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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go.jinbo.net/mybbs/view.php?board=cool&id=33532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는 현재 페미니즘류나 노힘이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노동해방과 여성해방의 관계를 하나로 보이는 것이고, "계급모순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여성"문제라고 표현하는 노힘의 주장과 사고들이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건설 토론회 발제문에서 보여준 노힘의 변혁전략이 애매모호하고 불철저한 개량주의의 모습으로, 기존 민노당이나 진보신당과 별반 차이가 없는 노선으로 비치는 것이다.
[노동해방실천연대 펌]
구체적인 역사적 실례를 통해 본
노동해방과 여성해방과의 관계
대리운전노동자
김광수 동지의 글*과 노힘 여성동지들의 문제제기로 발단이 된 해방연대 사이트 내 여성해방 논쟁을 지켜보며, 나의 견해를 몇 가지 피력해 보고 싶다.
* 노힘아가씨와 민투위 건달들
http://www.pwc.or.kr/webbs/view.php?board=pwc_5_1&id=22943&page=11
우선 나는 논쟁을 지켜 보며, 내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과 일치하는 주장을 펴는 글들에서는 공감도 많이 했지만,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내용들을 술술 풀어내는 글들을 보며 내가 가지고 있는 남성으로서 부족한 면들을 많이 배우기도 했다.
우선 나는 여성해방문제에 대하여 '주시자'님의 견해*에 기본적으로 공감과 동의를 하며, 같은 입장을 지향한다.
* '아류 페미니즘' 척결해야
http://www.hbyd.org/zboard/view.php?id=hbyd_freeboard&page=3&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023
내가 생각하는 여성해방문제를 내 나름대로 한 번 정리해 보겠다.
나는 여성해방문제를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이란, 여성억압의 기원문제를 사회적 역사적(생물학적 아니라) 문제로 보는 데서 기본적으로 출발한다.
이 여성억압의 기원문제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이 매우 중요한데, 이 기원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후 여성해방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상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원 문제를 앞서 지적한 대로 역사적 사회적 문제로 보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에서 벗어난 것이나 다름 없다.
그 다음, 페미니즘류와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이 갈라지는 지점이 기본적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기원문제에서 비롯되지만, 항상 여성해방 논쟁의 중심에는 여성문제가 계급론으로 환원되느냐 되지 않느냐의 문제로 제기된다. 이번 해방연대 사이트 내의 논쟁도 중심은 이 문제이다.
그런데 나는 이 문제를, 우리들이 앞서 지적한 여성억압의 기원문제를 제대로 이해해 낸다면 쉽게 풀어낼 수 있는 문제인데, 다른 동지들은 특히 노힘 동지들(내지는 지지자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곰곰히 생각해 봤다. 왜 오늘날 여성해방문제가 논란이 많고 입장이 다양한가를............
나는 이 문제를 이렇게 본다. 즉 페미니즘류가 생각하는 사회 변혁의 상(像)과 혁명적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변혁의 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사회 변혁의 상이 다르기 때문에 여성해방문제에 대한 접근이 다른 것이다.
나는 이 문제의 해답을 인류 역사상 노동자 권력이 들어섰던(잠시나마)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에서 찾고자 한다. 인류 역사적으로 경험한 구체적인 역사적 실체에서 우리들의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이 설득력을 갖기 때문이다.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과정과 여성해방문제의 구체적인 실체를 살펴보기 앞서 먼저 상기하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혁명적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자들의 다음과 같은 기본 인식이다.
"역사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여성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 사회적 대변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회의 진보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정확히 측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칼 마르크스, <쿠겔만 박사에게 보내는 편지>, 1968.12.12.)
"모든 해방운동의 경험이 보여주듯이 혁명의 성패를 좌우는 것은 여성이 혁명에 얼마나 참여했는가이다."(레닌)
"한 사회의 여성,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태도에 의해 그 인간 사회를 평가할 수 있다...삶의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여성의 시각으로 그것을 보는 것을 배워야 만 한다."(트로츠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지금부터 아래 [ ] 안에 있는 내용은 하니 로젠버그, <소련여성과 페레스트로이카> (한울,1991)을 요약발췌한 것이다. 여성해방과 노동해방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논증하기 위해, 그리고 노힘이 주장하는 "계급모순으로 환원되지 않는 여성문제"라는 인식이 왜 문제이고 틀린사고인가를 살펴보기 위해 좀 장황하게 인용하더라도 양해 바란다.)
