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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를 배회하는 유사 파시즘

노무현,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진보 학자群
 
 
오늘은 우리 사회에 창궐하고 있지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부정적 사회현상에 대한 얘기이다.


노무현 대통령(이하 경칭 생략)과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그리고 얼마 전 전두환식 영남파시즘의 혈통을 이어받고 있는 한나라당 그들 모두 유사파시즘적 행태를 보였거나 보이고 있다.  어떤 독자는 무슨 소린가 할 법 하다. 필자가 왜 그렇게 노골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가는 읽다 보면 이해할 것이다.


가장 적극적으로 지역주의정당이라고 딱지를 붙이며 혈안이 되어 매도하는 측은 민주노동당과 이른 바 좌파진보진영의 학자들이다.

 

우선 지역주의정당이라고 할 때 그 개념을 명백히 하도록 하자.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며 무소속출마및 정당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등 일련의 기본권이 보장된 민주주의 국가이다.  그리고 보수주의(자)나 자유주의(자)가 반사회적이라거나 위헌적인 그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나 모두 합법적으로 정당활동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보수정당이기 때문에 지역주의정당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만약 보수정당이기 때문에 지역주의정당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상의 자유를 부정할 뿐 만 아니라 은연 중 (좌파)진보주의만이 가치로운 그것이라는 전제에 서기 때문이며 그것은 곧 사상의 자유와 양립할 수 없는 위헌인 파시즘적 자의적 현상재단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 지역주의 정당이라고 매도될 때 반개혁적 혹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지역에 기반한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무차별하게 매도의 대상인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보수정당이기 때문에 지역주의 정당이 아니라, 민주당은 주요지지 기반이 호남유권자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한나라당은 영남지역 유권자들을 지지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지역주의 정당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조사해 본 결과 가장 지역주의적인 정당은 민주노동당으로 드러 났다. 비례대표제야 어느 당이든 존재할 수 있는 의원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지역주의정당 유무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지역구의원들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권영길은 창원시에서 당선되었고 역시 민주노동당의 조승수는 울산 북구에서 당선되었다. 가장 지역주의 정당인 셈이다.   따지고 보면 지역주의 정당외에는 대한민국에는 없는 셈이 된다.


그럼에도 노무현,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과 진보진영의 학자들은 민주당과 한나라당을 지역주의 정당이라고 몰아세우며 정치적 공세를 일삼았고 일삼고 있다. 이게 합당한 작태인가?


이러한 부당한 작태를 자행하는 자체는 곧 파시즘이다. 역사적 의미로의 파시즘이 아니라 자기 주의.주장과 정당이 절대선이며 다른 대상은 무차별하게 무가치하다는 입장을 지칭하는 의미에서 유사 파시즘이다. 우리사회에서 횡행하는 이러한 파시즘의 만행이 대낮에 아무런 제지없이 버젓이 활보하고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지금 현재에도 사이버에서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 이른 바 빨갱이 사냥과 흡사한 지역주의정당이란 딱지 붙이기의 파시즘 망령이 우리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현실을 네티즌과 국민들은 자각해야 할 일이다.  이러한 파시즘적 맹아로부터 파시즘이 대두되기 때문이다.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관점의 주장들이 묻혀지고,  인물 본위의 맹목적 지지자들이 목청을 돋구고 파시즘적 주장이 걸러지지 않을  때 그리하여 정치권을 제대로 비판 견제할 수 없다면  우리 사회는 어느 덧 파시즘에 휘둘리는 불행한 시대를 맞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자아내게 하는 세태가 아닐 수 없다.

 

파시즘은 그 양상은 다양하나 질적으로 똑 같이 파시즘일 뿐이다.   필자가 파시즘적 작태를 일삼는다고 지목한 정당과 인물은 이의가 있다면 말씀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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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진영의 파쇼적이며 자의적인 현상재단

 

[비평] 진보진영의 전향적 자세가 필요하다.

 

대자보에 게시된 류철원의 "노대통령의 선봉장, 유시민의 '앙시앙 레짐' "에 대한 비평글이다. 크게 문제되는 부분만 부각하여 지적할까 한다. 특히 필자는 좌파아닌 진보주의자이지만 이 글은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를 위한 글이라고 이해해도 좋겠다.

 

류철원의 글의 요지는 아래와 같고 그것이 바르다로 간주하고 시작하겠다. "이념의 협애성에서 지역주의정당이 온존된다고 주장하는 최장집과 선거제도 변경을 주장하는 유시민의 그것들은 보완적 쌍두체제로 결합될 수 있는 성질로 보수일색 "이념적 편애성"이란 제약된 조건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은 단순하며 본성적일 수 밖에 없으니 이질(이념)적인 좌판을 벌려 놓아야 하고 그 최선의 제도적 환경은 "중대선거구제-순수 정당명부제"라는 것이다.

 

 

필자가 비판하는 논지는 아래와 같다.

 

1. 먼저 유시민과 최장집의 그것들은 모두 문제가 있다. 결함있는 것을 전제로 논리를 전개하여 그것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대로 엉뚱한 헛다리를 긁으며 악을 써대는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2. 다음으로 류철원이 유시민을 골때리는 논리와 독선이라고 비난하는데는 동의하나 정작 당사자인 류철원은 멀리 "파쇼적"으로까지 나아가며 협박까지 일삼는다.

 

먼저, 류철원은 한사코 진보주의 정확히 좌파를 선이며 개혁적이라고 전제하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것은 보수일색이라느니 반민주적인 열린우리당을 자의적으로 보수정당의 전범으로 삼는 태도에서나 여타 정당들을 깡그리 지역주의정당이라고 매도하고 있는 점에서 그러하다. 전국 모든 지역에서 고루 고루 점수를 따는 유시민식 정당이지 않는 한 영락없이 지역주의 정당으로 낙인찍히게 생겼다.

 

도대체 어떤 정당이 유시민식으로 전국적 고루 고루 정당이어야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서나 비로소 정당이며 류철원식으로 좌파라는 사상적 기반에 근거하지 아니하면 지역주의정당이 돼 버리고 진중권이 즐겨쓰듯 보수정당의 정치인들은 정치자영업자라고 매도될 수 있는 하찮은 것들인가?

 

그렇다면 비슷한 논리로 나는 민노당과 열린우리당을 이렇게 표현하겠다.. 무식하고 파쇼적이고 무법적이고 부패한 지역정당이라고 말이다. 간단히 동의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부패했다는 측면에 게거품을 물고 따질 것이라 생각되어 그 단서를 제공하겠다.

 

"중앙선관위 공식 발표에 따르면 총 242건의 위법 사례중 열린당은 102건을 차지했고 한나라당 78건, 민주노동당 22건, 민주당 8건, 자유민주연합 4건으로 민노당이 (상대적 비율로) 1위를 랭크하고 있고 또 국고보조금을 불법 사용한 것으로 확인된 규모에서도 열린당은 1억8329만원으로 제1야당인 한나라당의 3634만원의 4배 이상인 것으로 밝혔졌다. 이와 관련, 민노당은 5387만원으로 한나라당 보다 액수가 많은 2위를 차지했고 민주당은 2360만원에 그쳐 민노당이 (상대적비율로) 1위를 랭크하고 있다. 데일리안(2005-08-19자)"

 

류철원이 그토록 열망하는 진보(?)정당의 한 단면이다. 두 자료에서 톱을 달리고 있다. 제도권에 입성한지 3년도 안 된 10석여의 정당이 모습이니 30년정도 되거나 의석수가 많아지면 어떠할 것이라는 것을 가히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아울러 다른 민노당의 속성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토론을 요청한다면 누구에게나 흔쾌히 응하겠다.

 

아무튼, 류철원과 최장집과 유시민이 염원하는 정치지형이란 간단히 이렇다.

 

무소속출마는 배려할 필요없고, 이른 바 이처럼 자랑스러운 이념정당인 민노당과 문제있는 보수정당들을 깡그리 묶어 보혁 대립구도를 위한 제도적환경을 조성하여 유권자에게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의 좌판에서 엿을 골고루 사서 즐기도록 구도를 짜는 것이 지역주의를 해소하는 첩경이며 비결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개성의 다양성처럼 보수정당의 나름대로의 차별성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사상의 자유니 사상의 다양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곧 어느 정당지지자들의 지지 정당이나 차별성을 무차별하게 무시하고 매도하는 것이며, 몰역사성이라는 용어정도는 알 터이니 민주당과 한나라당을 등치시켜 차별성을 없애버린다는 작태가 무슨 짓을 자행하고 있는지의 의미쯤을 쉽게 알 것이다.

 

그러하니 사상의 자유를 드높이 구가하는 좌파들의 구호만큼 공허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특정집단에 대한 부정이므로 그 해악의 양이 구성원만큼 배가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모습이 민노당이나 좌파가 갖는 사상적 기반이고 이런 생떼가 그대로 파쇼적 발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최장집류를 필두로 하는 이념의 협애성이 그대로 지역주의 정당의 원인이 된다고 계속 우기려면 과거 공산주의국가들과 나찌즘 파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그 때, 그리고 우리 가까이 있는 노동당만이 존재하는 북한에도 지역주의가 무성해야 되고, 나아가 류철원과 유시민은 또한 소선거구제를 채택하는 제반나라에서 지역주의가 극성을 부린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진보학자들과 류철원식으로 보수정당을 지역주의정당이라 딱지를 붙이는 것은 과거 사이비 보수인 한나라당이 좌파들을 잡을 때 쓰던 빨갱이 마녀사냥과 질적으로 하나도 다르지 않은 생사람 아니 생政黨 잡는 것이고

 

과거 그러했던 사이비 보수정당과 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오히려 사상의 자유 언론표현의 자유를 위해 반독재투쟁에 앞장섰던 민주당을 한나라당과 등치시켜 부패정당이니 정치자영업자니 하며 딱지를 붙이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백주대낮에 공개적으로 떼거리로 자행되고 있는 이 몰역사적 유린과 화려하게 치장한 진보주의라는 옷을 걸친 민노당의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또 있다. 보수주의,보수정당 좌파진보주의,민노당을 무차별하게 혼용하며 기성 보수정당의 흠을 마치 보수주의나 자유주의 자체의 결함으로 몰고 나아가 좌파진보주의의 가치우위적인 지위라는 전제가 시공간적으로 확보된 것마냥 거드름을 피운다.

 

마지막으로 엉터리 전제로부터 자의적인 잣대로 화려한 수사를 섞어가며 엉터리 결론을 도출하여 자화자찬 오르기(orgy)를 맛보고는 류철원이 꿈꾸는 그런 괴상한 정략적 구도로의 직진에 동참하지 않으면 바로 구체제의 후예들이라며 협박까지 일삼는다. 정말 괴상한 꼬락서니가 아닐 수 없다.

 

전제도 틀렸고 전개하는 논리도 그러함에 더 문제삼을 필요없겠지만, 그 토록 정의롭다고 찬송가를 불러대던 중대선거구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제 글을 맺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중대선거구제란 한 선구구단위에서 2인이상의 대표를 뽑는 제도를 말한다. 소선구제나 중대선거구제나 모두 장단점을 가진다. 중대선거구제의 가장 큰 단점은 1위와 2위(3위등)의 민주적 정당성의 양이 달라 투표가치의 평등을 크게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A선거구에서는 1위와 2위 당선자가 6:4 심한 경우에는 9:1로 당선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9를 얻은 의원과 1을 얻은 의원이 같은 가치로 의정활동을 하는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단위선거구당 인구편차를 조절하여 지역구를 획정하고 소수(2위)표나 사표들에 대해 비례대표제로 보완하는 등 투표가치의 평등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존재하고 있는데도 소선거구제라는 가치중립적 제도가 마치 지역주의(정당)의 원인인양 매도하면서 중대선거구제가 절대지선의 제도인양 찬양가를 불러대는 것이다.

 

현행 선거구제는 제1당에 프리미엄을 주어 정국안정을 꾀하자는 취지로 할증적비례대표제를 채택하였다. 그런 점에서 투표가치의 왜곡을 수반(링크 참조)한다. 그리하여 투표가치의 평등을 보다 관철하기 위해서는 바뀌어야 할 것이지만 이 또한 역사에서 보듯 어느 정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할 때 무차별하게 그런 제도적 수혜를 입는다는 점에서 중립적이다.

 

이제 결론을 내야겠다. 지역주의는 제도에 의해 배태된 존재가 아니고 인위적으로 독재자 박정희와 그 후 일련의 경제정책등에 기인하여 고착되었는데도 진보정당은 정략적 목적에서 지역주의를 무차별적으로 매도하며 빨갱이사냥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는 민주당에 대한 마녀사냥을 자행했고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작금의 망국적 지역주의는 제도에 의해 해소될 수 없고 위정자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기십년 묵은 지역(경제)적 차별등의 제도외적 원인에 까닭이 있고 전대 정상모리배들이 저질러 놓은 사회적 부조리를 후대 정치권에서 해소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즉 소외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적 배려로 해소해야 할 사회적 현상인 것이다.

 

류철원과 좌파진영의 시원한 반론을 기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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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모리배인 유시민의 궤변에 대해서


[비평] 우리 모두가 앙시앙 레짐의 자식입니다.
  

  
최장집 교수(이하 경칭 생략)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개정판 ‘후기’에 대한 유시민의 "우리 모두가 앙시앙 레짐의 자식입니다"에서의 요약을 존중하고 문제점과  이견을  주석으로 달도록 하겠다.  유시민과 최장집이 지적 권위주의자가 아니라면 소시민의 분석에  답변을 기대한다.

(유시민은 최장집의 책을)  5)" 지역주의 : ...한국의 지역주의는 권위주의 지배의 한 산물로서 반호남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바...지역주의는 그 자체가 독자적이고 지배적인 균열이 아니라 권위주의의 잔여범주로서 정당체제의 이념적 협애성과 사회적 기반의 약함, 시민사회의 강한 보수 헤게모니 등으로 인해 작위적으로 동원될 수 있었고 영향력을 가졌던 일종의 종속변수였다.  문제는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역주의를 만들어내고 유지시키는 현재와 같은 정치적 대표체제를, 보다 민주화하고 갈등의 이념적 계층적 기반을 넓히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라고 요약하고 있다.

