌 강화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문헌들 속에는 프롤레타리아 국가기구가 궁극적으로 자치행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언급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새로운 질서’는 고안해내거나 생각해내거나 혹은 계획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의 생활에 대한 실천적이며 이론적인 사실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유기적으로 생성된다. 대중들을 정치적으로 휘어잡으려는 그리고 그들에게 혁명적 사상을 부여하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단지 시끄럽고 해로운 야단법석만을 만들어 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련의 붉은 파시즘은 스탈린 시대의 애국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몇 가지 보기를 들자.

“우리 모두의 사랑, 우리의 충성심, 우리의 힘, 우리의 심장, 우리의 영웅심, 우리의 생활 – 이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하여 있습니다. 모두 가져가십시오. 오 위대한 스탈린이여,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오 위대한 조국의 지도자시여, 당신의 아들들에게 명령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공기 속에서, 땅 밑에서, 물위에서, 성층권에서도 걸을 수 있습니다. ・・・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내가 그에게 가르쳐 줄 첫 단어는 바로 ‘스탈린’이 될 것입니다.”
(레닌그라드 레드타임즈, 1935, 2월 4일 기사)

“소비에트 애국심 – 끝없는 사랑의 불타오르는 감정이며, 조국에 대한 조건 없는 헌신이며, 조국의 운명과 조국 방위에 대한 심원한 책임감인 – 은 우리 인민의 깊은 심원으로부터 용솟음쳐 나온다. ・・・레닌과 스탈린에 의해 탄생하고 키워진 소비에트 러시아여! (프라우다, 1935, 3월 19일자)

   이에 대해 라이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정치의 정서적 전염병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조국에 대한 자연스런 사랑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소비에트 애국심’은 혁명적 열정이 사라져 버릴 것을 예상하여 나중에 「보오탄(Wotan) 애국심」(고대 독일 신화의 최고신, 북유럽 신화의 주신 오딘을 말함. 파시스트 애국심)에 대한 투쟁을 위해 필요한 준비였으리라.”

  국가의 소멸 그리고 국가의 기능을 인간에게로 옮기는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음은 다음과 같은 국가주의를 표현한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콜호즈와 수많은 강철 같은
  선동자를 위하여 국가가 필요하다
  태평양에서 민스트까지, 아프리카에서 크리마아까지
  비옥한 땅이 트랙터를 기다리고 있다.
  국가가 너희들을 부른다.
  앞으로! 앞으로 모두 함께!
  대오를 갖추어 나가자!

  스타하노프주의로의 퇴보는 소련에서 인간의 성격구조 형성에 비참한 영향을 미쳤다. 지나치게 야심적이며 무지막지한 사람들만이 경쟁적인 성과급제도 아래에서 우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아주 뒤떨어지거나 탈락하게 된다. 

이러한 격차는 약한 노동자들에게는 질투와 야심을, 강한 노동자들에게는 무례함과 오만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함께 소속되어 일한다는 집단의식은 생겨날 수 없고 정서적 전염병의 특징인 고발과 반발이 유행하게 된다. 소비에트 정신에 대한 파시스트적인 칭찬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도 드러난다. 

“어떤 공장이 형편없는 기계를 생산한다면 그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죄악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투쟁하는 우리 모두에 대해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훈련 받은 소수의 “에토스”는 항상 대다수 국민을 무능하게 만든다. 신화와 에토스는 영웅적일 수 있지만 항상 위험하고 비민주주의적이며 반동적인 방법이다.

  라이히는 그 당시 소련의 객관적 상황과 전쟁 이데올로기의 결합이 파괴적 효과를 낳았다고 결론짓고 있다.

  첫째, 1억 6천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한 나라가 수 년 동안 계속해서 전쟁의 상태에 놓여있고, 또한 군국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고취되어있다면 전쟁 이데올로기의 목적이 달성된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인간구조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중들에 대한 교육에 있어서 삶의 이상으로 추켜세워진 사심 없는 헌신은 숙청, 처형, 모든 종류의 강압적 조치와 같은 독재적 과정의 수행을 가능하게 만드는 대중심리를 점진적으로 형성했다. 

