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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편

Name 류은숙 (2004-12-06 18:12:18, Hit : 278, Vote : 49) Subject 시 한편 '국경없는 친구들'이 발간하는 잡지2004년 9-10월호에 실린 시입니다. 쓴 사람에 대한 설명은 이름 외에는 없네요. 형제요 자매인 우리들 벗들이여 우리는 형제요 자매다 우리는 같은 강물의 물을 마신다 우리는 같은 공기를 호흡한다 우리는 같은 지구에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아간다 기쁠 때 슬플 때 웃음과 눈물에는 같은 목소리와 색깔이 있지 않은가 '도시 거주자', '산 속에 사는 종족', '바다의 집시들', 뭐라 불리우든 우리는 똑같은 살과 피를 갖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보살펴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안아주고 등 두드려 줄 것이다 형제요 자매인 우리들 우리는 똑같이 인간이라는 종족이요 우리에게는 똑같은 신이 있다 여기 저기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다 똑같은 영혼을 가졌기에 2004년 7월 우기에, 치앙마이에서 L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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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11월후원금송금내역

Name  
   류은숙  (2004-12-01 15:03:34, Hit : 414, Vote : 73)
Subject  
   후원금 송금 내역
11월에 모인 후원금을 12월 1일 송금했습니다. 송금액은 100달러로, 원화로는 110, 471원(수수료 포함)입니다. 현재 잔액은 -2,179원입니다. 참여해주신 계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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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노동의 땅

Name  
   류은숙  (2004-11-29 16:52:07, Hit : 416, Vote : 75)
Subject  
   강제노동의 땅
'국경없는 친구들'이 발간하는 잡지(2004. 5-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역사적 장소와 전통적 생활방식은 언제나 관광객들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다. 오늘날에는 여행하는데 돈도 덜 들고 훨씬 돌아다니기 쉬워져서, 상당수 사람들이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Ankor Wat), 라오스의 LUang Prabang, 중국 남부의 Sipsongpanna 등 이웃국가들에서 갈 곳을 고른다.
아직, 버마 같은 곳은 대중적으로 선택되는 곳은 아니다. 외국인들, 특히 서구인들은 자기들 돈이 군부정권의 주머니와 군대로 흘러들어갈까봐 버마에 가지 않으려 한다. 이런 행동은 일종의 불매운동이다.
버마에는 아주 유명한 관광지가 있다. 예를 들어 Pagan, Rangoon, Pegu같은 곳이다. 여기에 가볼 기회가 있었던 사람들은 도시와 사람들의 이국적 분위기에 감명받는다. 하지만, 관광객들이 들어가 볼 수 없는 많은 지역이 있고, 그곳에서 버마인과 많은 인종적 소수민족들은 군사정권의 억압하에서 수백년 전의 노예와 비슷한 고통스런 환경속에 살고 있다.
현재, 버마군사정권은 사람들을 강제로 일 시켜서 도로 건설을 하고, 절과 불탑을 고치고, 군사시설을 짓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짐꾼으로 부려지거나 대인지뢰가 묻힌 전투지역에서는 군인들 앞서 걸어가는 인간 방패로 동원된다. 이렇게 동원된 사람들은 임금도 못받고 일하고, 명령을 따르지 않을 때는 욕설과 구타를 당한다. 많은 사람들이 음식과 마실 물의 부족 때문에 병이 걸리고, 죽어서야 정글을 떠나게 된다.
수년 동안, 버마군사정권은 관광객들을 맞기 위한 인프라를 개발해왔다. 그러나, 군부가 예상했던 숫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관광객들이 왔다. 강제노동과 억압의 땅은 사람들이 휴가를 갖기 위해 선택하고 싶은 곳이 아닌 것이다.
이와 동시에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버마에서 도망치고 있다. 이들은 타이를 행선지로 삼는다. 버마에서 도망치는 사람들 숫자는 버마를 행선지로 삼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몇 배가 훨씬 넘도록 많다.
강제노동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우리 땅에서 이주노동자로 살아갈 때는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추신: 국제노동기구(ILO)에 강제노동관행에 관한 잘못된 정보를 흘렸다는 명목으로 세 명의 버마인이 사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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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원 여러분께

Name  
   류은숙  (2004-11-22 17:43:25, Hit : 365, Vote : 53)
Subject  
   계원 여러분께
안녕하세요. 날씨가 찬데 감기 조심하세요.

