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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지식인 지옥? - <첩첩산중>(옴니버스 영화《어떤 방문》중, 홍상수, 2009)

  • 등록일
    2009/11/28 18:15
  • 수정일
    2009/11/28 18:15

홍상수, 지식인 지옥?

- <첩첩산중>(옴니버스 영화《어떤 방문》중, 홍상수, 2009)

 

 

멜리에스가 환상적인 달나라 여행을 필름에 담아 대중 앞에 내 놓았을 때, 그것은 일종의 마술쇼에 가까웠다(《달나라 여행》, 1902). 그것은 테크놀로지와 놀이의 경이로운 결합이었다. 따라서 “예술은 애초부터 기술이었다”라는 로버트 저매키스(Robert Zemeckis)의 말은 영화라는 매체예술에 이르러 완전히 증명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테크놀로지와 예술이 결합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일정정도의 네러티브가 부재한다면 그 필름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이상이 되지 못한다. 거장 큐브릭(Stanley Kubrick)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가 단지 조잡한 테크놀로지의 전시가 아니라 뛰어난 선견지명으로 완성된 ‘시네마’(‘무비’가 아니라)로 평가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따라서 영화가 기술이고 또 예술이라면, 거기에는 그 기술-예술의 필요충분조건으로서의 창조적 네러티브, 즉 사건구조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사건구조는 시나리오만이 아니라 카메라와 편집을 통한 시공간의 분할을 모두 포괄한다. 작가(감독)의 특유성은 이 사건구조의 창조를 위해 이미지를 얼마만큼 극단적으로 또는 근원적으로 다룰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홍상수는 이 영화예술의 본질을 끝까지 고수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초기작인 《강원도의 힘》(1998)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고집스럽고 때로는 시니컬한 작업방식은 이제 ‘딱 홍상수식’이라는 레떼르를 달고 다닐 정도가 되었다. 사실 어느 정도 홍상수식 시네마에 물릴 때도 되었건만,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화가 나올 때마다 (정말) 작정하고(!) 본다.

 

희한한 것은 여기에 있다. 내가 살펴 본 바에 따르면 홍상수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필자를 포함하여) 먹물께나 든 지식인들이다. 그런데 홍상수가 영화 안에서 능청스럽게 놀려대고 키득거리게 만드는 대상이 또 이 지식인들이 아닌가? 언젠가 나는 홍상수의 이 끝없는 지식인에 대한 조롱과 희화는 역설적으로 지식인에 대한 홍상수 자신의 애정, 결국 자기 자신(작가 자신도 프랑스 유학씩이나 다녀온 지식인이 아닌가?)에 대한 나르시시즘의 발현이라고 썼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 파악도 부족할 듯싶다. 왜냐하면 이 ‘나르시시즘’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혀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개봉한 홍상수의 《첩첩산중》은 그 나르시시즘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나는 그래도 창피한 줄 안다’는 것이다. 너무나 간단해서 실소가 나올 지경이지만, 어쩌랴, 지식인이란 그런 족속들이다. 간단한 사실을 복잡한 진리(aletheia)로 떠드는 자들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 간단한 사실을 사람들이 매우 자주 망각(letheia)하고 살기 때문에 (데리다식으로 말하자면) 지식인들의 ‘경매가’가 한없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가 주장한 것은 더도 덜도 아니고 바로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다. ‘창피한 것을 아는 것’과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사이에 무슨, 루비콘 강 쯤 되는 심연이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다들 인정할 것이다. 그래서 홍상수는 지식인들을 놀려대면서도 그 지식인들이 창피한 줄도 알고 그래서 ‘괴물이 되지는’(《생활의 발견》 중 김상경의 대사) 않을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홍상수의 적정수준의 페시미즘도 한 몫하고 있다. 사실 창피스러운 줄 아는 것과 괴물이 되지 않는 게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굉장한 덕목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을 테지만 생활과 욕망이란 것이 그 덕목의 실천을 참으로 힘겹게 만든다는 인생관이 그것이다.《첩첩산중》에 등장하는 지식인들도 그렇게 산다. 창피하지 않으려고, 자기 자신을 위무하고 때로는 위악을 떨면서 말이다.

 

거두절미. 홍상수는 이번에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이후 오랜만에 글쟁이들을 등장시킨다. 주요 등장인물은 4명이다. 전주 어느 대학의 교수 겸 소설가인 전 선생(문성근), 그의 한때 제자이자 애인이었던 미숙(정유미), 그리고 미숙의 예전 애인이자 데뷔한 소설가인 명우(이선균), 마지막으로 미숙의 절친이며 현재 전 선생의 애인이자 또 제자인 진영(김진경). 그리고 까메오로 잠깐 실제 소설가인 은희경씨가 등장한다. 이들 배우들의 역할 면면만 봐도 벌써 실소가 나온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가 애인이고 친구가 또 그 애인의 애인인 이 요지경 상황이란 게 그리 별스럽지도 않다. 그러니까 홍상수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 있어서도 그렇다는 말이다. 작가가 이들 지식인들의 그 별스럽지 않은 삶을 ‘요지경’으로 만드는 것은 이들이 이러한 삶 자체의 비루함을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홍상수의 다른 영화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나지만 이 영화에서도 지식인들(또는 그 지식인 중 한 명)은 마침내 그 삶의 비루함과 창피스러움을 깨닫게 되는데, 영화의 종반부에 가서 그러하다.

