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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와 루이스처럼

[설탕듬뿍 꽈배기]
델마와 루이스처럼


이건 꿈이야.
그가 묶여 있는 것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다.
꿈이어야 해.


*
 

라면을 끓이려는데 수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얘가...
평소에는 소매 걷고 달려들어 물이 적네 많네, 스프를 먼저 넣어야 맛있네, 하며 나서던 애가 멍한 것도 아니고 뚫어져라 보는 것도 아니면서 쳐다보고만 있다.
무슨 일 있나? 힐긋 한 번 더 눈길을 주고 라면을 뜯기 시작했다.
언니.
왜?
언니 보면... 뭐랄까... 여자 같아. 이 말 알아? 여자 같다는 말?
얘가 왜 이래?
그래. 그래. 여성스럽다는 말이 맞다. 언니는 그냥 뭘 해도 여성스러워.
너... 무슨 일 있니?

 

그때는 지금처럼 자주 먹지 않았지만 그래도 별식삼아 먹곤 했는데, 삼십 명 먹을 라면을 끓이는 게 쉽지 않았다.
집하고 회사만 왔다 갔다 하던 사람이 삼십 명치 라면을 한 번에 끓여볼 일이 있나?
거기다 입맛은 또 각각이라 면은 꼬들꼬들해야 한다, 아니다 약간 퍼져야 한다, 달걀은 다 풀어라, 아니다 노른자는 터뜨리지 마라, 뭔 말이냐 아무 것도 넣지 말고 그냥 끓이는 것이 맛있다, 면서 다들 먹을 때마다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도 그 때는 서로 웃으면서, 그냥 주는 대로 먹지, 여기가 음식점이냐고 한 마디 할 여유가 있었다.
이젠 열 명 남짓 남았다.
삼십 명이 아니라 오십 명, 백 명이라도 자리를 지켜주기만 하면 라면을 맛있게 끓이련만.


*
 

서너 달 지나니 한 명, 두 명 빠지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할 때 한 달이면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위원장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길면 한 달이라고.
장사가 얼마나 잘 되는데... 문을 닫겠냐고 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우리가 대단한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라고 그랬다.
맞는 말이었다. 몰랐는데, 일할 때 회사에서 해줘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런 것들이 다 법에 있다고 했다.
법에 있는 것들을 해달라는 건데, 그게 뭐 대단하다고.
다들 그랬다. 금방 끝날 거라고.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
 

다들 후르륵거리며 먹는다. 아무 말 없이.
희는 입맛이 없다. 음식을 만든 사람은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더니... 집에서는 몰랐는데 나와서 음식을 만들어보니 그 말이 맞다.
찬밥이라도 있으면 라면 국물에 말아 먹으련만 오늘은 그마저도 없다.


*
 

그 말은 수가 먼저 꺼냈다.
언니, 진짜로 죽여 버리고 싶어.
왜, 무단침입에 기물파손도 모자라서 살인까지 하려고?
웃기지 마라 그래. 우리가 뭘 잘못했우? 노동자가 노동조합 만든 게 잘못이우? 난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해. 그 새끼 죽이고 나도 죽자. 그 새끼는 인간도 아냐.
그만 해.
아냐. 할 수만 있으면 잡아다가 죽을 때까지 괴롭히고 싶어. 그래도 내가 당한 고통의 백분의 일도 안 될 거야.
그만 하라니까.
언니, 언니는 그런 생각 안 들어? 억울하다는 생각 안 들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냐니. 백 번, 천 번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오죽하면 전생에 무슨 죄가 있길래... 이 말을 달고 지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일로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전생의 죄가 아니라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안 들어.
언니, 언니, 나는 말이우. 그 새끼를 잡아서 꽁꽁 묶은 다음에 밥도 안 주고 화장실도 못 가게하고 그래서...
수야. 난 말이지...

특별히 마음에 뒀던 것도 아닌데 그 말이 나왔다.