계원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글을 올립니다.

먼저 이 사이트에 대한 홍보를 많이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자유게시판에 의견도 많이 남겨주세요.(제 이름으로만 도배되고 있는 듯 하여 무안합니다) 자신의 참여동기나 국경없는 친구들에 묻고 싶은 것, 같이 읽고 싶은 글 등등 많이 많이 써주세요.

그리고 계비 납부는 매 월 말일까지 해주셨으면 합니다. 모인 액수와 상관없이 매달 1일에 송금할 계획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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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 친구들이 보내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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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4-11-22 17:40:12, Hit : 447, Vote : 73)
Subject  
   '국경없는 친구들'이 보내온 편지-한국의 친구들에게
한국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

타이에서 인사를 보냅니다. 우리를 지원하는 모든 분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 모든 분들에게 고맙다는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고, 저는 국경지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곧 국경에 가게 될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1년 동안, 우리는 "우정과 인권을 위한 카렌(Karen)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인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인권의 향상과 카렌족의 네트워크를 향상하기 위함입니다. 소수민족인 카렌족은 타이-버마 국경에 의해 찢어져 있습니다. 버마쪽에 사는 카렌족은 독재치하와 무력분쟁지역에 살고 있고, 타이쪽에 사는 카렌족은 사회적 소수자로서 시민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온갖 종류의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국경지대에 거주하는 카렌족 중 한 집단에 의해 운영됩니다. 이들은 우리가 양 진영의 카렌족을 모아 함께 진행했던 풀뿌리 인권교육프로젝트에 참가했던 사람들입니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 그들 스스로가 같은 종류의 프로그램을 계속하길 원했고,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모든 일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고, 다만 옆에서 보조하고 있습니다.

올해에 세 번의 워크샵이 있었습니다. 국경지대에 참가지원서가 배포됐고, 18명이 선발됐습니다. 자기 마을로 돌아가서 인권 사업을 계속하겠다는 약속 그리고 지원자의 마을에서 3번의 워크샵을 완전히 참가하도록 허락한 경우를 선발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성평등을 고려했고, 난민인 카렌족과 타이 시민권을 가진 카렌족도 동등하게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이 워크샵들은 난민 캠프와 국내유민캠프에서 열렸습니다. 사람들은 인권의 원칙과 메커니즘, 타이법과 타이의 인권 메커니즘, 소수민족과 난민의 권리, 갈등해결과 평화건설, 발전권과 공동체의 권리, 미디어의 이용, 지역사회조직, 인권활동가에 대한 훈련에 대해 배웠습니다. 18명 중에서 10명만이 과정을 완수했습니다. 탈락자들에게는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재정문제도 있었고,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카렌 프로젝트 팀과 저는 이 10명의 사람들에 대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힘을 기르는데 정말 열심이었습니다. 8개월 동안 6명의 여성과 4명의 남성인 이들 10명은 가까운 친구가 됐습니다. 이들은 자기 마을에서 진행할 4개의 프로젝트를 제안했고, 우리는 그것을 지원합니다. 둘 이상의 워크샵 참여자들이 공동으로 결합하여 이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저는 다음주에 이 워크샵 중 하나를 방문할 것입니다. 그것은 분쟁지역에 있는 학교의 교사들을 위한 인권워크샵입니다. 다른 프로젝트는 난민캠프의 청소년들을 위한 인권교육, 타이에 사는 카렌족·난민캠프와 국내유민캠프에 사는 카렌족에게서 수집한 인권상황에 대한 책입니다.