 

이 영화도 그래서 당연히 마지막 장면이 핵심이다. 여기서 극중 모든 등장인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두 모인다. 그 전날 과음(과연 홍상수 영화에서 음주란 무엇일까?)을 한 네 명은 각자의 연인(섹스파트너?)과 모텔에서 하루 밤을 보낸 뒤 모텔 앞 식당에서 딱, 마주친다. 서로 데면데면하게 따로 상을 봐서 먹다가 가려던 찰나, 식당 문 앞에서 마침내 전 선생이 화를 버럭 내며 다른 커플(미숙-동우)을 불러 세운다. “야! 이 새끼들. 일루와! 너네 왜 인사도 안하냐? 어제 진영이만 버려두고 너네 둘이 갔다며? 그래서 진영이가 나한테 전화했다. 그래서 술 마셨고, 늦어서 잠깐 들어가서 쉰 거야.” 전선생과 진영의 사이를 아는 미숙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훽 던지며 말한다. “그만해요! 창피한 줄 아셔야지! (동우를 보며) 야, 나 간다. 넌 뒤에 따라와!” 그리고 화면전환, 모텔촌의 건물들을 비추는 카메라. 첩첩산중, 아니 첩첩모텔중.

 

미숙은 혼자 차를 몰고 어디로 갔을까? 평론가 정성일도 지적했다시피 이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와 클로징 시퀀스가 매우 정교한 장면의 대칭구조로 이루어져 있다(『씨네21』730호 참조). 나는 정성일의 이 평에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싶다. 즉 이러한 구조적 대칭성은 곧장 이념적 대칭성, 다시 말해 이 등장인물들이 매우 정교하고, 섬세하게 서로의 욕망을 거래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 말이다. 여기서 미숙의 존재는 네러티브 상에서나 구조상에서나 매우 특유하다. 그녀가 보이스오버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러한 장면의 대칭구조에 파열구를 내는 당사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미숙은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욕망을 거래의 대상이나 가벼운 섹스스캔들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는 달리 매우 절실하게 거기 매달린다. 영화의 첫 장면에 그녀가 차를 몰며 전주로 가면서 혼잣말로 뇌까리는 “죽어도 돼, 죽어도 돼”라는 말은 이 절실함이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미숙의 이 절실함의 정체는 분명 문학 창작에 대한 욕망이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창작활동을 위해 전선생과 사귀고, 그와 헤어지자 바로 동우와 잠자리를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런 혐의가 짙다. 그녀가 충동적으로 은희경의 집을 찾아가서 “선생님이 제일 잘 쓰세요. 이제부터 글만 쓸거에요.”라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하는 것도 그런 욕망의 연장선상에 있는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일종의 ‘전이’(transference)를 바라는 이런 행동은 매우 유아적이며, 그래서 실현 불가능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자기 욕망에 끝없이 집착하는 미숙이야말로 나름 대로들 쿨한 이들 지식인-작가들과는 달리 지식인의 본질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전선생에게 쏘아부친 그 말이 그걸 증명한다. 하지만 미숙이 어떤 모범적인(?) 지식인상을 드러낸다고 해서는 매우 곤란하다. 홍상수 영화에서 그것보다 더 웃기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이란 건 그저 좀 아는(본질적으로는 스스로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또는 창피한 줄 아는) 그런 존재이지, 어떤 휘황찬란한 아방가르드가 아니다.

 

흔히들 홍상수 영화를 지식인들의 희화로 읽곤 한다. 그건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몇 가지 첨언을 해야 완전히 옳을 것이다. 그 희화라는 것을 통해서 당대의 지식인들의 본질이 유전(流轉)된다고 말이다. 예술(pathos)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로고스(logos))에 대한 상당한 부정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로고스가 반겨야할 일이기도 하다. 그 로고스가 당대를 지나 살아남는 것은 그러한 부정성의 전염을 통해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언제나 로고스는 파토스를 질투하거나(플라톤), 경외하거나(니체), 경제적 하부구조에 얽매이지 않는 불가사의한 것(맑스)으로 간주하지 않았던가? 존경스런 칸트조차 ‘숭고함’에 대면하여 어쩔 줄 몰라 했으니 말이다.

 

혹시 홍상수는 ‘구름’이나 ‘개구리’를 선사하려고 작정한 당대 한국 사회의 아리스토파네스일지도 모를 일이다. 창피스러운 줄 모르는 지식인들을 위해 창피스러운 영화를 계속 만드는 그런 예술가 말이다. - 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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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러닝타임, 121분-<내 사랑, 내 곁에>, 박진표,, 2009

  • 등록일
    2009/10/17 01:48
  • 수정일
    2009/10/17 01:48

* 마찬가지로 속 쓰린 글이지만 조금은 위안이 되는 ...

