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 둘...

* 이 글은 미류님의 [가족? 이야기 하나...] 에 관련된 글입니다.

7년째 동거 중인 그녀는 나의 여동생이다. 직장에 다니고 있으나 무슨 일을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고-아마도 mobile service와 관련된 일인 듯하나 그 동네가 워낙 낯설어 모를 뿐이다. 나를 무심하다 탓하지 마시라- 전범민중재판 기소인 모집 리플렛을 직장 동료 몇 명에게 전했다더니 본인은 아직 기소인이 되지 않았다는 것만은 잘도 기억하고 있는 정도...가 나와 그녀의 관계의 정도가 아닐까.

 

 



아마 그 전날 그녀가 내게 화장실청소할 때가 되었다고 알려주었을 것이다. 마음먹고 집에 일찍(이라고 해봤자 11시쯤이었던 것 같지?) 들어가 청소를 하려던 찰나,

"화장실 청소 좀 하래니까!"...

갑자기 나도 짜증이 나서

"지금 하려고 하잖아!"...박박... 화장실 바닥과 벽을 타일에 '기스'날 정도로 문질렀다.

 

침대에 누워 말다툼을 했다. 요지는 비슷하다.

내가 '집안일'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 그로 인해 그녀는 자꾸 짜증을 내게 되고 그게 싫다는 것.

내가 신경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요즘 너무 바쁘다는 것, 네가 내 일을 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항변...

 

하지만 그녀는 사실, 내가 바쁘다는 것-아니, 바쁘다기보다는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온다는 것-을 충분히 배려해주고 있었고 내가 하는 일들을 세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막연하게나마 인정해준다.

"내가 새벽이나 밤에 세탁기 돌리고 청소기로 청소하면 하지 말라고 했던 게 너 아니냐?"

"내가 너보고 집안일 다하라는 것도 아니잖아! 꼭 그렇게 시끄러운 거 해서 잠 못자게 해야 되냐? 걸레질하고 쓰레기 버리고 그런 거 하면 되잖아!"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내가 '집안일'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안일'의 대부분을 그녀가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고 나는 항상 미안해하면서 신경쓰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가만 돌아보니 나는 그저 '도와주는' 정도밖에 못됐던 것이다. 동생이 세탁기를 돌려서 빨래를 널어놓으면 개키는 정도, 씽크대에 그릇이 수북이 쌓일 때쯤 설거지하는 정도. 문제는 내가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뭘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

내가 아는 '집안일'은 세탁기 돌리고 청소하는 정도였던 것. 하지만 집/안에는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다. 쓰레기통 바닥에 집밖으로 쓰레기를 내보내는 비밀통로 같은 건 없다는 것, 형광등은 천년만년 불을 밝히는 요술램프가 아니라는 것, 이불과 요는 빨아야 할 때 경고음을 내보내지 않는다는 것, 책장선반 위로는 먼지가 쌓이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것, 화장실의 타일들이 때가 되면 허물을 벗는 애벌레가 아니라는 것...... 내가 몰랐던 것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모르려던 것들...

 

한달 정도 그녀가 집을 비운 적이 있다. 돌아보니 그때는 분명히 '집안일'을 '알고' 있었다.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았는데도 '집안일'을 짬짬이 챙겨서 잘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그녀와 '동거'하는 지금은 이 모양이다.

가족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속해있다. '집/안/일'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대개의 경우 아는 사람은 '엄마'다. 그리고 정말 분명한 건, 누군가는 알아야 하고 알게 된다는 것. 그리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

 

그런데 말야, 반성하면 좀 달라져야 하는 거 아냐, 자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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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9 13:34 2004/11/29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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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족이란...

    2004/12/01 12:59

    * 이 글은 미류님의 [가족, 이야기 둘...] 에 관련된 글입니다. 요즘, ER season #1을 자주 보고 있다. 나름대로 '영어 공부'를 좀 한답시고 영어 자막을 틀고 보고는 있지만, 대개 무척 사실적인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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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ribeun 2004/11/29 14:0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도 언니랑 살 땐, 집안 일이 그 정돈 줄 알았죠.
    혼자 살고 보니, 늘 애먹어요. 한다고 해도.. 아직도 그 정돈 줄 착각하다 말이에요.

  2. 미류 2004/11/29 15:4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도 늘 생각한다면서, 늘 제자리예요. ^^;;

  3. 욘용 2004/11/29 23:2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혼자 살면..밥을 안먹게되지요 크크
    사실 설거지보다 요리가 완전 어려워서 ㅠㅠ
    하지만 빨래는 어쩔수없이..;;;;;;;;;;;;;;

  4. 미류 2004/11/30 09:3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내 한 수 가르쳐주마, ㅎㅎ
    집에서 안 먹더라도 밥 잘 챙겨먹구 다녀~

  5. nodame 2004/11/30 13:3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흠..저도 집 근처의 따닷한 한식집 하나 뚫었답니다. 8시 반쯤 집 밖을 나와서 4000원짜리 밥을 먹고 들어오는데..그게 사실 집에서 해 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_-

  6. 미류 2004/11/30 21:3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럼, 4000원 내고 밥먹는데 그게 집에서 해먹는 것보다 나아야지, 못하면 쓰냐? !!! ^^;; 쨌든 밥 잘 챙겨먹구 다니셤~

  7. neoscrum 2004/12/04 11:0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청소.. 집안일.. 저는 혼자 살면서도 마치 누군가 해줄 것처럼 살고 있어요. 흐.. 먹거리도 예전에 옆방에 같이 먹을 사람 있었을 때는 제가 이것저것 해보기도 했는데.. 혼자 살면서는 오히려 해먹는 게 돈낭비, 시간낭비 같아서 벌써 2년이 넘게 사먹고 있어요. 그 중 1/4 정도는 인스턴트 음식인듯..

  8. 미류 2004/12/04 16:4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흐... 혼자 살 때랑, 같이 살 때랑, 집/안/일이 달라지는 건 사실이예요. 사람마다 제각각이죠. 저도 바지런한 편은 못되는지라 ^^;; 동생이랑 같이 살면서도 집에서 밥해먹지 않은지 오래됐어요. 인스턴트 음식은 거의 안 먹지만... 언제 기회되면 맛난 밥 같이 사먹어요~ ^^

  9. 미류 2004/12/04 18:1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참, 네오, 그 소사 노래는 뭔지 못 찾아봤어요. 그 후로 다시 소사를 안 들어서리... 근데 이제는 영화에 나왔던 곡도 생각이 안 나요. 번역된 가사가 있어야 그게 이건갑다 할 것 같네요. ㅡ.ㅡ

  10. NeoScrum 2004/12/04 19:1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음.. 그렇군요. 제가 한번 찾아볼께요. ^^ 제가 자료 찾는 거 하나는 또 자신있거든요. 지난번에는 작정하고 찾은던 게 아니라서 못 찾았던 듯..

  11. neoscrum 2004/12/04 20:0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찾았어요. ^^ 제 블로그에 노래를 올려놓을께요.

  12. aumilieu 2004/12/04 21:3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누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던가.
    내 심장을 바치러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갈 것이다, 천천히 갈 것이다
    그리고 너에게 모든 것을 줄것이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그 무엇은 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는 것이다

    네오, 그렇지 않아도 막 듣고온 길입니다. '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셨네요. 감사. (근데 작정하면 뭐든지 하는 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