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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하루

이 곳에 들어온지 가장 바쁜 하루였다. 오늘도 그 사람에게 몹시도 시달렸다. 그 사람은 자기 방을 쓰고 있는데 ~부자~앙 하고 부르면 나는 그 방에 가야한다. 또 뭐라고 뭐라고 하면서 지시를 내린다. 내 직책은 총무부장이다. 돈과 회원관리를 하고 있다. 처음 여기 왔을때 전화번호, 메일주소, 주소 여기저기에 구멍이 숭숭 뚤려있는 회원명부를 보고 경악을 했다. 어떻게 회원관리를 이렇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애꿎은 전임자를 탓했다. 네가 일을 열심히 안하고 가니까 내가 개고생이잖아. T.T 그런데 어제 이 사무실에서 일했던 사람이 다녀갔다. 몰래 물어봤다. 어떻게 회원관리가 이렇게 엉망일 수가 있죠. 전임자들이 오래 안 있고 금방 그만둬서 그래요. 다들 나처럼 잔소리듣는게 짜증나서 금방 싫증을 내고 그만뒀다고 한다. 사실인것 같다. 나도 그 사람 잔소리를 들을때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 자리에서 울고싶다. 제발 닥치라고. 그 사람 말이 너무 많다. 회원관리가 안되는것도 그 사람 탓이라고 한다. 이 조직은 그 사람의 사조직이나 다름이 없는데 회원조직방식이 어느 날 전화걸어서 어이~ 너 우리 조직에 회원으로 가입해 가입할거지 응 알았어 너 우리 조직 회원이다 안녕. 이런 식이란다. 그래서 회원정보도 그 사람이 업데이트 시켜줘야하는데 하지 않고 있단다. 아.. 다행히도 평상시에 나의 노동강도는 그리 높지 않다. 단지 나를 자주 부르고 부르면 잔소리가 많고 인신공격이 심하고(일을 왜 그렇게 못해 블라블라) 칭찬은 하나도 안한다는 점이다. 야단만 맞고 산다. 그러고보니 이 나이 먹도록 나는 한번도 누구의 윗사람이었던 적이 없구나. 내가 윗사람이 되면 어떨까. 차라리 당하고 사는게 나은걸까. 쫌 고상한 일기 좀 쓰고싶은데 내 삶이 전혀 고상하지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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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사회, 그 서글픔

얼마전 친구가 파리를 다녀왔다. 생각보다 도시가 너무 혼잡하고 지저분해서 실망했다고 하는데 놀란 점 중에 하나가 이주노동자, 특히 아프리카 출신 노동자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독일도 택시 노동자들은 터키 출신으로 알고 있다. 책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파리의 어느 공장노동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그들은 노동자라는 정체성보다는 이민자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소외된 자들 중에서도 소외된 자들이다.

 

현재 한국에서 이주민을 수입하는 방식은 크게 노동력과 신부 수입이다. 노동력은 다시 연수생과 불법체류자로 나뉘며 결론적으로 합법적인 신분의 노동력은 거의 존재하지 않다시피 하고 있다. 정부는 주기적인 강제추방으로 이들을 솎아내어 이들의 정착을 막고있다. 한국에 3년, 혹은 5년 이상 체류한 노동자에 한해서 합법적인 비자를 발급했을 경우 본국에서 가족을 데려오거나 한국인과 결혼하여 정착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정부는 이를 우려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 이주노동자의 경우 한국인과 결혼하면 주민등록증이 발급되며 한국에 정착할 수 있다. 한국에 수입되는 신부들도 한국인과 결혼하기 때문에 이들이 낳은 자녀는 한국인이 되고 이들의 2세는 한국인과 결혼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숫적으로 봤을때 한세대가 지나면 혈통에는 큰 지장이 없다고 보는 것이 좋다. 한국은 많은 수의 국민이 해외로 이민을 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정부는 이민자들이 정착국에서 합당한 대우를 받길 바라면서 정작 본국에서 본국 경제를 위해 희생하고 본국의 국민과 결혼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대하고 있다.

