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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05
    단편과 테제(2009/7/29-8/3)
    redbrigade
  2. 2009/07/29
    단편과 테제(2009/7/3-22)
    redbrigade

단편과 테제(2009/7/29-8/3)

  • 등록일
    2009/08/05 00:36
  • 수정일
    2009/08/05 00:36

-쌍차 투쟁이 진지전 양상으로 가면서 불분명했던 계급 관계가 점점 투명해지고 있다. 경찰과 사측의 진압공모사실이 언론에 폭로되면서 사측 논리의 정당성이 일정부분 훼손되고 있다. 여기저기서 연대의 손길도 일어 나고 있다. 쌍차 노동자들에게 '물을 갖다 주자'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매우 호소력 있어 보인다. 반면 금속노조 집행부는 여전히 무급순환휴직 카드를 들고 현장 투쟁력을 까먹고 있다. 7월 22일의 지리멸렬한 투쟁은 상당부분 금속노조 집행부의 기회주의적 전술에 책임이 있어 보인다. 

노동자대회는 피해만 안은채 끝났다. 폭력을 무릅쓰고 고생한 노동자-학생-시민들의 희생만큼 성과가 없었다. 난 화면을 통해 펼쳐지는 개들의 진압과 거기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노동자-시민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 희생의 스펙타클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스펙타클을 깨고 실재의 현장에서 승리를 구가할 날을 과연 가까이 온 것일까?

현재로서는 희망이 조금씩 보인다. 무엇보다 쌍차 도장공장 내부에 남은 노동자들의 패기가 아직 시퍼렇다. 그거면 되지 않겠는가?

 

- 대상에 대한 열정, 개념에 대한 냉정. 이를테면 철학자들의 격언이 이래야 되지 않겠는가? 물론 열정에는 사랑도 있겠지만, '분노'도 있을 것이다. 냉정에는 분석도 있겠지만 통찰과 직관도 있겠다. 내가 보기에 전자로 과도하게 기울면 논변의 백치가 될 것이고, 후자로 치우치면 설익은 객관주의의 함정에 걸려들 것이다. 이 두 벡터를 모두 고려하는 것, 그것은 순전히 '사건' 다시 말해, 개념과 대상이 조우하고 교전하는 그 사건을 예견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야만 글쓰기도 제대로 된다. 논쟁도 제대로 된다.

 

-물음과 대답의 적분과정은 신학의 근방역일까? 아니다. 이 과정은 일종의 반신학, 안티크라이스트의 과정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이며 규정이 아니라 미규정이며 코스모스가 아니라 카오스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적분은 완결된 아폴론이 아니라 언제나 미심쩍은 형태인 디오니소스를 불러내기 때문이다.

 

-유물론은 관념론의 대당이 아니다. 심층의 유물론은 이 대당 자체를 내재적으로 포월(Jaspers)한다. 이 유물론(내재-포월 유물론?)은 따라서 관계성과 비물질성조차 심층의 표면으로 이해한다. 심층은 오직 들끓을  뿐이다. 

 

- 호모폴리티쿠스는 그저 나온 규정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유적 본질인 기억과 관련있다. 즉 인간의 기억 자체가 매우 정치적이라는 게다. 프로이트는 이를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으며 라이히는 이를 분명히 했다. 따라서 기억의 정치라는 말은 동어반복이다. 문제는 이 동어반복의 사태를 해석하는 것이고 이 해석 안에서 계급투쟁을 복원하면서 승리하는 것이리라. 계급투쟁 속에 해석을 전유하는 것 말이다. 그러므로 리꾀르가 열정적으로 말한 '해석의 갈등'은 '해석의 계급투쟁'의 완곡어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미래이익에 대한 과장과 손실에 대한 과소 평가. 이를 경영학에서는 투자유치를 위한 포트폴리오, 즉 홍보라고 일컫는다. MB의 일관된 거짓말은 이 천박한 마키아벨리즘에 근거한다. 이때 소통은 기만술 이상이 될 수 없지만 그 기만술의 행위주체 쪽에서 보자면 너무나 당연하고 확고한 전략인 셈이다. 이러니 MB는 죽었다 깨어나도 반성의 무능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다중의 저항이 MB에게는 이해불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초는 누가 대주는 거야?!"라는 짜증 섞인 질문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고 그의 횡한 대뇌 어딘가에서 배회할 것이다. 이 대뇌 이상 증후군을 바로. 'candlephobia"라고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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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2009/7/3-22)

  • 등록일
    2009/07/29 02:54
  • 수정일
    2009/07/29 02:54

- 무기계약노동자로 전환하지 않고 해고를 강행하는 사업장에 대한 소송을 준비하는 전략은 괜찮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비정규직법은 무조건 폐기되거나, 최소한 기준요건을 강화해야 한다.

