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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개념과 역사- 김성구(2011년)

신자유주의에 대한 오해와 반MB연합의 오류

[칼럼] 신자유주의 개념과 역사에 대한 혼란과 오류

김성구(한신대) 2011.03.14 11:14

1970년대 이래 세계경제의 장기침체를 배경으로 등장한 신자유주의의 지배는 어느덧 30년의 역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신자유주의의 지배는 전면화 되었다. 그 결과는 처음 우려했던 것보다 더 참혹하다. 더군다나 2007/2009년의 충격적인 금융위기를 겪고 나서 이제는 누구나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 금융계의 거물들로부터 정부의 수장들까지. 신자유주의는 실로 ‘공공의 적’이 되었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자본주의 세계의 지배적인 경제사상이자 경제정책이다. 이런 역설적인 상황은 신자유주의의 개념과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도 상당 정도 연관되어 있다. 말하자면 개념과 역사의 왜곡이 불신의 대상이 된 신자유주의에 산소호흡기를 대주는 상황이다.

 

▲  김성구 한신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돌이켜보면, 필자가 신자유주의 비판을 처음 제기했던 것은 1995년의 일이다. <이론>지 1995년 겨울호 특집논문의 하나로 필자가 발표한 논문 제목은 ‘사회적 시장경제론 비판’이었다. 당시는 김영삼 정권의 시기였고, 김영삼 정권의 이른바 신(경제)정책에 의해 우리나라에서도 신자유주의적 경향이 가시화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비판은 고사하고 신자유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기만 한 그런 시대였다. 서방에서는 1970년대 말이래 신자유주의가 정치적 논쟁의 핵심이었지만, 필자가 유학에서 돌아온 90년대 초 국내 정치에서도 강단에서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인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한국의 정치와 강단은 세계사의 변화 흐름에 뒤쳐져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논문은 독일판 신자유주의인 사회적 시장경제론의 비판을 통해 김영삼 정권의 개혁정책의 본질이 신자유주의임을 밝히고자 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이 논문은 우리나라에서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1998년 김성구, 김세균 등의 공저 <자본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문화과학사에서 간행되었는데, 이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 비판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외환위기와 김대중 정권에 의해 신자유주의 정책이 전면화 되는 상황 때문에 신자유주의 비판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정치경제적 토대이었다.

 

신자유주의 비판의 문제제기, 이는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가져올 위험한 결과들을 비판하고, 그에 대한 대중적인 저항력을 동원하여 그 전환을 저지하자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신자유주의와 구조조정에 대한 대중적인 투쟁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관철되었다. 저성장과 고용불안, 금융투기와 금융위기, 대외종속의 심화, 극단적인 양극화, 그리고 상업지상주의. 이런 구조의 악순환이 전개되었는데, 실로 전개된 그 결과는 비판과 문제제기에서 예상했던 관념적인 사고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한국자본주의의와 한국사회의 모습은 불과 15년 사이에 너무도 나쁜 방향으로 변모하였다. 비판과 투쟁의 주요한 정치적 과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반(反)신자유주의 대중운동의 독자적인 구축에 있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진보진영과 대중운동은 오히려 신자유주의에 끌려갔는 바,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의 개념과 역사에 대한 혼란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 때문에 한국의 진보진영은 신자유주의에 끌려가면서도 스스로는 반(反)신자유주의 투쟁에 매진한다고 잘못 판단하였다.

 

위의 논문에서도, 또 위의 책에 쓴 논문(‘자본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적 공세’)에서도 필자가 신자유주의의 개념과 역사를 둘러싼 당시의 혼란을 정정하고자 주력한 것은 이런 우려 때문이었다. 반신자유주의 대중운동의 구축에 있어 하나의 주요 문제는 김영삼 정권으로부터 김대중 정권으로 이어지는, 나아가서는 후의 노무현 정권까지 포함하는 민간정권의 성격과 그에 대한 진보진영의 정치적 입장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관철되고 신자유주의 비판이 확산되는 속에서도, 경실련, 참여연대 등 시민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진영 내에서도 민간정권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다수적 입장이었고,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 다수적 입장은 신자유주의를 영미권 신자유주의로만 이해함으로써 자유주의 민간정권들의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고 평가하면서 비판적 지지를 변호하였다.

 

이에 대해 필자는 영미권 신자유주의와 독일권 신자유주의 즉 신자유주의의 변종문제를 제기하고, 민간정권들의 경제정책이 (독일판) 신자유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신자유주의 개념과 역사에 관한 혼란은 민간정권들에 대한 진보진영의 비판적 지지와 오늘날 이른바 반(反) MB연합이라는 정치적 오류의 토대가 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혼란은 현재 유럽의 사민주의와 미국의 민주당을 신자유주의 경향으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또 우리의 이상으로서 추구하는 망상의 토대이기도 하다. 또 대공황 이후 최대의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지배가 계속되는 이데올로기적 토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개념과 역사를 둘러싼 혼란과 오류를 정정하는 문제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와 구자유주의, 영미권 신자유주의와 독일권 신자유주의의 차이를 인식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게 필요하다.

