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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으로서의개념은야생적상태에의사물들자체로정의된다 이것은원초적부재의장소며이것을통해차이와반복이라는책은어떤근접의정합성으로서의일관성을가진다.
표정의문제또는표면의문제하나의표정이어떤방식으로미끄러지는가하는문제는일종의생태적심리학현상학의문제처럼보인다표정은우리가지각하기어려운미분율로항상미끄러지기때문에그것이매번어떤생태적결정을함축하는지파악하기힘들다 그것들은심층과에네르기층어딘가에서뭔가가되고있다 그효과는시실상측정불가능한영역에서드러나는데이것은필연적으로이분법의가상을초래한다 이분법은여기서단순히심신이아니다 이분법은일종의층간에서유추된다 지질학적효과또는고고학적변형인것이다 사실이러한공간적인유비는위험하다 왜냐하면표면의효과란단순히선분화와그것의적분으로환원되지않기때문이다그것은가장먼거리에서오히려더자주서로의효과를더능숙하게교환할것이다
서양철학전통이환경윤리나환경정의에관한최소한의모범도되지않는것처럼보이는것은인간중심주의의문제라기보다는타자개념에대한협소한이해라고보는것이더정확하다 애초부터자연은이타자의함축에들어와있지않았던것이다 그렇다면환경과타자성은역사적인근대성의발생과더밀접하게연관된문화와그위기라는맥락에서더잘이해될수있다 데카르트적인또는성서적인맥락에서는사실자연이란일종의맹점인것이다 따라서환경위기는직접적으로근대성의문제,이론적인동시에역사적실천의문제가된다
환경위기는그결과가먼저심각한위기로인지가능하게됨과더불어비로소의제가된것이다 이렇게되고서야인간은자신을둘러싸고있는환경을타자의범주안에포함할수있게된것이다 우리는환경문제에관해근대성담론을단죄할증거가없다 오히려지금여기타자를제대로인식한우리세대야말로그윤리적잣대로평가될수있다 환경문제는개념의역사적확대과정을노정하는문제며그래서이것은지식(science)이아닌지혜(sage)의문제가된다.
천안함사건은영구미제사건이될가능성이커보인다 국방부조사는현재전혀신뢰할만한결과를내놓지못하고있는데특히외부공격가능성외의다른해석을하나씩차단해가는모습에서더그렇다 객관적시각에서보면천안함은좌초일가능성이외부공격에의한피폭가능성보다크다 가능성의정도에서더유력한이부분을간과하는이유는무엇인가? 이런식으로해석의방향을잡아나가면서다른해석을봉쇄했을때는결과적으로모순에봉착할수밖에없다 이모순은해결불가능한어떤것이될것이고국방부조사단의결과가어떤식으로나오든의혹은풀리지않을것이다 애초에다른가능성들을쳐내왔기때문에그가능성을두고다시조사하지는않을것이고말이다 남은것은이사건을어떻게정치적으로가공할것인가하는문제만남는다 조중동이발빠르게움직이는그방향,그건이런판단하에서결정되고있을것이다
살(fresh)이란무엇일까 대부분의사람들이살에정성을들인다 근원적으로보자면그것은죽음이고소멸이다 그렇다면여기어떤역설이숨어있는것일까 소멸할것에대한관심또는지향(intention) 잠정적으로생각하자 살에대한관심은결국죽음에대한관심이다 여기 헤도니즘과금욕주의의우발성이있다 다시말해두관점의차이는본질적이지않다정도의차이다
권력(pouvoir)의 본질은 과시다. 본질은 현실화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지 않으면 권력은 히스테리 상태에 들어간다. 사실상 권력의 히스테리는 그 자체로 권력의 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은 스스로의 병력을 드러내든지 아니면 현실화되지 않는 비정상을 참아 나간다. 결절점은 여기에 있다.
비정상은 사실 권력만의 진실이고, 다중은 그 진실과는 다른 진실을 산다. 우정, 사랑, 연대, 더 가깝게는 영화, 드라마, 가족 그리고 ‘신데렐라 언니 ’ ... 정도다. 무관심과 정치는 그리 멀지 않다. 무관심은 사실상 정치적 뿌리다(무관심은 곧 삶에 대한 관심이며, 삶이 정치라는 것을 아는 순간 그 ‘무’관심이 곧 삶의 활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은 언제나 착각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권력의 진실과 다중의 진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아니, 다를 뿐만 아니라 적대적이다.
한명숙은 이러한 적대적 상황에서 그 ‘무’를 일깨우는 힘이다. 하나의 적대적 힘이 여기 녹아 있다. 천안함에 맞서는 정치적 힘 말이다. 천안함이 기뢰든, 어뢰든, 그 어떤 어중이떠중이에 의해 그 많은 목숨을 앗아갔든 권력은 관심이 없다. 다시 한번 말하자. 권력은 거기 관심이 없다. 권력의 관심은 과시다. 스스로의 힘에 대한 과시 말이다. 한명숙은 지금 그러한 과시의 한 가운데 선거를 준비한다. 선거는 과시에 비해서 너무나 힘 없다. 즉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명숙은 그 과시의 힘 앞에서 넘어질 수 있다. 천암함을 끌어 안고 가는 이 과시의 힘은 다중을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선거는 천안함의 침몰과 더불어 야권 연대의 가부를 따라 움직일 것이다.
이 움직임을 주목해야 한다. 천안함 함미가 올라 오는 순간, 정치는 어떻게 움직였는가? 천안함 함수가 올라 오는 이 순간 정치는 또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러고 보니 천암한 침몰이라는 이 전대미문의 사건이 도대체 너무 정치적이지 않은가?
MB는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동시에 그렇게 보인다, 동시에 그렇게 보이게끔 만든다. 누가? MB. 희한한 줄타기다.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지 않은, 그 말들. 천안함 함수가 올라오는 그 와중에 조중동은 함수가 의미하는 바를 벌써 말한다. 익숙하다.
이 와중에 한명숙은 시장출마를 선언했다. 여기에 지도리가 있다. 이것은 이벤트다. 더불어 MB와 다를바 없는 과시가 된다. 거울상. 여아 할 것 없는 과시의 정치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 와중에 PD 수첩이 쐈다. 최근 얼마간 지금만큼 언론이 중요한 때가 없다. 조중동은 연일 천암함에 북한을 끌어 들인다. MB는 연일 그것을 세탁해 의혹을 보낸다. 수구층은 벌써 결집했고, 그들은 표심은 결정되었다. PD수첩은 이 결정사항에 변수가 되지 못한다. 다만 합리적 진보와 보수층에 호소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이 사안은 의제 변경이다. 정치적 의제가 변화되는 것이다. 북풍은 얼마간 잠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영역은 수구 보수층이 아니다. 그들의 영해는 이미 정해졌기 때문이다. PD 수첩이 건드리는 바다는 따로 있다.
지켜볼 일이다. MB는 천안함을 밀고 갈 것이고, MBC와 다중은 검찰과 한명숙을 밀고 갈 것이다. 여기 이 길항의 한 가운데 6월 선거가 놓여 있다. 나올 만한 변수는 이제 박근혜다. 거기서 뭐가 나올 것인가? 이 공주님께서 뭐라 말할 것인가?
권력의 거짓말이 상습적으로 변할때 나타나는 현상은 해석의 선의가 해체된다는 것이다. 권력도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는데, 이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바로 끝없는 해석의 퇴행현상이다. 이제는 권력 쪽이나 권력을 비판하는 쪽이나, 해석 투쟁 안에서조차 이전투구를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애초부터 지적 양심이라는 것이 거짓말하는 권력 쪽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고, 비판자들에게도 이런 경향이 점점 더 심해진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해석 투쟁을 넘어 완연한 권력투쟁으로 진입하며, 이때 승자는 물론 권력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쪽, 즉 거짓말쟁이 권력이 될 것이다. 비판의 무기가 무기의 비판이 되는 필연성이 여기 있다.
주체화는 타자를 경유하여 객체화되거나 다시 주체화될 것이다. 완전한 객체화는 분열이나 죽음이지만 재주체화는 타자성 아래 던져진(sub-jectum) 객체화를 통해 더 풍부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는 그것이 온전하다면 그 안에 필연적으로 타자성, 객체성을 함축하며, 또한 예기한다. 타자는 주체의 인식근거이며 존재근거이고 이런 의미에서 주체는 자아와는 다르다. ...
'차이의 정치학'이 '되기의 정치학'과 다르며, 후자가 더 중요하며, 전자는 후자에 의해 구축되어야 한다는 이정우의 말은 경청할만 하다([주체란 무엇인가] p. 87).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어떻게 국가적인 방면에서 진행되는 차이의 정치학의 사각지대를 폭로하고 그것을 되기의 정치학으로 대체할 것인가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청와대와 검찰 간의 교감은 주로 법무부 장관을 통해 반공개적으로 이루어지고, 청와대 민정수석을 통해 세밀한 부분에서 살을 맞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요직에는 검찰 출신 선후배를 배치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정수석에 검찰관 별 상관 없는 문재인 수석을 앉혔는데, 이명박 정권은 옛 정석을 되살린 것이다. 초대 민정수석은 이종찬(고려대 졸, 서울 고검장 역임), 정동기(한양대 졸, 대검차장, 인수위 법무행정 간사 역임) 였고, 지금은 권재진(서울대 졸, 서울고검장 역임이다. 이정도면 이 정권이 얼마나 피에 굶주렸는지 알만하지 않은가?
현상학적자아는근원적인동일성안에서움직이는것인가차이는결국동일성이획득되는그지점에서사라지는것처럼마치그것이차이자체의운명인것처럼취급된다하긴어떤쩔학이든플라톤주의의그늘아래에서는동일한것을욕망할지도모른다.
현재한국사회정권은위기를노정중이다 북풍은그것에대한명백한증거다 문제는이바람이유월선거까지갈수있는가다 .
새폰을샀다 둘다연구에열중 얼추이런저런기능에익숙해진다 무엇보다멀티기능이된다 메모도음악들으며쓸수있을것이다 내설익은철학적사유를좀더안락하게정리할수있을것이다 4/8
하얀씨와함께벗꽃을본다 비오기저이미꽃을피웠다가후두둑떨어진꽃잎들이앞마당에누워있다 햇살가득한봄하늘 조급증때문에먼저맞이한다 조락 또는 조산 어떤것이든계절이목숨한뼘보다더길구나 우린또멀리떨어질것이고 우연이든필연이든영원히함께할자신이있다 조락이든 조산이든 말이다4/9
벗꽃예쁘게흐드러진거리에당신을남겨두고 난또먼길을간다 이렇게남겨두고갈때마다 아리다 이착하고예쁜사람을어찌남겨두는것일까 난매정하고이기적인가 잘살아야한다 당신이날믿는만큼 용기를가지고.
수원터미널에서80번을타고집으로간다 이도시는매번익숙함과낯섦을반복하는애인처럼내마음에휑하게들어찬다 한번아니몇번을지나쳐도 크게반기지않는다 한쪽에는다지어진아파트한쪽은탐조등을달고나와버스를굽어보는타워크레인 가로수들은내가고개고개를돌릴때마다사형수들처럼중얼거린다 난무죄야
아침운동은포기하고학원으로바로나선다 날씨흐리다 금연을해야겠다 정신이개운하지못하다는느낌 공부를제대로해야한다 그녀와의약속도지켜야하고말이다 인천에도착해서늘오던커피숍에자리잡았다 주말에여기올때마다늘같은자리에한외국인이앉아책을읽는다 고개를숙이고손은주머니에넣은채글ㅈ·들을꼼꼼히확인한다 책의유골을시선의솔로살살훑어나간다 잘다듬은턱수염사이로낱말들이피부를
간지럽히는듯. 4/10
수업을마치고인천지하철을탔다 반형성이어느정도되어가지만그래도여전히불안한구석이보인다 가면갈수록아이들을유지하는것에더신경이쓰일듯하다 수업내용이야하는만큼더여유있어지겠지만아이들이들고나는건내노력만으로결정되는것이아니니말이다 원장과부원장의신뢰도중요할것이다 신뢰를쌓아가면서입시에서좋은결과를낸다면이곳일도장기적으로내다볼수있을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virtus와fortuna가함께작동할것이고그것을사랑하는것이중요하다.