이 문제를 천착해 보도록 하자. 최장집의 말처럼 지역주의란 정치권에 의해 자행한 인위적 산물이라는 점에서 종속변수가 분명하다. 그리고 지역주의라는 개념은 암묵적으로 부정적인 관념이 전제되어 있다 하더라도 적확한 표현이 아니다. 부정적인 지역주의이며 혁파해야 할 중병이라고 핏대를 올리면서도 정작 중병의 원인 규명과 그 처방이 전혀 없거나 빗나가고 있다.  

경제적면으로만 국한해서 보더라도 멀게는 아시아에서 먼저 근대화한 일본에 인접한 대문(부산)이라는 지형적인 여건으로  그 후 일제의 대륙침략路 기능에서  지역불균형의 유래를 찾을 수 있겠지만,   인위적으로 지역적 불균형을 심화시켜 고착시킨 자는 독재자 박정희의 불균형성장론에 입각한 경제개발론과 정권유지욕에서 자행되었고 그 이후 (수도권을 제외한) 비영남지역과 영남지역의 지역불균형이 심화돼 온 것이 객관적 사실이다.

지금 유시민이나 최장집이 지역주의를 단순히 정치현상으로만 (국한시켜) 이해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유시민은 권력확보에 혈안이 돼 있는 정치모리배인 까닭이고 사회학자인 최장집은 지역주의에 대해 사회학자로서 피상적인 이해수준에 그친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평등하게 세금을 내며 평등한 국민으로서 특정지역(호남 또는 비영남)에 거주한다는 사실만으로 불이익(사회적 비용)을, 영남은 상대적 수혜를 기십년 동안 누려온 것이다. 이것은 현재  경제,사회,문화등 제반영역에 강고하게 고착되어 있다. 필자는 이를 영패(영남패권주의)구조라고 지칭한다.

그리하여  최장집의 그릇된  인식에 바탕한 지역주의인과(또는 관계)론을 토대로 유시민이 반박논리를 진행하는 것은 소모적일 뿐이요 그 해법도 맞을 리가 없다.

지역주의, 정확히 영남패권주의는 정상모리배에 의해 자행된 인위적인 사회(부조리)현상이므로 당연히 정치인들이 적극적인 시정책으로 해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100M경주에서 약체주자(비영남지역)와 날렵한 준마(영남지역)를 경쟁시키는 것과 같은 부당한 조건을 정당화하는 비인도적 방관만이 남을 뿐이다.

결국 최장집의 잘못된 분석을 토대로 유시민이 논리도착 혹은 인과전도라니 하며 반박하는 태도는 무의미하므로 비평을 가할 필요는 없지만,  유시민의 반박논리의 문제점을 좀 더 보기로 한다.  

유권자인 국민과의 관계에서 지역주의및 정치지형(선거결과)은 종속변수일 뿐이고,   정치제도와 지역주의관계는 정확히 인과관계가 없다. 지역주의는 제도 아닌 정치모리배의 작품일 뿐이다.  즉,  정치제도는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 제도이므로 망국적 지역주의를 양산할 수 없으며 그것을 부정한다면 소선거구제를 채택하는 나라들에서 보편적으로 망국적 지역주의가 편재함을 유시민은 증명해야만 할 것이다.  간단히 그러한 역사는 대한민국에만 독특한 부정적 사회현상인 것이다.  바꿔 말하면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으므로 지역주의가 존재하며 강고한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선거제도변경의 당위성을 악착같이 부각시키려는 유시민이나 노무현의 논리는 한 마디로 알리바이(장기적 집권 혹은 영향력 확보)를 만들기 위한 견강부회요 아전인수일 뿐이다.  정치모리배 유시민의 글  "흥분말고 근거를 따져라" 의 한 문단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인용한다.

"과거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과 자기를 따르는 패거리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으로 착각했다. 극소수 정치군인들의 안전을 국가안보로 착각했던 전두환 씨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자기가 하는 모든 선택을 '구국의 결단'이라고 믿는 '자기기만적 확신'에 빠져 일을 그르쳤다..."

여기서처럼 유시민이 올인하고 있는 노무현이 그런 사악한 위정자가 되지 않는다는 보증을 할 자격과 권위는 갖고 있지 않다.  그 자격은 오로지 주권자에게 있다.

유시민과 노무현의 시커먼 속내는 자비롭게도 경쟁정당인 민노당의 예를 들어 선거제도의 변경의 당위성을 부각시키며  주 목표인 중대선거구제로의 개정을 노리고 있을 뿐이다.  

지금처럼 영남에서의 유권자의 선택이 변하지 않는 한  그 종속변수에 불과할 중대선거구제는 지역구도와 정치지형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가 없다.  유시민이 호남유권자의 몰표를 비정상적으로 매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한 태도는 정의로운 집단적 선택을 감히 부정적으로 보는 것으므로 가치전도적 사고에 지배된 정치모리배의 그것일 뿐이다.

그 밖에 중대선거구제로 변경하여 선거구당 2명이상을 뽑을 때 1위당선자와 2위당선자의 민주적정당성이 각 단위 선거구마다 다를 것은 불 보듯 뻔하므로 현행 소선거제도보다 더 투표가치의 불평등을 야기하는 불합리한 선거제도일 뿐이다.  바꿔 말해서 중대선거구제는 보편적 국민 이데올로기가 다양화 다원화되어 상호 경쟁할 정도의 쌍벽을 이룰 정도로 일반화되었을 때 유용한 제도인 것이다.

그 외 유시민의 가치전도적 관점에 대해 지적하겠다.  유시민은 대결자체를 맹목적으로 부정적으로 매도한다. 그러나 가깝게는 독재대 민주구도에서의 투쟁은 필요악이었다. 독재타도에  신사도를 발휘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리고 이념과 정당이 다른 한,  한 이불속 부부처럼 사이좋게 지내는 정당은 유사 이래로 없다. 그것이 정당과 정치의 속성이다.  

나아가 부패정당인 한나라당은 척결의 대상이지 손잡고 노래하며 즐기는 연정의 대상이 아니다.  유시민과 노무현이 얼마전까지 비난하며 부패정당이며 수구냉전정당이라는 규정한 한나라당과의 연정으로 놀아난다면 그것은 곧 평화민주개혁세력의 정치지반이라는 참여정부의 민주적정당성에 대한 부정과 배신이요 불의와 타협하여 변절한 역사적 죄인으로 기록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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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과 최장집의 학적 한계와 자가당착

[비평] 진보 학자군의 전향적 자세가 요구된다

독자칼럼
  
[편집자註] 본 글은 독자 칼럼니스트 ID "시민25"님이 본지에 기고하신 글을 정리하여 편집한 것입니다. 옥고를 남겨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독자 및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독자님들께 알려드립니다.

손호철 교수(이하 경칭 생략)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대연정은 오히려 지역주의 자극"이란 제목의 글에 대한 비평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좌파 아닌 진보주의자인 필자의 이 비평은 보수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자를 위한 변호의 글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손호철은 "지역주의는 이를 대신할 강력한 정치적 균열구조가 존재할 때 맥을 쓰지 못 하며 그렇지 않다면 지역주의는 계속될 것이라며 87년 이후 민주화의 효과로 민주대 독재의 대결구도가 깨지자 지역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이는 정당 간의 이념적 차이가 협애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이 부분은 최장집과 동일하다.  그리하여 지역주의 혁파의 비결은 보수 대 진보의 대결구도라고 진단한다.



손호철의 자가당착과 무지

손호철의 논리는 간단하게 무식하다. 우선 천혜의 지역적 조건과 그 지역민의 이해와 결부돼 발현하는 지역주의란 인간의 개성처럼 다양하여 말살이나 해소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손호철이나 노무현이나 필자가 거론하는 지역주의는 없앨 수도 없애서도 안 되는 지역주의가 아니라, 이른 바 <망국적> 지역주의라는 한국의 특산 괴물이다.  

이 망국적 지역주의가 협애한 이념의 제약탓에 의해 배태되었고 기승을 부리는 것이라면 사회주의 북한이나 중국등 단일정당만이 존재하는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사회현상이어야 하며,  아울러 소선거구제를 채택하는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만 독특한 부정적 사회현상인 이 지역주의를 다른 나라에서 찾을 수 없음은 당연하다. 도대체 망국적 지역주의가 무엇인가?

망국적 지역주의란 제도외적인 독재자 박정희의 권력욕이라는 원인과 유신체제하의 불균형적 경제성장론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지역간 불균형이 초래된 이래 그 영향이 지금까지 온존되고 있는 사회현상이다.  

이 괴물은 박정희의 작품이었지만 그 후 정치경제영역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까지 저변을 넓혀 강고하게 고착되었다.

간단히 하나의 예를 들어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평등한 국민들이 사는 한국에서의 고속도로 완공은  경부고속도로가  1970년 호남고속도로는 1996년,  그리고 현재  경부고속도로는 평균 6~8차선 호남고속도로는 4차선으로 호남과 영남에 거주한다는 사실만으로 사회적 비용측면에서 일방은 타방보다 손해나 수혜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 사회간접시설면만 보더라도 간극이 무려 26년이란 긴 세월이다.

이러한 편차를 이념구도로 덮어 잠재울 수 있다고 진단하는 최장집이나 손호철의 지역주의에 관한 학적 인식자세는 천박함 그 자체이다.  

손호철과 최장집은 이른 바 진보적 학자로서 분배면에 관심을 두는 실질적 민주주의가치를 중시하면서도 소외지역민들이 몰려 군거하는 소외지역과 상대적으로 수혜를 누리는 수혜지역의 양극화란 부정적인 사회현상을 간과하면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양극화만을 주목한다면 표리부동이요 학자적 양심을 저버리는 태도일 수 밖에 없다.



파시즘적 논리전개

손호철과 최장집은 보수주의나 자유주의나 진보주의라는 개념을 한 번이라도 진지하고 엄밀하게 조망해 보았는가?  우선 진보주의는 좌파아닌 진보주의와 좌파적 진보주의로 대분할 수 있으며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이념 역시 나름대로의 고유한 가치를 갖고 있다.

좌파 진보주의만이 유일무이하게 가치롭다고 한다면 바로 파시즘적 사고이다.  더구나 사상의 자유를 부각시켜 주장하는 진보적 학자군들 입장이라면 그렇게는 이해할 수 없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보수주의나 자유주의 이념 혹은 정당들의 典範을 노무현및 열우당으로 삼고 진보정당은 민노당을 전범으로 삼아 논리를 전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념과 현실의 혼동일 뿐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적어도 87년이래 정당설립의 자유와 자유로운 투표 권리및 그 자유 그리고 정당을 전제하지 않는 무소속출마를 보장하고 있다.  이른 바 진보정당이 그간 제도권에 입성할 수 없었던 것(할증적 비례대표제는 별론)은 진보좌판에서 엿을 사서 즐기지 않는 국민들에게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국민일반의 시민정치의식의 낮음(?)에 그 원인이 있거나 진보좌판에 전시된 엿을 즐기지 않는 국민적 편견일 수도 있다.

때문에 보주수의 내지 자유주의라는 이념과 현상의 하나에 불과한 정당(정책, 정치인)을 혼동하여  가치로운 그  이념들을 매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니라면 진보적 학자군과 민주노동당은 파시즘적 사고와 편견에 절은 사이비 학자나 사이비 정당이라는 오명을 장차 벗을 길이 없을 것이다.


이념의 협애성과 정치구도

손호철은 "보수세력은 보수정당을,  진보세력은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초지역적 계급연합'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는 사뭇 이념을 구별하며 존중하는 논리이다. 그러나 "초계급적 지역연합"이라고 얘기할 때는 어느 새 안면을 싹 바꿔 초계급적 선택을 한 유권자群과 선택의 질조차 무시하고 만다.  그리고 이 "초계급적 지역연합"이라는 말 속에는 또한 진보좌판의 엿을 즐기지 않는 지역주의(?)적 유권자를 스스로 전제하고 있지만,  보수정당(정치인)에 온전히 그 책임을 전가하고 만다.

그리고 손호철이 자의적으로 "개혁적"이라는 한정어를  붙여버린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실체는 주대환(민노당 정책위의장)의 적절한 표현을 빌리자면 진보적 개혁의 장애에 불과한 해악이다.  필자는 좌파아닌 진보주의자로서 노무현및 열우당을 보수주의의 전범으로 볼 수 없다.  한나라당도 보수세력의 범주로 넣지 않는다.   비민주적인 부안방폐장건과 이라크파병을 지켜보면서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관철하지 못하는 반민주세력이라고 평가할  뿐이다.


손호철의 용감한 무식

손호철이나 노무현이 수구냉전세력과 평화민주개혁세력이라는 이질적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질적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반민주적 파쇼요 반역사적이며 지지자들에 대한 횡포일 뿐이다. 그리하여 최장집이 얘기했듯 노무현은 모종의 음모를 위해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손호철 또한 정정당당한 진보세력의 홀로서기가 아니라 치졸한 전술로 보수대 진보대결구도를 유도하려는 선동적 글쓰기를 하는 셈이다.

지금은 정보 대중화시대 인터넷 시대로 바야흐로 정보가 실시간으로 전파되는 공간적 제약이 해소되었다.  친일청산이 범국민적 정서로 자리잡았 듯 지역주의라는 실체에 대해서도 머지않아 범국민적 공감대를 얻어 곧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있을 것임을 낙관한다.

제대로 된 사회정서라면 지금처럼 지역주의의 실체를 왜곡하는 학자나 언론들을 역사적으로 단죄해야 한다. 친일파와 지역주의(영남패권주의)는 상통하는 심리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이 아니라 바른 것을 바르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에 지역주의에 대한 진보학자군의 전향적 자세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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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합당을 하라"  
  <기고> 손호철 교수 "대연정은 오히려 지역주의 자극"
  
노무현 대통령의 연이은 연정 제의와 관련해, 손호철 서강대 교수가 한국일보의 고정컬럼 '손호철의 정치논평' 2005년 9월 6일자 게재분을 확대발전시킨 글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손 교수는 이 칼럼에서 '연정을 하느니 차라리 한나라당과 합당을 하고 이 보수대연합 거대정당과 민주노동당이 경쟁을 하는 본격적인 진보 대 보수의 정치구도로 나가도록 하라'는 취지의, 대단히 논쟁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 독자들이 현재의 정치구도를 이해하고 전망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편집자>
  
대통령이 고집을 부리면 결국 '화두'는 만들 수 있다
  
노 대통령이 결국 일을 저지를 모양이다. 비판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노대통령이 지역주의 타파와 이를 위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에 올인 할 것을 분명히 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노 대통령이 처음 지역주의 타파와 이를 위한 대연정을 제의했을 때부터 개인적으로 그 뜻의 진정성과 살신성인의 정신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진정성과는 별개로 그 제안에는 문제가 많다는 점에서 이에 공개적으로 비판적인 견해를 밝힐 수밖에 없었다(프레시안 2005년 7월 29일자 기고문 "노대통령, 삼성 구하기에 나섰나?" 참조). 그리고 한나라당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 다수, 나아가 열린우리당과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비판적인 견해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이처럼 노 대통령이 외통수를 두고 나서니 당혹스럽기만 하다.
  
