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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06
    [나의 미카엘](아모스 오즈, 1968)
    redbrigade
  2. 2009/06/14
    형이상학의 재림-한스 요나스, [물질, 정신,창조]
    redbrigade

[나의 미카엘](아모스 오즈, 1968)

  • 등록일
    2009/10/06 00:20
  • 수정일
    2009/10/06 00:20

또 하나 독서의 흔적을 남긴다.

 

 

『나의 미카엘』, 아모스 오즈, 최창모 옮김, 민음사, 1998

 

[7]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9]고양이는 자기를 좋아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은 결코 사귀지 않지요. 고양이는 결코 사람을 잘못 보는 법이 없거든요.

 

[20]잠시 동안 그는 커다랗고 슬픈 꼬마처럼, 머리카락이 거의 다 잘려나간 꼬마처럼 보였다. 나는 그에게 모자를 사주고 싶었다. 그를 만지고 싶었다.

 

[23]겨울밤에 예루살렘의 건물들은 검정색 배경 앞에 얼어버린 회색의 형상처럼 보인다. 억눌린 폭력을 잉태하고 있는 풍경. 예루살렘은 때로 추상적인 도시가 된다. 돌과 소나무, 그리고 녹슨 쇳덩이들.

 

[25]잔인한 시련에서 자긍심이 솟아나왔으므로 나는 그 시련을 소중히 여겼다. 권력의 수복. 나는 병이 낫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로젠설 선생님의 말로는 어떤 의미에서는 병이 자유로움을 주기 때문에 아픈 것을 더 좋아하고 낫기를 거부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해 늦겨울에 병이 다 나았을 때 나는 유배감을 경험했다. 나는 연금술을 일으키는 힘을, 꿈과 현실을 구분짓는 선을 넘어서 나에게 꿈을가져다 주던 힘을 상실해 버렸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나는 깨어난다는 것에 대해 실망감을 느낀다. 나는 심각한 병에 걸리고자 하는 막연한 나의 열망을 비웃고 있다.

 

[31]{미카엘}비가 오면 예루살렘은 사람을 슬프게 만들어요. 사실은 예루살렘이 언제나 사람을 슬프게 하는데 그것이 매일 매순간, 매년 매시에 종류가 다른 거죠.

 

[32]{미카엘}한나 고양이들은 겨울에, 그것도 가장 추운 날 가장 발정을 많이 한다는 거 알고 있어요? 결혼하면 나는 고양이를 기를 거예요. ... 난 외동아들이에요. 고양이들은 어떤 제약이나 관습에도 묶여 있지 않으니까 교미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발정한 고양이는 낯선 사람에게 붙잡혀서 죽도록 짓눌린다고 느끼나봐요. 그 고통은 육체적인 거죠. 타는 듯하고.

 

[36]물론 나는 그가 고양이를 기르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정말로 나에게 평온함을 느끼게 해준다. 어째서 내가 결혼할 사람이 아주 강해야 한다는 걸까?

 

내 곁에서 침묵하며 걷고 있었다. 그와 나, 우리들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기묘한 한 순간, 나는 내가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아니면 시간이 현재가 아니라는 격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 모든 일은 전에 겪은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 여러 해 전에 어떤 사악한 남자 곁에서 이 칠흑 같은 좁은 길을 다라 걷고 있을 것이라고 내게 경고했을 것이다. 시간은 더 이상 평탄하지도, 흐르고 있지도 않았다. 시간은 일련의 갑작스러운 격발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내가 어렸을 때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꿈 속이든지, 무서운 이야기 속이든지. 갑자기 나는 말없이 내 곁에서 걷고 있는 그 희미한 형체에 두려움을 느꼈다.

 

[40]그가 외투 단추를 끌러 나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우리는 실재였다. 나는 억눌려 있던 그의 공포를 받아들였다. 나는 그것을 즐겼다. 당신은 내 것이에요, 내가 속삭였다. 절대로 다시는 멀어지지 말아요, 하고.

 

[47]보통 사람이 철저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거짓은 늘 저절로 드러나버린다고 말이다. 그건 마치 너무 짧은 담요 같은 것이다. 발을 덮으려고 하면 머리가 드러나고 머리를 덮으면 발이 빠져 나오고. 사람은 그 구실 자체가 불유쾌한 진실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무언가 숨기기 위해서 복잡한 구실을 만들어낸다. 반면에 완전한 진실은 철저하게 파괴적이고 아무런 결과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보통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조용히 서서 지켜보는 것뿐이다.

 

[91]잠을 자지 않을 때에 아이는 눈을 뜨고는 새파란 섬을 보여 주곤 했다. 나는 이것이 이 아이의 내면의 색이라고, 눈이라는 틈을 통해서 아기 피부 아래에서 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밝은 파란색의 작은 방울이 보이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106]날은 여전히 흔적을 남기지 않고 지나갔다. 나는 매일, 매시의 경과를 이 글에 기록해야 하는 엄숙한 의무를 지고 있으며 그 이유는 나의 날들은 나의 것이며 나는 평온하고 날은 예루살렘 가는 길에 기차에서 내다본 낮은 산들처럼 쏜살같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109]나는 그의 자제력을 사랑했다. 그것을 깨부수고 싶었다.