*
 

오초본드는 아들에게 처음 들었다.
희는 아들 생각을 하면 가슴이 꽉 막혔다.
그다지 잘하는 공부는 아니었지만 웬만했던 녀석이었다. 2학년 때는 담임이 조금만 더 하면 외고도 갈 수 있겠다면서 집에서 조금만 신경 쓰시라고 하기도 했다.
그랬던 녀석이었는데... 엄마가 이렇게 지내고 있으니 공부가 잘 될 리가 없었다. 시험 때마다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3학년 기말고사에선 터무니없는 점수가 나왔다.
지 아빠는 심하게 꾸짖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희는 싫은 소리를 할 수 없었다. 그냥... 엇나가지만 않는 것도 고마웠다.

어느 날인가 오랜만에 집에 들어가 아들 방에 가보니 조그만 비행기며 배, 자동차가 있었다. 모두 나무로 만든 것들이었는데 이 녀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이 생각부터 들었다.
야자 마치고 들어온 아들에게 비행기 만들 시간이 있냐고 했더니 공부 잘 안 될 때 가끔씩 만드는 것이라면서 씩 웃는다. 어이없어서.
엄마가 이렇게 지내는 것은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고 하나마나한 소리를 늘어놓으니 다 알고 있다면서 또 씩 웃는다.
품에 있을 때나 자식이지... 클 대로 다 커서 같이 다니면 젊은 애인이라는 말 듣겠다고 수가 그랬다.
오랜만에 엄마를 봐서 기분이 좋은지 학교 이야기며 동무들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나무로 만든 자동차를 하나 집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중에 엄마한테 이런 차 사줄게, 그런다.
참내~ 울컥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학원도 보내지 못하는데... 먹을 거나 제대로 먹는지 모르겠는데... 지 엄마 차 사줄 생각을 하다니...
잠긴 목소리로 그런 거 어떻게 만드냐고 물었더니 나무를 어떻게 얻고 조각칼로 어쩌구 오초본드로 붙이고, 설명을 해댄다.
오초본드? 그게 뭔데? 회사 이름이 오초야?
그게 아니고 오초 만에 붙는다고 오초본드란다. 손가락끼리 붙여도 붙는다고 제대로 붙으면 수술을 해야 뗄 수 있을 거란다.

그 때 그 생각이 잠깐 스쳐갔다. 진짜 그냥 스쳐갔다.
눈꺼풀을 붙여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어이없게도 사장이 묶여 있는 것을 보자 본드가 없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진짜 눈을 못 쓰게 만들 생각이었나? 두 눈 다?
두 눈이라니, 이 상황에서 눈 하나, 눈 둘을 따지는 자신이 우습기도 했지만, 희는 겁이 났다.
어쩌려고?
죽이려고.
죽이긴, 수야, 정신 차려.
희는 수 눈이 무서웠다. 마치 눈에서 피라도 나는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수야, 너 왜 이래. 이런다고 될 일이 아냐.
언니. 나 그냥 이 새끼 죽이고 나도 죽을게.

그때 사장이 웃는 것 같았다. 잠깐 입 꼬리가 올라간 것 같았다. 비웃는 건가? 모르겠다. 비웃은 것 같았다.
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비웃어? 당신이 몇 명을 죽였는지 알아? 해고는 살인이야. 알아? 회사 문을 닫으면 다 죽는 거야. 알아? 아냐고. 너 같은 놈은 죽어야 해.
드라이버였나? 과도였나? 뭐였는지 언제부터 들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수는 들고 있던 그것으로 사장의 오른쪽 눈을 찔렀다.
안 돼. 수야. 안 돼.


*
 

언니, 뭐 해. 라면 끓이자고 했잖아. 꿈 꿨어? 소리는 왜 질러?
아니 그냥... 아무 것도... 아냐...

희 눈에서 눈물이 났다. 피보다 진한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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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8 03시 07분  미디어충청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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