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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주체란 무엇인가], 그린비, 2009

  • 등록일
    2010/01/07 02:45
  • 수정일
    2010/01/07 02:45

 

이정우 선생이 이 책을 쓴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말대로 그가 철학을 시작한 지점이 이 개념이고, 모든 철학은 '주체' 개념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나의 연구 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 철학자가 사유를 시작한 로두스는 아마 영원히 미탐사인채로 남을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 지점은 언제나 그가 돌아와야 할 곳이기도 하고, 그래서 영원히 알 수 없는 곳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정우 선생은 두 권의 저서를 더 예고하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사건이란 무엇인가: 정치적 맥락에서] 그리고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이 그것이다. 선생은 전자를 '사건론'이라 부르고 이 책을 '주체론'이라 하면서 이 두 책이 [진보의 ... ]를 보완한다고 말하고 있다. 

 

주로 '개념론'을 쓰면서 철학사적인 작업을 해온 당대의 가장 뛰어난 한국지성 중 한 사람인 이정우 선생이 이제는 실제로 '자신의 철학', 말 그대로 '주체의 철학'을 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그러니 시작에 불과한 이 작은 책자를 읽고 허기진 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책들이 많이 기대된다. 

 

  

『주체란 무엇인가-무위인(無位人)에 관하여』, 이정우 지음, 그린비, 2009.
 
1. 술어적 주체를 넘어
주체와 술어 / 집합적 주체들 / 주체성의 선험적 지평으로서의 시간
2. 차생(差生)과 정체성
자기차이성 / 고유명사로서의 주체 / 객체성과 주체성의 갈등과 화해
3. 인식론적 역운(逆運)
진리가 오류로 둔갑할 때 / 역운의 극한
4. 타자-되기
주체화를 둘러싼 투쟁 / 거대 주체를 무너뜨리기 / 타자 없는 주체 / 타자-되기
5. 무위인(無位人)
‘우리’들의 계열학 / 상생적인 되기의 함정: 남북한의 예 / 진정한 우리-되기의 가능근거: 무위인
맺음말
후주 및 관련 저작들
 
[12]주체 물음의 반복 아래에는 ‘나’라는 힘이 숨어 있다. 그것은 자의식을 갖춘 개체가 좋든 싫든 품을 수밖에 없는 힘이다. 이 힘이 주체 물음을 반복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런 반복에는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물음의 반복에는 해(解)의 불완전성이 함축되어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하는 내적 힘은 그 물음의 반복을 통해 스스로의 동일성을 계속 흐트러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왜 주체는 스스로에의 물음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주체가 자기에의 물음을 반복하는 선험적 지평transcendental horizon[13]은 시간이다. 끈덕지게 되돌아오는 물음-힘은 시간을 그 가능조건으로 해서 반복된다. 시간은 ‘나’의 물음이 새롭게 되돌아 올 수밖에 없도록 강요한다. 이 강요는 시간이 생성시키는 이런 타자성과 관련된다. 시간의 지평 위에서 주체는 타자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생성해 가며, 그로써 자신의 동일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 상실로부터의 회복은 주체의 자기 변형을 요구하며, 이런 요구는 자기에의 물음을 반복케 하는 것이다. 이런 반복을 통해서만 주체는 해체되는 자신을 재구성해 나갈 수 있다. 해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타자와의 마주침에 충실할 때 주체는 반드시 해체되어 갈 수밖에 없으며 열려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체성은 그런 해체 과정과의 투쟁을 통해 새로운 동일성을 만들어 가는 능력이며, 그래서 늘 차이생성differentiation과 동일성의 교차로/전장(戰場)에서 성립하는 존재이다.
 
[15]주체로서 존재하는 것들은 우선 개체로서 존재해야 한다. 개[16]체성이 없는 곳에 주체성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17]이 모든 ‘것들’이 나름대로의 개체성을 담고 있다.
하나의 개체, 즉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자기의식을 가지게 될 때 주체성이 성립한다. ‘자기’의식이란 어떤 가름의 의식을 뜻한다. 즉 나와 나 아닌 것은 다르다는 것,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에는 불연속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할 때 자기의식이 발생한다. ... 원칙적으로 좁은 의미에서의 개체들, 즉 생명체들은 모두 자기의식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식물들은 0으로 수렴하는 자기의식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일찍이 헤겔이 심오하게 분석해 주었듯이, 타자성otherness 없이는 주체성도 없다. 나를 나‘이다’라고 긍정하는 것은 반드시 내가 아닌 타자를 내가 ‘아닌’ 존재로서 나로부터 구분해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 ‘아님’을 매개해서 나-‘임’으로 되돌아올 때에만 인간 고유의 자기의식이 가능하다. 이런 가름과 되돌아옴으로부터 자기의식이 탄생한다. 이 자기의식은 그 자기의식의 주체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동시에 불행하게 만든다. 주체는 자기의식을 가짐으로써 고도의 역능을 갖추게 된다는 점에서 행복하며, 타자와의 불연속이라는 근원적인 소외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불행하다. 자기의식을 갖춘 존재는 그 자기의식에 집착하면서도 동시에 그로 인한 불연속을 메우려고 한다는 점에서 모순된 존재 또는 이율배반적인 존재이다.
 
[22]경쟁의식은 질시를 낳게 되고, 질시는 우월감/열등의식은 증오심을 낳게 되고, 증오심은 고통을 낳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술어들 - 각종 형태의 “출신”, 전공, 직업/분야, 재산, 신체적 특징들, … 등 - 에 집착하는 자아의식(흔히 말하듯이, “자아의식이 강한” 의식)은 불행한 의식이다. 술어적 주체로 구성되는 사회/세상이라는 곳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누구도 이런 고통을 피해갈 수 없다.
이런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이름-자리들의 체계가 존재론적이고 가치론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것, 그것들은 실선으로 그려져 있는 듯이 보이지만 자의적인 - 소쉬르적 뉘앙스에서 - 분절선들 이상의 아무-것도-아니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가능하다. 장자는 이 아무-것도-아님을 ‘만물제동’(萬物濟同)이라 가르쳤다. 이 ‘제동’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일반성-특수성으로 이루어진 삶의 격자가 깨끗하게 지[24]워지고 보편성, 즉 분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질서의 무(無)이지만 또한 어떤 분절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무한한 질서를 담고 있는 허(虛)가 도래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보편성=‘허’ 위에서 독특한 특이성들을 그려 나갈 수 있게 된다. 이때 우리는 더 이상 위(位)를 가지지 않는 무위인이 된다.
 
[26]물질적인 맥락에서만 추상화해 본다면, 개체들 역시 어떤 면에서는 ‘우리’들이다. 하나의 신체는 숱한 세포들의 집합체이기에 말이다. ‘나’는 이런 숱한 ‘우리’들 - 나 자신인 ‘우리’까지 포함해서 - 이 중층적으로 포개져 이루어지는 드라마(사건)이다.
‘나’는 하나이지만 확장된 나로서의 ‘우리’는 무수히 많다. 나는 한 가족, 한 학교, 한 정치단체, 한 직장 … 에 동시에 속해 무수한 ‘우리’들의 교집합에서 성립한다. 숱한 ‘우리’들로 구성되지만, 또한 역으로 숱한 ‘우리’드로 해체된다. ‘나’와 숱한 ‘우리’들 - 사회 - 사이에는 이율배반적 관계가 성립한다. 개인과 사회의 드라마는 이 이율배반적 구조에서 연원한다.
 
[31]시간이 주체성의 선험적 지평이는 것이 단지 주체가 시간 속에서 변해 간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아가 주체가 시간의 지평 위에서 살아간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라는 선험적 지평은 주체를 역설적으로 조건 짓는다. 수동적 측면에서 주체는 규정들의 변화에 의해 변모를 겪어 간다. 시간적 측면에서 주체는 규정들의 변화에 의해 변모를 겪어 간다. 시간적 지평 위에서 주체는 변화를 겪는다. ... 그래서 시간이라는 조건은 나의 수동성의 조건인 동시에 능동성의 조건이다.
 
[33]삶의 범주들은 대부분 한 개인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회적-역사적으로 축적된 거대한 체계이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곧 그런 체계 안에 내던져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한 개인은 각 범주에서 하나씩의 술어들을 뽑아 내어 그것들을 통접시킴으로써 ‘자기’를 만들어 가고자 한다. 이것은 술어들의 그물로 되어 있는 거대 그물 속에서 자기의 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이며, 자기의 이름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그 그물이 고착되어 있을수록 ‘자기’의 구성은 상투적일 수밖에 없다. 이때 주체는 그물 속에 갇힌 새처럼 펄럭이면서 그저 좀 나은 이름-자리를 잡으려고 몸부림치게 된다.
이 새장에서 탈주하고자 한다면 술어들의 그물과의 끝없는 투쟁이 필요하다. 그물코를 찢어 그물의 모양 자체를 바꾸어 나가는 각종 실험들을 통해서만 삶의 술어적 그물은 변해 갈 수 있다. 주체는 일정하게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규정성들의 공간에서 끝없이 수선되는 직조물이라 할 수 있다. 한 시점에서 한 주체를 규정하고 있는 이름들(일반명사들), 즉 규정성들의 공간에서 그 주체가 차지하고 있는 이 이름-자리의 바깥으로 탈주하면서 스스로를 끝없이 수선하려 한다. 이 점에서 주체는 공간적 구성체일 뿐만 아니라 시간 속에서 계속 변화를 겪는 활동체이기도 하다. 주체는 “나는 ~이다”를 통해서가 아니라 “나는 ~이/가 되고 있다”를 통해[34]서 성립한다. 이 ‘~’이 그물 속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그물코가 아니라 그 자체 생성해 가는 어떤 것일 때, 주체란 ‘~되기’를 통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주체는 명사-형용사의 주체이기보다는 동사의 주체, 동사로서의 주체이다.
 
[37]산다는 것은 곧 겪는다는 것이고 겪는다는 것은 시간의 지평 위에서 끝없이 생성하는 차이들을 겪는 것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는 지각, 계속 생성해 가는 타인들과의 만남, 부딪쳐 오는 숱한 사건들 … , 이렇게 주체는 살아가는 한 크고작은 차이들을 만나며 그때마다 변해 간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해, 주체는 끊임[38]없이 신체적으로 변양되고 동시에 정신적으로 감응한다. 만일 이런 차이생성이 모두 각각의 파편으로 고립된다면, 주체는 시간의 지평 위에서 계속 산산조각 나게 될 것이다. ... 주체는 시간의 지평 위에서 ‘시간의 종합’을 통해서만 주체로서 성립한다.
주체에서의 시간의 종합은 우선 크게는 두 가지 수동적 종합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생명체로서의 주체는 생존이라는 조건/틀 속에서 수동적 종합을 행한다. 생명체의 동일성은 시간과 차생을 겪으면서 와해되지만, 생명체는 이것들을 흡수하는 메타 동일성을 수립함으로써 자신의 역동적 동일성을 보존해 나가야 한다. 차이생성의 거대한 와류 - 이른바 “진화” - 에 휩쓸려 와해되지 않기 위해서는 시간의 종합이 필수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기억이라면, 기억이야말로 생명의 기초적 본성이라 하겠다. 기억은 차이들의 계열화 속에서 보존되는 자기(=자기 차이성)를 가능하게 한다. 차이생성과 싸워야 하는 생명체의 생존조건이 시간의 수동적 종합을 가져 온다.
... [39]따라서 여기에서의 ‘수동성’이란 소극성이나 무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종합의 주체가 진정 주체일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킨다. 그러나 자연과 사회라는 이중의 객체성 위에서 살아가야 하는 주체에게는 이런 수동적 종합 위에서만 능동적 종합도 가능하다.
시간을 종합하는 존재로서의 주체는 자신 안에 자신으로부터의 차이생성을 머금게 된다. 이 차이생성은 자기에게 그 자기와 차이 나는 자기들을 가져오며, 주체는 이 차이들을 시간의 종합을 통해 소화해 냄으로써 주체로서 성숙해 간다. 주체의 이런 성격을 ‘자기차이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40]기억은 차생의 종합을 통해 보존되는 자기 - 자기 차이성 -를 가능케 한다. 시간적 지평에서의 차이들은 구체적인 존재함의 기본 조건이다. 세계는 기본적으로 차이들의 생성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억하는 주체는 내적 복수성internal multiplicity을 통해서 성립한다. 내적 복수성은 외적 복수성과 다르다. 공간 속에 외연도적으로 펼쳐져 있는 수적 복수성으로서의 외적 복수성과 대비적으로, 내적 복수성은 시간을 종합하면서 강도적으로 접혀 있는 질적 복수성이다. 기억이란 다름 아닌 내적 복수성이다.
술어들의 집합, 이름-자리가 공간적 주체를 구성한다면, 자[41]기차이성, 내적 복수성, 기억이 시간적 주체를 구성한다. 시간적 주체는 공간적 주체를 해체/재구성하면서 열린 주체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시간적 주체가 시간을 배반할 때 이런 열림은 닫혀버린다. 자기차이성은 기억을 통해 가능하지만 또한 기억을 통해 닫혀 보리기도 한다. 주체가 기억을 바탕으로 자기차이성을 만들어 나갈 수도 있지만, 기억에 갇힌 자기차이성에서 물러나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주체에게 이렇게 이율배반적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자기차이성의 긴장이 존재한다.
 
[43]주체는 사건들의 총체 - 열린 총체 -를 가로지르면서 생성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이 누군가가 “산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주체는 어떤 집합체의 요소이기를 그친다. 가로지르는 주체는 어떤 면에 속하는 점이 아니라 운동하는 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맺는 관계들의 양상도 자신이 속한 면에 입각해 이뤄지는 집합론적 관계 맺음이 아니라 선적인 운동을 통해서 생성해 가는 관계 맺음이다. 한 사람의 주체성은 주어진 무엇이 아니라 이런 운동이 결과적으로 만들어 가는 고유한 어떤 길일 것이다.
 
[44]주체는 빈위들/사건들의 총체가 형성하는 객체성을 가로지르면서 성립하기에, 단적으로 주어지는 주체성 같은 것은 없다. ... 개체 나아가 주체는 (실제 이름을 가지든 가지지 않든) 고유명사로서 존재하지만, 그 고유명사는 거대한 객체성의 한 얼굴로서 성립하는 것이다. 한 개체/주체의 고유함은 객관적 세계의 한 갈래로서만 성립한다. ... [45]이런 이유에서 개인의 ‘단독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개인의 단독성도 결국 세계의 한 얼굴이라는 점을 무시하는 것이다. 규정성들, 우주의 법칙성들, 사회-역사적 구조들을 떠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의 단독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여전히 개체를 실체화하는 것이다. 개인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의 개체성을 실체화하기보다는 ‘이-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47]삶에서의 필연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 자유는 주관적 환상이 되어 버린다. 역으로 자유의 가능근거를 확보하지 못하는 필연성은 인간적 삶을 뒷받침하는 철학이 될 수 없다. ... 근대 이후 꾸준히 이어져 온 한 경향은 인간이 이룩한 인식의 성과에로 인간 자신을 흡수시켜 보려 한 경향이다. ... 그러나 이런 식의 시도들은 여러 가지 문제점, 특히 어리석음을 함축한다.
첫째, 존재와 인식의 순환성의 문제이다. 인간은 인식주체로[48]서 어떤 대상을 규정하지만, 그런 규정 자체가 바로 인식주체의 어떤 조건들의 결과라는 점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그물로 고기를 잡을 때면 바다가 그 그물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 그물을 더 잘 만들면 더 많은 고기가 잡힐 수 있다. 특정한 그물을 실체화하거나 고착화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존재와 인식은 끝없이 순환적이며, 인식론적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으면서 그 순환의 고리들을 더 정교화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50]진정한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의 문제이다. 이는 곧 인식론적-존재론적 우와 윤리학적 우로부터의 탈주이다. 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지나 무식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이란 어떤 사실을 ‘모르는’ 것(무지)이나 말과 행위에서의 난폭함(무식)이 아니라 철학적 요점을 빗맞히는 데에서 유래한다. 무지하지 않기도 또 무식하지 않기도 어렵지만, 어리석지 않기는 특히 어렵다. 철학적 요점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빼어난 아니 위대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학자들에게서도 철학적 어리석음은 자주 발견된다. 진정한 주체성/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인식론적-존재론적으로나 윤리학적으로나 어리석음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인간은 자신이 주체성의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할 때 종종 선험적 착각에 빠지곤 한다. 왜일까? 자신이 주체성(대상의 정복) [51]한가운데에 있노라고, 드디어 ‘진리’에 도달했노라고 확신할 때, 그는 객체성과 부딪히는 과정, 그 역동적인 과정을 사상해 버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53]관계를 떠난 순수 내면적 자기-만듦은 대개 허구적인 만듦에 불과하다. 그것은 주체-화의 선상을 따라 이루어지는 자기-만들기가 아니라 허구적 주체성에 침잠하는 상상적 만듦일 뿐이다. 실재적인 자기-만들기가 중요하다. 그러나 실재적인 자기-만들기는 늘 쉽지 않다. 타인이란 늘 힘겨운 존재이다. 눈길은 이 힘겨움을 드러내는 곳이다. 사회적 장 안에서의 나=자기는 시선들의 교차로에 존재한다. ... 사회적 장 안에서의 나는 그런 눈길들의 총체가 결집되는 그 무엇이다.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나는 그런 눈길들로, 술어적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의 공간을 마련하는 나(소요하는 나), 또는 그런 눈길들과 실제 투쟁하고 그것들을 변화시키려 행위하는 나(투쟁하는 나)이다. 전자는 그물코들에 속하지 않는 사각지대에 숨는 나이고, 후자는 그물코들의 구조를 바꾸어 가는 나이다. 그러나 소요에만 빠져 있는 나는 선상에서 성숙해 가는 나가 아니기에 결국 허구적인/상상적인 나에 그치며, 투쟁의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객체회되는 나는 그물코를 바꾼다면서 스스로를 그물코 구조에 흡수해 들어가는 얄궂은 나에 불과하다.
 
[58]문제가 되는 것은 진리와 오류의 실체론적 구분이 아니라, 진리가 오류로 화하고 오류가 진리로 화하는 생성과정(과 그것이 함축하는 주체의 생성과정)이다. 논의했듯이 변이해 가는 이율배반적 구조의 선상에서 생성하는 주체는 곧 인식상의 변이를 겪는 주체이기도 하고 또 진리와 오류가 갈라지기도 하고 뒤바뀌기도 하는 (그 자체 생성하는) 선상에서 살아가는 주체이기도 하다. 특히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진리가 오류로 화하는 과정 즉 ‘역운(逆運)’의 과정이다.
 
[59]인식이란 본래 순수한 것도 고상한 것도 아니다. 원초적인 맥락에서의 인식이란 생물학적인 것이며 생존경쟁의 한 요소로서 작동한다. 인식하는 자는 주체가 되고 인식의 대상이 되는 자는 객체가 되며, 때문에 인식이란 “먹느냐 먹히느냐”라는 생물학적 현[60]실의 인식론적 버전, 즉 “인식하느냐 인식당하느냐”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원초적인 맥락에서의 인식이란 결국 주체화와 객체화의 투쟁인 것이다.
 
[63]정보를 통한 세계의 객체화와 그렇게 형성된 객체성에 의한 주체의 객체화에 있어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물론 아직은 상상적인 이야기이지만, 인간이 자신의 생각/마음을 객체화함으로써 다시 정보망의 객체로 전락하는 경우일 것이다.
 
[65]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를 통해서 스스로를 주체화한 것으로 착각하지만 결국 그 의미에 의해 객체화화되곤 한다. 의미는 주체가 대상에게 던지는 빛이지만, 공시에 다시 주체에게 되돌아와 형성되는 그림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주체-화와 객체-화의 이율배반적 놀이는 인간의 자기이해에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적 구조를 가진다. 1)세계는 X이다. 2)인간은 세계의 한 부분이다. 3)고로 인간 역시 X이다.
 