 

- 현재 한국사회를 강한 의미에서든 약한 의미에서든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신자유주의라는 변수를 고려해야만 적확해진다. 다시 말해서 이때 파시즘이 근대적 의미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경찰국가'라는 규정에서 더 나아간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파시즘은 경찰력을 안고서 정보사회 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의 심장부를 지나간다. 정보사회 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치부욕이 가장 노골적으로 그리고 가장 치밀하게 작동하는 사회구성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파시즘은 군사적 권력을 가장 대담하고 노골적으로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실재로 그렇게 한다. 이 경로에서 또 중요한 것이 미디어다(베를루스코니, 이명박). 따라서 탈근대 파시즘은 전세계 다중을 자신의 극으로 놓고(이 파시즘은 그런데 결코 다중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다. 모든 잉여가치가 이들로부터 나오니 말이다) 한 줌도 안 되는 금융자본가들과 정보자본가들을 자신의 뒤에 보호하면서, 그리고 화폐, 경찰, 핵을 무기로 하면서(그 각각에서 신용독점, 지역적-국제적 치안독점을 통한 불안을 양산하면서) 자신의 기생력을 이어간다.

 

-촛불을 가만히 살펴 보면, 하이데거의 그 악명 높은‘일상성'이란 테제가 오해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래 하이데거에게서 일상성은 피투된 현존재의 '빠져있음'으로부터 비롯된 현존재의 비본래적 실존양식이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이를 폄훼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현존재든 이러한 기본적인 비본래적 양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현존재 분석 자체도 여기에 기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하이데거의 일상성이란 존재론적 차이 자체의 잠복기다. 그러나끼 일상성은 표면적인 비본래적 상태를 유지하지만 현존재의 본래성을 언제나 예상하는 '물러남'(withdrawal)이란 것이다. 이러한 일상성의 특질, 여기서 바로 예술적 영혼의 울림이 드러난다. 바하만의 말한 시인의 책무, 즉 "미래를 향해 예포를 울리는 자"라는 것과 들뢰즈의 '어두운 전조'는 촛불이라는 괴물을 예상하는 하이데거의 고요한 일상성의 외피를 둘러쓰고 우리 주위를 돌아 다닌다.   

 

-이런 생각 안하고 싶지만, 비정규직법 개악 정국 속에서 MBC 뉴스를 보다 보면, 이 사람들이 정말 미디어법과 비정규직법을 거래하는 건 아닐까, 라는 의문이 슬슬 든다. 그제는 법 적용 대상도 아닌 대학 연구원들을 들먹이더니, 오늘은 두 법안을 두고 여아간 줄다리기가 '답답'하다고 했다. 악의를 가지고 싶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독해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명박이가 드디어 기부를 결정했다. 재단법인을 만들었다. '청계'란다. 그런데 재단법인 이사진들의 구성을 보는 순간 당장에 못미덥다는 생각이 든다. 저 돈이 결국 측근들에 의해 관리될 것이고 퇴임후에 그 돈이 실제 교육사업에 쓰이기도 하겠지만 또 어디에 쓰일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게 딴나라당 정치자금이 될 지 유럽 어디에 부동산을 사는 데 쓰일지 누가 감시한단 말인가? 공익재단을 만들고 이사진을 구성하려면 자기 측근을 기용할 일이 아닐 것이다. 아예 재단형식의 출연이 아닌 다른 방식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 그 '재단'을 이용해서 돈 세탁 따위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뒤가 구리다. 어째서 명박이는 무슨 짓을 해도 이리 찜찜하냐?
: 좀 전에 기사들을 봤는데, 역시 가관이다. 네티즌들이 아무도 그걸 '기부'라고 믿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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