어쨌든 노대통령이 이처럼 배수진을 치고 나선 이상 선거제도 개혁이 앞으로 중심적인 화두로 떠오르게 됐다. 답답한 일이다. 물론 현재의 선거제도는 과거의 전국구 제도 등이 위헌이라는 사법부의 판결이 나오자 사표를 줄여 표의 등가성을 확보해 나가면서 기존의 보수정당 체제에서 대표되지 못 됐던 유권자들을 대표할 수 있도록 비례대표를 대폭 확대하라는 시민사회단체들과 정치학자들의 주장을 정치권이 타협적으로 수용해 만든 절충적인 제도로 문제가 많다. 또 지역주의는 우리 사회의 심각한 병리현상인 만큼 이를 개선할 수 있도록 선거제도를 개선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폐지 등 민주개혁 과제들, 그리고 그 간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사회적 양극화 등 시급한 현안들이 산적해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이 문제를 제기해 이 문제로 한나라당과 사생결단식 내공 대결을 해야 하는 것인지 회의가 든다.
  
그렇지만 결국 노대토령의 지속적인 문제제기에 의해 열린우리당이 선거제도 개혁안을 국회에 상정하고 선거제도 개혁 문제가 중심화두로 제기된다면 현재의 절충적인 선거제도를 지역주의, 사표에 따른 비대표성 등 선거제도를 둘러싼 문제들을 전향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이와 관련해, 지역주의가 하도 답답해 개인적으로 대구 국회의원은 광주 시민이 뽑고, 광주 국회의원은 부산 시민이 뽑는 식의 교차투표제라는 극약처방을 생각해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는 하도 답답해 생각해본 것일 뿐 결국 여러 면을 고려할 때 가장 바람직한 대안은 많은 학자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지지를 표명해 온 '독일형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다. 이 점에서 노 대통령이 대연정을 제의하며 그동안 줄곳 주장해 온 중대선거제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나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중대선거제는 너무 문제가 많은 시대착오적인 제도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정치권에서 선거제도 개혁이 논의된다면 이번에는 독일식으로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그러나 선거제도를 바꿔서 국회의원 의석이라는 면에서 지역주의가 약화되게 만들더라도 밑바닥의 지역주의가 그대로 남아 있어 무늬만의 탈지역주의로 끝나고 만다면 문제는 반쪽밖에 해결한 것이 아니다.
  
대연정은 오히려 지역주의 자극할 위험성이 있다
  
이와 관련해 우려되는 것은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노 대통령이 제의하고 있는 대연정론이 갖고 있는 함정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대연정이 오히려 지역주의를 자극할 가능성이다. 문제의 핵심은 지역주의는 이를 대신할 강력한 정치적 균열구조가 존재할 때 맥을 쓰지 못 하며, 우리가 지역주의를 아무리 비판해도 이를 대신할 다른 정치적 대치구도가 생기지 않는 한 지역주의는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결하고 80년 전두환 일당이 광주학살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87년 민주화 이전에는 지역정당 체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해, 민주 대 반민주라는 압도적인 대립구도가 있었기 때문에 지역주의가 전면화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87년 이후 양김이 분열하고 민주화의 효과로 이 구도가 깨지자 지역주의가 전면화됐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1987년 이후 지역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은 한국정치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깨졌지만 반공주의, 3김 정치 등으로 인해 서구와 같은 진보 대 보수의 구도로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정당 간의 이념적 차이가 너무 적어 같은 값이면 우리 지역정당을 뽑자는 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얼마 전 프레시안이 잘 소개한 바 있듯이(전홍기혜 기자 "노, 무얼 위해 지역구도를 극복하고자 하나?", 2005년 7월 29일자) 한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정치학자인 최장집 교수가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정당간 이념적 거리가 커져서 이념적 차별성이 확대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다. 그런데 문제는 대연정을 할 경우 가뜩이나 별로 없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이념적 차이가 더욱 없어져 차별성이 지역밖에 남지 않는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차라리 합당해 '열린한나라당' 대 '민주노동당'의 구도로 가라
  
따라서 연정보다는 차라리 합당을 하는 것이 낫다. 한나라당과 '보수대연합'(가능하다면 민주당까지 포함해)을 해 일본의 자민당과 비슷한 거대보수정당을 만들고 이에 민주노동당이 대립하는, 서구식의 본격적인 보수 대 진보의 대립구도로 나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두 당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작명을 해준다면 '열린한나라당'이나 '한나라우리당'이 좋을 것이다). 즉 1955년에 만들어져 일본 전후 질서를 대표하는 55년 체제(자민당 대 사회당, 공산당) 처럼 거대보수여당 대 군소진보정당의 경쟁구도로 시작해 서서히 보수 대 진보가 균형을 이루는 유럽형으로 변해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실 좌파 정권이라는 냉전세력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진보세력이라기보다는 한나라당의 냉전적 보수에 대립되는 개혁적 보수 내지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이다. 또 이라크 파병,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 등이 보여주듯이 여러 면에서 한나라당과 큰 차이가 없다. 이 점에서는 대연정을 제의하며 그 이유로 두 당 간의 차이가 실질적으로는 그리 크지 않다고 말한 노대통령의 지적이 맞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국가보안법 등 냉전을 둘러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부분도 그 차이가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지만) 신자유주의 등 다른 큰 정책적 노선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그리고 어차피 지금도 국회의 주요법안들이 두 당의 타협과 절충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바 이것과 두 세력이 합당해 한 당에서 의원총회를 통해 절충해 타협안을 내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결국 어쩡쩡한 연정보다는 합당을 통해 본격적인 보수 대 진보의 정치구도로 나아감으로써 지금처럼 부자건 가난뱅이건, 같은 지역이면 무조건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초계급적 지역연합'을 호남이건, 영남이건 부자와 보수세력은 보수정당을, 노동자와 진보세력은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초지역적 계급연합'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이 지역주의를 깨는 비결이다. 결국 선거제도의 개혁이라는 그릇만 만들어주는 것으로는 부족하나 그 그릇을 채울 내용까지도 이처럼 바꿔줄 때 지역주의는 해체될 수 있을 것이다. (허긴 이같은 복잡한 분석이 필요없이 호남과 영남의 지지지반을 갖고 있는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나아가 민주당이 한 당이 되는데 무슨 지역주의가 있겠는가?)
  
노 대통령의 '마지막 봉사'를 기대한다
  
지금까지 한국정치가 안고 있던 딜렘마는 지역주의를 깨기 위한 최고의 무기는 국민들이 지역을 넘어서 자신의 근대적인 계급, 계층적 이해관계와 이념에 의해 투표하는 진보 대 보수로 나가는 것이지만 역으로 한국정치가 진보 대 보수로 나가는 데 가장 큰 장애 역시 계급, 계층적 이익과 이념을 떠나 지역적으로 투표하는 지역주의라는 악순환이었던 바, 노대통령이 합당을 통해 한국정치를 본격적인 진보 대 보수의 구도로 만들어준다면 이 같은 악순환을 깨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노대통령이 말한 조국과 민족을 위한 노대통령의 마지막 봉사가 될 것이다.
  
따라서 곧 있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의 회동에서 대연정을 제의하느니 차라리 합당을 제의해야 한다. 문제는 이 같은 제의에 한나라당이 응할 것이냐는 것이지만 이는 연정도 마찬가지다. 노대통령의 마지막 봉사를 기대해 본다.    
  

  
2005/09/08 [08:52] ⓒ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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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모리배인 유시민의 궤변에 대해

정상모리배인 유시민의 궤변에 대해서

[비평] 우리 모두가 앙시앙 레짐의 자식입니다.
  

  
최장집 교수(이하 경칭 생략)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개정판 ‘후기’에 대한 유시민의 "우리 모두가 앙시앙 레짐의 자식입니다"에서의 요약을 존중하고 문제점과  이견을  주석으로 달도록 하겠다.  유시민과 최장집이 지적 권위주의자가 아니라면 소시민의 분석에  답변을 기대한다.

(유시민은 최장집의 책을)  5)" 지역주의 : ...한국의 지역주의는 권위주의 지배의 한 산물로서 반호남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바...지역주의는 그 자체가 독자적이고 지배적인 균열이 아니라 권위주의의 잔여범주로서 정당체제의 이념적 협애성과 사회적 기반의 약함, 시민사회의 강한 보수 헤게모니 등으로 인해 작위적으로 동원될 수 있었고 영향력을 가졌던 일종의 종속변수였다.  문제는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역주의를 만들어내고 유지시키는 현재와 같은 정치적 대표체제를, 보다 민주화하고 갈등의 이념적 계층적 기반을 넓히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라고 요약하고 있다.

이 문제를 천착해 보도록 하자. 최장집의 말처럼 지역주의란 정치권에 의해 자행한 인위적 산물이라는 점에서 종속변수가 분명하다. 그리고 지역주의라는 개념은 암묵적으로 부정적인 관념이 전제되어 있다 하더라도 적확한 표현이 아니다. 부정적인 지역주의이며 혁파해야 할 중병이라고 핏대를 올리면서도 정작 중병의 원인 규명과 그 처방이 전혀 없거나 빗나가고 있다.  

경제적면으로만 국한해서 보더라도 멀게는 아시아에서 먼저 근대화한 일본에 인접한 대문(부산)이라는 지형적인 여건으로  그 후 일제의 대륙침략路 기능에서  지역불균형의 유래를 찾을 수 있겠지만,   인위적으로 지역적 불균형을 심화시켜 고착시킨 자는 독재자 박정희의 불균형성장론에 입각한 경제개발론과 정권유지욕에서 자행되었고 그 이후 (수도권을 제외한) 비영남지역과 영남지역의 지역불균형이 심화돼 온 것이 객관적 사실이다.

지금 유시민이나 최장집이 지역주의를 단순히 정치현상으로만 (국한시켜) 이해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유시민은 권력확보에 혈안이 돼 있는 정치모리배인 까닭이고 사회학자인 최장집은 지역주의에 대해 사회학자로서 피상적인 이해수준에 그친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평등하게 세금을 내며 평등한 국민으로서 특정지역(호남 또는 비영남)에 거주한다는 사실만으로 불이익(사회적 비용)을, 영남은 상대적 수혜를 기십년 동안 누려온 것이다. 이것은 현재  경제,사회,문화등 제반영역에 강고하게 고착되어 있다. 필자는 이를 영패(영남패권주의)구조라고 지칭한다.

그리하여  최장집의 그릇된  인식에 바탕한 지역주의인과(또는 관계)론을 토대로 유시민이 반박논리를 진행하는 것은 소모적일 뿐이요 그 해법도 맞을 리가 없다.

지역주의, 정확히 영남패권주의는 정상모리배에 의해 자행된 인위적인 사회(부조리)현상이므로 당연히 정치인들이 적극적인 시정책으로 해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100M경주에서 약체주자(비영남지역)와 날렵한 준마(영남지역)를 경쟁시키는 것과 같은 부당한 조건을 정당화하는 비인도적 방관만이 남을 뿐이다.

결국 최장집의 잘못된 분석을 토대로 유시민이 논리도착 혹은 인과전도라니 하며 반박하는 태도는 무의미하므로 비평을 가할 필요는 없지만,  유시민의 반박논리의 문제점을 좀 더 보기로 한다.  

유권자인 국민과의 관계에서 지역주의및 정치지형(선거결과)은 종속변수일 뿐이고,   정치제도와 지역주의관계는 정확히 인과관계가 없다. 지역주의는 제도 아닌 정치모리배의 작품일 뿐이다.  즉,  정치제도는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 제도이므로 망국적 지역주의를 양산할 수 없으며 그것을 부정한다면 소선거구제를 채택하는 나라들에서 보편적으로 망국적 지역주의가 편재함을 유시민은 증명해야만 할 것이다.  간단히 그러한 역사는 대한민국에만 독특한 부정적 사회현상인 것이다.  바꿔 말하면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으므로 지역주의가 존재하며 강고한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선거제도변경의 당위성을 악착같이 부각시키려는 유시민이나 노무현의 논리는 한 마디로 알리바이(장기적 집권 혹은 영향력 확보)를 만들기 위한 견강부회요 아전인수일 뿐이다.  정치모리배 유시민의 글  "흥분말고 근거를 따져라" 의 한 문단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인용한다.

"과거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과 자기를 따르는 패거리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으로 착각했다. 극소수 정치군인들의 안전을 국가안보로 착각했던 전두환 씨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자기가 하는 모든 선택을 '구국의 결단'이라고 믿는 '자기기만적 확신'에 빠져 일을 그르쳤다..."

여기서처럼 유시민이 올인하고 있는 노무현이 그런 사악한 위정자가 되지 않는다는 보증을 할 자격과 권위는 갖고 있지 않다.  그 자격은 오로지 주권자에게 있다.

유시민과 노무현의 시커먼 속내는 자비롭게도 경쟁정당인 민노당의 예를 들어 선거제도의 변경의 당위성을 부각시키며  주 목표인 중대선거구제로의 개정을 노리고 있을 뿐이다.  

지금처럼 영남에서의 유권자의 선택이 변하지 않는 한  그 종속변수에 불과할 중대선거구제는 지역구도와 정치지형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가 없다.  유시민이 호남유권자의 몰표를 비정상적으로 매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한 태도는 정의로운 집단적 선택을 감히 부정적으로 보는 것으므로 가치전도적 사고에 지배된 정치모리배의 그것일 뿐이다.

그 밖에 중대선거구제로 변경하여 선거구당 2명이상을 뽑을 때 1위당선자와 2위당선자의 민주적정당성이 각 단위 선거구마다 다를 것은 불 보듯 뻔하므로 현행 소선거제도보다 더 투표가치의 불평등을 야기하는 불합리한 선거제도일 뿐이다.  바꿔 말해서 중대선거구제는 보편적 국민 이데올로기가 다양화 다원화되어 상호 경쟁할 정도의 쌍벽을 이룰 정도로 일반화되었을 때 유용한 제도인 것이다.

