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용산을 만나다, 그리고 우리

어제 <캄보디아, 용산을 말하다>에서 이야기하려고 정리해본 것. 현장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 다르게 말하기는 했지만, 계속 채워나가야 할 이야기. 

* 진상규명은 단순히 화재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 연루되었던 힘들을 찾아내는 것. 

* '소유권'은 단지 무언가를 법적으로 소유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평택, 강정, 두물머리 등 소유권자이면서도 '소유권'에 밀린 사람들을 기억해야. 

* 시 달팽이집. "사고팔지 않아도 좋겠다" 집이나 땅을 누군가 사고팔기 위해 소유한다는 것이 중요. 그것은 단순히 욕망을 좇는 투기가 아니라 이 체제의 작동 방식. 그것을 볼 때 우리는 "보상을 받았는데 왜 싸우냐"는 질문-캄보디아의 소피도 들어야 했던 질문-을 바꿀 수 있다. 보상이 부족하다는 항변은, 결국 보상의 적절한 기준을 정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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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무실 이야기
 
내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은 아마도 여기, 인권운동사랑방 사무실일 것이다. 이사온 지 15개월 정도 됐다. 대문까지 닿기 전 약 10미터 정도의 급경사가 난관이지만 조금만 더 오르면 산책할 수 있는 공원 숲길이 나온다는 점이 숨을 틔워준다. 마당도 있다. 전에 살던 사람이 두고 간 긴 나무 벤치가 은행나무 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즐길 수 있는 자리에 있다. 얼마 전에는 다른 사무실에서 얻어온 빨간 파라솔이 마당 한편에 세워졌다. 붉게 물든 햇빛그늘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는 맛이란! 집 뒤쪽으로는 길고양이들이 먹을 사료를 담아두는 그릇이 있다.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찢어놓기도 하던 길고양이들이 예전보다 덜 눈치를 보며 제 집처럼 다닌다. 단독주택인데 주방이 넓어 좋고 늦게까지 회의를 하다가 가볍게 뒤풀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좋다. 물론 좋은 점만 있을 리는 없다. 불편하거나 아쉬운 점을 말할라면 훨씬 많이 들 수 있다. 그래도 그 중 한 가지만 뽑으라면, 임대차계약을 다시 할 수 있을지 불안하다는 것.
그렇다. 결정적이다. 그런데 이 결정적인 것은 참 사소하기도 하다. 마당의 깨진 타일을 어떻게 붙여볼까 고민하다가, '이거 원래 깨져있던 건데경경 주인이 물어내라고 하면 어떻게 증명하지?'라고 스스로에게 묻게 될 때, 밤에 수다를 떨며 웃고 즐기다가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질 때 이웃들에게 미안해지면서 곧이어 '혹시 집주인한테 우리가 시끄럽다고 내보내라고 하면 어떡하지?'라고 물으며 불안해질 때, 벽마다 빼곡히 채워진 자료들을 뒤지며 필요한 자료를 찾다가 '이사갈 때 이걸 다시 어떻게 싸지?'라며 한숨을 쉴 때, 이런 보잘 것 없는 순간들마다 나는 이 공간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손님인 것처럼 이 공간을 드나드는 것은 아니다. 방금 나는 부엌 바닥에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는 묵은때를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닦았고, 마당 은행나무 옆에는 작년 이맘때쯤 심어놓은 여러해살이 알뿌리 식물에서 고운 보라색 꽃이 자라나 있다. 사무실은 내가 무언가를 하는 곳이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곳이기도 하다. 그건 내 삶이고 사무실은 내 삶의 장소다. 그런데도 나는 그 곳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진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강제퇴거가 여기에서 시작된다는 것. 
 
