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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30
    옛글들
    redbrigade
  2. 2011/04/23
    2011/04/23
    redbrigade

옛글들

  • 등록일
    2011/04/30 20:26
  • 수정일
    2011/04/30 20:26

에레혼으로서의개념은야생적상태에의사물들자체로정의된다 이것은원초적부재의장소며이것을통해차이와반복이라는책은어떤근접의정합성으로서의일관성을가진다.

 

표정의문제또는표면의문제하나의표정이어떤방식으로미끄러지는가하는문제는일종의생태적심리학현상학의문제처럼보인다표정은우리가지각하기어려운미분율로항상미끄러지기때문에그것이매번어떤생태적결정을함축하는지파악하기힘들다 그것들은심층과에네르기층어딘가에서뭔가가되고있다 그효과는시실상측정불가능한영역에서드러나는데이것은필연적으로이분법의가상을초래한다 이분법은여기서단순히심신이아니다 이분법은일종의층간에서유추된다 지질학적효과또는고고학적변형인것이다 사실이러한공간적인유비는위험하다 왜냐하면표면의효과란단순히선분화와그것의적분으로환원되지않기때문이다그것은가장먼거리에서오히려더자주서로의효과를더능숙하게교환할것이다

 

서양철학전통이환경윤리나환경정의에관한최소한의모범도되지않는것처럼보이는것은인간중심주의의문제라기보다는타자개념에대한협소한이해라고보는것이더정확하다 애초부터자연은이타자의함축에들어와있지않았던것이다 그렇다면환경과타자성은역사적인근대성의발생과더밀접하게연관된문화와그위기라는맥락에서더잘이해될수있다 데카르트적인또는성서적인맥락에서는사실자연이란일종의맹점인것이다 따라서환경위기는직접적으로근대성의문제,이론적인동시에역사적실천의문제가된다

환경위기는그결과가먼저심각한위기로인지가능하게됨과더불어비로소의제가된것이다 이렇게되고서야인간은자신을둘러싸고있는환경을타자의범주안에포함할수있게된것이다 우리는환경문제에관해근대성담론을단죄할증거가없다 오히려지금여기타자를제대로인식한우리세대야말로그윤리적잣대로평가될수있다 환경문제는개념의역사적확대과정을노정하는문제며그래서이것은지식(science)이아닌지혜(sage)의문제가된다.

 

천안함사건은영구미제사건이될가능성이커보인다 국방부조사는현재전혀신뢰할만한결과를내놓지못하고있는데특히외부공격가능성외의다른해석을하나씩차단해가는모습에서더그렇다 객관적시각에서보면천안함은좌초일가능성이외부공격에의한피폭가능성보다크다 가능성의정도에서더유력한이부분을간과하는이유는무엇인가? 이런식으로해석의방향을잡아나가면서다른해석을봉쇄했을때는결과적으로모순에봉착할수밖에없다 이모순은해결불가능한어떤것이될것이고국방부조사단의결과가어떤식으로나오든의혹은풀리지않을것이다 애초에다른가능성들을쳐내왔기때문에그가능성을두고다시조사하지는않을것이고말이다 남은것은이사건을어떻게정치적으로가공할것인가하는문제만남는다 조중동이발빠르게움직이는그방향,그건이런판단하에서결정되고있을것이다

 

살(fresh)이란무엇일까 대부분의사람들이살에정성을들인다 근원적으로보자면그것은죽음이고소멸이다 그렇다면여기어떤역설이숨어있는것일까 소멸할것에대한관심또는지향(intention) 잠정적으로생각하자 살에대한관심은결국죽음에대한관심이다 여기 헤도니즘과금욕주의의우발성이있다 다시말해두관점의차이는본질적이지않다정도의차이다

 

권력(pouvoir)의 본질은 과시다. 본질은 현실화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지 않으면 권력은 히스테리 상태에 들어간다. 사실상 권력의 히스테리는 그 자체로 권력의 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은 스스로의 병력을 드러내든지 아니면 현실화되지 않는 비정상을 참아 나간다. 결절점은 여기에 있다.