그 외 유시민의 가치전도적 관점에 대해 지적하겠다.  유시민은 대결자체를 맹목적으로 부정적으로 매도한다. 그러나 가깝게는 독재대 민주구도에서의 투쟁은 필요악이었다. 독재타도에  신사도를 발휘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리고 이념과 정당이 다른 한,  한 이불속 부부처럼 사이좋게 지내는 정당은 유사 이래로 없다. 그것이 정당과 정치의 속성이다.  

나아가 부패정당인 한나라당은 척결의 대상이지 손잡고 노래하며 즐기는 연정의 대상이 아니다.  유시민과 노무현이 얼마전까지 비난하며 부패정당이며 수구냉전정당이라는 규정한 한나라당과의 연정으로 놀아난다면 그것은 곧 평화민주개혁세력의 정치지반이라는 참여정부의 민주적정당성에 대한 부정과 배신이요 불의와 타협하여 변절한 역사적 죄인으로 기록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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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는 학자연하는 좌파 선동가이다.

이른 바 조중동은 구체적으로 과거의 친일행태와 가까이는 수구냉전세력(기득권)의 대변인역할을 해 왔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는다. 

 

제대로 된 학자라면 학문적 성과를 위한  산고의 진통은  수미일관된 체계적인 철학의 토대 위에서 수행된다. 학자가 글을 기고할 때 그 글에는 글쓴이의 철학과 사상이 묻어난다.  따라서 한 개의 글을 보고 그 됨됨이와 식견을 감히 가늠할 수 있겠다.    강정구교수(이하 경칭 생략)는 이른 바 양심적 지식인 혹은 학자인가?  아니면 사꾸라 혹은 선동가인가?  필자는 한 지식인으로 인한 사회적 영향력은  간과해서는 안 될 대상이기 때문에 단호하게 조중동에 버금가는 똑 같은 사회적 해악인 사꾸라 먹물이라고 규정한다. 

 

구문의 앞에 붙은 괄호로 둘러싸인 숫자는 강정구의 원글의 문단마다 필자가 인용의 편의를 위하여 추가한 것이며 직접인용 혹은 축약한 내용들은 쌍따옴표(혹은 갈색글자)로 인용되었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강정구의 6.25동란에 대한 글이 계기가 되었고,  대자보 편집부가 장문의 강정구 띄우기 기사를 올린 것을 본 연후이다.  강정구의 글 중 가장 첨예하게 관점이 나뉘었던 탄핵파동에 관련된  글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았다.

 

"(3)노무현 탄핵파동의 역사적 기원과 본질:

(27)제대로 친일청산이 되었더라면  의회쿠데타는 없었고 탄핵정국은 없었다.  미국의 치밀하고도 노골적인 개입과 시민사회의 한계에 부딪쳐 6.29 라는 수동혁명으로  귀착한 미완의 혁명인 6월항쟁은 (4)대통령직선제의 쟁취수준에 머물러 군부독재와 그 하수인들(주류 정치세력과 수구 신문 등)에 의해 (형식적 + 실질적)민주화가 지연되었는데, 이 후 3당통합으로 문민정부이래 반개혁적-반민주적-반민족적-반민중적 주류 카르텔을 형성해, 경상도 패권이 이를 지탱하였다.

 

(4-1)비주류 DJ와 이후 신생 노무현의 보수적 개혁노선의 일환으로 시작된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차떼기당의 본질이 파헤쳐지면서 정권상실 후 의회권력마저 위기에 몰리게 되었고,  민주당내 냉전수구세력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민주당 역시 (5)조순형등 당권파가 반동적 행보로서 탄핵을 선도하고 두 당은 급격히 일심동체되어 국민주권의 발로를 무너뜨리려는 탄핵은 소외상태에 놓여 있던 주류세력의 가세로  (17)의회쿠데타라는 폭거가 (5)자행된 의회 다수의 횡포로서의 민주질서 파괴이다."라고 강정구는 주장한다.

 

강정구의 글에서 민주주의는  "(21)형식-간접 민주주의외  (22)정치영역외 일상생활의 민주화인 국민권력화 또는 인민권력화라는 실질적 민주주의이어야 한다."라고 그럴 듯 하게 말한다. 그러나 정작 민주질서라는 잣대로  현실을 재단할 때는 강정구식 모종의 의도와 편견이 개입하여 뒤죽박죽 일관성이 없다. 조금 더 보자.  

 

"(23)탄핵을 주도한 냉전수구세력의 다수결에 의한 민주적 절차를 밟았다는 주장은 의회다수 결정이 국민다수 결정의 상위개념이라는 의미로서 국민주권이나 인민권력에 반한다.  현실적 한계로 인한 간접민주주의가 필요악적 요건이라 할지라도 이 둘이 상충될 때는 당연히 국민전체 참여의 의사결정에 따라야 한다.  (24)이런 점에서 경미한 문제를 트집 잡아 국민전체참여의 결정에 의해 창출된 통치권력을 정지시킨 탄핵소추 가결은 반민주적 폭거와 의회쿠데타이며 곧  민주질서 파괴범행이다."라고 규정한다.

 

87년 미완의 6월항쟁 성과물은 "겨우"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이다. 강정구가 그 간난신고로 탄생된 헌법에 규정된 절차에 의해 선출된 노무현을 부정할 리는 없고,  따라서 국민의 결단 혹은 총의(consensus)라는 정태적 민주적정당성을 가진 그 헌법정신과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이념을 관철하는 입장에서  " (11)탄핵의 본질은 민주 대 반민주 전선"이라고 규정하는 강정구 입장을 결합하여 보자.

 

강정구 스스로  "노무현 정부의 정책본질은: 탈권위주의적인 합리적 보수 수준 . 대미 자발적 노예주의 정책/ 평화통일 지향적이기보다 분단유지 수준/ 재벌을 위한 경제정책 중심 / 집시법 등에서도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에 위배되는 반민주적 입법 / 대 이라크 파병 미국에 공범자로 동참""진보적 개혁을 발목 잡는 장애물"로  反 진보적 개혁 행태의 참여정부라고 규정한다.  실제로 필자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참여정부의 실정에서 아주 중요한 비민주적 부안방폐장 강행과 대북송금특검이 빠져 있다. 또한 최근 노무현이 열린우리당을 평당원신분으로 좌지우지한 데서 보여주었듯 탈권위주의적 보수세력이라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학자로서의 양심이 있다면 참여정부를 감히 민주라고 규정할 수 없다. 사이비진보나 좌파 민주노동당식 독선적 기준을 들이대기도 전에 보편적 잣대로 평가하면 곧 민주가 아닌 수구냉전세력과 한치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 외 강정구의 무식함은 또 있다. "의회다수 결정이 국민다수 결정의 상위개념이라는 의미로서 국민주권이나 인민권력에 반한다."라고 얘기할 때 그것은 강정구가 민주주의라는 주요속성에 절차적민주주의도 포함된다는 것을 모르는 무식함의 발로이거나 일부러 간과한 것이다. 또한 인민권력이나 국민주권이 현실속의 유동적으로 살아 생동하는 동태적 민주적 정당성을  강정구식으로 절대 선이라 이해한다면 공간을 옮겨 포퓰리즘의 광기로 얼룩 진 파시즘과 나찌즘의 국민주권은 정당한 것이 되고야 만다.  이렇게 강정구식으로 국민주권을 편의적이며 상황논리로  이해하는 한 정태적으로 국민주권이 녹아있는 헌법상에 체현된 그것은 어느 덧 유명무실한 종이에 불과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이 옳지 않음은 명백하다. 따라서 강정구는 그의 현실생활이 어떠하든 문제있는 인식태도를 가진 먹물에 불과하다.

 

이렇게 잘못된 관점을 기초로 하여 이른바 노무현과 참여정부에 비판의 날을 세웠던 非좌파인 진보주의자및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를 아우르는 평화민주개혁세력에 수구냉전세력이라는 마타도어를  감행하며 아전인수격으로 민주노동당에 우호적인 관점에서 탄핵정국을 재단하기 시작한다.

 

강정구는 "(7)세계사적인 탈냉전과 민족사적인 통일시대라는 전환기에  냉전(反북한-숭미-반공-지역분열) 이데올로기가 386세대와 인터넷 신세대에 의해 배척되어 그 위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이 젊은 탈냉전세대가 냉전수구의 늙은 세대를 숫적으로 압도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직선제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 (8)구도에서 내각제는 냉전수구세력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고   미국 역시 반미적 젊은 탈냉전세대의 힘을 무력화하는데 이해가 일치한 것이다."라며  의회권력마저 앗기게 될 우려가 있는 차떼기 한나라당과 싸잡아 "민주당내 냉전수구세력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민주당 역시 (5)조순형등 당권파가 반동적 행보로서 탄핵을 선도하고" "한나라당과 일심동체가 되어"라고 말하게 된다.

 

필자의 사견으로는 탄핵본질을 캐기 위해  친일잔재나 독재세력으로 거술러 올라가기도 전에  민주당내 신.구주류 헤게모니다툼에서 노무현과 영합한 비열하고 패륜적인 신주류의 권력욕으로  같은 뿌리인 민주당을 마타도어하며  (선관위에서 경고를 내렸 듯) 민주적 정당성을 왜곡하려 선거개입을 적극적으로 자행하는 노무현에 대항하여 민주당이 주도한 민주헌정질서 회복을 위한 결단이라고 평가한다.  한 나라당은 탄핵을 관철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동원해야 하는 종된 주체였던 것이다.  당시 한나라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한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부패했다는 점에서 의회권력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곧 한나라당관여 없이는 한 건의 법안도 통과될 수 없는 현실적 한계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야 만다.  

 

강정구의 언어구사도 매우 부적절하다. 의회권력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과 자유와 평화를 위해 일로 투쟁해 왔던 민주당을 싸잡아 냉전수구세력의 범주에 넣고야 만다. 이런식의 논리라면 나는 강정구를 학자적 양심을 저버리고 자신의 사상적 기반에 지배되어 아전인수격으로 현상을 재단하는 선동가요,  그 사회적 해악이 스탈린이나 히틀러나 무솔리니에 못지 않는 인류의 해충이라고 단언한다.  이렇게 강정구를 규정하면 강정구는 게거품을 물고 어이없어 할 것이다.

 

그렇듯 강정구는 단지 정대철과 냉전수구세력에서 배를 갈아 탄 이부영을 비롯한 몇몇 인사들이 노무현 권력우산 속에 숨어 들어간 기회주의자들의 둥지인 열린우리당과 노무현이  강정구 말대로 "진보개혁에 장애에 불과한 데도"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더럽힐 수 없는 거룩한 민주라는 범주속에 자의적으로 포섭시키는 괴상한 짓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강정구가 그렇듯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일청산의 대상으로서의  심리구조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순응적 패배주의와 기회주의 극단적이기주의라는 것이다.  강정구식으로 탄핵정국을 재단하면 이른 바 식민통치하에서 외롭게 투쟁했던 소수의 독립투사들의 투철한 정의관은 어느 덧 퇴색되고야 말 것이다.  그 것 뿐인가?  강정구와 사이비 진보진영에서 만끽하는 사상의 자유와 언론표현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민주당을 키워주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수구냉전세력이라고 싸잡아 매도하는 작태는 그대로 마녀사냥이요 빨갱이사냥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것 뿐인가?  민주노동당은 현실속에서 10%남짓한 지지를 얻었다. 그렇다면 90%에 비해 무가치한 정당이라는 논리까지 가능하다.  따라서 강정구가 자의적으로 "민주대 반민주"라는 재단한 탄핵정국의 본질론은 터무니 없다.

 

강정구의 글쓰기가 계속되고 있으므로   "(6)국민적 저항이 표출되지 않았다면 탄핵을 바탕으로 총선연기와 내각제 개헌이라는 수순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고 말했 듯 노무현이 냉전수구세력의 여왕인 박근혜과 이른 바 모종의 거래를 위한 영수회담을 추진하는 현실의 반인민주권적 노무현의 작태에 대해 날 선 비판을 가해야 일관된 학자로서의 자세임은 명백하다.  이미 그런 글이 나왔어야 할 것이다.

 

그 외 강정구가 매우 낙관했던 냉전수구세력의 와해는  TK지역은 물론 영남지역에서의 쇠퇴 기미가 전혀 없었다. 영남유권자들의  선택은 요지부동이었던 것이다.  강정구처럼 탄핵의 본질을 궁구할 때 절차적민주주의라는 중요한 가치를 무시한다면 지금 노무현이나 민주노동당이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왜 필요한가? 

 

강정구식 자의적인 탄핵 본질은 바야흐로 이제 점입가경이다. "탄핵반대는 70-75%인데 노대통령의 지지도는  30%이다. 그 차이 57-60%는 반노 또는 중립 세력이며 그 구성부분은 진보적 개혁세력과 과거 한나라당 지지세력까지 포괄하며  호남 대부분은 열우당과 민주당을 놓고 결국 반탄핵 대열에 합류했다.  (13)TK를 중심으로 한 골수 냉전수구반동세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세력이 협력한 셈이다." 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강정구는 당시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자료를 토대로 노무현정부를 "(11) 탈권위주의적인 합리적 보수 수준(진보적 개혁을 발목 잡는 장애물 : 反 진보적 개혁 행태)으로 . 대미 자발적 노예주의 정책/ 평 화통일 지향적이기보다 분단유지 수준/  재벌을 위한 경제정책 중심 /  집시법 등에서도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에 위배되는 반민주적 입법 /  대 이라크 파병으로 미국에 공범자로 동참"하는 등  진보 개혁의 장애에 불과한데도  "(19)합리적 보수세력으로의 지나친 쏠림 현상이 굳어지는 것을 경계하고 진보적 개혁세력이 탄력을 받을 수 있는 (28)온전한 새 판인 (9)진보적 개혁세력의 새판 짜기를 하자."라고 얘기한다. 강정구의 이 글에서 마침내 강정구의 기도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정정당당한 정책경쟁 혹은 이념경쟁에 의한 홀로서기가  아니라,  반민주적인 노무현정부를 이른 바 "합리적 보수세력"으로 미화시켜 합리적 보수세력의 한계를 기정사실화하여 합리적 보수를 마타도어한 뒤 강정구의 우호적인 진보세력과 사이비 합리적 보수세력의 대결구도로 이끌어 가려는 것이 주된 목적인 것이다.  이런 작자가 학자입네 하고 행세하는 사회구조도 문제지만 대자보편집부에서 이런 작자를 위해  글을 내 건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강정구에게 묻건데.  강정구의 뇌리는 무엇에 지배당했길래  광범한 스펙트럼의 합리적 보수세력의 전형으로 노무현정부의 그것을 삼아 버리는가?  강정구의 사상적 기반에 의하면  강정구가 갖고 있는 사상 이외에는 모두 그대로 다양성과 다원성을 인정할 수조차  없는 무차별하게 무가치한 그것들인가?  그렇다면 나는 강정구를 파쇼중독자라고 비난하겠다.

