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1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8/05
    100803
    도끼
  2. 2009/10/14
    진보의 한 부분(5)
    도끼
  3. 2009/06/30
    [옮김] 가장 편안하게(2)
    도끼
  4. 2009/06/27
    그는 사회주의자다(6)
    도끼
  5. 2008/06/27
    시작이 중요하다
    도끼
  6. 2007/06/09
    인간소외 극복 사명 띤 두 개 공동체, 종교사회주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2)
    도끼
  7. 2007/04/06
    "예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도끼
  8. 2005/06/25
    카트 하다가 겪은 일(1)
    도끼
  9. 2005/06/07
    건성건성...(1)
    도끼
  10. 2005/06/05
    이승만과 아무개(3)
    도끼

100803

그래서 자주 만나는 닭집에서 보기로 했는데, 김현수가 전화해서 "퇴근하셨으면... 만날까요?" 해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같이 보자고 했다.

김현수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 이성우 위원장께 전화 드려 다시 사정 이야기를 하고 장소를 바꿨다.

 

▲ 이성우 위원장

 

▲ 김현수

 

조금 후에 계룡대지회에 갔던 오임술과 주훈이 왔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 오임술(왼쪽)

 

▲ 주훈(오른쪽)

 

이성우 위원장께서는 '가문비와 느티네 집'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시는데... 근래 글이 뜸해서 내가 "요즘 글이 올라오지 않는데 글을 쓰지 않으시는 건지... 아니면 이제는 비밀글만 쓰시는 건지..." 여쭸다.

그랬더니 "우리 이야기를 써야 하는데...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나 써도 그게 어디 이야기인지 다 알고... 쓰는 게 부담스럽다"고 하셨다.

 

블로그야 개인이 운영하는 것이지만, 이성우 위원장께서는 '미디어충청'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 거기에도 글을 올리고 그래야 할 상황이신데... 그게 쉽지 않다는 말씀인 듯했다.

 

이성우 위원장의 생각이 나와 똑같지는 않겠지만... 요즘 내가 하는 고민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운동이랍시고 이십 년 넘게 해 왔는데... 도대체 우리는 왜 제대로 이뤄내는 것이 없는지.

젊을 때는 그게 저쪽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저들이 폭력적으로 역사의 발전을 막고 있고, 반동적으로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인민에게 우리의 진심을 알리고 흔들림없이 전진한다면 인민들은 우리를 지지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은 좀 다르다.

저들의 문제야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저들은 그렇게 살아왔고, 또 (논리적으로만 이야기하자면) 저들은 그게 생존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걸 뒤집지 못하는 것일까.

수십 가지, 수백 가지 진단을 할 수 있겠지만, 일단 지금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은 우리가 우리의 생각, 주장처럼 실천하지 못한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최소한(글쎄 진짜 이게 최소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지키고 살아야 한다. 따지고 보면 이게 무슨 운동의 원칙인가? 자유주의자들도 자기가 하는 말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기본'이라고 하지 않나?

 

어떤 사업을 벌일 때, 파업을 할 때, 이게 우리만 이익인 것이 아니라 인민에게 이익이 된다는 선전을 할 때, 인민들이 그걸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차이는 굉장히 중요하다.

저들의 악의적 선전 때문에 진실을 알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또 제대로 알기만 하면 우리를 믿을 것이라는 신념으로 운동을 하는 것인데... 요즘은 그 신념이 근본부터 흔들린다.

정말 우리는 인민의 편에서 운동하고 있는가?

 

이런 내용을 가감없이, 비록 저들의 악의적 선전에 다시 악용되더라도 분명하게 짚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 검열이랄 것도 없다. 그냥... 무너질 것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진보의 한 부분

얼마 전 휴대전화를 바꿨습니다. 요즘 전화기를 만들 때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저절로 고장 나게 만드는지 오 년 넘게 사용하니 버튼이 잘 눌리지 않고,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말소리도 잘 안 들리는 것 같고 그랬습니다.
잘 아는 대리점에 가서 "가장 싸게" 할 수 있는 전화기를 달라고 했습니다. 동무이기도 한 사장이 대뜸 "너는 애니콜 안 쓰잖아?" 하더군요. 애니콜 말고 아무 거나 싼 것으로 달라니까 "넌 벨소리 직접 만들어 넣잖아?"랍니다.
싼 게 있긴 한데, 만들어 넣는 벨소리 용량이 적어서 네 마음에 들지 않을 거라고, 비슷한 값인 애니콜은 벨소리 공간도 넉넉하고 뭐도 되고 어쩌구 하더니, "그래도 애니콜 안 쓸 거지?" 다시 되묻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저 역시 물건을 살 때, 이런저런 기준을 들이댑니다.
제가 휴대전화를 고르는 기준은 첫째, 싸고, 둘째, 제가 만든 벨소리를 마음대로 넣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엠피쓰리를 넣을 수 있든 없든 카메라 화질이 떨어지든 말든 그런 것은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따질만한 기준이 벨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새로 산 전화기는 벨소리도 두 개 밖에 넣지 못하고 넣을 수 있는 용량도 제한되어 있어서 라이브벨 수준으로 벨소리를 만들면 십팔 초를 넘기지 못합니다.
당연히 썩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엔(지금은 덜 하지만)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불편함은, 애니콜을 사용하는 '가책'과 비교하자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언젠가 어떤 자리에서 "나는 성인이 된 이후 내 돈 주고 삼성 제품 산 게 단 한 개도 없다"고 했더니, 농담인 줄 알았는지 떠벌이는 것으로 봤는지 "텔레비전은?", "냉장고는?", "세탁기는?" 등등 묻습디다.
누군가 "삼성 제품 안 쓰다가도 결혼할 때는 사게 되더라"고 하기에 "혼수품 중에 삼성에서만 나온 게 있냐? 다른 회사 제품 쓰면 되고, 만약 그런 제품이 있다면, 나는 안 산다"고 했습니다.