비정상은 사실 권력만의 진실이고, 다중은 그 진실과는 다른 진실을 산다. 우정, 사랑, 연대, 더 가깝게는 영화, 드라마, 가족 그리고 ‘신데렐라 언니 ’ ... 정도다. 무관심과 정치는 그리 멀지 않다. 무관심은 사실상 정치적 뿌리다(무관심은 곧 삶에 대한 관심이며, 삶이 정치라는 것을 아는 순간 그 ‘무’관심이 곧 삶의 활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은 언제나 착각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권력의 진실과 다중의 진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아니, 다를 뿐만 아니라 적대적이다.

한명숙은 이러한 적대적 상황에서 그 ‘무’를 일깨우는 힘이다. 하나의 적대적 힘이 여기 녹아 있다. 천안함에 맞서는 정치적 힘 말이다. 천안함이 기뢰든, 어뢰든, 그 어떤 어중이떠중이에 의해 그 많은 목숨을 앗아갔든 권력은 관심이 없다. 다시 한번 말하자. 권력은 거기 관심이 없다. 권력의 관심은 과시다. 스스로의 힘에 대한 과시 말이다. 한명숙은 지금 그러한 과시의 한 가운데 선거를 준비한다. 선거는 과시에 비해서 너무나 힘 없다. 즉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명숙은 그 과시의 힘 앞에서 넘어질 수 있다. 천암함을 끌어 안고 가는 이 과시의 힘은 다중을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선거는 천안함의 침몰과 더불어 야권 연대의 가부를 따라 움직일 것이다.

이 움직임을 주목해야 한다. 천안함 함미가 올라 오는 순간, 정치는 어떻게 움직였는가? 천안함 함수가 올라 오는 이 순간 정치는 또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러고 보니 천암한 침몰이라는 이 전대미문의 사건이 도대체 너무 정치적이지 않은가?

MB는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동시에 그렇게 보인다, 동시에 그렇게 보이게끔 만든다. 누가? MB. 희한한 줄타기다.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지 않은, 그 말들. 천안함 함수가 올라오는 그 와중에 조중동은 함수가 의미하는 바를 벌써 말한다. 익숙하다.

이 와중에 한명숙은 시장출마를 선언했다. 여기에 지도리가 있다. 이것은 이벤트다. 더불어 MB와 다를바 없는 과시가 된다. 거울상. 여아 할 것 없는 과시의 정치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 와중에 PD 수첩이 쐈다. 최근 얼마간 지금만큼 언론이 중요한 때가 없다. 조중동은 연일 천암함에 북한을 끌어 들인다. MB는 연일 그것을 세탁해 의혹을 보낸다. 수구층은 벌써 결집했고, 그들은 표심은 결정되었다. PD수첩은 이 결정사항에 변수가 되지 못한다. 다만 합리적 진보와 보수층에 호소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이 사안은 의제 변경이다. 정치적 의제가 변화되는 것이다. 북풍은 얼마간 잠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영역은 수구 보수층이 아니다. 그들의 영해는 이미 정해졌기 때문이다. PD 수첩이 건드리는 바다는 따로 있다.

지켜볼 일이다. MB는 천안함을 밀고 갈 것이고, MBC와 다중은 검찰과 한명숙을 밀고 갈 것이다. 여기 이 길항의 한 가운데 6월 선거가 놓여 있다. 나올 만한 변수는 이제 박근혜다. 거기서 뭐가 나올 것인가? 이 공주님께서 뭐라 말할 것인가? 

