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multitude님의 [맑콤- 정남영샘]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트랙백이라기보다는... --;

 

맑스코뮤날레 쟁점토론회가 있다길래 다녀왔다.

<계급 그리고 시민, 민중, 다중>

이런(?) 류의 토론회는 오랜만이라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왔다.

역시나 가벼운 마음으로 보면서 생각났던 것들 주절거려볼 양으로...

 

 



정남영의 발표와 이진경, 최갑수, 남구현의 토론이 들을 만했다. 김세균의 발표는 그가 이전에 발표한 글에 대한 조정환의 반론,에 대한 반론 형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인 탓도 있겠지만 발표라 하기에는 너무 산만했다. 또한 그가 '다중론'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논쟁지점을 그리 적절히 짚어내지 못하는 느낌도 있었다. 오랜만에 그의 글에서 '비제도적 투쟁정당'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는데, 발표에 대한 실망 탓이었는지, 조금 아까운 느낌(물론, 내가 비제도적 투쟁정당의 적극적 지지자인 것은 아니지만 소중한 모색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신광영의 발표는 충실한 느낌은 있었으나 기존의 논의에서 크게 새로워진 것 같지 않은 느낌. (앗, 이 '느낌'의 반복이란! 이렇게 불성실한 글을 써도 되는 건가? --;) 차라리 그의 글에 나온 '사회운동 노동운동 노선'에 대한 논의에 초점을 맞추거나 혹은 최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시민운동이 보였던/보이는 변화(?)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거나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 정남영의 발표가 들을 만했던 것은 일단 글의 성실함 때문인 듯하고 아마도 이런 토론이 새롭게 제기되는 맥락의 핵심에 네그리가 있었다는 조건 덕분일 듯.

토론은 개인적으로 듣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물어주어서 무척 반가웠으나 결과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고 충분히 '토론'되지 못해 아쉬움. 서관모의 토론은 한마디로 '다중론'은 읽어볼 가치도 없는 잡탕이다, 뭐 이런 거였는데 뭐 솔직하다고 생각함. 발표를 하면서 '잘 모르지만...'을 남발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난 안 본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 수도. 물론 역시 토론자의 자세라고 하기에는...

 

#2.

김세균은 네그리 또는 조정환을 비판하면서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네그리의 인간론(?)은 존재론적이라는 거다. 그러나 이진경이 지적했듯이 김세균 역시 '물질적 생산'이나 '생산적 노동'에 대한 논의에서는 '관계'를 보기보다 실체성/물질성(기계론적 유물론에서의)에 한정짓는 모습을 보인다. 생산적 노동을 말할 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산업노동자 혹은 육체노동자를 상상하는 것이 이해를 도울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상상하기 힘든 부분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3.

대중운동 우위 하에서 대중과 당의 결합, 이라는 명제가 지침이 될 수는 있겠지만 맑스가 중요시한 '어떻게?'라는 질문을 피해갈 수는 없을 듯. 이진경은 '무한히 연기되는 미래를 만들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조심히 물었음. '당'의 개념이 이미 그 안에 통일적 '권력'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닌지.

 

#4.

이진경의 토론 중 '다중'이 기존에 '계급', '대중'이라는 개념이 가졌던 유효성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이 있었는데 '대중'? 어떤 개념인지, 계급논의와 관련하여 지녔던 유효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5.

역시 정남영에 대한 이진경의 토론 중. 개체성과 특이성이 어떻게 다른지. 에 대한 답 듣고 싶었는데 못 들음. 아마도 그 차이를 해명하는 과정은 시민과 다중의 차이를 해명하는 과정이 될 듯한데.

