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내란음모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은 한국사회 민주주의가 어디쯤 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박근혜 정권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사건만은 아니다. 문재인 정권 들어 진실과 정의로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점이 그 증거다. 연말 사면에서도 이석기는 제외되었고, 국회 인사청문회 때마다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은 '존중'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주장한 '북한식 사회주의 추구'는 어떤 사상이나 실천도 처벌할 수 있는 만능키로 남아있고 국가보안법은 건재하다. 

한발 더 내딛으려면 

경순 감독의 <지록위마>는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줬다. 전후 맥락이나 사건의 개요를 충분히 모르는 사람들에게 다소 어렵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민주주의가 멈춰선 자리가 어디인지는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내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록위마>는 시민사회의 침묵과 자기검열을 문제로 지목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의문스럽다. 과연 사상에 대한 자기검열이 침묵의 이유였을까? 오히려 두 사건이 특정한 조직의 문제로 여겨졌고 그 조직이 그리 내키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 아니었나? 
통합진보당 당권파라 불리던 세력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패권적'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좋은 말로 하면 자신의 입장을 잘 관철시키는 세력이다. 번번히 관철당하는 개인이나 조직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좋지가 않고 토론이 달가울 리가 없다. 말해봤자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 또는 경험칙. 그리고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면 별도의 조직이 있다고 여겨질 수 있다. 이석기가 강연을 했다는 모임은 일요일 밤 10시에 열렸다. 그걸 정당의 공식행사라고 하는 건 별로 이해되지 않는다. 정당행사로서는, 참여가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는, 부적절한 행사다. 그러니 'RO'가 조작이라는 걸 알면서도 유사한 조직이 있을 법하고 알 수 없는 무엇까지 다 옹호하는 게 선뜻 내키지 않는 건 당연하다.  
(잠시 덧붙이자면, 나는 '지하조직'의 존재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누군가 '지하'에서 혁명을 도모하지 않았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다르다? 각자 판단할 문제지만, 누군가 여전히 '지하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결사의 자유가 있고, '지하'이기 때문에 생기는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지하조직을 선택한다면 그것 역시 자유의 영역이다. 지하조직의 존재가 공개 조직의 비민주성을 낳는 등 여러 문제를 일으킬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존재 자체를 없애야 할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RO는 아니지만 그런 '지하조직'이 있었다 쳐도 그것은 처벌되어야 할 이유가 아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폭거라 할 수 있는 사건을 두고 시민사회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반성적 평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남은 '내키지 않음'을 그대로 두고서는 달라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런 분위기가 고착된 데에는 통합진보당 당권파로 불리던 세력의 몫도 있다. 

'말할 수 없는 것' 

이석기가 했다는 강연이나 통합진보당의 주장이 그들 외에는 누구도 말하지 못하는 내용이었나? <지록위마>에서 김미희가 말하듯 이종석도 문정인도 하는 이야기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미국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불가피했던 측면, 지금 한반도 평화체제를 전망할 수 있게 된 데에 북한의 도전이 주효했던 점 등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이것만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변혁을 도모하는 정치적 입장이 있다. 자주와 통일이라는 가치 아래 반미투쟁이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미국의 폭력에 맞서는 것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이런 입장들 역시 말하지 못하는 내용들은 아니다. 더 말하고 토론해야 할 내용들이다. 그런데 서로 말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 이건 자기검열과는 다르다. 
당권파를 향한 '이념적 경직성과 폐쇄적 조직문화'에 대한 비판은 잘 닿지 않는다. 자신들의 사상이나 주장은 발설되는 순간 탄압의 빌미가 될 것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남겨진다("침묵하는 것 자체도 일종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탄압의 존재 자체를 그 '말할 수 없는 것'이 정당한 이유로 삼게 된다.("이런 탄압은 시대적 대격변기에 저들이 우리를 얼마나 두려워하는가의 표현입니다.") 어느 순간 자신들은 "자주의 기치를 든 유일한 정치집단"이 된다. 결국 이들의 신념은 조직 안에서 견고해지는 만큼 조직 밖으로 소통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자리이므로 모두를 초대할 수 없다는 항변. 내란음모 조작 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을 현재진행형의 국가폭력으로 규정하면서 대응을 해나가려면 이 지점에서 변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지록위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김재연의 이야기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김재연은 당시 이석기 강연이 자신에게는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카로스의 감옥>에 실린 이석기 강연 요약문을 보니 어떤 느낌이었을지 알 듯하다. 전쟁위기가 고조될수록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럽고 무력감에 빠지기도 쉬운데 한반도의 격변기라는 정세 인식을 바탕으로 신념이 더욱 중요할 때라는 강연을 들으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던지도 모르겠다. 같은 강연을 들었다면 나는? 내게는 이석기가 아무런 선동도 하지 않아(내란선동죄 유죄라니 웬말이냐) 결론이 좀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김재연의 이야기는 매우 소중하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자리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21대 총선에 나온다는데 당선돼서 국회의원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면 좋겠다.) 

반대하는 사람을 얻어야 

동시에 <지록위마>에서 감독과 홍세화가 주고받는 대화도 소중하다. 홍세화는 두 사건의 문제와 별개로 이석기의 강연 내용이 적절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감독은 그런 평가 역시 일종의 자기검열 탓은 아닌지 되묻고 홍세화는 더 생각해보겠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말한다. <지록위마>에서 이태호가 이석기 강연 내용이 당시 정세에 대한 인식과 운동의 요구로서 적절치 않았다고 비판한 것도 마찬가지다. 김재연처럼 누군가는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토론하기 위한 공론의 장을 열어야 하고 홍세화처럼 누군가는 그것에 대해 토론해주어야-당권파의 입장에서는 반대하는 사람을 얻어야- 한다. 어떤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얘기하는 사람이 있을 때 공론의 장이 성립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침묵의 또다른 이유는 자기검열이라기보다 북-미 관계나 한반도 평화 등에 대해 '할 말 있는 세력'이 별로 없다는 점에도 있다.  
사건 당시 진중권은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사상이나 주장이 토론할 가치도 없는 것처럼 조롱했다. 국가폭력은 공안기구의 힘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무언가를 공론장에서 배제하고 누군가의 시민권을 격하시키는 데 동조하는 만큼 국가폭력은 '성공'한다. '나는 통합진보당이 아니지만' 또는 '나는 그들과 생각이 다르지만' 같은 말로 안전한 공간을 확보한 후 말하는 방식이 위험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탄압으로부터 함께 지켜내겠다는 말도, 비슷한 이유로 무력하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함께 싸울 수 있다. 나와 생각이 어떻게 같거나 다른지 알아야, 동의하든, 반대하든, 함께 싸울 수 있다. <이카로스의 감옥>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지록위마>도 함께 보고. 
(하지만 나는 책과 영화의 제목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갔기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는 논리는 폐쇄적인 회로를 반복한다. 이들이 대한민국의 체제에서 가장 첨예한 전선에 놓여있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이들의 운동이 가장 반체제적이라거나 변혁적인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지록위마 역시, '누가 누구에게'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했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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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5 16:33 2020/01/05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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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겨울 2020/01/08 17:1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사상이나 주장이 토론할 가치도 없는 것처럼 조롱했다"

    참 좋은 글입니다. 나는 왜 이런 글을 쓰지 못했을까?

    추천 한 개 놓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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