아주대앞카페구스또 늘오는곳이다커피맛이좋고바리스타분도친절한곳 맘은좀오락가락이다 아마결혼하기전까지는이긴장상태가지속되리라 좀있다커피숍을나서기전에큰형님에게전화를넣어야한다 여전히자연스럽진않다 삶의문제라는게철학적질문과다른계열을형성하고있다는것을배운다 그것은타자의문제고관계의문제기때문이며게다가정서적인것이다 로고스는신체를떠날수없기때문에파토스를 안고갈수밖에없을것이다 고뇌는오래머무는법이고그것이그파토스의진정성을증거하는게다 이지속되는정서의지체기간동안주체는변양을통해다양체가되기보다영점아래에얼어있게될게다 바다는어디에있을까 이갑갑한샛강이봇물터질바다말이다. 4/12
수원가는일반고속버스 커텐을비집고자꾸만햇살이브딪힌다 막여름이된듯한햇살이라니 당신을두고오는길이눈부시게산란한다 불모의땅처럼전신주가차창앞으로넘어지고 흰색차선이죽죽긋고지나는길위에 4월의햇살이픽픽쓰러진다 저들은기도하는걸까.
라캉을 인용하자면 무의식은 언어다. 그렇다면 무의식을 벗어난 의식은 무엇인가? 프로이트 이후로 중요한 것은 의식이 아니다. 무의식이 의식을 규정하고, 그로 인해 의식은 진정한 의미에서 미궁(labartine)에 빠졌다. 미궁은 미로가 아니다. 미로는 출구와 입구가 정해져 있으나 미궁은 입구에 대응하는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미궁의 끝은 괴물이며 괴물과의 대면이고 무의식의 절단된 신체와의 대면이다. 혹은 신체의 변형, 소(미노타우로스), 인간의 목소리를 내는 그 소의 형상 말이다.
생각해야 할 것은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에서 의식은 항상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긴다. 소를 죽인다. 그러나 절대 길을 잃지 않는 의식은 항상 무의식의 언어를 교란한다. 나는 지금 의식과 무의식의 자리를 바꿔 놓고 있다.
의식은 자신의 자리를 chaos에서 찾는다. 이때 개념(concept)이 등장할 것이다. 개념은 오랜 사막대 여행 후에 절을 찾은 현장법사의 가사장삼과 같다. 그것은 혼돈을 헤매다가 비로소 휴식을 취한다. 개념은 거기 있다. 현장의 몸은 개념을 벗어두고 모사(경전번역)에 열중한다. 소를 죽였지만 스스로를 회피하는 것은 무의식의 임무다. 가사장삼을 벗어 둔채로 그는 모사에 열중하고 소는 발견될 수 없다. 마지막에 가서 보이는 것은 원륭한 세계, 소도 아이도 없는 그 경지다.
그러나 이것은 초월이다. 근거를 망치에서 찾지 않고, 집에서 찾는 것. 목적을 숭배하는 것. 그런 것들 말이다. 초월은 목적론적이고, 이때 주체는 개념을 완전히 벗어나 휴식을 경멸하면서 활동할 것이다. 신이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깨달음이 서방정토로 도망간다. 귀족들은 환호성을 지르지만 민중은 염불(미륵)을 외울 것이다.
고대 그리스는 physis를 잊고 moira를 넘어 hybris를 취한다. 진보이고 동시에 쇠락이다.
나는 nomos의 등장을 플라톤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nomos는 필연이고 운명이다.
physis에서 nomos. 콘퍼드를 따르자면 여기서 주체가 나온다. 그러나 구분하자. 중세의, 근대의 주체와.
덧없음에서 주체로, 이게 더 옳지 않겠는가? 주체의 탄생을 중세 이후로 본다면 아마 신에서 주체로, 가 되었으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그러한 이행을 정당화할 것인가?
하나(one)와 여럿(plurality)에 대해 생각한다. 리꾀르는 그의 아들이 철학에 대해 묻는 질문에, 철학은 결국 이 문제, 즉 '일과 다'의 문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입장을 취하자면 '하나'의 편을 들 것이다. 입장을 반성하자면 '여럿'의 편이 될 것이다. 여기 지도리는 바로 반성이고, 그것은 더도 덜도 아니고 철학이다. 어디로 방향을 정할 것인가?
선택하라. 실존적 선택이 아니라 이것은 형이상학적 선택의 문제라 할 만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생성'이라는 오래된 문제가 또 도사리고 있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생성'이라는 산을 또 넘어야 한다. '일'이라면 발생의 문제가 있을 것이고, '여럿'이라면 '수렴'의 문제가 생긴다.
이를테면, 여기 촛불이 있으나 이것을 하나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볼 것인지(불티가 중심으로 수렴하는), 이런 저런 불꽃의 연속(다양체multiplicity로 생성하는)으로 볼 것인지.
존재론을 떠나서는 철학은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반드시 잔여(residue)가 생긴다. 해석의 잔여, 실존의 잔여, 존재의 잔여, 그리고 정치의 잔여.
중심은 잔여일 것이고, 잔여는 원륭(圓融)으로 통한다. 불이(不二), 그리고 상의상관(相依相關).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명백하다. 존재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양성과 더불어 잔여가 긍정되어야 하며, 동시에 일원론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는 이제 'to ti on'또는 ousia가 아니라 오히려 symbebekos에 가깝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인간관계의 '금'(crack)이라는 것이 있다. 과연 이 '금'이 진실일까? 난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러한 금은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단절'이다. 단절을 겪으며 나는 상처를 입고, 오랫동안 그러한 단절이 의미하는 바르 캐묻는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상황을 판단하면 그것이 일종의 이별통고이며, 한동안의 무관심이며, 또한 냉정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의 말(mot), 하나의 눈짓, 제스춰 그리고 상이한 관점들. 나는 이것들이 결국은 표면적인 단절로 귀착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한다. 그것은 일종의 운명이다.
그래서 그것을 사랑할 것인가? 심층에 이르러 그러한 단절을 이어붙이고 있는 인과성을 긍정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나의 정서에 역행하는 것,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단절을 긍정하는것. 나는 그것이 괴롭지만, 이제 긍정할 때가 된 것이다. 사랑은 표면에 있지 않고 저 깊은 곳에서 울리는 '어두운 전조'다. 사랑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는 단절이다.
26. 지젝이 레닌을 평하면서 말한 ‘실재에 대한 열정’(『레닌 재장전』Renin Reloaded)은 이른바, 피타고라스-제논이 갑론을박하는 존재론의 평면이 정치의 평면으로 대체된 결과라고 보인다. 레닌에게 실재에 대한 열정은 1917년 혁명이 강제하는 정세 속에서 헤겔의 『대논리학』을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검토 가운데 레닌은 당시의 러시아 지식인들의 플레하노프류의 속류 유물론을 비판하게 되는데, 사실 이러한 작업은 이론적 투쟁의 장에 영향을 미쳤다기 보다, 이후 전개되는 러시아의 ‘실재’ 즉, ‘혁명’에 영향을 주게 된다. 하지만 레닌 자신이 외쳤다시피(“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오늘, 아니 지금 당장 혁명을 준비해야 한다.”) 헤겔로부터 착안한 유물론의 새로운 관점이 어떤 식으로 정세를 추동할 것인지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그가 ‘무지’의 상태로 남겨 둔 그곳, peras가 아니라 apeiron이 창궐하는 그 시점에 그는 그 온전한 의미에서, ‘야만적 별종’(Savage Anomaly, 네그리)으로 변한다. 멘세비키들을 종용하면서, 때로 그들을 탄핵하면서 레닌은 스위스로부터의 개입을 시도하는 바, 이때 그가 외쳤던 것은 ‘모든 권력을 볼세비키에게!’다. 이 순전한 권력의지는 실재의 apeiron을 주체성의 내재평면으로 불러 오는 주술과 같다. 이 경우 레닌은 1848년 마르크스가 호명한 그 ‘프롤레타리아트’를 답습한다. 그리고 이 개입이야말로 레닌이 파악한 헤겔의 정세에 대한 개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헤겔을 유물론적으로 독해하면서 레닌은 부정성이 결코 ‘정신’ 안으로 수렴하는 것을 방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부정성은 바로 실재의 혼돈 자체, 정세 자체로 ‘개입’하도록 강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27. 이러한 것이 바로 실재에 대한 열정을 노정하는 주체, 혁명적 주체라고 불릴 수 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레닌주의적인 ‘개입’을 통해 사유의 의지가 도달하는 것이 결코 실재 자체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 조건은 다만 어떤 정치적 주체성의 생산을 당면한 임무로 제출하는 것일 뿐이고, 그 조건을 독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임무를 자각한 계급과 그 계급의 ‘전위’가 탄생하는 것이다.
28. 그러나 ‘개입’은 분명 하나의 금(crack)이다. 일상성을 횡단하는 주체가 만들어내는 이 금은 따라서 일상적 주체 자신을 완전히 일신한다. 혁명적 주체가 탄생하는 과정은 ‘개입’의 진리치가 얼마나 강렬한가에 달려 있다. 보통 이 개입의 진리치는 그때그때마다의 ‘슬로건’으로 정식화된다. 레닌의 ‘슬로건’에 대한 논의(On Slogans, 1917)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분석되고, 변주되었지만 여기서는 들뢰즈-가타리의 그것을 옮겨 보도록 하자.
화행론은 언어의 정치학이다. ... 레닌의 텍스트 「슬로건에 관하여」(1917)에서 출발해서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일어난 레닌 고유의 언표 유형의 형성을 좋은 예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텍스트는 이미 하나의 비물체적 변형이었다. 즉 이 텍스트는 프롤레타리아의 조건이 몸체로서 주어지기도 전에이미 대중에게서 언표행위라는 배치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도출해 내었던 것이다. 제1차 인터네셔널은 천재적인 솜씨로 새로운 유형의 계급을 “발명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하지만 레닌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단절하기 위해서 다시금 또 하나의 비물체적 변형을 발명 또는 선포했다. 이 변형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서 언표행위라는 배치물로서의 전위를 뽑아내고 다시 이것을 “당”에, 변별적 몸체로서의 새로운 유형의 당에 귀속시켜 버렸다. 비록 이 변형은 관료주의 특유의 잉여 체계로 전락해버렸지만 말이다. 이는 레닌의 대담한 도박인가?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혁명>의 평화적 전개를 위해 2월 27일에서 7월 4일까지만 유효하며, 전쟁 상태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평화에서 전쟁으로의 이행은 대중으로부터 지도적 프롤레타리아로 가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프롤레타리아로부터 지휘하는 전위로 가려고 하는 이러한 변형을 내포했던 것이다. 정확히 7월 4일에소비에트 권력은 끝난다. 이것을 외부적인 상황 탓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전쟁, 레닌을 핀란드로 도망가도록 몰아넣었던 봉기 등. 그렇다고 해도 비물체적인 변형이 귀속되는 몸체, 즉 <당> 그 자체가 조직화되기 이전인 7월 4일에 비물체적 변형이 언표되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모든 개개의 슬로건은 특정한 정치적 상황이 갖는 특수성들의 총체로부터 연역되어야 한다.” 이러한 특수성은 언어학이 아니라 정치로 귀착될 뿐이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가 얼마나 철저하게 안으로부터 언어에 작용하는지를 주목해야만 한다. 명령어(=슬로건)가 바뀌자마자 어휘뿐 아니라 구조며 모든 요소들을 변주시킨다. 한 유형의 언표는 그것이 화행론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에 따라서만 평가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 유형의 언표는 그 언표의 암묵적 전제, 그 언표가 표현하는 내재적 행위들이나 비물체적 변형과 관련해서만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직관은 문법성을 판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 자체와 관련해서 언표행위의 내적 변수들을 평가하는 데 있다.(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역, 새물결 2001, pp. 161-163)
29. 여기서 들뢰즈-가타리는 슬로건의 특성을 ‘명령’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한 후 제출되는 것이면서도, 그 정세의 확고한 어떤 주체를 ‘선취’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의 효과가 달성되는데 그것은 그 주체(프롤레타리아트)의 탄생이다. 이는 우리 식으로 말해서 ‘금’으로서의 개입을 통해 혁명적 주체가 탄생하는 데 있어서 언어적 전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 주는 일단이라고 할 수 있다. 언표주체가 언표행위주체를 생성시키는 이 과정은 일종의 실재의 탄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0. 하지만 이것은 ‘진리’와 얼마나 먼 것인가? 사실상 1917년의 러시아는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얼마나 구현하는 것인가? 과연 1917년의 프롤레타리아와 2011년의 프롤레타리아, 러시아와 남한의 그것은 또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여기서 진리는 다시 적대의 전선을 완전히 옮겨 놓는다. 언제나 허방인 이 진리, 우리가 실재를 발견했다고 소리치는 순간 탈주하는 이 진리의 자리는 하나의 수렴점으로 다가가는 어떤 입자라기 보다, 호이겐스의 파동과 같다.