 

[199]나는 기쁨과 기대로 몸을 떨면서 창가에 서 있었다. 덧창 사이로 붉은 구름에 뒤덮여 밝은 안개의 미세한 틈을 뚫고 지나가려는 해를 지켜보았다. 잠시 후에 해는 갑자기 나타나서 나무 꼭대기를 밝은 빛에 휩싸고 뒤쪽 발코니에 걸려 있는 양철을 번쩍이는 광채로 뒤덮었다. 나는 거기에 사로잡혔다. 맨발에 잠옷차림으로 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섰다. 창틀에는 서리꽃이 피어 있었다. 실내복 차림의 한 여자가 쓰레기통을 비우러 나왔다. 그 여자의 머리카락도 나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209]땅은 억제된 화산 위에 놓인 초록색 껍질에 불과하다.

 

[212]이 남자는 언제 자제력을 잃을 것인가? 아, 한 번만이라도 저 사람이 겁에 질린 것을 한번만이라도 보았으면. 기쁨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미친 듯이 달리고.

 

[231]죽음과 나는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가깝고도 먼 사이. 인사나 겨우 하는 정도인 아는 사람.

 

[233]꿈이 산산조각나면 민감한 사람들은 구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깨진다.

 

[233]<너의 파괴자들과 너를 소멸시킨 자들이 네 앞에 나아가리라.> 이사야서의 이 구절이 가지는 의미는 두 가지이다, 라고 교수가 말했다. 우선 히브리 계몽운동은 그 자체 내에 궁극적적으로는 파멸에 이르는 사랑을 키웠다. 그 다음에는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 낯선 땅을 보게 되었다. ... 소수의 꿈구는 사람들과 투사들, 현실에 반기를 든 현실주의자들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부흥은 없었을 것이고 말 그대로 파멸할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업을 달성하는 것은 언제나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교수는 결론지었다.

 

[265]<말해 봐요, 미카엘> 나는 혐오감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물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거죠?> 미카엘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에 대해서 잠시 동안 생각했다. 그 동안에 그는 테이블에서 부스러기를 모아 자기 앞에 한 무더기로 쌓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질문은 무의미해.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야. 그냥 살고 있지. 그걸로 끝이야>

<미카엘 갠츠, 당신은 태어났을 때와 똑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죽을 거예요. 그걸로 끝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지. 그걸 진부한 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말이 맞을 거야. 하지만 진부하다는 건 진실의 반대는 아니야. ‘2 더하기 2는 4이다’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래도 …>

<그래도 미카엘, 진부하다는 것을 확실히 진실의 반대고, 나{266}도 언젠가는 두바 글릭처럼 미쳐버릴 거고 그건 다 당신 책임일 거예요, 얼간이 갠츠 박사님>

<진정해 한나>

 

[292]평화로운 미풍이 소나무를 건드려 흔들어 놓는다. 먼 하늘이 서서히 창백해진다. 그리고 저 광대한 공간에 조용하고 차가운 정적이 내려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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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의 재림-한스 요나스, [물질, 정신,창조]

  • 등록일
    2009/06/14 19:50
  • 수정일
    2009/06/14 19:50

한스 요나스 지음, 철학과 현실사, 2007독일어 판을 좀 참고하고 글을 써 볼까 싶었는데, 독일어 판이 절판이란다. 아쉬운 대로 읽은 걸 정리해 본다.

 

한스 요나스라고 하면 우선 형이상학적 물음에서 시작하여 과학철학으로 그리고 생명윤리로 여러 번의 전회를 거듭한 철학자로 기억된다. 이에 걸맞게 그는 이 말년의 저작에서 아주 단호한 어조로 윤리학과 형이상학의 복권을 강조한다. 물론 이러한 강조의 조건으로 과학적 성과(진화론)를 참조하고 있다. 하지만 과학이 가지고 있는 문제틀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기독교 철학자로서 그가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고, 형이상학의 복권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결국 구원을 요청하는 것은 '신'이다.

 

사실상 한스 요나스가 주장하는 '복권'은 오래된 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라기 보다 잊혀진 것을 발굴하는 작업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데카르트가 플라톤 이래 형이상학의 유구한 명성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폄훼한 이래로 오랫동안 일종의 '존재론적 망각'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은 요나스 혼자만의 주장은 아니다. 가다머가 그렇게 파악했으며, 그 전에 칸트는 형이상학을 인간의 선천적인 '소질'이라고까지 했다(칸트는 결과적으로 형이상학의 신학적  고갱이를 비워버렸고, 결과적으로 그것의 내밀한 효과를 반감시켰지만).

