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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2009/7/3-22)

  • 등록일
    2009/07/29 02:54
  • 수정일
    2009/07/29 02:54

- 무기계약노동자로 전환하지 않고 해고를 강행하는 사업장에 대한 소송을 준비하는 전략은 괜찮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비정규직법은 무조건 폐기되거나, 최소한 기준요건을 강화해야 한다.

 

- 현재 한국사회를 강한 의미에서든 약한 의미에서든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신자유주의라는 변수를 고려해야만 적확해진다. 다시 말해서 이때 파시즘이 근대적 의미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경찰국가'라는 규정에서 더 나아간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파시즘은 경찰력을 안고서 정보사회 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의 심장부를 지나간다. 정보사회 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치부욕이 가장 노골적으로 그리고 가장 치밀하게 작동하는 사회구성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파시즘은 군사적 권력을 가장 대담하고 노골적으로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실재로 그렇게 한다. 이 경로에서 또 중요한 것이 미디어다(베를루스코니, 이명박). 따라서 탈근대 파시즘은 전세계 다중을 자신의 극으로 놓고(이 파시즘은 그런데 결코 다중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다. 모든 잉여가치가 이들로부터 나오니 말이다) 한 줌도 안 되는 금융자본가들과 정보자본가들을 자신의 뒤에 보호하면서, 그리고 화폐, 경찰, 핵을 무기로 하면서(그 각각에서 신용독점, 지역적-국제적 치안독점을 통한 불안을 양산하면서) 자신의 기생력을 이어간다.

 

-촛불을 가만히 살펴 보면, 하이데거의 그 악명 높은‘일상성'이란 테제가 오해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래 하이데거에게서 일상성은 피투된 현존재의 '빠져있음'으로부터 비롯된 현존재의 비본래적 실존양식이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이를 폄훼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현존재든 이러한 기본적인 비본래적 양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현존재 분석 자체도 여기에 기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하이데거의 일상성이란 존재론적 차이 자체의 잠복기다. 그러나끼 일상성은 표면적인 비본래적 상태를 유지하지만 현존재의 본래성을 언제나 예상하는 '물러남'(withdrawal)이란 것이다. 이러한 일상성의 특질, 여기서 바로 예술적 영혼의 울림이 드러난다. 바하만의 말한 시인의 책무, 즉 "미래를 향해 예포를 울리는 자"라는 것과 들뢰즈의 '어두운 전조'는 촛불이라는 괴물을 예상하는 하이데거의 고요한 일상성의 외피를 둘러쓰고 우리 주위를 돌아 다닌다.   

 

-이런 생각 안하고 싶지만, 비정규직법 개악 정국 속에서 MBC 뉴스를 보다 보면, 이 사람들이 정말 미디어법과 비정규직법을 거래하는 건 아닐까, 라는 의문이 슬슬 든다. 그제는 법 적용 대상도 아닌 대학 연구원들을 들먹이더니, 오늘은 두 법안을 두고 여아간 줄다리기가 '답답'하다고 했다. 악의를 가지고 싶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독해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명박이가 드디어 기부를 결정했다. 재단법인을 만들었다. '청계'란다. 그런데 재단법인 이사진들의 구성을 보는 순간 당장에 못미덥다는 생각이 든다. 저 돈이 결국 측근들에 의해 관리될 것이고 퇴임후에 그 돈이 실제 교육사업에 쓰이기도 하겠지만 또 어디에 쓰일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게 딴나라당 정치자금이 될 지 유럽 어디에 부동산을 사는 데 쓰일지 누가 감시한단 말인가? 공익재단을 만들고 이사진을 구성하려면 자기 측근을 기용할 일이 아닐 것이다. 아예 재단형식의 출연이 아닌 다른 방식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 그 '재단'을 이용해서 돈 세탁 따위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뒤가 구리다. 어째서 명박이는 무슨 짓을 해도 이리 찜찜하냐?
: 좀 전에 기사들을 봤는데, 역시 가관이다. 네티즌들이 아무도 그걸 '기부'라고 믿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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