18. 하지만 이것은 애초에 말했던 바와 같은 진리의 ‘현전’(Anwesen)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실화’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 하나의 정치적 계기를 통해서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공간 안에서도 발생하는 것이고, 그때 그것은 인간의 실존적 조건 안에서 단순히 나타나는(present)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일종의 ‘의사-현실화’라고 부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나타나는 대상, 또는 사건으로서의 빈자리는 결국 사라짐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전과 이 본질의 드러남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19. 하이데거라면 본질의 탈은폐와 그것의 물러남을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사건’(Ereignis)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본질은 하나의 역사성으로서 그것이 분기하는 그 지점에서 현존재를 통해 드러난다는 한계를 가진다. 하지만 진정한 현실성이란 현존재의 빠져 있음 가운데 아무리 자신의 사유의 의지를 발휘한다 하더라도 그에게 우연적으로 닥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유의 의지가 횡단하는 일상 가운데 하나의 ‘허방’이다. 사유는 허방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사유는 ‘죽음’이라는 단일한 시점을 향해 가는 것(Sein zum Tode)이 아니라 곳곳에 널린, 움직이는 그 ‘사건’의 허방을 겪는 것이다. 이것은 산포된 필연성이며, 확률적이지만 동시에 삶의 내재성 안에 편재한 충만함이다.
20. 우리는 마치 살얼음 위를 걷듯이 일상의 한가운데를 걸어간다. 거기서 무수한 타자들을 만나고 풍경들을 접하며 상이한 속도와 강도를 통해 그것들과 조우한다. 하지만 본질은 이러한 조우들 틈에 입을 벌린 금(crack)과 같다. 우리가 본질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이 금을 찾아다니는 동시에 이 금과 만나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 금과 조우한다면 금은 우리를 단숨에 빨아들일 것이고, 그 자리에 커다란 허방을 마련할 것이다. 우리는 들어온 자리를 잃어버린 채 강물 밑, 얼음 밑을 숨이 막힌 채 뒤집어진 채로 떠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진리는 본질의 드러남이라는 이 폭력적인 과정을 통해 자신을 내 보이지만, 그것은 더욱이 우리가 사유의 죽음을 무릅쓰고 견뎌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21. ‘실재’는 이 숨 막힌 순간에 찾아온다. 현실성의 강도가 0으로 육박해 가는 시점은 바로 현실성이 실재성과 옷을 바꿔 입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진리는 현실성의 안감에서 떨어져 어디론가 흘러간다. act의 속도과 밀도가 형해화되는 이 순간. 이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0도에 가깝게 만드는 그래서 그 죽음의 실재를 통해 실재를 직관하면서, 진리를 상실하는 찰나의 과정이다.
22. 하지만 이것은 어떤 특별한 체험을 이야기 하는 것인가? 어쨌든 이 유비로부터 나는 실재성과 현실성이 서로 길항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 사건은 현실성에 다가가기 위한 우회로(해석학적 우회?)이며, 본질의 드러남은 실재성에 다가가기 위한 또 다른 우회로(신학적 우회?)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실재성은 진리가 아닌 어떤 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인가? 이 질문은 또한 진리가 실재성을 미끄러져 나가는 무엇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3. 오래된 비유를 하나 더 들자. 피타고라스는 기하학적인 도형들을 산술적으로 표현했다. 이를테면 선분 AB는 하나의 일정한 단위, 즉 1로 표현될 수 있는데, 이는 산술적인 덧셈을 통해 단위-길이를 구성한다. 따라서 1+1+1=3이라는 셈은 하나의 단일한 선분 AB 내부에 a-b-c-d라는 연속된 구성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속된’이라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 피타고라스가 산술을 기하에 적용할 때 적시한 것은 바로 도형의 ‘연속성’(continuity)이 정확하게 산술적 ‘단위’(unit)에 대응(correspondence)한다는 가정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의 단서가 붙는데, 그것은 오직 그러할 때만(if and only if), 즉 ‘1이 a-b에 대응할 때, 오직 그러할 때만’이라는 것이다.
24. 하지만 여기에 일정한 비정합성이 존재한다. 제논은 정확하게 피타고라스의 이 지점을 공격한 것이다. 다시 말해, 연속적인 기하학적 선분 AB는 불연속적인 산술적 단위인 1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AB는 그 안에 무한분할 가능한 잔여(remainder)를 남기며 그것은 결코 1과 일치할 수 없다. 사실상 피타고라스조차 이러한 비정합성을 자신의 수론에서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긍정할 수는 없었다. 이는 피타고라스가 그 유명한 정리에서 루트2를 정의할 때 간취한 것이다. 제논은 피타고라스가 간취한 이 논의를 존재론으로 끌어와서 불연속성에 대한 비판으로 활용한 것이다.
25. 그런데 이 대립적인 이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존재론적으로 상이한 입장을 취했다는 것에 있다기 보다, 그 둘이 실재를 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경우 루트2의 존재는 그 ‘일치’를 보증하는 연산자였던 반면, 제논에게 그것은 ‘일치’를 보증하지 못하는 결정적 증거였던 셈이다. 즉 전자는 ‘유한’의 관점, 즉 peras(한도, 한계)의 관점에서 ‘무한’을 바라 본 것이며, 후자는 무한 그 자체를 긍정하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실재는 피타고라스에게도 제논에게도 있지 않다. 오히려 실재는 하나의 선분 AB이며, 또는 그것을 분할하거나 1에 대응시켜 가는 사고과정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운동’이며, 또한 그 운동의 속도를 0에 접근시키느냐, 아니면 식별불가능한 방식으로 활성화시키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0에 접근시켰을 때 실재는 진리의 형식을 띄고 나타나지만,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는 ‘접근’의 속도를 무한히 증가시킴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공백으로 남겨 두게 된다. 반면, 식별불가능성의 영역으로 그것을 운동시킨다면 진리는 어느 순간 실재 ‘자체’가 되겠지만 그와 동시에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모든 문제들은 이 실재를 가운데 두고 벌어지는 ‘목숨을 건 도약’이거나 ‘전쟁터’로 비춰진다.
16. 정치에 있어서 진리는 하나의 획득 가능한 권력이지만 스피노자가 예견한 바와 같이 그것은 한 편에서는 potentia이고 다른 한 편에서는 potestas다. 물론 여기서 보다 근원적인 것은 전자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전자의 잠재성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한도 내에서의(때로 그것은 무한한 폭력으로 발현되기도 하지만-혁명적 폭력의 문제) potestas가 필요하다. 라클라우(Laclau)가 말하는 “빈자리의 생산”으로서의 권력은 이런 현실화 과정 내에서 2차적인 actuality를 가능하게 한다. 만약 정치적 진리가 이러한 빈자리의 생산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라면, 역으로 그것은 또한 스스로가 빈자리를 남겨두고 물러남으로써 권력을 놓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바로 ‘진리의 적대적 성격’이 탄생한다. 즉 정치적 진리는 결코 단선적인 ‘하나’의 과정 내에서 완결적으로 흐르지 않으며, 언제나 적대의 한편과 다른 한편에 빈자리를 실어 나름으로써 획득된다(또는 놓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존재론적인 유예가 아니라 적대의 양 진영이 진리가 가진 폭력적 특성을 일종의 정치적인 ‘공세’로서 활용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다 깊은 의미에서 이러한 빈자리의 ‘물림’(withdraw)은 정치적 진리가 어떤 획득 불가능한 ‘상황’과 ‘주체’를 가정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발생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 상황은 바로 1871년 파리와 1980년 광주에서 ‘일시적으로’ 획득된 것이기도 하고, 이런 저런 시위들 안에서 불현듯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 상황과 조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이고, 또 ‘빈자리’이지만 더불어 ‘덧없음’(헬라스적 의미에서)은 아니다. 따라서 정치적 진리란 다름 아니라 적대의 한 주체, 특히 기존의 권력으로서의 potestas가 아니라 하나의 잠재적 계급의 혁명적인 형성과 그 폭력적 과정으로서의 potentia가 권력을 장악하고, 또 potestas 자체를 억압할 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그의 11번째 테제를 통해 말한 ‘해석’(=potestas)과 ‘변혁’(=potentia)의 상관관계라고 할 것이다.
17. 만약 ‘사건’의 진리가 올바르게 관철되기 위해, 정치권력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이 사건 자체의 ‘매듭’을 확실히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요청한다. 이를테면 1936년 당시 프랑스 인민전선(사회당, 공산당, 급진당의 연합전선)은 5월 선거에서 승리하였지만 중요한 매듭을 놓쳐 버림으로써 적대의 기회를 공중분해 시켰다. 그 결절점은 선거가 끝나고 내각이 구성되는 시점이었다. 그때 공산당은 레옹 블룸(사회당)이 새 총리가 되는 과정에서 어떤 전략도 전술도 취하지 않았다. 레닌이었다면 이때 이 사건의 지도리를 일정한 방향으로 틀어 놓기 위해 공산당의 슬로건을 ‘모든 권력을 인민에게’로 라고 바꾸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공산당은 선거에 승리하고서도 아무런 정치권력도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이 역사적 사례의 교훈은 ‘사건’의 정치적 진리가 그 적대적 전선의 선명화를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이고, 여기에 대한 적극적 개입(때로 폭력적인)만이 potentia를 현실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1. 진리란 무엇인가? 가장 적확한 대답은 ‘모른다’일 것이다. ‘사유와 존재의 일치’ 따위의 고전적 질문은 접어두자. 여기에는 ‘사건’이라는 대당이 존재한다. 존재가 사건과 구별되는 순간 ‘일치’는 그 보편적 성격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사건은 하나의, 또는 둘의, 또는 셋의, 또는 마오(Mao)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에서 둘이 나오는” 불일치의 순간이다.
그렇다면 개별성이 진리인가? 나와 너와 그것들, 또는 불특정한 이것(thisness). 그렇다면 이 진리는 다시 ‘현실성’(actuality)라는 대당을 만난다. ‘이것’은 현실성 앞에서 그저 죽어 있는 ‘일반성’일 뿐이다.
일반성(generality)과 보편성(universality)는 다르다. 진리는 일반적이면서 보편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멈추자. 과연 일반성과 보편성은 함께 획득될 수 있는가?
2. 보편성은 잠재성(potentiality)를 함축한다. 하지만 일반성은 잠재성이 아니라 ‘가능성’(possibility)로부터 나오는 ‘평균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사유하는 나’(res cogitans)는 ‘존재하는 나’와는 매우 다르다. 평균성 아래에 있는 그 가능성들은 현실화되지 않는 이상 두 항 모두 ‘참’이 아니라 ‘거짓’이다. 둘 중 하나가 ‘참’이라 하더라도,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3. 왜냐하면 여기서 나오는 ‘평균성’은 실재(reality)를 재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내 앞에 있는 이 촛불은 하나의 ‘실재’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하나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어떤 ‘영상’(idea)로 받아 들인다(감각의 잡다, sensibility). 이 타고 있는 불꽃은 내 망막을 통해 내게로 오며 과학적으로 상상하자면 내 대뇌 어딘가에서(지각, perception) ‘개념화’되어 ‘촛불’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이 ‘인식’(cognition)이다. 여기까지 칸트는 올바르다.
4. 반론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실재’를 내게 알려 주는가? 그것은 다만 ‘현실’일 뿐이지 않은가? reality, 즉 하나의 ‘재산’으로서의 그 고정된 ‘의미’는 여기서 다만 act(행위), 즉 actuality(행동성)일 뿐이지 않은가? ‘real’ 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진리다. 그러나 act는 내가 행위할 때 바로 그때 그 지점에서(hic et nunc) 수용되는 진리다.