 

권력의 거짓말이 상습적으로 변할때 나타나는 현상은 해석의 선의가 해체된다는 것이다. 권력도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는데, 이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바로 끝없는 해석의 퇴행현상이다. 이제는 권력 쪽이나 권력을 비판하는 쪽이나, 해석 투쟁 안에서조차 이전투구를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애초부터 지적 양심이라는 것이 거짓말하는 권력 쪽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고, 비판자들에게도 이런 경향이 점점 더 심해진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해석 투쟁을 넘어 완연한 권력투쟁으로 진입하며, 이때 승자는 물론 권력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쪽, 즉 거짓말쟁이 권력이 될 것이다. 비판의 무기가 무기의 비판이 되는 필연성이 여기 있다. 


 

주체화는 타자를 경유하여 객체화되거나 다시 주체화될 것이다. 완전한 객체화는 분열이나 죽음이지만 재주체화는 타자성 아래 던져진(sub-jectum) 객체화를 통해 더 풍부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는 그것이 온전하다면 그 안에 필연적으로 타자성, 객체성을 함축하며, 또한 예기한다. 타자는 주체의 인식근거이며 존재근거이고 이런 의미에서 주체는 자아와는 다르다. ...

 

'차이의 정치학'이 '되기의 정치학'과 다르며, 후자가 더 중요하며, 전자는 후자에 의해 구축되어야 한다는 이정우의 말은 경청할만 하다([주체란 무엇인가] p. 87).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어떻게 국가적인 방면에서 진행되는 차이의 정치학의 사각지대를 폭로하고 그것을 되기의 정치학으로 대체할 것인가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청와대와 검찰 간의 교감은 주로 법무부 장관을 통해 반공개적으로 이루어지고, 청와대 민정수석을 통해 세밀한 부분에서 살을 맞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요직에는 검찰 출신 선후배를 배치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정수석에 검찰관 별 상관 없는 문재인 수석을 앉혔는데, 이명박 정권은 옛 정석을 되살린 것이다. 초대 민정수석은 이종찬(고려대 졸, 서울 고검장 역임), 정동기(한양대 졸, 대검차장, 인수위 법무행정 간사 역임) 였고, 지금은 권재진(서울대 졸, 서울고검장 역임이다. 이정도면 이 정권이 얼마나 피에 굶주렸는지 알만하지 않은가?

 

현상학적자아는근원적인동일성안에서움직이는것인가차이는결국동일성이획득되는그지점에서사라지는것처럼마치그것이차이자체의운명인것처럼취급된다하긴어떤쩔학이든플라톤주의의그늘아래에서는동일한것을욕망할지도모른다.

 

현재한국사회정권은위기를노정중이다 북풍은그것에대한명백한증거다 문제는이바람이유월선거까지갈수있는가다 .

 

새폰을샀다 둘다연구에열중 얼추이런저런기능에익숙해진다 무엇보다멀티기능이된다 메모도음악들으며쓸수있을것이다 내설익은철학적사유를좀더안락하게정리할수있을것이다 4/8

 

하얀씨와함께벗꽃을본다 비오기저이미꽃을피웠다가후두둑떨어진꽃잎들이앞마당에누워있다 햇살가득한봄하늘 조급증때문에먼저맞이한다 조락 또는 조산 어떤것이든계절이목숨한뼘보다더길구나 우린또멀리떨어질것이고 우연이든필연이든영원히함께할자신이있다 조락이든 조산이든 말이다4/9

 

벗꽃예쁘게흐드러진거리에당신을남겨두고 난또먼길을간다 이렇게남겨두고갈때마다 아리다 이착하고예쁜사람을어찌남겨두는것일까 난매정하고이기적인가 잘살아야한다 당신이날믿는만큼 용기를가지고.