 

다문화사회라는 말은 어쩌면 듣기 좋은 허울 좋은 말일지도 모른다. 이동하는 사람들은 이동의 자유가 부여된 상류층과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 어딘가로 떠나야하는 사람들이다. 중간에는 대다수의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붙박이인생들이 있다. 우리는 이제 아무도 원치 않는 일을 대신 해 줄 사람들이 여기에 와 있다. 일본에서는 유흥가의 '삐끼'들도 아랍노동자들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제 도처에서 이주노동자들과 만날 것이다. 한국여성과 결혼할 수 없는 남성을 위해 빈곤한 세계의 여성은 계속 수입될 것이다. 필요해서 수입했다면 최소한 이들을 위한 대책은 세우는게 도리라고 하겠다. 그들은 오늘도 한국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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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망상

한동안 꿈같은 백수생활을 하다가 지옥같은 직장생활을 하고있다. 내 꿈은 백수지만 나도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한 돈때문에 직장에 다니고 있다. 몇년씩 조신히 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집에서 노는게 주말이나 휴가때나 가능하지만 나처럼 밥먹듯이 수시로 직장을 그만두는 인간은 직장을 다닐 때와 집에서 놀 때가 확연히 다르다. 우선 직장에 다니면 밥을 많이 먹게 된다. 집에 있을땐 먹고 싶으면 아무때나 먹을 수 있기 때문에 한번에 많이 먹을 필요가 없지만 직장에 다니면 먹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한 번 먹을 때 많이 먹어둬야한다. 나는 고기는 먹지 않는 주의지만 직장생활을 할 땐 고기를 먹는다. 선택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나는 고기를 즐겨먹던 그 옛날부터 고기를 먹으면 소화가 잘 안되서 고기가 나한테 안맞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직장에 다닐땐 고기를 먹어야한다. 먹을땐 맛있지만 소화가 안되서 괴롭다. 퇴근후엔 화풀이로 주로 먹는다. 지하철 타기 전에 먼저 뭔가를 먹고 지하철에 내려서 또 뭔가를 먹을 때도 있다.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돈이 너무 많이 지출된다. 어젠가 옷이 좀 끼는 것 같아서 어~ 안되겠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그 날 퇴근후에 또 먹었다. 집에 들어오면 또 망상의 세계로 달려간다. 나의 오랜 꿈은 돈버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결혼을 해서 남자는 돈벌러 밖에 내보내고 나는 남자가 벌어오는 돈으로 사는 상상에 잠긴다. 어차피 요새 직장인들은 아침은 안먹으니까 아침엔 그냥 나갈테고 점심은 밖에서 먹을테고 저녁은 먹고 들어올테니까 나는 그냥 나 먹을것만 챙기고 주말엔 모.. 단촐한 외식.. 어차피 내가 만든게 맛있을리 없잖아.. 청소와 빨래 정도하면 되지 않을까. 남의 노동에 기생해서 살아가려는 내 꿈은 아주 오래전부터인테 아무도 나와 결혼하겠다는 남자가 없어서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내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영악함이 마음에 든다. 왜 내 꿈은 실현되지 않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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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걷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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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그해의 여름