 

내 생각에 요나스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윤리적 물음이 기반하는 형이상학이란 반드시 급진적(radical)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뿌리까지 파고 들어서 '과학'이 감히 도달하지 못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캐 묻는 것'(Socrates),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다가 한 마디 덧붙이자면, 그 물음은 더 이상 '~ 은 무엇인가'가 되기 보다, '어떻게, 왜, 누가'라는 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형이상학은 '존재 자체'에 대한 관념론이 아니라 '존재자 그것들'(aliquid)에 대한 유물론이 되어야 한다는 것. 문제는 idea가 아니라 singularity라는 것.   

 


 


한스 요나스 지음, 김종국, 소병철 옮김,『물질, 정신, 창조』, 철학과 현실사, 2007.

 

역자서문_ 아우슈비츠로 빅뱅 읽기: 한스 요나스의 <물질, 정신, 창조>

머리말

 

1 우주기원론적 로고스? 근본 물질 속에 어떤 "정보"가 깃들어 있었다고 가정할 수 없는 이유

2 로고스에 대한 대안: 자연선택에 의해 무질서로부터 질서가 생성되다

3 주관성이라는 수수께끼

4 주관성이라는 데이터는 우주론적 현상에 무엇을 보태주는가?

5 정신의 초월적인 자유

6 정신이라는 데이터는 우주론적 현상에 무엇을 보태주는가? 서구 형이상학의 논변들

7 이후에 진행될 숙고의 추측적인 성격

8 정신의 제일원인에 대한 물음: 정신의 제일원인은 정신보다 못한 것이었을 수 있는가?

9 신인동형론에 대한 반론

10 물질과 정신의 단순한 무모순성: 진화의 현상 앞에서 무능함을 드러내는 데카르트의 이원론

11 물질과 정신의 완전한 일치: 정신의 우주적인 희소성 앞에서 무능함을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심신 병행론

12 교정된 우주론적 현상에 따라 새롭게 제기된 우주기원론적 물음

13 근원적인 정신의 자기 소외로서의 세계의 시작: 헤겔 변증법의 진실과 거짓

14 모든 성공 형이상학의 약점: 창조에 있어서의 신적 모험에 대한 오해

15 대안적인 우주기원론적 추측: 우주의 자율성과 그 기회를 위하여 신이 힘을 포기하다

16 우리가 신을 도와야만 한다: 에티 힐레줌의 증언

17 철학은 사변적이어도 좋은가?

18 다른 곳에 또 하나의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하는지를 아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역자해석_ 기술공학시대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요구하는가?

 

[28]따라서 우리는 우주론적 현상을 다룸에 있어 밖으로부터 안으로 나아가는 셈인데, 이는 존재사적으로는 더 이른 것으로부터 더 나중의 것으로, 양적으로는 가장 흔한 것으로부터 더 나중의 것으로, 양적으로는 가장 흔한 것으로부터 가장 드문 것으로, 구조상으로는 가장 단순한 것으로부터 가장 복잡한 것으로, 추론 상으로는 봄(Sehen)으로부터 지각(Fühlen)을 거쳐 사유(Denken)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가장 내밀하고 가장 드물고 가장 늦게 발생한 것으로부터, 물질보다도 먼저 존재하고 있었던 최초의 시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요컨대 우리는 우주론적 현상으로부터 우주기원론적 추측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29]추측은 이성의 소관이긴 하지만 이성을 구속하는 힘을 가질 수는 없다. 우리는 만유의 시원에 관한 사변에서 추측 이상의 어떤 것을 기대해선 안 된다.

 

[32]가령 생성하는 물질 속에 태초부터 이미 깃들어 있던 우주론적 ‘로고스’와 같은 일체의 예정된 프로그램과 계획에 관한 가설은 발전에 대한 설명 모델로서 타당하지 않다. 간단히 말해서 정보란 축적되는 것인데, 대폭발은 어떤 것을 축적할 시간적 여유를 아직 갖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발생적으로만이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정보의 개념, 즉 이미 현존하는 로고스의 개념은 타당하지 않다. 개개의 경우에 안정적인 분절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든지 간에 이 개개의 경우는 오직 자기 자신을 반복하고 자신의 차원을 유지하며 세계 내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넓힐 수 있을 뿐, 자신을 넘어서 나아가는 행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이 행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밖으로부터 다가와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하는 어떤 초월적인 요인이 필요하다.