제가 삼성 제품을 쓰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노동조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없는 게 아니고 노조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른바 '무노조신화'라고 되도 않는 '선전'을 해대는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노조 만든다고 하면 칩까지 달아 스물네 시간 감시하고 테러까지 자행하면서 그게 '자랑'인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삼성 제품 쓰지 말자고 하면 "그럼 엘지 것 쓰자는 거냐?", "뭐 엘지는 노동자에게 잘하는 회사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질문으로 논지를 흐리면 안 됩니다. 최소한 엘지는 조합이 있습니다. 그 조합이 어용이든 제대로 하지 못하든 조합이 활동하는 사업장입니다.
'조합 없음'이 자랑인 회사, 조합 건설을 폭력으로 막는 회사는 민주주의의 적이고, 공공의 적입니다.

홍세화 씨가 유럽의 어느 나라에 갔을 때 삼성에 대해 이야기를 했더니 그 나라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삼성 제품을 쓰지 않겠네요?"

불매운동? 그런 거 안 해도 됩니다. 그냥 내가 쓰지 않으면 됩니다.
컴퓨터 한 대를 조립 주문할 때도 "삼성 부품은 하나도 넣지 마십시오"라고 이야기하십시오.
저는 이게 진보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시당 소식지에 실린 칼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옮김] 가장 편안하게


가장 편안하게

제 이야기를 좌파는 이래야 한다는 불편한 이야기로, 좌파의 윤리 강령으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히려 다들 좀더 편안하게 살자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아까 제가 좌파들이 제 아이 사교육 시키는 일로 서로 티격태격하는 풍경을 말씀드렸는데, 저는 '좌파가 어떻게 제 자식을 사교육 시키느냐'는 말은 틀린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아이 사교육 시키는 사람이 뭐하러 좌파를 하는가'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이 꼭 좌파로 살아야 합니까? 누가 우리에게 좌파로 살아야 한다고 강제한 일이 있습니까? 양심적인 자유주의자로, 이명박 비판하고 조중동 반대하고 춧불시위 참여하고 하면서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끄럽지 않은 삶 아닙니까? 그런데 굳이 자신을 좌파로 규정하면서 불편하게 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한국 사회에 좌파가 지나치게 부족하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자신을 좌파라 강변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양심을 건사하는 자유주의자로 살지만 좌파들을 존중한다, 이런 품위 있는 자유주의자가 많아야 사회가 갈피를 찾게 되고 좌파도 제 역할에 전념할 수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참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나같이 내가 가장 현실적인 좌파다, 내가 변화한 시대의 좌파다, 억지를 부리면서 묵묵히 활동하는 좌파들을 비현실적이니 관념적이니 깎아내리지요. 그런 태도가 조갑제 같은 극우세력의 이념 공격보다 훨씬 더 좌파에게 치명적입니다. 대중들에게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리거든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좌파가 그럴 수 있느냐, 난 좌파인데 이래도 되나, 이런 불편함을 버리십시오. 편안하게 사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는 가장 편안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존엄한 권리입니다. 좌파로 사는 게 편안하면 좌파로 살면 되는 것이고 자유주의자로 사는 게 편안하면 자유주의자로 살면 됩니다. 그게 사회에도 본인의 정신건강에도 좋습니다. (부산 강연에서)


----------------------------------------
2009년 6월 25일 11:43  규항넷



김규항 씨가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옮겼습니다. 밑줄은 제가 그엇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는 사회주의자다

[설탕듬뿍 꽈배기]
그는 사회주의자다


머리가 깨질 것 같네.
두 탕 뛰는 게 아닌데... 뭐 어쩔 수 없었지만...
어제 교육이 뭐였더라? 맨날 같은 이야기만 떠들어대니 이젠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모르겠어.
교육부장도 말이야, 시간 좀 잘 잡지. 어정쩡하게 끝나니까 대낮부터 술을 마시게 되잖아. 점심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저녁 빨리 먹는 셈 치자는 말을 해. 그것도 그렇고 어떻게 모이기만 하면 맨날 삼겹살이냐. 한 마디 하려고 했는데, 흐흐흐 안 하길 잘했지. 조직부장 거 괜히 나서서 찐따나 먹고. 회가 먹고 싶으면 지가 사던가. 나도 그 생각은 했지만 대놓고 맨날 삼겹살이냐고 하면 되나? 그런 때나 삼겹살 먹지 또 언제 먹겠어? 따지고 보면 맨날 먹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저 양반은 좀 굼떠. 나이를 많이 자신 것 같지도 않은데.
요즘은 기술도 좋아졌는데 꼭 저기서 차단기를 올려야 하나? 하이패스도 나오는 판인데. 돈도 빠져나가는 판에 그냥 직원들 차는 딱 인식해서 통과하도록 하면 되지 일일이 올리느라 바쁘고. 왜 회사에선 이런 걸 안 바꾸나. 사람이라도 바꾸던가. 저 양반이 파견이지? 거기는 노인네밖에 없나? 젊은 사람 앉혀 놓으면 한결 낫겠구만.
이런 문제를 딱 대놓고 얘기해야 하는데... 위원장이 지랄하겠지. 정규직으로 채용하지는 못할망정 짜르자고 할 수 있냐고. 하긴 그 말도 맞아.
그래도 젊은 놈이 낫지. 인사도 싹싹하게 할 테고.

