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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안의 문성근, 영화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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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침묵, Epiphany의 함성

  • 등록일
    2009/12/21 02:21
  • 수정일
    2009/12/21 02:21

 

 

위대한 침묵, Epiphany의 함성

- 《위대한 침묵》, 필립 그로닝, 2009

 

오프닝은 눈보라와 불빛이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진다. 외삽 되는 검은 화면에 말씀(logos)들이 새겨진다.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부터 온다.” 장면 전환. 카메라가 수도원 건물들을 잡아낸다. 견고한 저 건물들. 문득 화면이 블로우 업으로 돌아간다. 작게 울리다가 이내 높아지는 수도원의 종소리. 그리고 옷자락 스치는 소리, 수사들의 오래된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그리고 다시 침묵. 말씀들. “가진 것을 모두 버리지 않은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2시간 42분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 긴 러닝타임 동안, 눈이 먼 늙은 수사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약 5분여의 대사와 산책과 눈썰매 타는 동안의 수사들의 몇 마디 말, 그리고 미사를 하는 동안의 기도 소리 외에 어떤 ‘인간의 소리’도 이 영화에는 없다. 잠깐 잠깐씩 화면을 블로우 업 시키는 것 외에 별다른 편집 기술도 동원되지 않는다. 대신 무엇이 있는가? 감독은 분명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들, 무슨 소리를 듣는가?’

 

인간의 목소리 대신 여기에는 무심한 수도원 건물들이 있고, 알프스 협곡을 통해 불어오는 세찬 눈보라가 있으며, 긴 주랑과 그곳을 들락거리는 짐승들이 있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카메라의 표면성이 잡아 내지 못하는 어떤 것, 이것(aliquid)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영화를 보는 내내 보고, 듣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름 붙이자마자 존재 저편으로 사라진다.

 

그 신성하고 언설 불가능한 것이 이 영화의 모든 부분, 심지어 가장 하찮아 보이는 오브제들 속에서 들끓고 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하면 곤란하다. 감독이 원하는 건 그런 것이니까. 이를테면 이 질릴 정도의 롱 테이크 속에서 삶에 속하지만 삶과는 다른 어떤 것, 인간의 신체를 하고 있지만 신의 말씀인 어떤 것이 편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들끓는 것을 보거나, 느끼기 위해서 모든 인간의 음성을 거두어야 한다. 그 음성이 사라진 자리에 관객에게 요구되는 것은 일상적인 지각체계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미세지각들이다.

 

저 멈춰진 화면 속의 건물들, 회백색의 계단들, 그리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수사들의 내부로부터 표면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흔들리는 원자들의 클리나멘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 2시간 42분의 명상이 제대로 된 경지에 이를 것이다.

 

영화 후반부. “여기 내가 있다”라고 말씀은 전한다. 그리고 수사들의 모습들이 하나하나씩 비춰진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구체적으로 말을, 아니 더 선명해진 침묵을 건넨다. 말씀이 저들 수사들 하나하나 속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늙은 수사의 벗은 몸을 차분히 쓸어내리는 화면. 그러니까 ‘나’는 늙어 쪼그라든 신체 안에 있다는 것이다. 또 비춘다. 수도원의 오래된 노동자들. 또한 그들에게 말씀은 “내가 있다”고 한다. 침묵은 선명해진다. 점점 더 선명해져서, 빛이 되기도 하고, 쟁여진 장작들 사이 검은 틈으로 스며들기도 하며, 젊은 수사의 미소 안에 머물다 가기도 한다.

 

침묵이 선명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화가 필름의 표면 아래에 숨겨 왔던 어떤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는 뜻이다. 작가의 관점에서 그러한 폭발은 주로 수사들과 노동자들을 거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숨겨져 있던 그것을 수사들과 노동자들, 심지어 감독이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다. 숨겨진 그것이 이들을 매개로 스스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존재는 오직 생성하는 것이므로, 제 차례에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은 운 좋게도 발을 담근 자에게 그 차가운 느낌을 ‘단 한 번’ 전해줄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미사를 집전하고 성서 주해서를 낭독하는 거룩한 천상의 장면(초반부)에서부터 수사들의 면면과 노동자들의 투박한 모습이 미디엄 숏으로 흘러가는 지상의 장면(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에피파니를 따라 명상해 온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말씀이 ‘여기 있다’고 한 것은 분명 지상에 이르러서이지만 결국 그는 언제나 거기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이 그런 것처럼, 침묵의 강도 발을 담그든 말든 언제나 흐를 뿐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에피파니의 함성을 들을 수 있는 자는 운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린 양들은 운이 나쁜 나머지, 명상의 경지가 아니라 잠의 밑바닥에서 두 시간 동안 편히 쉴 수도 있을 터. - 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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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그리고 Salsa!