 

[35]질서는 무질서보다 더 성공적이다. 처음에는 무법칙적이고 불규칙한 것, 그 어떤 보존 법칙에도 따르지 않는 것이 임의의 다수성 속에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어서 머지않아 소멸하고 규칙적인 것에 자리를 내주어 결국엔 규칙적인 것만이 남게 된다. (또다시 ‘동어반복’이지만) 단명한 것은 바로 그것의 단명 때문에 장수하는 것에 길을 내주게 되며, 이후 장수하는 것이 점점 더 확산되고 공고해질 때 그 속에서 아무런 입지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 영속적인 프로톤이 형성되고 확산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중력과 역학이 지배적인 힘을 얻게 되었다. 또한 수소 원자로부터 원소 주기율표와 (아름다운 결정(結晶)들의 세계를 포함한) 화학의 세계가, 요컨대 물질의 왕국이 출현했다. 더 나아가 최초의 광선으로부터 전자기 에너지의 양자 구조도 형성되었다... . 한마디로 말해서 입자와 네 가지 힘들(등 등), 보존법칙 및 이와 결부된 엄격한 인과성 그 자체와 그것의 우주적인 우세는 모두 발전과 선택의 산물이다.

 

[37](원주)자연 내의 평형은 절대적으로 안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특별한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한에서만(rebus sic stantibus) 유효한 어떤 것이다. 따라서 ‘순환’의 현상 역시 - 그것이 스스로의 영속성과 끊임없이 갱신되는 삶의 사이클을 통해서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위안을 준다고 해도 - 그 자체로는 시간적이고 무상하며 장기적으로는 쇠락의 과정에 내맡겨져 있다. 그러한 현상은 과거에 진화의 과정에서 규칙적인 인과성이 태초의 혼돈에 대하여 승리를 거둔 덕에 나타났지만, 그러한 인과성은 그때부터 부단히 마모되어 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우주의 무상함에 우리가 놀랄 필요가 없다. 우리와 신적인 관찰자의 관점에서 볼 때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는 우주적 모험 전체의 의미를 결정하는 바로 그것(즉 생명 - 역자)이 출현할 수 있었던 기회는 바로 그와 같은 크고 넓은 마디들의 - 우리에게는 영속적인 것처럼 보이는 - 사이사이에 있었다.

 

[37]왜 세계는 그러한 가장 일반적인 영속적 질서와 거기에서 직접적으로 생성된 대우주와 화학 세계의 구성물들에 그냥 머물러 있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다윈의 대답은 맹목적인 우연과 개별 사례 속에서 기존의 구성물들에 새로운 특징들(구조적인 요인들)을 부여할 수 있을 만큼[38]의 무질서가 항상 충분히 남아 있었으며, 생존 기준이 오직 확률로만 표시되는 진화의 선택 과정에는 주사위 던지기에 비할 만한, 순간의 우연이 가로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찾으려고 했던 ‘초월적인 요인’이다. 그것은 선행하는 정보, 로고스, 계획, 지향 등의 개입이 없이 새로운 것과 고차원적인 것으로 인도한다. 이 과정은 이미 ‘정보’화되어 버린 기존 질서가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무질서 - 이것은 기존 질서에 부가적인 정보로서 강요된다 - 에 감염됨으로써 일어난다.

 

[41]생명의 영역, 즉 유기체의 내부에 주관성이 등장한 것은 하나의 경험적인 사태이다. 물질계의 특정한 화학적-형태학적 질서로부터 전체 유기체의 왕국이 출현했다는 사실은 물질 그 자체의 외적인 속성들 - 이는 이를테면 물질의 ‘기하학’이라 할 수 있는데 … 그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차원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 부족한 부분을 나중에 보완하는 식으로 그러한 경험적 데이터에 덧붙여질 수도 없다. 우리는 결코 공간량과 지각의 합계를 낼 수 없다. 양자의 명백한 병렬적 공존에도 불구하고 ‘연장’과 ‘의식’을 하나의 동질적인 장 이론으로 통합할 수 있는 공통분모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단순한 병렬을 넘어 상호 의존과 상호 작용 속에서 공존한다. 더욱이 양자는 철두철미 ‘물질’ 속에서 공존한다.

 

[43]영혼과 정신의 생명, 즉 ‘의식’ 그 자체를 다른 방식으로 [44]- 즉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생성되어 - 존재하는 뇌수 안에서 다른 방식으로 - 즉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 결정된 과정들의 무력한 부수현상으로 보는 일면적인 유물론적 선택지도 근거가 박약하기는 매한가지다. 이러한 일원론적 ‘부수현상설’은 이원론적으로 피안을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자기모순을 안고 있으며, 엄격한 철학적 논변에 의해 반박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수수께끼에 대한 일원론적 해결책을 모색해 볼 만하다. 왜냐하면 동물과 인간의 내면에서 싹튼 주관성의 목소리가 언젠가 말 없는 물질의 소용돌이 위로 떠 올랐지만, 그것은 계속해서 여전히 물질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면성의 생성에 의해 발언권을 얻은 것은 바로 세계 물질 자체이다. 세계물질의 존재를 결산하는 과정에서 세계 물질의 가장 경이로운 성과를 세계 물질로부터 박탈해선 안 된다. 따라서 일원론적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물리학(Physik)의 외적인 계량 가능성을 넘어 ‘물질’의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교정하고 보완하는 일이다. 물리학의 계량 가능성은 물질의 추상일 뿐이다. 요컨[45]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세계 물질의 메타-물리학(Meta-Physik)[형이상학]이다.