[1917년 세계여성의 날(2월 23일)에 페트로그라드 여성들은 파업을 강행하기로 결정하고 파업에 돌입했다. 당시에는 전쟁 관계로 여성노동자들의 비중이 매우 높은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 의식을 가지고 있다던 볼세비키 조차 이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냉담했고, 당시 볼세비키 당 페트로그라드 지역위원회 지도자였던 까이우로프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했다는 점이다.
볼세비키가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에 팜플렛을 통해 지지 입장을 표명한 것은, 이틀이 지난 2월 25일에서야 였다. 이것은 혁명적 지도는 때로는 상황에 뒤처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트로츠키는 훗날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묘사했다.
"2월 혁명은 그 자신의 혁명 조직의 저항까지도 극복하면서 아래로부터 시작되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중에서도 가장 억압받고 있던 여성 방직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혁명의 불을 당겼다. 그들 중에는 남편을 전쟁터로 떠나보낸 군인의 아내들도 많았을 것이다. 빵을 사기 위해 서야 했던 긴 줄이 최후의 자극이 되었다. 그날 약 90,000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동참했다. 여성노동자들과 주부들은 지방희회로 몰려가서 빵을 요구했다. 그것은 숫염소에게 젖을 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도시 곳곳에 붉은 깃발이 나부꼈고 깃발에 적힌 구호들은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빵이요, 원치 않는 것은 전제군주와 전쟁임을 보여주었다. 여성의 날은 성공 속에 지나갔다. 분위기는 고조되었고 희생자는 없었다. 황혼이 깃들일 때까지도 그날의 시위가 잉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다."(러시아혁명사, 1934)
운동이 성공하려면 군인들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어야 했다. 그 일 역시 여성들이 아주 훌륭하게 영웅적으로 해냈다. 트로츠키는 말했다. "그들은 남자들보다 더 대담하게 군인들 앞으로 걸어가서는 총을 손으로 잡은 채 거의 명령하듯이 호소했다. '무기를 버리고 함께 합시다.'" 2월 27일 밤이 되자 황실 수비군 150,000명이 몽땅 탈영했다. 같은 날 노동자 소비에트 대표자회의가 구성되었고, 3월 3일 짜르는 물러났다. <프라우다>는 찬양했다. 여성 만세! 세계 여성 만세! 세계 여성의 날, 가장 먼저 폐트로그라드 시가지로 뛰쳐나온 것은 여성이었다.....여성 만세!
대기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계약서, 법률 서적, 블랙리스트는 갈가리 찢겨 나갔다. 여성 노동자들이 가장 즐겨 썼던 방법 중의 하나는 사장(자본가!)을 바퀴가 하나 달린 손수레에 싣고 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멋진 상징이 아닐 수 없었다. 항상 노동자들을 모욕하던 자에게 그 모욕을 되돌려 준 것이다. 비보르크 방적공장 사장은 노동자 총회 자리에 나타나 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지 설명하려고 애썼지만 여성 노동자들은 불경스럽게도 그를 번쩍 들어 수레에 싣고서 수로(水路) 쪽으로 끌고 갔다. 둑 가장자리에서 수레를 멈추고 임금인상 동의서를 내밀자 그는 벌벌 떨면서 서명했다.
2월 혁명이 시작되고서 '공장위원회'들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 주역은 대개 월급이 높은 숙련 노동자들이었다. 공장위원회는 당시의 노동자계급 내부 관계의 축소판이었다. 공장위원회 위원들은 6개월마다 선출되었는데 노동자들이 소환을 결정할 경우 그 결정에 따라야 했다. 최종 결정권을 지닌 최고 기구는 자주 개최되던 총회였고 총회는 자신이 권리를 아낌없이 행사했다.