 

신체는 소멸한다. 인간은 죽는다.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이 명제는 가히 선험적(transzendental)이라 할만하다. 선험적이라는 것은 실재적이라는 것이고, 실재적이라는 것은 흉내(imitation)낼 수는 있어도, 그것을 겪을(suffer)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연기에는 흉내 내는 것이 있고, 겪는 것이 있다. 연기론 교과서를 펼치면 이 두 분류를 유명한 두 극작가의 이름을 들어 명명하고 있다. 스타니슬라브스키와 브레히트. 겪는 연기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것이다. 그러나 메소드(method) 연기라 칭하는 이 연기법은 ‘육체의 변형’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어떤 연기든 ‘~되기’(becoming)을 실행한다. 이것은 의식적인 장을 연기 대상과 겹쳐 놓는 ‘속임수’가 아니라, 육체와 의식의 지각장(perceptual field)을 연기대상의 근방역에 이르기까지 육박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도는 필연적으로 마조히스틱한 자기부정의 상태를 배우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배우의 육체는 카메라 앞에서 단순히 피사체일 뿐이다. 그는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인격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부여한 인격을 오로지 ‘연기’해야 한다. 그런데 연기는 피사체로서의 자기위치를 끊임없이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 부정을 통해 배우는 이미지의 평면만을 생산하는 카메라에 심도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 즉 ‘~되기’는 카메라와 배우 간의 끊임없는 교전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배우 김명민은 이 교전의 장을 손쉬운 의식의 지각장으로 하지 않고, 육체의 지각장으로 선택했다. 사유만이 아니라 느낌과 감각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제 것’으로 만드는 힘든 길을 선택한 것이다. 영화는 극중 백종우의 증세가 어떻게 고스란히 김명민의 것이 되는지 시시각각 재현하고 있다. 집요하게도 카메라는 그러한 과정 전체에 대사나 사건으로 다가가기보다, 김명민-육체, 혹은 백종우-육체 그것 자체의 전시만으로 그러한 재현에 이르려고 한다. 하지만 김명민의 것이 된 백종우의 육체는 그러한 재현의 시도를 번번이 물리고 스스로가 ‘배우’이며 이것은 ‘연기’라는 것을 주장한다. 이것이 문제다. 연출과 연기의 간격이 두드러지는 지점 말이다. 감독은 김명민이 “연기에 미친 배우”(『씨네21』722호)라고 평가하지만, 광기라는 것은 이해불능의 타자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지 감독이 배우에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배우의 연기가 감독의 권능 너머로 탈주했다는 것을 시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어떤 소통의 부재가 존재한다. 현장에서 도대체 김명민의 육체가 겪고 있는 고난을 제대로 필터링한 스텝이 몇이나 될 것인가? 그리고 어째서 김명민은 그토록 멀리까지 달아나 버린 것인가?

 

이 모든 것을 간과하자. 그렇다면 영화는 충분히 진실에 가 닿았는가? 위에서 말한 소통부재의 디렉팅(directing)과 소통부재의 액팅(acting)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는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담아낸 것인가?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앵글은 시종일관 김명민의 신체를 부감으로 잡거나 밝은 조명 아래 드러냄으로써 신성화한다. 그것은 마치 종교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예수의 육체와 같다. 고난의 흔적이라고는 깡마른 거죽밖에 없는, 그나마 인공의 광선 아래 순백으로 빛나는 그 육체 말이다. 과연 루게릭 병이 그와 같이 성스러운 신체 상태를 유지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일까? 여기서는 이제 카메라 앵글마저 김명민의 신체를 배반한다. 그가 메소드 연기를 위해 수 십 kg을 감량한 그 기간 동안 그의 육체는 온전히 감량의 흔적만을 피사체로서 감당할 뿐, ‘연기’로 드러나야 할, 고통은 오간데 없어지고 말았다. 그의 신체는 멜로드라마, 최루성 가족영화, 추석 개봉작이라는 낭창낭창한 레떼르를 가장하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숨기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마치 루게릭 병으로 인해 안면근육 마비로 우는데도 불구하고 웃음이 생기는 것과 같이 김명민은 이 영화 안에서, 전시되고 성화된 자신의 육체와, 메소드 연기를 통해 고통스럽고, 루게릭 병으로 또 더 고통스러운 자신의 지각체계라는 무간지옥에 빠져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김명민의 편이 되고 싶지만 저 상황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어째서 백종우는 이지수(하지원 분)에게 참으로 이기적이게도 결혼하자고 한 것이며, 도대체 이지수는 어떤 4차원 소녀이기에 그것을 선뜻 받아들이고, 그도 모자라 임종에 이르기까지 그를 지키는 것일까?

 

한가위에 사람들의 희생정신을 북돋우고 ‘긴 병에 장사 없다’는 시쳇말에 의식적으로 거스르기로 작정한 영화라 하기에는 김명민의 육체가 너무나 부질없다. 저 신체가 121분짜리일 뿐이라니 말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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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의 멧돼지들-<차우>, 신정원, 2009

  • 등록일
    2009/10/17 01:35
  • 수정일
    2009/10/17 01:35

*이 글은 개인적으로 매우 속이 쓰린 글이다. 묵혀 두었다가 이제야 올린다.