 

[48]주관성과 같이 전혀 무차별적이지 않은 것이 전적으로 무차별적이고 중립적인 것에서 생겨났으리라는 것, 따라서 이러한 주관성의 출현 자체는 완전히 중립적인 우연이어서 그것의 발생을 조장하는 그 어떤 종류의 선호도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대단히 무리한 생각이다. 차라리 그러한 선호가 물질의 태내에 존재했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 따라서 물질에는 비록 계획(우리는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이에 대한 가설을 부인해 왔다)은 없었지만, 아마도 계획에 대한 동경과 같은 어떤 것, 이를테면 우주적인 우연의 기회를 포착하여 그것을 계속 [49]관철시키는 하나의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한에서 ‘우주기원론적 로고스’ - 이것이 근본 물질에 내재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우리는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 보다는 ‘우주기원론적 에로스’가 더 진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사태의 대부분은 여전히 우연에 맡겨져 있다. 예컨대 지구처럼 생명에 특별히 유리한 조건을 갖춘 행성이 우주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것은 정말로 있을 법하지 않은 희한한 우연이었다.

 

[50]생명은 자기목적이다. 다시 말해 생명은 능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원하며 추구하는 목적이다. 목적성은 자기 자신을 열렬히 긍정한다는 점에서 무차별적으로 무목적적인 것보다 무한히 우월하다. … 이는 곧 물질이 태초부터 잠재적으로 주관성이었음을 의미한다. 비록 그러한 잠재성의 현실화를 위해서는 영거의 시간과 희한한 행운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정도의 ‘목적론’을 끌어낼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생명의 증언 뿐이다. / 지금까지 우리가 제시한 논변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목적성 - 목표를 향한 노력 - 이 특정한 자연적 존재, 특히 생명체 내부에 주관적인 의식으로서 명백하게 나타나고 거기에서 또한 객관적이고 인과적인 작용을 일으킨다면, 목적성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을 산출한 자연에 완전히 낯선 것일 리가 없다. 다시 말해 목적성은 그 자체가 ‘자연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자연적으로 제약된 것이며,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이다. [51]따라서 목적인은 - 더 나아가서는 가치들과 가치의 차이들도 - (반드시 중립적이지만은 않은 - 세계 인과성 개념의 한 요소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세계 인과성은 목적인과 함께 주어진 성향인 동시에 작용인들의 결정 구조에 목적인이 개입하는 것을 허용하는 개방성이다. 생명 현상이 우리의 사유에 시사하는 바는 이렇게 심대하다. … 이와 같은 목적론적 잠재력이 그러한 외[52]적 조건들의 실현에, 따라서 유기체와 뇌수의 진화에 이미 관여했는지(만약 그랬다면 어디까지 관여했는지), 아니면 그러나 조건들이 독자적인 발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추측은 해볼 수 있다. 어쩌면 이미 그런 조건들에 대한 ‘동경’이 인과적으로 작용하면서 질료적으로 제공된 최초의 기회들을 밑거름으로 하여 점차 (즉 그러한 기회들의 축적을 통해 지수적인 방식으로) 그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나는 - 에로스 개념을 허용하는 순간에 이미 암시했던 것처럼 - 이것을 믿는다.

 

[56]인간의 도덕적인 자유 … 그것은 모든 자유 중에서 가장 초월적이고 가장 위태로운 자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또한 단념(Sich-Versagen)의 자유이자 자발적으로 선택된 무감각(Taubhiet)의 자유이며, 더 나아가서는 극단적인 악 - 이것은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최고선의 가상으로 위장하고 나타날 수도 있다 -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선과 악에 관한 지식, 즉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은 또한 선과 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선들을 선택할 때마다 동인으로서 관여함에 틀림없는 ‘에로스’는 - 심지어는 인간의 경우에서와 같이 고도로 시각화된 에로스조차도 - 행위를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는 하지만 아직 이것만으로는 스스로가 참된 목표를 [57]찾아내어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보증할 수 없다. … 도덕적 자유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지적 자유의 또 한 측면을 추가해야만 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갈 수 있는 사유의 능력, 자신의 주체인 ‘자아’를 주제화할 수 있는 능력, 요컨대 반성의 자유이다. 이 반성의 자유 안에서 사유의 세 가지 자유[pp53-4 참조,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 자유, 감각적인 소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유, 초월의 자유]는 함께 작용한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자유가 … 오직 인간, 즉 정신에게만 있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

 