5. 여기, 진리는 필연적으로 분기한다. 촛불은 타오르지만 나는 그 촛불을 ‘인식’할 수 없다. 촛불은 타오르지만 나는 그 촛불을 ‘감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의 작용이 더 확실한가? 이 시점에서 그것은 감각이다.
6. 왜냐하면 감각은 act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인식은 act의 뒤에 온다. 감각-지각-인식의 그 과정에서 reality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감각은 이때 베르그송적 의미에서의 ‘직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베르그송적 의미에서의 직관이 가지는 ‘종합’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act의 본성으로부터 나온다.
7. 그렇다면 감각은 이제 act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파생물일 뿐인가? 그것은 직관조차 허용하지 않는 “물자체=X”인가? 이 길을 따라 가야 한다. 완전한 유명론이 올 것인가? 아니면 불완전한 유물론일 것인가? 진리는 이 샛길 어딘가에 있을 것인가?
8. 니체적 의미. 곱씹어 봐야 한다. ‘진리에의 의지’가 ‘당대의’ 진리라 했다. 다만 진리에 의지함으로써만 진리가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며 진리에의 의지를 가지지 않는 자들은 “진리 따위는 상관없다”고 말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진리’를 구할지도 모른다.
9. 이 명제를 살펴보자. ‘진리에의 의지가 진리다.’ 이 명제는 다시 말해, 진리는 ‘의지’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원함’과 ‘원하지 않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문제의식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틀을 옮겨 놓는 것이다. 로고스에서 티모스(thymos)로 말이다. 상대주의의 딜레마가 나타날 수 있다. 이 명제는 간단하게 반박된다. “‘진리에의 의지가 진리다’는 진리다”는 진리가 아닌 것이다.
10. 그러나, 여기 명제와 실재(reality)의 간극이 드러난다. 이 명제는 결국 그 진리치를 증명하기 위한 무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명제에 둘러쳐진 따옴표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11. 결국 상대주의는 진리에 대한 담론 자체를 반성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의지’의 문제, ‘관점’의 문제로 만든다. 하지만 여기 중대한 발견이 있다. 언제, 철학이 ‘의지’와 ‘관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있었던가?
12. ‘의지’와 ‘관점’은 니체의 술어다. 여기서부터 ‘진리’는 변곡점에 들어선다. 현실성(actuality)은 실재성(reality)과 갈라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잠재성(potentiality)는 가능성(possibility)과 분기할 것이다. 그러나 이 구분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촛불은 그대로 남지만 그것을 보는 우리, 즉 우리의 reality는 너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체’(media)며, 또 ‘환경’(environment)이며, 마찬가지로 ‘인간-주체’(subject)다.
13.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의지와 이성을 고전적으로 구분한다거나, 그렇게 함으로써 둘 중 하나의 우위를 선언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의지는 이성과 더불어 의미가 ‘되고’, 이성은 의지와 더불어 이성이 ‘된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이성이 실체화된 진리에 즉자적으로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영원한 과정 안에서 다만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다는 아니다. 이러한 진리론은 매우 고답적이다. 칸트조차 철학은 철학함(philosopher)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문제는 이성이 이러한 다가감, 철학함을 위해 의지를 절실하게 요청한다는 것이다.
14. 이 계기에서 살펴봐야 하는 것은 바로 일상적인 사태들, 또는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현존재의 그 ‘빠져 있음’(Verfallen)의 상태라 할 것이다. 이 일상성 안에서 철학은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 모든 것을 횡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다가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현시대의 일상은 자본주의 이래 더 이상 숙고할만한 시간적, 공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이 당대적 인간의 사태 자체, 그것이 요청하는 바가 바로 ‘의지’라 하겠다.(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이성적 의지’라고 했다) ‘사유의 의지’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이 의지의 내밀한 양태는 바로 ‘의지의 사유’라고 할 만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기서 ‘의지’를 ‘욕망’으로 번역한다면 우회로를 거쳐야 하겠지만, 여하튼 이러한 이성과 의지의 양태는 거의 하나가 되어 진리의 ‘과정’ 안에서 길항하기도 하고 조화되기도 한다. 결국 사유의 의지는 일상의 폭력을 극복해야 한다는 매우 금욕적인 요청에 마주하게 된다.
15.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폭력’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유와 마주침으로서 사유를 촉발하고 변양(modification)하는 폭력이다. 들뢰즈-프루스트적인 의미에서 이러한 폭력은 사유로 하여금 진지한 열정(passion)으로 그러한 폭력은 ‘겪게’만드는 계기를 형성한다. 이 지점에서 사유의 의지는 더욱 내밀한 바탕으로부터 나오는 동기구조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일상이란 단순히 대응폭력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조우와 교전(encounter)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사유의 태도야말로 바로 ‘긍정’의 태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유의 의지는 즉자-대자의 상승 곡선을 그리면서 자신을 하나의 완전태(enthelekeia)로 가정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차이와 반복, 그리고 영원회귀로 규정할 수 있게 된다.
김무성이 말했다. “이것이 정의”라고. 결식아동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영유아 필수 예방접종 예산이 반영되지 않았으며, 형님에게 1400억 원을 안겨 주었다. 그래 “이것이 정의”다. 박희태는 800여억 원을 가져갔고, 4대강 예산으로 9조 3천여억 원이 배정되었으며, MB는 이를 두고 “다행이다”고 했다. 그래 “이것이 정의”다.
너희들의 정의다. MB 토건 권력과 한나라당, 너희의 정의다. 너희들의 천국이다. 정의는 자고로 ‘공정성’(fairness)을 그 기조로 삼으니, 국회 예산 심의 과정 도중 정말 ‘공정하게’ 날치기한 너희, 그래서 “이것이 정의”다. 3년 째 날치기를 하면서, 이번에는 그 “정의”를 위해 주먹을 휘두르고, 합의를 깰 생각을 미리 하면서도 머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했던 너희, 그래서 이 정의는 오로지 너희들만의 정의다.
정의의 원칙을 너희는 잘 알고 있다. 롤스(Rawls)가 말한 가장 중요한 그 원칙 ‘최소수혜자 최대이익의 원칙’을 참으로 잘 알고 있다. 가난한 아이들의 급식을 끊고, 그 돈으로 MB부인의 ‘한식 캠페인’을 지원한 너희들, 그 최소수혜자가 MB 부인이었다고 우길 것 같은 너희는 참으로, 정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공천을 따내기 위해, 자신의 정치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기 위해 ‘정의의 칼’을 휘두른 자들, 권력을 쥐고 한 줌의 토건 부르주아들 배를 불리면서도 그것이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자, 청년들의 목숨을 담보로 원전 장사를 하려는 자, 너, 그리고 너희들, 모두는 “이것이 정의”다 라고 말한다. 맞다. 그것이 정의다. 그 정의를 위해 사람을 미행하고, 대포폰을 만들고, 뒷조사하고, 대명천지에, 어린애도 못 믿을 말로 거짓말을 해대는 너희, 그리고 MB, 맞다, 옳다고 하자. 그것이 정의라고 인정한다.
그렇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다음의 모든 것이 ‘정의’다. 사기, 협잡, 협박, 폭력, 위선, 이기심, 사리사욕, 화폐 페티시즘, 부도덕, 파시즘, 독재, 다중에 대한 경멸, 비굴함, 야비함 , 병역회피, 꿀꿀이 잡탕과 쥐떼들. 따라서 이제부터 다음과 같은 것들은 부정의다. 양심, 도덕, 좋은 삶(eu zen), 배려, 합의, 청렴함, 존중, 진실, 이타주의, 공정성, 법률, 생명, 선한 민중들과 성실하고 순한 우리의 가족들과 이웃들. 이 모든 것은 사악하며 부정의하다.
이제 이러한 가치의 전도, 자기기만, 책임전가, 뻔뻔함이 너희의 정의를 위해 봉사할 것이니, 너희는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많은 다중들이 그 정의 아래에서 신음할 것이고, 괴로울 것이고, 짜증이 밀려 올 것이다. 너희는 이 다중들이 치를 떨다가 나가 떨어져서 ‘부정의’에 관심을 끄고 투표장을 멀리하길 바란다. 그리고 일찌감치 장악한 방송 매체에다 대고 연일 선전 선동에 몰두할 것이다. 전쟁의 위협으로 공포를 주입하고, 일치단결을 명령하고, 돈 다발을 흔들면서 말이다.
그러나 과대망상에 빠진 정의, 독단과 독선으로 일군 권력은 이제 천정을 쳤다. 정의와 부정의가 자리를 바꾸는 이 순간, 끝없는 나락이 너희 ‘정의’의 발치, 그 한 뼘 뒤로 입을 벌리고 있음을 알아라. 그러므로 2년 뒤 또는 1년 뒤 선거 혹은 민중이 봉기하는 그 일순간 너희의 ‘정의’가 지옥 한 가운데에서만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온 몸이 불에 타면서, 목이 잘리면서 말이다. “통일이 가까워오고 있다”고? 천만에! 잘 들어라! 너희의 몰락이 가까워오고 있을 뿐이다. - redbrigade
201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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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구현사제단, '4대강 옹호' 정진석 추기경에 "궤변이오""남모를 고충 있나…사도좌의 가르침마저 거스르고 있다"
'부자 감세 연장' 오바마, 진보진영과 '절연' 분위기민주당 하원 초유의 집단 반발…진보 논객들 "오바마는 사기꾼"
푸틴·룰라 "어샌지 체포는 잘못"유엔 인권최고대표도 우려 표시…'위키리크스 대전' 확전되나
"원희룡, 날치기 안 한다더니"…종교계 '배신감' 표출4대강 국민논의위 "오만한 정부·여당 실상 알려나가겠다"
[오마이뉴스]
대통령 부인에겐 242억, 결식아동은 0원, 날치기 법안 뜯어보니, 다 나눠먹었구만
- [주장] 국가예산 사유화한 정치모리배들... 더러운 국회에서 나오라
이상득 형님, 배부르게 드셔서 행복하십니까-결식아동 급식지원 예산 0원으로 전액삭감...이것이 '공정사회'인가
연석회의 중심축 놓고 진보신당과 이견 노출... 양당 전·현직 대표 회동도 제안
[한겨레]
북풍에 포격당한 대통령 지지율 [2010.12.10 제839호]
[정치] 연평도 포격·천안함 침몰 등 안보 이슈 때마다 지지율 되레 하락…
군 핵심참모, 연평도 포격 대응지침 확인…청와대 ‘거짓 해명’ 논란 확산
[경향신문]
[단독]형님 예산·강만수 예산… 막판 4600억 밀어넣었다
[민중의소리]
날치기 비난 여론 희석 위한 제스츄어..."국가 미래에 관심있나"
뚜렷한 근거 없는 강경론 되풀이...부시 행정부 전철 밟을 수도
정규직∙비정규직 연대 민주노조의 숙제로..현대차 교섭 태도 관심
‘뇌사’ 인권위 사퇴 도미노..전문위원 등 7명 추가 사퇴
[레디앙]
진보신당-민주노총 간담회…"현장에서 통합 기대감 높아져"
[여론조사] 주요기관 신뢰도 1위가 '보통'…나머지 모두 '불신'
[참세상속보게시판]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3박 4일 제주도, 한라산. 일생일대의 순간들이 지나갔다. 한 순간이 마치 한 평생인 것처럼 아름답다. 고단한 일정을 내 옆에서 견뎌 준 그 사람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축하해준 모든 분들, 친구들, 동학들, 오지 못하고 멀리서나마 축하해 준 모든 사람들. 신뢰라는 것은 그런 것일 것이다. 믿는다는 것, 그리고 불확실한 삶 안에서 내가 생각해야할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돌아오는 기내에서 리영희 선생의 부고를 들었다. 편히 영면하시길. 진실은 영원히 승리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나 지금이나 단 하나다. '지혜사랑'(또는 레비나스적 의미에서 '사랑의 지혜). 그러나 이 단순한 대답은 철학사 안에서 위상을 달리하며 끊임없이 변주되어 왔다. 또는 오히려 이 질문과 대답 자체가 다시 구성되었다. 그래서 질문은 대답 속에서 다시 물어지고, 대답은 질문을 통해 다시 의문에 부쳐 지는 것이다.