  • 등록일
    2009/12/14 12:11
  • 수정일
    2009/12/14 12:11

 

끝 그리고 Salsa!

- 《시간의 춤》, 송일곤, 2009
 
“시간만이 불멸하는 삶은 아름답다”(중국인 이민자 남편의 말) 하나의 거대한 비극. 그게 쿠바 한인들의 강제 이주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위대한 것은 이런 긍정이다. 왜냐하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불멸하는 것은 오직 죽음 뿐”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찬사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멸하는 것이고, 매우 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경이로운 것이라고 확인한다. 이와 같다. 조선인 쿠바 이민자 세대들은 죽음을 반추하면서 삶을 긍정하는 사람들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들은 말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산다!
 
감독이 발견한 것도 그런 것이다. 애국주의적 향수를 카메라에 담는 일 따위는 너무 지겹기 때문에 아예 그러한 감상을 농담처럼 웃어넘기는 이 사람들이 작가에겐 더 친숙한 것일지도 모른다. 쿠바와 한국이 야구경기를 한다면 그들은 쿠바를 응원할 것이라고 정말 진지하게 말한다. 그들에게 조국은 쿠바며, ‘꼬레’는 아득한 세대의 기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기 때문에 혁명도 그들의 삶에 대한 긍정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 아름다웠던 것은 혁명의 시간에 그(녀)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것은 혁명이 아니다. 하긴 혁명이 대수겠는가? 더 극적인 것은 ‘혁명의 시간’이 아니라 ‘살사(salsa)의 시간’이다. 세상을 바꾸었는데도 불구하고 춤을 추지 못한다면 옳지 않다. 그래서 쿠바 한인들, 아니 한국계 쿠바인들은 즐거운 소수자들이다.
 
우리는 이념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너무 자주 슬프고, 너무 자주 분노하고, 너무 자주 좌절하기 때문에 냉소에 익숙하다. 냉소에 익숙하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처연한가? 처연함은 슬픔의 독을 삶의 여린 살에 꽂아 넣는 주사바늘과 같다. 과연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또는 민족주의든, 하나의 이념이 앞서 이들을 규정했다면 이 쾌활함이 가능했을 것인가? 물론 혁명은 위대하다. 하지만 춤이 더 즐거운 것도 명백하다. 그러니 사실 더 위대한 것은 죽음과 혁명의 기억을 껴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냉소에 찌들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도, 혁명도, 죽음도 끝나지 않는다. 춤을 춰야 하니까! “Fin y Salsa!"(영화 마지막 자막) - 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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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안의 문성근, 영화 [실종]

  • 등록일
    2009/03/23 20:25
  • 수정일
    2009/03/23 20:25

 

 

 

영화평을 제대로 써 보려고 한 20분 궁싯댔는데, 글이 몽땅 날아가 버렸다. 젠장.

 

하여간 문성근이 오랜 일탈 이후, 스크린에 복귀한 것은 어느 정도 성공한 듯 보인다. 감각 있는 감독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던 것 같다.

 

역시 이 영화의 압권은 현아(전세홍 분)의 생니를 무시무시한 뻰치로 몽창몽창 뽑는 장면인데, 사실 난 이 장면부터 영화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정말, 스릴러의 문법을 철저히 지킨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분쇄기 장면이다. 현아를 산 채로 갈아 버린다. 히유 ~ 정말 지금도 끔찍해서 소름이 돋는다. 더 충격적인 것은 분쇄기 앞에서 판곤(문성근 분)이 하는 말이다.  "이거 통 채로 갈기는 처음인데 ,,, 기계가 괜찮을라나 ..."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영, 아니올시다, 이다. 이 영화의 소재가 된 것이 보길도 대학생 살해 사건이란 건 영화를 보고서야 알았다. 굳이 실화에 기반했다는 것을 밝힐 필요가 있었는가? 멀뚱멀뚱 여대생 둘을 보던 그 어부 아저씨 연기도 영 꽝, 이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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