 

아니라면  "(9-1)친-반 노무현의 대립구도론, 국론분열론, 언론 사주론 등은  탄핵 주도 냉전수구 정치세력과 조-중-동 중심의 주류신문들과 사이비원로측이고, (9-2)민주-반민주대립구도론,  민주화를 위한 진통론 등은  反탄핵 주도의 사회운동세력,  합리적 보수세력 및 일반 민중진영이다."라고  재단한 것은 학자적 양심을 저버린 특정목적의식에 지배된 편견이 개입한 것이다.

 

강정구에 대한 변명을 위한 대자보 편집부의 거창한 제목 "더불어 함께 사는 하나된 조국위해 투쟁하는 지식인"이란 제하의 글을 읽어 보면,  강정구는 상황논리로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는 둥 하며,  비판적 학문을 위한 17가지 지침을 나열해 놓고 있는데 첫 번째가 올바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이다.

 

필자는 강정구가 만인으로부터 진정으로 존경받는 학자다운 학자이기를 바란다. 물론 몇 개의 글로 강정구 자체를 평가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리고 강정구식 관점과 필자의 관점이 어떻게 달라서 문제가 있는지 강정구와 대자보편집부의 친절한 답변을 들었으면 한다. 참고로 필자는 좌파아닌 진보주의자이다.

 


[기고] 탄핵파동과 한국사회 새판 짜기

2004년03월26일 ⓒ민중의 소리

강정구 / 동국대교수  unikorea@cvnet.co.kr

(1)3.12탄핵소추 가결은 3.13-3.20 反탄핵 촛불시위를 가져오면서 탄핵파동으로 불거진 한국민주주의의 위기를 반전의 기회로 삼아 사회개혁과 민주화의 진전으로 나아갈 것으로 전망된다.

(2)1945년 해방이후 우리의 현대사와 민주주의가 시련과 고통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저항과 희망의 역사임을 다시 한번 반추하면서 우리의 현주소를 점검하고 이에 바탕한 희망의 역사를 구상해보자.

(3)탄핵파동의 기원
먼저 대통령 탄핵소추의 기원을 보자.

기원은 단기보다는 장기적 요인에 초점을 맞추면서 인과관계를 분석하는 방법이다. 이번 파동의 기원은 미완의 혁명인 6월항쟁으로 거슬러올라간다. 6월항쟁은 광주의 학살을 통해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노태우 일당의 군부독재 제도와 그 핵심 및 하수인들을(주류 정치세력과 수구 신문 등) 인적청산하고, 민주주의(형식적 + 실질적) 이행과 공고화로 나아가려는 민주항쟁이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치밀하고도 노골적인 개입과 시민사회의 한계에 부딪쳐 6.29 라는 수동혁명으로 귀결되었다.

(4)이 결과 항쟁은 겨우 대통령직선제의 쟁취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이후 군부독재 핵심과 하수인들이 3당통합을 통해 김영삼과 김종필 세력을 끌어들여 문민의 탈을 쓴 반개혁적-반민주적-반민족적-반민중적 카르텔을 형성해 우리 사회의 주류로 군림해 왔다. 여기에 경상도 패권주의가 교묘히 결합해 이 주류를 지탱해 주었다.

이들 주류가 김대중의 비주류와 노무현이라는 신세대의 주자에 의해 정권을 상실해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노무현 참여정부의 보수적 개혁노선의 일환으로 시작된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차떼기 정당인 한나라당의 본질을 파헤치면서 총선에서 주류세력이 의회권력마저 상실할 위기에 놓였다. 이 즈음 당내 냉전수구세력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민주당 역시 한나라당과 같은 운명으로 기울 것 같은 조짐을 보였다.

(5)이에 조순형 대표 등 당권파가 핵심이 되어 반동적 행보를 보이면서 최후의 발악과 같은 탄핵을 선도하고 나서자 두 당은 급격히 일심동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에다 새로운 정치구도에서 소외상태에 놓여 있던 주류언론-주류관료(외교부 항명파동에서 보여 준 바와 같이)-주류사회세력의 부추김과 가세가 의회 다수의 횡포를 통해 국민주권의 발로를 무너뜨리려는 탄핵으로 나타난 것이다.

(6)만약 국민적 저항이 표출되지 않았다면 탄핵을 바탕으로 총선연기와 내각제 개헌이라는 수순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7)세계사적인 탈냉전과 민족사적인 통일시대라는 전환기를 맞아 구태의연한 늙은 냉전수구 세대의 전유물인 냉전-反북한-숭미-반공-지역분열 이데올로기가 새로 등장한 386세대와 인터넷 신세대에 의해 배척되어 그 위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또 이 젊은 탈냉전세대가 냉전수구의 늙은 세대를 숫자적으로 압도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직선제를 통해 이 냉전수구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 구도이다.

(8)이러한 구도에서 내각제 개헌은 이 냉전수구세력이 야합을 통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기에 내각제 개헌설이 계속 나돌았던 것이다. 미국 역시 여중생 압살사건을 기해 반미가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는 젊은 탈냉전세대의 힘을 무력화하는데는 내각제가 안성맞춤이라고 볼 것임에 틀림없다.

(9)냉전수구세력의 옛 판에서 진보적 개혁세력의 새판 짜기로

탄핵정국에 대해 친-반 노무현의 대립구도론, 국론분열론, 언론사주론 등과 민주-반민주대립구도론, 민주화를 위한 진통론 등으로 대조적인 평가가 나돌고 있다.

앞의 논의는 주로 탄핵 주동자인 냉전수구 정치세력과 조-중-동 중심의 주류신문들과 김수환 추기경를 비롯한 소위 원로답지 못한 원로들의 목소리고 뒤의 논의는 反탄핵 주도의 사회운동세력, 합리적 보수세력 및 일반 민중진영의 견해이다.

(10)탄핵정국 대립구도는 결코 친노와 반노의 대립구도(전선)는 아니다. 노대통령의 지지도는 겨우 30%에 불과하지만 탄핵반대는 70-75%가 된다. 이는 반노나 중립적이지만 탄핵반대의 대열에 참여한 비율이 전체 반탄핵 진영의 57-60%를 차지하고 있음을 말한다. 반탄핵 진영에는 친노세력보다 오히려 반노 또는 중립 세력의 비중이 높다.

(11)정확한 대립구도는 민주 대 반민주 전선이다.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보면 탈권위주의적인 초보적 개혁 수준에 머물 뿐이지 진보적 개혁과는 거리가 멀다. 합리적 보수 수준의 자유주의적 합리화에 불과하다. 오히려 진보적 개혁을 발목 잡는 장애물이다. 미국에 할말을 하겠다면서 실제는 대미 자발적 노예주의 정책을 펼쳤고, 평화통일 지향적이기보다 분단유지 수준에 머물렀고, 노동자 등 민중을 위한 것보다 재벌을 위한 경제정책이 중심이고, 집시법 등에서도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에 위배되는 반민주적 입법을 하고, 이라크에 파병을 함으로써 집단학살이라는 범죄를 짓는 미국에 공범자로 동참하는 등 그의 反 진보적 개혁 행태는 명백하다.

(12)이런 점에서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은 민주노동당 등 진보적 개혁세력과 대립전선에 놓여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진보적 개혁세력과 과거 한나라당 지지세력까지도 반탄핵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물론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사이에 고민하던 호남유권자의 대부분은 단호하게 반탄핵 대열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한나라당의 아성이었던 영남권에서도 반탄핵 대열이 승세를 굳히고 있는 것 같다.

(13)이를 보면 국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의 기초를 의회를 장악한 냉전수구세력들이 무너뜨리는 반민주적인 기도에 저항해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한 골수 냉전수구반동세력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세력이 집결한 셈이다. 이러한 민주-반민주 전선을 친노-반노로 호도 함으로써 대립구도를 희석시켜 냉전수구세력의 본래기도를 관철시키려는 저의가 깔려 있는 것이 앞의 논의이다.

(14)비록 이러한 민주-반민주 대립전선이 탄핵정국의 핵심 대립구도이긴 하지만 현재의 우리 사회는 동시에 보수적 개혁에(또는 자유주의적 합리화) 머물러 진보적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참여정부와 이를 뛰어 넘는 진보적 개혁세력과의 대립전선 또한 기본적인 대립전선이다.

탄핵정국에 휩싸여 이 기본적 대립전선이 非쟁점화될까 우려되는 바가 크다.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장거리의 포석과 통이 큰 포석이 필요하다.

(15)국론분열론을 주장하며 안정을 구가하는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신문들은 언제나 사회의 변화나 진전의 조짐이 있을 때는 이런 종류의 사회변화 저항적인 언술을 퍼뜨려 왔다. 광주학살 때도 유신독재 때도 국론을 분열시키지 말고 안정을 기해야 한다고 역설해 왔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짓밟은 군부독재의 폭거에 대해서도 반대와 저항의 목소리를 내지 말아야 국론이 분열되지 않고 안정된다는 식의 논리는 학살을 일삼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군부독재에 군소리 없이 따르라는 말과 다름없다.

(16)무릇 기득권자는 조그만 변화에도 마치 세상 전체가 파멸로 가는 듯한 과장된 반응을 보이면서 역전을 시도한다. 조그만 변화도 그들의 기득권에 해를 끼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전과 변화를 위해서는 기존의 잘못된 제도, 구조, 규범, 그리고 그런 구조 속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사람들에 대한 청산 작업이 곧, 인적청산과 물적 청산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지난 6월 민주항쟁에서는 민주화의 긴 여정 가운데 겨우 간접민주주의 또는 형식민주주의의 초보단계인 대통령 직선제 정도만 관철시킨 것에 불과하다.

(17)군부독재 하에서 광주학살, 정권찬탈, 삼청교육대, 언론말살, 고문과 탄압 등을 일삼았던 핵심이 아직도 전직 대통령으로 예우 받고 단돈 29만원 밖에 없다고 우기는 파렴치 범 행세를 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5-6공의 하수인 및 동조자들이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두텁게 국회에 포진하고 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반민주적이다. 그래서 의회쿠데타라는 폭거도 거침없이 감행한 것이다.

(18)역사의 진전을 위해서는 단호한 결단이 요구된다.

엉거주춤한 틈에 냉전수구반동세력의 안정화 논리가 끼어 들어 역사진전을 가로막는 과오를 우리는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쓸데없는 원로들의 목소리가 끼어 들 틈을 주지 않아야 한다. 이번 의회쿠데타를 계기로 쿠데타세력인 냉전수구집단에 대한 청산작업을 마무리지어야 한다.

(19)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이제 합리적 보수세력과 진보적 개혁세력의 대립구도를 띠게 만들어 이들 사이의 경쟁과 견제 및 균형을 취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 일고 있는 합리적 보수세력으로의 지나친 쏠림 현상이 굳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제 수구냉전세력이 활개치는 옛날 판을 일소하여 마무리짓고, 동시에 진보적 개혁세력이 탄력을 받을 수 있는 구도의 새판 짜기로 나아가야 할 시점이다.

(20)어떤 민주주의인가?
우리는 탄핵정국을 민주와 반민주의 대립전선으로 보았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아마 여러 종류의 민주주의를 각기 그리고 있긴 하지만 베버나 슘페터가 말하는 상호경쟁 하에서 국민의 선택에 의해 선출되어 의사결정에서 국민의 의사를 수렴 및 반영하는 통치를 의미할 것이다.

(21)물론 이 같은 절차와 형식의 문제를 중심으로 보는(how to rule) 형식-간접 민주주의의 요건은 민주주의에서 기초이고 필요조건이지만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다.

(22)주로 정치영역에 국한시키는 민주주의 원칙은 경제, 일상생활, 가족 등의 여러 영역으로 확대되어 일상생활의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 우리의 헌법이 명시하는 국민주권이 간접 및 형식 차원이 아니라 실질적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국민이나 인민이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고 그들의 보편적 이익이 관철되는 의사 결정구도가 확대되어야 한다. 이는 통치주체의 문제(who rules)로서 국민권력화 또는 인민권력화라고 볼 수 있고 오히려 알의 형식민주주의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이다.

(23)이번 의회쿠데타에 의한 탄핵을 주도한 냉전수구세력은 이를 다수결에 의한 민주적 절차를 밟았다고 항변한다.

이 해석은 의회다수 결정이 국민다수 결정의 상위개념이라는 의미로서 국민주권이나 인민권력화를 위배한다. 비록 국민전체의 참여에 의한 의사결정인 직접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 모든 부문에서 적용되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간접민주주의가 필수적 요건이라 할지라도 이 둘이 상충될 때는 당연히 국민전체 참여의 의사결정에 따라야 한다.

(24)이런 점에서 경미한 문제를 트집 잡아 국민전체참여의 결정에 의해 창출된 통치권력을 정지시킨 탄핵소추 가결은 반민주적 폭거와 의회쿠데타로 규정되어져야 한다. 또 이를 주도한 냉전수구세력은 민주질서 파괴범으로서 단죄를 받아야 한다.

(25)과거청산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
위기는 기회를 낳을 수 있듯이 우리는 이번 탄핵정국을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개혁의 전기로 만들어야 한다. 이에 실패할 경우 친일파-군부독재 청산 실패의 결과처럼 한국민주화와 사회개혁은 장기간 중단된 채 퇴행적 역사행로를 걷게 될 것이다.

(26)만약 해방 후 친일파청산이 제대로 되었다면 이회창이 대통령후보로, 박관용이 국회의장으로, 조순형이 민주당대표로, 최돈웅이 다수당의 재정위원장으로서 차떼기의 주동자로, 김용균이 국회법사위간사로 될 수 있었을까? 만약 6월항쟁에서 군부독재세력이 제대로 인적청산 되었다면 최병렬이 대표로, 김기춘이 법사위원장으로, 박근혜가 다수당 새 대표로, 홍사덕이 다수당 총무로, 김용갑-정형근이 국회의원으로 될 수 있었을까?