 

영화는 착란과 전도(顚倒) 또는 사시(斜視)의 스펙타클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지 않고 굳이 영화관에 갈 리가 없다. 그러니까 영화는 태생적으로 서사구조의 안정성, 즉 시점과 시제, 주체와 시공간의 평형성(stability)을 거스르는 경향을 띈다. 놀라운 것은 시간과 공간을 분절하고, 편집하는 와중에 기억을 일신하거나 뒤섞음으로써 영화가 오히려 실재를 드러낸다는 것이다.(1) 말 그대로 이것은 원인(cause; 작가-주체의 의도)이라기보다, 준원인(quasi-cause; 광경과 편집)의 영향을 더 많이 받으며, 편집증적으로 심층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표면의 효과를 통해 이미지의 분열증을 극화(dramatization)한다. 그래서 장르가 더 극단적일수록 그 영화는 점점 더 사이코드라마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 공리계를 따라 재코드화 되는 길을 따르지 않는다.(2) 각각의 시퀀스는 야바위 상자에 담긴 주사위들의 각 면 위에 놓인 점들과 같아서 ‘흔들고, 여는’ 그 과정 모두가 작가의 지향성과 시선을 빗나간다. 숏과 시퀀스는 이렇게 자기구성(self-constitution)되며, 작품 전체는 거대한 우연의 긍정을 통해서만, 그것을 전제하고서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다.(3) 이러한 영화 예술의 특성은 마땅히 소수성(minority)이라 명명될 수 있겠다.(4)

 

[차우]는 이 소수성을 이미지의 표면 위에 전시하는 매우 특유한 영화다. 그러니까, [차우]는 괴수영화, 아니 코메디 영화, 아니 이 모든 장르-부정성(‘아니’) 바로 곁에, 영화에 ‘대한’ 담론을 배치함으로써 스스로 ‘극곁극’(play-beside-play)을 구현한다.(5) 실재로 이 영화는 ‘사시’(관객과 직접적으로 시선을 맞교환할 수 없는 영화의 운명에 대한 은유. 그것은 항상 ‘해석’을 경유한다)인 마을 이장과 마을의 치안담당 경찰의 술자리 대화에서 시작한다. 술자리 자체가 횡설수설로 시작해서 황당하게 끝나지만, 이 장면의 진실성은 거기 있다기 보다 작가가 이제부터 이런 횡설수설로 장르를 충돌시키겠다고 미리 선언한 것이라 하겠다. 장르는 하나의 주사위 면, 또는 당구공과 같아서 작가는 흔들고 열거나, 큐대를 들어 불분명한 강도 조절을 하는 정도에서 임무를 다할 것이다. 나머지는 관객의 몫이거나, 운명이며, 이도저도 아니라면 불가해한 신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 전체의 경첩은 빠져 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대번에 알겠지만 이 헐렁거리는 숏과 시퀀스들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웃음’인데, 희한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웃음이 ‘페이소스’라는 것이다. [시실리 2km](2004)에서부터 시작된 ‘뜬금없고 썰렁한’ 신정원의 문체론(stylistics)은 여기서 부터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웃음과 페이소스의 결합이 가져다주는 효과가 또한 가히 변태적이라고 할 만한데, 그것이 불쾌감의 잔영을 동반한 쾌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두고 감독이 가진 ‘B급 감수성’의 발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그것을 초과하는 ‘간질거리는’ 뭔가가 있다. 이를테면 오컬트적 요소, 또는 이미지의 페티시즘 말이다. 물론 이 영화 텍스트를 의미론의 측면에서 읽는다면 이 초과분은 처음에 말했듯이 극곁극의 구조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답을 이렇게 손쉽게 내리면 해석의 여지가 없어진다. 곤란한 것은 극곁극의 형식을 취하는 영화텍스트가 알려지기 위해서는 다른 텍스트보다 더한 텍스트적 가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해석은 곧 그 드라마의 ‘효과’와 마찬가지기 때문이다.(6)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해석이 느리지만 확고한 걸음을 옮길 수 있도록 질문을 다시 하는 것이다.

 

우선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작가는 어째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관객 입장에서 이런 류의 유사 오컬트 무비는 불편한 코미디에 가깝다는 것을 작가가 알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도 웃지 않을 수 없었어, 라는 건 매우 당황스러운 여운을 남긴다. 사실 이러한 시도 자체는 낯선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거대한 멧돼지가 뒤뚱거리면서도 놀라운 속도로 돌진하다가 옆으로 미끄러지고 앞으로 뒹구는 장면은 한강대교 하부 난간을 건너다니며 어이없게도 귀여운 재주를 부리던 봉준호의 [괴물](2006)의 샘플링이라 할 만하다. 또한 앞서도 얘기했다시피 이 영화의 독특한 사건구조는 바로 장르 간 충돌을 기획하는 것인데 이것도 낯설지 않다. 특히나 호러 계보 안에서 샘 레이미([이블 데드], 1982)나 토비 후퍼([텍사스 전기톱 살인 사건], 1974)는 누구나 인정하는 하이브리드 거장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 고전적 B급 호러 씨네아스트들과 신정원, 봉준호가 다른 점은 하이브리드 효과가 저예산이라는 제작조건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의식적 포획을 따라 기획되었다는 것이다. 하긴 최근의 샘 레이미([드레그 미 투 헬])에게 그 시절은 추억일 뿐이겠다.