 

이명박이 되고나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네.
그런데 말이야. 얘네들이 이럴 줄 몰랐나?
찍은 놈들 잘못이지 뭐. 한 번 된통 당해야 다음 찍을 때 잘 찍지. 부자들한테 잘 할 것이라는 걸 몰랐다는 거야, 아니면 부자들한테 잘 하더라도 우리 좀 봐달라는 거야. 무슨 생각으로 찍은 거야? 이러니 나라가 이 모양이지. 하여간 조선놈들은...

가만있자. 아침에 마누라가 뭐라고 했는데... 머리 아프고 속 뒤집어지는데 뭘 하라고, 조잘조잘, 하여간 여자들이란.
뭐였지?
아, 맞다.
그 사람들 계약기간 다 됐다고 했지? 요즘 월세가 좀 뛰나? 십만 원 올리든지 나가든지 하라고 얘기하라 했지? 나가라긴 야박하게. 여자들은 꼭 같은 말을 해도 그렇게 한다니까.
십만 원이면 몇 부지?
그런 건 자기가 전화하지 좀...
하긴 월세도 시세에 맞게 올리긴 올려야 해. 옛날엔 그게 그렇게 서럽더니 집주인 말이 맞더라구. 세를 올리지 않으면 나중에 그 돈으로 비슷한 집을 얻지 못한다고 했지? 맞는 말이야. 이 사람들도 지금 올리지 않으면 나중에 터무니없는 집에 살 수도 있거든. 잘 알아듣게 이야기하면 되겠지. 영 아닌 사람들은 아닌 것 같지? 아니면 어때? 내 집에서 살면 내 말대로 해야지.
오전부터 전화하긴 그렇고... 이따가 퇴근할 때 하지 뭐.

점심은 뭘 먹나? 해장해야 하는데.
아니, 와인 지난 지가 언젠데 그 녀석들은 아직도 와인 타령이래.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긴 하더만 배 터지게 삼겹살 먹고 간 사람한테 와인 마시자는 건 또 무슨 경우람? 돈 자랑 하려면 양주나 한 잔 하던가.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니 좋긴 좋더라구. 녀석들 미안하긴 할 거다. 그래도 노조활동 하는 놈은 나밖에 없잖아. 그때는 평생 새우깡에 소주만 마실 것처럼 굴더니 다들 삐까번쩍한 차 몰고...
크크. 아가씨들은 허리띠를 본다고? 진짜 돈 있는 놈은 양복, 와이셔츠, 넥타이 뿐 아니고 양말 같은 것도 명품인데 양말은 얼마짜리인지 보기 어려우니 허리띠를 본다는 거지? 그래서 다들 자기 허리띠가 얼마짜리인지 따지고... 하여간... 삼십년이 지나도 모이면 그때처럼 논다니까. 웃겨.
살다가 허리띠 오십 만원 줬다는 놈은 또 처음 봤네. 애들한테 깐보이지 않으려고 허리띠에 오십 만원이나 쓰냐? 웃긴 놈이라니까. 옛날엔 꽤 했던 놈인데... 세월이 많이 가긴 했어.

이 양반은 어딜 또 가자는 거야.
강좌는 무슨 강좌. 이 나이에 한 시간씩 앉아서 강의 듣게 생겼나? 힘들어 죽겠구만 뭘 또 들으러 가자고. 간부가 무슨 대가리 채우는 사람인가? 하여간 빨갱이들은 모이면 위원회고 말만 많고... 나도 빨갱이 축에 끼는데... 크크크.

사회주의라... 좋지.
다들 잘 사는 게 좋은 거지. 당연한 말을 저렇게 길게 설명하나. 나도 좋은 차 타고 와인 먹고 다녔으면 좋겠다.
나눠서 공평하게 사는 게 맞지. 그거 모르는 사람 있나? 사장 놈들 좀 덜 먹고 나도 돈 걱정 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세상이 오긴 오려나?


------------------------------
2009-06-26 15시06분  미디어충청 칼럼


몇달 전 미디어충청에서 코너를 하나 맡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예전에 이주노동자와 관련해서 드문드문 글을 올렸드랬는데, 이주노동자와 관련한 일이라는 것이 사실 백 가지, 천 가지 경우가 모두 비슷비슷하다. 그래서 이주노동자에 국한하지 않고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쓰라고 한다면 쓰겠다고 했다. 내 말에 답하느라 그랬는지, "그게 더 좋다"고 해서 쓴 글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시작이 중요하다

나만 그런 건지 모르겠다.
세월이 수상할수록 뭐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길게 보든 짧게 보든 뭐라도 해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제대로 된 시작인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만 헤매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뭘 어떻게 해야 "이뤄낼지" 모르겠다. 심지어... 어떤 때는 내가 바라는 게 뭔지, 그것도 헷갈릴 때가 있다.