(27)천부당만부당한 이야기다. 제대로 청산되었더라면 이번 의회쿠데타의 진원지이고 주도자인 이들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응당 탄핵정국은 없었을 것이다.

(28)이같이 친일파 청산과 군부독재 청산의 실패는 결코 과거의 지난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탄핵파동을 일으켜 민주화와 사회개혁에 족쇄를 채우려는 현재의 문제다. 다시는 친일파 청산과 군부독재 청산의 실패라는 역사적 과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냉전수구의 낡은 판을 완전히 허물고 온전한 새 판을 일구는 촛불을 계속 밝혀야 할 것이다.

2004년03월26일 ⓒ민중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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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들 제대로 하라 - 교수의 현주소

[미디어 비평] 강정구 위한 교수선언문 그 문제점 
  
 
강정구 교수에 대한 일단의 교수들의 기자회견문(전문 아래에 첨부)을 읽고 느낀 소회이다.

그들의 주장의 핵심은 지금의 민주화 인간화 시대는 교수및 연구자들의 처절한 노력과 희생이 바탕이 됐다고 한다. 그런 주장을 전제로 동국대 강정구 교수의 필화사건은 다원주의사회에서의 학문의 자유 사상의 절대적 자유에 역행하는 냉전시대적 유습의 잔재라고 주장한다.  민주와 평화, 통일을 위하여 앞장서온 양심적인 교수, 연구자들은 학문적 연구와 평가의 문제는 학계에 맡기고 경찰당국은 간섭하지 말 것을 엄중히 요구하는 비장한 선언문이다.

 

이제부터 심각한 반문을 시작해 보도록 하자. 시작하기 전에 국가보안법의 당부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도록 하자.

 

국가보안법폐지론과 존치론의 대립이 있다. 물론 대한민국사회에서 국가안보나 국가기강을 제대로 유지할 주체가 이른 바 떡값으로 얼룩져 있는 부패검찰이고 과거 공안정국에서 충실한 권력의 시녀노릇을 한 전력이 있었으나 인적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만큼 처벌조항자체를 없애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 폐지의 근거가 철저한 인권보장이라는 점에는 공감하지만 사상의 절대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은 그 자체로 부당하다는 점에 한정시켜 얘기해 보겠다.

 

국가보안법에 의거하여 의법조치하는 경찰의 태도를 합리화하자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노파심에서 다시 부연한다.

 

 

학문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것인가?

 

보통 학문적으로 자유의 限界와 그 制限을 구별해서 사용한다. 한계란 자유자체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금지요, 제한이란 예를 들어 국가안보, 사회안녕질서, 공공복리를 이유라는 현실적 수요때문에 가해지는 규제이다.

 

자유는 극단적으로 다원화되고 개인주의화된 사회에서도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무인도에서 혼자 산다면야 자유라는 개념 또는 이념이 효용가치가 없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자유란 즉자대자적인 관계 즉 똑 같은 자유의 주체인 자신 이외의 타인들을 전제하고 있는 관계적 개념임을 쉽사리 알 수 있다.

 

때문에 자유는 본질적으로 평등한 자유의 주체를 억압하는 적, 즉 자유의 적에게는 자유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곧 자유에  내재하는 본질적 한계이다.  그 본질적 한계를 역사적 교훈에서 구체적으로 찾아 본다면 나치즘, 파시즘, 붉은군대식 공산주의를 들 수 있겠다.

 

그렇다면 학문의 자유는 완전히 절대적인가? 여기서 절대적이란 말은 시공간적으로 학문의 자유의 주체에게 어떠한 한계가 없는가이다.

 

우선  질문들에 자답해도록 해 보자.  학문의 자유의 주체가 나찌즘, 파시즘적인 자유를 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자유를 누리는 체계를 파괴하는 것을 용인하겠다는 것과 동일한 인식이며 인정돼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외 학문의 자유의 주체가 누리는 자유의 한계는 명백히 있다.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는 용도로 사용할 목적으로서 그 방법과 기예를 연구하는 학문의 자유를 인정할 수는 없다.  또한 학문의 자유를 빌미로 다른 학문의 자유의 주체를 압살하는 학문의 자유는 인정될 수 없다.

 

나아가 사회공동체를 위협할 만한 심대한 위험을 유발할 수 있는 실험을 아무런 규제 없이 자의적으로 수행하는 것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국가보안)법 이전의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사회규범에서 도출할 수 있는 본질적인 문제이며 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상아탑에서 연구에 종사하는 대학교수든 그 누구든 학문의 자유가 절대적이라고 주장한다면 절대라는 문제에 대해 재고해 봐야 할 것이다. 필자의 주장에 이의가 있다면 논리적인 반박글을 기고해 주실것을 부탁 드린다.

 

그렇다면 사상의 자유는 완전히 절대적인가?  사상의 자유가 발현하는 모양은 사유 주체의 내부적 그것으로부터 그것이 현실적이며 가시적으로 나타날 때의 양상으로 단계적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절대적으로 타인과 무관한 사유주체의 내부적 사유공간만에서의 사상의 자유는 그 대상을 확정할 수 없으므로 논의할 실익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과의 관게와 얽힌 사회속으로 사상의 자유가 현실화될 때는 마땅히 그 한계와 제한의 수요때문에 절대적일 수가 없다.(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와의 경계나 관계는 별론)

 

예를 들어, 어떤 역사적 사실에 대한 間주관적인 평가와 어긋나는 주장을 교수(학문의 자유의 주체)가 할 때 그것이 사회보편적 규준과 어긋나는 정도에 그친다면 학문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강정구 교수의 글은 어떤가?  사실을 편의적을 인용하여 오도하고 있고, 글 자체 내에서 자가당착적 주장을 하고 있어서 학자적 양심이나 일관된 철학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글임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참조 글: 강정구교수의 왜곡된 역사관 )

 

이것을 학문이라고 얘기하며 그 자체를 철저히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곧 무가치한 글이라도 교수가 쓴 글이므로 무조건적으로 보장받아야 한다는 지극히 권위주의가 팽배한 독선적 태도요 부끄러운 교수를 편애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부연하여 국가보안법에 관한 경찰의 수속을 규탄하는 자세 또한 큰 문제가 있다.  경찰더러 평등한 국민을 차별하여 교수에게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법치주의의 예외를 인정해 달라는 주문이며 부당한 압력이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부당한 법이 아닌 한 헌법재판소에 의해서 위헌판결이 나지 않는 한 존중해야 한다.  나아가 국가보안법 폐지론자가 존치론을 무가치하다고 매도하는 순간 곧 사상의 자유를 명백히 부정하는 자기모순적 주장이 되고야 만다.

 

이미 선언에 참여한 교수일단은 강정구 교수의 글이 학문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을 것이지만 교수단체 기자회견문 전문의 내용은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학문적 가치가 있음을 전제로 그것을 법으로 단죄하는 것은 법치주의 남용이다."라고 해야 바른 자세일 것이다.

 


<교수단체 기자회견문 전문>

과거청산과 새로운 민주 통일 시대에, 누가 학문의 자유를 탄압하는가

지금 한국사회는 과거청산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평화와 민주에 기초한 미래지향적인 현대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이래로 여전히 한반도는 강대국에 종속되어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훼손당했고, 안으로는 분영과 갈등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냉전 시대에 왜곡되고 억압된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교수 및 연구자들의 처절한 노력이 있었던 만큼 학문의 자유 탄약 사건도 그치지 않고 발생했다. 그러한 희생과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 사회가 이만큼이나마 민주화, 인간화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발생한 동국대학교 강정구 교수 필화사건은 우리 사회를 여전히 냉전 시대에 가두려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과거청산을 통해 우리가 열어가는 민주사회의 본령은 학문과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사회이다. 서로 다른 주장이나 견해가 교환되고 논쟁이 활성화되는 다원주의사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당국은 강정구 교수의 학문적 내용을 문제삼아 국가보안법 7조 ‘찬양ㆍ고무, 이적표현물 소지 등 처벌조항’으로 사법처리 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경찰에서 밝힌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는 지난 7월 27일 강정구 교수가 한 인터넷 매체에 기고한 칼럼에서 “6ㆍ25전쟁은 후삼국 시대에 견훤과 궁예, 왕건 등이 모두 삼한통일의 대의를 위해 서로 전쟁을 했듯이 북한의 지도부가 시대한 통일전쟁”이라는 언급에 대한 것이다. 서울경찰청 보안보장은 “강정구 교수에게 8월 26일 출석하라는 1차 요구서를 발부했다”면서 “강정구 교수에 대한 사법처리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학자의 학문적 입장 표명에 대해 경찰이 사법처리를 운운하고, 소환 수사시키고 한 것은 민주사회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며 미래 사회를 열어가는 학문의 자유를 죽이는 것이다.

또한 공안 당국을 비롯하여 경찰 당국은 이미 지난 시기 부당하게 휘두른 반민주, 반평화, 반인권적 만행을 통감하여 거듭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러나 스스로의 공언을 식언으로 만들면서 사실상 이미 사망이 선고된 국가보안법을 적용하겠다는 궁색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과거청산 의지가 없음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 땅의 민주와 평화, 통일을 위하여 앞장서온 양심적인 교수, 연구자들은 학문적 연구와 평가의 문제는 학계에 맡기고 경찰당국은 간섭하지 말 것을 엄중히 요구한다. 또 녹슨 국가보안법의 칼날을 휘두를수록 이 땅에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라는 목소리만 더 높아지리라는 것을 경고한다. 학뭉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가보안법의 명맥을 이어나가려고 하면 할 수록 남북통일,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은 멀어지고 국민의 저항은 강화되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교수 및 연구자 일동은 강정구 교수에 대한 사법처리 운운이 과거청산과 민족사적 과제 해결에 역행하는 것이자 민주사회의 기본을 훼손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그러므로 부당한 권력 행사에 대해서는 이 땅의 모든 민주시민, 민주단체들과 함께 힘을 모아 당당하고 단호하게 대처할 것임을 천명하다.

1. 평화와 통일의 시대, 학문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라!
1. 학문의 자유 탄압하는 국가보안법 철폐하라!
1. 남북화해를 가로막는 국가보안법 철폐하라!
1. 강정구 교수에 대한 소환조치를 즉각 철회하라!

2005년 9월 2일

전국교수노동조합ㆍ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ㆍ학술단체협의회ㆍ한국산업학회ㆍ한국노동산업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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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주대환의 독선과 분열증 그리고 무식함

"노대통령은 '크게 옳은' 말들을 하고 있다"

주대환 민노당 정책위원장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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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평문은 비평근거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일히 원문의 문단에 번호를 붙여 인용한다. 그리고 이른 바 자칭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정책위원장 주대환(이하 경칭 생략)이라는 직함은 사소한 것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유수의 씽크탱크로서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민주노동당의 말이며 그 정체성이라고 이해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판단한다.


 

제목을 이렇게 정한 까닭은 읽다보면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을 것이지만 정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 단어들을 곁들여 설명하면서 비평을 할까 한다. 

 


 

주대환은 "지역구도(정확한 말이 아니므로 앞으로 영남패권이라 칭함)가 한국정치의 낙후성으로 발생했고 지속되고 있다(8.10)"고 이해한다. 이렇게 주대환이 얘기하는 순간 주대환의 비효율적인 언어적 수사가 발현된다. 도구적 동물이라 칭하는 인간은 언어생활 역시 효율을 추구한다.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기 위해서 가장 적확한 말을 모색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남패권이라는 사회악을 혁파해야 한다고 할 때 그 사실을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은 가해지역주체와 피해지역주체가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려지는 지역구도라는 개념이 아니다.  주대환이 무식해서 비효율적인 개념을 사용한다면 더 배워서 정치를 해야 할 것이고 고의라면 거대 사회악 앞에서 그 소심함과 비겁함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분열증세란 사고의 장애를 말하는 정신병이다. 분석대상인 글에서의 구체적인 문단은 46과 48이다. 주대환은 "3김 정치, 3김 없는 3김 정치는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노무현이 정직하게 인정하고 있듯 구시대(46)"는 마감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한편, "우리는 우선 1987년 이후의 한국 정치를 3김 정치로, 지역구도로 파악하지 않는다(48)"라고 얘기한다.

 

짤막한 하나의 글에서 이렇듯 횡설수설하며 동일한 현상에 대해서 인식하지 않는다고 얘기할 수 있고 한편으로 그것은 인정하며 종식되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은 그대로 분열증세일 뿐이다.  그 증거는 또 있다. "우리는 우선 1987년 이후의 한국 정치를 3김 정치로, 지역구도로 파악하지 않는다(48)"라고 얘기하면서 지역구도를 혁파하기 위해서는 혹은 노무현의 메시아적 소명은 온 국민이 나눠야 한다(54)고 얘기한다.

 

독선적이라는 것은 혼자만 옳다고 생각하거나 행동함을 지칭한다. 이를테면 주대환의 말 중에 민주노동당외에 주대환이 규정한 고만고만한 보수정당 전체가 추구하는 이상향(Utopia)은 진보정당 민주당이 꿈꾸는 글로벌스탠다드 국민국가만 못하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독선적인 태도가 발전하면 정치영역에서의 독재를 뜻하는 파쇼가 된다.  민주노동당 외에는 모두 고만고만하여  본질적 차이가 별로 없어 인정할 가치가 없다고 얘기하는 태도가 곧 파쇼이다.  "정치철학이 제대로 분별 정립되지 못해 본질적으로 대차없는 보수정당(자유주의/보수주의)들끼리의 정치때문에 지역구도와 인물 위주로 정치가 이뤄져 온 것이다(22.23)"


 이렇게 말하는 내면의 심리는 사뭇 민주노동당의 이념적 기반만이 가치롭고 보수정당의 이념적 기반인 자유주의나 보수주의가 무가치하며 무차별한  사상이라는 것이 팽배해 있다. 좌파인 민주노동당은 사상의 절대적 자유를 주장하고 있지만 속내는 별로 그렇지 않고 독선적이며 파쇼적으로 다른 사상들을 존중할 줄 모르는 위선적 행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정말 민주노동당이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는 정당이라면 절대로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없는 것이다.


자유를 위해 싸운 정당과 자유를 앗아 배를 불린 정당을 무차별하게 동질적으로 매도하는 것이 정상인의 그것일까?  정상적인 사고의 소유자라면 불가능한 독선적이며 파쇼적인 심리구조이다. 이런 행태는 탄핵과 총선과정에서도 시종일관 견지된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이다.