[59]타자를 향한 일차적인 의욕은 주어진 경우에 운이 좋으면 만족될 수 있지만, 반성적으로 함께 의욕된 것, 즉 자기 삶의 방식에 대한 자아의 관심은 항상 만족되지 않은 채 자기 회의로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러한 자기 관심은 세 번째로 언급한 사유의 자유 - 즉 무한하고 영원하며 무제약적인 것으로 상승할 수 있는 자유 - 의 규범에 스스로를 종속시킨다. 둘째, 선을 행할 수 자유는 동시에 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유이기도 하며, 악은 천의 얼굴을 하고 선에 대한 모든 의욕 속에 숨어 있다. 초월적인 [60]척도에 의거한 자기 구속은 관심 그 자체를 무한하고 무제약적인 어떤 것으로 만든다. 영원의 관점에서는 더 이상 무상하고 유한한 객체의 덧없고 제한된 선만이 아니라 그와 같은 무한하고 무제약적인 것 역시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따라서 이제 관심은 동시에 자기 자신이 된 주체, 즉 해방된 주체의 무한한 교활함에, 즉 모든 자유 의지의 어쩔 수 없는 이중성에 내맡겨진다. … 자기 관심 및 자기 시험인 동시에 자기 도취이기도 한 반성 그 자체는 이러한 이중성을 본질적으로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다. 과도한 죄책감에 몸을 떨며 영혼의 심연 속을 헤매는 위대한 인물들의 전율스런 이야기들은 바로 그러한 이중성을 보여준다. 그들은 최고선을 향한 사랑에 불타며 자기 탐구의 고통으로 [61]괴로워한다.

 

[62]먼저 우리는 순수한 내면성을 대변하는 관념론적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첨삭된(expurgiert) 외면성을 대변하는 유물론적 물리학자들 또한 쉽게 망각하곤 하는 한 가지 사실 - 이 사실은 겉보기엔 ‘역설’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주관적인 것의 현존 그 자체가 세계 내의 객관적인 사태이며(이를 부정할 수 잇는 것은 오직 유아론뿐이다), 따라서 인간적인 현상 역시 우주론의 소관사라는 사실이다.

 

[69]내면성과 관심과 목적에 대한 의욕을 가진 생명은 세계 물질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생명은 세계 물질의 본질에 전적으로 낯선 것일 리가 없다. 또한 생명이 세계 물질의 본질에 낯선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세계 물질의 시원에도 낯선 것이 아닐 것이다(여기에서부터 논변은 우주기원론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 대폭발 속에서 형성되고 있던 물질에는 이미 주관성의 가능성, 즉 우주적이고 외적인 실현의 기회를 기다리는 잠재적인 내면성의 차원이 내재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앞으로 우리는 내면성의 자기실현을 위한 물리적 조건들이 전개되는 데 있어 그러한 ‘기다림’, 즉 ‘동경’이 관여했다고 추측할 것이다. 이처럼 생명에 이르기까지의 우주의 역사에서는 기계적인 우연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도 하나의 은밀한 목적론이 관철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런 경향을 추동하는 ‘의지’의 계기가 태초의 근원 그 자체 내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우주기원론적으로 추측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추측들이 내재적인 자연철학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었[70]다. 태초의 ‘보는’ 지성, 즉 궁극적으로 초래될 것에 대한 영원한 예견은 가정될 필요가 없다. 무의식적인 경향만으로도 생명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족하다. 우리의 사유가 생명 현상을 실마리로 하여 도달하게 되는 범심론은 그 자체로는 아직 신학이 아니다. 요컨대 존재론적으로 무한한 중요성을 지닌 생명의 증언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 존재를 알리는 내재성의 목소리인 것이다.

 

[72]미래에 정신의 물리적 담지자가 될 뇌는 태아 단계에서 유전자의 독점적인 물리화학적 감독 - 이는 태아의 몸속에서 이루어지는 순수한 물질의 배치를 말한다 - 하에 형성된다. 유전자의 이러한 감독은 생성 과정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때 유전자는 그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며, 유전자의 작용 역시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그것은 전적으로 정신없이 진행되는 과정이다.

[원주]어쨌든 이러한 방식으로 창조되는 것은 정신 그 자체가 아니라 미래의 정신의 잠재적인 담지자이다. 정신은 신생아와 그에게 말을 건네는 주변의 어른들, 즉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정신적 주체들과의 의사소통 - 이것은 처음에는 전적으로 수용적이지만 나중에는 뚜렷이 상호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 으로부터 비로소, 그리고 오직 그것으로부터만 생성된다. 신생아에게 말을 건네는 언어적 환경이 없다면 인간이라는 이름의 어린 짐승은 설령 신체적으로 생존하고 성장한다 하더라도 결코 인간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언어는 이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학습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정신 또한 기존의 정신으로부터 학습될 수 있는 어떤 것임을 의미한다. 유전적으로 준비된 뇌수의 도구적 속성을 이용하는 새로운 정신은 오직 기존의 정신과의 교류를 통해서만 생긴다. … [73]따라서 모든 개별적 개체발생에 있어서 현실적인 정신은 자신의 생성을 위해 이미 그때그때의 현실적인 정신을 전제한다.