강영안 선생도 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반복한다. 하지만 그 대답은 레비나스와 마리옹, 그리고 리쾨르라는 20세기 주체 철학(아니면 타자의 철학) 안에 재정위하는 방식을 취한다. 결론적으로 철학은 오래 은폐되어 왔던 '타자성'이라는 주제를 꺼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는 이러저러한 우회를 거쳐 '부름'에 응답하는 그런 존재가 된다. 절대적 주체성은 없으며, 단지 '겸손한 주체'의 모습만이 남는다. 그러나 이 겸손은 너무나 투철하기 때문에 그 전의 '주체'마저 더 투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주체를 강화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더 투과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것, 타자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이 주체는 그래서 스스로가 존재 근거나, 인식 근거라고 말하기 보다, 윤리의 근거 또는 윤리라는 실천을 매개하는 일종의 '천사'가 되는 것이다.
강영안 선생이 '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논의 가운데에는 어쩌면 신의 부름을 받는 불완전한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윤리적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인간보다는 더 상위의 주체성, '하지만' 상호주체성의 주체성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표정훈, 강영안, 효형출판, 2009
1. 철학을 향한 먼 길
[왜 하필 암스테르담이었는가?]
[20]내가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고등학교 때였어요. 내가 나갔던 고등학생 신앙 집회 강사 가운데 한 분이 이근삼 교수였는데, 일본 신도 민족주의와 한국 기독교인들의 대결에 대한 논문으로 1962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에서 신학박사를 받으셨어요. 당시 그분의 약력 소개를 보고 알게 된 거지요.
한국교회의 큰 지도자였던박윤선 박사님이 한국전쟁 직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사모님이 사고로 돌아가는 바람에 귀국하셔서 박사학위까지 마친 이는 이근삼교수가 처음이었지요. 그 다음으로 손봉호 선생님께서 1972년에 한국인 최초로 철학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지요.손봉호선생님은 1973년 초 귀국해서 [21]한국외국어대 네덜란드어과 선생님으로 오셨지요. 그때 나는 2년 다니던 신학대학을 중도하차하고 외국어대 네덜란드어과로 옮긴 직후였습니다.
(...)
[21]한국의 유학 풍토(독일, 프랑스, 미국 위주)는 철학의 수입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국의 철학 수입과정 - 서양철학 수입 초기(1920대 후반 1930년대):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주로 생철학, 실존철학, 마르크스주의를 가르쳤으며, 이 내용은 독일철학적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1929년 1회 졸업생 김계숙 이후, 신남철, 박종홍이 뒤를 이었는데, 이들이 독일철학의 영향하에 있었다.
해방 이후 최초로 1921년 이관용이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음으로 초대 문교부 장관이었던 안호상이 1929년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왔다.
[22]일본에 있던 철학자들도 독일철학 연구자들이 다수였다. 그런데 일본의 초기 철학은 주로 실증주의와 공리주의였다. 니시 아마네(1829-1897)와 쓰다 마미치(1829-1903)는 네덜란드 유학파로 레이든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자 시몬 피스링Simon Vissering에게서 배웠다. 그런데 철학적으로는 옵조머르Cornelis Opzoomer(우트레흐트에서 레이든으로 강의를 나옴)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옵조머르는 콩트August Comte(1798-1857)의 실증주의와 존 스튜어트 밀John Atuart Mill(1806-1873)의 공리주의를 네덜란드에 도입한 학자다. 이렇게 해서 실증주의와 공리주의가 일본에 먼저 소개된 것이다.
문제는 실증주의와 공리주의는 일본의 천황중심체제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결국 독일 철학이 수용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라파엘 폰 케버Raphael von Koeber(1848-1923)[케베루 센세이로 불림]다. 작가인 나쓰메 소세키, 철학자 아베 지로, 와쓰지 데쓰로, 니시다 기타로, 미키 기요시 등이 제자다. 케버는 처음에는 음악을 전공했으나, 후에 철학을 공부했는데 쇼펜하우어 전공자였다.
[24]미국유학은 1960년대부터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해방 후 서울대 김준섭이 컬럼비아 대학에서 돌아왔는데, 미국 유학파이긴 하지만 저술에서는 독일철학의 기풍이 짙게 배어 있다. 이보다 이르게는 남가주 대학에서 유교도덕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치진이 있다.(1930년 귀국), 1934년에는 갈홍기가 시카고 대학에서, 1937년에는 박희성이 미시간 대학에서 학위를 마쳤다.
미국으로 갔다가 독일에서 학위를 마친 사람들도 있었다. 서울대 교수였던 차인석, 김여수 가 대표적이다.
프랑스 유학파는 매우 드물었다. 해방 전에는 연세대에 재직했던 정석해가 있고, 1960년대에는 변규룡, 김진성 등이 있었다.
미국철학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서강대 이한조 때부터다. 전혀 글을 남기진 않았지만, 좋은 강의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안병욱, 이어령, 김형석의 책을 빠짐없이 찾아 읽었다. 『현대문학』과 『사상계』도.
[32]개혁파의 신학적 전통은 예정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더 중요한 내용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입니다. 삶의 어떤 부분도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는 뜻이지요. ... 그럼에도 삶의 각 영역들은 다른 영역의 간섭이나 제약을 받지 않는, 고유한 주권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가정에는 국가나 교회로부터 침해받지 않을 고유한 주권이 있고, 국가도 교회나 학교, 가정으로부터 침해받을 수 없는 고유한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33]암스테르담 자유대학의 ‘자유’는 국가와 교회로부터 자유로운,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국가와 교회의 통제에서 자유로운 대학을 카이퍼는 세워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말하자면 보통명사로 이 표현을 쓰다가, 대학을 설립하면서 고유명사로 변한 것이지요.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의 ‘자유’는 이 점엣 베를린 자유대학교나 브뤼셀 자유대학교의 ‘자유’와는 구별됩니다. 브뤼셀 자유대학교는 예컨대 루뱅대학처럼 가톨릭 대학이 아니라,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대학이란 의미입니다. 베를린 자유대학교에는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자유 민주주의를 통해 얻은 자유, 곧 ‘정치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대학이란 뜻이지요.
[34]이러한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액티비즘activism 즉, 적극적 행동주의를 함축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주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무관한 삶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예술가든, 정치가든, 경제인이든 자기 자리, 직분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보는 겁니다. 칼뱅이 우리 모두의 직업을 하나님이 부여한 소명으로 보는 것과 통합니다.
우리나라의 주류 장로교 전통 신학은 경건주의입니다. 세상과 교회, 하나님의 일과 세속적인 일이라는 이분법이 주도하는거지요. 하나님의 일은 목사나 선교사가 하고 교수, 예술가, 정치가, 기업인은 세속적인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 전통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 그런 이분법을 없애버립니다. 교수나 예술가, 청소부… 모두가 거룩한 하난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하찮게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일이기 때[35]문에 모든 게 거룩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속 이원론을 깨뜨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죄 짓는 것 외에는 모두가 거룩하다”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 내가 자라온 신학 전통의 이론은, 성속 이원론을 거부합니다. ... 16세기 교회 개혁으로 얻은 가장 소중한 유산 가운데 하나입니다.
[39]본 회퍼는 『옥중서간』에서 “신 없이, 신 앞에”(ohne Gott, vor Gott)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탈종교화하자는 프로그램이었지요. 본 회[40]퍼는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1804~1872)와 니체Friedrich Nietzsche(1844~1900), 바르트로부터 종교란 인간 욕구에 기초한 것이라는 생각을 배웁니다. 그래서 종교를 신앙과 엄격하게 구별하지요. 이 구별을 따라 본회퍼는 전통 기독교를 인간의 욕구에 기초한 종교로 봅니다. 하나님을 마치 고대 그리스 연극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처럼 이해한다는 것이 전통 기독교에 대한 본회퍼의 비판입니다.
그는 종교를 벗어난 기독교, 다시 말해 참된 신앙으로서의 기독교를 회복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욕구를 만족시키는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우리의 욕구와는 전적으로 다르지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에 기초한 기독교를 회복하자는 거죠. ... 본회퍼가 신앙의 대상으로 고백한 하나님은 무엇이나 줄 수 있고,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 사랑 때문에 한없이 연약하고 낮아지며 심지어는 무능하기까지 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본회퍼는 하나님의 고통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고통 받고 계시다는 뜻이[41]지요. 루터의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 전통을 이어받는 맥락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여하튼 나는 본회퍼를 읽으면서 전통적인 신학과는 다른 일종의 신학적 애매성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46]반 퍼슨 교수의 책 가운데 『다시 그 분이시다』라는 네덜란드어로 된 책이 있습니다. 부피는 작지만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성서』의 언어는 서술하는 언어가 아니라 선포하는 언어입니다. 낡은 계단이 위헙스럽게 삐걱거린다고 합시다. 그 위험한 계단을 [47]오르는 사람에게 누군가 “계단!”하고 소리칩니다. 이때 “계단!”이라는 말은 그게 바로 계단이라고 명명하거나 서술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계단이 위험하니까 조심하라.” 경고하는 언어지요. 마찬가지로 『성서』에서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할 때, 이것은 마치 우리가 앞에 놓인 사과를 두고 “이 사과는 과일이다.”, “이 사과는 빨갛다.”. “이 사과는 맛있다”고 서술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서술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지요.
[54]기본적으로 읽어야 할 책 8권의 목록도 [반 퍼슨 교수가] 써 보내 주셨지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과 『성찰』, 안셀무스의 『프로슬로기온』, 어빙 코피의 『논리학 개론』, 칸트의 『프롤레고메나』 등이 그 목록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 루뱅과 암스테르담
[72]세 가지 생물학 이론이란, 자연발생spontaneous generation, 예정조화preformation, 후생epigenesis에 관한 이론을 말합니다. 자연발생설은 생명체가 물질에서 나왔다는 주장으로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그 단서를 볼 수 있습니다. 후생설이란 생명체는 생명체에서 나온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생명체의 성장은 환경과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예정조화설은 예컨대 정자나 난자에 앞으로 발전될 수 있는 완전한 형태의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봅니다.
[80]철학과 기독교를 분리시켜 보는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겁니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철학 개념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최근에는 유럽철학이나 영미철학 모두 오히려 종교에 대한 관심이 커진 걸 볼 수 있어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나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한 철학적 노력이 상당히 많이 이루어지고 있거든요. ... [81]자니코Dominique Janicaud(1938-2002)라는 사람은 ‘프랑스 현상학의 신학적 전회’라는 말을 이미 1991년에 하거든요. 프랑스 현상학자들 가운데 레비나스Emmanuel Levinas(1906-1995), 폴 리쾨르Paul Ricoeur(1913-2005), 미셀 앙리Michel Henry(1922-2002), 장-뤽 마리옹Jean-Luc Marion(1946- ) 같은 이들이 모두 기독교 신앙의 토대에서 철학을 하고 또 철학을 통해 신앙을 반성하는 철학자들입니다. 심지어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1924-1998)도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저작을 남겼고, 데리다Jacques Derrida(1930-2004)의 말년의 저작도 종교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 미국 철학계도 사정은 비슷하지요. 우리나라에 그의 『언어철학』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윌리엄 올스톤William Alston, 휘튼 대학의 아서 홈스Arthur Holmes, 노트라댐 대학의 앨빈 플란팅가Alvin Plantinga, 예일대의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ff 등이 1978년 기독교철학자회Society of Christian Philosophers를 시작한 후, 지금 약 1300면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나도 2004년에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82]{기독교 신앙과 철학의 관계는?}상보적 관계가 있는 것 같요. 기독교 신앙을 통해 철학을 하는 토대가 될 수 있는 세계관이랄까, 그러니까 인간과 자연과 역사를 보는 어떤 관점을 얻었지요. 다시 말하면 창조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건데, 나무 한 그루나 별 하나, 그밖에 모든 것들이 물질 그 자체라기보다는 어떤 방식으로는 창조주와 소통하고 관계 맺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 그러니까 일종의 인격적 관계이자 존재라는 세계관입니다. ... 인격적 교류가 가능하고 자신과 타인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요컨대 자연주의적 관점과 달리 인격주의적 관점에서 인간과 세계를 본다는 게 내가 기독교에서 배운 중요한 철학적 전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83]하나님은 존재신학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다만 찬양 받으실 분이라는 깨달음이라고 할까요. 성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보면 “주님, 당신은 큰 분이시고, 크게 찬양받으실 만한 분입니다Magnus es, Domine, et admirabilis valde”라는 구절이 나오지요. 이야말로 존재신학을 뛰어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개념으로 이러저러하다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개념, 그러니까 우리가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어 계신다는 겁니다.