#2. 캄보디아와 한국의 풍경
 
강제퇴거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가 떠올리는 풍경들이 있다. 개발 사업에 저항하는 철거민들이 겪어야 했던 모진 수난들, 눈 앞에서 무너져내리는 지붕, 챙겨나올 새 없이 집과 함께 부서져버리는 삶의 역사, 장기 입원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온갖 부상, 울부짖는 사람들, 순식간에 폐허가 되는 삶의 자리... 그런 상황까지 가는 걸 막아보겠다고 망루를 지어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 그러다가 땅으로 다시 내려올 수 없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구조에 저항하는 것은 한치도 용납하지 않겠다며 무력을 사용하는 경찰과, 깨끗하게 사람의 흔적이 지워진 땅에 여유롭게 건물을 지어올리는 건설자본들...
캄보디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강제퇴거의 풍경이다. 4천 가구 이상이 쫓겨났고 보상은 아주 적거나 없었다. 그에 맞서는 사람들을 향해 군이 총을 겨누기도 했다. 법원은 손을 놓고 있고 정부는 마지못해 조금씩 양보한다. 80년대 판자촌을 쓸어낼 때의 풍경과, 아마도 매우 흡사할 것이라 짐작된다. 한국의 개발 사업 풍경은 꽤 달라지기는 했다. 2000년대 들어 시작된 뉴타운 개발은, 그야말로 '멀쩡한' 주거지가 개발 사업 구역으로 지정되고 용역폭력의 양상도 조금은 달라졌다. 임대아파트와 주거이전비라는 보상도 정착되었다. 집보다는 상가가 더 문제로 부각되기도 했다. 심지어 최근에는 개발이 멈춘 듯 보인다. 드림허브가 되려고 했던 용산 국제업무지구 개발은 부도의 허브가 됐다. 용산참사가 있었던 용산 4구역도 빈 땅만 휑하다. 서초구의 헌인 가구단지, 부천 중동, 김포 신곡 등 개발이 멈춘 곳은 많다. 눈 앞에서 누군가 쫓겨나지 않아서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무도 보지 못하는 개발이 멈춘 곳에서는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다. 
최근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다. 막무가내로 개발이 추진되던 때와 비교하면 다행스러운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상황이 답답하고 애달픈 사람들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철거민들이 그렇다. 개발을 멈추라고 그토록 싸워온 이들이 막상 개발이 멈춘 상황에서 더욱 고통스럽다. 개발 붐이 불어 여기저기 곳곳에 개발 구역이 지정되고 개발 사업이 승인되기 전부터 개발 이익을 기대한 토지와 건물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바뀐 건물 주인들은 기존의 세입자들을 내보냈다. 기댈 곳 없는 세입자들은 속절없이 집을 떠났고 가게를 비웠다. 그 사이에 개발 사업이 승인된 곳이든 승인조차 못 받고 땅 장사만 한바탕 휩쓸고 간 곳이든, 황량하기는 마찬가지다. 다행히도 운이 좋아 남은 세입자들, 못 나간다고 기를 쓰고 버텨 남은 세입자들은, 이제 폐허가 된 동네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장사를 하던 이들은 생계가 끊어지고 집에서 살던 이들은 역사가 끊어졌다. 더이상 사람이 살 수 있는 동네가 아닌 곳에서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 고통은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 문제는 쫓겨남 이상이다. 
조합이나 건설사나 지자체나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발을 빼고 있다. 오히려 자신들도 빚더미에 올라 힘들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개발 사업을 밀어붙인 것은 그들이다. 돈만 있으면 땅을 살 수 있고 그 땅에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고, 지자체는 가난한 사람들보다 돈 있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주거지나 상권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원래 살던 사람들, 그 땅에서 삶을 일구어내던 사람들은 아무런 개입을 할 수 없다. 오로지 땅을 소유한 자들의 결정에 내맡겨져 있다. 그러니 비어 있는 땅을 보는 철거민들의 마음은 참담하다. 저 땅은 소유권자들에게 돈이거나 빚이겠지만, 자신들에게는 삶이었기 때문에. 
 