여러분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저는 그들이 무슨 일을 진행하고 있는가를 들으면 아주 행복합니다. 사람들은 아주 신이 나서 이 일을 계속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저는 재정적 어려움을 포함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를 쓰기 직전에, 저는 2003년 프로그램의 한 참가자에게서 온 작은 보고서와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Naw Mary이고, 난민캠프에 살고 있습니다. 27살인 그녀는 그녀 인생의 13년을 난민으로서 폐쇄적인 캠프에서 살아왔습니다. 작년에 훈련워크샵을 마친 후에, 올해 초 우리에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특히 분쟁지역의 여성을 위한 워크샵을 조직하고 싶다고요. 우리는 필사적으로 그녀가 워크샵을 여는 데 필요한 425달러를 위한 재정지원을 알아봤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Naw Mary가 우리에게 전해온 소식은 타이 당국이 더욱 엄격해져서, 난민캠프내에서 워크샵을 조직하려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버마로 가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편지를 받아보고, 얼마나 기쁘고 그녀가 자랑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그 일을 해낸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단지 15명 정도의 카렌 여성만이 올 것이라 기대했는데, 32명이 참가했고 그중에는 5명의 남성도 있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주변 마을에서 왔는데, 그 지역은 버마군부가 아주 날뛰는 곳이라서, 매우 조심해야만 했습니다. 워크샵 둘째날 군인들이 마을에 왔습니다. 참가자들 모두가 흩어져서 도망쳐 숨었습니다. 모든 서류와 종이들을 급히 치웠습니다. 군인들은 2시간여동안 마을을 수색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때 참가자들은 아주 겁이 났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워크샵을 계속하기 위해 되돌아왔습니다.  

평가 자리에서, 참가자들은 자신들에게 소중한 경험이었으며, 이런 자리를 가져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상황을 분석해봐야 하고, 세상을 더 넓게 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좀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했습니다. 무력분쟁 때문에 아주 고립돼 있는 그들에게 이러한 프로그램은 다른 사람들을 알게하고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참가자들은 후속프로그램이 또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고, 전쟁 속에서 생존과 존엄을 지키기에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이런 프로그램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희망했습니다.

저는 Naw Mary의 편지를 읽고,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자랑스러울 뿐 아니라 제게는 '국경없는 친구들'이 또한 자랑스럽습니다.  우리가 한 역할이 극히 미미하다 할지라도요.

어떤 사람들은 난민들이 인권에 대해 알 필요가 뭐가 있느냐고 얘기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그들이 배우는 것은 국제인권법으로서의 인권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에 대해 배우는 것이요, 뭔가 변화를 일굴 수 있는 자신들의 힘에 대해 배우는 것이라고요, 둘째, 인권교육은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인권피해자인 그들 자신이 고립과 침묵의 문화를 깨뜨릴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들이 행복감을 느끼고, 호기심을 느끼고, 자극을 받고, 배우기에 열심이고, 그로부터 나오는 힘을 확산시키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한국의 친구 여러분, 이것이 제가 새해가 오기 전에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활동은 여러분의 지원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난민과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제 동료들, 그리고 저는 우리의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핌(Pim)
국경없는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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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글-친구가 사는 곳

Name  
   류은숙  (2004-11-18 13:33:32, Hit : 680, Vote : 84)
Subject  
   잡지 글-"친구가 사는 곳"
*'국경 없는 친구들'이 발간하는 잡지에 실린 글입니다.

"친구가 사는 곳"

어디에 제일 가고 싶냐는 질문을 받으면 당신은 어디를 떠올리나요? 가고 또 가도 결코 지겨워지지 않는 그런 곳 말이예요. 내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내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단연코 "Mae Hong Son"입니다.
그 마을이 아주 풍경이 좋고 작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다양한 소수민족의 풍부한 문화를 갖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Mae Hong Son"이라 하면 으레 떠올리는 상징은 "긴 목을 가진 카렌족(목에 고리를 끼워 길게 늘이는 종족으로 유명한 것이 카렌족임)"입니다. 사람들은 카렌족과 그들의 가족이 버마에서 온 난민이란 것을 모른채 관광객으로서 그들의 목걸이를 떠올릴 뿐입니다. 내가 Mae Hong Son을 아주 좋아하는 이유는 거기에 내 친구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고, 그 친구들 때문에 Mae Hong Son에 관광객의 관심을 끄는 일들 말고도 더 많은 얘기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한 친구를 여러분에게 소개하지요. 그녀의 이름은 빅토리아입니다. 빅토리아는 가족이 버마에서 도망쳐 나온 후에 타이에서 태어난 Kayah족 소녀입니다. 우리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녀는 버마군인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와 Mae Hong Son에 살고 있는 만 명이 넘는 Karenni족이 도망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얘기합니다.

