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혜와 권리 사이

대학 와서 만난 한 친구. 지금은 가끔 안부 물으며 지내는 정도지만 대학 초년 시절에는 많이 믿고 의지했던 친구였다. 그 친구, 말할 때 일정한 간격으로 손목을 터는 습관이 있었다. 같이 얘기를 할 때마다 그 동작이 어색해 눈을 어떻게 둬야 할 지 몰랐다.

그때는 그게 어떤 '질병'인 줄 알았다. 어렸을 때 다쳤다거나 선천적인 문제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손이 자꾸 움직이는, 원하지 않지만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힘에 의해 고통받는, 그런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볼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2년 정도 지나서 그게 습관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동작의 어색함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안쓰러운 마음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 변화가 참 신기하다. 질병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사실만으로 다르게 보이다니. 돌아보면 나의 안쓰러운 마음에는, 그 친구가 극복하기 힘든 어떤 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깔려있었고 그것은 나에게 묘한 우위감을 주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매번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모르는 난감한 상황에 혼자 애를 끓었던 것 같다.

 

어제는 서울역에 나갔다. 주거권에 관한 기사를 준비하면서 노숙인들을 인터뷰하기로 했고 몇몇 아는 단체를 통해 인터뷰할 만한 사람을 소개받을까 하다가 일단 가서 만나보기로 했다. 5명이 해가 다 떨어진 시간에 서울역 광장에서 우물쭈물하다가 몇몇 노숙인들에게 '붙들려'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거의 술을 드신 분들이었다. 그 중 몇몇 분은 이야기를 조근조근 잘해주시기도 했지만 몇 분은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기도 했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은 아니었다.

그 중 한 분은 옷을 잡아끌면서 자기랑 같이 가자고 하다가 빨리 집에 가라고 밀치기도 하고 약간 위협적인 몸짓을 보이기도 했다. 옆에서 인터뷰하는 다른 사람을 두고 갈 수가 없어서 적당히 실갱이를 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 사람이 노숙인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럴 수 있었을까. 적당히 눙치기도 하고 손 놓으시라고 말로 할 여유가 있었을까. 물론, 어제의 여유가 가장된 여유였던 것은 분명하다. 실갱이를 하면서도 나는 도망쳐야 하는 방향을 가늠하고 있었고 내내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르다. 비슷한 체격의, 비슷한 인상의, 비슷한 정도로 술을 마신 비노숙 남성이었다면 잽싸게 도망쳤을 것이다. 당연하다. 나는 도망치는 것 말고는 그의 권력으로부터 나를 보호할 방법이 없을 테니까.

 

권력이 일면적으로 작동하는 것만은 아니기에 그 노숙인과 나를 비교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 내가 그 노숙인보다 훨씬 많은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친구에게 느꼈던 안쓰러움과는 다르지만 그 노숙인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가능했던 것은 그와 나의 관계에서 나를 우위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혜와 동정을 넘어, 라는 말이 인상깊게 박힌 것은 장애인이동권투쟁이다. 왜 그랬는지는 차치하고 어쨌든 두고두고 그 고민을 하고 있다. 하지만 권리와 필요에 근거한 사회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시혜와 동정을 넘는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는 막연하다.

노숙인의 권리를 듣기 위해 서울역으로 갔던 순간에도 나는 시혜의식과 맞닿아있는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나 스스로를 노숙인으로 정체화(?)하기 전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벽 너머에서라도 그/녀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나는 어디에서,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할까. 언제, 어떻게 싸워야 할까.

 

나는 여전히 시혜와 권리 사이에서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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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03 16:40 2005/05/03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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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강 2005/05/03 17:2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도 늘 헤매요...ㅜㅜ 어쩔 수 없는 중산층의 젊은 남성이라는 이 자리에서...ㅜㅜ

  2. JWalker 2005/05/03 18:0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도, 늘. 머리보다 더 빨리 반응하는 습관 덕에, 언제나 뜨악하곤 해요.

    홈페이지 주소가 바뀌었어요. 그냥요.