 

여기서 문제는 이제 애초에 제기되었던 괴수영화와 코메디 사이의 장르충돌 뿐 아니라 B급 호러와의 관계다. 그리고 이 복합성을 고려하자마자 우리는 최초의 그 문제, 즉 ‘불쾌의 쾌’, ‘페이소스와 웃음의 결합’이 가리키는 그 준원인을 감지할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신정원 감독이 고전적 하이브리드의 형식을 가져오되 그 내용과 표현을 자기 식으로 구축했다는 것이다. 샘 레이미와 토비 후퍼의 장르실험은 한바탕 웃음으로 끝나는데 반해 신정원의 장르충돌은 호러를 중추적 요소에서 물리고 그 자리에 괴수를 놓음으로써 그와는 다른 효과를 달성한다. 그 웃음의 근방에서 떠도는 변태적 페이소스라는 효과 말이다. 이 페이소스가 웃음의 진정한 준원인인 이유는 그것이 웃음과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이 아니라 페이소스로부터 웃음에 이르기까지, 정서의 스펙트럼 전체를 주파하는 계열 전체를 작가의 실험이 드러내고 있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관객은 작가가 제시하는 그 정서의 속도에 편승하여 플롯이 삐걱거리는 순간순간에 다양한 강도에서 그 스펙트럼의 톤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경험 전체, 작가와 관객이 함께 잠겨 있는 이 웃음과 페이소스의 스펙트럼과 강도 전체를 그로테스크 싸카즘(grotesque sarcasm)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7)

 

그리고 이제 두 번째 주제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과연 작가가 이 미학적인 정서 가공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이 말은 역으로 ‘가장 최초에’라고 바꾸어 쓸 수 있다) 드러내는 것은 뭘까? 결국 괴수는 죽고 인간들은 행복해진다. 이건 그렇게 담대한 결론은 아니다. 오컬트에 육박하는 플롯과는 판이하게 다른 이 상투적인 결론을 두고 어이없어 하는 것보다 그 다음 이어지는 보너스 장면을 잘 살펴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이 마지막 보너스 씬은 싱거운 결론을 상쇄하는 것과 동시에 관객이 내내 느꼈던 그 정서적 이물감의 정체가 바로 고전적 드라마의 근간을 이루는 선입견에 대한 도발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것은 콜러리지가 “불신의 자발적 중단”이라고 했고, 고다르가 관객이 영화관 안과 밖을 구분한다고 했을 때 그 고다르의 관객이 상정하는 하나의 ‘신념’을 말한다.(8) 신정원은 이 신념과 선입견을 극곁극 형식을 통해 역전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차우]에는 인접한 두 극 A와 B가 있다. 관객은 이 두 극을 취사선택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두 극은 1형식 문장의 주어와 보어처럼 서로를 제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두 극은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있을 수 있는데, 두 극을 이어주는 동사가 부정법 동사기 때문이다. 이 부정법 동사는 딱 부러지는 ‘~이다’(be)가 아니라 언제든 변형이 가능한 ‘~임’(to be)이다. 다시 말해 이 문장(극)의 경첩(시간성)은 덜렁거린다.

 

A극은 관객이 줄곧 쫓아다니는 주요 플롯이다. 이를 통해 작가와 관객은 모두 콜러리지와 고다르의 지평에 얌전히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극 B가 있다. 즉 중반부에 인물들 각자가 ‘포수전설’의 주인공이 되는 만화적 장면(B1)이나, 뜬금없는 극중 캠 촬영 장면(B2), 그리고 가장 중요한 미친 여인의 집 장면(B3). 이 장면들은 극 A가 가지는 서사적 완결성을 번번이 위반하고, 주술구조를 과잉결정(overdetermination) 상태로 몰고 간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 극 B는 극 A에 무언가를 더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극 A 가운데서 빼버림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극 B는 A에서 스스로를 ‘빈자리’로 제시한다. 즉 주어 A는 술어 B 없이도 견뎌낸다. 여기서 극의 시퀀스들을 이어주는 시간성은 순전히 맥락 없다. 당연히 이게 작가의 장르충돌의 효과인 것이고 말이다.

 

더 나아가 보자. 그렇다면 극 A는 B와 완전히 대체 가능한가? 완전히 가능하지는 않아 보인다. B 극들 각각도 그러하다. 만약 그러한 대체를 가능하게 하려면, 영화가 시간성과 그것을 짊어진 주체를 직접적으로 다루어야 하는데 이는 홍상수식 시간 구성과 ‘기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실 이 영화는 그런 구성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대체(alternative)가 아니라, 전치(transference)와 응축(condens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는 대상 간의 교환을 통해 둘 중 하나를 표면상 무화시키는 은유적 과정이지만, 전치와 응축은 어느 대상도 무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놔두면서 그것들을 표면상으로든(전치), 이념 상으로든(응축) 인접시키는 환유적(전치), 상징적(응축) 과정이라 하겠다. 따라서 극 A와 B는 이런 환유적, 상징적 관계로 [차우]라는 이미지 계열 안에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극A와 극B(그리고 B들) 사이에는 교환과 자리바꿈이 가능하고,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사구조의 일방향성(bon-sense)을 수시로 역방향성(para-sense)으로 구현할 수 있는 틀거리가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전체 줄거리에서 극B는 그것 자체로 확장될 때 하나의 단일한 플롯으로 구성될 수 있다. 즉 이 극 B들은 하나의 응축된(condensed)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극 B의 상징들 중 전체 이야기들(즉 A와 다른 B들)의 맥락을 벗어나는 것이 바로 극B3이다. 어째서 이런 구성을 기획한 것일까?