[66]자본주의적-기술적 주체들은 다른 주체들을 객체화해 그들의 프로젝트에 복속시키려 한다. 이런 기도는 특히 TV, 신문, 영상, 인터넷을 비롯한 대중매체와 대중문화를 동원해 이루어진다. 다른 주체들은 이런 객체화에 복속되거나 일정 정도 저항한다.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말했지만, 나는 ‘대중문화’를 어떤 분야/장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문화가 만들어지고 전파되고 소비되는 특정한 양태를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한다. 실험영화들은 대중문화가 아니지만 『일주일 만에 읽는 칸트』나 「날아라 아인슈타인」등은 대중문화이다.]
 
[76]자신의 힘으로 포섭하지 못했던 객관적 소여가 주체 속에 녹아들어 감으로써 주체는 자신을 보존하고 확충한다. 이런 존재는 우선 스스로의 개별성을 지향하는 존재이며, 주체성은 개별성을 전제한다. 주체란 개체적이든 집단적이든 일정한 개별성을 근간으로 하는 것이다. 개별성은 생명체 특히 동물에게서 두드러지게 성립하며, 따라서 주체화란 생명의 어떤 성격 특히 동물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주체-화가 그 안에 이미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성격을 품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주체-화의 문제는 그 근저에서부터 이미 윤리학적인 문제를 품고 있다.
 
[77]‘sub-jectum’(subject)에는 이런 이중적인 의미(‘아래에 던져진 것’이자 ‘주체’)가 깃들어 있다. 이중체로서의 ‘sub-jectum’이 가지는 이런 동적 구조가 우리가 앞에서 만났던 역동화된 뫼비우스적 이율배반의 구조를 형성한다. 인간세는 이런 이중체들의 드라마(사건, 상황)이다.
이런 이중체들이 엮어가는 드라마는 타자를 내리누르고 솟아오르려는 욕망과 권력의 드라마이다. 이런 근본적인 구조 때문[78]에 모두가 하나 되는 이상향, 영원한 평화, 완전한 사랑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
 
[78]이것은 곧 개체/집단에서의 주체화와 객체화의 균형의 문제이다. 나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만큼 타자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 타자를 객체화하는 만큼 나 자신도 자발적으로 객체화되는 것. 이러한 주체화와 객체화 사이에 균형이 무너질 때 타자[79]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등장하게 된다. 서로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균형 속에서만 주체화와 객체화를 둘러싼 갈등도 균형을 잡는다.
 
[82]결국 주체성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주체들의 균형은 근거 없이 주어진 거대 주체성을 와해시킴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나 사실상 이 세상에 그늘을 만들지 않는 어떤 주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거대한 주체성을 무너뜨리는 것 못지 않게 스스로가 그늘을 만들지 않으려는 끝없는 노력이 요청된다. 거대한 주체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투쟁의 삶이고, 그늘을 만들지 않으면서 사는 것은 소요의 삶이다.
 
[86]거대주체의 형성은 바로 그만큼의 그늘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고, 주체화∞객체화에서의 폐색(閉塞)현상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런 폐색으로부터의 탈주는 항상 ‘되기’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A가 B가 된다는 것은 A-임에서 B-임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상상적으로만 가능할 뿐이며, 또한 A와 B의 동일성을 그대로 남기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A와 B의 차이를 건너뛴다는 것은 곧 A와 B의 동일성 자체는 유지된다는 것을 뜻한다. 차이의 체계는 곧 동일성의 체계에 다름 아[87]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핵심은 이 ‘차이의 체계=동일성의 체계’라는 거대한 동일성 그 자체를 극복하는 일이다. 이것은 ‘차이들’differences이 아니라 ‘차이화/차이생성’differentiation의 지속적인 운동, 즉 되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는 곧 모든 개체들, 주체들은 사실상 dA, dB .......일 뿐 A, B가 아니라는 생성존재론적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이때 모든 관계는 A와 B가 아니라 dA와 dB의 관계가 된다. 그래서 되기란 늘 변별적 동일성들에서의 건너뜀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의 미분적인 생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생성, 즉 공히 생성하는 타자들 사이에서의 미분적인 되기가 곧 타자-되기라 할 수 있다. 이 타자-되기가 모든 윤리적 행위의 존재론적 근거가 아닐까.
[*차이와 차이화/차이생성을 구분하지 않으면 큰 오해에 빠진다. A, B, C의 차이들의 체계는 곧 동일성의 체계이다. 차이들의 체계가 그 자체 A, B, C의 동일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차이들의 체계=동일성의 체계 자체를 생성시키는 것이다. ‘차이의 정치학’과 ‘되기의 정치학’을 동일시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이다. 되기의 정치학이 무너뜨리려는 것이 바로 차이의 정치학이기 때문이다.]
 
[91]수많은 주체들 - 개인적 주체들과 집단적 주체들을 포괄하는 극히 다양한 주체들 - 은 각각 하나의 계열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계열들 사이에 다양한 방식의 이어짐, 끊어짐, 갈라짐, 합쳐짐, 엇갈림 ... 이 성립한다. ... 수많은 ‘우리’들이 갈라진다. 매일 수많은 부부들이 갈라서고, 회사들이 분열되고, 정당들이 따로 살림을 차린다. 하나의 주체가 둘 이상의 주체로 갈라선다. 갈라짐은 하위 주체성들의 [92]형성으로 귀착한다. 이럴 경우 ‘우리’의 술어들은 두 ‘우리’의 술어들로 변환되며, 그로써 술어들의 다른 계열들이 형성된다. 어떤 술어들은 보존되고 어떤 술어들은 파기되며, 어떤 술어들은 변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주체성들이 형성된다.
 
[93]전체-주체성 안에 그 주체성의 빛을 받지 못하는 그늘이 있을 때, 그렇게 객체화된 그늘은 주체성을 획득하려 하고 그때 전체-주체성에 금이 간다. 그래서 그 금은 정확히 주체화∞객체화의 선상에서 발생한다.
갈라짐이 도덕적 당위를 획득하는 경우는 전체-주체성이 그 부분들을 억압할 때이다. ... 갈라짐이 도덕적 당위를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는 정당한 전체를 부분들의 이기적인 욕망에 입각해 와해시키려는 경우다. 국민투표를 통해 정당하게 획득한 권력을 쿠데타로 전복시키려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 갈라짐은 독특한 ‘이-것’들의 창조가 이[94]루어질 때 진정 의미를 가지게 된다.
 
[96]한 주체가 타자를 정복하고자 할 때 그 타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요청된다. 그러나 두 주체가 대치할 때 각자는 서로에 대한 허상을 요청한다. 그 허상이 각 주체의 존립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각 주체는 타자에 대한 허상을 통해서 내부 결속력(그러나 사실은 지배층의 동일성)을 다져 왔으며, 더 나아가 그러한 허상들의 창출에 암묵적으로 공조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박정희와 김일성은 거울 이미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대치가 붕괴될 때 허상들 역시 무너질 것이고, 그러한 와해는 그 주체의 중심(지배층의 동일성) 역시 무너뜨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대치의 와해는 각 주체 내의 핵심 주체가 아니라 그 핵심 주체에게 압력을 가해 온 역사의 힘(타자들의 힘) 자체였다고 해야 한다.
 
[97]냉소주의는 모든 섬세한 차이들을 비웃음의 동일성으로 환원시킬 뿐이다.
 
[98]통일을 통해 계급적 모순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통일은 과거의 핵심주체들을 와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켜 줄 것이다. 즉 민족은 통일될지 몰라도 지배 구조는 와해되기는커녕 강화될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그늘이 메워질 때 또 하나의 그늘이 생겨나는 것은 그러한 과정이 진정한 되기가 아니라 거대 주체에 의해 이[99]루어질 때이다. 이 경우 진정한 이-것이 생성하기보다는 구조적인 재조정만이 이루어질 뿐이기에 말이다.
...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저항주체들의 개입이 요청된다. 더 정확히 말해 저항주체들의 상승변증법=상생이 요청된다. 저항주체들이 서로에게 그늘을 만들기보다는 전체로서의 저항을 생각하면서 상생의 관계를 맺을 때에만 진정한 ‘우리’-되기가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끝없이 차생하는 힘이지만 또한 그 안에 새로운 형상들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생명은 연속적이면서도 (절대 불연속은 죽음의 세계이다) 거기에는 다양한 형태의 개별화를 가능케 하는 힘 또한 내장되어 있다. 삶의 모든 드라마는 생명의 이런 힘에서 출발한다. ‘우리-되기’ 역시 이런 생명의 힘의 한 발현이다.
 
[100]사회의 집합론적 구조, 존재론적으론 생명의 배반인 죽음을 또 가치론적으론 불평등을 함축하는 이런 구조를 ‘위’(位)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무위인이란 이런 위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위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면서 이-것들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이-것들의 창조는 타자들 사이에서의 ‘되기’를 전제하며, 타자-되기, 숱한 형태의 ‘우리’-되기를 통해 가능하며, 때문에 존재론적 행위인 동시에 윤리학적 행위이기도 하다. 무위인으로 산다는 건 단지 위를 거부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위를 겁부하고 허공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여기에서 무(無)는 위의 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위의 잠재성이며, 숱한 위의 형태들이 점선들로 존재하는 허(虛)이다. 무위인이란 이 허의 차원으로 내려가 삶의 또 다른 방식들을 사유하고 현실로 다시 올라와 새로운 이-것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그때에만 무위인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며, ‘우리-되기’에 창조적으로 공헌할 수 있다.
 
[101]인간은 단순한 개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나아가 생명체로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란 주체로서 존재한다. 인간은 개체이자 생명체이자 주체이지만, 전자의 두 층위가 필수적인 것이라면 마지막 층위만이 고유하고 충분한 것이다.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를 돌아다보면서 사유할 때 주체의 문제는 피해갈 수 없으며, 어떤 논의를 하든 사유의 핵심에 놓여 있는 문제라 하겠다.
개체 특히 생명체로서의 인간으로부터 주체로서의 인간으로 간단하게 넘어가는 것만큼 경계해야 할 것도 없다. 뇌과학이나 사회생물학을 비롯해서 우리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천박한 경향, 즉 다양한 학문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진정으로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과과학의 성과를 조악하게 일반화하는 경향이야말로 인간-주체의 이해에서 무엇보다 우선 극복해야 할 태도이다. 주체의 이해는 무엇보다 그를 고유한 주체로 만들어 주[102]는 어떤 기호, 의미, 상징계, 사회, 문화 - 무엇이라 하든 - 문턱을 넘어서 논의되어야 하며, 이 문턱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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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되는 loser들-[열외인종 잔혹사], 2009

  • 등록일
    2009/09/14 02:14
  • 수정일
    2009/09/14 02:14

loserfiction이 너무 범람하는 건 아닌가? 어디서든 그렇다. 처음에는 참신했다. 명품으로 온 몸을 휘감은 부잣집 꽃미남들이 브라운관을 휘젖고 다니고, 신상걸이 나와서 대놓고 PPL을 해대는 걸 보다가, 프롤레타리아들의 땀냄새와 그들의 빌어먹을 운명, 심지어 도덕적 타락에 이르기까지 접하다 보면 신선함을 느낄 법도 했을 게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시도들이란 게, 이들의 삶을 우리가 끌어 안고 가기 보다, 전시하고 참관하고, 객관화해서 결국에는 우리 삶으로부터 멀리 배제시키는 것으로 비친다.

 

주원규의 이 소설에 등장하는 프롤레타리아들은 더 이상 우리 삶의 끔찍한 한 부분을 폭로하는 힘도 없고, 단지 자신의 삶을 관음적 독자들의 시선에 고스란히 전시함으로써 소설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 시킨다. 그래서 이들은 말 그대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loser일 뿐이다. 그러니까 loser는 운명이고, 빼도 박도 못하니, 맘에 안 드는 새끼들은 꿈에서나마 쏴 갈기는 체험을 하라는 것, 그게 이 소설의 교훈인지도 모른다.

 

여러 평자들이 이 신인 작가에게 '재담꾼'이니 '거침없는 문체와 발랄한 상상력'이니 하는데, 나로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번 [무중력 증후군]에서도 그랬듯이 한겨레 문학상은 아예 이런 방면의 글들을 잔뜩 뽑아 놓고 젊은 독자층이 다녀갈만한 인터넷 매체 등속에 광고를 뿌리면서 본전을 뽑을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한겨레에서 그렇게까지 하는데 뭐, '비난'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문학상'이라는 그 본연의 면모를 통해 보자면, 한참 함량미달이라는 건 어쨌든 사실인 듯 하다. 차라리 문학상 이름에 '한겨레'를 빼고  그저, '젊은 작가상' 정도면 어떻겠는가?

 

 

주원규, [열외인종 잔혹사], 한겨레 출판, 2009
 
[21]아예 경찰까지 데리고 온 시청 단속반의 기세로 봐선 오늘은 몇 명이 본보기로 붙잡혀 막장 중의 막장 -노숙자들은 그곳을 그렇게 부른다- 인 쉼터로 끌려가게 될 것 같다. 소주도 담배도 자유도 없는, 대신 땀만 흘리는 노동과 긍정적 사고에 대한 강박과 억지 희망만이 창궐하는 그곳에 감금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김중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50]20대의 자리를 죄다 차지하고 앉은 건 4, 50대 강남 아줌마들이나 [51]시장 바닥의 생활력 강한 억순이들이 아니다. 문제는 30대다. 90학번 이후 생산된 이들이 그런대로 가능성 있는 자리란 자리는 죄다 꿰차고 앉아 20대의 장밋빛 진로를 철저히 봉쇄하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 아닌가.
 
[76]{무료급식 자원봉사를 두고}물론 초인적인 박애주의로 무장한 이들이 극소수 존재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조차 인간이다. 매일같이 이렇게 냄새나는 무리들이 죽치고 앉아 구걸한다고 생각해보라. 그게 뭐 그리 신명나는 일이겠는가. 김중혁은 종교 재단에서 파견된 자원봉사자들이 하나같이 똥 십은 표정을 하고 있는 궁극의 원인을 그렇게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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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의 촛불], 조정환, 갈무리, 2009

  • 등록일
    2009/09/10 00:57
  • 수정일
    2009/09/10 00:57

책을 읽은지는 꽤 되었다. 늘 하던 버릇대로 발췌 했는데, 이래저래 다른 일들이 겹치는 바람에 이번에는 꽤나 시간이 걸린 샘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도 서평을 쓰기에는 너무 아득해져 버렸다.  

 

조정환 선생의 노고에 진심어린 존경을 보낼 뿐이다. 정치적 입장이야 어떻든 선생 같은 분이 이 땅에 있다는 것은 후학들에게 보기 드문 축복임에 틀림없다. 이 분 자체가 '다른 삶'이며, 그래서 이분의 책 자체가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조정환 지음, 『미네르바의 촛불』, 갈무리, 2009

 

책머리에

 

1부 촛불의 논리, 윤리, 그리고 생리

촛불: 유령인가 중간계급인가 다중인가?

보수에서의 촛불유령론 19

진보에서의 촛불유령론 20

촛불 중간계급실체론 28

촛불 과잉아나키즘론 31

다중으로부터의 도피 35

제헌권력: 대중들, 민중, 천민, 그리고 다중 39

투쟁의 새로운 순환 속에서 운동과 정치 54

승리라는 문제 혹은 감각의 혁신을 위하여 65

 

파시즘에 대항하는 촛불

근대적 전체주의와 수용소 파시즘 71

탈근대적 전체주의와 삶권력의 파시즘 76

삶권력의 정치적 계급적 토대와 그 전략 78

탈근대 파시즘 속에서 삶정치의 가능성 80

한국에서의 파시즘의 운명: 이명박 대 촛불 81

 

촛불봉기: 다중이 그려내는 새로운 유형의 혁명

머리글 87

촛불봉기의 발생조건 89

촛불봉기의 전개과정 93

권력의 대응 변화 106

촛불봉기의 특징과 새로움 107

집단지성과 봉기의 새로운 기술 123

촛불권력의 현재적 장애와 한계 128

촛불봉기의 쟁점과 새로운 과학 131

촛불봉기는 무엇을 바꾸고 있는가? 138

맺음말: 미래 운동의 새로운 로두스 141

 

금융위기와 촛불의 시간

미국발 금융위기와 국유화 145

자본주의 위기의 역사 속에서 서브프라임 위기 147

서브프라이머의 입장에서 본 금융위기 151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촛불 155

 

2부 촛불 현장에서: 기록과 성찰

뉴라이트 한국과 촛불

현대의 자본순환과 뉴라이트 161

뉴라이트 우파 정부의 성격: 순수자본독재 167

이명박 정부의 반혁명 170

뉴라이트 한국 20년 결산 173

무력 174

법 176

공안탄압 179

언론과 문화 182

화폐정치 185

테러 188

지배의 피라미드와 촛불 192

 

사회운동의 새로운 순환과 촛불

촛불의 발생계기: 삶정치적 복합문제로서의 광우병 197

노동의 재구성과 촛불 200

촛불과 욕구노동 204

촛불과 코뮤니즘 208

민민연과 애국촛불 212

 

촛불봉기의 주체성

다중의 형상들 221

문명, 시민, 시장과 촛불 244

 

촛불봉기의 특이성

중앙지성, 집단지성, 다중지성 247

다중지성의 미네르바 257

질서화와 (자기)조직화 262

삶정치와 그 무기들 279

계획으로서의 촛불과 욕망으로서의 촛불 292

 

촛불의 헤게모니와 민주주의의 전망

국가권력 293

촛불운동 297

민주주의 311

 

촛불의 쟁점들

촛불은 오합지졸인가? 329

폭력인가 비폭력인가? 331

다시 무기의 문제 345

민족주의라는 쟁점 347

금융자유화도 금융국유화도 아닌 다중의 공통되기와 자치 352

촛불은 일시적인 것인가 영원한 것인가? 356

 

3부 촛불테제

촛불테제 1: 금융위기와 촛불테제

촛불테제 2: 이명박과 강인한 테제

 

촛불봉기 일지

참고문헌

 

[5]촛불은 두 가지 차원을 갖는다. 하나는 사회정치적 차원이다. 2008년에 우리는 촛불이 낡은 사회의 닫힌 문을 밀면서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는 모습을 뚜렷이 목도했다. 생명을 위협하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결정에, 일제고사에, 대운하에, 비정규직에, 뉴라이트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항의하며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들려졌던 촛불들, 이것이 사회정치적 차원의 촛불이다. 또 하나는 존재론적 차원이다. 사람들이 손에 촛불을 켜고 있을 때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을 때조차 존재론적 촛불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영혼 속에 켜져 있다. 언제나 삶을 인도하는 것은 촛불이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는 것은 이 존재론적 촛불, 영혼의 촛불을 가시화하고 사회화하는 행동이다.

 

[6]그러나 우리는 안다. 광기란 말은 다중의 활력에 공포를 느끼는 낡은 질서가 그것을 가두기 위해 사용하는 형틀(푸꼬의 『광기의 역사』)이라는 것을. 유령이란 말은 낡은 질서를 위[7]협하는 혁명의 능력 앞에서 공포에 질린 질서가 내 쉬는 탄식이라는 것(맑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선언』)을. / 이 신성동맹의 총력전이 확인해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촛불이 한국의 모든 정치세력으로부터 분명히 실재하는 하나의 정치적 힘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 그렇다면 촛불의 존재론적 차원은 망각되거나 부인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촛불은 광기다’라는 말 속에는 현존하는 권력질서가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괴물적 힘에 대한 강렬한 인정이 들어 있다. ‘촛불은 유령이다’라는 말 속에는 지각할 수도 접근할 수도 측정할 수도 없는 힘에 대한 인정이 들어 있다. 사건을 볼 없고 오직 사물만을 볼 수 있을 뿐인 경직된 눈으로 볼 때, 촛불의 힘은 ‘광기적’이며 촛불의 운동은 ‘유령적’이다. 반촛불 신성동맹은 ‘광기’, ‘유령’과 같은 공포의 언어형식 속에서 촛불의 존재론적 차원에 대한 더 없이 분명한 인정을 표현하고 있다. / 그러므로 지금 촛불은 이 공포의 언어형식을 긍정의 언어형식으로 뒤집고 지금까지의 직접행동들이 드러낸 새로운 경향에 좀 더 분명한 이름을 주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특이한 다양성들이 좀 더 강도 높은 공통 언어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것을 통해 지금의 부정적 인정을 긍정적 인정으로 전환시키고 촛불이 발명한 새로운 경향이야말로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이정표임을 몸과 두뇌, 활동과 언어 모두의 힘으로 입증해 나가야 한다. 이 책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바, 권력에서 활력으로, 민중에서 다중으로, 당에서 네트워크로, 국가에서 코뮌으[8]로, 민족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의 언어학적 전환과 혁신에 대한 강조는 지금까지 촛불이 연 새로운 정치평면을 분명히 밝히고 한 걸음 더 전진하기 위한 담론적 진지를 구축하려는 노력이다.