 

[74]이 정신은 동시에 그런 종류의 인식, 즉 사실에 관한 인식을 토대로 그 자신이 현존하며 사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보편적인 물질, 즉 뇌 안에 모아져서 조직된 물질적 요인들의 덕택임을 알고 있다. 따라서 정신은 물리학이 그에게 가르쳐주는 온갖 속성들 외에도 정신의 가능성, 즉 - 특수한 조건들이 주어지면 - 정신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소질이 저 정신에 낯선 물질에 부여되어 있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83]물질은 단순히 정신과 양립 가능하다는 가설 - 이것은 창조에 관한 하나의 최소 가정이었다 - 하에서는 사실상 정신이라는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 전술한 대안, 즉 신의 세계 통치 - 늘 새로이 세계의 진로에 개입하는 일반 섭리(providentia generalis)와 특수 섭리(providentia specialis) - 에 관한 보완적 가정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지만, 우리는 이 가정을 거부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방법적인 면에서 설명의 원리로는 아무런 쓸모도 [84]없고 심지어는 설명의 이념 그 자체를 파괴할 뿐 만 아니라 우리의 자연과학과 역사과학의 너무 많은 부분이 이론적이고 도덕적인 면에서 그것과 직접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제일원인은 정신의 운명을 일일이 직접 관리하는 대신 근본 물질을 시간 속에 풀어 놓을 당시에 단순하고 중립적인 정신과의 양립 가능성이나 정신의 공존에 대한 단순한 관용 이상의 어떤 것을 그 물질에다 부여했음에 틀림없다. 어쨌든 외부와 내면 사이에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설정하고 있는 것보다 더 친밀한 관계가 가정되어야만 한다.

 

[88]우리는 이 두 가지의 우주론적 인식, 즉 세계의 시원에 관한 인식과 정신은 우주 안에서 뒤늦게 발생한 희귀한 것이라는 인식을 우주기원론적인 물음에 반영해야만 한다.

 

[93]우리는 … 이성의 장엄한 행보를 운운하기보다는 차라리 한심스럽게 낭비해 버린 엄청난 비용을 애석해하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정신이 출현한 것은 요행히도 상황들이 최적으로 부합하는 우주적인 우연의 유희 덕택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성의 장엄한 행보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 [94]우리는 -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그리고 알건 모르건 간에 - 언제가지나 실수를 모르는, 세계 정신의 선택받은 집행자인가! 차라리 입을 다물라! 아유슈비츠의 치옥을 - 가령 그것이 반정립에 의한 종합을 이루기 위해서 요구되는, 그리고 유익한 구원의 조치였다는 식으로 - 전능한 신의 섭리나 교묘한 변증법적 필연성에 전가할 수는 없다. … 지금 신성은 우리로 인하여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일그러진 얼굴로부터, 더 나아가서는 신의 얼굴로부터 또다시 오명을 씻어내야만 하다. 여기에서 나에게 이성의 간지를 운운하지 말라!

 

[96]따라서 “보아라, 좋지 않으냐?”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에 굴하지 않으면서도 존재의 본성에 대한 생명과 정신의 증언을 경시하지 않는 형이상학은 세계의 파란만장한 진로와 관련하여 맹목적인 것, 무계획적인 것, 우연적인 것, 예상할 수 없는 것, 극도로 위험한 것의 여지를, 요컨대 정신을 지닌 제일원인이 창조와 더불어 감행했던 거대한 모험의 여지를 남겨두어야만 한다.

 

[99]오직 시공간적으로 거대한 우주만이 신적인 힘의 개입이 없이 단순한 확률의 지배에 따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정신이 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것이, 그리고 유한성 안에서의 정신이 자기 시험이 창조주의 의도였다면, 창조주는 거대한 우주를 창조한 후 유한한 것의 진로를 유한한 것 그 자체에 맡겨 [100]두었음에 틀림없다.

 

[101]이제 우주론적인 현상을 매개로 우리의 마음 속에 떠올랐던 우리의 우주기원론적 가설로부터 - 즉 생성의 흐름 속에서 정신이 원래부터 의욕되었다는 점과 그렇게 의욕하던 근본정신이 유한한 정신들의 예측 불가능한 자아성(Selbstheit)을 위해 힘을 포기했다는 점이 연결됨으로써 - 다음의 결론이 도출된다: 신적인 모험의 운명은 우리의 변덕스러운 손에, 우주의 한구석인 이 지구에 달려 있으며, 바로 우리의 어깨 위에 그에 대한 책임이 지워져 있다. 신은 아마도 인간이 자신의 일을 망쳐 놓을까 봐 몹시 불안해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창조의 의도를 실현태인 것처럼 보이는 우리가 도리어 창조의 의도를 우리 멋대로 좌절시킬 수도 있으며 또한 그럴 힘이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래선 안 되는가? … [102]이제 문제는 ‘존재’다. 우리는 존재를 보아야만 하며, 존재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우리가 보는 것에는 생명과 정신이라는 증거가 포함되는데, 이는 가치중립적이고 목표중립적인 자연에 관한 이론에 반하는 증거들이다. 우리가 듣는 것은 우리가 본 선(善)의 부름, 즉 그 선에 내재하는 존재에의 요구(Anspruch auf Existenz)이다. 보고 들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는 자기를 승인하라는 선의 명령의 수탁자가 되며, 따라서 선에 대한 의무의 주체가 된다.