난 거의 참석하지 못했는데 작년엔 이십 년째라고 꼭 오라고, 얼굴이나 한 번 봐야하지 않겠냐고 채근해서, 갔다 왔다.
근사한 음식점에 모여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라며 상투적인 인사를 주고받고, "지원 나갔을 때... 거 롯데 앞에서...", "신세계 쪽에 고가 있잖아. 그때 그 위에서 난리친 게 우리 조 아니었냐. 양쪽으로 포위되면 끝장인데 어떻게 거기서 그럴 용기가 났는지..." 운운하며 추억도 씹고 고기도 씹고 그랬다.
그러다가 누군가 이랬다.
우리들... 그때... 병을 던지면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했나?
글쎄... 내 기억만 되살리자면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저 허공에 발길질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설마...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많은 시간을 길에서 보냈겠나.
잠시 고민을 하는데, 다른 동무가 "최소한 파쇼는 끝장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라고 답을 했다.
그 말에 모두들 웃었다.
그랬던가? 소주병에 담긴 신나와 휘발유가 파쇼를 홀라당 태워버릴 것이라 생각했던가?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내 견해는, 어떻든 그 당시 "우리"의 "병"이 파쇼를 태운 게 아니다.
태우긴 커녕 노 아무개가 나와 한 마디 하니까 바로 조용해졌다.
그때 우리가 원했던 게 직선제였나?
"최소"한 "끝장"내는 것은 그저 기억에만 있는 목표였나?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기에 그 많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선량한" 시민으로 돌아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 잠깐 기억을 되살리자면, 그때 지하철 칸칸에 뿌려진 "피"에 죽으나 사나 "직선제 쟁취"라고 썼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네들 내부 문서엔 "군부독재세력은 절대로 직선제를 받을 수 없고(그네들 판단으로는 직선제를 받으면 군부독재세력이 지니까) 그러므로 지금 외치는 "직선제 쟁취"는 "혁명적인 구호"가 된다"는 식으로 쓰여 있기도 했다.
되도 않는 것에 "혁명"을 갖다 붙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가소로운데, 예의 노 아무개의 한 마디 이후 차로 가득 찬 명동 도로를 보면서 "링겔족이 이야기하는 혁명 이후는 이런 것이구나"라고 쓰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따지고 보면 이것저것 다 문제였던 거 같다. 몽땅 문제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뭔지 구체적으로 고민하지 않는다는 반증이겠지만, 하여간 내 보기엔 몽땅 다 문제였던 거 같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사람들이야 뭘 고민하겠는가?
뉴타운 허가는 나지 않는다고, 안 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자, "그 사람 대한민국 최고 부자니까 영 안 되면 자기 돈이라도 써서 뉴타운 하지 않겠어요?"라고 되묻는 사람이 뭘 고민하겠는가?

이런 사람들 말고... 어떻든 어떻게든 세상이 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십 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무엇부터 시작할 것인가? 이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 책 제목 : 무엇을 할 것인가
- 글쓴이 : 레닌
- 옮긴 이 : 최호정
- 펴낸 곳 : 박종철출판사


--------------------------------------------------
진보신당 대전광역시당(준) 소식지에 '서평'을 '고정적'으로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① 서평 형식이 아니어서 싫어할 듯.
   ② 고정적으로 쓸 자신은 없음.

--------------------------------------------------
예상했던 대로, 이게 무슨 서평이냐는 '점잖은 항의'가 있었고, 특정 정파를 비난하는 내용은 삭제하면 어떻겠냐는 '은근한 제안'이 있었다.
어떻든... 실리지 못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인간소외 극복 사명 띤 두 개 공동체, 종교사회주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레디앙, 두 번째 글이다.

개인적으로 틸리히를 썩 좋아하지 않아서... 아주 힘들게 쓴 글이다.
여러번 독촉을 받고, 밤을 새우기도 하고, 쓴 글을 몽땅 날리기도 하고... 사연이 많았다.



인간소외 극복 사명 띤 두 개 공동체
종교사회주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세계의 사회주의자-29] 종교사회주의자 폴 틸리히

자본주의체제만 종교를 인정한다? 어떤 자리에서 '체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펴는 것이 그 나라의 '바른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이야기하곤 한다.

내가 목사라는 것을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감출 것도 아니기에 나랑 서너 번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게 되고, 예의 '체제'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될 때 예외 없이 말한다.

목사님이 왜 사회주의를?

"목사님인데... 사회주의에 호의적이신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한 나라가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또 대외적으로 인정되는 '체제'가 자본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그 나라에서 펼치는 각종 정책이 '사회주의적'일 수 있다는 것, 특히 '속세 국가'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빈부 격차를 좁히려는 정책들은 '사회주의적 정신'에 기초하여 입안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 그들은 다시 말한다.

"어떻든 사회주의국가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잖습니까?" 왼쪽 가슴에 손수건 달고 다닐 때부터 들었던 말이다. 이론적으로 사회주의체제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도 어이없는 말이려니와 자본주의체제가 종교를 인정한다는 말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이다. 세상 어느 '체제'가 종교를 인정하나?

주지하는 대로, 이 나라에서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 것'과 '미국을 모국으로 삼는 것'을 동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집회에는 예외 없이 성조기가 등장한다. 미국을 반대하는 것은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이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빨갱이일 수는 없을 터, 그네들 입장에선 당연한 행동일 수 있겠다.

그러나 과연 기독교 신앙은 친미적이어야 하는지(그게 꼭 미국이래서 뿐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특정한 나라를 추종하는 것이 가능한지), 인류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인지 돌이켜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대단한 이론가들의 주장을 빌지 않더라도 내가 남을 짓밟아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체제,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뒤처지는 체제가 성경의 여러 '말씀'들과 맞아 떨어지는지 그 정도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나라에서 신앙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런 고민을 할 겨를이 없는지 모르겠지만, 유럽에 있는 '신앙인'들은 그런 고민을 심각하게 했던 것 같다. 교회를 다닌다면, 성경에 쓰여 있는 '말씀'을 믿는다면, 그래서 이 땅을 이끄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삶이 윤택해지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기독교사회주의와 종교사회주의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연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사회주의'를 떠올린다. 그러나 기독교사회주의와 종교사회주의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이론이다.