둘째, 호전적인 세력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는 정부가 수년 동안 계속해서 대중들에게 군국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어려운 현안과업을 해결하는 와중에 자신의 과업을 잊어버린다면, 목적이 충족되어 이러한 분위기가 쓸모없게 된 이후에도 이러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강화하게 된다. 따라서 대중들은 소외되고, 분리되고, 무기력해지거나 자신의 욕구를 넘어서서 비합리적인 애국주의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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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주)

1)  마르셀 반 데르 린덴, (황동하 옮김), 「종합:서구 마르크스주의와 소련」, 『실천』, 2011년 6월(통권55호)를 보면 1917년부터 2005년까지 소련을 분석한 입장들을 종합하고 있는데, 특히 1985년부터 지금까지 자본주의(또는 국가 자본주의)로 보는 입장이 절대다수임을 알 수 있다.
2)  피터 세지윅, 「해설」, 빅토르 세르쥬 (황동하 옮김), 『러시아혁명의 진실』, 책갈피, 2011, 539쪽.
3)  Samuel Farber, Before Stalinism: The Rise and Fall of Soviet Democracy, Polity Press, 1990, 72쪽.
4) 윗 글, 75쪽.
5) 윗 글, 76쪽
6) 이정희, 「볼셰비키 사회주의와 ‘노동자 관리’(Workers’ Control) 운동, 1917-1921」, 서울대 박사논문, 1998, 8.
7) T. F. Remington, “Instintution Building in Bolshevik Russia: The case of State Control”, Slavic Review, 41, (Spring 1982), 99-101쪽.
8) Malle, S. The Economic Organization of War Communism, 1918-21, Cambridge, 1985, 495-505쪽.
9) A. Kollontai, The Workers’ Opposition in Russia, New York, 1921, 3-12쪽.
10) “What are Workers’ Councils?(iv)”, International Review, ICC, 4thQuarter, 2010,143호, 10-14쪽.
11) Avrich, P., Kronstadt in 1921, New York, 1970, 72-4쪽.
12) Stephane Courtois, Nicolas Werth et al., (translated by J. Murphy and M. Kramer) The Black Book of Communism: Crime, Terror, Repression, Harvard Univ. Press, 1999, 858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은 소련, 유럽, 아시아, 제3세계에서의 이른바 “공산주의 국가들”에서의 범죄, 테러, 억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13) 윗 책, 9-10쪽
14) 윗 책, 제1부 인민에 맞선 국가: 소련에서의 폭력, 억압 그리고 테러(N. Werth), 52쪽
15) 윗 책, 73쪽.
16) 윗 책, 262-264쪽.
17) 윗 책, 731쪽.
18) 윗 책, 734-745쪽.
19) Mac Intosh, “The Bolsheviks, The Civil War, and Red Fascism”, Internationalist Perspective, 2003 (Spring/Summer), no.41, 18-20쪽.
20) 빌헬름 라이히, (윤수종 옮김), 『성정치』, 중원문화, 2011, “변증법적 유물론과 정신분석”, 99쪽.
21) 빌헬름 라이히, (오세철 옮김), 『파시즘의 대중심리』, 현상과 인식, 1986, 246쪽.
22) 윗 책, 264쪽.
23) 윗 책, 286쪽.
24) 윗 책, 323쪽.
25) 윗 책, 326쪽.
26) 윗 책 3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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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경제이론 동향- 신희영

 

WS 점거운동, 경제학 지형 바꾸나?
[기고] 비주류 경제학에 큰 자극 줘…신자유주의 대안 모색 활발
 
 
 

글 머리에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고 있다. 지난 12월 17일을 기점으로 3개월째 이어지던 점거 운동이 각 지역 경찰의 탄압과 추운 날씨 때문에 상징적인 근거지를 확보하지 못한 채 일종의 ‘후퇴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회를 빌어 필자는 국제 경제 위기와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이 미국 경제학계의 지배적인 담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전개된 일련의 사건들 - 미국발 경제 위기와 유럽 재정 위기로의 파급, 그리고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으로 불거져 나온 사회 운동 차원의 저항 등 - 을 접하면서, 필자는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미국 사회에서 어떤 지위를 점해 왔는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경제학자들이 연구를 해나가면 좋을지에 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영미권의 경제학자들이 주류 경제학의 ‘자폐성’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적실성 있는 학문을 만들기 위해 그동안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에 대해서도 한국의 독자들과 의견을 나누어 보고 싶다.