 

[9]우리의 촛불은 저녁에 타올라 시간을 수놓았다. 그래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이 아니라 새벽녘에야 울 수 있었다. ... 존재론적 차원에서 ‘촛불이 승리한다’는 것, 즉 촛불이 삶과 세계를 변형시키는 힘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정치적 차원의 승리와 동의어인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이 꺼졌다고, 촛불이 패배했다고 말할 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차원이리라. 역사는 우리에게 혁명들이 패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실제로는 그것이 거대한 도약을 하고 있음을 여러 차례 입증해 주었다. 그래서 혁명은 영원하다고, 촛불은 영원하다고, 촛불이 승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존재론적 차원의 승리능력을 사회정치적 차원에까지 폭발시키고 확산시키는 임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적 혁명은 실제로는 존재론적 능력을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실현하려는 부단한 과정 그 자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아테나 여신 미네르바는 지혜의 신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신이다. 지성의 신이면서 동시에 행동의 신이다. 직접행동이 지성을 우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2]대중은 이미 알지만 넘어서기를 꺼려하는 한계를 갖는다. 대중은 스스로의 힘으로 횡적인 연대와 보편성의 정치로의 주체적 전화를 달성할 수 없다. ... 이렇게 이론의 특별한 지위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자기생산 능력의 필연적 한계가 가정되고 전제되어야 한다. ... 그런데 다중들이 자신들에게 강제 부과되어온 그 ‘필연적’ 한계들을 거리낌 없이 넘어서고 다중지성이라는 새로운 지성형태를 창출한 것은 바로 자신들에게 강제 부과되어온 그 ‘필연적’ 한계들이라는 임의의 가정들과 전제들이 부당하고 허구적인 것들이라 것을 깨닫는 순간이 아니었던가? ... [23]이론의 특별한 지위란 지식이 권력과의 공모 속으로, 즉 지식-권력 체제의 동력으로 편입되어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거짓 명제에 지나지 않는다. 다중의 특이성들의 공통화를 가능케 할 이론은 다중의 삶과 투쟁의 경험들 외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다중과 어떤 경계도 없이 뒤섞인 가운데에서만 고유하게 생산될 수 있는 사건으로서의 이론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지위도 요구하지 않으며 그래서 권력으로서의 이론이기를 거부하는 이론이며 특정하게 경계지워진 이론가 집단이 아니라 삶과 투쟁의 경험 속에 있는 다중들의 지성적 소통과 연결 속에서 생성되는 내재적 이론이다. 아고라와 그것에 합류되었던 다양한 커뮤니티들, 웹사이트들, 블로그들에서 이루어진, 그리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지성적 활동들은 결코 ‘대중의 조력자, 지원자’라는 비루한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보고, 분석, 비판, 상상이라는 사유의 행동들은 집회와 시위의 몸 행동들과 결코 분리되지 않았으며 그 연결을 통해 다중은 자신의 경험들이 매순간 직면하는 경계들을 한걸음씩 혹은 도약적으로 넘어서곤 했다.

 

[24]그렇지만 촛불은 그 어떤 성과도 낳지 못한 채 마치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가? 촛불은 꺼졌고 이후에 오히려 상황은 악화되고 있지 않은가? ... [25]촛불환상론은 지속, 반복, 실체, 성과에 대한 애착에 굳게 터를 잡고 있다. 이 이론이 말하는 진보는 반복을 통한 실체적이고 가시적인 성과의 지속적 축적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진보를 가져올 수 없는 것은 환상이며 유령이다. ... 여기서 우리는 촛불환상론의 진보 [26]관념이 촛불로 인한 사회적 (사실은, 권력과 자본의) 손실액을 들이밀며 피해보상청구를 탄압의 무기로 사용했던 보수들과 맺고 있는 철학적 동맹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냉정한 실리주의와 근대적 계산주의이다. 그것은 지속의 무덤 아래에 단절을 묻고, 반복의 그물로 차이를 포획하며, 잠재적 활력을 실체의 관에 봉하고 성과의 주판놀이로 과정의 기쁨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사건의 시간을 지속의 시간으로 바꾸는 것, 살아 있는 시간을 죽은 시간으로 바꾸는 것, 아니 차라리 시간을 공간 속에 닫아보리는 것. 이 관념적 변환을 통해서 주체는 대상으로 내몰리고 표현은 재현의 거울상으로 전도되며 활력은 권력 앞에 피고로 무릎 굻려진다.

 

[27]운동은 결코 실리적 성과들과 그것의 축적을 보장하지 않는다. 진보를 성과의 축적과 지속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삶과 운동이 적대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완전한 몰각에 기초한다. 지속되는 것은 권력이지 삶과 운동이 아니다. 운동은 권력에 대한 단절로서, 권력을 위기에 빠뜨리는 잠재력으로서, 전체를 열어 새로운 지평으로 이동시키는 차이로서 존재하는 힘이다. 중요한 것은 권력과 자본의 지속이 단절과 위기와 열림인 이 삶의 활력에 대한 의존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이 노동의 물신화를 통해서만 살아가듯 권력은 활력의 실체화를 통해서만 살아가기 때문이다. ... [28]이런 의미에서 이명박 권력은 촛불에 대한 의존성에서, 촛불과 함께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진보를 지속과 반복의 철학 위에 정립할 때, 그 진보는 다른 방식으로 수행되는 권력 정치 이상일 수 없다.

 

[35]촛불에 대한 냉소가 생산하는 것은 촛불이 직면한 한계를 열어젖히는 것이 아니라 촛불의 정치를 권력의 정치로 대체하는 것이다. / 촛불의 정치를 권력의 정치로 대체하기 위해 사용하는 소재들, 기법들은 서로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된 것은 이러한 대체가 다중으로부터의 도피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촛불을 유령화하려는 보수와 진보의 노력은 다중을 ‘정보전염병’에 걸린 환자로 분류하거나(이명박) 이념방송이나 인터넷이나 유사과학에 의해, 요컨대 괴담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 인[36]형들로 격하시키거나(『조선일보』와 백승욱) 스펙타클에 매혹당한 구경꾼 혹은 산책자로 조롱하거나(이택광), 약자들을 배제하는 통일된 계층 즉 중간계급으로 환원시키는(은수미, 김보경, 정용택(123)) 것들이었다. 이 사변적 요술들은, ... 촛불이 곧 민주주의라는 “암묵적인 주장”과는 거리를 두는 것 ... 촛불은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기획 하에서 ... 촛불에게 유령, 구경꾼, 스파이(이택광), 약자에게 무관심한 배제자들, 중간계급, 절망에 빠진 대중(백승욱 50) 등의 잔혹한 낙인을 찍는다.

 

[37]“[1]촛불집회가 대중 역량의 자율성을 보여주는 계기였던 것은 사실이다. [2]그러나 그것이 ‘대중지성’, ‘다중의 자율성’에 대한 찬미의 주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3]네그리의 다중론과 1968 혁명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 이런 논리의 비약을 뒷받침한 주된 근거이기는 했다”(백승욱 44, 강조는 인용자). 서동진이 ‘운동의 정치로서 촛불 시위에 관하여 준열한 반성을 시도’한 글이라고 소개한 이 글에서 백승욱은 세 개의 문장을 전개하면서 두 번의 무조건적 단언을 행하고 있다. 다중이 [38]무엇인지, 자율성이 무엇인지, 대중지성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네그리의 다중론과 그것에 대한 단순한 해석은 어떻게 다른지, 1968년 혁명에 대한 단순한 해석은 단순하지 않은 해석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 논리가 비약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단 말인가? 또 촛불집횡에서 드라난 바의 저 ‘대중역량의 자율성을 보여주는 계기’를 누군가가 다중의 자율성이라고 명명한다면 왜 그것이 ‘논리의 비약’인가? 그것을 ‘찬미의 주장’으로 취급하고자 하는 의도의 과잉으로부터 백승욱 자신이 다중 개념에 대한 실제적으로 ‘단순한 해석’을, 아니 차라리 비난을 쏟아내는 ‘논리적 비약’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내가 옳게 읽고 있는 것이라면 논술의 기초조차 파괴할 정도로 파탄난 이 사고전개 위에 기초한 ‘무조건적 단언들’의 나열을 ‘준열한 반성’이라고 읽어 주면서 권위를 부여해 주는 이 지식 공동체의 ‘사유의 정세’가 실로 심각한 위기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묻는 것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촛불이 민주주의적 주체가 아니라는 주장이 촛불의 내적 구성, 그 동태를 분석하고 차이를 식별하는 일보다 분석에 앞서 세워진 가정들과 척도들로 촛불을 재단하기를 좋아한다는 것 ...

 

[42]만약 하나의 이념에 의해 단단히 결속된 사람들이 형성된다면 그것은 이미 대중masses이라는 “이 다양하고 이질적인 (...) 흐름”(140)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일한 이념을 갖는 주권을 정립하는 주체형상으로서의 역사적 국민nation이나 인민people에 상응할 것이다. 그러한 집단은 능동성과 수동성을 함께 갖지만 능동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행위마저도 주권의 명령에 따르는 행위, 즉 수동성의 표현형태라는 점에서 수동성에 의해 지배된다. 다중도 수동성과 능동성을 함께 갖지만 수동성마저도 능동성의 표현양식이라는 점에서 능동성에 의해 지배된다. “배우면서 가르친다”, “복종하면서 명령한다”, “물으면서 걷는다”는 사빠디스따의 경구들이 다중의 존재론적 특질을 표현한다. 다중은 그 환원할 수 없는 특이성 속에서는 다중multitudes이며 그것의 공통되기 속에서는 다중multitude이다. ... [43]투쟁의 새로운 순환 속에서 탄생하는 다중들은 자신들의 특이성을 잃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능동적이기 위해서만 수동적일 뿐이며 환원불가능한 복수성과 이질성 속에서만 공통될 뿐이다. 특이성의 공통화는 이념적 공통화와는 다른 공통화의 능력, 방법을 요구한다. 즉 코뮤니즘의 다른 길을 요구한다. 복수적인 다중들이 그 환원할 수 없는 복수성 속에서 하나의 다중으로 행위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이제 이념적 당이 아니라 횡단적 네트워크의 형태에서 찾아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아무리 불만족스럽게 느껴진다 해도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시작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비추어 볼 대, 단일한 이념의 부재를 한계로 보는 시각은 낡았다. 그것은 새로운 투쟁순환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 그리고 이 새로운 공통화의 노선과 경향을 발견할 수 없는 무감각, 전진하기를 주저하면서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모델을 빌려오고자 하는 퇴행성에서 발생하는 감수력과 시력의 한계를 오히려 운동의 한계로 역투사함으로서 발생한다.

 

[44]“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 내부에만 존재하는 것과 달리, 대한국민은 대한민국과 이중적 관계를 맺게 된다. 대한국민은 대한민국 헌법 내부에도 있고, 동시에 (그 법을 만들 자들로서) 외부(다른 차원)에도 있을 수 있다. (......) 촛불시위대가 헌법이라는 상징적 질서 안의 주어일 뿐인 ‘국민’-언표의 주체-이 바로 자신들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함으로써 ‘국민’을 언표행위의 주체로 집단적으로 현전시켰을 때, 거기에는 분명 중대한 변화가 존재한다. 나는, ‘우리, 국민은 … ’이라고 주권선언을 하면서 발언하는 이들이 분명 제헌적 권력(‘대한국민’)이 있던 것과 동일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비유컨대 명목상 주어로 헌법 안에 갇혀 있던 ‘국민’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상징질서) 안에서뿐만 아니라 이제 국가 바깥에서 그것을 대상으로, 대자적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행위는 당연히 헌정질서를 그 기원의 순간으로 데려간다. (......) 촛불 대중(대한국민)들의 ‘헌법-안으로의-월경’과 법전에만 존재하던 ‘국민’(주권자)의 ‘법전-밖으로의-월경’을 목도한 특권층들, 사실상 ‘법에 우선해’ 국가를 제 것인 양 다룰 수 있었던 자들이 느꼈을 경악과 공포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간다. ‘저것들이 우리 손에서 국가를 빼앗으려는 구나!’”(한보희, 262-3)

 

[45]권력이 느끼는 그 무서움과 두려움이란 제정된 틀 안에 있는 듯 하면서도 그 틀을 벗어나면서 그 틀으 비틀고 변형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 저 ‘괴물’ 앞에서의 막막함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청와대, 의회, 법원에 그들이 출석해 있지 않을 때에조차도 정책, 입법, 판결의 행위들 속에서 늘 (내키든 내키지 않든)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재적 유령에 대한 감정일 것이다. 어쩌면 그 감정은 분명한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려움이라기보다 일종의 불안, 정치적 불안에 가까운 것일지 모른다.

 

[48]훈육권력의 생명권력으로의 전화는 권력의 자기진화가 아니라 그 밑 삶의 생산과 재생산의 지형에서 전개되고 있는 다중의 생성에 권력이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반작용의 형식일 뿐이다. 생명권력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배코드를 장악하고 있었던 훈육권력과는 달리 매순간마다, 매계기마다 지배의 형식[49]을 발명해야 하는 위기로 내몰린다.

 

[54]촛불에 대한 무수한 오해들은 이 거대하고 또 장구적일 수밖에 없는 흐름에 단일한 정체성을 부여하여 정의하려는 환원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촛불은 실재하기 때문에 유령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기존 질서의 어떤 자리에 할당하기에는 특이하고 괴물스럽다는 점에서 유령이기도 하다. 촛불은 결코 중간계급의 행동으로 환원될 수 없지만, 촛불비판가들이 ‘중간계급’, ‘중산층’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행위자들이 촛불봉기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 [55]이들 지대임금노동자각 촛불의 전부였던 것은 결코 아니고 이들이 촛불 속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촛불에서 주도권을 쥐려고 했던 모든 시도들은 좌초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56]‘촛불은 비정규직을 배제했다’는 촛불비판가들이 널리 공유하는 생각은 편협한 환각이다. 초기의 촛불이 광우병 위험소 수입에 대한 항의에서 촉발되었고 이미 전개되고 있던 비정규직 투쟁들과 일정한 거리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촛불에는 비정규직의 노동자들이 처음부터 다수 참가했다. 비정규직인 사라이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단일한 정체성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자/녀를 둔 어머니/아버지이고, 국민이고 민중이며, 쇠고기 소비자이고, 신문구독자이고, 방송청취자이며, 선거권자이고 ...이기 때문이다. 촛불이 이미 전개되고 있던 비정규직 투쟁현장들(KTX, 이랜드, 기륭, 코스콤 들)과 즉각적으로 결합되지 않았던 것을 촛불의 중간계급적 성격 때문으로 투사하는 것은, 비정규직 투쟁이 어떻게 하면 더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호소력 있는 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를 투쟁방향, 투쟁과제, 투쟁방식, 동원과 조직화 방법 등의 모든 측면에 걸쳐 검토하고 혁신해야할 내적 문제를 회피하도록 만든다. ... 촛불 비판가들의 중간계급론[57]은 촛불이 광우병 의제를 넘어 발전하면서 점점 더 깊이 (거리투쟁과 현장투쟁 모두에서) 비정규직과 결합되어 갔고 용산 철거민 투쟁들과도 즉각적으로 결합되었던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잘못된 사실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

 

[57]촛불에는 비폭력을 옹호하는 주장만큼 폭력을 옹호하는 주장이 공존했다. 제도화를 경계하는 생각만큼 제도화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생각이 공존했다. 국가를 부정하는 생각만큼 국가를 옹호하는 생각이 공존했다. 이 중 어느 것이 더 강하게 분출하고 어느 것이 약화되는가는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이 합류된 다양한 경향들 속에서 어느 하나를 옳은 것으로 선택하고 나머지를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조건들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지각하는 방법, 느끼는 방법, 생각하는 방법, 연결하는 방법, 결정을 내리는 방법, 행동하는 방법 등 다양한 차원에 걸쳐 이 시공간에 합류한 모두가 달라질 필요가 있다. 요컨대 촛불이라는 사건 자체가 지금까지의 민주주의의 관념, 제도, 기술, 구성 등의 근본적 혁신을 [58]요구하는 상황 속으로 우리 모두를 끌고 들어간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여기서 우리가 촛불이라는 사건을, (자본의 새로운 순환에 대응할 뿐만 아니라 깊은 심층에서는 실제로 그것을 이끄는) 투쟁이 새로운 순환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징후로 읽어야 한다면 바로 이 때문이다. 투쟁의 새로운 순환은 삶과 운동과 정치의 모든 것을 변형시키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투쟁의 순환이 어떻게 갱신되고 있단 말인가? 20세기 중후반 전세계적 대중노동자들의 투쟁은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의 사회구성의 변화를,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주권의 변화를, 훈육권력에서 통제권력(삶권력)으로의 권력성격의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대중노동자에서 사회적 노동자로의, 민중에서 다중으로의 주체성의 변화를 가져왔다. 촛불은 지구상황 속에 편입된 한국에서 산업노동과 대중노동자가 주도했던 투쟁의 한 순환이 종결되고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하에서 기존의 산업적 공간적 지역적 세대적 경계를 넘어 구성되는 다중이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의 형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62]다중은 민중, 인민, 국민이라는 주체성들이 구성했던 안전보장 장치인 국가와는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과제 앞에서 애국과 민족을 중간 계급의 이데올로기로 할당하는 편리하나 무익한 태도를 반복하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애국은 이 국가 아닌 공동체에 대한 사랑으로, 애족은 근대적 의미의 민족과는 다른 공통적 주체성에 대한 사랑으로 확대되고 변형될 때에만 투쟁의 새로운 순환의 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촛불 속에서 제기되는 애국, 애족의 요구 속에는 2002년 월드컵 응원이나 사빠띠스따의 대문자 민족 속에서 나타났던 바[63]의 국가 없는 나라사랑에로의 열림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63]이를 위해서는 비제도적 영역에서의 저항력과 구성력의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축적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운동 정치를 기반으로 선거 정치에 다양한 방식으로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가능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삶권력의 상황은 소수의 전위적 힘으로 세계를 변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고전적 표상을 끝낸다. 수만,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의 단결된 힘으로 나머지 더 큰 대중의 세계를 변[64]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는 끝났다. 삶정치적 활력은 삶권력을 균열시키면서 그것이 항상 위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힘이다. 이것은 운동과 정치 사이에 경계를 긋고 그 중 어느 것의 힘만으로 변형을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전염적이다. 삶정치적 활력은 생산, 사회, 운동, 정치, 문화 등의 모든 차원에서 다중의 가능한 능력 전체가 표현되도록 함으로써 주어진 세계를 새롭게 열어나가는 영구적 과정이기를 요구한다. ... 사람들의 이 자율적 행진을, 지금 우리가,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경계를 넘는 절대민주주의의 개시라고 부른다면 그것이 왜 문제이겠는가? 절대적 민주주의의 행진 속에서의 촛불들은, 승리에 대한 맹목적 확신이나 유토피아의 손쉬운 도래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는 의미에서가 결코 아니고, “죽음의 공포에 이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선을 욕구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일 중에서 죽음에 대해서 가장 적게 생각하고 그의 지혜가 죽음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에 있다”는 의미에서 절대적 낙관을 갖는 자유인들이다. 그리고 거꾸로 이 자유인들이 죽음의 과잉과 죽음에 대한 과잉 성찰에 오염된 세계를 밝히는 촛불들이다.