기독교사회주의는 19세기 중엽에 자본주의 사회의 악마적 착취와 그에 따른 위기의 장기화 등을 타개하려고 영국의 킹슬리(Charles Kingsley), 모리스(F.D.Maurice), 루드로(J.N.Ludlow) 등이 주창한 운동이다. 1850년에 '기독교사회주의'라 불린 이 운동은 신자들이 사회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배격하고, 경제적 사회악에 대해 도전하는 것을 기독인의 의무이자 하느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미국, 일본 등으로 번진 이 운동은 본질적으로 '교회를 위한 운동'이며 교회의 신앙 부흥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곧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예언자적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가난한 자, 눌린 자, 학대받는 자, 약한 자들을 위한 교회의 저항 운동이었으며, '전투적 교회'라는 모델을 채택했다. 반면 패배와 절망의 궁지에서 헤매는 자들에게는 적극적인 사랑의 모습을 보임으로 그들을 그 상황에서 구출해 내는 것, 곧 정의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와 달리 종교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교회를 위한 운동이 아니고, 교회와 사회의 벽을 허무는 운동이었다. 교회가 되었든 세계가 되었든 모두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교회와 세계를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없으며, 오히려 '주권' 아래에 있다고 인정되는 교회보다 교회 밖, 속세에서 '주권'을 더 많이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교회 밖의 여러 '운동', '현상'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찾자면 어떤 '이론'이 가장 '성경적'인지 따지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사회주의는 사회 현상을 유지하려는 보수적 전통교회보다 세계 혁명을 부르짖는 사회주의의 실천적 역동성 속에서 종교적 의의를 찾았다. 그러므로 종교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사회주의자들처럼 마르크스주의를 교회에 반하는 이론으로 생각하지 않고 포용하려 했다. 마르크스주의가 갖는 반종교성이나 무신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더 특별한 하느님의 경륜과 손길이 있다고 믿었다.

종교사회주의의 발흥

자본주의가 전성하던 시대에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을 목도한 요한 블룸하르트(John Blumhart)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설교에서 종교사회주의의 불씨를 지폈고, 그의 아들인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t)는 '하느님의 사랑'이 교회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으며, 종교가 없는 사회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영역이고, 그렇다면 마땅히 사회주의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곳으로 생각했다.(세계의 사회주의자 28-"예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참조)

하느님의 사랑은 그만큼 깊고 넓다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당시 유일한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의 당원이 되고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의 영향으로 나중에 종교사회주의의 지도자가 된 요(Joh), 뮬러(Mueller), 로츠키(Lhotzky), 쿠터(Kutter), 라가츠(Ragaz), 젊은 시절의 칼 바르트(Karl Barth), 에밀 부르너(Emil Brunner), 틸리히(Tillich), 하이만(Heimann), 멘니케(Mennicke), 덴(Dehn) 등이 뒤따랐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한 사회민주당을 적극 지지했다는 점이다. 라가츠나 쿠터는 사회민주당이 사회 정의에 아무런 관심도 영향력도 없는 기성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가차 없는 채찍질"이라고 했다. 특히 라가츠는 사회주의를 "장차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빛"이라고 했다.

물론 이들이 모두 같은 생각과 행동 방식을 취했던 것은 아니다. 혹은 정치 일선에 직접 나서기도 했고, 혹은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만 했다.

나중 모습도 모두 같진 않았는데, 라가츠의 경우, 1차대전 이후 러시아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 운동에 환멸을 느끼고 종교사회주의를 종교적 의미로만 국한했다. 칼 바르트도 후에 "하느님의 의지를 특정한 정치적 지향점과 동일하게 볼 수 없다"면서 종교사회주의를 떠났다.

종교사회주의자 틸리히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년 8월 20일 ~ 1965년 10월 22일)는 1918년 독일혁명 이후, 여러 교수들을 규합하여 '종교사회주의신문'을 발간하면서 종교사회주의와 관계를 맺었다.

틸리히가 종교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이유는, 첫째, 그를 둘러싼 사회적 여건이 있다. 1차대전 중 틸리히는 국민들이 계급적으로 분열되고 적대적인 관계로 대립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런 상황을 수수방관하며 오히려 지배계급과 결탁하였다. 틸리히는 기성 교회가 무산자의 인권에 무관심한 것을 개탄하였다.

둘째, 그는 1차대전에 참전한 경험으로, 사회주의 혁명만이 제국주의의 '계급 분화'를 타파할 것으로 믿었다. 혼돈과 전쟁 속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아침은 밝아오고 있었다. 부르주아 시대는 가고 프롤레타리아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초월적 메시지와 사회주의 혁명을 연결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음을 알았고, 그것이 종교사회주의였다.

틸리히는 이러한 '시대의 징표'를 '제2의 카이로스(kairos)'라고 했다. 틸리히에 따르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어느 순간에 이르면 하느님 나라의 핵심적인 현시가 역사 안으로 임하는데, 바로 이런 성숙한 시간을 신약에서 '시간의 성취' 곧 카이로스라고 한다.

이 두 번째 카이로스는 새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창조적인 시간이었다. 틸리히는 카이로스라는 개념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진가를 평가하려 했다.

틸리히가 본 마르크스주의

틸리히는 세계적 위기상황에서 종교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이것만이 부르주아 문화, 사회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인간소외를 극복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틸리히는 사회주의 운동을 외적인 경제적 제도의 변혁이나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그치지 않고 노동자의 자기 소외를 철폐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사회주의는 사회주의 운동의 본래적인 사명을 자각시키며 인간소외를 치유하는 처방이었다. 사회주의가 외적 혁명만 아니라 부르주아로 인해 발생한 인간소외, 더 구체적으로 비인간화에 대한 항거로 발생한 것이라면 종교와 반목될 수 없으며 적대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종교란 인간소외에 대한 해방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틸리히에겐 종교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인간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인류 최대의 사명을 띤 공동체"였다.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가 계급이기주의를 강화하고 지나치게 적의를 발산할 때, 종교사회주의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 부도덕한 과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며 공동운명을 개척하는 역할을 한다고 봤다.

틸리히의 종교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실존이 본래 가져야 할 위치에서 빗나갔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외형은 인간이나 인간으로 누릴 자유가 없는 사물이나 다름없다고 봤다. 곧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생산과 교환이라는 경제적 메커니즘에 의해 노동자들은 '인간 상실'의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를 두고 틸리히는 '프롤레타리아의 상황'이라고 했다.