내가 그를 만난 것은 2000년 여름이었다. 당시 나는 4년째 하고있던 학원강사를 그만두고 관광안내원 자격증을 따려고 고군분투중이었다. 영어공부를 하려고 코리아헤럴드를 구독중이었는데 거기서 국내거주 외국인들을 위한 엠네스티 모임이 있다는 광고를 봤다. 한국인도 올 수 있다고 했다. 거기 가면 영어로 떠들 수 있으니 외국인 친구도 사귀고 돈 안들이고 영어공부를 할 수 있겠다아.. 이런 생각에 가보았다. 혜화동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햄버거를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인신매매 얘기가 나오자 어떤 남자가(아프리카인이다) 자기가 몸파는데 그게 왜 문제야하면서 웃었다.(사실 나는 그 대화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이해하는척하면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러자 한쪽에 앉아있던 필리핀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도 몸을 파는걸 원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홍콩 주재 필리핀 대사관에서 고용인에게 맞아죽은 글렌다 로리오라는 여자에 대해서 말했다. 그녀는 domestic worker인데 그 집에서 도망쳐서 대사관으로 피신했으나 고용인이 대사관까지 쫓아와서 그녀를 폭행했다. 사람들이 방관만하고 아무도 말리지 않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었다고 한다. 엠네스티는 국내 인권문제에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하자 그는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잘못 찾아왔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학생이냐고 영어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한국말로 노동자라고 대답했다.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봤더니 컴퓨터 임브로이더라고 했다. 컴퓨터 관련직종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물어보니 옷에 상표를 박는 재봉사였다. 모임이 끝나고 나는 그에게 전부터 이주노동자에 관심이 있어서 좀더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버스를 타면 종종 이주노동자들과 같이 탈 때도 있었지만 한번도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그는 혜화동 벤치에서 내게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는 나에게 전태일 얘기를 해주었다. 영화를 봤는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일단은 책도 샀는데 읽을 수가 없어서 괴롭다고 한다. 필리핀에는 전태일처럼 용감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에게 전태일 얘길 처음으로 해준건 이주노동자다. 그를 따라서 혜화동에 있는 필리핀 공동체에 갔다. 허름하고 비좁은 집인데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다들 나에게 사장이 월급을 안준다며 전화 좀 해달라고 했다. 전화를 걸었더니 사장이 넌 누구냐고 했다. 친구라고 했더니 그냥 끊었다. 기분이 몹시 나빠진 나는 외노협에 전화를 했다. 체불임금상담하는걸 해보고싶다고 했더니 언제 찾아오라고 했다. 거기 갔더니 어떤 센터에서 일하는 활동가가 있었는데 주말에 아주 바빠죽겠으니까 와서 좀 도와달라고 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그 센터에서 주말에는 상담활동을 도왔고 주중에는 노동부 지방노동사무소에 갔다. 상근하시던 분이 노조를 만들겠다며 떠났고 빈자리를 내가 채웠다.

 