Karenni는 버마의 7개 소수민족국중에 가장 작습니다. Karenni는 많은 소수종족으로 구성돼 있는데 제일 많은 인구가 Kayah족이고, 그 다음이 Karen, Kayaw, 그리고 Kayan 또는 Paduang 족으로, 이들은 타이 사람들에게 "긴 목을 가진 카렌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Karenni 왕국은 Kayah족의 지도 하에서, 역사적으로 Lanna와 버마 제국 둘다와 외교적 유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영국이 버마에 대한 지배를 수립했을 때 Karenni국은 여전히 독립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독립을 위해 성공적으로 분투하는 과정에서, 버마의 정치엘리트들은 버마연방을 만들었고, 이 연방은 소수민족 국가들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후로, 버마군은 새로운 국민국가의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정당화하고, 타 민족들에 대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소수민족의 영토를 느슨하게 통치했던 고대 버마 제국의 권리 주장을 해왔습니다.

소수민족을 향한 혹독한 폭력은 소수민족을 겨냥한 전쟁 뿐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전혀 청취하지 않는 많은 개발 프로젝트(특히 댐 공사)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댐으로 인해 농사짓고 살던 땅에 악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쫓겨나거나 강제노동을 하게 됐습니다.

슬프게도, 그들이 타이로 이주하게 되자, 그들 중에서 "이국적"이고 뭔가 달라 보이는 사람들은(긴 목을 한 카렌족처럼) 타이 장사꾼들의 표적이 됐습니다. 이 장사꾼들은 이 사람들의 문화를 팔아서 이익을 볼 수 있다는 데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만약 버마정부가 헌법을 기초하기 위한 의회를 소집하게 돼서, 전쟁이 끝나게 되고,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Mae Hong Son의 관광산업이 영향을 받게 될 것을 걱정하는 것이 이들 장사꾼들의 속내입니다. 빅토리아가 이런 뉴스를 읽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빅토리아의 꿈을 생각합니다. 그 고향에서는 산 속에 마을들이 있고, 사람들은 소박한 삶을 살고, Mae Hong Son에서보다 더 아름다운 문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나에게도 빅토리아와 똑같은 꿈이 있습니다. 모든 난민 친구들이 고향으로 즐겁게 돌아간다면, 나에게는 방문하고 싶은 "친구가 사는 곳"이 하나 더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나는 희망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의 그들 사회에서는 더 이상 지역주민들을 싼 노동력이나 문화상품으로만 취급하는 개발 프로젝트와 관광산업을 볼 수 없게 되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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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어린이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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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4-11-16 15:51:56, Hit : 793, Vote :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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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민어린이글 4
Saw Su Le (11살, 1학년)
빨간색 카렌족 셔츠를 입고, 미래를 향해 걸어간다. 선생님이 안 계시면 학생들은 배울 수 없다. 선생님이 안 계시면 우리는 읽는 것을 배울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학교 때문에 셈을 할 수 있고, 많은 것을 읽고 쓸 수 있다. 선생님은 우리를 밤낮으로 도와주신다. 전혀 불평하거나 소리를 치지 않으시고, 너무나 친절하게 너무나 인내심을 갖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신다. 우리 카렌족 아이들은 부끄럽지 않다. 우리가 노력하면 언젠가는 우리도 우리 친구들을 선생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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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동부의 무력분쟁 지역에서, 전체 가족 중 단지 11%만이 제대로 열려있는 학교에 갈 수 있다. 휴전지역에서조차 예산의 부족과 정부의 지원이 없기 때문에 학교가 정기적으로 열리지 않는다.

전쟁은 인간에게 큰 상실이지만, 재정적으로·정치적으로·군사적으로 강력한 사람들에게는 얻어지는 것이 있다. 세계의 자원에는 분명 아동을 위해 쓰여질 것이 있는 것인데, 그 자원이 이윤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넘겨져서 무기를 만들고, 군사 지도자를 살찌우는 반면에, 아이들은 굶주리고 있으며 배우고 놀고 평화로운 환경에서 자라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은 단순히 읽고 쓰는 것을 배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교육은 마음을 치유하는 마음의 양식이다. 쓰고, 그리고, 노래하는 활동과 뛰어 노는 활동은 아이들이 경험한 전쟁에서 비롯된 긴장을 이해하고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자 방출구이다.  그러나 무력분쟁지역에서의 인도주의적 원조는 이런 교육 활동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학교에서의 수업이 전쟁 지도자들의 승리를 부각시키는 역사인식을 통해 폭력을 오히려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

어린 영혼들이 피와 총탄의 악순환에 끌려 들어가기 때문에 그 아이들과 함께 놀아야할 야생 나비들은 홀로 배회하고 있다.

