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되려면 아직 멀었다.

2008/10/01 00:10 생활감상문

배탈 나서 점심은 굶고, 오후에 효나상(HA양)이 사다 준 딸기 요구르트 하나, 둥글레차 두어 잔, 속이 헛헛해 마신 따끈한 녹차라테 한잔.... 그리고 집에 와선 미음 좀 끓여서 몇 숟갈에 간장 타서 먹은지라.... 아직 내가 포스팅 재개할 때가 아닌데... 이건 정말 반성해야 할 것 같아서.... 두고두고 반성하려고 현장기록 차원에서 몇 줄 적는다.(몇 줄 적는다 하고 언제나 그렇듯이 배경 설명에 진을 다 빼겠지만)

 

놀다가 늦게 들어와 일단 잠은 잘 잤는데... 새벽에 한기에 떨면서 늦잠도 못 자고 일찍 깼다. 일어나자마자 옥상에 이불솜 갖다 널었다. 시월을 맞이하야 솜이불 덮을 때(해마다 일년에 8개월은 솜이불을 덮고 잔다)가 왔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한기가 들어서 그런지, 대충 차가운 샌드위치랑 야채주스로 아침 때웠더니 배탈 나서 오전 내내 뜨거운 찜질팩 배에 올려놓고... 먹은 게 없으니 기운이 없어서... 이게 장염인가 뭔가... 상하이 다녀온 다음 배앓이가 벌써 몇 번째던가 세보면서... 과민성대장증후군인지, 세균성 장염인지.. 그런 거나 고민하면서.... 몇 번이고 자기한테 시간 맞춰서 겨우 세팅해 놓은(그것도 쉬는 날인 토요일에, 부산영화제 가는 것도 포기하면서 잡아놓은) 모임 갑자기 못 온다는 L선생도, 설득할 기운 없어서 전화도 못하고는 겨우 메일로만 간곡한 참석 압박을 했다. 내일 아침까지 답장 없으면 기운 차려 전화 걸어야지 하고는.

 

그러고 집에 와서 혼자 미음 끓여 몇 술 뜨고는.... 기운 하나 없는 다리로 옥상까지 올라가서는 솜이불 메고 내려오는데... 아~ 정말 오늘 같은 날은 누구 기운 센 사람, 부려 먹을 사람 있으면 좋겠다고... 나도 마누라가 있으면 좋겠다고... 그래도... 뭐 그럴 수는 없으니까... 난 언제까지 기운이 세야 할까... 뭐 그런 생각하면서 후달거리면서... 좀 서글퍼하면서 내려왔다.

 

내일은 회사에 입사한 지 만으로 1년 되는 날. 그리고 울 아버지와 동명이인인 신입사원이 새로 입사하는 날이다. 기념으로 케이크 내기로 했는데... 한약도 먹고 있고, 배탈까지 났으니 더더욱 밀가루는 안 되겠는지라... 소화 안 되는 달걀과 우유도 처리할 겸... 찹쌀케이크 반죽해서 얼른 오븐에 집어넣고 밀린 설겆이 해결하고 있는데... 자꾸 문자가 온다. 이동통신 포인트 썼다는 문자다.

 

안 그래도 아침에 샌드위치 사먹는데... 멤버십카드 없길래... 어제 또 놀다가 어디다 흘렸군... 하고 쩝쩝...했는데... 누가 주워서 그것을 편의점 가서 쓰나 보다 했다. 에휴~ 아침에 정지시켜야지 원.. 하고... 그런데 설거지를 마치고 다시 전화기를 보는데... 10~20분 사이에 포인트 사용 문자가 일곱 통이나 와 있다. 금액도 350원부터 1500원까지... 순식간에 5천 원이다. 뭐 현금은 아니지만, 영화 예매할 때 할인도 되고, 가끔 월급날 케이크 사서 후배들한테 인심 쓸 때도 요긴하고... 일주일에 1리터씩은 꼬박꼬박 사다놓는 우유 살 때도 출근길 편의점에서 할인받아 사는 재미가 쏠쏠한데...(그거 말고는 쓸 데가 없어 30퍼센트도 다 못 썼지만) 괜히 기분이 나쁘다. 자꾸 문자가 오니까. 통신사 홈페이지에 가서 정지 신청을 했지만, 업무시간이 아닌지라 내일 아침에나 반영이 된단다. 이거 이런 식이면 8만 원쯤 남은 포인트... 밤새 다 쓰겠잖아?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한 사람이 주워서 이렇게 순식간에 쓸 수가 없다. 이렇게 짜잘하게. 또 곰곰히 생각해 보니... 포인트 카드를 쓴 것은 어제 아침 집앞의 편의점에서였다. 아무래도 이 집 알바생이 의심스럽군. 가봐서... 물건 고르는 척 서 있다가 누가 계산할 때 이게 나오나 안 나오나.. 봐야겠다.... 지갑도 안 가지고 열쇠랑 핸드폰만 들고 슬리퍼 끌고 대문을 나섰다.