 

[66]촛불이 ‘승리한다’는 것은 촛불이 죽음의 세계를 비추어 밝히면서 삶을 개방하고 또 변형하고 있다는 현재 사태를 단언하는 것이지 성과물을 획득하여 분배할 시간잉 올 것이라는 미래 사태를 단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촛불이 승리한다’는 사람들=삶들이 낡은/죽은 세계의 변형을 위해 힘을 모으는 (즉 협력하는) 운동 속에 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자유인이 죽음을 모르듯이 촛불은 패배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승리하다는 촛불의 속성이지만 패배는 촛불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67]패배란 (업적의 시각에서 보면 성과물을 놓치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업의 시각에서 보면 협력의 붕괴敗로 인하여 힘들이 서로 등져 있는 상태北를 지칭하는데 촛불은 정확히 이 등짐의 부정, 즉 껴안음(연결, 연대, 공명, 공통화, 네트워킹)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촛불비판가들이 말하는 ‘촛불이 패배했다’란 말은 마치 ‘원이 네모나다’란 말처럼 형용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 그러므로 승리의 문제와 관련하여 촛불에 대해서는 ‘촛불은 승리한다’ 이외의 어떤 다른 시간 표현도 적절치 않으며 그 표현이야말로 촛불의 힘과 성격을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77]탈근대적 전체주의 기계는 삶의 수준에서 진행되는 대중의 활발한 분자화와 혼종화 즉 다중화를, 그 역시 분자화된 자본의 네트워크화와 그에 입각한 전지구적 통제를 통해 통합하려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부르주아지는 대중의 분자화 운동의 대두에 직면하여 나타난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위기 상황에서 그 어떤 통치형태보다 더 대중의 분자화를 자극했던 파시즘에 다시 호소하는 길을 선택한다. 탈근대의 자본지배[78]는 대중의 분자화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에 일면적 억압으로 대응하거나 혹은 대의적 사회계약으로 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자본 자신의 분자화와 미시화를 통해 이에 대응하려 한다. 자본은 삶으로부터 노동을 분리시키고 그것을 집중시켜 착취하는 방법으로부터 삶의 수준으로 내려가 그것의 분자적 미시적 운동 자체를 활성화하면서 그것을 수탈하는 방법으로 전술을 전환한다. 이것이 탈근대 파시즘으로서의 삶권력의 대두이다.

 

[78]탈근대 파시즘은 근대 파시즘의 단순한 복구가 아니다. 근대 파시즘은 분자화하는 흐름들을 장려하면서도 그것들이 서로 수평적으로 연결접속되도록 하기보다 노동, 인종, 국가, 전쟁의 끈으로 묶었고 주권 아래에 종속시켰다. 근대 파시즘은 이 때문에 한편에서는 격렬한 분자화,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잔혹한 전체주의화의 이중과정으로 나타났다. 파시즘 권력은 ... 외부적인 것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탈근대적 파시즘의 삶권력은 더욱 격렬하게 분자화하는 삶과 삶시간에 직접 대면하여 그 내부에서 기능한다. ... 삶시간은 ... 권력pouvoir의 척도 너머로 움직이는 창조적 능력puissance으로서의 활력의 시간이다. ...[79]근대의 자본과 권력은 이처럼 삶에서 노동을 분절하는 것에 의존했다. / 파시즘의 탈근대적 부흥과 삶권력화는 이제 삶시간 전체의 자본에로의 포섭을 시도한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자본의 권력의 증대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이 자신의 척도권력(가치법칙)을 잃고 늪으로 빠져듦을 의미한다. 그래서 탈근대적 삶권력은 직접적으로 삶활력을 자신의 축적기반으로 확보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사활을 걸게 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금융화, 사유화, 정보화, 요컨대 자본 자체의 분자화와 미시화는 삶을 직접적인 축적기반으로 확보하기 위한 자본의 유연화 전술들이다.

 

[79]척도너머의 삶능력을 지배하기 위해 권력이 선택하는 길은 두 가지 벡터로 구성된 하나의 길이다. 하나의 벡터는 노동하는 대중의 일부에게 잉여가치의 일부를 분배하여 이들이 자본주의의 생존에 이해가 걸린 그것의 적극적 구성부분으로 기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임금의 지대화). 또 하나의 벡터는 노동하는 일부에게 임금 이하의 몫을 지불하고 이들을 부단히 외부화하고 배제하여 인위적인 제4세계를 창출하는 것이다(지비정규직화 및 불안정화). 이것은 삶권력이 시도하는 대중의 분할이라는 단일화 과정의 양면이다.

 

[80]삶능력은 무엇보다 창조력이며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구성력이다. 이 힘은 권력과 삶이 아니라 특이한 다중들이 서로 반려종(해러웨이)으로서 협력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한다. 상보적 면역체계의 패러다임(에스또지또)도 삶과 권력의 타협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보다는 특이한 다중들의 협력적 상호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사용될 필요가 있다. 이럴 때 면역 패러다임은 민주주의적 구성의 과학(매디슨)을 혁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81]충분하지 않다. 삶능력의 이 민주주의적 구성과정은 살게 하기 위해서 죽이기를 반복하는 삶권력의 폭력기관들을 무력화하거나 해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레닌). 그러나 이것을 위해 삶능력이 민중의 권력을 위해 행사되었던 대항폭력과 같은 것으로 될 필요는 없다. 대항폭력은 주권이 행사하는 폭력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예속시킬 다른 주권을 생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중의 삶능력이 행사하는 폭력은 삶권력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다중의 탈주를 용이하게 하며 특이한 존재들 사이의 소통을 확장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협력을 생산하는 힘’이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기존의 권력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협력을 생산하는 삶능력의 이 두 측면을 함축하는 것이 ‘제헌권력’pouvoir constituant이다.

 

[82]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과연 대중의 분자화를 자극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명박 정권은 강한 분자운동을 보여준 대중에게 족쇄를 씌우고 컨테이너 장벽, 전경 장벽, 장보 장막, 거짓말 장막을 설치한다. ... 그 결과 대중은 그램분자화되어 다시 무거운 유형의 계급집단으로 집계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대중의 분자화는 이명박 정부의 등장 이전에, 특히 노무현 정부에서 더 강하게 자극되었다고 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이명박 정권에 의해 강하게 추진되는 것은 분자화가 아니라 전체주의화다. ... [83]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의 이행은 파시즘 발전의 이 두 역사적 단계를 압축적 방식으로 재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분자화 중심에서 전체주의화 중심으로 초점의 이동! 파시즘의 활성국면에서 쇠퇴국면으로의 이동!

 

[85]이명박 정부는 탈근대 파시즘이 급속히 쇠퇴의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신자유주의의 종말이 예견되고 또 경험되는 시대의 말기 파시즘적 징후들을 보인다. 그것은 점점 더 사법, 감옥, 폭력, 전쟁, 인종주의, 여론조작, 거짓말 등에 더 많이 의존하면서 자신의 기반을 침식하고 붕괴를 향해 질주한다. 정규직 노동자에게 주어졌던 혜택들의 침식, 요컨대 주식시장의 붕괴로 인한 배당금의 실종, 부동산 가격의 폭락으로 인한 지대 수입의 소멸, 연금들의 부후(腐朽)로 인한 임금지대의 위기 등은 결국에는 파시즘 그 자체의 기반을 송두리째 허무는 것으로 작용할 것이다. ... 2008년에 불붙은 촛불은 쇠퇴하는 탈근대 파시즘 체제로부터 대중의 이탈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그것은 전체주의화를 거부하는 분자화에 대한 열망의 분출이다. ... [86]탈근대 파시즘은 근대 파시즘과는 달리 단일하게 결속시키기 어려운 복잡하고 혼종적인 다중을 창출했다. ... 우리는 촛불 속에 ‘분자화를 활성화하는 전체주의화’라는 파시즘적인 모순적 욕망이 잠재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 문제는 탈근대 파시즘의 이 전체주의적 쇠퇴 국면에서 인종주의적 전체주의, 노동주의적 전체주의, 자유주의적 전체주의로 귀결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절대적 분자화로 귀결되지도 않을 정치적 가능성을 발견하고 구축하는 일이다. 그것은 분자적 특이화들의 연결접속, 즉 공통화의 가능성에 다름 아니다.

 

[102]이 경향적 저하는 촛불로는 안 된다는 절망감, 촛불을 들기 두렵다는 공포심 등이 결합된 결과이다. 결코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만족감이나 현재의 권력에 대한 지지로의 전향의 결과가 아니다. ... [103]하지만 이것은 촛불이 꺼지는 과정이 아니라 촛불이 내면 깊숙이 잠재화되는 것일 뿐이다. 절망감과 공포심은 해방의 감정이 아니라 억압된 감정이며 그것은 언젠가는 다시 표면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정서이기 때문이다.

 

[104]거리에서는 군사적 해법이 가장 큰 관심을 끈다. 그러나 군사적 승리는 촛불의 실패를 의미할 것이다. 군사적 수준에서의 최대의 것은 방어를 넘는 것일 수 없다. 정치적 해법은 제도화를 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승리 역시 촛불의 붕괴를 의미할 것이다. 부르주아적 제도화 자체가 촛불의 매장자이기 때문이다. ... 대안적 삶의 가능성과 그것의 입증이야말로 촛불의 승리를 향한 가장 확실한 일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 생활밀착형 촛불로의 전환과 혼동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생활에서 정치로의 상향과 그것의 군사적 보완의 [105]방향은 군사나 정치에서 분리된 생활이라는 방향과는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15]촛불은 단일쟁점 운동인 듯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우리 시대의 어둠을 고발하고 규탄하고 해결하려는 존엄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누구나가 동의할 수 있고 사전에 규정되어 있는 어떤 정치적 목적에 의해 규정되기보다 개개의 사안 속에서 목적과 방향을 생산하고 발명해 나가는 역동적 성격을 갖는다.

 

[119]절대적 폭력의 비폭력 형태나 저항적 비폭력 형태 혹은 방어폭력의 형태는 권력이 항시적으로 사용하는 선제폭력(현존하는 부르주아적 권력체제 그 자체가 구조적으로 실존하는 선제폭력의 형태이다)과 결코 대칭적인 것이 아니다. 대칭적이고 대항적인 폭력의 구사가 현존하는 폭력에 대한 부분적 부정일 뿐이라면 비폭력이나 저항적 비[120]폭력, 그리고 그것의 높은 수준인 방어폭력은 절대적 폭력에 기초하면서 다중의 공통된 힘이 상황에 따라 표출되는 현상형태이다. ... 절대적 폭력은 모든 시민상태들을 근본에서 규정하는 자연상태이다. 그것은 행동하고 저항하고 투쟁하기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선제폭력으로 표현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비폭력, 저항적 비폭력, 방어폭력 등으로 현현하면서 자신을 생명의 존엄과 삶의 (비록 잠재적일지라도) 절대적 공동체로, 생명들 사이의 혁명적 협력을 가능케 하는 절대적 폭력으로서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촛불은 총과 다르다. 그것은 국가정치와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삶정치의 무기이자 절대적 폭력에 기초하여 발생한 모든 사람의 보편적 협력, 공통되기이며 인류 공동체의 실재성을 알리는 상징이 아닌가?

 

[121]대의민주주의를 직접민주주의로 대체하는 것이 촛불운동의 목표가 아니라 절대적 제헌권력의 실재성을 입증하고 그것을 확장적으로 구축하며 그에 걸맞는 정치적 제헌양식을 창출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의민주주의로의 수렴론은 반혁명적이다. 반면 대의민주[122]주의가 아닌 직접민주주의로의 복귀 주장은 낮동안의 노동에 이은 밤시간의 야간집회를 항구화해야 하는 EJ안기 어려운 부담을 준다. 직접인가 대의인가가 쟁점이 아니라 다중의 절대적 구성역능과 제헌권력의 압도적 우위를 승인하는 것이 문제이고 이것에 걸맞는 제헌의 기술을 창출하는 것이 목표이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자기 삶의 운영자로 될 수 있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가능한가는 지금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직접민주주의의 현장에서 발명되어 나와야 할 절대민주주의적 과제이다.

 

[122]‘승리’는 군사적 실력적 승리를 의미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주인됨, 궁극적 주체성에 대한 직관적 통찰이자 그것의 언표이다. ... 그것은 측정이나 계산을 통해서 도달한 과학적 진리의 선언이 아니라 삶과 시간에 대한 총체적 직관을 통해 도달한 신화적 진[123]실의 표명이다. 승리는 그러므로 권력의 순간성과 촛불의 영원성에 대한 단언이다.

 

[123]아고라는 그러나 선전과 선동의 매체가 아니라 정보의 취합과 토론, 그리고 결정의 생산공간으로 기능한다. ... 아고라는 우리 시대의 다중지성, 집단지성의 코뮌으로 기능한다. 물론 아고라에서의 결정은 결코 최종적이지 않으며 권위를 갖지도 않는다.

 

[128]자발성은 자율성의 의지를 갖추고 그것을 물질적 제도로서 구축할 때에, 그리하여 그것으로 낡은 것을 해체하고 또 대체할 때에 확실한 전진을 이룰 수 있다. 촛불권력은 어떠한가? 분명히 촛불은 상당히 확실한 권력적 실재성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실재적 권력으로 느끼고 그것을 행사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대리주의/대의주의적 정서와 의식이 촛불봉기 속에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다. ... [129]촛불은 투쟁의 기관, 봉기의 기관일 수는 있어도 권력의 기관일 수 없다는 오랜 대의주의의 유산이 촛불을 짓누르고 있다. ... 그러나 대리주의/대의주의는 강렬한 자발성과 자율성을 갖는 촛불의 생리와 융합될 수 없다. 대의주의 경향은 촛불의 침식과 소거를 가져올 위험성으로 봉기 내부에 상존하고 있다. ... [130]촛불이 제기했던 국민소환제 요구는 대표자에 대한 소환과 해임을 통해 권력이 대표자에게 귀속되지 않고 선출자에게 귀속되는 권력에 대한 상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것은 촛불 정부가 갖추어야 할 제도들에 대한 예상들의 일부이다.

 

[132]네티즌이 전 지구적 온라인 연결망인 인터넷에 접속되어 있는 한에서 네티즌은 국민의 경계를 넘어선다. 설령 한국어 사이트만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 이름은 국민이라는 용어로 환원될 수 없는 잉여를 갖는다. ... 촛불 봉기의 주체들은 누구인가? ... 주권들의 회복을 주장하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진성국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이들은 국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국민으로서 국가로부터 보장받아야 할 여러 권리들(생명권, 건강권 등)을 정면으로 거부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이상 국민이 아니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쫓겨난 망명자들이며 스스로 제헌의 주체로 나서지 않고는 생명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국가 없는 국민이다. 국가 없는 국민은 더 이상 국민이 아니며 새로운 유형의 권력을 창출함으로써만 해방될 수 있는 다수의 사람들인 다중이다. ... 거리와 광장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에[133]서 이들은 분명 대중이다. ... 하지만 이들은 전위를 거부하며, 지도를 거부하며, 배후를 거부하고 자신이 곧 배후이고 각자가 스스로의 지도자이고 모두가 서로의 지도자라는 점에서 대중이 아니다. ... 이들은 피켓에 고유한 자신의 목소리를 담고자하며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자신의 개성과 특이성을 담고자 하고 또 봉기에의 참가, 참가후의 활동, 귀가의 시점, 여론에 대한 분석과 해석등을 스스로 하고 또 이후의 활동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점 등등에서 특이한 사람들의 공동체인 다중이다. ... 이들은 결코 경제적으로 규정된 객관적 통일성을 갖는 계급은 아니다. 무수히 많은 계급들이 하나의 공통의 의제 앞에서 정치적으로 결집된 무리라는 점에서 이들은 다중이다. 국가에 저항하는 국민, 이것은 더 이상 국민이 아니며 자연상태로의 복귀(존재론적 다중) 위에서 새로운 공통되기를 모색하고 있는 다중(정치적 다중)이다. 요컨대 지금의 봉기에서 다중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명확하게 등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37][지도부를 만들려는 시도는] 촛불봉기의 내재적이고 자율적인 지도력을 구축하려는 봉기 대오와 접속하지 못한 채 그 자체로는 중요한 의미를 담는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공허한 외침으로 되고 말았다. 이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촛불의 힘이 무수하게 특이적인 힘들의 접속과 소통, 신뢰와 사랑의 축적을 통해 형성되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지도력 역시 그 내부로부터, 때로는 누적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돌발적인 방식으로 형성되어 나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봉기의 과정 속에서 참가한 다중들과 단단하게 마디로 결합되지 않는 한에서는 아무리 좋은 생각들도 실효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141]이러한 공동체적 주체성이 지금 갑자기 출현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체성은 탈근대적 생산활동 속에서 이러한 출현을 가능케 할 오랜 예행연습을 거쳤음도 분명하다. 이들의 소통능력은 투쟁의 현장에서 처음 실험해 보는 낯설고 초보적인 것이 아니다. 이들은 공장, 학교, [142]사무실, 가정 등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생산적 삶 속에서 반복적으로 정보적 소통을 연습해 왔고 오늘 그것을 투쟁의 능력으로 전환시키고 있을 뿐이다. 탈근대적 생산은, 근대의 생산에서와는 달리, 구상과 실행의 분리 위에서 위계적 방식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들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스스로가 상황파악, 분석, 계획, 그리고 결정의 주체가 되도록 요구받는다. 요컨대 탈근대적 생산의 과정은 개인들에게 수동적 대중이 아니라 수동적이면서 동시에 능동적인 전인이 되도록 요구한다. ... 이런 의미에서 촛불봉기는 탈근대적 생산의 탈근대적 항쟁으로의 역전이다. 이 탈근대적 항쟁이 폭력과 파괴를 최소화하려는 윤리정치적 감각에 의해 이끌리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오늘날 생산 속에서 생명과 소통의 공동체를 만들고 있고 혁명은 폭력적 권력과 강탈적 자본에의 예속상태에 놓여 있는 이 생명과 소통의 공동체를 자립적으로 분리시켜내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자각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 촛불봉기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질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적인 것들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직 많은 약점들을 갖고 있지만 새로운 삶, 새로운 운동, 새로운 혁명이 자라나와야 할 필연적이고 비가[143]역적인 터전이다. 정동과 지성의 결합체인 다중지성과 그것의 운동은 운동의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 탈근대적 운동의 토대이고 조건이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모든 진지한 운동들이 발딛고 있는 로두스다. 여기에서 뛰는 길 이외에 어떤 길도 지금은 주어져 있지 않다.

 

[152]우선 신자유주의가 중산층을 공격하여 저소득층화하면서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고 실업자가 증가했다. 여기에서 인종차별이 더해졌다. 위계적 인종구조를 창출하는 삶권력 하에서 하층으로 가면 갈수록 신용을 잃어버린 서브프라이머들이 늘어난다. 안정적인 주거를 갖지 못하고 불안과 위험 속에 방치되어 있는 이들의 삶의 안전에 대한 욕망이 모기지에 대한 잠재적 에너지로 축적되어 있었다. 두 번째로 신용의 정보화와 위험평가기술의 발전이 증권화(가공자본화)를 촉진한다. 컴퓨터 공학의 발전과 정보화는 신용평가의 기술을 증대시킨다. 정보독점은 점차 (무디스, 스탠다드 앤 푸어스, 피치 등의) 신용평가기관을 권력화한다. ... 이들은 위험에 대한 계측을 가능케 하여 저소득층을 대부 시장으로 흡수하는 역할을 떠맡는다. ... 증권화와 복잡화, 그리고 보험화가 결합하면서 위험은 인지하기 어려운 저층으로 깊이 은폐되었고 신용평가기관의 권력화를 매개로 이것은 세계시장 전체에 유통되었다. ... [153]이는 자신의 주택지분을 은퇴하기 이전에 현재의 소비를 위해서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 정보산업의 버블 붕괴라는 조건 하에서 주택과 토지가 투기의 대상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 증권화를 재촉한다. 이것이 미국내 주택수요를 증대시키고 프라임 외에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상품화를 가져온다. / 이렇게 해서 가능해진 증권화가 위험을 세계화한다. 돌아보면 위험의 세계화는 태환능력을 상실한 달러가 국제화폐로 등장한 것에서 본격화되었다. 이때부터 미국의 발권특권은 세계경제의 핵심문제로 등장했다. ... 미국의 소비가 각 지역들(특히 중국)의 생산을 지탱하고 다시 그 지역들에서 창출된 잉여가 미국의 채권과 증권을 구입함으로써 달러를 미국으로 실어보내는 순환고리 ... 이제 미국의 주택금융시장이 세계자본시장과 연결됨으로써 위험세계화의 새로운 형태가 나타난다. ... 세계시장에서 유통되는 주식, 채권 등 거의 대부분의 복잡한 금융증서들은 가공자본의 특징을 지닌다. 그것은 실현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 수익에 돈이 지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용자본, 가공자본이 금융자본에 의해 매개되는 한, 부실과 파산의 위험은 피할 수 없다. ... [154]이 부채관계망에서 서브프라이머의 대극에 있는 금융자본은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이 위기의 부담을 국민들(서브프라이머들, 프라이머들 등)에게 전가할 것이다.