 

여기에 등장하는 ‘미친 여인’은 영화 전반부에서 미미한 역할만을 담당하면서 관객들에게 단순한 폭소나 불안을 선사하는데,(9) 후반부로 갈수록 이물감이 심해져서,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극 전체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내가 보기에 바로 여기, 이 ‘미친 여인’ 에피소드가 가진 전치와 응축의 힘이 있다. 중요한 것은 전치와 응축이 통속적인 정신분석에서 오로지 오이디푸스 방향만을 가리키는데 반해, 이 에피소드는 그러한 일방향성을 비웃고 어떤 형태화할 수 없는 이념들로 향한다는데 있다.

사실 ‘미친 여인’이 그녀의 희생대상(처음에는 거지-아이 그 다음에는 포수-어른)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인데, “나를 엄마라고 불러!”라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이 여인은 폭력을 행사한다. 마치 통속적 정신분석이 “너는 아빠(엄마)를 사랑한거야! 그(녀)와 관계하고자 한거야!”라고 윽박지르며 환자가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분석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말이다.(10)

 

하지만 작가는 이 여인의 이러한 협박과 폭력을 통해 그러한 시도 자체를 희화시키고, 우리가 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감당하는 그러한 권력의 폭력이 사실은 맥락을 벗어난 ‘억지’일 뿐이라는 실재 자체를 전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에피소드가 단순히 이념적 차원에서 작동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충분히 전통극이 가지는 일방향성을 역행한다. 그러면 이 영화에서 또 다시 미친 여인이 등장할 필요가 있었을까? 역행의 누승적 역량에 종지부를 찍는 이 에피소드가 이념 층위에서가 아니라 영화적 층위에서 획득한 효과는 무엇일까? 나는 이것이 감독 자신이 영화에 대해 가지는 의견(doxa)이며, 이를 통해 희한하게도 역설(para-doxa)을 산출한다고 말하고 싶다. 즉 감독은 이 에피소드를 통해 ‘영화라는 거, 그거 별거 아니야, 이미지의 아상블라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작가가 의도한 대로 영화는 아상블라쥬다. 하지만 이제 술어 규정이었던 것이 주어로 간다. ‘아상블라쥬는 영화다.’ 그리고 더 나아간다. ‘아상블라쥬는 현실이다.’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도 그렇다. 그건 이리저리 뜯어 붙인 이미지의 조합들, 이접(disjunction)들인 것이다. 영화에서 시작하여 현실로 가는 이 방향은 영화가 현실을 과잉결정하는 그 순간이며, [차우]에서는 미친여인이 마지막 보너스 씬에 등장하여 관객들을 웃겨 줄 때 등장한다. 이 방향은 사실 애초에 이와는 다른 방향, 즉 관객이 극장이라는 현실 공간에 자리를 잡고, 영화라는 허구를 감상하는 선을 따라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었다. 이 역방향의 출현, 고다르의 신념이 거부당하는 사건, 이미지에 감염되는 순간,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제대로 박살나는 장면은 마치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에서 어린 엘리스가 꾸는 꿈이 실재의 소녀들에게 전이된 것과 같은 것이다. 가히 ‘엘리스 효과’(Alice effect)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여기 있다.(11) 하긴 미친 여인의 집들과 거기 등장하는 어린 거지와 어른 사냥꾼은 ‘이상한 나라’의 등장인물들처럼 현실과 관념이 구분되지 않는 동화적인 맥락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차우도 마찬가지다. 이 멧돼지, 또는 그 어린 새끼 멧돼지들까지, 처음부터 이들은 엘리스의 세계에 속한 것이지 않겠는가? 장면 B는 서사적 이야기 A의 구멍이 아니라, 오히려 A가 구멍이라는 가설이 가능해지는 것은 온전히 이 효과를 극단까지 밀어붙일 때 가능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영화를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사건’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이 영화 [차우]의 괴수가 엘리스의 것이든, 험프티덤프티의 것이든 그건 새롭지 않다. 다만 그들을 만나고, 또는 나와 동시대의 관객들이 함께 이미지를 ‘흡수’하면서 공히 그것에 감염되는 그 시간이 더 새로울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영화가 있으면 다시, 하나의 새로운 코뮌이 탄생하는 것이고, 1시간에서 2시간, 또는 그 이상의 러닝타임 동안 나-우리는 타오르는 이미지를 둘러싸고 새로운 시간성을 경외하면서 해방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오로지 이미지-가상의 한갓 놀이인 것만은 아니다. 현실이 전쟁과 폭력으로 인간성과 문명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과는 반대로, 영화는 이미지를 가지고 고통스럽고 또 우습고, 어이없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실재를 우리 눈앞에 들이 민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차우]는 결국, ‘극곁극’의 형식을 빌어 장르충돌 실험에 괴수영화를 도입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하였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시퀀스와 플롯을 이념 층위에 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 층위에까지 밀어 붙임으로써 영화와 더불어 현실을 탈신화화, 탈이념화시킨다. 그 시도가 결과적으로 가장 첨예한 실재, 즉 영화와 현실, 그리고 권력, 그 모두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로서 [차우]의 특유성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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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홍상수의 [오, 수정](2000)은 영화가 기억을 어떻게 가공하고 그를 통해 어떻게 실재를 드러내는지 보여준다. 사실 홍상수의 작품 전체가 기억에 대한 작가 자신의 해석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상당한 나르시시즘에 육박한다. 그의 영화는 내내 지식인에 대한 냉소적 포지션을 유지하지만, 기억에 대해 해석하고 그를 통해 지식인들의 심리를 전시하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이 바로 그 자신과 지식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2) 만약 재코드화의 길을 따른다면 그 영화는 장르에 충실한 ‘재밌는’ 영화는 될 수 있을지언정, ‘좋은’ 영화는 아닐 것이다.