 

수원터미널에서80번을타고집으로간다 이도시는매번익숙함과낯섦을반복하는애인처럼내마음에휑하게들어찬다 한번아니몇번을지나쳐도 크게반기지않는다 한쪽에는다지어진아파트한쪽은탐조등을달고나와버스를굽어보는타워크레인 가로수들은내가고개고개를돌릴때마다사형수들처럼중얼거린다 난무죄야

 

아침운동은포기하고학원으로바로나선다 날씨흐리다 금연을해야겠다 정신이개운하지못하다는느낌 공부를제대로해야한다 그녀와의약속도지켜야하고말이다 인천에도착해서늘오던커피숍에자리잡았다 주말에여기올때마다늘같은자리에한외국인이앉아책을읽는다 고개를숙이고손은주머니에넣은채글ㅈ·들을꼼꼼히확인한다 책의유골을시선의솔로살살훑어나간다 잘다듬은턱수염사이로낱말들이피부를

간지럽히는듯. 4/10

 

수업을마치고인천지하철을탔다 반형성이어느정도되어가지만그래도여전히불안한구석이보인다 가면갈수록아이들을유지하는것에더신경이쓰일듯하다 수업내용이야하는만큼더여유있어지겠지만아이들이들고나는건내노력만으로결정되는것이아니니말이다 원장과부원장의신뢰도중요할것이다 신뢰를쌓아가면서입시에서좋은결과를낸다면이곳일도장기적으로내다볼수있을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virtus와fortuna가함께작동할것이고그것을사랑하는것이중요하다.

 

아주대앞카페구스또 늘오는곳이다커피맛이좋고바리스타분도친절한곳 맘은좀오락가락이다 아마결혼하기전까지는이긴장상태가지속되리라 좀있다커피숍을나서기전에큰형님에게전화를넣어야한다 여전히자연스럽진않다 삶의문제라는게철학적질문과다른계열을형성하고있다는것을배운다 그것은타자의문제고관계의문제기때문이며게다가정서적인것이다 로고스는신체를떠날수없기때문에파토스를 안고갈수밖에없을것이다 고뇌는오래머무는법이고그것이그파토스의진정성을증거하는게다 이지속되는정서의지체기간동안주체는변양을통해다양체가되기보다영점아래에얼어있게될게다 바다는어디에있을까 이갑갑한샛강이봇물터질바다말이다. 4/12

 

수원가는일반고속버스 커텐을비집고자꾸만햇살이브딪힌다 막여름이된듯한햇살이라니 당신을두고오는길이눈부시게산란한다 불모의땅처럼전신주가차창앞으로넘어지고 흰색차선이죽죽긋고지나는길위에 4월의햇살이픽픽쓰러진다 저들은기도하는걸까.

 

 

라캉을 인용하자면 무의식은 언어다. 그렇다면 무의식을 벗어난 의식은 무엇인가? 프로이트 이후로 중요한 것은 의식이 아니다. 무의식이 의식을 규정하고, 그로 인해 의식은 진정한 의미에서 미궁(labartine)에 빠졌다. 미궁은 미로가 아니다. 미로는 출구와 입구가 정해져 있으나 미궁은 입구에 대응하는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미궁의 끝은 괴물이며 괴물과의 대면이고 무의식의 절단된 신체와의 대면이다. 혹은 신체의 변형, 소(미노타우로스), 인간의 목소리를 내는 그 소의 형상 말이다. 

 

생각해야 할 것은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에서 의식은 항상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긴다. 소를 죽인다. 그러나 절대 길을 잃지 않는 의식은 항상 무의식의 언어를 교란한다. 나는 지금 의식과 무의식의 자리를 바꿔 놓고 있다.

 

의식은 자신의 자리를 chaos에서 찾는다. 이때 개념(concept)이 등장할 것이다. 개념은 오랜 사막대 여행 후에 절을 찾은 현장법사의 가사장삼과 같다. 그것은 혼돈을 헤매다가 비로소 휴식을 취한다. 개념은 거기 있다. 현장의 몸은 개념을 벗어두고 모사(경전번역)에 열중한다.  소를 죽였지만 스스로를 회피하는 것은 무의식의 임무다. 가사장삼을 벗어 둔채로 그는 모사에 열중하고 소는 발견될 수 없다. 마지막에 가서 보이는 것은 원륭한 세계, 소도 아이도 없는 그 경지다.