 

[이어서, 154]신용은 한 사람을 공동체의 성원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며 공동의 사회적 노동관계의 마디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신용은 창조될 수 있고 또 창조된다. 이것은 인간들의 공동체, 사회적 노동이 부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의 증폭을 반영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하에서 신용은 사회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 아니라 사적(국영이라 할지라도 국가가 지배계급의 이익을 돌보는 사적 기관인 한에서는 사적이다) 금용기관들에 의해 매개된다. 이 때문에 신용은 사회 공동체를 순환시키는 피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신용의 순환이 부단히 사회적 적대를 확대재생산한다. 서브프라이머들의 양산, 억압, 퇴출의 주기적 반복은 그것의 결과이다. ... [155]인플레이션은 생산되지 않은 부를 분배하는 것이다. 그 분배는 극히 불균형적이다. 이번의 위기 대처 과정에서도 확인된 것처럼 소수의 은행가들, 기업가들이 대부분을 분배받고 국민들이 그 나머지를 분배받는다. 인플레이션은 물가를 상승시킬 수밖에 없는데 그 고통은 노동계급과 빈민, 즉 다중이 전적으로 짊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대안이 있는가? 금융기관이 매개하는 신용기능을 공동체가 담당하는 길이다. 현재의 은행국유화는 다중들의 희생 위에서 자본의 이윤만을 보장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162]전지구적 뉴라이트는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이다. 이것은 공장을 축적기반으로 하기보다(공장을 그 일부로 삼는) 사회를 축적기반으로 하는 초국적 금융자본 주도의 자본주의이다. 화폐(달러, 유로, 엔, 위안 등), 금리, 환율, 주가 등은 뉴라이트 정치의 핵심적 무기이다. 화폐정치가 뉴라이트 정치의 본령이다. 올드라이트 중에서 케인즈주의 정치는 조세와 재정을 핵심적 무기로 삼았고 자유주의 정치는 공장착취를 핵심적 무기로 삼았다. 뉴라이트 정치에서 올드라이트 정치의 두 무기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재배치되어 금융축적의 밑바닥에 놓이게 된다. 뉴라이트는 노골적으로 부자들과 자본가들을 위하는 정치이다. 삶의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만들면서 그 매매행위에 축적의 논리를 부과한다. 모든 교환 행위, 매매 행위, 소통행위에는 이자가 발생해야 한다. 소통으로서의 삶이 이자 체제에 포획된다. 신자유주의적 축적은 삶의 위기를 먹고 산다.

미국은 뉴라이트 정치에서 태풍의 눈이다. 달러기축을 유지함으로써 세계자본의 순환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달러기축을 유지하는 방법은 전쟁을 하는 것이다. ... [163]전쟁은 달러에 대한 믿음,, 달러에 대한 전 지구적 복종을 구축하는 방법이다. ... 천문학적 적자가 누적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버틸 수 있는 동력이 바로 달러에 대한 믿음, 달러에 대한 세계 화폐들의 복종에서 나온다. 미국은 국채의 판매를 통해 적자를 메운다. 국채는 그 국가의 존재에 대한 신용(믿음)을 근거로 한다. 권력에서 기인하는 검은 돈들, 노동자들의 소득에서 기인하는 보험금들(국민연금, 건강보험 등)이 미국의 국채를 사들이고 이를 토대로 달러가치가 유지되며 이로써 미국의 적자를 그때그때 보전할 달러가 확보되어 왔다. ... 이것[국가보증금융회사의 부도사태]은 미국의 신용을 크게 떨어뜨릴 것이며 미국 국채의 판매는 급감될 것이다. 유로화를 비롯한 다른 화폐로의 전환이 불을 보듯 뻔하다. 군사적 군주국으로 제국체제, 즉 신자유주의적 세계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미국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163] FTA는 위기에 빠진 미국이 동맹국이나 주변국의 자산과 노동을 미국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원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모든 장벽의 철거를 통해 노동, 상품, 원료,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함으로써 FTA는 위기경제의 영역을 확대하고 위기의 폭발을 유예하며 위기를 [164]더 큰 규모에서 생산한다. 한미 FTA는 그 작업의 일환이다. 한국 정부는 더 많은 돈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러나 금융자본의 유입은 항상 불안정하며 단기계약 이후에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그래서 더 폭넓은 이자 행위를 하기 위해 FTA를 원한다. ... 생명, 사회정의, 윤리, 평등, 자유 등등의 모든 가치는 관심 밖이다. ... 위기를 넘어서야 한다는 명령은 매 시기에 모든 자본에게 부과된다. 그래서 한국의 대자본도 FTA를 원한다. 이렇게 해서 약육강식의 논리가 세계적 규모에 확대된다.

이런 점에서 일국적 뉴라이트는 전 지구적 뉴라이트의 기능마디이다.

 

[166]비정규직 운동은 정리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원직복직,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당사자 운동으로 되어 있다. 이 운동은 정규직이라는 전통적 고용형태에 대한 애착을 보[167]여 준다. 과거에 정규직 고용은 생명안전의 일차적 조건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생명안전은 피고용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소득이 고용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노동과 소득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은 지난 세기에 케인즈주의 사회들에서 입증되었다. 만약 실업이나 비정규 고용상태에 있다고 해도(사실 이것이 비정규직 노동자수가 정규직 노동자보다 많아진 우리 시대의 정상적 고용양식이다)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생명안전을 구태여 정규직으로 고용되기를 통해 해결해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적 소득보장 요구는 비정규직의 생명불안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규직의 해고불안을 해소하는 수단일 것이며 정규지/비정규직의 분할을 통해 지배하는 자본의 통치를 파괴하는 방식일 것이다. 촛불이 민족주의를 넘어서고, 비정규직 노동이 과거에서 투쟁의 꿈을 빌려 오는 당사자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넘어설 때 촛불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들 두 개의 운동은 투쟁의 선순환 흐름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175]공포를 조성하는 대응은 일시적으로 시민들을 위축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그것현재 불복종의 형태로 진행되는 문화적 윤리적 성격의 시위를 삶정치적인 총파업으로 발전시키는 촉매제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수준에서의 삶정치적 파업들을 결행하고 있다. 이 삶정치적 파업들의 연쇄와 집결이 장기화되어 삶정치적 총파업으로 발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들의 요구가 수용될 수 없고 불만이 해소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이 총파업은 지금까지 운동에 극도의 절제를 요구해온 비폭력이라는 마개를 뽑아버릴지도 모른다. ... 비폭력의 마개가 뽑혔을 때 다중이 절대적이고 순수한 폭력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낼 길이 있을까? 다중의 절대적 폭력은 경찰력으로도, 군사력으로도 저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풍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력이며 모든 것을 절멸시키는 거대한 죽음충동이기 때문이다.

 

[184]전광판의 거대한 영상들은 다른 생각을 가질 겨를을 주지 않으면서, 아니 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억제하면서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민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자본의 영상은 네거리의 상공을 점거하고 있다. [185]자본의 거리정치는 이렇게 영상을 통해 밤낮으로 어떤 제지도 받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촛불의 거리투쟁이 살수, 체포, 연행, 구금, 구속, 구타, 협박의 소나기를 맞으면서 피난의 행진을 하는 것과는 달리.

 

[186]민족주의는 화폐나 자본과 공존가능하며 심지어는 그것들에 의존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민족주의는 중소자본의 육성을 문제해결의 수단으로 사고해 왔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철저히 해체되고 기반을 잃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중소자본이다. 촛불에서 민족주의의 득세는 촛불의 운신기반을 좁히는 것으로 작용했고 특히 다양한 유형의 노동하는 사람들의 적극적 참가를 가로막는 것으로 기능해 왔다. 비정규직을 비롯한 다중의 삶의 문제는 민족주의를 통[187]해 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의 경우는 촛불 속에 민족주의적 뉘앙스를 갖는 ‘국민’ 관념이 부상하면서 집회나 시위 참가에 어려움을 느껴왔다. ... 촛불의 다양성을 좀 더 실효적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와 같은 배제적인 관념보다 훨씬 개방적인 관념을 발명해야 한다.

 

[194]한국의 경우 그것은 노무현과 민주당 등에 의해 그 정치적 표현을 얻는다. ... 촛불봉기에서 반이명박, 반뉴라이트 쟁점을 이끄는 흐름 중의 일부는 이 신자유주의 좌파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민족해방적 민족주의 흐름의 일부도 그러하다. 그래서 촛불봉기의 초기에 신자유주의 좌파 정파는 무시되었지만 촛불이 약화될수록 신자유주의 좌파에 대한 지지와 의존의 경향은 증대했다. 그래서 촛불 전체가 신자유주의 좌파 흐름과 은연중 동화되어가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에 대항해온 사회(민주)주의는 촛불봉기에서 한 발을 빼고 있었고 촛불을, 노동자투쟁으로 이어질 전주곡으로만 볼 뿐 자신들이 뛰어야 할 로두스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아래에 사회민주주의 흐름이 있다. 이 흐름도 세밀하게 나누면 우파와 좌파로 구분할 수 있다. 민주노총에 기반을 둔 민주노동당의 일부에 의해 표현되는 사회민주주의 우파는 한국적 특수성 때문에 민족주의 우파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규직 노동자, 농민, 지식인, 학생 등을 정치적 대의기반으로 삼는다. 이 정치경향은 촛불봉기에 참가했지만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그 아래에 사회민주주의 좌파가 있다. 사노련, 노동자의 힘, 노동해방실천연대 등이 이에 속한다. 진보정당은 사회민주주의 우파와 좌파가 혼재된 정파로 존재한다. 정규직/비정규직 선을 따라 노동계급 구성이 변화함에 따라 사회민주주의 좌파는 점점 비정규직 운동에 깊이 [195]개입하는 것으로 사회민주주의 우파와 차별성을 띠는 경향이 있다. 촛불의 초기에 금속노조, 화물연대 등의 노동자운동이 촛불과 연결되었고 촛불봉기가 장기화되면서 기륭, KTX, 이랜드, 코스콤 등의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이 촛불과 연결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아직 확고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 흐름은 촛불을 중간계급 운동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상의 대의주의 정파들에 의해 대의되지 못하거나 혹은 그러한 대의를 거부하는 사회적 존재들이 있다. 이들은 사회학적 차원에서 노동의 공통되기에 기초한다. ... 직접행동주의적 아나키즘과 코뮤니즘은 이러한 경향을 정치화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201]비정규직이 위기의 삶을 의미하는 한에서 정규직화는 하나의 대안일 수 있겠지만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적이다. 하나는 현재의 자본관계가 기술, 정보, 지식, 정동(affect)에 광범위하게 의존함으로써 직접적 노동(직접적 고용자)에 덜 의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한에서 더 많은 직접적 노동의 안정적 사용에 대한 요구는 탈근대자본주의를 근대의 자본주의로 복귀시키라는 요구를 의미하게 되어 비현실적 복고경향을 드러낸다. 둘째 설령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 요구의 지향은 안정된 자본주의의 구축에 있게 되고 노동해방의 전망을 닫게 만든다. 즉 이 요구는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요구이다.

현대의 비정규직문제는 고용불안정의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의 실제적 본질은 삶의 불안정, 삶의 안보(안전보장)의 취약화의 문제이다. ... 그러므로 고용요구는 실제로는 삶의 안전보장에 대한 요구로 이해되어야 한다. 닥쳐온 고용위기는 자본(관계)이 다중의 삶의 안전을 더 이상 보장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그러므로 자본관계와는 다른 방향에서 삶의 안전을 보장받고 삶의 행복을 추구할 방법을 찾는 것이 다중이 직면한 문제이다. 이 문제를 풀어나갈 바탕은 삶의 생산과 재생산 능력으로서의 노동이다.

 

[202]오늘날 착취는 사회화된 노동, 일반노동에 대한 착취이며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자본관계에 이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피고용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취업노동자)은 직접 고용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자본이 이용하도록 만드는 역할, 즉 지주소작관계 한에서의 마름과 비슷한 역할을 떠맡아 가고 있다. 개별 자본에 직접 고용되지 않거나 불안정하게 고[203]용된 사람들이 삶의 위기를 겪고 있는 정도가 높은 만큼 취업과 정규고용은 삶의 안전보장(보험)의 성격을 더 강하게 갖게 된다. ... 이로부터 ‘일정하게 보장받는 직접고용 노동자’와 자본 사이에 비보장노동자에 대항하는 안보동맹이 맺어질 가능성은 그만큼 높다. 그 동맹은 주권적 안보동맹일 것이다.

 

[204]비정규직 법안은 다중의 연합을 파괴하고 다중 내부에 위계제를 도입하면서 소수의 안정된 고용노동자를 매개로 하여 다수의 비정규직 불안정노동자를 파견근로, 기간제 근로 등의 형태로 착취하려는 제도 구축 시도이다. 우리는 비정규직 제도를 더욱 확장하고 또 확고하게 안착시키려는 이 법적 시도의 나쁜 효과를 폭로하고 그것에 맞서면서 노동기본권에 기초한 고용안전이라는 방어적이고 복고적인 주장을 넘어설 수 있도록 준비해 나가야 한다. 그 디딤돌은 무조건적 보장소득 요구이다. 그것은 현행의 일반적 공통노동과는 더 이상 부합하지 않는 현재의 사적 자본관계를 척결하고 자본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삶의 안전보장을 이룰 관계를 새롭게 창출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일 것이다. 이것은 촛불의 취지와 완전히 일치한다.

 

[206]자본주의는 두 가지 공리에 기초한다. 첫째, 소득(임금)을 얻으려면 [207]노동을 해야 한다. 둘째, 노동하려면 고용되어야 한다. 첫째가 가치법칙이요 둘째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본원적 축적이다. 첫째가 노동의 계량화, 시간화이며 둘째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노동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창출이다.

그런데 이 공리들은 자본가 예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 그리고 이 공리들은 케인즈주의에 의해 자기부정되었다. 케인즈주의는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소득을 주는 것을 국가의 원리로 삼음으로써 개별화된 노동과 개별화된 소득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국가적으로 승인했다. 이후 개별노동과 개별소득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이 있다는 생각을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로서만 가동될 수 있었다.

 

[208]이것[무조건적 소득보장]은 부르주아 정치체 속에서 충분히 달성될 수 있는 과업은 아니다. 부르주아 정치체는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할, 지배자와 피치자의 분할,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분할, 이윤과 임금의 분할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정치체는 더 이상 현 단계의 인류사회를 광범한 동의하에 꾸려나갈 수 없다. 대다수 사람들을 생존선 이하의 비정규직으로 몰아넣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자와 이윤을, 그리고 일종의 마름 수당인 정치적 임금을 특혜적으로 받는 정규직으로 분할하고 있는 현재의 부르주아 정치만큼 그것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비정규직은 폐지되어야 한다. 정규직도 폐지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유롭게 일하면서 그 생산물이 자유롭게 분배될 수 있는 관계는 새로운 정치체에 의해서만, 다중지성의 코뮌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209]민족주의 비판, 즉 반민족주의가 뉴라이트를 생산했다는 것이다. 뉴라이트는 신자유주의이다. 이것은 자본의 초국적화의 경향을 내면화한 민족주의 비판이다. 거대 독점자본, 초[210]국적화한 재벌들, 초국적 금융자본들이 힘을 얻기 위해서 민족주의를 걸러내야 했다. 뉴라이트는 민족이라는 단위가 오늘날 자본주의의 발전에 조응하지도 자본의 축적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뉴라이트의 반민족주의는 전적으로 자본축적의 논리학이다. 뉴라이트는 근대에 한 몸으로 결착되어 있던 민족과 국가를 분리시키고 민족주의 대신 애국주의를 옹호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자본은 국가를 폐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축적을 위한 마디로 삼는다. 즉 국가는 세계자본주의에 필요하다. 뉴라이트는 바로 이 필요에 맞추어 애국을 주장한다. 뉴라이트에게 애국이란 국가를 자본축적의 지렛대로 이용한다는 의미이다.

 

[215]역사적으로도 국가는 내부적으로 억압(치안)의 기관이었고 대외적으로는 전쟁의 기관이었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지만 그 보호는 주어진 영토 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하여 부를 축적하고 그들을 국민으로 조직하여 착취의 영토를 확장하는 동력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호와 억압은 국가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민민연 선언문이 자신의 정치학을 정부에 대한 기대가 붕괴된 것 위에 정립할 때, 그리고 촛불연대 선언문이 자신의 정치학을 대한민국의 국가적 존엄성의 위기 위에 정립할 때 이 두 선언문은 스스로 국가가 되려는 권력의지에 함몰하였거나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제하려는 십자군 전쟁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국가, 애국, 국민은 ... 반동적이며 수구적인 가치이다. 이것은 나치즘, 파시즘, 일본군국주의, 네오콘 등에서 그 극단적 완성을 보게 되는 가치이며 근대의 이른바 ‘정상’ 국가들이 매일매일의 정치에서 착취와 수탈을 위해 끊임없이 동원하는 이데올로기들이다.

 

[216]국가는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바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에 따라 정립된 정치체계를 지칭하지 않고 접속하여 협력하는 삶의 네트워크를 지칭할 때 의미를 갖는다. 민주주의는 국가형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국가형태를 파괴하고 다중들 자신에 의한 다중들 자신을 위한 다중의 자치형태를 발견하는 힘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 의한 모든 사람의 모든 사람을 위한 자기지배가 민주주의의 실제적 잠재력이다.

 

[218]연대기구가 설정하고 있는 ... 목적은 존엄의 촛불에 외부적인 것이며 국가와는 다른 유형의, 즉 코[219]뮌 유형의 자율적 공동체 구축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연대 기구 조직화의 움직임은 촛불을 살림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연대기구들이 정식화하고 있는 정신들은 퇴행적이지만 다중들은 촛불을 살린다는 첫 번째 이유 때문에 연대기구가 여는 시공간을 촛불의 자기목적, 즉 촛불의 자치를 위해 활용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시공간을 창조의 시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촛불에서 국가주의적 권력정신을 해체하기 위해서라도, 흩어져 있던 촛불들이 서로 배우기 위해서라도, 또 촛불을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저 지도자들과 전위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리라.

 

[229]많은 사람들이 다중 개념에 제기해온 문제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이민, 이주를 전형적 사례로 삼는 다중의 유목적 운동에 대한 긍정이 만약 그것이 즐거운 것이라거나 행복한 것이라는 등의 감성적 진단에 기초한 것이라면 랑시에르(그리고 여타 사람들)의 ... 비판의 적확한 표적이 된다. 왜냐하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헤매는 이주, 이민은 글자 그대로 비참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주에 대한 네그리와 하트의 긍정은 이 유목적 운동이 갖는 역사적 세계사적 의미에 대한 진단에 기초한 것으로서 비참에도 불구하고 이주가 갖는 변형의 힘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의 비판은 과녁을 빗나간다.

