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적, 한미 FTA

- 인간다운 삶과 자본의 대격돌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아니, 갑론을박은 하나의 주제를 두고 설전이 벌어질 때나 어울리는 표현이다. FTA에 대한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철지난 녹음기마냥 같은 소리만 늘어놓는 한국정부의 모습은 민망할 지경이다. 특히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요구하지는 않음을 확인’하는 정도로 사회공공성 해체에 대한 우려를 무마하려는 모습은, 한국정부가 한-미 FTA를 계기로 터져나오고 있는 민중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과 ‘하나의 시장’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이 한-미 FTA의 목표다. 시장은 자본의 이윤 동기가 작동하는 공간. ‘하나의 시장’은 결국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수적인 권리들을 보장하기 위해 이윤동기를 억제해온 공공성의 영역을 침범하기 마련이다.

수많은 FTA들이 집중공략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의약품. 한-미 FTA 역시 예외없이 지적재산권 조항을 강화하고 있다. 의약품특허기간을 연장하고 의약품 관련 자료를 독점하며 복제의약품의 생산을 막는 것, 즉 시장에서 약이 비싸게 팔릴 수 있는 조건을 보장받는 것이 FTA가 노리는 바다. ‘약이 없어 죽을 수는 있어도 돈이 없어 죽을 수는 없다’던 환자들의 절규에 ‘돈이 없으면 차라리 죽으라’는 저주를 내리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의약품을 더욱더 시장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노력은 공공의료제도를 직접 공격하기도 한다. 호주의 공공의료제도인 ‘의약품급여제도’는 의약품을 싸고 안전하게 공급하기 위한 제도였다. 그런데 미국과 호주가 FTA를 체결한 이후 이 제도는 근본적으로 위협받게 된다. 한국 정부의 협정문 초안에도 있는 ‘투명성’이라는 문구가 이 제도를 흔드는 무기가 되었다. 협정에 관련된 국내 제도와 절차의 투명성을 보장하고 협정과 관련한 행정조치 등에 대해 행정적, 사법적 검토와 재심의 기회를 부여하자는 것이 ‘투명성’이 요구하는 바이다. 이는 의약품의 판매를 허가하고 약값을 산정하는 절차에 제약자본이 공식적으로 개입할 여지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미국 기업들이 이런 불편한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협정문 초안의 8장 ‘투자’에서 보장하고 있는 투자자-국가 소송제도는 이미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에서도 악명을 떨치고 있다. 투자자인 기업이 투자유치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 수 있는 투자자-국가 소송제도가 보장된 NAFTA는 멕시코와 캐나다 정부의 환경정책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권리들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공공정책을 자본의 이해에 맞춰 해체하는 것이 바로 FTA가 불러올 사회공공성 해체의 실상이다. 그러나 인권이 협상의 대상일 수 있는가.


권리는 내어주고 의무는 팽개치고

 

자본이 공공정책에 개입해서 더욱 많은 것들을 시장으로 가져가는 동안, 이 과정에 민중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더 좁혀져 간다. 이미 FTA 협상 개시에서부터 민주주의는 훼손되어왔다. 민중의 권리가 도마에 올라있는데도 FTA와 관련된 절차에 민중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어떤 집단과 어떤 규칙의 교역을 할 것인가에 대해 민중이 발의할 수 있는 구조는 언감생심이라고 치자. 그러나 정부의 보고서 하나 제대로 검토하지 못하는 입법부의 ‘능력’은 어떻게 봐야 하나. FTA를 체결해온 수많은 국가들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잽싸게 협상을 추진한다고 경축해야 하나.

이에 뒤질세라 사법부 역시 이미 신통한 능력을 보여준 바 있다. 작년 9월, 전북 학교급식 조례안이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위반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그것이다. 부실한 학교급식이 여론의 뭇매를 수차례 맞은데다 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놓인 농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여론을 울리던 당시, 대법원이 내놓은 판결은 분명 용감한 것이었다. 더구나 국제기구나 초국적자본의 명시적 압력이 존재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말이다.

‘국회 비준을 거쳐 공포.시행된 조약은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는 헌법 6조1항을 즐겨 내뱉는 사법부가 무역협정은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면서 유독 사회권규약 등 국제인권조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과연 무지의 소치일까. 대법원의 판결로 ‘식량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중요한 자원이 제3자의 힘이나 경제적 지배에 의해 박탈되지 않도록 입법을 포함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 보호할 의무’는 내동댕이쳐졌다. 바닥에서 산산이 부서진 것은 농민들의 생존권과 어린이들의 식량권, 건강권이었다.


불평등은 정부의 힘?