 

   
 

미국 주류 경제학 담론의 역사와 동향

영미권의 경제학 담론이 보여온 폐쇄성에 대해서는 대학에서 기초 경제학 수업을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경제 행위자들의 소비 패턴과 생산자들의 생산량 및 가격 조절 법칙을 해명한다는 이름 하에,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소비 함수와 생산 함수를 오남용하고, 개별 행위자들의 효용 및 이윤 극대화 행위가 아무런 외부 효과나 구조적 제약 없이 시장 경제 전체의 일반 균형을 달성한다는 전형적인 담론이 바로 그것이다.

흥미롭게도 영미권의 경제학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전통적인 케인즈주의 경제학에 의해 지배되었다. 알프레드 마샬과 피구 등 전쟁 전 유럽 경제학을 지배하던 당시의 ‘신고전파’ 경제학 패러다임의 한계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기업의 투자와 소비를 근간으로 하는 유효 수요가 거시경제 전반의 안정성과 복리 증진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를 체계적으로 강조한 것이 바로 케인즈의 경제학이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후반부터 몰아닥친 오일 쇼크와 하이퍼 인플레이션(hyper inflation) 충격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미국 경제학은 거시 금융 경제학 영역에서 밀턴 프리드먼류의 통화주의(Monetarism)와 루카스 등이 주창했던 합리적 기대 가설(Rational Expectation hypothesis)이 번성하는 일종의 방향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통화주의 이론과 합리적 기대 가설의 핵심을 이루는 몇 가지 아이디어들은 데이비드 흄과 존 스튜어트 밀이 제창했던 국제 통화의 유출입을 통한 경상수지의 자동적 균형(Hume specie flow) 등에 관한 논의를 참고할 때 경제사상사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경우에는 1940년대부터 전통적인 케인즈주의적 유효수요 관리 이론을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미국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져들고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와 중화학 공업 부문에 대한 배타적인 지원을 핵심으로 하는 미 연방 정부 차원의 ‘케인즈주의적 경기 부양 정책’(당시 이단적 케인즈주의자와 맑스주의 경제학자들은 미국에서 이렇게 오남용된 케인즈주의 경제 정책을 ‘군사 케인즈주의’라고 불렀다)이 실효를 거두기 못하자 당시 소수에 머물러 있던 통화주의자들이 경제학계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로 올라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초 미국에서 레이건 행정부가 등장하고 영국에서 대처가 수상이 되어, 우리가 오늘날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일련의 경제 정책 - 부자들에 대한 감세 정책, 금융 시장에 대한 규제 완화, 정부의 공공 서비스의 축소, 노동조합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임금 및 사회 복지 수당의 축소와 공기업들에 대한 대대적인 민영화 조치 등 - 을 관철시키기 시작하자 통화주의 이론과 합리적 기대 이론은 영미권의 경제학계는 물론 정부의 주요 정책 결정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흐름과 약간은 구별되면서도 결과적으로 그 괘를 같이 하는 지적 기반이 존재했다. 그것은 특히 미국 학계를 중심으로 구소련과의 냉전 체제가 지속되는 동안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영구성과 안정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체계화 작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소비자 효용 증대를 통한 가치의 형성, 수요 공급을 통한 일반 균형의 달성이라는 논리를 수학적으로 입증하려는 시도가 만개했고, 그 결과 수리적 논증을 통한 일반 균형론이 만들어진 것이다.