...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드는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는 비참의 산물이지만 그것의 역사적 의미는 그들이 추방된 자로서 느끼는 감각이[230]나 감성과는 별개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주하는 다중의 유목적 운동은 그것이 비참에 의해 조건지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인류인들의 국경을 넘는 혼종과 새로운 주체성의 탄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계기이며 코뮤니즘을 새로운 수준에서 구축할 잠재력의 축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랑시에르가 ‘인민’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그 아무개n'importe qui가 오히려 다중으로부터 특이성을 지워버리고 난 후에 남는 찌꺼기의 이름이 아닌지 반문해 보아야 한다. 촛불들은 이런 ‘인민’이기에는 너무나 다채색이고 특이하다.

 

[234]보호의 사랑은 연대의 사랑과 같은 것이 아니다. 보호자와 위안자는 그것이 뜨거운 사랑에 불탈 때조차 위계의 상층에서 보호받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보호의 구조는 권력의 구조이며 그래서 억압은 보호의 이면이다. 그래서 다중이 보호에 만족하고 그 보호의 틀 속에 안주하게 되면 그들의 행동의 자유는 협소해 지고 상상력의 폭도 좁아진다. 그래서일 것이다. 청소년들이 어느날 태평로 아스팔트 바닥에 대자보를 붙여두었던 것은. “우리를 보호하려고 하지 말라. 우리를 대[235]상화하려 하지 말라. 우리는 이 투재의 주체이다.” .... 보호와 위안을 일시적 방패막으로 삼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힘을 재정비하고 다시 ‘투쟁의 독자적 주체’로 나서야 한다. 보호의 사랑에 길들여질 것이 아니라 투쟁 속에서 단련되는 공동체의 사랑을 쟁취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자칭의 보호자들과 대립하는 방법으로? 아니다. 주체의 입장에 확실하게 설 수 있을 때, 자칭하는 보호자는 원군일 수 있다. 이 원군의 권력망을 살짝 벗어나면서 그 원군의 힘을 싸움의 동력으로 배치할 수 있다면.

 

[236]선거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선거가 다중들의 정치적 승리를 위한 고유하고 적절한 형식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대의민주주의는 다중의 정치적 형태로서 극히 취약하다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선거에서 승리하기란 거리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몇 배는 힘들고 설령 승리한다 하더라도 그 승리를 변질 없이 지켜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대의는 본질적으로 굴절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237]촛불이 중산층의 의제라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널리 확산되는 생각이 있다(박노자, 김종엽). 이 생각은 비정규직의 투쟁이 촛불에서 주변화되는 것을 고려한 판단이다. 그러나 비정규직 투쟁의 주변화가 촛불의 [238]중산층성을 뒷받침하는 증거일까? 의제를 신원주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부분적으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촛불과 비정규직 투쟁이 서로 접근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의제의 계급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피상적이며 안이한 해석으로 보인다. 촛불은 단일의제를 갖는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의제들을 포함하는 용광로이다. 삶의 다양한 요구들이 촛불을 통해 제안되었다. ... 하지만 현재의 비정규직 투쟁은 이 잠재력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 왜 비정규직 투쟁이 무조건적 보장소득과 같은 공통적 요구를 제기하는 것으로 발전하지 않는 것일까? 그럴 때 사회적 연대의 잠재력이 더 커질 수 있는데도 말이다. 현재 비정규직 투쟁의 당사자 운동적인 이 제한성이 촛불과 비정규직 투쟁의 결합을 방해해온 요소가 아닌지 진지하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240]일본은 단일한 통일체가 아니다. 한국이 이미 두 개의 민족(부르주아지와 다중)을 포함한 복합체이듯이, 일본도 두 개의 민족을 포함하고 있는 복합체이다. 누가 이 복합체를 단일한 통일체로 보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각국의 지배계급, 즉 민족부르주아지이다. 민족부르주아지는 복합체인 한국이나 일본을 단일한 통일체로 환원함으로써 국민적 통합을 강조하고 저항, 혁명을 억제한다. ... 민족국가는 다중의 정치형태일 수 없고 오직 자본의 정치형태일 뿐이다.

 

[242]혁명은 영구적인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의 주요한 정치적 과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와 연결된 모든 계급계층이 동시에 동원되어야 한다. 문제와 연루된 세력들 모두가 동원되지 않고서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누가 주도하는가 혹은 할 것인가가 현재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에서 공동행동을 할 것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공동행동의 가능성을 침식하며 결국 투쟁의 역량을 해체한다. ... 다양한 전선들이 공동의 목표로 집중[243]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그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이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결집하되 이후의 방향들(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 자율주의 등)은 각 참가자의 의향과 욕망과 생각에 맞게 열어두는 것.

 

[243]어떤 이데올로기, 어떤 관념을 갖고 있느냐보다 적대성, 즉 정치적인 것의 실재성을 단언하고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것에 어떤 방향을 새길 것인가는 참가자들 자신에 의해 결정될 문제이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로두스는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촛불 외부의 딴 곳에 있지 않다. 새로운 과학은 그 속에서 나와야 한다. 파시즘 경험을 떠올리며 ‘대중의 성격구[244]조의 비합리성과 조작가능성’을 우려하면서 봉기행동으로부터 멀리 자리잡고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그 외부에서 망루적 비평을 하는 것에 만족하게 된다면 그것은 대중운동에 대한 원천적 부정으로 귀착되지 않겠는가?

 

[245]촛불이 승리한다. 하지만 그 승리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과정이 아니라 국가에 위임된 자신의 권력을 되찾고, 시장에 내맡겨 놓은 삶을 되찾아 의식적으로 자기통제하며 타인과의 비시민적, 비시장적 관계방식을 창출하고, 주로 자본가들만이 이용권을 갖고 있는 문명을 자신의 것으로 되찾아오는 기나긴 투쟁, 파괴와 해체를 수반하는 투쟁의 과정,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고 활력을 키우는 항구적 운동 그 자체를 가리킨다.

 

[248]모든 지성은 중앙 명령권자에게 주어져 있고 조직과 체계는 그것을 관철시키는 구조이다. 규모가 크고 검정색 일색이며 표정조차 없는 그 지성이 집중지성, 중앙지성이다. 전통적으로 지배계급은 이러한 중앙지성에 의지해 왔다. Central Intelligence Agency의 약칭인 미국의 CIA나 한국의 구 ‘중앙정보’부 등이 그 사례이다. 근대에 중앙지성은 거대한 힘을 발휘했지만 지금 그것은 급격히 능력과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다른 한편에 개개의 특이한 지성들과 그 네트워킹에 기초를 둔 다중의 집단지성이 있다. 겉으로 보면 다중지성은 오합지졸로 보인다. 통일된 사전행동계획이 없다. 언제 어디서 모인다는 식의 커다란 지적 연결선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 개개인들은 매순간 정보들이 수집되고 처리되고 전송되는 지성망의 마디로서 기능한다. 명령과 통일이 아니라 연결과 협력이 다중의 집단지성의 관건이다. ... 명령권자들만이 사유하고 나머지는 그에 복종하는 중앙지성과는 달리 집단지성에서 다중들은 직접사유하며 언제 결합되고 언제 물러날지를 전체에 대한 고려 위에서 스스로 결정한다.

 

‘집단지성인가 중앙지성인가?’라는 물음은 그것이 양자택일적 의미를 지니는 한 잘못 제기된 물음잉다. 우리 시대의 모든 것이 집단지성에 의존하고 있고 그것이 노동양식이자 삶의 양식으로 되어가는 한에서 집단지성은 어떤 선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집단지성은 다중의 지성형태일 뿐만 아니라 노동하는 사람들을 다중으로 편성하는 힘이다. 중앙지성은 집단지성을 이용하고 착취함으로써 생존한다. ... 중앙지성은 집단지성의 외부에서 집단지성의 착취자로 기능하는 한에서 집단지성 발전의 장애물이다. ... 그래서 집단지성의 발전과 진화는 중앙지성의 해체와 재전유, 그것의 집단지성화를 통해서, 중앙지성의 기관들을 집단지성의 네트워크 마디로 재편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 집단지성은 지금까지의 사회변화의 [251]결과이자 동시에 미래 사회변혁의 조건이고 동력이다. 그것은 일과적인 것도 방법적인 것도 아니다. 오늘날의 인류는 집단지성 위에섯, 그것에 근거하야 도약해야 한다 집단지성은 우리가 도약해야할 로두스 섬이다.

 

[251]집단지성과 다중지성은 다르다. 어떻게 다를까? 다중지성은 특이성들의 접속과 혼종, 그ㅡ리고 새로운 것의 생산을 통해 작동함에 반해 집단지성은 다양한 것들 사이의 비판과 배제를 통해 특정한 경향의 헤게모니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 집단지성에서는 다중이 집단으로 환원되고 수축되는 것이 아닌가? [252]집단지성은 토론을 통해 지배적인 것을 구축한다. 하지만 다중지성은 다양한 생각들과 감정들, 능력들의 모자이크를 구축한다. 집단지성은 새로운 유형의 당이다. 우리 시대에 적응된, 재구축된 당이다. 다중지성은 이러한 당들의 참여를 보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전통적 당들이 대상으로 삼았던 대중들의 특이화이자 특이화된 대중들의 지각적 정동적 지성적 움직임이다.

 

[254]촛불봉기는 배후나 지도에 의해 이끌려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서로 생각과 감정을 전염시키면서 집단적 지성체로 성장해 가고 있다. 전염은 촛불봉기가 살아나가는 방식이다. 그것은 탈근대적 소통방식이다. 그것은 질병이 아니라 탈근대민주주의의 동력이다. 이것은 포퓰리즘과 혼동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60]미네르바의 예측이 거듭해서 맞아떨어지는 것은 미네르바 자신도 알고 있듯이 현재 전 세계의 지배자들이 새로운 것을 창안하지 못하고 낡은 것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은 예측불가능하지만 낡은 것은 예측가능하기 때문이다. 미네르바의 경제예측의 날카로움은 금리, 환율, 주가, 부동산, 물가, 인수합병, 투기 등에 관한 정확한 정보에 기초하며 그 운동 경향에 대한 통찰력 있는 파악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 예측에 대한 권력의 공포는 오늘날 금융세계의 특징에서 기인다.

 

[262]미네르바의 예측활동은 권력으로부터 서민들을 분리 시켜내지만 그들을 온전히 다중의 시간 속으로 가져가지는 못한다. 이제 미네르바의 지혜가 촛불의 정열을 품고 촛불의 정열이 미네르바의 지혜를 장착할 때이다. 지성과 몸의 합체 속에서 자본에 묶였던 예속의 끈이 끊어진다. 드디어, 미네르바의 촛불, 촛불의 미네르바.

 

[267]촛불의 깊은 저층에서는 이 다양성들 사이의 끊임없는 대류, 전염, 공명이 발견된다. ... 온갖 사람들의 분노, 사랑, 결의, 지혜, 용기, 헌신 등이 촛불을 지속시키고 있다. 이와 달리 촛불의 상층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정파적 이해관계와 패권의식이 행위자들의 판단과 행동을 제약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자신의 판단과 취향과 욕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촛불이 단일한 투쟁형태, 투쟁방향, 투쟁조직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만큼 촛불에 위험한 것은 없다.

 

[269]조직화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집화와 시위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 수단이다. 조직화를 창조로 이해했을 때 집회와 시위는 참여자들의 적극적 자기표현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고 새로운 삶의 형상이 출현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조직화되는 것은, 아니 정확하게 말해 스스로 조직화하는 것은 약동하는 생명력이지 개물화된 인격체들이 아니다. [270]조직화를 질서로서 생각할 때에만 이미 현존하는 개물화된 인격체들을 명령-복종관계 아래에, 혹은 동원체계에 묶어내는 것을 조직화로 이해하게 된다. ... 그러나 조직화는 그 이상일 뿐 아니라 반드시 그 이상일 때에만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조직화는 생명의 새로운 진화를 가능케 하는 기술이자 예술이다. 생명이 막혀 있는 지점을 뚫고 이루어질 때 그 시간에 그곳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생명이 특이화된다. 생명의 특이화가 나타나지 않는 조직화, 기존의 것들이 단순히 반복되고 있을 뿐인 조직화, 이것은 그 규모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아무 것도 창조할 수 없고 단지 형태만을 바꿀 뿐이다.

 

[274]지금 조직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현 시기에 필요한 네트워크 형태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으로는 설득력이 있고 또 필요하며 실제로 지금도 촛불을 들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요구에 부응하는 하지만 이것이 비조직화에서 조직화로의 이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조직화에 대한 협소한, 그래서 결국은 유효하지 못한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며 향후에 이러한 이미지가 고정될 때 촛불 운동 전체를 질곡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지 때문에 촛불봉기가 밟아온 조직화의 진화과정을 좀 더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단적으로 말해 지금 조직화에 대한 긴급한 요구는2008년 5월~6월간에 이루어졌던 리좀적 조직화가 탄압으로 파괴되거나, 역량의 고갈로 취약해지거나, 다른 부분과의 네트워크에 실패하여 이탈하거나, 봉기의 진화가 직면한 장애에 대한 해결전망을 찾지 못하고 잠복함으로써 이완되고 기능마비된 상황에서 이를 대체할 다른 조직화의 모색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미조직화에서 조직화로의 발전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조직화의 움직임이 이 점을 유념하지 않는다면 다중의 봉기가 다시 치솟을 때, 지금 구상되는 조직적 형태를 조직화의 유일한 형태로 보고 이것을 그 거대한 운동에 부과하려는 시대착오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276]촛불들을 결합시키고자 하는 노력들이 오히려 촛불들을 분열시키고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될까? 조직화(organization)가 질서화(ordering)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질서화란 명령-전달-실행의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 이 체계에 결합된 개개인들은 기계부품으로 전화된다. 이것은 오늘날 공장, 당, 국가, 군대 등이 취하고 있는 형태이다. 근대적 조직화는 질서화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촛불은 처음부터 질서화에 대한 항의였고 그것에 대한 거부를 독특한 특징으로 내보였다. ... 독립된 중앙지도부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이유는 여기에 있다. 촛불들은 지도부를 요청하는 듯하면서도 실제로 지도부를 거부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여왔다. 그러나 이것은 이중성으로서보다는 지도력의 독특한 형태, 독특한 존[277]재방식에 대한 요구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궁극적 전쟁지도는 특이한 개개인들의 네트워크, 집단지성과 집단의지, 요컨대 다중지력에 의해 이루어지되 개별의 전투지도는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지도란 다중의 위가 아니라 옆에, 아니 실제로는 안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 다중은 자임하는 지도부들을 봉기에 이용하면서 그들의 권력화를 차례차례 붕괴시켜 왔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277]조직되어야 하는 것은 특이한 힘들이지 인격체가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회적 생산력들, 사회적 투쟁력들이 조직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력들’=‘힘들’은 산재하며 이동적이고 가변적이다. 그 어느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관계망 속에서 때로는 격류처럼 때로는 호수처럼 움직인다. 법률적 인격체들이 질서정연하게 조직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 사회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힘들이 공명, 전염, 촉발, 가책, 호기심, 놀이, 결의 등 각각이 다른 이유들, 조건들, 맥락들, 목적들에서 합류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결코 어떠한 조직화도 없이 자연과정을 방치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각각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하고 자신의 내적 계획을 수립하며 그 욕동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직접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 욕망과 전망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신적 신체적인 더 많은 직접행동들(직접행동을 가투로 환원지 말 것, 몸으로 하는 행동만으로 환원하지 말거)이 필요하며 이것들이 서로 공명하고 전염되고 서로 감싸고 융합되면서 새로운 차원을 열어나가는 것이 창조로서의 조직화, 자기조직화의 과정일 것이다. ... [278]조직화 이후에 오는 행동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행동 속에서 이루어지는 조직화!

 

[279]이날 시위는 지도력의 자생적 형성과정을 보여주었다. 하나의 독립된 부분이 전체를 이끌기보다 서로가 보완하면서 대오를 살려내려는 집단의지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전대협이 대오를 이끌 때는 구호 선창권이 리딩에게 독점되었다. 이날 구호선창은 여러 사람에 의해 다양한 시점, 다양한 지점에서 이루어졌고 길잡이가 이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강력하고 자신감 있는 지도는 시위대의 사기를 높이는 반면 시위대 개개인의 표현욕구를 억제하는 측면도 있었음이 반증되었다. 지도력은 지속적으로 분산되어야 하고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지도력을 갖도록 연습되어야 하며 그럴 때에만 저항과 창조의 영속성이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 맹아적으로 인지된 날이다. 강력한 그러나 독립적인 지도부는 시위대를 대중으로 만들며 내부로부터의 지도력의 형성과정을 억제하는 효과를 갖는다.

 

[282]그러므로 촛불은 군사적 대응을 방어의 무기로 잘 활용하되 그것에 함몰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장기적으로는 군사적 대응을 극복하고 새로운 차원을 열어젖히면서 그 새로운 차원에 군사적 대응력을 종속시켜야 한다. ... [283]자본은 다중의 이 네트워크에 의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을 공격할 수 있는 실제적 무기는 군사적인 것에 있지 않고 이 생산의 지점에 있다. ... 삶정치적 총파업은 두 가지 의미에서 전통적인 노동자 총파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첫째 1980년대의 전투적인 노동자 파업과는 달리 1990년대 이후 노동자 파업은 중앙에 의해 조절되면서 제도적 성과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둘째, 삶정치적 총파업은 공장에서의 파업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고 삶의 모든 영역들, 가정, 교회, 언론, 학교, 군대, 회사, 백화점, 마켓 등에서 파업이 조직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삶정치적 총파업은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되는 삶의 모든 영역에 파국을 도입하는 경로이다.

 

[291]우리는 살수차 대 유모차의 대립이라는 사태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살수차의 도덕에 유모차의 윤리가 대립했으며 살수차의 법에 유모차의 삶이 대립했었다고.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것은 도덕과 법이 아니라 윤리와 삶이라고. 도덕은 시민사회 속으로 이입된 법이라고. 윤리는 삶의 자기표현이라고.

 

[295]여기서 국가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는 주체성의 측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권력이 이러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은 현재의 촛불이 권력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위임된 권력, 대의 권력이 항상 다중의 언론과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침해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이것은 국가가 다중을 감시하고 처벌할 것이 아니라 다중이 권력의 소음, 권력의 얼굴, 권력의 돈을 감시하고 행동으로 제약하며 권력을 처벌할 삶정치적 방안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이를 위해서 촛불 자신이 권력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서는 것, 권력을 직접 행사하는 것, 스스로를 제헌권력pouvoir constituant으로 정립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있을까?

 

[297]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좋은가라고 묻는 습관은 누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좋은가라는 노예적 문제틀에 속한다. 어느 누구도 우리 자신의 지배자가 되지 않게 하는 것, 모든 사람들 하나하나가 권력자로서 자신의 존엄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그것이 가능한가를 숙고하는 것이 촛불에게 주어진 정치적 과제이다.

 

[298]맑스는 루이 보나빠르트의 집권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철저성의 사례로 파악했다. 두더지는 가장 파괴하기 쉬운 적이 등장할 때까지 부르주아 사회로 하여금 생산력을 가동하도록 자극하는 방식으로 혁명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부르주아 사회의 가능성을 남김없이 실현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사회가 도래할 수 있는 물적 전재들과 비물질적 전제들이 형성될 때까지 사회의 순환을 밀어붙인다. 이것이 혁명의 철저성이다. 철저성은 혁명의 영원성이 발현되는 방식이다. 촛불은 영원하고도 철저한 혁명의 지속성이 출현하는 현 국면이다.