 

집에서 해당 편의점까지는 도보로 2~3분 거리. 그런데 가는 사이 또 포인트 사용 문자가 두 통이나 온다. 가는 발걸음이 빨라지고, 열도 더 오른다. 작은 편의점에 들어서서, 계산대를 보는 순간... 이 이름 석 자 멀쩡히 찍혀 있는 멤버쉽카드가 바코드 판독기 앞에 그냥 편안하게 놓여 있다. 아예 내놓고 쓰고 있던 거다.

아마... 어제 아침엔... 편의점 주인 아줌마가 계산을 했는데... 내가 계산하고 놓고 간 것을 주인 아줌마가 챙겨 놓은 것을 알바생이 발견하고... 재미 삼아 손님들 계산할 때 찍어준 모양이다. 자~ 여기서부터 나 사고 치기 시작한다... 다짜고짜.... 카드를 집어 들고..."이걸 누구 허락 받고 사용하지요?"라고 따지기 시작한다. 내가 누군지, 이 카드가 내 것인지... 생략생략.... "이게 남의 거라고 마구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요? 손님 물건인데... 고스란히 간직했다가 찾으러 오면 돌려줘야 할 물건을... 이런 식으로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요?" 화들짝 놀란 알바생(2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죄송합니다. 한번밖에 안 썼습니다."라고 급히 둘러댄다. 아마도... 문자로 포인트 사용 내역이 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 거짓말에 난 더 화가 났다. "한 번이라고요? 거짓말 하지 말아요." (전화기 문자 내역 보여 주면서...) "열 번은 썼잖아요." 계산을 하려고 계산대에 다가오다가 내 서슬에 주춤주춤 서 있던 30대 남자 자기도 모르게 전화기 같이 들여다 본다. 마치 그가 증인이라도 된 듯이.... 나는 더 의기양양해져서 목소리가 더 커진다. 밥도 못 먹은 사람이... 좀전까지... 자기 연민에나 빠져 있던 사람이... 아아~ 아무래도 그 자기 연민은 동정이 아니라 분노였나 보다. 쳇. "내가 여기 편의점 코앞에 살아요. 자주 온다고요. 이 카드 주인이 어떤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바로 쓴 거죠?" 성질 같아선 10분이고, 20분이고 훈계를 늘어놓고 싶었지만... 더 할 말은 없을 듯해... 그 정도 하고 왔다는 말도 없었든, 간다는 말도 없이 바로 돌아서서 나왔다.

 

그렇게 걸어나온 지 딱 1분쯤 지나서야 후회가 들었다. 익명의 카드 주인을 무시하고, 남의 포인트로 손님들한테 인심 쓴 알바생이나... 익명의 알바생이라고 다짜고짜 화를 낸 나나.... 별반 다를 것도 없건만...  평소 돈 꿔가고도 제때 안 갚는 친구에게 착한 척하고, 식당에게도 아줌마들한테 감사함니다, 고맙습니다 어찌나 생글거리는지, 평소 딸네미 고운 목소리 한 번 듣고 싶어하는(그러나 늘 짜증 섞인 대답밖에 못 듣는) 울 아버지에게 "뭘 그리 비굴하게 구냐"는 질투 섞인 구박까지 받는 내 모습은 다 위선이었나 보다. 어디 성질 부릴 껀수 없나 찾고 있다가... 제대로 걸렸달까?

 

어쨌든 (천지가 울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소리 지르고 따질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왕 날아간 포인트....(이미 10월이라 8만 점이든, 7만 5천 점이든   남은 포인트 다 쓸 일도 없고, 사실 현금도 아니고.... 그래 봐야 통신사 포인트 땡겨다가 편의점 물건 파는 대기업만 좋은 일이고...) 카드만 찾아오면(현금영수증용 카드로 등록되어 있어서 잃어버리면 아깝기는 했다. 재발급하려면 천 원 내야 하기도 하고) 될 일이었는데... 결국 또 돈 문제로 이렇게 밑바닥 보이는구나. 작년에 회사 그만두고 오사카 여행 준비할 때도 예약 상황 놓쳐다가 나중에 더 비싼 코스로 예약하라는, 무책임한 여행사 직원이랑 싸워 놓고도... 반나절을 우울해했는데... 난 왜 이 모냥인지.... 서비스직종의 백화점식 감정 서비스... 너무나 피곤하고 위선적인 일이라고... 안쓰러워하면서도... 내가 강자라는 생각이 들면.... 결국 이런 식이다.

