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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사회운동에 대해서는 그다지 직접 관계하지 않은 지 좀 되었다. 박사반 들어와서는 공부에 전념해야 했던 사정도 있었고, 대만 사회운동 문화에 대한 답답함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답답함은 나의 지적 무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내가 지난 5년 경험하고 관찰한 결과 대만은 진보적 운동의 주체가 일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어떤 건강한 대중 조직으로 발전하는 사례가 거의 없다. 극소수의 예외적 사례로 들 수 있는게, 결혼이주여성 운동과 성노동자운동 정도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나는 많은 한계를 느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를 대만적인 운동의 문화라고 보고 있는데, 이를 해명하기가 쉽지는 않다.
근래에 대만에서 나의 이 답답함을 다시 일깨워주는 사건이 있었다. 대북(台北)의 왕(王)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이 도시 재개발에 의해 강제로 철거를 당하게 된 것이다. 지난 3월 28일 철거가 되면서 그 후 지금까지도사회운동, 야당인 민진당, 학계 및 문화예술계까지 현장으로 집결하여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내 경험으로는 몇년 전 낙생원(한센병 환자 주거지 강제철거) 이후 처음 보는 경찰과 학생들의 충돌이었다. 우선 관련 기사들을 종합해본 결과, 개발지구에 15층 규모의 주택을 건설할 예정이고, 지난 여름에 이미 다른 주민들로부터 동의를 받아 철거를 준비해왔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개발상이 왕씨에게 9천 6백만 ntd(우리돈으로 약 35억)까지 보상금액을 제시했으나, 왕씨는 몇 대에 걸쳐 오랜동안 살아온 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이주를 거부해왔다고 한다. 왕씨를 도운 이들은 대만 <도시재개발 피해자 모임>이라는 단체이다. 이 단체에는 내가 잘 아는 열정적인 친구도 있는데, 왕씨와 함께 그리고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통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는 개발상의 이익과 왕씨의 이익이 표면적로 충돌하고 있다. 물론 그 배후에는 도시 재개발을 둘러싼 자본과 민중의 충돌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공권력의 강제철거는 분명 개발상의 이윤 확보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도시 재개발을 친민중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운동단체들은 왕씨의 '주거권' 또는 '사유재산권'을 옹호하고, 정부는 법적 승인을 거친 개발상의 '개발권'을 옹호하는 형국이다. 문제는 이러한 운동 내부에서 먼저 검토되었어야 할 정부의 도시계획과 재개발 정책의 문제에 대한 분석과 대안은 거의 부재하다는 것이다(이는 활동가/지식인의 역할이다). 그리고 그 운동의 주체와 성격이 매우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나는 대만에서 왜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이례적으로 모여 경찰과 충돌하고 왕씨의 주거권을 지키고자 했는지 궁금해졌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거의 부재하다시피한 대만에서 이러한 충돌은 일종의 예외적 사건이다. 그래서일까? 그토록 상업주의적인 대만 언론은 열심히 카메라에 이 학생들을 담는다.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적 노선을 걸어왔던 야당 민진당과 기타 여러 부류의 사회운동의 활동가들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대만의 사회운동의 주체성의 문제를 다시 고민하게 된다.
포퓰리즘적 대리주의적 운동... 특히 지식인과 학생은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경찰에 붙잡혀가는 그릇된 정의감이 주는 쾌감 때문일까? 학생들은 그렇다치고, 연구자들이나 교수들도 유사한 행동을 하고 있는데 그들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낙생원과 마찬가지로 지금 철거된 왕씨 집은 학생들과 연구자들 및 예술가들의 축제의 장이 되어 가고 있다. 그곳은 그들에게 오랜만에 '정의로운 나'를 확인하는 장소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이번 철거가 있기 전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철거'의 희생자가 되었을텐데, 그들은 다 어디로 가고 왕씨만 남았을까? 그리고 왕씨는 진정한 운동의 주체일까? 낙생원 운동에 대한 여러 비판들이 많았는데, 그에 대한 반성은 대만 사회운동 안에서 다시 망각된 것일까? 시간이 지나면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결국 자기자리로 돌아갈 뿐이다. 그리고 남는 것은 무엇인가?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남기는가가 아닐까?
