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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평등의 동일성은 문학가/사상가의 동일성이기도 하다. 전리군 선생의 글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상가와 문학가의 통일
마지막으로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노신의 몸에 체현된 사상가와 문학가의 통일이다. 다시 말해서, "노신은 논리적 범주로 사상을 표현하는 사상가가 아니며, 다수의 상황에서 그의 사상은 개념적 체계에 호소하기 보다는 비이성적인 문학적 기호와 잡문체의 기쁨, 웃음, 분노, 욕 등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단지 문학화된 표현뿐이 아니며, 문학화된 사유를 더욱 포함한다. 노신이 주목한 것은 줄곧 인간의 정신 현상이었다. 모든 사상적 탐구와 곤혹은 그에게서 모두 개체 생명의 생존과 정신적 곤경의 체험으로 전화될 것이었고, "바로 생명철학이 노신이 동시대 다른 중국 사상가와 구별되는 독특한 지점을 구성하는 중요한 측면이었다". 그리고 "문학화된 형상, 의념, 언어는 노신 철학이 주목하는 인류 정신 현상, 영혼 세계에게 총체성과 모호성 그리고 다의성을 부여하였고, 본래 가진 복잡성과 풍부성을 돌려주었다. 이렇게 노신이 탐구하고자 한 정신 본체의 특질과 외재적 문학 기호 사이에 일종의 조화와 통일을 이루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노신 사상과 그것이 표현하는 "풍요로운 모호성"의 특징에 주의했는데, 이를 노신의 한계로 보는 것은 안타깝게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인용은 錢理群、王乾坤﹐〈作為思想家的魯迅[사상가로서의 노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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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jinbo.net/nomad22/332[자유와 평등]
우리가 경험했고, 또 경험하고 있는 온갖 성격과 형태의 사회에서, 오랜 체험과 그것으로 얻어진 예지로써 이제 내릴 수 있는 한 가지 결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유와 평등은 동등하고 동격의 가치를 지닌 요소이지만, 집단적 인간의 행복 추구의 실천적 순서로서는 ‘자유’가 ‘평등’ 앞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까이 인류의 근현대사에 점철된 수많은 봉기·민란·폭동·혁명·민족 해방 전쟁 등에서 우리는 목표 추구의 질적 무게는 같지만, 목적 달성의 선후 또는 완급에서는 ‘자유’가 평등보다 앞섰다는 많은 실례를 정확히 평가하고 인식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자유는 ‘인간’ 생명체의 원초적 본성이고, 평등은 개개인의 집단적 생존이 형성된 뒤에 생명이 요구하는 ‘추후적·사회적 조건’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임형이 고민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구만. 현실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 패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진정한 평등으로만 가능하지만, 현실적·사회적 생존차원에서는 개개인에게 가치 있는 것은 자유가 먼저이고 다음에 평등을 욕망하게 되니까요.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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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발리바르가 equaliberty로 평등/자유의 동일성을 말했던 것이 다시 생각났는데, 평등을 앞세운 것은 의도적인 것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