 

[312]대통령은 어떤 의미에서도 (도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윤리적 의미에서의 선일 수 없다. 윤리적 선은 자기역능의 확장이다. 그 확장은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은 윤리적 의미에서의 악이다. 그것은 나의 역능의 확장이 아니라 축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촛불은 좋은 대통령을 뽐는 데 열중할 것이 아니라 어떠한 외부적 명령도 거부하면서 오직 자신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주권자로서의 개개인들이 무제한적으로 자유로운 연합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의 추구과정에서 때로 덜 나쁜 대통령을 필요로 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315]촛불이 제기한 문제는 결코 의회에서는 풀릴 수 없는 문제이다. 다중들의 직접행동, 그 직접행동의 전지구적 전염, 촛불코뮌의 구축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문제는 풀릴 수 없다. 촛불봉기를 압력수단, 봉기수단으로만 이용하고 그것을 제헌적 권력기관으로 보지 않는 모든 정치적 경향들을 경계하고 그것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다중의 직접행동이 아닌 다른 수단은 문제를 덮고 지연시키고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문제는 이명박이 아니라 촛불이다’라고 책임전가하며 촛불을 폭력으로 짓밟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333]비폭력의 이상에 우리가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방어폭력을 통해서이다. 권력의 거대한 폭력에 맞서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지키는 방어행위를 통해서 비폭력의 이상에 한걸음이라도 접근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방어폭력은 대항폭력인가? 정당한 저항적 대의가 있다면 선제적으로 폭력을 행사해도 좋다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폭력을 선제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어떠한 저항적 대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의 축소는 인류가 추구해온 시민적 이상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비폭력적 삶, 비폭력적 관게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선제폭력은 폭력상황을 가속시킬 것이고 결국 시민들의 패배를 가져올 것이다. 방어폭력은 폭력을 해체하고 무력화하기 위한 폭력이며 폭[334]력의 최소화, 폭력의 해체를 지향하는 운동이다. 방어폭력은 정당방위로서 현존하는 법에 의해서도 보장되어 있다. ... 방어폭력의 일차적 형태는 도주이다. 납치하려는 사람들과 맞서 싸우기보다 그들의 물리력의 행사범위를 신속하게 벗어나는 것이 자신을 방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설마 나를 때리겠는가 하는 생각은 권력과 경찰에 대한 터무니없는 믿음, 환상적 신뢰에 기초한다. 도주에도 불구하고 폭력범과 납치범들이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위협할 때는 자신을 방어할 가능한 최선의 방책을 찾아야 한다.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방어폭력이 비폭력의 이념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실제적 의미의 비폭력은 싸움의 전술이 될 수 없다. 비폭력은 폭력의 해체를 지향하는 이념이다. 그것은 절대적 폭력상태인 자연상태로부터 시민사회를 건축하는 혁명적 협력의 이념이어야 한다. 혁명적 협력으로서의 비폭력은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방어하는 방어폭력을 통해 현재의 사회적 협력을 방어하며 그것을 독점폭력의 강제로부터 분리시켜 내기 위한 것이며 강제적 협력이 아닌 자발적 협력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시민들의 실제적 전술이어서는 안 되고 이념이어야 한다.

 

[337]2008년 8월 16일 비폭력의 얼골로 살아왔던 시민들이 자연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연상태에서의 시민들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니며 자연인일 뿐이다. 자연인으로서의 개인들은 절대적 폭력의 체현자들이다. 법은 이들에게 장애물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국가의 무력은 자연인들의 적이다. 자연인들은 무력에 의한 폭력의 재현 혹은 대표를 거부하면서 자신에게 적대적인 무력을 해체시키려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시민상태의 구성으로, 사회적 협력존재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무력에 대항하는 자연인들의 폭력은 새로운 권력을 구성하는 힘, 제헌권력이다.

 

[341]“법은 불법에 양보할 필요가 없다.” 불법이라도 양보해야 한다는 종교적 무저항주의가 봉기 속에 널리 확산되어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형법이 우리에게 각성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촛불봉기에서 국민들은 지금 자신들이 법이고 정권이 불법이라는 인식을 널리 공유하고 있다. 정권은 [342]그 반대로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자신들이 법이고 봉기에 참가한 국민들을 폭도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합법성을 둘러싼 두 개의 인식이 대립하고 있는 순간이 지금이다. 이 대립은 인식론적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인식을 진리로 만드는 것은 실천을 통해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 촛불봉기에서 승리한다면 다중이 행사한 방어적 폭력은 법에 의해 정당화될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행하고 있는 지금의 연행들, 경찰폭력들 등은 법에 따라 처벌될 것이다. 만약 패배한다면 민중의 행위는 물리적 폭력행사는 물론이고 도로점거 등 일체의 시위동작이 폭도의 행위로 몰려 처벌될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폭력은 정당화될 것이다. 우리는 폭도인가 법인가? 광주민중항쟁에 참가했던 시민들에게 던져졌던 이 질문이 다시 촛불봉기에 나선 시민들에게 던져지고 있다. 여기에는 무엇이 진리인가를 둘러싼 거대한 인식론적 내기가 걸려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실천적 내기가 동시에 걸려 있다.

 

[357]그러므로 촛불은 5년의 수명을 갖는 문제가 아니다. 촛불은 전 지구적 평화를 갈망하는 삶정치적 성찰의 무기이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든 혁명적 불빛이다. 거대함을 욕망하지 않으면서 작은 그러나 무수한 것들의 의지를 모아 그려내는 근원적 혁명에 대한 갈망이다. 촛불은 몇 개월의 수명을 갖는 것도 아니며 몇 년의 수명을 갖는 것도 아니다. 촛불은 영원하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꺼질 수는 있지만 완전히 꺼질 수는 없다. 일시적 꺼짐은 촛불의 잠재화일 뿐이지 소멸이 아니다. 비가시화일 뿐이지 비실재화가 아니다. 생명이 영원한 만큼 촛불도 영원하다.

 

[364]13. ... 현대자본주의는 점점 더 많은 인구를 임금, 소득에서만이 아니라 신용에서도 배제한다. 그리고 그럴수록 가치의 부로서의 실현은 더욱 어려워진다. / 14. 사회적 협력은 다중 서로의 신뢰에 의지할 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실제적 사랑에 의지한다. 배제와 차별과 위계는 이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밑바닥에서부터 파괴한다. 신용사회, 금융자본지배의 사회, 금융자본주의, 신자유주의는 다중의 협력에 의지하면서 이 협력을 끊임없이 깨뜨리는 살아 있는 모순이다.

 

[366]21. 신용의 실추, 신용의 경색, 자산의 파괴, 화폐보유의 증대, 이것들은 다중의 생산적 공동체를 파괴한다. 믿음의 부재, 사랑의 실종은 그 자체가 전쟁상태이다. 대규모의 전쟁들이 이를 조건으로 유발된다. 신용자본주의에서 전쟁자본주의로의 이행. 전쟁자본주의는 신용자본주의의 이면으로 도사리고 있었다. / 22. 자본주의가 신용과 전쟁 사이를 오가는 체제임을 직시할 때에 다중이 먼저 수행해야할 일은 자본주의의 비밀을 구석구석 밝히는 일이다. 촛불은 이 일을 시작했다. 신용, 신뢰, 사랑, 협력을 사유화, 시장, 권력, 국가의 수중에서 해방시키고 그것을 자율적인 기관으로 전환시키는 일을. / [367] 23. 삶의 공동체가 가치공동체로 역전되는 메커니즘을 절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삶의 공동체가 가치공동체, 화폐공동체로 나타나지 않도록 고용/비고용, 노동/비노동, 임금/비임금, 정규/비정규의 분할기계들을 해체하여 공통화기계가 작동되게 하는 것, 중앙지성 대신 다중지성, 민족주의 대신 인류인주의, 국가 대신 다중의 코뮌. 24. 촛불은 삶이며 삶은 촛불이다. 자본의 전체주의를 깰 때 삶, 생명, 산-노동의 시간이 열린다. 자본의 신용이 깨지는 시간이 바로 삶의 신용이 열리는 시간이다. 자본의 신용이 깨지는 시간이 바로 삶의 신용이 열리는 시간이다. 이 틈새에서, 위기와 공황의 구멍 속에서 해방의 시간이 열린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삶,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살(flesh)이 열리는 시간. 촛불의 시간, 촛불의 전명화, 촛불의 세계화, 모든 사람들의 촛불되기, 그래서 절대적일 뿐인 민주주의.

 

[370]6. 신자유주의에서 화폐는 다른 모든 종교의 상위에 있는 종교로 된다. 자본가들만이 아니라 노동자들, 빈민들도 자본의 신도로 된다. 착취, 강탈, 협박, 사기 그리고 이것들을 통한 권력관계 생산은 화폐종교의 근본주의적 교리이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인격의 근본토대이다. / 7. 자본은 자본가들의 종교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만과 소외에 빠진 피착취자들의 종교이기도 하다. 자본은 자본의 심부름꾼이나 원천동력들, 즉 자본의 노예들 모두에 대한 구원자이다. 자본은 노예의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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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그러나

  • 등록일
    2009/03/23 22:59
  • 수정일
    2009/03/23 22:59

[지옥의 묵시록]을 안 봤으면, 이 책이 이만큼의 리얼리티라도 주었을라나 모르겠다. 하여간 고전이다. 게다가 난 기껏 번역서를 훓었을 뿐이니 ... 함구.

 

 

 

 

 


 


조셉 콘래드 지음, 이상옥 옮김, 『암흑의 핵심』, 민음사, 2008.

 

[7]쌍돛대 유람선 <넬리>호의 돛은 펄럭이지 않았고 배는 닻을 내린 채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멎었다.

 

[16]이 불미로운 행위를 대속(代贖)해 주는 것은 이념밖에 없어요. 그 행위 이면에 숨은 이념이지. 감상적인 구실이 아니라 이념이라야 해. 그리고 이 이념에 대한 사심 없는 믿음이 있어야지. 이 이념이야말로 우리가 설정해 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하며 제물을 바칠 수 있는 무엇이거든 ... [말로]

 

[61]거짓말 속에는 죽음의 색깔이 감돌고 도 인간 필멸의 냄새도 풍기는 게 아닌가. 바로 거짓말의 이런 속성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서 증오하고 혐오하는 바이며 내가 잊어버리고 싶은 바이기도 하다네.

 

[105]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고 팔다리를 움직이거나 근육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죽어버렸지. 오직 마지막 순간에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은 어떤 신호에 응답하듯이 그리고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은 어떤 속삭임에 응답하듯이 몹시 상을 찌뿌리기만 했어. 그 찌뿌림은 죽음에 임하고 있는 그의 검은 얼굴에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둡고 위압적이며 위협적인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지. 그 캐묻는 듯하던 눈초리 속의 빛은 순식간에 멍한 유리빛으로 퇴색하고 말았어.

 

[109]그네들, 여인들 말이네, 그들은 내 이야기와 관련이 없고 또 마땅히 관련이 없어야 하네. 우리는 여인들이 작기네 자신의 아름다운 세계 속에서 머물러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그래야만 우리의 세계가 좀더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129]숲은 하나의 가면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었고, 닫혀 있는 감옥의 문처럼 무겁기만 했으며, 무언가 알고 있으면서도 숨기고 있거나 무언가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거나 또 [130]어떤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 침묵의 외양을 갖추고 있었어.

 

[146]그건 어떤 뚜렷한 육체적 위험과도 관련 없는 순수히 추상적인 공포였어. 그 공포의 감정을 그토록 압도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글쎄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받은 도덕적 충격 때문이었어. 마치 전적으로 괴물 같은 무엇이 생각을 괴롭히고 영혼을 짓누르며 별안간 내게 들이닥치고 있는 듯했어.

 

[176]내가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앞바다는 강둑 같은 시커먼 구름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끝나는 곳까지 나 있는 그 고요한 물길은 찌뿌린 하늘 아래서 음침하게 흐르면서 어떤 엄청난 암흑의 핵심 속으로 통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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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철학] 2008년 여름호

  • 등록일
    2008/10/05 12:14
  • 수정일
    2008/10/05 12:14

 

[시대와 철학](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 실리는 논문들은 대개가 (이런 표현이 맞을 건데) 맛있다. 이번 호(통권 19-2호)에도 논문들이 튼실한 맛을 풍긴다.

 

특히 첫번째 논문인 김재희 선생의 글은 '표현적 유물론'이라는 매력적인 개념을 통해 베르그송의 시간론과 물질론을 해부하고 있다. 앞으로 이 개념을 도구 삼아 들뢰즈와 일련의 철학자들을 살펴볼 예정이라니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두번째로 눈에 띄는 건 김동기, 김갑수 선생이 쓴 논문이다. 일본과 중국에서의 서양철학의 수용을 문헌적 엄밀함을 가지고 분석했다.

 

이외에 이재유 선생의 '여성되기와 계급투쟁'도 사유의 확장에 일조한다.

 

다 정리해 놓고 보니, 발췌해 놓은 여기 저기서 [시대와 철학] 특유의 젊고 반골적인 냄새가 그득하다. 아카데미즘에 완전히 속하지 않으면서, 시대와 더불어 철학하기를 그치지 않는 젊은 학자들이 많다는 건 분명 희망일 것이다. 

 


 


김재희, [베르그손에서 잠재성과 물질의 관계]

 

베르그손의 물질 개념은 3차원에서 논의된다. (1) 인간 지성의 도식에 따라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인간적 경험 세계를 이루는 물체들의 집합 (2) 생명과 대립하는, 반복과 해체 경향을 지닌, 불가분한 흐름으로서의 물질 (3) 살아 있는 자연의 현실적 표면에 해당하는, 생명과 연속적인 물질.

첫 번째가 상식적 믿음의 차원이라면, 두 번째는 과학적 지식의 차원이고 세 번째는 형이상학적 직관의 차원이다. 베르그손은 과학적 물질 개념이 상식을 넘어서 실재의 본질에 도달하는 측면을 인정하지만 여전히 형이상학ㅈ거 통찰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고 본다. 전체는 부분들의 집합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이 물체들의 집합으로 환원되지 않듯이, 살아 있는 자연은 물질의 차원으로 환원되(33)지 않는다. ... ‘비가역적인 방향을 가진 불가분한 흐름’ ...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물질은 ‘거의’ 지속하지 않는다. 지속하는 것은 의식, 생명체, 우주(자연)이다. 물질은 우주의 현실적 표면으로서 우주의 잠재적 이면인 생명과 연속적이기 때문에, 지속하는 우주 안에 있기 때문에, 완전한 비-지속으로서의 공간과 일치할 수 없을 뿐이다. 지속한다는 것은 과거를 붙들어 현재 속으로 연장하는 기억의 수축력이 있다는 것인데, 물질은 이러한 수축력이 없다. 그래서 물질은 흩어짐이고 등질화하는 공간의 방향으로 퍼져가는 흐름인 것이다.

베르그손의 물질 개념은 (1) 가역적인 운동과 기하학적 공간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비가역적인 시간성’을 물질에 부여하고 (2) 생명과 연속적이면서도 본성상 다른 물질의 고유한 경향성을 해명하면서 (3) 기계론적 환원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살아있는 자연의 창조적인 생성을 설명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베르그손의 물질 개념이 갖는 한계 역시 분명하다. 베르그손은 물질을 ‘흐름’으로 정의하면서, 생성에 관한 물질의 자기 조직화 역량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했다. ... (34)(1) 베르그손은 행위의 필연성에 몰두하고 있는 지성은 “물질의 생성”에 대해 주목하지 못하고 물질이 부동적인 외관만을 취하는 데 그친다고 지적한다. ... 이때 ‘생성’이란 물질이 원자적인 실체가 아니라 유동적인 흐름이고 불가분한 연속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적극적으로 어떤 형태를 (35)창조햔다는 것이 아니다. 물질은 자발적으로 형태를 창조하기 보다는 오히려 생명의 수축력에 의해 어떤 형태로 창조될 뿐이다. ... 따라서 베르그손은 생명체의 창조만을 개체생성의 예로 간주한다. ... 그렇다면 물질의 ‘결정화(cristallisation)’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물질의 원리가 ‘이완’에 있다면, 생명체가 아닌 결정체를 조직하는(또는 수축하는) 역량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 (36)생성된 형태를 생명체에만 국한시킨다면, 생명체라고 할 수 없는 이 ‘세계들’과 ‘성운들’의 생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물질이 흐름이기 때문에 형태 창조의 역량을 생명의 수축으로부터 가져와야 한다면, 이 체계들의 생성 또한 생명의 힘으로 봐야 하는가? 그렇다면 물활론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물질을 가로지르면서 생명체들을 절단해내는 생명”의 역량과 구분되는, “:세계를 형성하는 물질”의 역량은 무엇인가?

미시적인 차원에서 결정체의 형성, 거시적인 차원에서 성운의 응축과 계의 형성은, 분명 생명체의 차원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형태 창조이다. 그러나 베르그손은 우주 안에서의 생성을 생명체의 차원에서만 검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생성 원리를 존재론적 차원 전체로 보편화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 베르그손의 물질 개념은 우주 전체의 차원에서 생명과의 관계 속에서만 생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베르그손은 기계적인 자연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연을 주장한다. 물질은 이 자(37)연의 표면적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자연의 살아있음은 ‘물질의 이면에 생명의 잠재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계론적 환원주의에 반대하는 복잡계 이론(complex systems theory)이나 창발주의(emergentism)는 유기적이든 무기적이든 모든 물질은 하나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물질에 내재하는 자기 조직화 역량’으로부터 생명체의 창발적인 생성까지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복잡계 이론은 전체와 부분 사이의 관계를 비환원적으로 이해하며, 복잡한 체계들의 창발적인 자기 조직화 역량을 인정한다. 체계(system)란 부분들 사이의 관계에서 창발적인 특성이 발생하는 통합된 전체를 의미한다. 생명체 역시 다층구조를 지닌 하나의 체계이다. ... 각 단계에서 전체는 그 부분들로 환원되지 않는 창발적 속성과 복잡성(complexity)의 증가를 얻는다. 이 복잡계 이론은 물리적 우주에서 발견되지 않는 어떤 힘이나 원리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생명체의 비환원적인 독특성을 밝힐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베르그손이 우주에서 물질의 엔트로피 흐름에 저항하는 역-엔트로피 흐름을 생명의 수축력에서 찾았다면, 프리고진은 물질의 엔트로피 자체가 질서와 조직화로 변환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요컨대 베르그손은 수축력을 물질의 과정과는 반대로 작동하는 “비물질적인 것(immatériel)”으로 보기 때문에, 비유기적인 물질 자체의 조직화 역량으로 해석하는 데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다. 프리고진의 물질계를 베르그손의 지속하는 우주 자체와 비교해 본다면 어떨까? 양자 모두 예측불가능한 열린 계로서 자기 조직화 역량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미시계의 결정체와 거시계의 성운 모두가 우주의 자기 조직화 역량에 따른 수축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 사실 개체 생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베르그손은 존재론적 개체화에서는 유기체의 수준에 대해서만 논의했을 뿐이고, 무기체는 인식론적 개체화의 차원에서만 논의하고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검토하지 않았다. 거시계의 태양계에서부터 일상세계의 사물들과 미시계의 미립자들에 (40)이르기까지 닫힌 체계로서의 물체들은 공간화하는 물질에 대한 인간지성의 인식작용에서 비롯된 것이지 자연발생적인 존재론적 생성물로 고찰되진 않았다. ... 다시 말해서 자기 조직화 역량에 해당한다고 해석할 수 있는 수축력은 어디까지나 물질이 아니라 우주적 생명의 것이다. 베르그손에게 지속은 기억이고 생명이지 물질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 과학이야말로 베르그손 보다 한발 더 나아가 물질 자체의 지속을 얘기하며 미시적인 차원으로 존재론적 층위를 다양화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상과 같은 점을 고려해 본다면, 베르그손의 물질 개념으로 창(41)발적인 생성을 오늘날 시도되고 있는 표현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베르그손의 물질은 거대한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생성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생명의 잠재성이 현실화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더 근본적으로는 물질 자체의 자기 조직화 역량에 관한 고려가 결여되어 있기 땜문이다. 그러나 베르그손의 지속하는 우주, 즉 살아 있는 자연의 형이상학은 현대 과학의 물질론을 흡수하여 정교화 한다면, 정신주의나 생기론 보다는 표현적 유물론에 훨씬 더 가까울 수 있을 것이다.