미국 주류 경제학 담론의 자폐성에 대한 비판

그러나 현재 미국 대학에서 압도적인 다수의 경제학 프로그램이 채택하고 있는 이와 같은 지배적인 연구 동향은 수많은 문제들을 야기해 왔다. 수많은 문제점들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현대 영미권 경제학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사회적 적실성과 역사성이라는 중요한 시험대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합리적’이라고 가정된 생산자 또는 소비자로서의 경제 행위자가 어떻게 이윤과 효용을 극대화하고, 이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통해 일반 균형에 다다르는지를 핵심 연구 과제로 삼고 있는 주류 미시경제학은, 근대 사회에 존재하는 그리고 여러 사회철학자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분석한 바 있는 ‘근대적 이성의 복수성’이란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미시경제학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조차 경제 행위자들이 전략적 또는 목적 합리적 이성 이외에도 다른 이성적 판단과 고려를 한다는 사실을 분석할 인식론적 수단을 결여하고 있다.

게다가 합리적 소비자와 생산자들의 상호작용이 잠재적으로 야기할 수 있는 외부성(externality)에 대해서도 주류 미시경제학은 제대로 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 합리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가정된 개별 행위자들의 행위를 근본적으로 구속하고 그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구조와 법적 제도적 배열 상태에 대해서 제대로 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함몰된 채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인식론적인 차원에서도 미국식 주류 경제학은 분석자(경제학자)와 행위자(소비자, 생산자 등)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간극 또는 ‘인식론적 거리’에 대해서 제대로 성찰하지 못하고, 통계학자나 수리 경제학자 자신들도 평소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은 초월적 계산 능력을 경제 행위자들에게 아무런 거리낌없이 부여하면서 합리적 기대 가설의 타당성을 강변하고 있다.

미시 경제학과 함께 현대 경제학 프로그램의 핵심 연구 영역인 거시경제학 영역에서도 문제는 심각하다. 재정 정책과 금융 정책, 기업 투자와 소비 및 물가 변동 등 거시 경제학의 대표적인 연구 영역은 몰역사적인 생산 함수와 소비 함수를 동원한 동적 최적화 모델을 세우고 문제를 풀이하는 것으로 채워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요 대학원 과정에서 더이상 경제사상사나 경제사 관련 과목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그 중요성과 복잡성을 더해가는 금융 문제에 대해서도 주요 대학원의 금융 경제학 프로그램은 제대로 해명할 개념적 수단을 결여하고 있다. 지배적인 담론은 낡고도 낡은 통화주의 이론에 근거하거나 금융 자산의 상대적 수익률을 예측하는 자산 다변화-비지니즈 모델로 퇴락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현대 자본주의 금융 시장의 본질적인 불안정성과 금융 기업들이 실물 경제와 맺고 있는 복잡다단한 거래관계는 ‘저축에 기반한 투자 증대’라는 낡은 공식으로 환원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금융 시장의 원할한 작동을 가로막은 비신축성 또는 경직성이나 비대칭적 정보론으로 환원되고 있을 뿐이다.

비주류 경제학계의 역사와 동향

주류 경제학 담론이 지닌 일종의 폐쇄회로와 같은 이같은 문제점들에게 대해서 비주류 경제학자들은 다양한 비판을 해왔다.

우선, 19세기 후반 한계주의 학파(Marginalist) 경제학자들에 의해서 편파적으로 이해된 데이비드 리카도의 노동가치 이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본(이윤)과 노동(실질 임금)의 적대적 상호관계를 재정립하려고 했던 피에로 스라파와 그의 뒤를 이은 신리카도주의 경제학자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를 거치며 정점에 달한 칼 맑스의 잉여 가치 이론을 더욱 발전시키고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복잡성과 산업관계의 연관을 실증적으로 분석하려고 한 현대의 고전적 맑스주의 경제학자들도 왕성하게 비주류 경제학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케인즈의 거시 금융경제 이론을, 투자를 통한 저축율과 경제 성장율의 증대라는 기본 테마와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복잡성과 금융 불안정성이라는 문제의식과 연결시켜 온 포스트 케인즈주의(Post-Keynesian) 경제학자들의 논의도 눈여겨 볼 만하다.