 

그러나 이것은 초월이다. 근거를 망치에서 찾지 않고, 집에서 찾는 것. 목적을 숭배하는 것. 그런 것들 말이다. 초월은 목적론적이고, 이때 주체는 개념을 완전히 벗어나 휴식을 경멸하면서 활동할 것이다. 신이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깨달음이 서방정토로 도망간다. 귀족들은 환호성을 지르지만 민중은 염불(미륵)을 외울 것이다.

 

고대 그리스는 physis를 잊고 moira를 넘어 hybris를 취한다. 진보이고 동시에 쇠락이다.

 

나는 nomos의 등장을 플라톤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nomos는 필연이고 운명이다.

 

physis에서 nomos.  콘퍼드를 따르자면 여기서 주체가 나온다. 그러나 구분하자. 중세의, 근대의 주체와.

 덧없음에서 주체로, 이게 더 옳지 않겠는가? 주체의 탄생을 중세 이후로 본다면 아마 신에서 주체로, 가 되었으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그러한 이행을 정당화할 것인가? 

 

 

하나(one)와 여럿(plurality)에 대해 생각한다. 리꾀르는 그의 아들이 철학에 대해 묻는 질문에, 철학은 결국 이 문제, 즉 '일과 다'의 문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입장을 취하자면 '하나'의 편을 들 것이다. 입장을 반성하자면 '여럿'의 편이 될 것이다. 여기 지도리는 바로 반성이고, 그것은 더도 덜도 아니고 철학이다. 어디로 방향을 정할 것인가?

 

선택하라. 실존적 선택이 아니라 이것은 형이상학적 선택의 문제라 할 만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생성'이라는 오래된 문제가 또 도사리고 있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생성'이라는 산을 또 넘어야 한다. '일'이라면 발생의 문제가 있을 것이고, '여럿'이라면 '수렴'의 문제가 생긴다.

 

이를테면, 여기 촛불이 있으나 이것을 하나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볼 것인지(불티가 중심으로 수렴하는), 이런 저런 불꽃의 연속(다양체multiplicity로 생성하는)으로 볼 것인지.

 

존재론을 떠나서는 철학은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반드시 잔여(residue)가 생긴다. 해석의 잔여, 실존의 잔여, 존재의 잔여, 그리고 정치의 잔여.

 

중심은 잔여일 것이고, 잔여는 원륭(圓融)으로 통한다. 불이(不二), 그리고 상의상관(相依相關).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명백하다. 존재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양성과 더불어 잔여가 긍정되어야 하며, 동시에 일원론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는 이제 'to ti on'또는 ousia가 아니라 오히려 symbebekos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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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3

  • 등록일
    2011/04/23 13:07
  • 수정일
    2011/04/23 13:07

일상적으로 만나는 인간관계의 '금'(crack)이라는 것이 있다. 과연 이 '금'이 진실일까? 난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러한 금은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단절'이다. 단절을 겪으며 나는 상처를 입고, 오랫동안 그러한 단절이 의미하는 바르 캐묻는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상황을 판단하면 그것이 일종의 이별통고이며, 한동안의 무관심이며, 또한 냉정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의 말(mot), 하나의 눈짓, 제스춰 그리고 상이한 관점들. 나는 이것들이 결국은 표면적인 단절로 귀착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한다. 그것은 일종의 운명이다.

 

그래서 그것을 사랑할 것인가? 심층에 이르러 그러한 단절을 이어붙이고 있는 인과성을 긍정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나의 정서에 역행하는 것,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단절을 긍정하는것. 나는 그것이 괴롭지만, 이제 긍정할 때가 된 것이다. 사랑은 표면에 있지 않고 저 깊은 곳에서 울리는 '어두운 전조'다. 사랑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는 단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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