 

정부 역시 민중의 권리를 내어주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교육인적자원부는 FTA에서 초․중등 교육은 개방하지 않는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제주특별자치도와 경제자유구역에서 영리목적의 각급 외국교육기관이 설립될 수 있도록 준비해놓았다. 외국의 유수 대학을 유치할 때는 토지 무상 임대뿐만 아니라 연구비, 장학금 등의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경쟁을 통해 교육의 질을 높이겠다는, 그래서 해외로 빠져나가는 교육비용을 붙잡아두겠다는 알량한 고뇌를 기특하게 볼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공교육의 붕괴로 인해 계층별 교육 격차가 구조화되고 교육불평등이 빈곤을 악순환하는 원인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교육권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한 해 수천만원의 등록금을 내야 하는 외국대학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불평등이라면 미국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왔는데, 이 기회에 확실히 1위 자리로 올라서겠다는 것인가.

인권에 대한 정부의 몰이해는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산업자원부는 ‘제조업 등 무역조정 지원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농축산업, 어업뿐만 아니라 제조업 분야의 피해에 대해서도 지원을 하도록 했다. 자유무역협정 체결로 누군가 피해를 볼 수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솔직하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피해의 규모를 터무니없이 작게 예측하고 있는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이런 법률 쪼가리가 각종 인권후퇴에 대한 보완책이 될 수 있는지를 엄중히 물어야 한다.

지난해 7월 단전으로 인한 인권침해가 문제되면서 산업자원부가 들고 나온 소전류 제한기만 봐도 인권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은 확연히 드러난다. 사용료를 내지 못하는 가구는 110W로 사용할 수 있는 전류가 제한되도록 한 것. 냉장고를 켜놓으려면 TV는 볼 수 없고 형광등은 두 개까지 켤 수 있는 전력인 110W는 인간다운 삶, 바로 인권의 존재이유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런 정부가 FTA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지원책을 마련해 놓았다고 너스레를 떤다.

하지만 실상을 보자. 제조업의 피해는 고스란히 제조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 감수해야 할 몫으로 떨어진다. ‘외부의 충격을 통한 내부 개혁’이라는 한-미 FTA의 목표는 비정규직 노동의 확대, 노동권의 후퇴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전기를 끊어놓고 제한된 전류로 삶을 묶어놓는 소전류제한기와 노동권을 박탈한 후 지원을 통해 피해를 보완하겠다는 시도는 어딘가 닮지 않았는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를 보장하는 것이 인권이고 억눌리지 않고 자유로운 노동을 만들어가는 것이 인권이다. 줄 수 있는 만큼 받는 것은 인권이 아니라 노예계약일 뿐이다.


공공성의 해체는 인권의 부정

 

세계인권선언에도 규정되어 있듯, 인권의 보편성은 ‘모든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의 보장을 요구한다. 과연 FTA는 모든 권리와 자유의 실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필연적으로 민중의 권리를 배제해가는 과정인 FTA는 단지 인권을 후퇴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회공공성의 해체를 통한 인권의 부정, 그것이 FTA의 정확한 실체다.

지난해 11월 나온 미국 헤리티지재단의 보고서는 “자유무역협상들은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익보다 전세계의 무역장벽을 낮추는 대안적인 방법으로서 그 가치가 있다”고 말하면서 자유무역이 경제성장률을 높인다는 믿음을 설파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달 발표된 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는 경제성장의 몫이 결코 빈곤층에게는 돌아가지 않는 현실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한-미 FTA에서 어느 나라가 더 이익을 볼 것이냐를 셈하는 것은 도박판의 양편에 누가 앉아있는지를 보지 못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전세계의 무역장벽을 낮추는 자유무역에서 나오는 열매들은 공공성의 영역에서 시장으로 넘어가 자본의 손아귀에 사뿐히 내려앉을 것이다. 이 화살표가 빈곤과 불평등이 심화되는 방향과 정확히 동일한 지점을 향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FTA 저지를 넘어 공공성 확보에 나서야

 

인권의 실현을 위해 우리는 더욱 많은 것을 공공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싸움들을 열어젖혀야 한다. 자본에게만 열린 영역들을 민중에게 열리도록 돌려놓아야 한다. 자본이 공중파방송에 프로그램 편성비율을 늘려달라고 하면 방송노동자와 시청자들은 프로그램의 편성에 개입할 수 있는 경로를 요구해야 한다. '구두, 서면 또는 인쇄, 예술의 형태 또는 스스로 선택하는 기타의 방법을 통하여 국경에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접수하며 전달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는 표현의 기회를 넓히고 표현에 필요한 물적 조건을 공공이 보장하는 질서를 요구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위기에 놓인 우리들의 삶이 인간다워질 수 있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인권이다. 그것이 실현되는 질서는 과연 시장에 있는가, 공공성의 영역에 있는가. 모든 곳에서 인간다운 삶과 자본이 격돌하고 있다. FTA 협상의 진행에 주목하고 발언하고 행동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인권을 침해하는 국가권력과 자본에 맞선 투쟁의 역사가 인권의 역사다. 우리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질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 [벼리 ②] 악몽의 세계화, 인권과 평화 동시 공격하다

 

[인권오름 제 5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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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4 19:03 2006/05/24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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