 

[108]근대사상의 오랜 역사를 거쳐 오면서 거의 공식적인 신조의 위치에까지 오른 금령들로서, 하나는 증명할 수 없는 것에서는 손을 떼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의 특별한 경우인) 다른 하나는 논리적으로 존재에서 당위로, 사실에서 가치로 통하는 길은 없다는 것이다. 전자는 형이상학에 대한 금지이고, 후자는 가치와 도덕적 구속력과 윤리는 단순히 주관적인 것일 뿐이라는 도그마이다. 이와 같은 금지들에 대하여 철학자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찬동하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새삼스럽게 놀랄 [109]필요는 없다. 그것은 철학이 모방하고 싶어 했던 자연과학의 성공 앞에서 철학 스스로가 굴복해 버린 저간의 사정을 반영한다. … 자연과학은 그 대상으로부터 목적과 의미 요소와 주관성 등을 제거하고 모든 대상을 시공간 안에서 양적인 측정이 가능한 것으로 환원한다. 이는 존재론적으로는 그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지만, 지식의 수확량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방법론적으로는 대단히 유용한 허구이다. / 데카르트를 계승한 철학은 이와 유사하게, 말하자면 똑같이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시의 대상에 첨삭을 가함으로써 응수했는데,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주관적 관념론 - 특히 선험적인 종류의 주관적 관념론에서는 독일인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 의 순수 의식이라는 찌꺼기 자아(Rumpf-Ich)이다. 후설(Edmund Husserl)의 순수 의식은 비록 ‘생활세계’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이때의 생활세계는 오직 순수 의식에 ‘대하여’ 주어진 것으로서만, 순수 의식 내에서 스스로를 구성하거나 혹은 아예 순수 의식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순수 [110}의식 그 자체는 생활세계의 일부가 아니며, 생활세계와 무슨 의존적인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신체 역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체험된 것, 즉 ‘현상(Phänomen)’으로서만 나타날 뿐이다.

 

[111]전체에 관한 사유는 철학의 본분이다. 그러나 철학은 정밀과학에 압도되어 (데카르트를 시작으로) ‘확실성’을 지식의 주된 목표로까지 격상하면서 고귀하지만 정밀하지 않은 원래의 본분을 내팽개치고 마치 하나의 개별과학처럼 전체의 절반에만 안주해 왔다. …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119]이제 요점과 결론을 언급할 때가 되었다. 우주 안에 다른 지적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었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과연 있을까? 그러한 지식으로 인해 우리의 책임이 조금이라도 달라질까? 우리는 이곳에서 우리가 중대한 책무를 방기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곳에서 더 선한 손에 의해 계속 이행되기를 안심하고 기다릴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러한 책무가 오직 우리에게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몫의 책무를 볼모로 하여 더 많은 모험을 감행해도 좋은가? 아니다! 우리가 지배하는 이곳, 우리의 힘이 미치는 유일한 영역인 이곳에서 정신이 어떤 운명을 맞게 될 것인가에 대해 오직 우리만이 책임이 있으며, 어쩌면 존재할지도 모를 저 가상의 지성들은 그들의 영역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책임을 갖는다. 그 어[120]떤 정신도 다른 정신이 져야 할 책임의 일부를 덜어줄 수는 없으며, 다른 정신이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을 도와줄 수도 없다. 그들은 우리를 도울 수 없고, 우리는 그들을 도울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고독하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주의 이 한 모퉁이에서, 우리가 불길한 힘을 갖게 된 바로 이 순간에, 신의 사태가 저울판 위에서 떨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곳에서야 신의 사태가 성공했든 위태로워졌든 구출되었든 결정적으로 실패했든 간에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랴? 후일 우주 어딘가에서 수신된 우리의 신호가 사망신고여선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몹시 할 일이 많다. 우리의 지구를 위하여 진력하자. 외계에 그 무엇이 존재하든지 간에 우리의 운명과 창조라는 모험 - 이 모험은 바로 이곳과 결부되어 있으며 보호할 수도 있고 배반할 수도 있다 - 의 운명은 바로 이곳에서 결정된다. 마치 우주에는 사실상 우리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러한 가정하에서 우리의 운명과 창조라는 모험의 운명을 걱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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