일요일이면 센터는 북새통이었다.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관계는 결코 동등한 것이 아니어서 내게 상담을 받으러 오는 노동자들은 여자건 남자건 나를 무척이나 하늘처럼 우러러봤다. 자기들 문제를 내가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자마자 공장에서 얼마나 수모를 당했는지 하염없이 말하곤했는데 나는 내가 묻는 사실에만 대답하라고 차갑게 말했다. 그 얘기 다 들어주다간 날 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 중 일부는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만 얘기하고 불리한 사실은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가고 난 다음에 사장한테 전화를 하면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한다. 보통 노동자 세 번, 사장 세 번 이렇게 확인을 하고난 뒤 사실관계가 정리되면 수순에 들어간다. 될 수 있으면 진정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처리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진정을 하게 되면 노동사무소에 가야한다. 사장은 보통 장부를 들고 오는데 완전 지꼴리는대로 썼기때문에 그건 볼 필요도 없다. 처음 노동사무소에 갔을때는 근기법을 잘 몰라서 감독관에게 당하기 일쑤였다. 노동사무소 화장실 유리를 박살을 내고싶을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어떤 노동자는 막상 사장이 나타나면 나한테 했던 얘기와는 정반대 얘기를 해서 그 싸움을 완전히 패배로 이끈다. 밖에 나가서 당신 왜 그랬냐고 부들부들 떨면서 물어보면 사장이 무서워서 그랬다고 한다. 그 다음부터는 좀 온순해보이는 노동자를 보면 들어가기 전에 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당신 사장이 아니라고 몇번이나 다짐의 다짐을 받아야했다. 나는 정말이지 그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굴었다. 당신들이 원하는건 돈이잖아. 돈을 못받으면 노동자들은 울거나 분노하거나 굉장히 괴로운 반응을 보인다. 처음에는 나도 어쩔줄 몰라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좋을지 몰라 같이 괴로워했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상황에 맞게 문구도 매뉴얼화되어 적절한 말을 자동적으로 읊어주었다. 나는 거기서 라틴 아메리카 계열 노동자들 빼고 우리가 흔히 제3세계라고 부르는 곳에서 온 사람들은 거의 다 만나봤다. 부르키나파소에서 온 노동자도 만났는데 어떻게 한국을 알고 오셨습니까 하고 물어봤더니 친구가 여기서 일하길래 나도 왔다고 대답했다. 필리핀이나 파키스탄 노동자들은 한국에 거의 맨처음 유입된 노동자들이어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반해 아프리카(모로코, 알제리, 튀니지아 제외한)에서 온 노동자들은 한국에서 가장 가혹한 대접을 받고 있다. 한번은 어떤 아프리카분이 자기 작업일지를 들고 왔는데 나는 그걸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두 달 동안 일한 시간이 빼곡이 적혀있는데 그는 두 달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24시간을 일하고 그 다음날 18시간을 일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날은 16시간. 이런식으로 그의 작업일지는 무지막지하게 이어졌다. 이렇게 일하고도 죽지 않은게 희한한데 더 이상 일못하겠다고 했더니 돈은 나중에 줄테니 그냥 가라고 하더니 아무리 찾아가도 돈은 주지않고 욕설만 한다고 한다. 내가 센터에서 일했던 그 2년 동안 지난 30년 동안 살아오면서 당했던 수모를 모두 당했다. 그 2년 동안 그 전해에는 보도 듣도 못한 끔찍한 일을 경험했다. 볼거 못볼거 다 봤다. 사장한테 임금을 지급하라고 전화를 했더니 사장이 야밤에 도망을 갔는데 어떻게 돈을 주냐고 고함을 지르길래 찾아가보면 그 공장은 틀림없이 택시만 들어가는 아주 으슥한 곳에 있는 공장이다. 좀 무서운 얘기지만 그런 공장에서는 불법체류자 한 명 죽여서 땅에 파묻어도 모르지 않을까. 근로감독관들도 그럴거라고 그랬다. 어떤 공장에서는 매달 산재가 발생하는데 가보면 노동자들이 새까만 먼지를 뒤집어쓰고 눈만 반짝이면서 일을 하고 있다. 내 눈에는 도저히 그들이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공단에 있는 병원들은 산재가 발생하면 돈벌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아주 좋아하고 사장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 한번은 손을 심하게 다친 베트남 노동자가 있어서 찾아가봤더니 경미한 상태인 한국사람들과 같은 병동을 쓰고 있길래 사장에게 그 사람은 안정을 취해야하니까 독실을 쓰게해달라고 했더니 참견말라고 했다. 한번은 몽골 여성노동자가 손가락이 잘려서 같이 일하는 남자 상근자와 찾아가봤더니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나와 같이 일하는 상근자는 카메라를 꺼내더니 사진기자처럼 자세를 바꿔가며 사진을 계속 찍었다. 그가 사진을 찍은 이유는 그 사진을 소식지에 올려서 회원들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함이다. 나는 의자로 그 인간의 머리를 쳐서 그가 피칠갑을 하고 뒹구는 상상을 했다. 산재다발공장에는 근로복지공단에서 내사가 들어오는데 기계를 좀더 안전한 것으로 바꾸게 한다. 그러면 생산성에 차질을 빚는 경우가 있는데 안절부절못한 사장은 망치를 들고 와서 안전장치를 부순다. 아까와 똑같아진다. 처음에는 순진해서 노동자들에게 프레스공장 다니면 손가락 다치니까 딴데서 일하라고 했는데 나중에 가구공장이나 얼음공장에서 일하다가 허리다친 사람보니까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다. 나는 체불임금상담만 했기때문에 산재의 세계는 잘 모른다. 하지만 산재다발공장에 가면 가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저 공장에서 다친 사람에게 보상금을 받게 해주는게 전부일까. 