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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도 책 읽어주는 남자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읽지 못하는 세계를 스스로 고민하고 해석하기 보다는 똑똑한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은 적이 많았다. 나보다 지적으로 우월한 그 누군가는 분명히 남성일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하여튼 그의 음성을 통해 사랑 뿐만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면,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나도 행복감에 빠져들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이유는 너무도 많지만 치명적으로 그녀는 글을 읽지 못한다.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책을 읽어주는 남자와 듣는 여자, 영화 속 장면은 행복한데 나는 왜 이 대목에서 슬픈가? 책은 마치 또 하나의 권력처럼 느껴진다. 아름답고 연륜있는 그녀가 갖지 못한 능력, 훨씬 어린 남자는 그것을 갖고 있음으로써 그녀와 동등해지거나 오히려 우위에 서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세상의 기준에 꼭 맞게 보이지 않는 그들의 관계는 적절한 시점에 그녀가 떠남으로써 끝난듯하다. 그런데 그녀는 어느덧 유태인 수용소의 충실한 감시원이 되어 교회 안에서 타죽는 수많은 사람들을 내버려둔다. 감시 - 그것이 그녀의 임무였으므로. 정작 책임자도 아니면서 스스로 책임을 인정하고 유태인 학살의 주범으로 재판 과정에서 죄를 뒤집어쓰게 된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녀, 지켜보던 남자는 소리없이 절규한다. 그녀의 잘못은 무엇인가? 무지함 또는 무관심 - 그녀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과 세상에 대해서. 그러나 그랬던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음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그녀와 법대생으로 참관하는 그, 둘 사이의 거리는 참으로 멀게 느껴진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변호사가 된 그가 보내온 테이프를 통해 마침내 그녀는 스스로 글을 읽고 쓰게 된다. 그리고 수년만의 만남임에도 아직도 정의와 그녀에 대한 감정속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뒤로 하고, 그동안 둘 사이를 이어온 소중한 책들 위에 올라서서 자살하고 만다.
보고 나서도 가슴이 설레듯 아리듯 잠 못 이루는 영화가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바로 이런 영화 말이다. 왜일까? 감성적인 여자들이 흔히 그러듯 내게도 결핍된 지식에 대한 열등감으로서 지적인 허영심이 존재한다. 당연히 똑똑한 남자가 멋있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잘난 척하는 꼴은 차마 못본다. 나를 넘어서는, 그러나 나를 뛰어넘지 않을 정도의 부드러운 지적 능력.. 얼마나 유치한 생각인가. 그렇게 부러우면 스스로 똑똑해지면 그만인데 말이다. 도넘게 천재수준을 원하지 않는 한 따지고 보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닌 것을ㅋ 하여튼 현실에서든 영화에서든 순진하고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여자와 지적이고 멋진 남자의 공식은 아주 질릴 지경이다. 실제로 사제간도 아닌데 언제어디서든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싶어하는 남자들과 당연하듯 질문해대는 여자들, 그 틈에서 내 어중간한 감수성과 지식은 늘 밀리게 마련이다. 그럼 나는 어느 쪽일까? 책을 읽어주는또는 듣는 - 물론 어중간하다 그러나 사실 둘 다이고 싶다. 어느 한쪽이든 일방적이지 않고 서로가 좋아하는 책을 함께 읽어 주고, 듣고 싶다. 같은 여자들끼리도 좋지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신나겠지. 아, 언젠가 나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랑하는 그와 함께 책 읽을 수 있기를.. 그때 이 영화도 다시 봐야지. 물론 그이와 같이ㅋ
영화속 그녀는 너무 아름답고 슬프다. 그녀는 살아서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더 많이 사랑했어야 했다. 용서는 그렇게 구해야 한다. 죽음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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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es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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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그리고 결정!부가 정보
포카혼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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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새겨지는 발자국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