 

3) 영화가 언어적 해석(비평)에 대해 다른 매체와 비교해서 보다 폭넓은 수용성을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한 영화제작 과정 자체를 생각해 봐도 이러한 경향이 압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스텝들 간의, 감독과 제작자 간의 조우와 교전(encounter)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홀로 책상에 앉아 원고지를 채우면서 생산되지 않는다. 영화는 주체적(subjective) 작업이라기보다 간주체적(intersubjective)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4) ‘소수성’은 들뢰즈의 의미를 따른다. 그것은 ‘이디쉬어와 독일어를 쓰는 체코인 카프카’라는 말로 특화될 수 있겠다. 『카프카』, 질 들뢰즈 지음, 이진경 옮김, 동문선, 2001 참조.

 

5) 극중극(drama-within-drama)이 표면과 심층을 나누고 심층의 잠재성을 무한히 퇴행시키면서 끊임없이 표면으로의 강제적 도발을 기획함으로써 극 자체의 ‘본질’을 캐묻는 반면, ‘극곁극’은 잠재성 차원을 그대로 보존하고 단지 표면효과를 통해 ‘의미’를 환기함으로써 극의 분열증들, 좌절들, 더 나아가 극의 ‘무의미’ 차원을 드러낸다. ‘극곁극’은 필자가 새로 제시하는 개념임을 밝혀둔다.

 

6) 물론 일반적인 드라마나 극중극도 해석을 요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 해석 없이도 인상들의 조합이 하나의 완결된 서사를 구성함으로써 독자를 쉽게 이해시키지만, 극곁극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곳곳에 서사구조의 일관성과 독자의 시선을 방해하고 정서적 반응을 비껴가는 사건들이 출몰한다. 문학 작품으로 치자면 카프카의 텍스트, 특히 『성』에서의 느닷없는 유머(이는 니체의 텍스트에서도 보인다-들뢰즈는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니체의 텍스트를 웃음 없이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썼다), 이현화의 『불가불가』에서의 반복구(“불가불가”)와 이접된 역사적 사건들의 계열들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물론 이 방면에서 가장 위대한 텍스트는 루이스 캐럴의 것들이다.

 

7) ‘그로테스크’란 개념은 기형도 작품에 대한 김현의 유명한 정의에서 나와서 현재 비평계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전유된 개념이다. ‘싸카즘’은 ‘싸티르’(satyr)와 ‘겪음’(suffer)의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는 용어로서 이 글 전반부에 해석한 사태와 잘 맞아 떨어진다. 이는 앞서의 극곁극 개념과 더불어 필자가 새로 제시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8) “영화는 꿈이다. 그러나 관객은 꿈꾸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극장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9) 이런 역할효과도 매우 특이한 것이다. 이 여인은 맥락 없이 등장하여 폭소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호러의 문법 안에 정위되면서 불안의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드라마의 희극적 등장인물, 이를테면 셰익스피어의 광대들은 비극이 슬픔과 불안 때문에 내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등장해서 장광설 따위를 펼치기도 한다.

 

10) 분석 차원에서 폭력이 정신분석에 의해 자행된다면, 물리적 차원에서 이는 파쇼적 정치권력의 핵심적인 속성이다. 이 권력은 자신이 호명하는 주체성 외에 다른 주체성을 알지 못한다. 만약 어떤 자율적 주체성을 불러낼 경우, 또는 반대와 저항의 논리를 광장에 갖고 나올 경우 어김없이 폭력이 행사되는 것이다.

 

11) 물론 이 개념은 루이스 캐럴에게 헌정된 것이다. 엘리스가 등장하는 그의 이야기들에서 현실은 꿈과 뒤섞이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축하고, 독자를 논리적으로 현혹하여 그 현실 자체를 무화하여 그 결과물로 웃음을 선사한다. 따라서 이 효과가 발생하려면 이미지나 텍스트의 강도가 현실이나 기억의 단면을 침범해서 트라우마를 형성하거나 사고패턴에 일시적인 또는 장기적인 충격을 가해야 한다. 통상적인 드라마의 반전은 극 안에서만 그치기 때문에 그런 효과를 달성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적인 역설과 다른 것은 역설이 논리적인 기반을 가짐에 반해 엘리스 효과는 정서적 기반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웃음은 결코 박장대소가 아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grotesque sarcasm과 흡사하게 고통마저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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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인무료관람-[써로게이트](조나단 모스토우, 2009)