저 공장이 존재하는한 산재는 계속 발생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나는 점점 무기력함을 느꼈다. 급기야  어느 날엔가는 대대적인 강제추방이 벌어져서 이주노동자들을 전부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남의 나라에서 기계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사는건 너무 끔찍한 일이다. 2001년엔 대대적인 단속추방이 벌어져서 한달동안 사무실만 지키고 있었다. 오뉴월 여름에 이주노동자들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애가 울까봐 애 입을 틀어막았다. 경찰이다 하는 소리에 맨발로 뒷산으로 도망치다 발에 피가 났다. 임신한 아내와 함께 병원에 갔던 남자가 붙잡혀서 아내가 그 자리에 쓰러져서 통곡을 했다. 내가 만났던 노동자들은 대부분 빨리 돈벌어서 집에 돌아가고 싶어했다. 어떤 중국 아저씨는 지갑에서 딸의 흑백사진을 보여주면서 자랑을 했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이 앨 못본지 벌써 오년째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가족에게도 이용당한다. 한국에서 송금하는 돈은 가족에게는 큰 돈이어서 가족이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고 자식은 아버질 남대하듯이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돈을 보내지 않으면 본국에 있는 가족이 큰 곤란을 겪기 때문에 나는 체불임금을 해결해주는 것을 큰 보람으로 느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아무리 내가 그들을 대상화하지 않으려 해도, 그들의 삶에도 아름다움이 있다고 해도, 그들을 연민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으려고 해도, 끔찍하다고 할 수밖에는 없다. 월드컵이 벌어진 2002년 여름 어느 날 손이 잘린 베트남 노동자를 만나러 병원에 갔다. 그는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알았다한들 우리는 대화를 나눌 수 없었을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감당할 수 없어서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 날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신촌에 갔는데 붉은 티를 입은 사람들이 길거리를 가득채우고 있었다. 모두들 행복해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똑같은 사람인데. 나는 결국 거길 떠났다. 2년이 채 안되는 그 시간은 알수없는 슬픔과 분노가 뒤엉킨 시간이었다. 나는 내가 삶의 비밀 중 하나를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건 도저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외설이었다. 나는 떠났지만 그들은 떠날 수 없다는 사실에 일말의 죄책감같은걸 가지고 살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아졌다. 거길 떠난 뒤 몇 달이 지나서 거울을 보았을 때 내 눈빛이 순해져 있는걸 보았다. 화난 표정을 지어보았는데 잘되지 않았다.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더 이상 그들의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닌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있다. 언젠가 누가 예전에 다 끝난 일을 가지고 날 찾아온 적이 있다. 진정건이 사장의 지급불이행으로 검찰에 송치되어 완전히 끝난 사건인데 굉장히 힘들었는지 다시 그 사건을 진행해달라고 왔던것같다. 나는 안된다고 계속 설명했는데(뭐 달리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 일말고도 일이 억수로 많았다) 그 사람은 끝도 없이 자기 얘기만 했다. 내가 화가 불같이 나서 노발대발하자 그걸 보고 있던 어떤 사람이 이 여자 도대체 뭐에요? 시골에서 왔어요? 하고 물었다. 엥? 그 사람 생각에 따르면 도시에서 자란 여자는 교양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삿대질을 하면서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랐다고 했더니 나에게 체불임금 상담하는걸 가르쳤던 선생님이 쓸데없이 이 사람 저 사람과 싸우지말라고 했다. 그 일 때문인지 남과 다투기 좋아하는 내 성격은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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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중2때 별명이 펭귄이었다. 키는 작은데 발만 빨리빨리 움직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언니가 집에 들어오려고 하는데 눈앞에 뭔가가 휙 지나가서 저게 뭐지 했는데 나였다. 집앞에 있는 가게에서 뭔가를 사가지고 쏜살같이 집에 들어갔던 것이다. 백미터 달리기도 아주 잘한다. 오래 달리기도 아주 잘한다. 예전엔 수영도 아주 잘했다. 그러나 운동부족과 흡연으로 요즘은 부진을 면치못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걸음은 빠르다. 사람들은 나보고 아주 씩씩하다고 한다. 그런데 내겐 걸음이 불편한 친구가 있다. 오래전에 그 친구와 걸어가다가 친구가 나한테 한마디했다. 다리 멀쩡하다고 티내는거야. 그 말을 들었을때 몹시 언짢았다. 난 원래 걸음이 빠를뿐인데. 그 친구를 배려하지 않은건 사실이지만 친구와 같이 있다보면 친구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저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을텐데. 속으로 서운했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나서 바로 며칠 뒤 백화점에 갔는데 어떤 애가 에스컬레이터에 장난을 치다가 엎어질뻔 했다. 그러자 그 애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병신되고 싶어, 어? 너 병신되고 싶어. 내 친구는 이런 세상에서 살고있는거였다.

