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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진리'에 대하여 2

  • 등록일
    2010/12/23 16:50
  • 수정일
    2010/12/23 16:51

 16. 정치에 있어서 진리는 하나의 획득 가능한 권력이지만 스피노자가 예견한 바와 같이 그것은 한 편에서는 potentia이고 다른 한 편에서는 potestas다. 물론 여기서 보다 근원적인 것은 전자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전자의 잠재성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한도 내에서의(때로 그것은 무한한 폭력으로 발현되기도 하지만-혁명적 폭력의 문제) potestas가 필요하다. 라클라우(Laclau)가 말하는 “빈자리의 생산”으로서의 권력은 이런 현실화 과정 내에서 2차적인 actuality를 가능하게 한다. 만약 정치적 진리가 이러한 빈자리의 생산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라면, 역으로 그것은 또한 스스로가 빈자리를 남겨두고 물러남으로써 권력을 놓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바로 ‘진리의 적대적 성격’이 탄생한다. 즉 정치적 진리는 결코 단선적인 ‘하나’의 과정 내에서 완결적으로 흐르지 않으며, 언제나 적대의 한편과 다른 한편에 빈자리를 실어 나름으로써 획득된다(또는 놓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존재론적인 유예가 아니라 적대의 양 진영이 진리가 가진 폭력적 특성을 일종의 정치적인 ‘공세’로서 활용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다 깊은 의미에서 이러한 빈자리의 ‘물림’(withdraw)은 정치적 진리가 어떤 획득 불가능한 ‘상황’과 ‘주체’를 가정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발생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 상황은 바로 1871년 파리와 1980년 광주에서 ‘일시적으로’ 획득된 것이기도 하고, 이런 저런 시위들 안에서 불현듯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 상황과 조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이고, 또 ‘빈자리’이지만 더불어 ‘덧없음’(헬라스적 의미에서)은 아니다. 따라서 정치적 진리란 다름 아니라 적대의 한 주체, 특히 기존의 권력으로서의 potestas가 아니라 하나의 잠재적 계급의 혁명적인 형성과 그 폭력적 과정으로서의 potentia가 권력을 장악하고, 또 potestas 자체를 억압할 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그의 11번째 테제를 통해 말한 ‘해석’(=potestas)과 ‘변혁’(=potentia)의 상관관계라고 할 것이다.

 

17. 만약 ‘사건’의 진리가 올바르게 관철되기 위해, 정치권력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이 사건 자체의 ‘매듭’을 확실히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요청한다. 이를테면 1936년 당시 프랑스 인민전선(사회당, 공산당, 급진당의 연합전선)은 5월 선거에서 승리하였지만 중요한 매듭을 놓쳐 버림으로써 적대의 기회를 공중분해 시켰다. 그 결절점은 선거가 끝나고 내각이 구성되는 시점이었다. 그때 공산당은 레옹 블룸(사회당)이 새 총리가 되는 과정에서 어떤 전략도 전술도 취하지 않았다. 레닌이었다면 이때 이 사건의 지도리를 일정한 방향으로 틀어 놓기 위해 공산당의 슬로건을 ‘모든 권력을 인민에게’로 라고 바꾸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공산당은 선거에 승리하고서도 아무런 정치권력도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이 역사적 사례의 교훈은 ‘사건’의 정치적 진리가 그 적대적 전선의 선명화를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이고, 여기에 대한 적극적 개입(때로 폭력적인)만이 potentia를 현실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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