#3. 풍경 너머에서 다시, 강제퇴거
 
집에 대한 권리, 땅에 대한 권리, 가게에 대한 권리는 돈에 대한 권리가 아니라 삶에 대한 권리다. 돈이 삶을 앞설 수는 없으며 돈이 있어 소유했다는 이유로 타인의 삶까지 소유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강서구 방화동에 카페 '그'가 있다. 2010년 8월에 영업을 시작했다. 정성을 다해 인테리어를 하고 가게를 가꿔서 썰렁하던 골목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2011년 5월, 1년도 채 안 된 시점에 건물주가 나가라고 한다. 건물을 헐고 재건축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구청에서 승인도 받았다고 했다. 카페 '그'는 구청에 진정서를 냈는데 '민사이므로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그동안 건물주는 카페 '그'에 명도소송을 건다. 명도소송은 소유권자가 법원으로부터 강제 퇴거의 권한을 구하는 소송이다. 각종 개발 사업에서 건물주가 세입자들을 대상으로 청구하는 소송이기도 하다. 법원은 건물의 소유권이 소유권자에게 있다는 동어반복을 하며 세입자를 내쫓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다. 이때 세입자가 버티지 못하도록 개입하는 것이 용역업체의 일이기도 하다.
소유한 자는 자유롭다. 집을 지을지 주차장을 만들지 정할 수 있고, 사람을 들여올지 내쫓을지도 정할 수 있다. 이게 당연한 것일까? 무엇을 소유한다는 것이 이렇게나 막강한 권한으로 번져 나가는 데에도, 많은 사람들은 '소유했으니까'라며 인정해버리고 만다. 카페 '그'는 싸움을 시작했다. 상가임대차보호법에 대해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단지 건물을 소유했다는 이유로 건물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의 삶까지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상식을 법으로부터 확인 받기 위해서다. 나가라 말라 할 수 있는 권한을 너무 쉽게 인정해버렸던 한국사회에서, 나가라 말라는 말이 함부로 입 밖에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걸 주장하기 위해서다. 
용산참사는 어떻게 기억되어야 할까. 그들을 가난하고 불쌍한, 개발 때문에 손해를 엄청나게 본 사람들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사실보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상식을 믿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상식을 부정하는 구조에 맞선 사람들이다. 카페 '그'가 그렇듯 이것은 단지 쫓겨나지 않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땅을 가꾸고 동네를 만들고 삶을 이어가는 것은 결국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진실을 구성하기 위한 싸움이다. 우리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누구나 저마다의 장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사람으로부터 장소를 빼앗는 것이 사람다운 삶을 방해하는 매우 큰 위협이라는 것을, 그래서 세입자의 불안정한 지위는 단순히 건물을 점유하는 데 있어서의 불안정한 지위가 아니라, 근본적인 불평등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제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4. 강제퇴거에 맞서는 연대
 
우리의 일상이 이미 그 현장에서 펼쳐지고 있다. 집이든 가게든 주인이 나가라고 하면 나갈 수밖에 없고 임대료를 올려달라고 하면 올려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삶의 계획이 어느 한 순간도 소유권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우리의 일상. 그 처지가 너무 보편적이라, 보편적인 문제로 인식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상황으로 이해되는 뒤집기. 이것은 건물주가 착하냐 못됐냐의 문제도 아니고 욕심의 문제도 아니다. 소유권을 철통같이 지키는 법과 제도들, 소유권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불온하다며 탄압하는 국가, 그로부터 끊임없이 이윤을 만들어내는 자본, 그 힘의 자장 안에서 펼쳐지는 우리의 일상의 문제다. 그래서 우리의 연대는 철거민들을 찾아가고 지지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각자 서있는 자리에서 강제퇴거의 힘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연대의 힘이 된다. 
언젠가 수영장 탈의실에서 아주머니들이 주고 받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스친다. 비슷한 동네에 사시는 분들이라 동네 사람들 이야기를 종종 나누신다. 한 가게에 대한 이야기였다. 커튼집이랬나. 10년 가까이 장사가 아주 잘 되던 가게였는데 건물 주인이 바뀌면서 나가라고 했단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월세를 조금 올려주겠다는 얘기까지 했는데도 그냥 나가라고만 했단다. 장사를 하던 분은 속절없이 가게를 옮겨야 했다. 그런데 건물 주인도 별다른 계획이 없었는지, 임대를 구한다는 광고가 붙고 반 년이 지나도록 장사할 사람을 찾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아주머니들은 가게를 옮겨야 했던 분의 사정을 안타까워하면서, 건물 주인이 임대 수익을 얻을 수 없게 된 걸 고소하다는 듯 얘기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안타까워하거나 고소해하는 것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 쫓겨나게 되는 상황에서 소유권을 당연시하지 말고, 무엇이 문제인지 한 번 더 들여다보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보일 것이다. 임대차보호법이 문제 아냐? 지자체가 세입자 편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우리라도 같이 따져줘야 하는 거 아냐? 그렇게 함께 하면서 우리들을 연결시키는 것이 인권을 지키는 연대일 것이다. 
(아, 부영건설이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중심에 미니신도시 규모의 아파트 단지를 짓는다는데, 거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묻는 것도 연대의 시작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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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0 20:15 2013/05/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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