공장위원회의 첫번째, 경제적 요구는 8시간 노동, 최저생계비 보장과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투쟁했던 기간에 대해서도 임금을 지급하라는 것이었다. 여성들은 특히 8시간 노동 관철에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노동시간은 여성은 7,8시간으로, 남성은(1시간의 연장 근로 시간을 포함하여) 8,7시간으로 놀랍게 단축되었다.
그와 동시에 처음에는 군수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그 다음엔 방직과 그밖의 여성 사업장에서 구성된 공장위원회 안에서 볼셰비키의 영향력도 성장해 갔다. 방직공장들에서 공장위원회가 처음 결성될 당시에는 위원들의 대부분은 당원이 아니었다. 예컨대 스코로호트 신발공장에는 40명의 위원이 있었는데, 단 한 명의 여성만이 볼셰비키 당원이었다. 그리고 코제브니코프 방직공장의 공장위원회 의장은 당원이었으나 나머지 5명의 여성과 2명의 남성은 당원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빠르게 바뀌었다. 5월경에는 볼세비키 당원과 그 지지자들이 대부분의 공장위원회뿐 아니라 페트로그라드 노동조합 평의회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9월에 열린 최초의 전국 방직 노동자대회에서는 볼세비키가 절대 다수였다.
어떠한 혁명에서든 노동자 지도부는 노동자계급의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단결에 힘쓴다. 그것을 위한 주요한 조치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을 상대적으로 많이 올림으로써, 즉 더 큰 평등주의로 나아감으로써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 격차를 크게 줄이는 것이다. 특히 여성이 그러한 조치 덕분에 많은 이익을 보았다. 1917년 2월부터 5월에 이르는 잇따른 파업의 결가로 숙련공의 임금은 59%, 미숙련공의 임금은 125% 인상되었다. 페트로그라드 종이공장 노동자들은 남성 214%, 여성 234%의 임금인상에 성공하였다.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위한 또 다른 조치는, 공장위원회를 만든 숙련노동자들로 하여금 여성 노동자들의 폭발적이고 격렬한 투쟁성을 조직적인 노동운동으로 이끌도록 한 혁명가들의 노력이었다. 여성 사회주의자들도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1917년 4월에 50여 명의 노동자계급 여성이 만나 여성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하였다. 레닌은 국내로 돌아온 4월에 여성내에서의 정치할동에 대한 중앙위원회의 지지를 구하는 데 힘썼다.
주로 얼마 안 되는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놀랄만했다. 혁명이 시작된 2월에는 거의 황무지 상태였던 방직공장, 식료품 공장 등에서 거의 빠짐없이 조합이 생겨났다. 실제로 여성의 조합 참여율은 남성의 경우보다 높았다. 식료품 공장과 방직 공장에서 여성의 비율은 66~69%였으나 전체 조합원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70~80%에 이르렀다.
혁명을 지키기 위한 공장 민명대가 창설되었고, 여성 노동자들도 순번에 따라 돌아가며 민명대 일과 공장 일을 했다. 그러나 혁명이란 한들 몇 백 년에 걸친 뿌리 깊은 편견들을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죽은 세대들의 낡은 습관이 산 사람들 머리에 악몽처럼 매달려 있다."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이 후진적이며, 조직이 안 돼 있고, 계급의 진보를 방해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노동자 조직을 대변할 수 있는 지도자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고질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노동자들 또한 그러한 편견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노동자 조직을 대표하는 여성 지도자의 수는 여전히 적었다. 방직 노동조합 평의회 대표 15명 중에 여성은 2명뿐이었다. 트라이앵글 고무 공장에서는 전체 노동자의 68%가 여성이었는데도 공장위원회 위원 25명 중 여성은 2명밖에 되지 않았다. 페트로그라드 전체 노동력의 절반이 여성 노동자였건만 3월 26~27일에 열린 소비에트 대회에 참석한 4,743명의 대표 중 여성 대표는 259명이었다. 다른 도시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여성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행위가 횡행했다. 파이프 공장의 어느 여성 노동자는 이렇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후진적인 노동자들은....여성이 일반 대중을 지도,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한다. 그들은 대표로 선출된 여성 노동자들에게 동물에게 하듯 손가락질을 하면서 '저기 우리 대표님께서 지나가신다'라고 비꼰다."