[85]철학과 신앙이 어떻게 조화가 되느냐 하는 것은, 철학 안에서 신앙인으로 살고 또 신앙 안에서 철학을 하는 이에게는 ‘조화의 문제’가 아니라 ‘일관성의 문제’에 속합니다.
[87]나는 지금도 철학적 통찰은 프랑스철학에서 얻는 경우가 많지만, 적어도 엄밀성 면에서는 영미 분석철학이 제대로라는 생각을 합니다.
3. 소크라테스, 철학의 화신
철학이란 무엇인가? 사실 그렇게 묻는 것 자체가 철학이지요. 우리 아[98]이가 ‘아빠 하는 게 뭐야?’라고 묻길래 ‘철학’이라고 했더니, ‘철학이 뭐야?’ 이렇게 묻더군요. ‘그렇게 묻는 게 철학이야.’ 그렇게 대답했지요. 그래도 잘 이해가 안되는지 다시 묻기에 ‘지혜 사랑’이라고 했지요. ... 여하튼 철학이라는 말의 어원으로만 답하자면 철학은 ‘지혜 사랑’이라고 해야겠지요.
[102]소크라테스는 철학의 구체적인 화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통해 철학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수 있거든요. ... 실제로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토포스atopos, 그러니까 토포스topos가 없는 존재, 자리가 없는 존재, 무엇이라 분류할 수 없는 존재, 괴팍하고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습니다.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의 괴이함, 괴팍함, 불가사의함 때문에 어디서나 받아들이기 곤란한 존재였다는 사실은 철학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107]우리가 소크라테스를 ‘철학의 화신’이라 할 때,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생활방식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재물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것과는 달리, 지혜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소크라테스에게는 철학이었다는 겁니다. 삶의 방식에 대한 선택이 되겠지요. 두 번째는 철저하게 근거를 물어간다는 것, 즉 질문을 던진다는 뜻입니다. 철학의 전형적인 모습이 여기에 있습니다.
[111]분명 그리스철학은 철저하게 문제를 논리적으로 따져나가는 이론적 색채를 강하게 지닙니다. 그러나 철학은 특별한 생활방식의 의도적이고 자발적인 선택hairesis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 본인 뿐 아니라 그에게서 연원한 여러 철학 학파에서 볼 수 있지요.
[113]하지만 오늘날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어디까지나 이론적 활동, 엄격한 지적 활동, 학문 활동으로 보는 관점이 지배적입니다. 철학을 엄밀한 지적 활동이라 보게 된 것은 서양 고대 철학 전통이 기독교화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와 철학이 만나면서 철학 자체의 정체성에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115]기독교 전통에서 철학은 다만,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 겁니다. 이렇게 삶의 방식으로써의 철학은 기독교 신앙이 완전히 흡수합니다. 그렇다면 철학은 폐기되어야 될 것인가? 이런 물음이 당연히 등장합니다. 중세에 이르러 담론의 방법, 논증의 방법론으로서의 철학이 요청됩니다. 『신약성서』 베드로 전서 3장 15절을 보면 베드로는 ‘너희가 소망을 둔 것에 대해서 그 이유(로고스)를 묻는 자들에게 답할(아폴로게인: 변증, 변호) 준비가 되어 있으라’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인이 소망을 둔 것의 이유, 근거, 로고[116]스를 묻는 이에게 답할 준비를 하라는 거지요. 철학은 바로 그런 준비의 방법이 된 겁니다. 중세 신학자요 철학자였던 안셀무스Anselmus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알기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의 수단으로서 철학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120]큰 틀에서 보면 철학은 이른바 ‘아르테스 리베랄레스artes liberales’ 영어로는 ‘Liberal Arts’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자유 기예’ 정도로 할 수 있을까요? 자유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능력을 갖추어야 할 지식을 일컫는 것이었죠. 요즘 같으면 앙마 ‘교양 교육’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지요. ‘소리vox’와 관련해서 문법, 수사학, 논[121]리학 그리고 ‘사물res’과 관련해서 산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 있었지요. 철학은 논리학이라는 이름으로 이 가운데 들어가 있지요. 대학의 출현과 철학의 정체성을 서로 밀접한 관계입니다.
[123]대학의 독서 방식, 이른바 ‘스콜라적 읽기lectio scholastica’는 ‘수도원의 독서방식lectio divina’와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 수도원을 중심으로 실행하던 읽기 방식인 렉시오 디비나, 곧 ‘거룩한 독서’는 우선 소리 내어 읽기lectio가 앞서고, 다음으로 그것을 되씹는 묵상meditatio, 이를 토대로 한 기도oratio, 그리고 관상complation으로 이어집니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영적으로 인격을 형성하고 성숙시키기 위함이지요.
[127]{언제 철학이 신학으로부터 독립했는가?}그 질문은 아마 이렇게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중세 이후, 사제나 신학자가 아니면서 이론적인 철학을 한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말이지요. 만일 이렇게 바꾸어 질문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데카르트라고 답해야겠습니다. 미셀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1533-1592)를 먼저 꼽고 싶기도 하지만, 그는 이론으로서의 철학보다는 스토아철학이나 에피쿠로스 전통처럼 그야말로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을 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전통은 파스칼, 쇼펜하우어로 이어진다고 할까요? 삶의 지혜를, 쉽게 외울 수 있고 되씹을 수 있는 경구 형식으로 표현한 분들이지요. 데카르트에 와서 비로소 철학이 신학과 별도의 위치에서 일종의 심급자 구실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중세와 단절한 인물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데카르트조차도 고, 중세 전통의 철학을 일종의 영적 수련, 영혼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밟아야 할 수련 과정으로 보는 관점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성찰』의 구조만 봐도 알 수 있지요. 6일 동안 하루에 한 단계씩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는 구조거든요. 첫 날에는 회의에 관해, 둘째 날에는 생각하는 존재의 확실성에 관해, 이런 방식으로 묵상Meditatio하고 있지요. 내용은 물론 형이상학적 주제이지만, 적어도 형식에서는 수행의 전통을 따르고 있[128]습니다. 데카르트가 예수회 신부들이 세운 학교에서 근 10년을 공부했기 때문에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의 수행법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고 가정해도 전혀 무리가 아닙니다. ... 따라서 데카르트에서조차도 철학은 완전히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영혼의 정화와 구원을 얻기 위한 과정, 삶을 캐묻고 검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칸트는?}물론 칸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계 개념으로서의 철학은 단순히 지식의 체계가 아니라 참다운 삶의 지혜를 추구하는 활동이거든요. 칸트에게 진정한 철학자는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이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철학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거죠. 다만 철학자라는 이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겁니다. 진정한 철학자는 이념에서 지식의 완전성 뿐만 아니라 삶에서 도덕적 완전성까지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칸트는 철학자는 이성의 기술자가 아니라, 인간 이성의 입법자라고 말했습니다. ... [129]그런 {지식의} 체계개념과 칸트가 추구하려는 철학자 개념이 정확히 일치하기는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불일치의 어려움 혹은 긴장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지점에서 동양철학에 관해 물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전통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서양 전통에서 철학이란 이름으로 해온 활동과 조금은 다른 활동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 나는 옳으리라 생각합니다. 서양전통에서도 지금까지 해온 얘기를 바탕으로 해서 보면 삶의 방식으로 철학을 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논증적인 철학을 한 것은 아닙니다. 넓게는 사상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철학의 범주에 넣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도 생각해 봐야겠지요.
[134]칸트 철학에서도 비슷한 갈등이 있습니다. 칸트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체계로서의 철학을 지향합니다. 칸트가 남긴 철학적 저술의 대부분이 체계로서의 철학에 해당하지요. 칸트의 비판철학이라고 할 때 비판은 우리의 인식 능력(지성과 감성), 욕구능력(의지), 쾌와 불쾌의 능력(감정) 등의 힘과 범위와 한계를 검토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비판 철학의 과제를 수행하는 칸트의 구체적인 작업은 체계로서의 철학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칸트는 역시 인간이 되는 게 가장 중요한 철학의 과제라고 봅니다. 체계로서의 철학보다 수양으로서의 철학을 우위에 두는 거지요. 실제로 칸트는 실천이성을 이론이성보다 우위에 놓습니다. 단순이 우위에 있는 게 아니라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인간이 그 도덕성을 실현하는 것,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 다시 말해서 ‘성인이 되는 것’이 사실상 칸트 철학의 궁극적 지향점입니다.
[137]유럽철학이든 분석철학이든 동아시아 철학이든, 오늘날 아카데미즘의 영역 안에서 우리가 하는 철학은 삶으로서의 철학, 삶의 방식으로서의 철학이기보다는 일종의 이론이자 연구 대상으로서의 철학입니다. ... 이러한 철학의 이분화, 즉 삶의 방식으로서의 철학과 학문적 논증으로서의 철학이라는 ‘두 철학two philosophies’을 완전히 하나로 통합시키는 건 뭐랄까요, 하나의 이상이겠지요. 하지만 철학은 이 간격을 느끼면서 본래의 실천적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138]철학에 대한 기대, 그러니까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던져주고 답을 모색해 달라는 기대는 여전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대는 매우 근본적이고 중요하지요. 왜냐하면 그런 물음에 과학이 답할 수는 없으니까요. 과학이 삶의 전체적인 구조와 의미, 가치 지향점등을 탐색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철학만의 고유한 영역이랄까, 그런 것에 대한 기대와 수요는 계속되리라 봅니다.
[141]{철학이란 무엇인가?}철학은 역시 그 오랜 이름 그대로 ‘지혜 사랑’, ‘지혜에 대한 사랑’입니다. .... 레비나스의 말을 빌어 ‘사랑의 지혜’라고 해보도록 하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철학은 문자 그대로 ‘지혜 사랑’입니다. ...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깨닫는 지혜이겠지요. ... 나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나의 존재 자체가 타자의 선물입니다. 내가 마시는 물과 공기, 나와 관계 맺고 있는 타인,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해 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 주고 나를 떠받쳐주는 창조주의 사[142]랑이 나를 있게 하고, 나를 나 되게 합니다. 철학은 이 사랑을 깨닫는 지혜이고 이 지혜를 추구하는 활동입니다.
4. 근대와 개인의 탄생
[147]르네상스란 기본적으로 그리스 고전이나 라틴 고전을 다시 또는 새롭게 읽어냄으로써, 그것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전형적인 유형 또는 본성을 찾아내려는 시도입니다. 휴머니즘은 독일의 교육자 니트하머F. J. Niethammer가 1808년 중등교육과정에서 시행하는 그리스와 라틴어 문헌을 중심으로 한 고전 교육을 일컫는 말로 휴마니스무스Humanismus란 말을 썼을 때, 처음 역사에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휴머니즘에는 고전 연구를 통해서 인간다운 삶의 전형을 발견하고 체득한다는 이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플라톤적으로 말하면 ‘인간 영혼의 형성’ 내지는 ‘교육’, 즉 ‘파이데이아paideia’ 되겠고, 키케로적으로 말하면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 곧 ‘인간성의 연구’, 다시 말해 ‘인문학’이 되겠지요.
‘휴머니스트’란 그리스 고전과 라틴 고전, 즉 고대 문헌을 전문적으로 읽어내는 사람, 곧 ‘인문학자’를 뜻했어요. 그러므로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계몽주의 시대의 이른바 ‘세속적 휴머니즘’과 엄밀히 구별해야 합니다. 후자의 경우는 신본주의에 대항하는 ‘인본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전자의 경우는 고전 연구를 통해 그 안에 드러난 도덕적 인간성의 회복을 소망한 경우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굳이 번역해 쓰[148]자면 ‘인문주의’라고 하는 것이 옳지요.