정남영에 대한 이진경의 토론 들으면서. 이진경이 최근에 낸 '자본을 넘어선 자본' 읽으면서 네그리의 '제국' 3장에서 다루는 논의를 '자본'을 빌어 전개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뭐, 여전히 그런 듯하지만. 쨌든 이진경은 자신은 네그리를 잘 모른다고 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겸손은 아닌 듯한데. 이진경 혹은 수유 연구공간 너머를 보면 네그리처럼 들뢰즈나 스피노자 등에 관심을 많이 보인다. 이진경의 '모름'은 의도적 방기일까, 그냥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던 것일까. 지금 글쓰면서 든 생각인데 철학적 수준의 논의를 사회학으로 옮겨오는 데에 좀더 신중을 기하는 걸까 싶기도.

 

#6.

서관모는 맑스주의자가 푸코주의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맑스주의자는 스피노자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함. 뭐, 주의자 주의자 하는 것이 별로 마음에 안 들면서도 스피노자 얘기하니까 괜히 흠칫. 에티카 읽은 게 전부인 걸. 난 스피노자주의자 아냐. --;

다중은 역사신학적 개념 아니냐 비판하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 나 역시 그 수준에서 다중에 모종의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7.

multitude가 people보다 오래된 개념. 16세기 셰익스피어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는 이야기 등. 흥미로웠음. 정남영이 네그리를 읽기 시작하게 된 것도 영문학을 하면서 multitude의 저항이 국가에 포섭된 형식이 peolple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고. 쨌든. 대항주체의 형성/정치적 기획의 차원에서 다중이 어떻게 가능할지를 보여줘야 한다는 최갑수의 지적에 동의.

 

#8.

물질적 노동과 비물질적 노동을 모두 이야기하는데 김세균은 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 하에서 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고 하며 정남영은 삶정치적 생산에서는 비물질적 노동이 헤게모니를 쥔다고 한다. 근데 나는 이 부분이 젤 궁금하다. 쨌든 네그리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변화를 비물질적 노동(생산)의 헤게모니로 보고 그에 맞는 사회분석을 시도했던 거고 기다, 아니다 얘기하려면 좀더 친절하게 예를 들어주면 좋을 것을... 내가 짧아서 그런 거겠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주었으면... 하고 언제나 바람. 물론 물질/비물질 노동/생산에 대한 이해 혹은 정의부터 양자가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9.

신광영에 대한 남구현의 토론 중. 사회운동 노동운동 노선에 정치적 문제의식이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물으며 '정치의 부재를 사회민주주의 정치로 채우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

 

#10.

신광영에 대한 이진경의 토론. '비'시민이 더욱 많이 생기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시민'운동이 더욱 고민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지적.

 

#11.

뭐, 아는 것 제대로 없이 다녀왔으니 건진 것 별로 없는 게 당연할 지도. 이런 고민을 '내가' 풀고 싶은 욕심은, 사실 없으니. 다만 궁금한 것을. 그러면서도 아쉬운 것은 제국/제국주의 논쟁이 시작되고 1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토론은 공중에 떠있다는 것.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 보건의료산별노조의 경험 등등 토론의 출발점이 될 만한 이야기들은 많고도 많은 것 같은데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 지나친 기대? 나는 열심히, 뭐든,  '투쟁'하고 있으면, 뭐가 되든, 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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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1 22:17 2004/09/11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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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이 글은 미류님의 [맑스 코뮤날레, 다녀오다]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맑스코뮤날레 제2차 쟁점토론회 참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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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rishin 2004/09/16 11:0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어쨌든을 쨌든으로 줄여서 쓰시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군요.

  2. azrael 2004/09/16 13:4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윽. 제게는 내용이 너무 어려워요...

  3. 미류 2004/09/16 15:4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azrael/ 제가 그냥 메모하듯이 쓴 거라서 --; 내용이 어려운 것보다는 전후설명 없이 막 쓴 거 때문에 그럴 꺼예요. 제가 좀더 차분하고 성실하게 썼다면 함께 얘기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기회가 된다면 차분히 얘기나눠보고 싶어요. ^^ 혹시 얘기해보고 싶으신 거 있나요?
    marishin/ '쨌든'을 남발한 --; 것두 사실, 막 쓰다보니... 버릇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