 

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을때 친하게 지냈던 선생님들이 고생많이 했다고 부산에 놀러오라고 했다. 부산엔 회의때문에 몇 번 간 적이 있었는데 맨날 일하러 오고 제대로 구경도 못했으니까 이번엔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해서 나는 직장을 그만두자마자 부산엘 내려갔다. 그런데 바퀴가 달린 가방을 들고간게 화근이었다. 그 가방때문에 계단을 만날때마다 괴로웠다. 왜 그렇게 계단이 많은지, 그리고 길바닥은 왜 그렇게 험난한지, 나중엔 선생님들도 다음엔 그냥 배낭메고 놀러가라고 하셨다. 서울에 올라왔을땐 너무 힘들어서 그냥 택시를 탔다. 택시에 타자마자 나는 기진맥진해서 가방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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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OPLE UNITED WILL NEVER BE DEFEATED

Frederic Rzewski performs his own composition--live March 2007 at the Miami international Piano Festival: the theme and opening variations of this monumental work based upon the Chilean protest song"El Pueblo Unido jamas sera vencido!" The entire performance is available on VAI-- http://www.vaimusic.com
http://www.miamipianofe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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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은 괴로워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느라 바쁘다. 나는 지금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몰래 이 글을 쓰고있다. 내게는 두 명의 윗사람이 있다. 둘 다 남자다. 한 명은 말수가 별로 없고 야단을 칠 때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은 이런 식이다. "사무실에서 담배피지 마세요" "수식 어디 갔어요" "이걸로 인수인계는 끝났어요. 더 이상의 인수인계는 없어요" 필요한 말만 하기 때문에 그의 지시는 반드시 적어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아.. 이건 지금 얘기해봤자 00씨가 못알아들을테니까 나중에 얘기하고..

 

또 다른 한 명은 말이 너무 많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는 지시를 내리지만 필요 이상의 말을 너무 많이 하기때문에 어떤게 지시인지 분간이 안간다. 결국 또 혼이 난다. 항상 일을 시키고 나는 시키는대로 했는데 그 결과가 마음에 안들면 다시 하라고 한다. 이건 결국 자기 지시가 마음에 안든다는 소리다. 지금까지 조직관리 개판으로 해놓고서, 그것도 지난 5년동안!!! 이제와서 단 하루만에 단 이틀만에 회원명부를 다시 만들라니 이 조직이 망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자기는 5년동안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회원들에 대한 정보를 다 꿰차고있지만 나는 지난달에 왔는데 나보고 이 사람 메일주소가 틀렸다는둥, 이 사람 휴대폰 번호가 바뀌었다는둥, 지금 이 사람은 여기서 일하지 않는다는둥 하며 화를 낸다. 어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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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도 괴롭다