이들은 특히 금융 시장과 노동 시장에서 나타나는 정보의 비대칭성(asymmetric information)을 강조하는 스티클리츠와 같은 뉴케인지언 경제학자들과는 구별되는 독립적인 연구 방법과 의제를 발전시켜 왔다.

그 이외에도 여성주의(Feminism)와 제도주의적(Institutionalist)인 시각에서 기업의 투자와 생산 활동 그리고 거시경제의 동학과 역사적 변천을 분석하려고 하는 시도들도, 비록 주변화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 경제학계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영미권 경제학계 안에서 1980년대 이후 지배적인 위치를 점해온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 일반 균형론, 합리적 기대 가설과 금융 시장의 효율성(efficient market hypothesis)이라는 공고한 지적 헤게모니에 맞서서 독립적인 연구 의제를 발전시키고 학회 운영, 잡지 발행, 그리고 도서 출판의 형태로 활발하게 활동해 나가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에 대한 비판 경제학자들의 반응

최근 전개되고 있는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은 이처럼 이념적인 간극을 보여온 경제학 담론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무엇보다도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주류 경제학 담론에 대한 거부감과 비판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그동안 학계에서 주변화된 것처럼 보였던 비주류 경제학자와 비판적 성향의 사회과학자들의 논의가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최근 벌어진 몇 가지 에피소드를 먼저 간략하게 소개하고, 뒤이어 영미권의 비주류 경제학자들이 최근 몇 년 사이 어떠한 연구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를 전하고자 한다.

우선, 미국 발 금융위기가 유럽으로 한창 번져나가던 2008년 가을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는 왜 금융 위기가 발생했고 경제학자들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공개적으로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 영국의 왕립 학술원에 소속되어 있던 주류 경제학자들은 여왕에게 ‘도래하는 금융 위기를 제대로 분석할 수 없었던 경제학자들의 무능력’을 인정하면서 ‘창의성과 사회 현안에 대한 민감성을 갖추지 못한 경제학자들의 집단 사고’를 자책하는 편지를 보낸 바 있다.

당시의 이 사건을 회고하면서 최근 토비 캐롤과 샤하르 하메이리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기고한 글에서 주류 경제학자들의 집합적인 무능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그들은 주류 경제학자들이 신봉하는 한계 효용 중심의 수요 공급 이론과 로빈슨 크루소우의 우화에서나 등장하는 자기 조절적 생산과 노동 및 소득 분배론을 핵심으로 하는 신고전파 경제학에 뿌리 깊게 잠재해 있는 학문의 정향성이야말로 주류 경제학자들의 무능력과 비사회성을 야기한 원천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편, 영국의 대표적인 비주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마이클 립턴, 스테파니 그리핀-존스 그리고 로버드 웨이드 등은 영국의 진보적 성향의 일간지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금융 시장에 대한 무분별한 규제 완화 조치들이 금융 위기를 빈번하게 발생시키고 국내적으로는 경제적 소득 불평등 문제를 심화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현재와 같은 위기 국면에서는 긴축 정책을 취할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유효 수요를 증대시키고 조세 형평성을 강화시키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확대 재정 정책 편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같은 글에서 경제학자들과 경제 정책 결정자들이 신고전파 경제학으로 정향된 편협한 이론이 아니라 리카도와 맑스 등의 고전파 정치경제학, 알프레드 마샬과 케인즈 그리고 하이만 민스키(Hyman P. Minsky)와 같은 사람들이 주창했던 금융 부문의 사회화와 정부의 적극적인 거시경제 조정 정책에 관한 이론을 진지하게 수용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툴사 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스캇 카터(Scott Carter)의 입장은 더욱 선명하다. 그는 한계 효용 및 한계 생산성 이론에 기반한 신고전파 경제학의 수요와 공급 가설, 그리고 다시 이 가설에 기반한 생산과 소비의 일반 균형론을 한마디로 ‘1%를 위한 경제학’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그는 생산 과정에서 잉여 가치가 착취되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의 본질적인 문제를 파헤쳤던 맑스주의와 스라피안 경제학을 학문적으로 복권시키는 것이야말로 ‘99%를 위한 경제학’을 수립하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했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마치 ‘과학’의 지위를 독점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양 행세해 왔던 현대판 ‘벌거벗은 임금님’(신고전파 경제학과 일반 균형 이론)의 실체를 폭로하고, 주류 경제학 담론이 합리화하고 변호하는 억압의 질서를 제대로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뉴스쿨과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암허스트 캠퍼스 경제학과 교수들이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에 대해서 지금까지 보여준 반응도 흥미롭다. 이 두 대학의 경제학 프로그램은 미국의 유타 대학이나 미주리 캔사스 시티 대학 등과 함께 미국 경제학계에서 비주류 경제학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유지해온 것으로 유명한 대학들이다.