 

이론사적으로 신자유주의란 원래 1930년대 독일에서 W. 오이켄에 의해 제시되어 2차대전 종전 후 구서독에서 사회적 시장경제론이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발전한 경제사상을 지칭한다. 1930년대에 자본주의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발전 속에서 자유주의의 위기가 노정되었을 때, 이에 대한 자유주의의 대응은 사회적 자유주의로서 케인스주의와 오이켄의 신자유주의(질서자유주의)로 나타났던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구자유주의간의 결정적인 차이는 다음에 있다. 즉 구자유주의는 자본주의시장의 일반적 조건(외적 조건: 사적소유와 시장경제를 위한 헌법과 민법/형법의 제정, 화폐발행과 관리를 위한 중앙은행제도의 정비 등)의 창출을 위한 국가의 개입을 요구하지만, 그러한 조건이 창출되면 시장경쟁의 자유로운 운동이 최적균형을 달성한다고 주장하고 그 이외의 국가의 개입을 일체 부정한다. 반면 신자유주의는 시장경쟁의 자유로운 운동이 시장경쟁의 조건 자체를 파괴하는 경향(독점화경향과 계급대립경향)을 발전시키므로 국가는 이 경향을 차단하는 정책(반독점정책과 사회복지정책)으로써 시장경쟁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름 아닌 이 두 정책의 인정 여하가 구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차이의 핵심을 이룬다. 신경제정책이든 민주적 시장경제든 우리나라 민간정권들의 경제정책은 이렇게 구자유주의로 분류할 수는 없지만 신자유주의에 포괄된다. 신자유주의는 정책적 개입으로써 경쟁질서가 유지될 경우 비로소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운동은 최적균형을 보장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정책개입이란 경쟁조건 유지를 위한 개입을 의미하며, 시장과정에 대한 직접적인 국가개입을 신자유주의는 바로 케인스주의의 폐해라고 하여 비판한다.

 

그런데 이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는 1970-80년대 현대불황과 관련하여 케인스주의적 이론과 실천을 비판하는 새로운 자유주의의 등장과 함께 다시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자유주의는 독일에서 다시 정치적 헤게모니를 획득한 사회적 시장경제론/신자유주의를 예외로 하면, 이론구성에서 구자유주의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신고전파/구자유주의에 대한 케인스적 비판을 다시 비판하여 구자유주의를 현대의 국가독점자본주의하에서 다시 복원한다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몽상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 이론적 대변인은 주지하다시피 F. A. 하이예크, M. 프리드만 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신자유주의 또는 신보수주의로 명명되었고, 미국 강단의 세계적 헤게모니 덕분에 오히려 영미권의 구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즉, 개념 사용에 착종이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미권 신자유주의, 독일권 신자유주의라고 하여 용어사용 자체를 구분해야 하며, 양자 간의 이론적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1970년대 말이래 독일에서는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영미권에서는 자유주의적 공세가 지배하였다. 한편 80년대 초 다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독일의 신자유주의는 2차대전 종전 후 경제부흥을 지도한 신자유주의보다 자유주의적 색채가 보다 강화된 것이었다.

 

이상의 혼란과 맞물려서 신자유주의의 개념과 역사에 대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또 다른 혼란과 오류가 있다.(윤소영, ‘신자유주의의 과거와 미래’, 한겨레, 2000. 7. 4.) 윤소영 교수는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신보수주의를 1970년대 미국 신우파의 사조로, 신자유주의를 신보수주의에 대항하는 1980년대 미국의 새케인시언의 사조로 파악하며, 1990년대에 신보수주의가 신자유주의(새케인시언)로 수렴했다면서 엉뚱하게도 이를 통해 일종의 워싱턴 컨센서스(?)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 파악은 아마도 보수주의=공화당, 자유주의=민주당이라고 분류하는 미국의 정치지형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본류가 1980년대 미국 새케인시안(과 미국 민주당 그리고 유럽 사민당)의 사상이라는 주장은 신자유주의의 개념과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신보수주의의 경제사상이었고(즉 정치적으로는 신보수주의,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따라서 양자는 분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의 본류는 미국 민주당과 유럽 사민당이 아니라 미국 공화당과 유럽의 보수당이었다. 미국 민주당과 유럽 사민당은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와의 정치적 논쟁에서 패배한 후 1990년대에 비로소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에 공식적으로 수렴하는데, 그것이 이른바 ‘제3의 길’이었다.(미국 클린턴/영국 블레어/독일 슈레더 정권.) 경제학적으로도 새고전파가 새케인시언으로 수렴한 것이 아니라 그 역이 진실이었다.(말하자면 신고전파 종합의 재판.) 미국에서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의 본류는 새케인지언이 아니라 시카고학파의 통화주의와 새고전파이었던 것이다. 미국 민주당과 유럽 사민당 그리고 새케인시언이 신자유주의의 본류라면, 2007/2009년 금융위기로 시카고학파가 신자유주의의 본산으로 공격받고 케인스주의가 대안으로서 복귀할 것이라는 세간의 기대, 그리고 케인시안의 공세는 설명이 불가하게 된다. 물론 세간의 기대와 달리 오늘날의 케인시안은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이 되지 못할 것이다. 케인스주의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에 의해 상당정도 오염되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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