  • 등록일
    2009/10/05 14:53
  • 수정일
    2009/10/05 14:53

테크놀로지와 윤리의 갈등이란 주제는 너무 오래되어 우러나지 않는 사골 같다. 이 갈등의 당사자들 중 어느 쪽 손을 들어 주느냐에 따라 디스토피아냐, 유토피아냐가 결정되는데, 최근에는 비관적인 축이 훨씬 돈이 되는 편인가보다. 하긴 미래의 ‘빅브라더’를 퇴치하기 위해서는 테러리즘과 파시즘조차 아름다워지는 시절이니([브이 포 벤데터]) 그동안 모범적인 테크놀로지 영웅들(터미네이터, 핸콕)을 꾸준히 양산해온 모스토우 감독 입장에서도 더 이상은 우길 힘이 없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화 초반부, 브루스 윌리스의 범상치 않은 가발과 짙은 메이크업은 시선에 상당한 압박감을 선사한다. 로봇 대리인과 실재 FBI 요원 그리어를 함께 연기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어 보이지만 멋진 금발을 찰랑거리는 써로게이트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저게 언제 적 브루스 윌리스였나 싶기도 하다. 브루스 윌리스가 머리 벗겨지기 전에 유명해졌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니 말이다. 오히려 써로게이트 센서를 뒤집어쓰고 자기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아내를 그리워하는 애틋하고 ‘이제는’ 머리와 수엽이 허연 그 할아버지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제 그도 슬슬 로맨스 그레이가 되어 떨어지는 낙엽을 무연히 쳐다볼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언제부턴가 명절 개봉관을 독점하던 성룡이 사라진 자리에 몇몇 할리우드 배우들이 조금씩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는데, 대체로 아놀드 주지사 류의 근육맨이었다. 그 중에 브루스 윌리스는 매우 특이한 경우이지 않았는가? 머리 벗겨진 영웅이라니. 이를테면 추석이나 설날만 되면 새날이 온다는 게 마냥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아닌 분들에게 브루스 윌리스는 아주 훌륭한 영화 속의 아바타였다고나 할까? 어쨌든 추석 개봉 영화로는 꽤나 부담 없는 라인업이기도 하다.

 

사실 톺아보면 이 영화에 어떤 철학적 메시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건 상당히 최신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바로 ‘소통’이라는 것 말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인간성을 파괴하고, 전쟁을 항구화하며, 종내는 인류멸망의 대재앙을 초래한다는 스토리텔링은 부지기수이지만 그것이 ‘소통’에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멀쩡한 써로게이트와는 별개로 인간들이 서서히 ‘폐인’이 되어 간다는 설정은 매우 신선하다 하겠다. 여기에 매우 복고적인 마스크를 가진 브루스 윌리스가 분했으니 이야기에 자연미가 스며드는 것도 어느 정도 예상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설정 다음이다. 그래서 윌리스 아저씨는 악당들을 처치하고 세상을 밝고 환하게 만들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이제는 너무 희망적이어서는 곤란하다. 테크놀로지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우리 문명인들을 적당히 곯려 먹고, 적절한 선에서 ‘선택’의 패를 던져 놓는 것이 훨씬 가망 있는 내기지 않겠는가? 모스토우와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이를 모를 리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이야기의 전모도 그러하다. 즉 그리어는 자기 아들이 써로게이트에게 죽임을 당한 뒤 눈이 뒤집혀 버린 써로게이트 제작자 캔트 박사의 음모를 캐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전광석화 같은 판단력을 발휘하여 인간들은 살리고 로봇들은 전멸시키는 놀라운 창발성을 발휘하는데 이로써 공멸의 디스토피아나 (비싼 로봇들을 살리는 동시에) 영웅의 일방적인 승리를 기대하던 두 부류의 관객 모두를 거의 아노미 상태로 몰고 가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통을 하려면 뚫린 입으로 하고, 노동을 하려면 육체를 가지고("in the flesh"-캔트의 대사 중) 하라는 것이다. 대신 로봇은 금지다. 폐인은 컴퓨터를 물리치고 세상으로 나오라!

 

그러면 그리어가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바람에 고철이 되어 버린 저 전 세계의 수많은 써로게이트들은 어쩌란 것인가? 라스트 씬에 이르러 건전지 떨어진 장난감처럼 쓰러진 써로게이트들 사이로 인간들이 느릿느릿 나설 때 과연 우리는 퇴행의 감상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 ‘인간다운 세상’이 도래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어쨌든 감독과 제작자들 안중에는 이런 골치 아픈 철학적 선택지가 아무 소용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맑스도 그랬다시피 전(前) 시대의 기술적 발전을 깡그리 무시하고서야 어디 좋은 세상이 가능하겠는가 말이다. 보는 입장에서는 다만 써로게이트 없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할 저 인간들이 불쌍할 뿐이다. 이제는 전쟁도 직접 할 것이고, 섹스도, 노동도 힘들여 스스로 해야 할 것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소통의 문제가 단지 언어와 지성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겠다. 그것은 몸과 몸이 부딪혀서 만들어 내는 여러 화음들(불협화음까지 포함해서)을 의미하지 않는가? 따라서 귀차니즘은 온 인류의 적이다. 소통을 거부하는 모든 폐인들은 이 영화를 꼭 봐야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교훈은 마땅히 다음과 같다 하겠다. 닥치고 폐인무료관람.  그러고보니 효자동 푸른기와집에도 폐인이 있었구나. 그 집 세입자도 무조건 무료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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