지식인의 역할은 그것이 활동가이든 비판적 지식인이든 대중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입을 통해 대중의 주체화라는 소임을 다하면서 자연스러게 사라지는 것일테다. 그러한 반복적 개입과 소멸이 바로 지식인의 역할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대만의 작금의 상황이 다시 한번 지식인들이 사회운동의 의제를 독점하거나 치환하여 자기 욕망의 필요에 따라 소비하고 궁극적으로 대중의 주체화를 지연시키는 대만 문화의 연속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 우려된다. 이 끈질긴 연속성은 어디서 오는가? 내가 보기에 아마 지식인 문화에서 오는 것이지 싶다. 이는 대중들이 지식인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인 것 같다. 대중은 지식인 보다 아래에 있어 도움을 구하지만, 궁극적으로 지식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계급적 본질이 다름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만의 노동조합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한계를 극복한 경험이 없었던 대만의 사회운동은 유/무의식중에 사실 자유주의에 복무하는 사회운동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식인의 급진적 주장도 그것이 대중과 결합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자기만족적인 것이고, 오히려 대중과 지식인의 지적 위계(나아가 계급적 위계)를 재생산하는 반동적 주장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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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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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올린 중국어의 한국어 원문]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도시 철거민 투쟁은 기본적으로 '생존권' 투쟁이다. 즉 재개발로 인해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한 세입자 또는 거주민(대체로 도시 빈민)이 그 투쟁의 주체들이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저소득으로 인해 빈곤한 지역에 저렴한 주거 비용으로 거주하는 자들로서 재개발로 인한 보상금으로는 자신의 직장 및 생활권에서 안정적인 거처을 구할 수 없어 더욱 먼 곳 내지 더욱 열악한 곳으로 이주해야 하기 때문에 종종 '목숨'을 걸고 투쟁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삶의 조건이 심각하게 열악해지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에서 내가 흥미롭게 느껴지는 지점은 '왕가'가 그러한 의미의 철거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거권' 등의 권리 담론 하에 상당수의 학생 및 지식인 등이 결집해서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아마도 '주거권'을 폭넓게 해석해서 '현대화' 자체에 대한 비판과 결부 지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내가 보기엔 대중과 유리된 ‘지식인 중심적’ 담론이기 쉽다. 왜냐하면 ‘현대화’는 성찰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추구의 대상이기도 하며, 거기에서 물질문명 자체에 대한 거부의 논리를 직접 끌어낼 수는 없고, 이는 일반적 상황에서 대중의 요구도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시의 발전 과정에서 일부 낙후된 지역은 재개발을 통한 주민들의 삶의 조건 향상이 매우 절실하다. 이는 ‘반현대화’가 아니고, 도시 발전에서 재분배를 실현하는 ‘현대적’ 방식이다. 만약 지식인들이 문화적 유적이기 때문에 보존해야 한다고 해도, 개발을 통한 낙후된 주거 환경 개선의 실익이 더 크다는 공동체의 대중적 합의가 있다면 개발 자체를 반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도시 재개발에서 주거권 보장은 철거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의 명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유사한 수준의 주거 환경이 보상 등의 방식으로 보장되는지의 문제이다. 왕가의 경우는 그래서 주거권의 차원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물론 이에 앞서 도시 재개발이 올바른 방향으로 계획되었는지에 대한 내용 및 절차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왕가 사건을 통해서 이 문제가 이슈화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일반적 상황에서 도시 재개발은 낙후 지역을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을 몰아내 다시 게토 및 슬럼 등의 거주환경이 열악한 도시 빈민지역을 형성한다. 그래서 ‘주거권’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만약 대만의 상황도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그러한 약소자의 피해를 해결하는 집단적 참여의 과정 속에서 그들이 운동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왕가 사건의 경우 사건 자체가 그런 방식으로 이슈화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나는 도시 빈민의 주거권 문제라는 대중적인 의제가 지식인 중심적이고 탈계급적인 ‘반현대성’의 의제로 치환된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운동의 주체가 모호해지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된다. 사회의 진보와 변화는 지식인을 매개로 한 대중들의 각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식인과 활동가의 실천은 철저하게 대중들의 인식수준에 제약 받을 수 밖에 없다.
뽀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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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용산, 두리반, 마리로 이어졌던 일련의 사태와 관련해서, 대만의 사례도 흥미로운 점이 있네요. 한국의 경우는, 최근 사회적으로 주목 받는 사례들은 (도시 하층의) '주거권'이 논의의 중심에 서기 보다는 도심재개발로 인한 '재산권'을 중심으로 전선이 형성되는 것 같은데요...그러니깐 정당한 보상 말이지요. (또 이런말하면 돌 맞을지 모르지만) 한국도 마찬가지로, 다분히 중간계층의 위기를 반영한 성격이 보이기도 하고요. 믈론, 도심재개발과 관련된 국가와 자본의 '탈취'와 각종 유무형의 폭력도 중요하지만요. 문제는 무슨 재산권이나 주거권이나 이러한 논의를 재기하거나 보다 충분히 논의를 진전시키지도 못하고, 일부에 미디어와 지식인, 학생, 활동가 등에 의해 투쟁 '쇼핑'으로 전유되는 것 같은데, 본격적으로 이를 다루는 단위도 거의 없고요. 사실, 뉴타운 열풍이 불었을 때도 이를 제대로 다루지도 못했던 것 같고요.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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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저도 두리반 등의 사례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만, 전후 맥락을 자세히 모르고 있어서 언급을 안했는데, 비슷한 측면이 있는가보군요. 나름 정리가 필요한 사안인 듯 합니다.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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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공간이 공과 사가 어우러져서 예측 불가능한 그 어디론가 향하는, 예컨대 혁명으로 향하는 궤도에 오를 수 있는 공간이라면 도시재개발이, 젠트리피케이션을 통한 공과 사의 엄격하고 적대적인 구분으로, 도시공간을 자본의 논리에 종속시키는 면에 주목하고 싶네요. 이런 맥락에서 주거권의 사회주의적 [재]해석이 필요하지 않나 하구요.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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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락된 이야기를 첨언합니다. ‚슈트트가르트 21’이라는 독일 바덴 뷔르템베르크 주 슈트트가르트시 중앙역 개조사업에 저항하는 시민운동이 있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자세히 분석하지는 못했지만 이 시민운동을 계기로 하여 녹색당이 처음으로 주차원에서 정권을 창출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시민운동은 주거권문제보다는 도시공간이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어서는 안된다는 시민의 예민한 감각이 폭발한 운동이 아닌가 합니다.재밌는 것은 ‚슈트트가르트 21’ 이 2011.11.27 국민투표에서58.8% (반대 41.2%)의 지지를 받았지만 행정법원의 판결로 사업 일부를 진행할 수 없게 된 상황입니다. 지하수방출과 종보호법(Artenschutzgesetz)에 걸려서 그리 되었습니다. 중앙역 앞 공원의 나무에서 사는 딱정벌레류인 Juchtenkäfer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야기죠. 공사를 진행하려면 나무를 다 베어야 하는데 벌목이 금지된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