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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러닝타임, 121분-<내 사랑, 내 곁에>, 박진표,, 2009

  • 등록일
    2009/10/17 01:48
  • 수정일
    2009/10/17 01:48

* 마찬가지로 속 쓰린 글이지만 조금은 위안이 되는 ...

 

신체는 소멸한다. 인간은 죽는다.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이 명제는 가히 선험적(transzendental)이라 할만하다. 선험적이라는 것은 실재적이라는 것이고, 실재적이라는 것은 흉내(imitation)낼 수는 있어도, 그것을 겪을(suffer)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연기에는 흉내 내는 것이 있고, 겪는 것이 있다. 연기론 교과서를 펼치면 이 두 분류를 유명한 두 극작가의 이름을 들어 명명하고 있다. 스타니슬라브스키와 브레히트. 겪는 연기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것이다. 그러나 메소드(method) 연기라 칭하는 이 연기법은 ‘육체의 변형’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어떤 연기든 ‘~되기’(becoming)을 실행한다. 이것은 의식적인 장을 연기 대상과 겹쳐 놓는 ‘속임수’가 아니라, 육체와 의식의 지각장(perceptual field)을 연기대상의 근방역에 이르기까지 육박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도는 필연적으로 마조히스틱한 자기부정의 상태를 배우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배우의 육체는 카메라 앞에서 단순히 피사체일 뿐이다. 그는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인격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부여한 인격을 오로지 ‘연기’해야 한다. 그런데 연기는 피사체로서의 자기위치를 끊임없이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 부정을 통해 배우는 이미지의 평면만을 생산하는 카메라에 심도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 즉 ‘~되기’는 카메라와 배우 간의 끊임없는 교전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배우 김명민은 이 교전의 장을 손쉬운 의식의 지각장으로 하지 않고, 육체의 지각장으로 선택했다. 사유만이 아니라 느낌과 감각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제 것’으로 만드는 힘든 길을 선택한 것이다. 영화는 극중 백종우의 증세가 어떻게 고스란히 김명민의 것이 되는지 시시각각 재현하고 있다. 집요하게도 카메라는 그러한 과정 전체에 대사나 사건으로 다가가기보다, 김명민-육체, 혹은 백종우-육체 그것 자체의 전시만으로 그러한 재현에 이르려고 한다. 하지만 김명민의 것이 된 백종우의 육체는 그러한 재현의 시도를 번번이 물리고 스스로가 ‘배우’이며 이것은 ‘연기’라는 것을 주장한다. 이것이 문제다. 연출과 연기의 간격이 두드러지는 지점 말이다. 감독은 김명민이 “연기에 미친 배우”(『씨네21』722호)라고 평가하지만, 광기라는 것은 이해불능의 타자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지 감독이 배우에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배우의 연기가 감독의 권능 너머로 탈주했다는 것을 시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어떤 소통의 부재가 존재한다. 현장에서 도대체 김명민의 육체가 겪고 있는 고난을 제대로 필터링한 스텝이 몇이나 될 것인가? 그리고 어째서 김명민은 그토록 멀리까지 달아나 버린 것인가?

 

이 모든 것을 간과하자. 그렇다면 영화는 충분히 진실에 가 닿았는가? 위에서 말한 소통부재의 디렉팅(directing)과 소통부재의 액팅(acting)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는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담아낸 것인가?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앵글은 시종일관 김명민의 신체를 부감으로 잡거나 밝은 조명 아래 드러냄으로써 신성화한다. 그것은 마치 종교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예수의 육체와 같다. 고난의 흔적이라고는 깡마른 거죽밖에 없는, 그나마 인공의 광선 아래 순백으로 빛나는 그 육체 말이다. 과연 루게릭 병이 그와 같이 성스러운 신체 상태를 유지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일까? 여기서는 이제 카메라 앵글마저 김명민의 신체를 배반한다. 그가 메소드 연기를 위해 수 십 kg을 감량한 그 기간 동안 그의 육체는 온전히 감량의 흔적만을 피사체로서 감당할 뿐, ‘연기’로 드러나야 할, 고통은 오간데 없어지고 말았다. 그의 신체는 멜로드라마, 최루성 가족영화, 추석 개봉작이라는 낭창낭창한 레떼르를 가장하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숨기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마치 루게릭 병으로 인해 안면근육 마비로 우는데도 불구하고 웃음이 생기는 것과 같이 김명민은 이 영화 안에서, 전시되고 성화된 자신의 육체와, 메소드 연기를 통해 고통스럽고, 루게릭 병으로 또 더 고통스러운 자신의 지각체계라는 무간지옥에 빠져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김명민의 편이 되고 싶지만 저 상황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어째서 백종우는 이지수(하지원 분)에게 참으로 이기적이게도 결혼하자고 한 것이며, 도대체 이지수는 어떤 4차원 소녀이기에 그것을 선뜻 받아들이고, 그도 모자라 임종에 이르기까지 그를 지키는 것일까?

 

한가위에 사람들의 희생정신을 북돋우고 ‘긴 병에 장사 없다’는 시쳇말에 의식적으로 거스르기로 작정한 영화라 하기에는 김명민의 육체가 너무나 부질없다. 저 신체가 121분짜리일 뿐이라니 말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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