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함도 편파적이라면

수어를 배우게 됐다. 오래전 다짐인 듯 바람인 듯 세워둔 안식년 계획이었다. 강좌를 듣기 전에 몇 권의 책을 읽으며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했다. ‘농’이나 ‘맹’이라는 말에 낮추는 느낌이 있어 ‘청각장애인’이 더 ‘바른’ 말인 줄 알았는데 둘은 ‘다른’ 말이었다. 듣지 못한다는 점이 부각되는 ‘청각장애인’과 달리, ‘농인’은 수어를 비롯해 농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자긍심의 언어였다. 알 것 같았다. 
첫 시간부터 당황했다. 선생님이 농인이었다. 청인(농인과 반대되는 뜻의, 소리를 듣는 사람)일 거라고 예상한 적도 없지만 농인일 거라고 예상해보지도 못한, 마음의 준비랄 게 무색해져버린 순간이었다. 이미 선생님은 손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나는 더 잘 배울 수 있을 거라며 스스로를 격려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은 정말 잘 가르쳐주셨다. 개강일보다 앞서 있던 보강수업 공지가 제대로 되지 않아 세 명밖에 안 왔더라, 그래서 1강 수업을 다시 하겠다, 는 말을 내가 듣고 있었다. 울다, 웃다, 있다, 없다, 알다, 모르다….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배웠다.  
손으로 말하고 눈으로 듣는 시간은 너무 생소했다. 신기하게도 쉬는 시간에조차 소리 내기가 머뭇거려졌다. 말소리에 이물감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규칙이 전혀 다른 세계를 여행하는 것처럼 에너지는 금세 바닥이 났다. 영어나 중국어 같은 외국어를 배우는 느낌을 예상했는데 조금 달랐다. 이를테면, 듣는다는 것. 나는 분명 선생님의 손을 보며 배우는데, 그건 그림이나 영상을 보는 것과 달라서 ‘보다’로 퉁칠 수가 없었다. 수업을 듣는다 하기도 어색했다. ‘듣다’라는 수어는, 검지손가락을 구부정하게 펴서 귀를 가리키며 흔드는 모양인데 선생님의 말이 귀로 들어오는 건 아니었다. 조금 다르게, ‘배우다’라는 수어는 검지손가락으로 코끝을 두드리는데, 내 코와 수업은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 말을 하면 정말 어떤 지식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내가 배우는 것이 하나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세계이기도 하다는, 그래서 더욱 알 수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계속 배우고 싶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느날 신문에서, 목소리를 찾아주는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기사를 봤다. “청각장애인과 가족들에게 목소리는 ‘한’”이라면서 전하는 이야기가 못내 불편했다. 하지만 기술을 통해 가족에게 “내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어 기쁘고 감사해요.”라고 청각장애인이 말할 때 그의 기쁨을 부인할 수도 없었다. 복잡한 마음이 잊혀갈 때쯤 동료 활동가의 페이스북에서 차별 진정이 있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케이티(KT)가 진행하는 목소리 찾아주기 사업이 차별을 조장할 수 있다고 짚어주는 이들이 있어 다행스러우면서도 다시 마음이 복잡해졌다. 목소리를 가지고 싶은 마음과 돕고 싶은 마음에 ‘차별’이라는 지적은 너무 차갑기 때문이다. 
수업에서, 농인인 부모와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농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 그리고 운명처럼 농인이 된 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왠지 뭉클하면서도 차마 축하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목소리를 가지게 된 사람의 이야기는 ‘따뜻한 기술’의 성과로 들리겠지만, 듣지 못하게 된 것을 ‘따뜻한 기적’으로 느끼기는 쉽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케이티의 ‘마음을 담다’ 캠페인에 담길 수 있는 따뜻함은 이미 편파적이다. 나도 이 세계를 만나지 못했다면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도우려는 마음’이 차별을 존속시키는 이유가 되기란 너무 쉽다. 어쩌면 사람들의 선의 때문에 차별은 더욱 견고해진다. 악의적인 차별은 더욱 쉽게 분별되고 더욱 강하게 단죄되기 때문이다. 네가 힘들 것 같아서, 네 마음이 다칠까봐, 와 같은 걱정은 진심어릴 때도 많다. 하지만 우리는 진심을 이해하는 데서 멈출 수가 없다. 조금 차갑더라도, 선의에 숨은 차별을 이해해야 우리가 함께 따뜻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농인’을 뜻하는 수어는 손바닥으로 귀를 막았다가 입을 막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농인들 사이에서, 우리가 왜 말을 못하나, 우리는 손으로 말한다, 는 의견이 일면서 귀에만 대는 모양이 혼용되고 있다고 한다. 손으로 말하는 농인들과 함께 따뜻해지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이 그 ‘따뜻한 기술’일 것 같지는 않다. 
(이참에 소개하자면, 국립국어원에서 만든 한국수어사전이 있다. 인터넷으로 한번들 들러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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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1 14:04 2020/06/01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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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성 2020/06/03 12:5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쉬시는 동안에도 부지런히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가시는군요.

    덕분에 제목을 이해했습니다.

    • 미류 2020/06/07 11:52 고유주소 고치기

      아직 많이 낯설지만, 많은 배움을 주는 언어인 것 같아요, 수어는. 또 나눌 기회가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