[149]에라스무스는 예배 참석이라든지, 고해 성사라든지, 종교적 의식이나 제도, 교회 등은 경건한 삶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전통 가톨릭교회에 대한 반항자, 곧 프로테스탄트는 루터라기보다 에라스무스라고 해야 할 겁니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기독교와 대립해 본 것은 낡은 해석입니다.
[152]근대 혹은 근대성에서 중요한 두 가지 발견을 든다면 하나는 물질로서의 자연의 발견이 되겠고, 다른 하나는 자유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발견입니다. 철학계나 대중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이와 관련해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사상가인 피코 델라 미란돌라(1463-1494)의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연설』은 근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중요한 철학적 문서입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째,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이보다 더 급진적인 생각은, 인간에게 어떤 주어진 본성이나 본질이 없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스스로 선택할 가능성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피코는 여기서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찾습니다. 둘째, 인간의 존엄성은 여러 가지 가능한 것들 가운데 최선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본 것이지요. 인간의 선택 능력을 통해 창조주와 비슷한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본 것입[154]니다. 이런 의미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모습에 따라 자신을 만들어가는 조형자요, 창조자”로 등장했습니다.
[154]르네상스를 기점으로 이 ‘관계’는 이제 인간과 마주 서고, 때로는 인간을 위협하기도 하는 자연과 사회의 관계입니다. 자연과 사회는 과거에 지녔던 근원적 의미, 다시 말해 인간이 그 속에서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는 근원으로서의 자연과 사회는 상실되고 인간이 규정하고, 이용하며, 관리하고, 통제해야할, 말하자면 자유와 맞선 존재로 등장[155]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우주는 하나의 ‘우연한’ 존재로 이해되고 인간은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입니다. ... 이렇게 이해된 주체는 이제 더 이상 자기보다 더 큰 우주적 질서에 의존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정립하는 자가 아니라, 그 질서와 자기를 ‘떼어냄’으로서, 문자 그대로 그 질서로부터(ab) 자신을 분리해(solvere)냄으로써 ‘절대적absolute’ 주체, 독립적 주체가 된 것이지요. 한편으로 이것은 엄청난 자유와 책임의 획득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종의 ‘고향상실’입니다.
[161]결과적으로 문제가 되는 건 세 가지입니다. 첫째, 만일 데카르트식이라면 나로부터 출발하여 신으로, 신에서 물질로 가는 건데, 이렇게 한다면 결국 유한과 무한, 유한실체와 무한 실체를 이분화시켜야 합니다. 정신이라는 유한실체와 신이라는 무한 실체 사이에는 존재론적 단절이 생기게 된다는 거지요. 피조물과 창조주의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론적 단절과 간격. 그렇다면 결국 데카르트에게는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는 셈입니다. 실체를 이원화시키지 않고 물질, 정신, 신 사이의 존재론적 연속성을 확보하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출발점입니다. 둘째, 실체가 가지는 무한한 속성들 가운데 두 개를 지목해낸 것이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입니다. 속성으로서 다른 존재 방식을 지닐 뿐, 동일한 실체의 다른 표현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결코 이원화될 수 없습니다. 스피노자는 속성에서도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이원화하는 것에 반대하는 겁니다.
[165]칸트 이후 독일철학에서 일종의 스피노자 붐이 일어나면서 스피노자 철학의 이러한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모든 것들이 신 안에 있다는 범재신론panentheism이지요.
요즘 스피노자가 주목을 받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탈종교, 탈신학적 영성의 원천으로 스피노자를 지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166]스피노자는 기독교, 유대교 전통을 떠나서도 여전히 모종의 영성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줍니다. 신체와 분리된 영성이 아니라 신체와 통합된, 자연과 일체를 이루는, 자연과 영혼의 하나 됨의 인식을 추구하는 영성이지요.
[169]데카르트는 근대주의자이고 스피노자를 탈근대주의자라고 말하는 이도 없지 않은 모양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 무엇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스피노자가 과학을 통한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다고 보았다는 점입니다. 감각적 지식, 지성적 지식, 직관적 지식. 스피노자는 인간의 지식을 이 세 가지로 보는데, 이 가운데 직관적 지식은 신의 지적 사랑을 뜻하지요. 신의 지적 사랑이 가능하자면 적어도 기본적인 필요조건으로 지성을 통한 보편적 인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과학적 보편 지식이 있은 다음에야 어떤 의미에서는 홀연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는 직관적 지식도 가능해진다고 본 것이지요.
[171]철학은 어떤 의미에서 노년의 학문에 가깝다.
5. 칸트, 그리고 철학의 소명
[175]도이여베이르트 철학의 핵심은 모든 철학적 사유에는 종교적 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종교는 절대적인 것에 대한 헌신이나 관심으로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을 빌자면 ‘궁극적 관심’을 뜻합니다. 모든 철학의 바탕에는 어떤 궁극적인 것, 절대적인 것에 대한 헌신이나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유물론, 유심론, 관념론, 실재론, 이런 것들은 철학적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그 이론 이전의 어떤 선택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물론이라면 물질을 궁극적인 것으로 보거나, 관념론이라면 인간의 생각을 궁극적인 것으로 보거나, 실재론이라면 인간 바깥의 현실을 궁극적인 것으로 보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지요. / 도이여베르트는 서양철학의 각 시대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추동력 또는 ‘근본 동인Ground Motif’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스 철학을 움직인 근본 동인으로는 형상과 질료를, 중세철학은 자연과 자유 등을 들고 있지요. 그리고 기독교 철학의 근본 동인은 창조와 타락 그리고 구속으로 보았습니다.
[178]도이여베르트는 유신론 전통에 따라 현실을 통합하는 아르케를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신에게 우리의 의식과 자아의 뿌리를 둘 때,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그 현실을 이론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이념(현실의 통일성, 전체성, 상호 연관성)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도이여베이르트는 자신의 노력을 현실 전체를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을 얻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우주론적’이라 부릅니다. 인식론의 한계를 벗어나 보자는 것이었지요. 이성이 이성 자신을 스스로 검토한다는 의미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초월해 이론적 사유 자체를 전반적으로 새롭게 비판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의도입니다.
[184]도식론은 범주의 연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범주의 연역’이란 범주가 어떻게 경험에 적용될 수 있는가, 경험에 사용될 수 있는가를 정당화하는 절차 혹은 과정입니다. 반면에 상징 문제는 ‘이념의 연역’과 관련됩니다. 신, 영혼, 세계 같은 초월적 이념들이 어떻게 경험과 연결해서 정당하게 사용될 수 있는가 하는 내용이지요. ‘범주 연역’에 관해서는 사람들이 많이 다루었지만, ‘이념의 연역’ 문제는 다룬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185]도식의 문제나 상징의 문제는 표상 가능성의 문제입니다. 표상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표상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지요. ... 감각된 경험에 대해 개념 적용이 가능해야 할 텐데, 개념 가운데서도 근본 개념이라 할 수 있는 범주를 어떻게 감각되는 현상에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지요.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도식입니다. ... 칸트가 말하는 도식은 결국 시간 규정인데, 시간 규정은 범주를 현상에 적용시키는 구실과 함께 현상을 지성적인 것과 연결시키는 매개, 수단, 도구입니다. 지성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이 결합될 수 있게 해주는 장치가 도식인 거죠.
[191]칸트의 표상적 사유는 결코 표상될 수 없는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범주가 시간 규정을 통해 도식화되고, 도식화된 것이 우리의 감각 대상, 감성 재료와 연관을 맺어 지식을 산출하지만, 범주를 생산하는 능력 자체는 비표상이니까요. 도식화된 것은 표상이지만 범주 자체를 생산하는 근원적 능력은 비표상입니다. 그렇게 비표상적인 능력이 범주를 가능하게 하고, 상상력의 도식 활동이 표상적 사유를 가능케 하는 겁니다. 비표상적인 것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신에 대한 사유[192]는 가능하지만 신 자체는 표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신은 우리의 권력, 지적인 힘, 지성의 힘 안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개념을 가지고 재단할 수 없습니다.
[193]그 소신은 바로 칸트의 철학 개념에 드러나 있으니까요. 『순수이성비판』의 방법론 부분에서 칸트는 철학의 개념을 두 가지로 구별합니다. “지금까지는 철학을 배울 수 없었다. 사람[194]은 오직 철학함을 배울 뿐이다.”라는 유명한 구절의 다음 문단에 나오는 것이지요. 여기서 칸트는 ‘학교 개념’으로서의 철학, 그러니까 인식의 체계이자 오직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먼저 이야기 합니다. 지식의 체계적 통일성, 논리적 완전성을 겨냥하는 순수한 이론적 철학, 강단 철학, 전문적 철학, 철학자들이 밥벌이로 하는 철학이 되겠지요. ... 다른 하나는 ‘세계 개념’으로서의 철학입니다. 철학자가 하나의 이상으로, 인간의 원형으로 등장하는 철학 개념이지요. 이때 철학자는 모랄리스트, 그러니까 도덕적 모범으로서 인간의 이상을 보여주는 이가 됩니다. 철학은 “인간의 모든 인식을 인간 이성의 본질적 목적에 관련짓는 학문”이 되는 겁니다. ... 철학은 “인간이성의 목적론”이며, 철학자는 “이성의 기술자가 아니라 이성의 입법자”가 되는 겁니다.
[196]동아시아의 유가 전통에서 성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군자, 혹은 군자가 도달하려는 목표인 성인이 이상적인 철학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주돈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성인은 하늘과 같은 이상적 경지에 도달하기를 희망하고, 현인은 성인이 되기를 바라며, 보통의 선비는 현인이 되고자 한다.” 칸트의 도덕철학의 지향점도 결국 성 혹은 거룩함입니다. ... 적어도 칸트 철학에서 철학자는 모랄리스트여야 하며 고유한 모범을 보여줘야 합니다.
[199]칸트는 결코 극단에 빠지지 않는 철학자입니다. ...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칸트를 의무론과 행복론 가운데 의무론에 속하는 철학자로 봅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칸트는 행복을 결코 무시하지 않습니다.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거죠. 다만 자유를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은 행[200]복과 반하더라도 의무를 추구해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칸트는 최고선 개념을 설정하지요. 덕과 그에 상응하는 행복의 일치가 최고선입니다. 덕에 반드시 따라야 할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야말로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이라는 겁니다.
[201]{칸트의 철학적 신앙고백}「라이프니쯔와 볼프 이후 독일철학이 형이상학에서 이룬 진보가 무엇인가?」
“순수실천이성의 고백을 세 항목으로 담고 있는 신앙고백Credo은 이것이다. 나는 세상에 있는 모든 선의 원천으로서, 그리고 최종목적으로서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이 최종목적이 사람의 능력 안에 있는 한, 세상에서의 최고선에 합치할 가능성을 믿는다. 나는 세상 안에서 가능한 최고선으로 지속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미래의 영원한 세계를 믿는다.
[203]나는 칸트의 이성이 ‘최소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잉된 이성이 아니라 최소의 이성, 즉 과학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으로, 도덕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으로, 인간 공동체가 가능할 수 있는 조건으로 최소한의 이성을 심급자로 도입하는 겁니다. 최소한 이것이라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지식, 도덕, 공동체가 가능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칸트의 이성 문제를 봐야 할 겁니다. 전형적인 계몽주의자인 디드로나 볼테르의 이성은 과잉 이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점에서 칸트의 이성에 대한 기대 혹은 호소는 종교적 신앙과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 [204]칸트의 이성비판은 이성을 확장시켜 전권을 위임하기보다 최소의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극단적인 것들을 배제하고 인간에게 조그마한 자리라도 고유한 자리, 위치를 잡아주기 위한 것입니다. ... 칸트는 겸손한 낙관주의자이자, 비판적 낙관주의자였던 셈이지요. 이러한 겸손한 낙관주의는 포스트모던을 이야기하는 오늘에도 여전히 수용할 수 있고, 이성의 과잉화, 이성의 확장으로 인한 폐단에 제동을 걸 수도 있고, 감성의 확장에 대해서도 제동을 가할 수 있습니다.
[207]칸트의 평화사상은 ‘영구평화론’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 칸트 철학 전체를 사실상 평화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말이지요. ... [하지만 칸트의 출발점은 갈등이다] 우리는 여러 면에서 갈등 상황에 처해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지요. 갈등에서 오는 고통 없이는 아무도 평화를 염원하지 않겠지요. 칸트의 ‘평화의 철학’은 뒤집어보면 사실은 ‘갈등의 철학’입니다.
