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의 1패

남자와의 첫 ‘섹스’에서 나의 동의는 없었다. 동의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계획에 없었음은 물론이고 예상에도 없었다. 옷이 벗겨질 즈음 뭔가 시작되고 있다고 느꼈고 삽입됐던 것이 빠져나갔을 때서야 그게 ‘섹스’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 알게 된 것이 많다. 이를테면 피임기구 사용법을 아는 것과 피임을 하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 같은 것들. 
오래동안 곱씹어도 이때의 경험은 해석이 어렵다. 내가 기대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뭔가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언제든 내가 멈출 수 있는 상황이라고 여겼지만 순전히 착각일 수도 있다. 만약 내가 동의하지 않았거나 중단시켰다면 그는 같이 멈췄을까, 설마 ‘폭행이나 협박’을 동원했을까, 혹시 나는 그게 두려워 아무말 못했을까. 
분명한 건, 내가 동의할 줄 알았더라면 훨씬 즐겁고 소중한 경험으로 기억됐을 것이라는 점이다. 유효하고 적절한 성교육을 충분히 받았더라면, 실제 상황에서 내가 어떤 느낌에 주목하고 어떤 생각을 펼치고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지 얼마간 예견할 수 있었다면, 나는 ‘당하지’ 않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더 걱정스러운 건 그 남자의 무능력이다. 처음이기는커녕 상당한 경험이 있던 그는 왜 자신의 성기를 삽입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줄 몰랐나. 
성에 관해 대부분의 남자들은 성기 삽입의 강도나 빈도 따위를 능력으로 착각한다. 자신이 ‘잘한다’고 자부할 때나 ‘못한다’고 시무룩할 때나 평가 기준은 거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한다’는 것 자체가 왜곡된다. 남자들은 그들이 남자라는 사실만으로 언제든 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여성은 당연히 ‘대상’이라고 여긴다. ‘섹스’란 서로 주체이자 대상이 되기로 합의한 상태에서 가능한 행위라는 걸 모른다. 
법과 사회가 성폭력을 다루는 방식이 수많은 남자들의 무능을 독려한다. “성행위 여부와 그 상대방을 결정할 권리”로 해석되는 ‘성적 자기결정권’은 여성의 권리를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논리가 된다. 법은 여성이 동의하지 않았거나 동의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성행위를 성폭력이라고 한다. 남성이 동의를 구하지 못한 것을 폭력이라고 짚지 않는다. 그래서 여성은 죽기 직전까지 폭행에 항거하거나,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협박이나 위력을 증명하거나, 항거할 능력이나 동의할 능력이 애초에 없었음을 확인시킬 때서야 폭력을 주장할 수 있었다. 동의 능력을 여성의 몫으로 떠넘길 때 생기는 문제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재발 방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와중에 형법의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 기준도 13세에서 16세로 강화되었다. 오래동안 애써온 여성들의 힘이라는 점에서 승리이고, 청소년 성폭력 피해자가 대항할 수 있는 수단 하나가 더 생겼다는 점에서도 승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항거 불능’의 장애인이나 ‘동의 불능’의 청소년을 더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여성에게 권리보다 책임을 떠넘기는 맥락에 있다는 점을 지울 수는 없다. 그래서 승리에 숨어 있는 의문의 1패이기도 하다. 이대로 두면, 승리 자체가 무효화될 수도 있는 1패. 
사람은 누구나 ‘성적’ 측면-무성애자일 때에도-을 가진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성적 고유함을 발견하고 성적 역량을 키우고 성적 행위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성적 측면을 포함한 온전한 존재로서 존엄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성적 권리’란 이 과정에 대한 권리일 것이다. 특히나 성적 역량은 사회경제적 조건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장애인이나 비청소년이면 이미 갖추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배우고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역량이 있을 때에만 갖출 수 있는 것이다. 
이번 법 개정에 관해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장애여성공감, 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에서 낸 입장에는 의제강간 연령 상향에 숨겨진 패배가 무엇인지 설명되고 있다. 많이들 읽어주시면 좋겠다. 이제 시작이다. 의문의 1패가 명백한 패배가 될지, 지금껏 이룬 승리가 승리가 되게 할지, 여기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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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1 22:48 2020/05/11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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