뉴스쿨 대학 경제학과 교수들은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 사안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뉴욕시 소재 대학생들이 뉴스쿨 대학 부속 건물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이자마자 즉각 그 점거 운동을 지지한다는 공개 성명서를 발표했다.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암허스트 캠퍼스 경제학과 교수들도 ‘경제학을 점령하라’(Occupy Economics)라는 제목을 단 동영상을 만들어 다음과 같은 일종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우리는 경제학계에서 벌어진 이념적 세척을 거부한다. 이와 함께 현재와 같은 경제 위기의 원인과 결과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필수불가결한 논쟁을 정치적으로 탄압하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1% 부자와 정치 엘리트들의 단기적인 탐욕으로부터 경제를 해방시키는,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을 지지한다. 우리는 공공 장소에서 공공선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경찰과 공무원들을 동원해 진압하려고 하는 냉소적이고 전도된 시도를 거부한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경제, 생태친화적인 경제,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경제 시스템을 건설하려는 새로운 비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경제 정의와 사회 정의를 요구하며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는 점거 운동가들과 연대할 것을 선언한다. -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과 함께 하는 경제학자들 일동”

비주류 경제학자들의 최근 연구 동향

비주류 경제학자들과 비판 사회과학자들의 이와 같은 사회적 실천이 가까운 장래에 주류 경제학자들의 지배적인 담론과 정향성을 대체하고 주요 경제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지 여부를 가늠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도 신고전파 일반 균형론과 그 변형태의 주창자와 옹호자들이 영미권의 학술 시스템과 각종 저널들을 장악하고, 이단적인 견해들이 공개적으로 거론되는 것을 가로막아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련의 등급이 매겨진 저널에 어떠한 글을 발표했는가를 신규 교수 임용이나 승진 심사에 중요하게 반영하는 대학 행정가들의 관행은 비판적인 사고를 지닌 학자들을 배척하는 중요한 기제로 작동해 왔다.(한국의 학술진층 시스템은 바로 이와 같은 기제를 한국의 학계에 무차별적으로 이식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지난 수년간 지속된 있는 국제적 차원의 경제 위기와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사회 운동이 비주류 경제학자들의 연구와 사회 활동에 지대한 자극과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학술 시스템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신중하게 지켜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한국에서 비주류 경제학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 최근 어떠한 연구 주제가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는지를 간략히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무엇보다도 지난 몇 년 동안 비주류 경제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은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경제 위기의 원인과 과정 및 정책적 대안에 대해서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경제 위기의 본질적인 원인을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이 지닌 본질적인 모순 -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이에 따른 이윤율의 하락 - 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지, 그래서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새로운 축적 체제의 현재와 같은 파국을 돌파하는 대안들이 무엇인지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다.