틸리히는,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유일한 도구인 노동력마저 위협받게 되며 상시적으로 실업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불안정'하며, '고독'하다고 봤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절망'에 빠져 있다고 봤다.

그렇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는 이 '상황'을 극복하려고 노동력의 사유화를 반대하며 생산이 공유되는 사회의 확립을 추구하게 된다.

또 하나의 일치된 지점은 '돈'에 대한 입장이다. 돈 때문에 인간관계가 왜곡되고 결국 인간의 소외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틸리히와 마르크스는 일치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노동력을 파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그로 인해 인간성이 파괴되고 인간이 본질적으로 누려야 할 자유를 박탈당했다는 점에서 둘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여러 공통점이 있었고, 실제로 틸리히가 마르크스주의에서 받은 영향도 크지만 최종 해결점은 차이가 있다.

인간소외를 극복하는 신률(神律)

틸리히가 평생의 과업으로 생각했던 것은 "인간의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하는 점이었다.

소련에서 시도한 공산세계 건설도 인간을 소외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봤다. 틸리히는 공산주의를 자율에 반하는 타율적 체제로 규정하였고, 그 타율이 절대화되어 인간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것을 개탄하였다. 그는 타율적인 '제도', 곧 전체주의, 공산주의로는 인간의 소외를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종교사회주의를 통해 인간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고 봤으며, '그리스도의 구속'을 사회주의 운동 속에 불어 넣음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자율도 타율도 아닌 '신률'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신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자율의 현상들인 자기 만족성, 개인주의 등이 종적을 감출 것이며, 타율에 의한 비인간화, 물건화(物件化), 도구화 등이 극복될 것으로 확신했다.

이런 이론을 기초로 틸리히는 그런 신률이 지배하는 날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의 '거룩한 공백기론(Sacred Void)'이다.

그러나 그 날은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오지 않았다. 지금 우리의 처지를 보면 조만간 그 날이 올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사회의 문제에 대해 인식하면서 소외되고 착취 받는 사람들에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고민한다면, 틸리히의 사상이 꽤 중요한 교과서가 될 듯하다.

서민식 / 목사. 대전이주노동자연대 대표

2007년 06월 09일 (토) 08:53:16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예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레디앙에서 청탁을 받았는데... 게을러터져서 미루고 미루고 전자우편, 문자메시지로 재촉받길 수십회. 아주 늦게 쓴 글이다.
    나는 "깊은 영성을 소유한 사회주의자,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라고 제목을 붙여 보냈는데... 짧고 과격해졌다.



   "예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세계의 사회주의자-28] 영성 깊은 목회자 블룸하르트


    비행기 한 번 타지 못한 터라 다른 나라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이 나라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두 가지 오해
    첫 번째 오해는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는 이른바 영적인 신앙인들은 결국 보수적(친미적이든 친한나라적이든) 입장을 가지게 되고, 기도도 하지 않고 룻이 여자인지 롯이 여자인지도 모르는 신앙인들은 결국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곧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색과 구도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세상만사에 대해 '감사'하게 되고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아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있는 티끌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오해는 복음이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황희처럼 네 말이 옳구나, 네 말도 옳다, 허허, 당신 말도 옳소, 라는 식으로 모든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맞장구칠 수 있는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투캅스의 안성기처럼 온갖 나쁜 짓을 다 하고 돌아다니다가 일요일, 수요일에 예배당에 앉아서 눈물 찔끔 흘리고 십일조 봉투를 내미는 사람을 예수께서 장하다고 하실까? 전두환을 앞에 두고 하늘이 내린 영도자라고 칭송했던 목사들을 예수께서 충성했다고 칭찬하실까?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오해를 하는 까닭은 성경 자체를 제대로 모르고, 스스로 고민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모범으로 삼을만한 신앙인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블룸하르트의 성장 배경, 영적 경험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 1842~1919)의 아버지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Johann Christoph Blumhardt)는 대단히 유명한 목회자였으며 치유자였다.
    아버지 블룸하르트가 1844년 카타리나라는 여자 교인의 병을 고치고 난 후, 참회운동이 온 마을을 휩쓸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에 모여 죄를 고백하고, 알콜중독자들이 술을 끊고,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왔으며, 병든 사람들이 건강하게 되었다. 예배를 마친 후에도 아버지 블룸하르트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열려져 있는 서재 창문을 통해서 병이 낫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 블룸하르트는 1852년 목사직을 사임하고 괴핑겐 근처로 이사했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도움받길 원했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자기 자신의 부족한 면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양친과 그들을 늘 가득 채우고 있던 영적 온기 속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나는 늘 소외감을 느꼈고 그러한 생활은 나와는 거리가 먼 뭔가 거룩한 것이었고 내 영혼을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기의 내적 확신보다 아버지의 권유로 신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유명한 신앙인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과 만나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1872년 고트리빈 디투스(카타리나의 언니)의 영면을 지켜보면서 당시 30세이던 블룸하르트는 하느님의 존재와 활동, 사도들이 어떻게 설교했는지 이해할 정도로 "이상스러운 탄생"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후 블룸하르트에겐 모든 의심과 불확실성이 완전히 사라졌다. 블룸하르트는 아버지에게 오는 엄청난 양의 편지를 맡아 썼고, 목회일도 대리했다. 1880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블룸하르트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았다.


