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여름 사이의 한때

2009/06/05 00:02 생활감상문

레슬리 파이스트, 머셔붐, 2004

 

지난 주 중반부터 두통 때문에 잠을 못 자다가 일요일 밤엔 두세 시간이나 눈을 붙였나? 월요일에 헤롱헤롱하다가... 월요일 밤엔 그나마 깊은 잠을 잤다. 봄과 여름 사이 이불 두께를 조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다음주에 드디어 데란다 책(들뢰즈의 자연과학적 재구성)이 끝나는데, 지난 주에 생각 많아 잠 못 잔 만큼 컨디션 관리에도 고민이 많았는데, 어제오늘... 저녁 시간에 좀 여유를 가질 일들(그래 봐야 30분?)이 있어서 그런지 잠을 잘 잤다. 시간적으로는 하루 다섯 시간 자기는 매한가진데, 한결 몸도, 마음도 가볍다. 심지어 오늘은 9시부터 졸리더군(버뜨 너무 일찍 자면 새벽에 깨기 때문에 3시간을 버텼더니 그만 두통이...... 그래도 자야지). 

어제 디자인팀 L팀장님이 아프셔서 이틀째 결근을 하시어... 점심시간에 S과장님과 함께 죽 사들고 문병을 갔다. 어디가 아프신지, 어떻게 아프신지, 식사는 했는지, 아픈 원인이 뭔지 이런저런 얘기 끝에... 단기적으론 마감 후유증, 중기적으론 이직 6개월차 적응으로 인한 체력/정신력 저하증이라는 야매 진단을 내려 드렸다. L팀장님 최근 변화에 대한 내적/외적 요구에... 변하고도 싶고, 지금까지 잘살았는데 변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고민이 많으시다(이직을 했든 안 했든 누군 안 그러겠냐만). 머리가 변하라는 것도 무조건 일을 잘하라는 것도, 부족한 능력을 야근으로 때우라는 것도 아니다. 작년 한 해 메신저 대화명을 "신체의 능력"이라 해두었다(요새는 다른 거다). 변화를 담지할 신체를 갖고 버티는 게 장땡이란 말이다(전부 나 자신에게 하는 얘기다)고, 나는 백지연처럼 나를 경영하는 건 못하지만, 나의 몸은 경영한다고... 뭐 그런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만큼 내가 부실해서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말이다. 태어나기를 약골로 태어나 과민성 대장 증후군과 남달리 밝은 잠귀, 입에 안 맞는 걸 먹느니 굶겠다는 주의지만 배고픔은 못 참는 자기 모순, 제 성질을 못 이기면 속병이 나는 성격까지 어쩜 다 그리 집안 내력 그대로인지... 뭐 여하간, 그래서 이 인구 밀도 높은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남달리 노동 강도 높은 직업을 선택한 사람은 나니까, 방법은 하나다.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거다. 물론 나도 놀고먹고 여유롭게 살고 싶다만(꼭 그 시절이 다 지나서가 아니라, 시절은 언제든 올 수도 있다. 공간과 배치만 적절하다면. 노는 것도 체력이긴 하지만) 돈을 벌려고만 하는 일이 아닐진데, 하는 일을 잘하는 게 내 삶 자체가 충실한 거 아닌가? 여기보다 어딘가에...에 대한 생각은 가끔씩만 하기로 했으니까.

여하간 어제 죽 안 좋아하신다는 데 억지로 식사하시게 해서 한의원 모셔다 드리고 사무실로 돌아와 교정을 보는데, <차이와 반복>을 인용해 지식과 배움의 차이를 설명해 놓은 부분이 눈이 들어온다. "배움이란 누군가가 문제의 객관성에 직면할 때 수행되는 주관적인 행위에 대한 적절한 명칭이다. (......) 이에 반해 지식은 개념들의 일반성 혹은 해들을 가능하게 하는 규칙의 조용한 소유만을 가리킨다." 이직과 적응과 자기-됨 등에 대한 이야기들, 그러니까 L팀장님께 잘난 척 늘어놓은 장광설은 모두 내가 나한테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어제는 오랫만에 파이스트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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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5 00:02 2009/06/0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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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09/06/12 15: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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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비밀방문자  2009/06/15 1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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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이  2009/06/15 16:2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뭐 그리 배타적인 사람은 아니라 부담스러울 것은 없구요 그냥 워낙 뜻밖이라서 놀랐다 뭐 그 정도입니다. 살면서 뜻밖의 선물만큼 신선한 충격은 없다는... 제가 좋아하는 필자 L선생님 평소 지론 받자와... 기분 좋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긴 합니다. 잘 보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