이와 더불어, 금융의 국제화가 야기하는 다양한 경제 문제들을 탐구하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움직임도 새롭게 동력을 얻고 있다. 그동안 맑스주의와 포스트 케인즈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의 다른 부분에 비해 비대하게 발전한 금융 부분이 어떻게 생산적 기업의 투자를 정체시키고 고용의 양과 질을 악화시키는지를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증적으로 분석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최근 몇 년 사이 비주류 경제학 학회 모임이나 컨퍼런스에서는 이와 같은 ‘금융화’(financialization) 과정의 기원과 전개 그리고 실물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종래의 금융화에 관한 논의가 영국과 미국의 산업 구조 변동에 국한되어 왔다면, 최근 들어서는 외환 및 재정 위기를 경험했던 나라들(라틴 아메리카와 동아시아 그리고 터키 등)에 대한 사례 분석으로까지 연결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를 통해 비판 경제학자들은 금융 산업과 비금융 산업의 관계, 정부의 산업 정책, 금융 위기 국면에서 취할 정책적 대안 등에 관해 심도 깊게 논의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경제 위기 국면에서 통상적으로 취해지는 긴축 정책이 어떠한 방식으로 경제 성장과 미래의 성장 동력을 잠식하고 채권국 은행들과 국제 투자자들의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보장하는 정책인지,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여성과 아동 그리고 이주 노동자 등의 사회적 소수자들의 이익을 희생하는지에 관한 이론적, 경험적 분석도 중요한 연구 테마 가운데 하나다.

마지막으로 경제학자들이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있는 거시 경제 성장 지표들도 새로운 시각에서 재검토되고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전통적인 국내총생산 지표는 가계와 비영리 단체들이 수행하는 직간접적인 경제활동의 기여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종래의 낡고도 낡은 거시 경제 지표들을 생태주의적 함의를 담을 뿐만 아니라 가계와 비영리기구들의 사회적 기여분도 고려할 수 있는 새로운 지표로 바꿀 수 있는지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다.

전통적인 실업률 개념도 협소하기는 마찬가지다. 종래의 실업율 지표가 지닌 한계를 넘어서서 고용의 양뿐만 아니라 노동 시간과 소득 그리고 기술적 숙련도 등을 핵심으로 하는 고용의 질을 제대로 포착하는 실질 실업률 개념틀을 만들 수 있을지에 관한 논의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 * *


참고 및 소개 자료들

• 영미권, 특히 미국의 주류 경제학 담론의 역사와 최근 동향과 관련하여 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자료들로는 다음의 책들이 있다. Paul Krugman, Peddling Prosperity,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1995; Robert Lucas, Jr. Studies in Business-Cycle, Boston: MIT Press TheoryGeorge Macesich, The Politics of Monetarism – Its Historical and Institutional Development, New Jersey: Rowman & Allanheld Publishers, 1984; 박만섭 엮음, <신고전파에 대한 12 대안 - 경제학, 더 넓은 지평을 향하여>, 서울: 이투신서, 2005

• 경제 위기 국면에서 주류 경제학 담론이 보여준 무능함에 대한 일종의 자기 성찰,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과 관련하여 비주류 경제학자들이 보여준 지금까지의 태도에 대해서는 관련해서는 Toby Carroll and Shahar Hameiri, “Where are they now?,” Le Monde Diplomatique English Edition, December 05, 2011; Michael Lipton, Stephany Griffith-Jones and Robert Wade, “A three-step programme to re-civilise capitalism,” The Guardian, December 07, 2011; Jonathan Tasini, “Harvard Revolt Against the "Free Market",” November 07, 2011; Scott Carter, “Occupy Economics! The Occupy Movement and Economic Theory,” Red State: The Journal of Socialist Thought from the Heartland, Volume 1: Issue 3, November 2011; Economists stand with Occupy Wall Street, “Occupy Economics - Statement on Occupy Wall Street” (www.econ4.org; http://player.vimeo.com/video/32597394?autoplay=1; http://vimeo.com/27264995) 등을 참조.

• 비주류 경제학의 역사와 최근의 정책 제안 그리고 연구 동향 등에 대해서는 비주류 경제학 소식지세계 경제학회 소식지 등을 참조. 특히 비주류 경제학 소식지에는 비판 경제학 프로그램과 각종 저널 그리고 학회 활동 등에 관한 유용한 정보가 실려 있다.

* 이 글을 쓴 신희영은 신사회과학원 (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경제학과를 졸업하고(경제학 박사), 뉴욕시 소재 재정정책연구소(Fiscal Policy Institute)에서 일하고 있다.

 
 
 
2012년 01월 02일 (월) 11:38:33 신희영 webmaster@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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