2월혁명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근본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했다. 여성 노동자들이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파업을 벌이기도 하고 푸틸로프 화학공장을 비롯한 몇몇 공장에서는 저임 노동자들의 파업이 저임 노동자 대표자 대회의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남녀 차별이 워낙 뿌리 깊었던 탓에 볼세비키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실현되지 못했다. 실업이 점차 증가하자 몇몇 공장에서는 여성을 과잉 인원으로 몰아 쫓아내려고 들었다. 볼세키비는 그것이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 투쟁을 벌였으며 그러한 투쟁을 계기로 볼세비키의 영향력은 크게 신장되었다.
10월이 가까워질수록 노동조합에 가세하는 후진적 노동자들의 수는 늘어만 갔다. 여름 동안에는 세탁소, 식품 조달 공장, 염색 공장 등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그들 대부분이 후진 노동자였다. 경험도 전통도 없었지만 그들은 스스로 '파업위원회'를 조직하였고, 다른 파업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광범한 요구들을 자신있게 내걸었다. 노동자의 힘과 자신감이 강해질수록 노동자들은 점점 더 혁명의 성과물들을 빼앗기고 있다고 느끼게 되고 임시정부에 대한 환상을 떨쳐버리게 되었다. 혁명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계속되었고 자본주의 또한 계속되었으며, 물가는 하늘을 찌를 듯 치솟기만 했고, 어떠한 개혁이든 파업을 통해서만 쟁취될 수 있었다.
10월혁명의 산물로서 마침내 노동자들과 억압받는 모든 사람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부가 세워졌다. 트로츠키는 말했다.
"혁명은 무엇보다도 인간성에 대한 자각이었다....과거에 2중 3중으로 노예살이를 해 온 여성이 개인과 사회의 진보를 향한 길로 나서도록 힘과 수단을 다해 돕지 않는 혁명은 혁명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권력을 장악한 볼세비키의 임무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후진적인 대중을 일깨워 스스로가 사회체제를 운영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레닌의 유명한 문구, "모든 요리사가 지배하도록" 처럼 말이다.
"모든 해방운동의 경험이 보여주듯이 혁명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여성이 혁명에 얼마나 참여했는가이다." 레닌이 말했듯이 혁명의 성과를 측정할 수 있는 잣대는 여성의 참여도이다.
혁명 이후 며칠 동안 많은 포고령이 선포되었다. 거대한 나라 러시아는 함흑의 시대로부터 가장 진보한 사회체제로 도약했다. 혁명 첫 해 동안 발표된 여성 관련 법령들은 여성의 권력를 크게 신장시켰다. 여성의 선거권이 완전히 보장되었고(당시에는 여성의 완전한 선거권을 갖고 있던 나라는 노르웨이와 덴마크 뿐이었다.), 가장의 권위주의에 종지부가 찍히는 한편 이혼의 권리가 확립되고, 시민법에 의해 결혼 관계가 자유 의사에 의한 관계로 변화되었으며, 사생아와 적자 사이의 차별이 금지되고, 동일임금(마침내!), 동등한 취업권, 출산 휴가가 주어졌으며, 간통과 근친상간과 동성연애를 형법상의 범죄로 다루지 않게 되었다.
1920년에 세계 최초로 임신중절권이 확립되었다. 1923년에는 몇몇 과학자들로 피임 연구를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피임 기구가 각 병원, 조산원, 여성 상담소에 비치되었고, 약국에서도 그것을 판매하게 되었다.
노동에 관한 법령도 광범하게 선포되었다. 혁명 4일째인 1917년 10월 29일 8시간 노동제가 공표되었으며, 여성에게 8시간 이상의 노동을 시키는 것이 금지되었다.
여성과 미성년자를 보호하기 위한 포고령도 선포되었다. 여성과 미성년자를 유해, 위험 작업이나 지하작업, 야간작업에 종사시킬 수 없게 되었고 시간외 노동은 규제되었다.