견강부회란 합리화하기 위해 억지로 끌어다 붙이는 것을 말하며, 자가당착이란 같은 사람의 언행이 표리부동하여 모순되는 것을 말한다. 이른 바 노무현의 대연정 제안은 "대차없는 보수 정당들끼리 뭉치는 것이고 (향후 민주노동당과의 경쟁구도로 갈 수 있으므로) '크게 훌륭한' 제안이다.  미국식 대립구도나 유럽식의 대립구도의 새로운 정치질서를 형성하면 지역구도는 사라질 것이(22.23.24)"라고 얘기하는 한 편, "영불에서는 소선거구제로 현대적 정책정당 체제를 발달시켜 왔지만 우리나라의 낙후한 전근대적 개인투기사업적 정치문화때문에 불가능하므로 대선거구(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거나 기득권을 가진 국회의원들이 반대한다면 차선으로 대선거구제를 기본으로 소선거구제적 요소를 혼합한 독일식의 선거제도라도 합의 채택하자. 소선거구제는 악이므로 범국민적 반대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32~38)"라고 주장한다.


이 긴 인용부분을 보완해서 정리하면 "한국의 보수 정치가 미국식의 보수(자유주의/보수주의) 양당 체제로 발전하며 정치 현대화가 진행되면서 지역구도는 자연스레, 서서히 극복되어 나갈 것이다.(14)"라고 말하는가 하면, "미국식 대립구도나 유럽식 대립구도로 새로운 정치질서를 형성해서 지역구도가 해소될 것(18)"이라고 하는 한 편, "정치인의 개인투기사업적 정치문화의 한계때문에 소선거구제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대선구제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것이 최선(32~38)"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발만 더 원인쪽으로 내 딛게 되면 그 원인이 유권자인 국민의 시민의식에 문제 있음을 알게 된다. 바꿔 말하면 한국의 후진적 정치의 가장 근본적인 개혁 처방이란 유권자의 시민의식 각성 혹은 시민의식 제고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대환은 갑자기 민노당식 정치대결구도로 가고 싶어 무리하게 논리를 비약시켜 소선거구제를 탓하며 바야흐로 국민적반대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영불 국민처럼 시민의식이 대등한 수준으로 영원히 제고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에만 타당한 논리일 뿐이다. 이것은 그대로 견강부회이며 자가당착이다.


그리하여 주대환은 모든 (민주노동당을 뺀) 기성정치인을 싸잡아 개인투기사업자라고 매도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즉 거짓말이다. 이 부분의 반박은 다른 정치인의 몫으로 남겨 두겠다. 아무튼 이러한 태도 또한 민노당식 독선과 파쇼적 심리구조를 웅변한다.


주대환은 또 "대한민국의 그 제 정당들은 이구동성으로 '개혁'을 외치며 국민생활과 무관하게 싸운다(22.23)" 고  말한다. 그렇다면 개인투기사업정치인이며 사이비개혁가들인 정치인들은 대결구도의 상대방이 아니라 척결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지금으로부터 2.5년도 채 되지 않은 총선 때 민노당은 열린우리당을 유일한 꿈의 연대의 파트너라고 극구 치켜올리며 민주당까지 싸잡아 매도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주대환식으로 말하면 그런 무가치한 그리하여 척결해야 할 정당중의 하나인 열린우리당과의 연대를 꿈꾼 민노당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를 대답해 주었으면 한다. 10년도 채 내다보지 못하는 색맹정당인데 어떻게 정권을 창출할 수 있겠으며, 민주노동당이 꿈꾸는 유토피아가 주대환 꿈대로 그대로 실현된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참고로 주대환이 파악하고 그리는 이상향을 보혁구도로 나눠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민주당, 자민련, 중부권 신당이 꿈꾸는 이상적 한국상은 아름다운 미국을 모델로 하고 깔끔한 일본을 현실적인 목표로 하는 국민국가를 건설이며" "민주노동당의 "정상적 국민국가" : 글로벌 스탠다드인 무상의료 무상교육의 선진복지국가(52)"이다.


민주노동당의 주장을 좀더 인용해 보자.

"민주노동당의 이상인 유럽식의 정치구도(사회주의/자유주의(보수주의))로 된다면 지역구도는 빨리 근본적으로 극복될 것이다. 그래서 진보정당의 성장은 지역구도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고 가장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오직 민주노동당만이 유럽을 모델로 하여 새로운 국민국가를 만드는 것이라고 국민들에게 그렇게 알려지고 그렇게 인식되고 기대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때때로 거대 여당에 근접하는 까닭이다. 우리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바라는 유럽식 사회주의/자유주의(보수주의)의 대립구도를 앞당길 것이다.(36.38)"
 

결국 주대환은 전근대적인 후진정치로 탄생된 인위적이며 비인도적인 "영패"구도를 정치인들이 솔선해서 인위적으로 되돌려 놓자는 주장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정치선진화가 진척되면 해소된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곧 이미 저질러진 상태(지역구도:영패구도)는 어찌할 수 없고 앞으로 점진적이며 자연적으로 해소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자의 양극화에서 노동자를 위해 민주노동당은 왜 그렇게 솔선하여 그것을 해소하고자 노력하는지 되묻고 싶다. 노동자와  '소외지역민들이 떼로 몰려사는 소외지역의 지역민'들은 성분이 다른 불평등한 사람들이란 소린가?... 이게 민노당의 정체성인 것이다.

 


한편 주대환은 "우리는 이 시대를 '민주화 과도기'로 파악한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화 과도기가 끝났다고 본다. 이제 우리나라는 '정상적 국민국가'의 문턱에 서 있다. 그래서 노무현 시대는 새로운 시대의 출발이다. 아니 민주화 과도기를 벗어나서 통일된 정상적 국민국가 건설의 시대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46.48) 라고 얘기한다.


위 인용 문단에서 주대환은 민주화 과도기가 끝났다고 본다고 얘기한다. 말하자면 주대환의 뇌리에는 민주화에서 정상적 국민국가로 넘어가는 것이 과도기라고 이해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비상식적인 진단이다. 지금 시대는 배분적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실질적 민주화시대가 시작되어야 하는 험난한 도정에 있을 뿐이다.


결국 주대환은 보수정당은 싸그리 고만고만한 정당이므로 노무현의 대연정제안은 크게 옳은 것이며 견강부회적으로 소선거구제를 혁파하고 민노당에게 특히 유리한  대선거구 비례대표제가 최선이라고 하는 것이 글의 요지인 셈인데 이 짤막한 글에서 민주노동당의 씽크탱크의 적나라한 모습을 훔쳐 보며 필자는 지금 매우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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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대통령은 '크게 옳은' 말들을 하고 있다[프레시안] 
2 <기고> "이제 1987년이 아니라 1948년으로 돌아가라"

4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직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 아무리 지역구도의 타파가 중요하기로서니, 선거제도의 개혁을 간절히 열망하기로서니 대통령직을 거기다 걸어버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평소에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역시 말을 가볍게 하는 대통령이고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대통령이고 대통령 자격이 없는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고 야단이다. 이제는 노무현 대통령을 아끼는 사람들까지 걱정이 되어서 말리는 분위기다.
 
6 지역구도 타파는 대통령직 건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8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우선 노무현 대통령의 이 지긋지긋한 '지역구도'에 대한 인식에서 다소의 착오가 있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지역구도는 한국정치의 낙후함의 원인이 아니고 결과다. 과연 보수정당들끼리 본질적인 의미에서 큰 차이가 없다면 과연 무엇으로 편을 갈라 정권을 다툴 것인가? 하다못해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만큼이라도 이념적, 정책적 차이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10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라는 대차 없는 정치철학이라도 제대로 분별 정립되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지역구도로, 그리고 인물 위주로 정치가 이뤄져 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역구도로 인해 한국정치가 발전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한국 정치가 낙후하기 때문에 지역구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2  그러므로 지역구도는 노무현 대통령이 그것을 타파해내지 못하더라도 한국의 보수 정치가 미국식의 보수 양당 체제로 발전하면서 자연스레, 서서히 극복되어 나갈 것이다.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동조하지 않는 보수 정치인들이 갖고 있는 전망인 것이다. 맹형규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이 제안한 '반노우국(反盧憂國)의 정치연합'은 한나라당 중심의 보수 대연합이니 그러한 구상이 실현된다면 우리나라 정치는 미국식 정치구도로 한발 다가가게 될 것이다.
 
14  우리 민주노동당 당원들은 지역구도에 더욱 큰, 격렬한 고통을 느끼고 있지만 한국 정치를 현대화하면서 결국에는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실현하고자 분투노력하고 있는 유럽식의 정치구도가 실현된다면 지역구도는 보다 빨리, 보다 근본적으로 극복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진보정당의 성장, 그 자체야말로 지역구도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고 가장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16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대연정은 '크게 훌륭한' 제안이다
 
18  미국식 자유주의/보수주의의 대립구도든지 유럽식 사회주의/자유주의(보수주의)의 대립구도든지 무언가 새로운 정치질서를 형성하면 지역구도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념과 정책이 비슷한 정당끼리 정치연합이나 연정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런 점에서 맹형규 의원의 제안도 역사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좋은 제안이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은 더 크고 훌륭한 것이다. 바로 우리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바라는 유럽식 사회주의/자유주의(보수주의)의 대립구도를 앞당길 것이다.
 
20  노무현 대통령이 하는 말 중에는 '크게 옳은' 말들이 있다.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차이는 개혁의 속도 차이, 상대적 차이이지 근본적인 차이는 아니다." 역시 노무현이다. 그의 순수한 영혼만이 벌거벗은 임금님의 알몸뚱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22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만들고자 하는 나라, 미래 한국의 모습, 통일 한국의 모습은 동일하다. 그 두 정당은 아름다운 미국을 모델로 하고 깔끔한 일본을 현실적인 목표로 해서 정상적 국민국가를 건설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리고 민주당, 자민련, 중부권 신당이 모두 완전히 동일하다. 대한민국의 그 모든 정당들은 모두 함께 한 목소리로 '개혁'을 외친다.
 
24  때때로 몸싸움을 벌이고 막말을 주고 받아서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큰 차이가 없다. 국민들이 보수정당들의 싸움질을 매우 싫어하는 이유는 그 싸움이 국민의 생활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국민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싸운다면 싸움질 그 자체를 싫어하겠는가? 결단코 아니다.
 
26  오직 민주노동당만이 유럽을 모델로 하여 새로운 국민국가를 만들고자 한다.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어떻게 쓰여 있든 상관없이 국민들에게 그렇게 알려지고 그렇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기대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의석 10석의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때때로 거대 여당에 근접하는 이유가 있다. 물론 통일한국이 지향해야 할 나라로서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들고 있는 국민의 45%와 민주노동당 지지율 15% 간의 격차는 좀 크지만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28  소선거구제는 정치개혁의 큰 걸림돌
 
30  지역구도와 소선거구제의 관계는 어떠한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소선거구제는 지역구도와 깊이 얽혀 있기는 하지만 동일한 실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소선거구제의 타파 없이도 지역구도의 타파가 가능하다는 말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소선거구제가 지역구도 타파를 힘들게 하는 조건이지만 지역구도의 원인은 아닌 것이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소선거구제를 가지고서도 현대적 정책정당 체제를 발달시켜 왔다.
 
32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말하자면, 우리나라 정치에는 지역구도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정치를 하는 보다 중요한 동기가 이상이나 사상의 실현이 아니라 개인적 출세욕이라는 문제다. 우리나라에서 정치는 '개인 사업'이다. 그리고 소선거구제는 지역구도만이 아니라 더 뿌리 깊게는 정치가 '개인 사업'이 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낙후한 전근대적 정치문화와 깊이 결부되어 있다.
 
34  우리나라에서 정치란 '꿈'을 가진 정치지망생이 자신의 명예욕,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서 벌이는 투기사업이다. 물론 그러한 전근대적 정치문화 역시 소선거구제 하에서라도 필연코 현대화되어 나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너무나 많은 노력과 희생과 시간을 요구하고, 한국 사회의 발전과는 시차가 너무 크게 날 것이다. 그래서 소선거구제 타파는 참으로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정치개혁을 앞당길 수 있는 지름길이다.
 
36  소선거구제를 타파하면 우리나라 정치의 현대화가 훨씬 빨리 진행될 것이 틀림없다. 대선거구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그 해법이다. 일찍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안했던, 광역시도를 하나의 선거구로 하여 각 정당이 후보의 리스트(정당명부)를 제출하고 유권자는 정당을 대상으로 한 표를 던지는 방식으로 바꾼다면 한국의 정치문화는 뿌리에서부터 뒤집어질 것이다.
 
38  혹여 소선거구제에 미련과 기득권을 가진 국회의원들이 반대해 절충을 할 수밖에 없다면, 대선거구제를 기본으로 소선거구제적 요소를 혼합한 독일식의 선거제도라도 합의 채택하면 곧바로 엄청난 변화가 초래될 것이다. 그래서 소선거구제를 넘어서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활발하게 전개되어야 하고 국민이 참여하는 국민운동으로 전개돼야 한다. '소선거구제 반대 국민운동'이 필요하다.
 
40  노무현 대통령은 1948년으로 돌아가서 생각하라
 
42  노무현 대통령은 1987년이라는 민주화가 시작된 시점에 '정치'에 입문한 사람이다. 그리고 15년간의 민주화 과도기를 나름대로 열심히 이편저편에 가담해 진지하게 다투고 온몸으로 투쟁하면서 - 심지어 정치 입문 최초에는 백기완 편을 들어 '비판적 지지론자' 이해찬과 논쟁한 적도 있다 - 정치를 해 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대통령이라는 정점에서 한국정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44  이제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 보수정치의 한가운데에 서서 그것이 하나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정직한 한 인간으로서 1987년이라는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 1948년으로 돌아가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더 길게 크게 역사를 보면 노무현 대통령의 비장한 수사는 고쳐져야 한다.
 