나의 오래전 친구의 아버지는 자신이 대단히 비범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고 정계에 진출할 꿈을 품고 있었지만 집안사정으로 교사가 된 것이 철천지 한이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부모의 중매로 결혼을 했는데 그의 아내는 국졸이었고(지금식으로 얘기하면 초등학교만 나오신 분이다) 부부싸움을 할때마다 무식하다고 하면서 기선제압을 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이 말이 너무나 상처가 되어 검정고시를 봐서 고등학교 수료증을 땄다고 하신다. 그리고 못배운 것에 대한 설움때문에 평소에는 굉장히 귀부인처럼 하고다니신다고 하신다. 내 친구는 교사가 되는게 꿈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남자는 무조건 정치학과나 경제학과를 나와야한다고 하셔서 그는 경제학과를 들어갔고 대학 4년 내내 아무런 보람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형들은 결혼을 할 때 부모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그 이유는 그의 아내들이 내세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형수들이 당한 어머어마한 수모에 대해 소상히 얘기해주었는데 그 이유는 나도 그 여자들처럼 내세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명절이 되면 집에 같이 내려가자고 했지만 막상 명절이 되니까 혼자 내려갔다. 명절이 되면 그의 형수들은 죽도록 일만 하는데 집에 돌아가면 끔찍한 복수극이 벌어진다고 한다. 아마 그 형수들은 시부모가 늙기만을 기다리지 않을까. 내 친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감정을 보이는것은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며 싸움을 할 때 감정소모를 하지 않도록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야단을 맞을 때에도 울거나, 울다가 어머니가 달래주거나 하면 둘 다 몹시 심하게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보통 대화를 할 때는 몹시 예의바른데 상대방이 자기 마음에 안드는 소리를 계속하면 그 다음부터는 무자비해진다. 그는 무척 이성적이고 자제력이 강해보이지만 사실 그의 자제력은 대단한 것이 아니어서 내가 계속 시비를 걸면 웃으면서 생까는척하다가 이런 씨발 조까네 하면 그건 그의 인내심의 막대기가 분질러졌다는 뜻이다. 그 다음부터는 욕설을 섞어가면서 혼자서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그걸 보고있으면 걔 책꽂이에 있는 책을 다 걔 머리통에 던져버리고 싶어진다. 그는 평소에는 사람같이 말하다가 자기가 좀 아는 주제나 심사가 뒤틀리거나 하면 혼자서 뭐라고 뭐라고 말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때는 싸워도 항상 내가 밀렸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승리는 나의 편이어서 나는 그가 나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왜냐면 그가 방에서 혼자 쉬고 있을때 나는 방구석에서 어떻게 하면 이길까를 궁리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너와는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을것같다는 통보를 받았다.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은 결혼을 한 뒤 아주 밝은 성격으로 바뀌었다. 올케가 밝은 성격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 ^0^ 심지어 아빠마저도 동생을 보면 저 놈이 내 아들이 맞는지 하고 놀래신다. 엄마는 오래전부터 아빠와 헤어져서 미국에서 살고 계신데 몇년전에 동생 부부가 미국에 있는 엄마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다음에 올케가 나를 찾아와서 부들부들 떨면서 그 때의 일을 회상했다. 엄마의 아들 사랑은 유별난 것이어서 심지어는 어렸을때 언니와 나는 눈물, 콧물을 흘려도 약을 안주셨지만 동생은 조금만 캘록거려도 약을 먹여서 아무리 약을 먹어도 잘 듣지 않는 기질로 애를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동생 부부가 미국에 갔더니 엄마가 사람들 보는데서 올케는 사람 취급도 안하고 아들 자랑만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엄마가 올케에게 어떤 남자에게 받은 반지를 보여주면서 너 남자한테 이런거 받은적 있니 하고 자랑을 하시더란다. 내가 그 말을 듣자 엄마가 드디어 미쳤구나!!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니까 올케가 식겁해서 놀랬다. 엄마는 미국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올케가 미국에서 기분이 너무 너무 나빠서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손을 부들부들 떨고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훔치니까 내 동생도 말없이 가만히 있더란다. 그리고 집에서 끔찍한 복수극이 벌어졌다고 한다. 불쌍하다 내 동생.. 내 동생은 아무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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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숨겨진 기억의 비밀