잇따른 포고령들이 집약되어 노동법으로 성문화되었다. 1922년의 노동법은 노동자 일반과 특히 여성 노동자의 해방에 대한 열망에 활력을 부여했다. 노동법의 목적은 여성들이 노동을 통해 남성과 평등한 존재로, 또 독립된 존재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이었다. 여성해방이야말로 노동법의 으뜸가는 목표였고 생산의 필요성은 그 다음이었다. 노동법은 살아 움직이는 대중의 참여에 힘입어 성취되었고, 훈련 프로그램과 사회보장제도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1920년대에 마련된 모자 복지를 위한 사회보장 규정은 그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앞선 것이었다.
산전 8주, 산후 6~12주의 유급 출산휴가제도가 실시되었을 뿐 아니라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신생아 수당에다 한 달 월급의 1/4 해당하는 보육 수당까지 받게 되었다. 젖먹이를 둔 엄마에게는 3시간 30분마다 30분씩 적을 먹일 수 있는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소련이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으로 페허가 되었음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조치들은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의 놀랄 만한 위업이 아닐 수 없었다.
1923년 11월 14일에 노동인민위원회와 최고경제위원회가 내린 지시에 의해 4.1kg을 초과하는 짐을 운반하는 일만 하는 작업에 여성을 고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여성의 정규 작업과 직접 연관된 경우에 한해서, 또 운반작업이 하루 노동시간의 1/3을 초과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 최고 16.4kg까지의 짐을 운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 보호법이 실천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대규모 감시기도 설치되었다.
여성을 옥죄는 가정 내 환경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공격이 가해졌다. 레닌은 이러한 운동들을 지지하면서 가사노동에 얽매이게 되면 잠재능력을 발휘할 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여성들은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혁명의 대의를 이해하거나 그것에 동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콜론타이는 여성의 삶에서는 '부엌과 결혼의 분리'가 '국가와 교회의 분리'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소위 '여성의 일'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공공시설이 만들어졌다. 조산소, 탁아소, 세탁소 등이 그것이다. 미혼자와 부부가 함께 살 수 있는 공공주택들이 지어졌는데, 그것들은 사설 아파트보다 우수하였다. 1919~1920년에 페트로그라드 주민의 90%와 모스크바 주민의 60%(총 1,200만 명)가 공동식당에서 식사했다!
제정 러시아에서 만연했던 매춘도 혁명 이후 모습을 감추었다. 새로운 도덕적 분위기는 인간의 존엄성을 높여 주었고 성을 사고 파는 행위는 근절되었따. 부르주아지는 배격되었고 그들의 돈은 몰수되었다. 매춘 여성은 계급사회의 피해자로 규정되어 이전처럼 범죄자 취급을 받지 않았다. 레닌이 말했듯이 "그녀들이 생산적 노동으로 복귀하여 사회경제 속에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다. 매춘 여성들을 위한 협동작업소들이 모스크바, 페트로그라드 등의 도시에 세워져, 그녀들에게 바느질과 그밖의 기술을 가르쳤다. 그녀들은 지속적인 검진을 받았고 성병 퇴치를 위한 캠페인이 강도 높게 전개되었다.
볼셰비키는 여성을 일깨우고 지도할 수 있는 조건들을 창출하는 한편 그를 위한 위한 조직으로서 당내에 여성분과(제노텔)를 설치하였다. 제노텔의 초대 의장은 이네싸 아르망이었고 그 다음이 콜론타이였다. 제노텔은 1918년 11월에 열린 여성대회에 힘입어 탄생했다. 그날 대회는 예상된 300여 명보다 훨씬 많은 1,147명이나 참석한 가운데 열띤 분위기 속에서 성황리에 치러졌으며 레닌을 비롯한 당 핵심 인사들이 참석해 축사를 했다.