46  "노무현 시대가 새 시대의 출발이 아니고 구시대의 마감이 되어야 한다." 그의 말에는 대선 승리에 이은 총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가 바라던 새로운 정치를 이루지 못했다는 좌절감이 깊게 묻어난다. 아직도 3김 정치, 3김 없는 3김 정치는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48  그러나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만큼 깊이 좌절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선 1987년 이후의 한국 정치를 3김 정치로, 지역구도로 파악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시대를 '민주화 과도기'로 파악한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화 과도기가 끝났다고 본다. 이제 우리나라는 '정상적 국민국가'의 문턱에 서 있다. 그래서 노무현 시대는 새로운 시대의 출발이다. 아니 민주화 과도기를 벗어나서 통일된 정상적 국민국가 건설의 시대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50  대권주자 김근태 장관이 참여하여 그야말로 '야심적으로' 복지 제도를 발전시키고 있는 이 변화는 한국이 OECD 평균의 복지국가, 오늘날의 글로벌 스탠다드의 국민국가로 가고 있는 의미심장한 변화의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그의 경쟁자 정동영 장관 역시 통일로 가는 길에 무언가 가시적 성과를 남기고자 애쓰고 있지만, 역사의 큰 흐름 속에 통일된 정상적 국민국가 건설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52  무상의료 무상교육의 나라는 소수 민주노동당 당원들의 꿈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글로벌 스탠다드이기도 하다. 흡사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매우 진보적인 헌법, 당시의 어법으로 말하면 '진보적 민주주의' 헌법에 담긴 내용들이 1948년 그 시점의 글로벌 스탠다드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민주노동당이 그리고 있는 '선진 복지국가'의 상은 통일한국을 건설하는 이 시점의 글로벌 스탠다드인 것이다. 그리고 그 내외의 압력은 큰 힘으로 작용하여 우리나라의 사회진보를 가속하고 있다.
 
54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 구도 타파와 선거구제 개편의 메시아적 소명 의식을 벗어던져도 국민들은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 짐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지역구도는 우리나라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넘어서지 못할 장벽이 아니고, 노무현만이 몸을 던져 돌파할 수 있는 장애는 더더욱 아니다. 
   
  
57  주대환/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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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영남패권주의의 온상 추미애 프리미엄

부제: 영남패권주의 척결의 과제:  문화적 측면의 선결 필요성  


적어도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지역주의의 병폐는 지역등권으로 풀어야 한다는데 커다란 공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지역등권이라는 출중한 정책 대안의 채택을 강고히 방해하는 현실조건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심각히 여기지 않는 것 같다.  내 견해로, 그 장애물은 정치구조의 훨씬 하부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저작권: 국회사진기다단


민주앙들의 정치인 추미애에 대한 애증을 읽다보면 그 하부구조의 실체가 자연히 드러나고 만다. 


한 때 우리들의 가슴에 슬며시 다가온 적이 있던 민주당 전 의원 추미애, 그녀가 어떻게 호남인들의 큰사랑을 받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합당한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추미애가 한 전라도 출신 대학 선배와 연애를 하고 결국 결혼을 하여 잘 살고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녀가 전라도라는 <집단>에 대한 한국사회의 비우호적 관점이나 영남우월주의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보는 것은 심히 위험한 가정이다.  


자신과 개인적 친분을 맺게 된 특정 개인에 대한 관계를 근거로, 그 개인의 배경이 되는 집단 전체에 대하여마저 그의 편견이 다 해소된 것으로 판정해주는 것은 큰 실수다.


어느 한 <개인>에 대한 호불호는 그가 가진 배경보다는 그가 갖고 있는 인간적 매력과 지위와 능력 등 거의 전적으로 개인적인 면모에 의해 결정된다.   적어도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면들에 의해서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가지는 어느 한 <집단>에 대한 호불호는 개인간의  문제처럼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면들에 대한 검증을 거쳐 결정되지 못하고, 자신이 그 집단에 대하여 이미 내면에 쌓아두고 있었던 파편적인 이미지를 제 구미에 따라 선택적으로 짜깁기하므로써 결정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집단에 대한 호불호는 매우 피상적인 정보의 파편들과 자신내의 이기적인 실속 추구에 따라  갈리는 법이어서, 사람은 그 안에 자기가 끝내 거부하고 마는 집단을 꼭 모셔두면서도 그 집단의 중추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는 어느 특정 개인에 대한 호감은 동시에 보이는 모순된 일을 얼마든지 한다. 


이렇듯 사람이 어느 한 <개인>과 어느 한 <집단>에 대하여 호불호를 결정하는  메커니즘은 서로 완전히 다르자료: 추미애 홈페이지므로 그 사람이 어느 한 개인을 지지했다고 하여, 그가 그 개인이 가진 특정 배경을 공유한 집단까지를 모두 지지하는 것이며 그 집단에 대한 편견을 다 버린 상태다라는 증거로 삼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논리적 오류다.  

특정지역에 대한(즉, ‘집단’에 대한) ‘편견의 극복’이란, 그 지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겨우 아니다.   그것은 그 지역에 대한 자신 안의 비뚤어진 ‘인식틀’을 고쳐 바르게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자신안의 상대적 우월주의 등의 사고편린들을 하나하나 성찰하여 깨끗이 클린징할 것을 요구한다.  마치 담배를 끊듯이 단 한번의 옹골찬 결단으로 완벽한 이별을 고할 수 있는 한번의 <사건>이 아니고, 뇌수에 숨어있는 편견의 찌꺼기들이 남모르게 자라나 어느새 반란을 일으킬까 초조한 심정으로 내내 감시하는 <과정>인 것이다.

추미애가 영남의 상대적 우월주의 문화에 대한 영남인으로서의 반성을 조금이라도 보였던 적이 있는지가 나는 심히 의문이다.  

그녀가 전라도인 남편(개인)과 살고 있다는 것이 곧 그녀가 전라도(집단)에 대해 갖는 각별한 사랑의 표현인 양 브랜드화된 것은 통탄스러운 한국의 저급문화 풍토 때문이다.  .  

추미애가 호남며느리가 된 것이 그녀의 정치적 프리미엄으로 작용토록 허용하는 문화는, 전라도 총각이 혹시라도 영남사위가 되기 위해서는 영남인들의 전라도인에 대한 혐오를 상쇄하고도 남을 메릿을 필히 제공해야 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것은 또한 그럴만한 능력이 안되는 수많은 호남의 처녀들이 영남의 며느리가 됐을 때 영남식구들에게 잘보이려 두 배 이상 애써야만 할 것이라는 문화적 압력을 깔고 있다.  지금 막 태어나는 아기도 그가 전라도산(産)이면 이미 이 멍에는 씌워진 셈이다.  그 아기가 영남산이면 추미애와 같은 프리미엄을 품고 태어난다.  영남인 한 사람의 가치와 호남인 한 사람의 순수 가치가 미리부터 평등하지 않다는 가치규준이다.  다시 말해, <불공평>이 버젓이 규범으로 자리잡은 문화다. 그 문화는 영남패권주의의 공기다.

추미애는 자신의 ‘전라도인 며느리’ 이미지가 하나가 엄청난 정치적 프리미엄이 되어 정당치 못한 혜택을 간단없이 누려온 것에 대하여 부채감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그것이  일말이라도 시위된 적이 있는가?   그녀는 전라도인 편에 서서 이 불평등 구조에 정면으로 대항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을 위해 제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조금이라도  희생시켜본 적이 있는가?  

오히려 추미애는 그 <불공평 프리미엄>을 극대화키켜  저 자신의 정치적 패권의 동력으로 삼으려고 그간 얼마나 추한 모습을 노정해왔더란 말인가!  (물론 그 결정판은 그녀의 삼보일배 쇼였으렷다.)  

나는 그녀가 거저 줏어먹은 이 프리미엄의 실체가 영남우월주의 사고에 찌든 노무현이 “통째”로 줏어먹은 전라도 “현찰”의 실체와  어디 한 점 다름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인간’ 추미애와 ‘인간’ 노무현은 완전 별개의 개인들이다.  그러나 ‘정치인’ 추미애와 ‘정치인’ 노무현은 ‘전라도차별/경상도우월주의’라는  이 나라의 야비한 문화풍토병을 그 자궁으로, 그리고 “전라도 현찰”이라는 마르지 않는 젖줄기를 빨고 자라난 한 뱃속 오빠 누이지간이다.

이 나라의 모오든 정치인들의 출생 배경과 성장과정이 그러했으나, 특히 추미애는 이제껏 그 누구보다도 넘치수갑, 차꼬게 누려왔던 경상도프리미엄 부스럼을 자신의 피부에서 온전히 벗겨낼 일이다.  지금 혹 추미애한테 남들보다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려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면 오해다.  그녀의 정치적 잠재력을 아껴서 이말을 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녀의 정치적 성장 문제와는 아무 상관없이, 터무니없는 이유로 혜택만 받아온 정치인으로서 그녀가 이 땅의 불공평, 그 왜곡된 가치규준들을 바르게 돌려놓는데 이제라도 일조하기를 요구하는 것 뿐이다. 아니 그저 반성만이라도 할 수 있기를 요청하고 있을 뿐이다.

“영남인이 전라도인과 부부의 정을 맺어 살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영남인은 전라도인이나 마찬가지제…” 라고 생각하는 호남인들의 사고는, 부단히 대항하고 극복해나가야 할 당사자들마저 정작 영남패권이데올로기에 이미 깊이 물들어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결정적으로는, 이들 전라도인의 사고방식이 오늘의 추미애를 키워온 비옥한 토양이었다.  본의 아니게 영남패권 구조를 견고히 하는데 호남인들이 반지원, 반동원됐던 셈이다.

‘영남’ 자체가 우리의 일상 문화와 정치영역을 관통하여 프리미엄으로 우대되는 이 기이한 현실의 형성에 부역한 것을 호남인들부터 통절히 자성할 일이다.  그와 함께  정치인 추미애는 그러한 영남패권문화를 최대로 향유해왔던 장본인임을 지금부터라도 심히 부끄러워 하고 통렬한 비판을 수용할 일이다.  그녀가 제2의 노무현이 되지 않으려면 더욱 그러하다.

오늘도 이 사회를 휩쓰는 영남패권이데올로기  문화와 노무현혼돈, 그리고 작금의 추미애증후군은 모두 한 묶음이다.  

지역등권으로 가는 우리의 길을 근본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깊은 늪은 결코 영남패권집단이나 영남민만이 아닌, <영남패권이데올로기>라는 이 사회의 광범위한 <문화>다.  그 문화는 노무현이나 추미애 뿐만이 아니라 미래의 노무현 복제인간을 끊임없이 양산해낼 것이다.  가치관이 잘못된 인간을 우대하는 문화를 우리가 가지는 한, 이 사회는 지역등권의 길을 영영 거부할 수밖에 없다.  


원제목 : 영남패권주의를 온존시키는 토양: 추미애의 예에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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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찬양대원 박유리의 글을 읽고....

박유리씨(이하 경칭생략)는 노무현이 대한민국에서 으뜸 정보력을 가지고 거시적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지사라고 한다. 필자는 친한나라당이 아니라 평화민주개혁세력의 일원으로서 그 찬양논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도대체 노무현에게 누가 국가 100년대계를 맡겼다는 허튼 소리인가? 노무현은 현행헌법상으로 단임으로 끝나는 잔여임기 2.5년도 남지 않은 국정지지도가 30%에도 미치지 못하는 식물대통령이다. 지지세력이라는 연료가 노무현의 헛발질로 이미 소진되어 수구세력의 대권후보가 여론조사에서 앞다퉈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차기대권을 걱정하지 않고 거시적으로 凡동아시아 뭐를 꿈꾼다고 한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
 
그렇게 양질의 우월한 정보력을 가지고 평화민주개혁세력의 구미하나 맞추지 못하고 국정지지도가 그리 낮은 것, 국내현안은 수구화로 내 치닫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말았고 차기대권은 한나라당이 넘보고 있는데
 
노무현이 이처럼 실정하여 차기대권을 한나라당으로 넘기게 된다면  - 아니 지금도 넘겨도 무방하다고 얘기하는 노무현인데 - 평화민주개혁세력으로부터 역사의 죄인으로 낙인 찍히게 될 것이다.
 
박유리 말대로 한줌의 뭐 정도 되는 한나라당하나 제대로 갈무리 못해서 질질 짜며 연정을 읍소한단 말인가?  만약 노무현이 실정만 하지 않았던들 한나라당은 그대로 영남지역을 기반으로 위축되다가 지역당으로 전락하는 운명을 고스란히 맞았을 것이다.
 
박유리식으로 그렇게 좁아 터진 땅 덩어리 안에서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동서로 갈리고 노무현에 의해서 더 작게 호남북으로 갈려진 것도 노무현의 위대한 통치술의 결과란 말인가? 
 
노무현이 일궈놓은 구체적인 성과가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권위주의의 청산?  배꼽을 잡고 쓰러질 정도로 웃기는 소리 말라.
 
최근 대 연정제안에서 일개 평당원 신분으로 자기 호주머니 돈보다도 더 가비얍게 열린우리당의 정체성과 방향을 좌지우지하는 1당보스 제왕적 보스의 극치를 보여준 것을 보면 권위주의 청산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개그 컨서트였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았는가?  노무현은 권위를 버린 것이 아니라 격식을 깬 권위주의의 극치를 지금 시범보이고 있을 뿐이다.
 
박유리가 이르는 "노무현은 기십년의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차기 대권 주자의 몫이다. 노무현이 차기에도 대통령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엉뚱한 꿈 꾸지 말고 박유리 말대로 좁아터진 땅 덩어리에서 껌 씹기보다 더 쉬운 상대인 한나라당에게 읍소하지 말고, 동서로 나뉜것도 모자라 호남북을 가르는 반역사적 반통합적 반민족적 죄나 짓지 말라고 할 일이다.
 
그리고 노무현과 그 맹목적 지지자인 박유리는 마치 참여정부가 그들 스스로 힘으로 성립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지금 노무현을 등진 평화민주개혁세력의 힘이 없었다만 겨우 10만도 못되는 노빠들의 힘으로 노무현당선을 꿈에도 꿀 수 없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노무현의 최근 인사정책을 보면 민주사회에서 손가락질 받는 엽관제의 현대판이다. 참여정부의 (평화민주개혁세력으로부터의) 민주적 정당성을 무시하고 역량과 적재적소를 무시한 자신의 측근들에게 모조리 한 감투씩 씌워주는 그런 엽관제적 인사 또한 구시대의 유물인 정실인사일 뿐이다. 그것 뿐인가?  역사상 누구보다도 더 독선적인 인물을 지금 국민들은 보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식 - 막무가내:독선- 식 강짜 사이비 민주주의 역사를 쓰고 있을 뿐이다. 역사는 노무현의 시대를 포퓰리즘의 광기와 맹목적 추종자들이 극성을 부린 시대로 평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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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엠파스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글에 대한 소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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