    회의감
    더 많은 사람들이 블룸하르트를 찾아오는데, 정작 블룸하르트는 회의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블룸하르트는 병 때문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가 더럽혀 놓은 온갖 것을 다시 깨끗하게 해 놓아야 한다는 식으로,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를 갈취하는 방법으로 모든 것이 진행된다면 거기엔 허위가 남게 됩니다. 이 모든 것에는 늘 이기적 성향이 깃들어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을 향한 구걸을 그만두고 어떻게 죄를 인식할 것인지,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하느님의 정의를 따라 노력하는 것,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에게 용납될 수 있는지 그 길을 찾으시오."
    개개인의 고난을 중요시하지 말고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기적을 찾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하느님 나라와 그 의에 봉사하는 것을 원했다. 블룸하르트는 개인 뿐 아니라 교회의 이기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교회를 향해 "죽어라. 그래야 예수가 산다"라고 했다.


    보다 넓어진 시각과 공개적인 '편들기'
    이후 블룸하르트는 보다 넓은 시각으로 사회운동을 벌였다. "예수는 많은 대중, 프롤레타리아 등 자기를 주장할 수 없는 자의 편이었다. 기쁜 소식이란 이 세상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얻어야 할 내용이다.
    블룸하르트는, 참된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주님과 함께 사회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당시 교회에 속해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블룸하르트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거룩한 질서에 대한 부정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운동을 반교회적인 태도, 무신론적인 태도라고 몰아붙였다.
    밧볼에서 조용히 지내던 블룸하르트가 공개적으로 사회 문제를 거론하게 된 계기는 이른바 '교도소 법률안'이었다. 이는 '기업의 노동관계 보호를 위한 법'의 초안인데 1899년부터 작성된 것이었다.
    당시 교회는 파업을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했다. 문제가 있으면 기업주의 양심에 호소하거나 최악의 경우 자선 사업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블룸하르트는 자본이 갖는 악마적 속성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이 법안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노동자들 편에 서기로 했다.
    그는 1899년 9월 19일, 괴핑겐에서 열린 항거대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나는 지금 알려진 법안이 제국의회에 상정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정된 후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공중 앞에 나서서 거기에 대한 반대입장을 천명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정의에 반하는 범죄입니다."
    그의 등장은 위축되어 있던 노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블룸하르트는 1899년 10월 2일 두 번째 집회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오늘날 노동계급의 편에 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지극히 적은 자들에게 속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리와 죄인들을 자기의 친구로 선언했습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 내가 프롤레타리아의 편이 되고 내 스스로가 프롤레타리아가 되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인한다고 비난할 사람이 있습니까? ...... 1900년 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이제 우리가 다시 실천하려고 하는 것일 뿐인데 왜 우리가 그것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되어야 합니까?
    민주주의적 신문인 「호펜스타우펜」은 그의 연설을 "사회민주주의의 신봉자 블룸하르트"란 제목으로 뽑아 호외로 발간했다.
    이때까지 블룸하르트는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미 그가 사회민주당에 입당한 것으로 해석되었고, 사람들은 블룸하르트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블룸하르트는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 특별한 해명없이 공식적으로 입당했다. 그러자 교계와 정치계의 신문들이 본노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블룸하르트는 천대받는 개개인을 돕는 것보다 멸시받는 계급의 편에 서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 때문에 그때까지 자신이 이뤄놓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 그렇게 됐다.
    비템베르그주교회는 그에게 목사직과 그 외 다른 직위를 포기할 것을 요구해왔고 그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라고 했으나 블룸하르트는 교회와 싸우지 않았다. 이후 블룸하르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종교적, 정치적 강연들을 했다. 비템베르그 지방의회에 사회민주당 후보로 추천되고 당선되기도 했다.


    여전히 깊은 영성을 지녔던 블룸하르트
    블룸하르트는 1906년 지방의회 의원 임기를 마치자 재출마 권유를 물리치고 팔레스틴(이스라엘) 여행길에 오른다.
    그는 1888년까지 대전도운동을 전개하고 병자들을 고쳤으며 그후 약 10년 동안 명상과 피정 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하느님 나라'를 강조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블룸하르트의 여정이 왔다갔다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정작 블룸하르트의 생각은 초지일관 '하느님 나라를 기다림'이었다.
    그에게 기다림의 공동체는 곧 이 세상에서 실현될 하느님 나라의 교두보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예수가 승리한다!'는 확신 가운데 살았다. 여동생 안나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주름살 투성이의 손을 가슴에 얹고 조용히 누워 있거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하고 속삭였다."
    1919년 8월 2일 영면한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예수가 승리했다는 것은
    영원히 남으리라.
    온 세계는 그의 것이 되리라.
 
    ※ 이 글은 『혁명적 신앙인들』(1987년, 손규태 편저, 한국신학연구소 펴냄)을 주교재로 블룸하르트의 삶을 정리했습니다.


    서민식 목사 / 대전이주노동자연대 대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카트 하다가 겪은 일

     제가 게임을 꽤 합니다. 저 어릴 때 갤러그라는, 지금 보면 지극히 단순한 '전자오락'이 있었습니다. 기억하기로 고등학생일 때 오십 원인가 했드랬는데, 오십 원을 넣고 모든 판을 다 깨고(쉰 판인가?) 다시 새로운 판이 시작되면 또 모두 깨고... 그 오십 원으로 세 시간 넘게 놀곤 했습니다. 그때 동무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처럼 오십 원으로 세 시간 넘게 노는 '놈'들에겐 오락실 주인이 백 원 주면서 가라고 했다는데, 저는 그런 경험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 이후 오락다운 오락을 찾지 못하다가 스타 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꽤 재미있다 싶었는데... 제가 이미 '노땅'이 되어 버린 탓인지 키보드 버튼을 찾아가며 하는 게임은 영 익숙해지지 않습디다. 그래서 그냥 재미만 있는, 때때로 시간 때우려 하는 정도만 했지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카트라이더를 접하게 되었을 때(이미 꽤 유명해진 뒤였지만) 눈이 번쩍, 아니 반짝반짝거렸습니다.