제노텔은 여성의 정치 참여를 반대하던 과거의 편견에 영향을 받아 1920년까지 7,4%에 불과했던 볼세키비 내 여성 당원을 늘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지역에서 전국에 이르기까지 각급 수준의 대표자 회의를 통해 당원 아닌 여성들이 공공 관심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 역시 제노텔의 목표였다. 되도록 많은 여성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되는 가운데 노동자 열 명에 한 명, 가정부부와 농민 백 명에 한 명꼴로 대표가 선출되었다. 대표로 뽑힌 여성들은 한 달에 두 번 회합을 갖고 훈련된 당원의 지도하에 정치학습을 했다. 그것은 거대한 사업이었고 제노텔은 그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이 구체적인 사회변혁기에 나타난 노동해방 문제와 여성해방 문제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인 하나의 실체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여성해방문제를 결코 노동해방문제와 분리해 사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둘은 '결함된 하나의 과정'이었다.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보여준 러시아 여성노동자들과 선진적인 러시아 노동계급의의 단결과 투쟁의 힘,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여성해방의 상(像)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내용들이었다. 머리 속으로 관념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닌, 오로지 실천적 투쟁을 통해서만 만들어내 낼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들은 노동자권력의 쟁취없이는 상상조차 살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노동자권력만이 그러한 혁명적 여성해방의 내용을 담보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또한 주목해야 할 점은, 1917년 10월 노동자권력을 쟁취했다고 해서 '계급'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프롤레타리아독재란 '계급'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당연히 노동자권력이 쟁취가 곧 여성해방의 완결이 아니라는 것이다. 혁명이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사회적 생산력이 높아져 나갈 때 계급(class)이 국가(역사적 산물로서의 state)과 함께 사라져 갈 것이며, 잔존하는 여성억압 내지는 차별의 문제가 점차 사라져 갈 것이다. 그래서 여성억압 문제의 기원문제를 계급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사회적 역사적 관점이라고 보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이 일관성이 있는 주장이고 유효한 것이다.
지금 페미니즘류나 노힘이 보지 못하는 것은, 사회주의 변혁에 대한 구체적인 상(像)이다. 다시말해 사회주의 변혁이라는 것, 노동자권력의 쟁취라는 것이 기존의 (자본주의적) 사회적 관계들이 온존(혹은 부분적인 변화)한 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들은 사회주의 변혁 즉 노동자권력 쟁취과정과 여성해방문제를 분리시켜 별개의 과정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의 단적인 하나의 예를 가지고 얘기해 보자. 즉 앞에서 살펴본 러시아 혁명과정에서, 가사노동의 예를 보자.
"1919~1920년에 페트로그라드 주민의 90%와 모스크바 주민의 60%(총 1,200만 명)가 공동식당에서 식사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지금 우리들의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상상해보자. 감히 상상이나 되는가? 페미니즘론자들이 여성해방문제를 주장하면서 감이 이렇게 까지 생각해 보았는가? 그리고 문제는 인류 역사상 실제로 이런 현상이 나타났었는데도, 사회주의 변혁(혁명) 또는 노동자(민중-노힘의 표현)권력 쟁취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고 까마득하게 잊고 있다는 점이고, 그러면서 "계급적 여성주의로 설명되지 않은 특수성" 운운하며 계속해서 동어반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사회주의 변혁의 像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다시말해 이러한 형태의 가사노동 육아노동 등의 사회적 수반 없이는 노동자 권력의 쟁취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사노동해방없는 여성해방 있을 수 없고, 여성해방 없는 노동해방, 노동자 권력쟁취는 있을 수 없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앞에서 하나의 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사회주의 변혁(곧 노동자권력의 쟁취)의 상(像)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는 현재 페미니즘류나 노힘이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노동해방과 여성해방의 관계를 하나로 보이는 것이고, "계급모순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여성"문제라고 표현하는 노힘의 주장과 사고들이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건설 토론회 발제문에서 보여준 노힘의 변혁전략이 애매모호하고 불철저한 개량주의의 모습으로, 기존 민노당이나 진보신당과 별반 차이가 없는 노선으로 비치는 것이다.
(이 글은 지난번 사노련 사이트에서 내가 노힘의 당건설 토론회 발제문에 대한 문제제기 글과, 그 글에 대해 바로 그 아래 '노동자'라는 이름(나는 '노동자'라는 분이 글의 내용으로 보아 노힘의 핵심관계자로 파악하고 있다)으로 답글을 달아 반론을 폈는데, 이글은 그 글에 대한 나의 재반론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아울러 밝힌다.)
[본문 출처]
http://www.hbyd.org/zboard/view.php?id=hbyd_freeboard&page=3&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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