 

그 알바생... 잘못하기는 했지만, 아직 어리고 철없어... 심야에 알바하다가 재미 삼아 그랬을 수도 있는데... 뭐 꼭 나이의 문제는 아니지만, 열 살은 더 먹은 내가... 거기서 그렇게 성질 부릴 이유 없었는데... 아아~ 정말...... 입이 쓰다.... 빨래 개고, 이불솜 끼우고... 정리하면서도... 낯이 뜨겁다. 잊지 말자... 오늘 또 사고 쳤음을. 누군가가 어떤 잘못을 했건, 어떤 사람이건 내가 함부로 대할 이유는 없다. 조용하고 친절한 태도는 남에게 무언가를 얻으려고 꺼내 쓰는 카드가 아닌걸. 그렇게 조심을 하는데도... 이게 참 안 되니.. 난 정말 사람 되려면 멀었구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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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1 00:10 2008/10/0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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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루  2008/10/03 1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그건 그렇게 하셔도 될만한 일인 것같은데.....(저라도 그랬을 거같아서.. ) ^^;

    그저께 지방에 가려고 공항버스를 탔는데 기사분이 승객들 짐 실어주려고 내리시면서 "그냥 찍으시면 돼요" 라고 해서 찍었더니 7천 얼마가 나오더라구요. 저는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옆자리 분에게 물었더니 김포는 3천원이래요. 그래서 또 나가서 얘기할까 망설이는데 아기를 업고 있어서 좀있다 내릴 때쯤에 가서 말해야지 하다가 말을 못하고 내리고 말았어요.

    내내 생각했어요. 말을 할까, 말까. 3천원이면 큰 돈은 아니지만 이건 부당하잖아, 그렇게 생각하다가 또 기사 아저씨가 "아줌마가 말을 안하고 찍었으니까 아줌마 잘못이죠" 하면 아침부터 기분이 상할 것같은데 어떡하지...그러다가 결국 그냥 내렸답니다. 하루종일 기분나쁠지도 몰라서 그냥 3천원을 포기했어요.ㅠ.ㅠ
  2. 강이  2008/10/03 2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루 님/ 망설일 일이라면 이미 하고 싶은 일이니 발을 내딛으라...고 제게 충고해 준 사람이 있지요. 제 반성은... 문제를 제기하고, 카드만 찾아오면 될 일이었는데... 현금도 아니고 쓰지도 않을 포인트 5천 원에 모르는 사람 앞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성질을 부렸다는 점이었지요. 그럴 필요는 없었거든요. 이미 제가 정당성과 승기를 모두 잡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에요. 정당한 항의와 싸움을 구별하는 일... 계속해서 훈련해 가야 하는 일인가 봐요- -;;
  3. 윤삼  2008/10/06 05: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일간 끼니 때마다 마늘과 쑥을 복용하도록 해봐.
  4. 강이  2008/10/06 13: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윤삼/ ( ..)(.. )( ..)(.. ) - -;;
  5. EM  2008/12/21 15: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왜 이 재밌는 것을 이제야 봤을까요..;;
    강이님과 돈문제로 걸릴 일이 없다는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ㅎㅎ
    (음.. 가만.. 이 덧글땜에 괜히 잊은일을 되새겨드리는 게 아닌지 몰겠네요^^)
  6. 강이  2008/12/22 05: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M님 / 이때 제가 사는 게 좀 힘들었던 거에요;; 평소에는 음... 꽤 우아한 척한답니다. 뭐 어쨌든 이제라도 재미있으셨다니 기쁩니다.^ ^
  7. EM  2008/12/22 0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하지만 하루 24시간 중에서, 대부분 우아하게 지내다가 약 5분도 안되는 동안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인간들 아닌가요. 특히 우리들.. 말하자면 좌파적인 정서를 조금이라도 공유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누구 말대로 "괴물"은 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살고있을 따름인데... 요새 한가지 문제는, 너무 극단적으로 괴물같은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괴물"의 기준도 더 극단화되고, 그만큼 저 자신에 대한 허용범위도 넓어지는 것 같다는 겁니다. 경계할 대목입니다..;;;
  8. 강이  2008/12/22 19: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M님/ 가끔은 그래서... 그냥 평소에 우아한 척하기를 포기하면 순간 '괴물'이 되는 사태도 오지 않을 텐데... 하곤 생각하지요. 다행히 주변에 인내심 많은 분들이 꽤 있어서... 보고 배울 기회는 많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