     집 피씨로 카트를 하는 제게 아내가 한 말입니다.

     남자들이란, 그저 운전에... 총 쏘는 것이면 뒤집어진다는 겁니다.

 

     이제 막 파란장갑을 끼게 된 저는 이 게임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껏 모아 놓은 루찌를 딸애 차 사는 데 다 써버려서 막상 저는 아직도 연카(처음부터 제공되는 연습용 차량)를 쓰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차에서 밀리다보니 기술이라도 제대로 익혀서 '시간 안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카트 사이트에 들려 온갖 비법, 나만의 기술 등을 읽고 연습하곤 했습니다(허허~ 매일같이 게임이나 하고 있는 것 같구만).

     그러다가 발견한 글이 있습니다.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자... 어쩌구 저쩌구... 아이디를 신고해 주시고... 어쩌구 저쩌구...

     뭔 얘긴지 몰라 네이버에서도 찾아보고 그랬더니 무조건 일등으로 들어오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나 봅니다. 뭐...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어제 카트를 하는데, 바로 그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한(것 같은) '놈'을 봤습니다. 분명 저랑 어떤 사람이 앞 서거니 뒤 서거니 하면서 끄트머리에 다 다다랐는데 난데없이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면서 '웬 놈'이 일등을 한 겁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이등을 했고 저랑 다투던 사람이 삼등을 했는데, 게임을 마친 후 '준비'할 때 저랑 삼등한 사람이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불법 프로그램 사용하는 거 아니냐? 이상하다.

 

     그런데...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한(것으로 추정되는) '놈'이 나가면서 방장이 바뀌고, 새로 방장된 사람이 저랑 삼등한 사람을 강퇴시켜 버렸습니다. 그 잠깐 사이에 "그냥 게임이나 하자"는 글들이 떴고... 그랬습니다.

 

     제가 사소한 일에서 좌절감을 느낄 때가 이런 때입니다.

     잘못한 사람과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을 같이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

 

     카트 한 판에 너무 심각합니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건성건성...

     이 나라에 와서 생활하던 외국인이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밥 한 번 먹자는 말을 인사처럼 하더라구요. 처음에 그걸 몰랐을 땐 누구라도 내게 밥 한 번 먹자고 하면 언제 먹나, 왜 안 부르나 하며 기다리곤 했어요. 그런데 이젠 그게 인사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인터뷰어가 이렇게 물었다.

     "이젠 누가 밥 먹자고 해도 기다리지 않겠네요."

     그 외국인이 답했다.

     "지금도 기다리긴 해요."

     그렇게... 분위기 좋게... 웃으며 마무리...를 했던 거 같다.



     밥 한 번 먹자거나 소주 한 잔 하자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이 나라 사람들의 두뇌 구조, 또는 오묘한 인사성을 무시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누가 밥 먹자고 하면 언제 먹자고 하나 기다린다.

     뿐 아니라 누가 내게 밥을 먹자고 하지 않고 내가 누구에게 밥을 먹자고 한다면, 그리고 상대방이 그러자고 한다면, 당연히 밥을 같이 먹을 것이라 생각하고... 기다린다.

     만약 내가 약속한 날짜에 같이 밥을 먹을 수 없다면, 같이 먹을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진 그 시간에 전화를 하든지 문자를 보낸다. 상대방이 나랑 밥을 먹으려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부분이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다시... 그런데... 지금 나랑 어울리는 꽤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래. 예의가 없다.

 

     같이 밥을 먹자고 했는데, 밥을 먹고 온다. 와서는 먹었다 먹지 않았다는 말도 없다.

     같이 소주 한 잔 하자고 했는데 약속한 그 날짜에 아무런 연락도 없다. 내가 전화를 해도, 통화가 되지 않았어도 다시 전화를 하지 않는다(내 주변에서 발신자 표시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나 뿐이다). 나는 그냥 기다릴 뿐이다.

     정말 예의가 없다.

 

     더 어이없는 것은 일과 맞물려 보자고 한 사람이, 그냥 가버리는 것이다.

     오후에 전화 통화를 했고 만나서 상의하자는 말도 했는데... 나 있는 건물에 왔다가 자기 일 마치고 그냥 간다. 어찌 이런 경우가... 있나.

     정말, 정말 예의가 없다.

 

     이 빌어먹을, 이 짜증나는 생활을 하다가 나도 그 두뇌구조에 그 오묘한 인사성에 물들지 몰라서 더 짜증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승만과 아무개

 

     이승만이 왜 친일파를 기용했을까요?

 

     첫째, 친일파는 독립군 출신에 비해 일을 잘 합니다.

     애비라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듣자하니 만주에서 말이나 타고 다닌다고 하고. 그 자식들은 돈도 벌지 못하는 애비 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그러니 독립군 후손이라는 놈들 데려다 쓸 일 있겠습니까? 동네 이장을 시키려 해도 기본적으로 아는 게 있어야 시키죠. 그렇죠?

 

     둘째, 친일파는 권력에 순종적입니다.

     자기들을 배척하는 권력에 대해서는 죽기살기로 덤비지만 자기들에게 이익을 주는 권력에 대해서는 간이라도 빼줄 듯 합니다. 곧 조중동처럼 상업주의(이익만 추구한다는 점에서)가 체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려 먹기도 좋습니다.

 

     셋째, 이승만은 친일파 말고는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임시정부에서 한 자리 차지했었다고도 하지만 하여간 문제가 많았던 인간인지라 임정 세력 내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회주의자들 그룹에서는 더군다나 인정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정권을 잡은 후 손 잡을 자들은 친일파 밖에 없었습니다.

 

     또 다른 뭐가 있습니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