지금까지 보여준 글들은 Ler Per Her 마을 아이들의 것이다. 약 120여명의 아이들이 거기서 학교에 다니는데, 18세에서 27세사이의 젊은 선생님들이 많은 고아들의 '사실상' 아버지, 어머니가 되었다. 여기서 교육은 아이들을 즐겁게 하고, 강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침에 선생님이 '사회 수학(social math)' 수업을 시작하셨다.
모래 한 더미에 다른 모래 한 더미를 더하면 얼마가 돼지? 둘이요.
맞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요. 만약에 두 더미의 모래가 하나로 섞여지면 어떨까요? 마치 우리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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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어린이 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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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4-11-11 12:12:02, Hit : 837, Vote : 85)
Subject  
   난민 어린이 글 3
Saw Mu(13살, 3학년)

우리 학교는 버마 쪽 Moei 강둑에 있다. 나는 학생이다. 매일 나는 빨간색으로 된 카렌족 전통 셔츠를 입고 학교에 걸어간다.

때때로, 나는 학교 근처에 서서 타이 쪽을 바라본다. 타이 쪽에 있는 학교는 근사하게 서있다. 아름답다. 거기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있다. 때때로 나도 그 학교에 가고 싶다.

우리 학교건물은 대나무로 만들어졌고, 지붕은 마른 잎으로 돼있다. 땅바닥 말고는 우리가 공부하는데 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때때로 버마 군인들을 피해 숨어야 하고, 그럴 때는 학교 대신에 나무 밑에서 공부한다.

나는 이따금 이런 일 때문에 부모님에게 불평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작고 볼품 없는 학교지만, 좋은 선생님이 계시고 좋은 교육을 받고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학교를 졸업하겠다고. 언젠가 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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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독재정권과 다양한 소수민족 무장세력간의 전쟁으로 국경주변의 상당수 어린이가 납치되고, 다치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하고, 장애인이 됐다. 많은 어린이가 가난하고 참혹한 생활형편에 내몰려 군인이 되거나, 짐꾼, 하인이 되거나 정부와 반군을 위한 스파이가 된다. 추정하기로는, 버마군대에는 18세미만의 아동군인이 5만에서 8만명 가량 있다. 소수민족 무장세력 쪽에는 얼마가 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Shan족, Karen족, Karenni족, Mon족이 사는 지역에 있는 피난민에 대한 조사에서 15세미만의 어린이나 피난민의 40%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타이에 있는 Karen 난민캠프에서는 12세미만의 어린이나 십만명 인구중의 38%를 차지하고, Karenni 난민 캠프에서는 14세미만 어린이가 약 8천명으로 인구의 36%이다.

무력분쟁속에서 어린이들은 온갖 형태의 폭력을 경험한다. 이 어린이들은 더 이상 숲 속에서 나비들과 놀 수 없고, 죽거나 장애인이 된 부모를 대신하여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그 결과 인신매매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인권침해의 피해자가 된다. 인신매매는 이 이 어린이들을 치앙마이, 방콕, 그리고 기타의 "문명화된" 도시의 어두운 뒷골목으로 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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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어린이글 2

류은숙  (2004-11-11 11:46:34, Hit : 679, Vote : 70)
Subject  
   난민어린이 글2
Naw Mu Jae (11살, 1학년)

나는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 고향은 평화롭지 않았다. 우리 마을은 불태워졌고 우리는 쫓겨났다. 그래서 여기 와있다. 내가 여기 왔을 때, 사람들이 쌀과 소금과 어묵과 옷을 가져다줬다. 나는 너무 좋았다.

여기 있으면서 나는 아주 행복하지만, 가끔은 아주 비참하기도 하다. 우리 학교와 마을은 연거푸 불태워 무너졌다. 나는 너무 무서웠고 정글에 숨었다. 나무 아래 땅바닥에서 모기와 벌레들에게 물리면서 자야했다. 공포와 걱정이 내 인생의 친구가 됐다.