[209]{경험의 원칙이란?} 어떤 주장을 할 때는 반드시 경험의 가능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원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험의 가능조건은 조금 풀어 말하자면, 주장과 관련된 대상이 공간 속에 주어져야 하고 상상력을 통해 시간 속에서 연속적으로 파악되어야 하고 지성을 통해 개념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경험 일반의 가능 조건은 동시에 경험 대상의 가능 조건”이란 말은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211]한나 아렌트가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으로 이해한 칸트의 ‘공통감각susnsus communis’의 의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칸트는 공통감각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판단 능력으로 이해합니다. 만일 이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면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212] 공동체를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공통감각을 제대로 활용하는 데는 세 가지 준칙이 있다고 칸트는 보고 있습니다. 첫째가 앞에서도 언급한 ‘계몽의 준칙’이라고 말한 “스스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미신이나 편견을 벗어나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이 한 개인으로서의 삶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데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 것이지요.
두 번째 준칙은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역지사지하는 것입니다. 칸트는 이것을 ‘확장된 사고방식의 준칙’이라 부릅니다. 한 개인의 좁은 세계를 벗어나 타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판단을 검토해봄으로써 ‘보편적인 관점’을 획득할 수 있는 계기를 이 준칙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언제나 자기 자신과 일관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일관된 사고방식의 준칙’ 줄여서 ‘일관성의 준칙’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지식과 판단에서 모순을 허용하지 않아야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실천 속에서 각자 우리 자신이 따르는 이성적 원칙과 어긋나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준칙들은 실제로 우리 삶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 문제를 접근하는 데 중요한 규칙들입니다.
[214]{갈등해소자, 조정자 외에 철학자의 다른 역할은?}갈등을 유발하는 역할이지요. ... [215]칸트는 마치 교수들이 초능력을 지닌 예언자나 마술사처럼 행세하는 데서 문제의 소지를 찾습니다. 이들{대중들}의 요구대로 교수들이 처방을 해준다면 당연히 대중들은 이들에게 몰려들 것이고 “철학을[216] 멸시하면서 떠날 것”이라고 칸트는 우려합니다. ... 결국 차이는 이성에 따른 삶을 사는 것이냐, 아니면 마술적인 방식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삶을 추구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이때, 철학자는 이성의 이름으로 갈등을 유발하고 문제를 지적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칸트가 생각하는 전형적 철학자입니다.
6. 타자의 발견과 윤리적 전회
[220]철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하나의 주의 혹은 이즘을 상정한다면, 어떤 특정한 사조나 철학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내가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현대철학의 반데카르트적 경향입니다. ... 현대철학이 반데카르트적 경향, 그러니까 반데카르트적[221] 경향을 보인다고 볼 때,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주체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적 지식의 위상 문제에 대한 이해 문제입니다.
[222]{데카르트가 아니라면 누가 주체 개념을 일반화했는가?}존재를 근거지우는 자아를 일컬어 ‘주체’란 용어를 적용해서 철학적으로 일반화시킨 것은 칸트와 독일 이상주의 철학자들입니다.
[223]원근법적으로 세계를 본다는 것은 나의 관점, 나의 시각, 내가 서있는 지점에서 세계를 본다는 것이지요.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는 내 시각의 관점에서,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배열하는 원근법의 철학적 대변으로 볼 수 있습니다.
[224]과학적 지식과 그 방법론에 관한 데카르트의 입장은 기본적으로는 ‘방법론적 일원론’입니다. 연구의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그러니까 연구의 대상이 다르다 해도 그에 적용하는 연구 방법은 같아야 한다는 입장이지요.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정반대되는 사고라고 할 수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적 대상 연구에는 감각이 작동하고, 수학이나 형이상학 연구에서는 지성이 작동한다고 보았거든요.
그러나 데카르트는 어떤 지식이라도 결국 같은 연구 방법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 방법은 곧 ‘지성의 작동 방식operationes mentis’입니다. 데카르트 초기 작품에서는 이것을 ‘직관’과 ‘연역’이라 불렀습니다. ... 직관의 인식과 이를 토대로 한 추론적 지식.
[227]{푸코는 언어의 지칭기능을}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지칭과 서술보다는 ‘포함과 배제’가 언어의 더 중요한 기제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언어는 권력의 수단, 권력의 장이 되는 거죠.
[228]{푸코에 있어서 담론은} 모든 현상을 포착하는 일종의 그물입니다. 담론은 그리스어의 로고스, 그것도 예컨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지향한 사물의 이성적 근거로서의 로고스라기보다는 소피스트들의 수사학 전통이 사용해온 힘의 로고스에 가까운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담론은 논문이나 에세이와 같은 쓰여진 글뿐만 아니라 상표, 사용설명서, 학위증, 프로그램, 소문 등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담론은 물질적 현존(음성, 문자, 제도 등)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자율적 활동성을 갖는다는 것이지요. 이때 담론에는 어떤 중심이나 통일성이 없습니다. 처음도 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근원적인 말도, 최종적인 말고 없지요. 모든 담론은 하나의 조각이고, 다른 조각과[229]어떤 방식으로 결합될 뿐입니다. 이 가운데는 지배하는 것이 있고 지배 받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진술이라도 지배 담론을 따라 이루어지고 그것에 따라 일정한 자리를 얻게 됩니다.
[231]주체철학과 관련해서 라캉을 보면, 그의 작업은 ‘주체의 탈중심화’라고[232] 할 수 있습니다. 주체의 ‘도치’, 주체의 '전복la subversion'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군요. 라캉도 푸코와 마찬가지로 주체는 근원이 아니라 욕망의 산물임을 보여줍니다.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라고 말하지요. 타인이 나에게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는 겁니다. 나의 욕망이라지만, 그때의 나는 타인의 욕망에 의해 생산된 결과입니다.
[238]현상학 전통으로 보면 1960년~70년대에 변화가 크게 일어났어요. 푸코, 라캉, 들뢰즈, 데리다 같은 이들이 주체의 해체 방향에 서있었다면, 현상학 계열에서도 주체에 지나친 자리를 제공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주체를 해체시키지도 않는 철학자들이 부각된다는 거죠. 이를 일러 ‘주체의 겸손함’ 혹은 ‘겸손한 주체’를 말하는 이들이라고 나는 부릅니다. 레비나스, 리쾨르, 마리옹을 예로 들 수 있어요.
이들의 배경은 각기 다릅니다. 레비나스는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고, [239] 리쾨르는 개신교, 특히 칼뱅주의 전통에서 자란 철학자이고, 마리옹은 리쾨르나 레비나스 철학을 창조적으로 수용하였지요. 소르본 대학에서 레비나스의 후임으로 교수가 되었고, 또 시카고 대학에는 리쾨르 자리에 후임으로 갔지요. 그래서 지금은 시카고대학과 소르본대학에서 모두 학생들을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241]한마디로 서양철학의 기본방향 설정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서양철학은 타자를 수용하고 환대하기보다는 타자를 배제하는 철학 전통입니다. 타자를 동일자로, 자기 자신에게 환원시키는 것, 동일자 혹은 자아의 권력 아래 두는 철학이 바로 서양철학이라는 겁니다.[242] 다른 말로 하면 서양철학은 제국주의의 철학, 전쟁의 철학, 전체성의 철학이라는 것이지요.
[243]{하이데거의} 도구 전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개별적 사물은 전체와의 연관성 속에서만 그 존재 의미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됩니다. ... 일종의 ‘해석학적 순환’이라 할까요. 부분은 전체를 통해, 전체는 부분을 통해 의미를 획득하는 거지요. 결국 타자로서 타자가 들어설 공간은 없습니다. ... [244]더구나 타자는 인격적 책임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지요. 결국 후설이나 하이데거, 더 넓게는 서양철학 전체가 인격적 관계가 들어설 공간, 엄밀한 의미의 윤리적 책임이 자리할 공간이 없다는 뜻입니다. 레비나스는 존재론과 인식론 중심의 철학에 대해서 윤리학과 인격적 관계가 선행하는 철학으로, 그러니까 윤리학이 제1철학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철학을 시도했습니다.
[244]데카르트의 『성찰』 나오는 신 존재증명을 보면 무한자는 유한자인 사유하는 주체가 자기 속에서 생산할 수 없는 이념입니다. 유한자는 무한자를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무한자를 만들어낼 수도 없습니다.[245] 무한자라는 이념이 있다는 건 무한자가 그 이념을 나에게 불어넣어줄 때 가능합니다. 이 점에서 데카르트의 무한자 이념은 칸트와 헤겔의 무한 개념과 다릅니다. 두 독일 철학자에게서 볼 수 있는 무한의 출발점은 유한입니다. 유한에서 출발해서 한정지을 수 없는 것 끊임없이 확장해가는 것이 무한입니다. 무한은 말하자면 유한의 부정으로 얻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무한자의 이념은 유한의 부정으로서의 무한이 아니라 유한이 포괄할 수 없는 무한다, 유한에게는 넘쳐흐르는 무한자입니다. 그러므로 유한이 무한을 손에 쥘 수 없지요. 데카르트의 무한자 이념에 레비나스는 윤리적 해석을 가하였습니다. 그래서 무한자는 나에게로 환원할 수 없고, 내가 지배할 수 없는 타자이며, 내가 수용하고 환대해야 할 타자가 되지요.
[247]{레비나스의 관점은 지나치지 않은가?}리쾨르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과잉 또는 과장의 철학이지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 자신을 유지, 보존하려는 관심을 가진 존재이며, 그럼에도 윤리적 호소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존재라는 게 리쾨르의 인간 이해입니다. 윤리적 호소에 응답할 수 있는 것, 즉 응답 가능성의 존재라는 겁니다. 응답response 가능성이 바로 윤리적 책임responsibility이 됩니다.
[250]리쾨르는 누가복음 6장에 나온 황금률의 가르침을 ‘넘침의 논리’라 부릅니다. 네가 넘치도록 받았으니, 남에게도 주라는 것이지요. 나는 이것을 ‘넘침의 윤리’란 표현으로 바꾸어 쓴 적이 있습니다. ... 나는 ... 기독교인에게 요청되는 윤리는 ‘상호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넘치도록 받았으니 그 받음에 대한 감사에서 우러난 윤리를 강조했습니다. 이 맥락에서 ‘넘침의 윤리an ethics of superaboundance’라는 표현을 썼지요. ... 거저줌을 강조한 것이지요.
[251]미셀 앙리는 내재성의 철학을 지향합니다. 내 안에서 초월적인 것이 가능해지는 궁극적 현상이 바로 신이라는 겁니다. 신은 내재적 존재 가운데에서도 내재적 존재, 앙리의 표현대로 하면 ‘초월론적 생명’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알고 있는 파생적 생명을 가능케 해주는 근거로서의 생명이라는 거죠. 지식이나 윤리도 초월적 생명이 외재화했고 드러난 것이라고 보는 점에서 전형적인 내재성의 철학이라 하겠습니다.
[253]폴라니는 인간의 활동으로서의 과학이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 의해, 문제 자체의 매력에 끌려서 진행될 수 있다고 봅니다. 지적 열정, 지적 호기심을 중시하죠. 그러면서도 과학을 포함한 인간의 활동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대화하며 진행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서로 이야기하고 함께 진행시키는 거지요. 과학은 단순한 개인적 활동이 아니라 공동체성을 지닌다는 관점인데, 이를 넓게 표현하면 콘비비얼리티conviviality, 즉 공생입니다.
[257]기술로서의 과학의 밑바탕에는 지식으로서의 과학이 깔려 있고, 지식으로서의 과학은 현실의 부름에 순응하고 거기 귀 기울이지 않고서는 제대로 하기 힘들 겁니다. 인간의 지적 추구는 분명 능동적이고 활동적 행위지만, 자연의 가장 깊숙한 곳, 인간의 깊숙한 곳을 이해하려는 측면에서 보면 그 첫 순간은 수동적이지 않을까요? 귀 기울여 가만히 보고, 그에 대해 질문하고 하는 것, 그러니까 인간의 지적 활동, 특히 과학적 탐구는 그 가장 깊은 차원에서는 수동성과 능동성이 교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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