맥락 기억의 또 다른 결과는 우리가 들은 (또는 보거나 만지거나 맛을 보거나 냄새를 맡은) 거의 모든 정보가 좋든 싫든 몇 가지 다른 기억들을 (종종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촉발한다는 사실이다. '비자의적 기억'이란 말을 만들어낸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유명한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회상들은 모두 맛과 냄새가 결합된 딱 하나의 자극을 의식적으로 재인한 뒤에 촉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기억의 실재는 프루스트가 상상한 것보다도 더 굉장하다. 정서적으로 의미심장한 냄새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예컨대 나의 옛 동료인 존 바르그가 뉴욕대학에 있을대 수행한 독창적인 연구를 살펴보자. 그의 실험에서 피험자들은 모두 대학생들이었는데 그들은 흐트러진 문장들을 정돈하라는 과제를 받았다. 이 흐트러진 문장들 가운데는 어떤 공통 주제와 관련된 단어들(예컨대 '늙은', '현명한', '잘 잊는', '플로리다' 같이 '노인'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이 들어 있었다. 피험자들은 그들이 부여받은 과제를 열심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진짜 실험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바르그는 학생들이 과제를 마친 뒤 실험장소를 떠나 복도 저편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장면을 몰래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학생들이 이전에 읽은 단어들이 그들의 걸어가는 속도에 영향을 미쳤다. 모든 학생들이 저마다 볼 일이 있고 갈 곳이 있었을 텐데, 유독 '은퇴한', '플로리다' 같은 단어들을 정돈했던 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천천히 걸었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사소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연구 대상이었다. 실험 결과 '교수', '지적인' 같은 단어를 미리 접했던 사람들은 '축구장 난동꾼', '어리석은'같이 덜 고상한 표현들을 접했던 사람들보다 지적인 과제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이렇게 볼 때 농구선수들이 상대팀에게 퍼붓는 온갖 험담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효과를 발휘할지도 모른다.

 

- 클루지/게리 마커스 지음

 

내가 처음 그 곳에서 일했을때 그녀와 나는 사이가 좋았고 우리 사이가 틀어진 것은 그녀가 나의 문제해결방식을 문제삼으면서부터였다. 그녀는 냉소적으로 웃으며 네가 정의의 사도라도 되니하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생각했을때 내가 정의가 사도라서가 아니라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이 원래 그랬다. 나는 그녀의 문제해결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녀는 나의 윗사람이기 때문에 감히 말하지 못했다.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그녀는 거의 매일같이 나에게 넌 논리적이지 못해서 라고 말했다. 그 사무실엔 거의 매일 그녀와 나 둘 뿐이었고 아무도 그녀가 나에게 매일같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한번은 나와 대화를 하다가 화가 나니까 자기가 먹던 사과를 내게 던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또 어떨때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애처럼 행동하는거 내가 언제까지 참아야하니. 내가 애처럼 행동하는건 사실이지만 그녀도 애처럼 행동할때가 있고 나는 감히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나는 매일같이 그 사무실에서 혼자 창밖을 바라보며 나 자신과 싸워야했다. 논리적이지 않다는 말은 한번 들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매일같이 들으면 상당히 자신감이 떨어진다. 나는 결국 그 직장을 좋게 끝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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