이제 나는 학생이다. 아침에, 나는 학교친구들과 놀러간다. 학교가 문닫으면, 전혀 재밌는 일이 없을 거다. 집에만 있어야 하고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 나는 학교에 가고 싶다. 선생님은 친절하시고 나를 사랑해주신다. 나도 언젠가는 선생님이 돼서 우리 선생님이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을 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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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센 사람들이 일으킨 전쟁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90%는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이고, 이들 중 절반이 세계의 어린이다. 요즘에도, 적어도 50개 나라에서 어린이들이 어른들의 무력 분쟁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지난 10년동안, 세계적으로 적어도 6백만명의 어린이가 전쟁으로 인해 장애인이 됐고, 2백만명이 죽었고, 백만명이 넘는 어린이가 가족과 이별하거나 고아가 됐다.

매년, 8천명에서 1만명의 어린이가 대인지뢰에 희생되고 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3십만 명의 아동군인과, 1천3백만 명의 국내유민인 어린이와 1천만명의 난민 어린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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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어린이글 1


Name  
   류은숙  (2004-11-09 20:07:56, Hit : 741, Vote : 72)
Subject  
   난민 어린이 글 1
*다음 글은 '국경 없는 친구들'이 발간하는 잡지에 실린 난민 어린이의 글입니다.

Saw Tu Lu, 14살, 3학년

나는 Ker Lee HLu Kee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농부였다. 내겐 누나 한명과 형 세명이 있다. 나는 막내다.

내가 어렸을 때, 버마 군부가 강제로 마을사람들을 짐꾼으로 데려갔다. 내 아버지는 너무 나이가 많으셔서 무거운 것을 감당할 수 없었고, 그래서 매를 맞으셨다. 아버지와 다른 마을 사람들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고향과 땅을 떠날 수 없으셨다. 그때 우리는 견뎌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버마 군인들은 우리에게 고향을 떠나도록 떠밀었다.

우리는 Swe Koh 마을로 도망쳤다. 그 마을에는 학교와 병원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학교에 다녔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아버지는 병이 드셨고 결국 우리를 남겨둔 채 돌아가셨다. 가끔씩 버마 군인들과 DKBA(Democratic Karen Buddhist Army)가 와서 우리 마을을 또다시 부쉈다. 우리는 Moei 강을 건너서 타이로 도망쳤다. 거기에는 타이 군인들이 있었고, 그 군인들은 우리를 Bae Gloh 난민 캠프로 데려갈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무서워서 그들의 자동차를 타지 않으려 했다. 어머니는 난민 캠프에서 사는 것을 무서워하셨다. 많은 마을 사람들도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강을 다시 되돌아 건너가기로 했고, 해방구에 있는 Ler Per Her 마을에 모였다.

Ler Per Her 마을에서는 학교와 병원을 다시 갖게돼서 행복했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간은 너무 짧았다. 군인들이 쫓아왔고 우릴 공격했다. 또 한번 나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타이로 도망쳤다. 군인들이 가버리고 나서 우리는 돌아갔다. 하지만 거기서 나는 우리 집과 학교를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들이 모두 불태워버렸다.

우리는 남쪽으로 좀더 내려갔다. 나는 마을 사람들이 집과 학교와 병원을 다시 세울 때까지 나무 아래서 공부해야 했다. 우리는 그곳을 New Ler Per Her 라고 불렀다. 형들과 누나는 결혼해서 나갔다. 그래서 집에는 어머니와 나만 남았다. 어머니는 아주 나이가 많으셔서 나는 어머니가 음식 구하는 일을 도와야 했다.

어느날 나는 친구들과 함께 새와 쥐를 잡으러 갔다. 어둑해질 때,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내 친구들이 앞장섰고 나는 뒤따랐는데 나는 지뢰를 밟았다. 친구들이 마을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다. 마을 사람들은 타이에 있는 병원으로 나를 보냈다. 내가 회복되자 학교에 다시 보냈다. 하지만 내 다리는 더 이상 똑같지 않았다.

모든 선생님들이 나를 도와주신다. 난 더 이상 부끄럽거나 나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지 않는다. 매일 밤, 숙제를 하고 나서 잠자기 전에, 나는 기도한다. 우리를 모든 해악에서 보호해달라고,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나처럼 피난 다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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