  3. 지호 2005/05/03 18:3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노숙인과 일반 남성 그리고 미류님과의 권력이라...저로서는 언뜻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에요. 노숙인보다 권력이 많아서 그에게 농을치고(사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모르는 표현이네요), 손을 놓으시라고 할 여유가 있었던 건 아니지 않을까요? 처한 상황 자체가 다른 것 같아요. 적어도 제가 보기엔 비노숙인과 노숙인의 문제가 아니라 미류님이 속한 상황이 다를거란 거죠. 흐흠...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요.

  4. 지호 2005/05/03 18:3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암튼, 미류님 언제 어디서나 강한 모습 보여주세요!

  5. 자일리톨 2005/05/03 22:3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전 속마음은 시혜이나, 입으로는 권리를 외치는 관념주의자인가봐요. 그래서 왠지 "시혜와 권리 사이에서 헤맨다"는 표현이 더 가슴에 와 닿았는지도...

  6. 미류 2005/05/03 23:1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김강, 같이 길을 찾아봐요. ^^

    JWAlker, 친절하게 알려주다니 고마우이. ㅎㅎ (근데 자주 바뀌기는 한다. ^^;)

    지호, 권력이라는 말이 부적절한 단어일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처한 상황도 달랐죠. 나는 어떻게든 인터뷰를 성사시키는 것이 중요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그/들을 낮춰보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ㅡ.ㅡ; 암튼, 지호님의 응원으로 힘내겠습니다. ^^;
    (눙친다(농이 아니라)는 말은 좋게 말로 은근슬쩍 상황을 무마한다는, 정면대결을 피한다는, 뭐 그런 뜻의 말입니다.)

  7. 미류 2005/05/03 23:1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자일, 전 마음깊이 동정하지도 못하고 ㅇ머리만 굴리는 것 같아요. -_-;

  8. 지호 2005/05/04 09:3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에고고...너무 어려운 말들인 것 같아요. 시혜, 권리, 관념주의자

  9. rivermi 2005/05/04 21:2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타자와의 차이가 익숙하게 와닿지 않아서는 아닐까요? 차이도 첨에는 여러가지 감정으로 와닿아 차별인지 차이인지 헷갈리는 거. 장애인이나 외국인 노동자를 대할때도 다양한 감정들로 혼란스럽지만 그들과의 관계가 익숙해지면 곧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게 되는거.
    노숙자문제도 정부가 정책으로 빨리 접근했으면..사실 그들의 존재가 굉장한 공포감으로 와닿는게 노숙자라는 이유로 그런 대접을 받아야할 이유는 없을터이니..어려워요.

  10. 알엠 2005/05/05 21:2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도 예전에 광화문에서 정신지체인으로 사료되는 한 분이 한별이 업는 걸 도와주고 제기 이런 저런 말을 할 때 차별과 편견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미류의 글을 읽다보니 그때 생각이 나네요. 미류한테 메일을 썼는데 돌아오네요. 블로그 주소가 메일주소랑 다른가봐요? 메일 주소 좀 알려주세요. 제 주소는 rmlist@jinbo.net입니다. 난 블로그 주소랑 이메일 주소가 같아요. ^^

  11. kanjang_gongjang 2005/05/05 23:2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전 배움의 연속이라 생각합니다.
    내 시선은 한정되어 있고 그 길이가 짧기에....누구에게 배우건 그 행함이 연속이기를 바램해 봅니다.
    전 사회적 소수자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듣지만 그 실천이 지난하기만 하네요. 내가 그 당사자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그 깊이를 느끼기엔 부족하다고만 생각하게 되네요.
    글 잘 읽고 갑니다.

  12. 미류 2005/05/06 18:3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갱,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차이가 아름다울 수 있는 관계를 만든다는 건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알엠, 메일 보낼께요. ^^

    간장 오타맨, 끊임없이 배우는 마음으로 돌아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