 

이재유, [여성되기와 계급투쟁]

 

계급투쟁은 소수자 되기로서의 여성되기와 궤를 같이 한다. 계급투쟁이 소수자 되기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지 않는 한 노동자 계급은 자본의 동일성, 보편성이라는 철가면을 벗지 못하고 음침한 고(65)통의 감옥 속에 평생 갇혀 지내야만 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 계급은 끊임없이 자신을 소수자, 여성으로서 새롭게 생산해 내야만 자본주의를 지양할 수 있는 역사적 운동 계급 주체가 될 수 있다. ... 왜냐하면 이 여성 되기는 노동해방의 물질적 토대인 노동자 계급의 자기 생산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 (66)그렇기 때문에 이 여성 되기는 진지 없이 치고 빠지는 단순한 게릴라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정규군대를 중심으로 하는 단순한 진지전도 아니다. 싸움의 헤게모니 장악을 통한 계급투쟁 진지를 구(67)축, 확보함으로써 진지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끊임없이 옮길 수 있는, 다시 말하자면 개별(상대적 가치형태의 자리)과 보편(등가형태의 자리)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기동전을 펼치는 게릴라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여성 되기라는 게릴라전이말로 노동해방의 핵심 열쇠이다.

 

김범춘,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비판적 접근]

 

오늘날의 이러한 냉소주의는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증명하는 것인가? 냉소적인 이성은 이데올로기와 실재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이 사회현실을 그 자체에 맞게 구조화하는 것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냉소주의는 우리 시대가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라고 보증할 수 없고, 따라서 오히려 냉소주의 자체가 이데올로기라고 말할 수 있다. ... 결국 냉소주의가 냉소주의일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데올로기의 지평 내에 있다는 것이다. 마치 냉소적인 부르주아적 주체가 화폐의 마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화폐는 단지 사회적 관계를 표현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생활에서 화폐가 마술이라고 믿는 것처럼 행동하듯이, 이런 냉소주의가 바로 이데올로기라는 게 지젝의 주장이다(82).

 

따라서 개인들이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망상들이 배치되는가가 이데올로기 문제의 핵심으로 등장한다(85).

 

떠도는 기표들을 어떤 주인기표로써 꿰매고 누비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가 창출된다. 우리가 현실적인 자유를 부르주아적인 형식적 자유와 대립되는 것처럼 보거나 국가를 계급지배의 도구로 보기 위해서는 이러한 누빔 작용이 성공적이어야 하고, 누빔은 누빔 작용으로 의미를 고정시킨 자신의 흔적을 깨끗이 지울수록 성공적인 것으로 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속성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비판에서 문제의 핵심은 어떤 누빔점이 부유하는 요소들을 총체화시키는가 하는 것이다(87).

 

지젝이 보기에 이데올로기적 열정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탈정치화된 객관적인 경제논리를 강조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형식이다. 탈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것은 ‘탈정치화된 경제’라는 환상으로 자신의 공백을 감추는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지젝은 이런 상황에서야말로 정치적인 행위를 통해서 환상을 횡단하여 경제의 재정치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98).

 

이데올로기는 역사 자체가 완성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절멸시킬 수 없는 그런 것이다. 발리바르는 이데올로기 이론 또는 이데올로기 개념은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적 과정의 총체화시킬 수 없는 복잡성이라고 정의한다. 또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표상체계가 다른 표상체계를 억압적인 방법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결과로서 다른 표상체계에 대한 지배력을 갖게 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 점이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이 강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의 이데올로기론이 노리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고정점에서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벗겨낼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대체하는 새로운 누빔점을 무엇으로 삼을지는 전적으로 이데올로기 투쟁이라는 정치적 실천의 문제이자 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101).

 

심혜련, [이미지로 사유하기 또는 이미지에 대해 사유하기]

 

이미지로 사유하기와 더불어 이미지에 대해 사유하기가 바로 이미지 리터러시의 출발점이다. 이를 통해 이미지 리터러시를 벗어나 종국에는 이미지에 대한 온전한 지각하기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로 사유하기에서 채택하고 있는 ‘읽기’의 방식은 아직도 문자시대와 이미지 시대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가능한 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읽기 방식에서 벗어나, 이미지를 언어적, 또는 텍스트적 방식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이미지 고유의 논리를 가진 것으로 봐야 하며, 또 이미지의 논리 또는 이미지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들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이미지에 대해 사유하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미지 본질에 대한 규정, 그리고 이미지(136)를 수용하는 방식으로서의 지각하기와 이미지를 가능하게 하는 매체레 대한 연구는 이미지 이론을 성립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기본적인 출발점이다. 이러한 출발점을 기본으로 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미지 리터러시가 성립되어야 할 것이다.

 

문성원, [반복의 시간과 용서의 시간]

 

들뢰즈의 ‘수동적 종합’에서는 종합과 결부된 능동성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이런 들뢰즈에서 늙음은 아마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서는 주체의 겪음보다는 전개체적인 생성과 그 생성의 역량을 이어받은 잠재성이 가득한 주체(애버레-주체)의 ‘되기’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 레비나스의 시간성은 주체성과 뗄 수 없는 것이지만, 그의 주체란 워낙 타자를 받아들임과 더불어 성립하는 수동적 주체이고 게다가 타자는 무한하므로, 그 시간성은 이미 주체가 재현할 수 없는 통시의 깊이를, 고갈될 수 없는 시간을 받아들인다는 역설적인 사태가 생겨난다. ... (163)이렇듯 주체와 타자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 유한함의 극복이란 ... 역시 주체 자체에서 오지 않고 타자로부터 온다. 이것은 물론 인과적 질서에 따르는 사태의 새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과적인 시간에서라면 우리가 비가역성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은 없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새로움은 존재 너머에서 오는 것이며, 타자의 용서로부터 오는 것이다. ... (164)이렇게 생각하면 레비나스가 용서를 다산성(fécondité)과 연결 짓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식은 나의 범위를 넘어선 타인이지만, 그래서 역시 타자로서 다가오지만, 그 비롯함이 나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래서 나의 연장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나는 나의 자식이라는 타자를 통해 새로워지는 셈이다.

 

이병수, [문화적 민족주의의 맥락에서 본 안호상과 박종홍의 철학]

 

(189)이들의 문화적 민족주의는 국가가 민족의 집단적 생존과 번영이라는 정치적 목표와 그 실현을 주도하는 민족이익의 보편적 담지자, 나아가 진리의 담지자라고 생각한 점에 그 특징이 있다. ... 안호상은 민족의 얼을 단군사상으로, 박종홍은 천명사상 혹은 성실의 사상으로 해석했다. 이들에 따르면 민족의 얼은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오늘날까지 간단없이 지속되고 있으며, 불변하는 특성을 지닌다. 역사학자 홉스봄(E. Hobsbawm)은 만들어진 전통(invented tradition)의 특징을 과거와의 연속성을 인위적으로 내세운다는 점, 그리고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관습(custom)과는 달리 불변성을 주장하는 점에서 찾는다. 민족의 얼에 대한 이들의 해석은 바로 홉스봄이 지적한 ‘만들어진 전통’에 해당한다. 민족의 얼은 국가 권력에 의해 선택적으로 구성되고 정치적으로 이용된 것이다. 민족의 얼에 대한 이들의 해석이 오로지 국가 권력의 정치적 필요와 결합하는 방식으로, 특히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와 결부되어 이루어지고 있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전통문화를 강조하더라도 체제 유지에 적합한 요소만 인위적으로 선택되었고, ‘조국 근대화’나 ‘반공’과 연관되지 않으면 그 어떤 실질적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

 

김동기, 김갑수, [동아시아의 서양 철학사상 및 윤리관 수용 양상 비교 -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이 논문은 목차에 따른 정리위주로 하고 발췌는 따옴표를 써서 처리함.

 

1. 들어가는 말

- 한국의 서구 문명과의 최초 접촉: 1631년 정두원의 책 수입. [천학초함]([직방외기], [천주실의], [영언려작]이 수록됨)

 

2. 일본에서의 서양철학의 수용양상과 그 특징

- 명치정부 수립 - 정한론(征韓論) - 구화주의(歐化主義): 1894년 경~민족주의와 파시즘: 1945

- 제1기: 1894-1910: 국가주의와 제국주의가 발흥한 시기 - 제2기: 1911-1930: 민주주의 사상의 유행과 좌절의 시기 - 제3기: 1931-1945: 민족주의와 파시즘이 준동한 시기

 

1) 제1기(1894-1910): 근대국가와 정체성 수립기

진화론과 독일관념론의 도입 - 민중봉기와 사회변혁 사상 - 계몽사상가들: 봉건이데올로기 비판 - 철학: 실학과 실증론적 경향 - 윤리학: 독립자존설(후쿠자와), 쾌락설(츠다), 공리주의(니시) - 정치: 자유주의와 입헌주의, 천부인권론 - 자유주의의 번벌관료와의 타협 - 유물론과 사회주의 - 교육칙어와 천황절대주의: 유교주의에 바탕한 입헌주의, 군국주의 - 청일전쟁과 위기의식, 국가주의의 강화 - 자본주의의 발달과 계급갈등 - 1877년 동경대학 설립(법, 리, 문, 의): 관학 아카데미즘 - 1898년 ‘사회주의 연구회’ 창설 - 러일전쟁 - ‘평민사’(코토쿠와 사카이): 사회주의 보급 - 1890년대 수입 단계에서 본격 저술 단계로 - [사회주의의 연구] 창간(사카이 토시히코, 1905, 3): 최초의 사회주의 잡지

 

2) 제2기(1911-1930): 일본 민주주의 형성기

다이쇼 데모크라시(요시노 사쿠조오)과 전간기의 자유주의(대정 리버럴리즘) - 맑시즘([빈곤이야기], 카와카미 하지메) - 러일전쟁 이후의 산업화 - 지식관료의 타협과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변질: 천황중심의 법치주의적 민본주의 - 1910년 전후: 니체, 파울젠, 오이켄, 쇼펜하우어, 베르그송 소개, 제임스 등의 프라크머티즘 소개 - 신칸트주의 인식론과 아카데미즘 - 한일합방: 벌족(군벌, 관료, 원로)과 부르주아 정당의 대립 - 제1차 호헌운동(‘벌족타파’, ‘헌정옹호 정당주의 발휘’) - [사회주의 연구](카와카미 하지메, 1919) 창간: 본격 사회주의, 맑시즘 연구 - 크로포트킨 연구, 번역(오오스키 사카에) - [노동](야마카와, 사카이, 1927. 7) 창간: ‘노동파’ - [일본자본주의 발달사 강좌](1932, 5) 출간: ‘강좌파’ - 미키 키요시와 맑시즘의 철학화 - ‘유물론 연구회’와 토사카 준

 

3) 제3기(1931-1945): 파시즘과 전쟁의 시기

만주사변을 전후로 한 파시즘의 대두 - 맑시즘의 지하화 - 니시다 키타로와 경도학파: 칸트와 헤겔의 전통철학과의 접목, 맑시즘 수용 - 타나베 하지메의 절대 변증법 - 미키 기요시 ‘불안의 사상과 그 초극’ - 하타노 세이치의 종교철학 - 쿄토학파의 등장(니시다와 타나베의 제자들): 국가주의 변호와 대동아 전쟁의 변론

 

3. 중국에서 서양 윤리관의 수용과 근대성

- 제1기: 1898-1915: 무술변법과 신해혁명을 전후한 시기 - 제2기: 1916-1927: 정치적으로 북벌 전쟁, 문화적으로 신문화 운동 시기 - 제3기: 1928-1948: 국내 혁명전쟁 시기부터 신중국 성립 직전 시기

 

1) 제1기(1898-1915): 구망과 계몽기

아편전쟁과 청일전쟁 - 유신변법 주장 - 일본을 통한 서학 수입 - 여러 번역기관 특히 상무인서관(1897,상해) - 수많은 정기 간행물들 - 진화론, 민주 자유와 근대 인식론, 의지주의, 아나키즘과 맑시즘의 특히 성행 - 엄복, 양계초, 손문, 왕국유, 장태염 등의 활약 - 프랑스 유학생과 일본 유학생들에 의한 아나키즘 소개: 사회진화론의 제국주의화에 대한 반발 - 손문과 주집신에 의한 맑시즘 소개 - “(224)서양 윤리관의 중국적 수용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 시기의 특징은 첫째, 구망, 즉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동기와 계몽 즉 무지한 인민에 대한 교육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두 번째는 대부분 비록 서양에 뿌리를 둔 사상이지만 일본을 통해, 때로는 일본에 (225)의해 한 번 걸러진 사상을 들여왔다는 것이다.”

 

2) 제2기(1916-19270: 신문화운동기

신해혁명(1911): 공화제 실험과 혁명의 실패 - “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 - 이대조, 호적 논쟁(문제와 주 논쟁, 1919), 진독수, 장동손 논쟁(사회주의 논쟁, 1920), 진독수, 구성백 논쟁(무정부주의 논쟁, 1920-21), 장군매, 정문간 논쟁(과학과 민주 논쟁, 1923-4) - 진독수의 활약과 공자 비판([청년], 후에 [신청년]-편집위원으로 진독수, 전현동, 이대조, 심윤묵, 고일함, 호적 참여) - 1919년 듀이의 중국방문과 강연, 실용주의의 전파 - 1920년 럿셀 방중 - 러시아 10월혁명과 맑스주의 본격 수용 - 1919년 이대조, [나의 맑스주의관] 발표 - 모택동, [상강평론] 창간

 

3) 제3기(1928-1948): 맑스주의의 중국화 시기

사회성질 논쟁, 중국사회 역사 분기 논쟁, 현대화 논쟁, 유물변증법 논쟁, 본위문화논쟁 - 5.4 운동의 반성과 모택동 - 대표적 맑스주의 저작들: 애사기, [대중철학], 이달, [사회학 대강], 모택동, [모순론], [실천론] - 이대조와 민수주의(Narodnikism); 진독수와의 변별 - 모택동의 이대조 수용

 

“(225)중국의 경우 일본에 비해 여러 가지 사상을 자유롭게 실험하고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는 하였지만, 서양 철학 사상은 물(235)론 전통사상에 대해서도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아카데미 철학’의 형성이 일본에 비해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론이 동서양의 사상을 일본식으로 결합하고 재창조했다면, 중국 역시 독자적인 방식으로 전통사상과 서양 철학 사상에 대한 결합을 시도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맑스주의의 중국화이다.”

 

“(235)우리나라는 일본이나 중국과는 또 다른 사회적 상황과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 비해 중국 쪽에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는데, 194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국화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일본을 많이 닮아 있다.”

 

진은영, [탈민족시대의 국가, 민족, 정체성에 대한 고찰-민족국가(Nationalstaat)에 대한 니체의 견해를 중심으로]

 

(269)니체는 유대주의를 혐오했지만 반유대주의는 더욱 혐오했다. 그가 실제로 문제 삼았던 것은 유대/반유대라는 대립 속에서 작동하는 민족주의의 이분법이다. 그는 이 관념적 이분법이 독일의 현실 정치와 문화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폭로하며 비판했다. 그는 민족주의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가 오늘날 유럽요새의 주인인 ‘훌륭한 유럽인’을 목격한다면 이들의 탈민족주의 역시 공격할 것이다. 민족주의와 (270)탈민족주의 모두에서 여전히 또는 새롭게 작동하고 있는 것은 자본의 논리와 그로 인한 삶의 마비이다.

 

세부목차

김재희(대진대), 베르그손에서 잠재성과 물질의 관계

1. 서론 - 2. 본론: 1)물체들의 집합으로 환원되지 않는 전체로서의 물질 - 2)물질의 발생과 창조 - 3)엔트로피와 역-역트로피 - 4)생명체의 발생 - 5)살아있는 자연으로서의 우주 - 3. 결론

 

이재유, 여성되기와 계급투쟁

1. 오늘날 맑스주의에서 왜 ‘여성되기’가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인가 - 2. 유적존재로서의 계급주체아 소수자 되기로서의 ‘여성 되기’ - 3. 계급투쟁으로서의 여성 되기 또는 여성 되기로서의 계급투쟁 -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되기-노동해방의 기본핵심 전술

 

김범춘,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비판적 접근]

1. 맑스주의의 구멍 메우기 - 2. 이데올로기적 냉소주의 - 3. 누빔점으로서의 이데올로기 - 4. 삭제의 정치경제학 - 5.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르기

 

심혜련, [이미지로 사유하기 또는 이미지에 대해 사유하기]

1. 이미지에 대한 재평가 - 2. 이미지로 사유하기 : 1)변증법적 이미지와 이미지 문서 - 2)이미지의 텍스트화 - 3. 이미지에 대해 사유하기 : 1)이미지의 존재방식 - 2)이미지를 지각하기 - 3)이미지와 매체 - 4. 이미지의 힘

 

문성원, [반복의 시간과 용서의 시간]

I - II - III - IV

 

이병수, [문화적 민족주의의 맥락에서 본 안호상과 박종홍의 철학]

1. 안호상과 박종홍 철학의 문화 민족주의적 성격- 2. 안호상의 일민주의와 단군사상: 1)일민주의 - 2)고대사 연구와 단군사상 - 3. 박종홍의 동도서기적 민족주의와 천명사상 - 1)동도서기적 민족주의 - 2)천명사상 - 4. 비판적 고찰, ‘민족의 얼’과 ‘보편성’의 측면에서: 1) 민족의 얼에 대한 국가주의적 해석 - 2)보편성에 대한 편협한 이해 -

 

김동기, 김갑수, [동아시아의 서양 철학사상 및 윤리관 수용 양상 비교-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목차 발췌에]

진은영, [탈민족시대의 국가, 민족 정체성에 대한 고찰]

1. 들어가는 말 - 2. 국가에 대한 계보학적 이해 - 3. 민족국가와 근대적 개인의 탄생 - 4. ‘만들어진 것’으로서의 민족 - 5. 민족주의와 원한 감정 - 6. 탈민족주의와 ‘위대한 정치’ - 7. 탈민족주의의 한계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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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성과 연대-[자본주의의 종말] , 엘마 알트파터

  • 등록일
    2008/10/04 11:47
  • 수정일
    2008/10/04 11:47

 

마지막 장을 덮으면 읽기를 끝내기가상당히 아쉬운 책들이 있다. 문학류일 경우에는 저자의 쾌청한 문체의 여운이 자꾸만 오감을 간지럽히기 때문이고, 인문-사회 과학 서적의 경우는 문제의식과 대안이 함께 명쾌하기 때문에 그렇다.

 

알트파터의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상당히 잘 쓰여진 책이다. 문제의식은 '지속가능성과 연대'이고, 그 대안도 이 문제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대안이 문제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편협하다고 보아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그러한 한계를 맴도는 것은 심화된 문제의식과 그로부터 나오는 명쾌한 결론을 방증하는 경우가 더 많다.

 

특히 금융자본주의의 '불가능성'과 그 데카당티즘적 구조에 대한 분석은 더욱 더 훌륭하다. 하나의 학술 서적으로서 손색이 없는 '작품'임에는 틀림 없다. 부분부분 빛나는 구절들이 보이고 ... 그런데 뭘까? 이 맹숭맹숭함은 ... 마치 well-made한 가족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온 심심하고 감동적인(?) 기분은?

 

이를테면, 알트파터가 비판하는 홀러웨이나, 네그리, 심지어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은 그에게 '국가' 또는 '권력'의 '유용함'마저 폐기하는 무모한 시도처럼 보이는 지도 모른다. 목욕물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린다는 말을 알트파터가 이 경우들에 적용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모호한 말이 또한, 심심하게 만든다. 자신의 대안이 반자본주의는 맞지만 '혁명'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단다.

 

결국 이 책은 잘 쓰여진 책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뭐, 좀 심심하다. 고전적인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레닌식 질문이 이 책에 통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대안도 명쾌하다. 그래도 혁명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신뢰도 보인다. 그러나 '국가'와 '권력'에 대한 미련 같은 걸 버리진 않는다. 알트파터가 너무 온건한가? 그것도 아니다. 제멋에 사는 사이비 생태주의자인가? 그도 아니다. 하여간 난 아직 좀, 심심하고, 다들 읽어 보면 알게다.

 

애고, 뭔 서평이 이런지 ... 원. 잘 읽었지만, 큰 쇼크 없었다면, 항상 글이 이 모양이다.

 

*여기 누르면 [프레시안]에 쓴 redbrigade의 서평이 나온다.


 


『자본주의의 종말』, 엘마 알트파터 지음, 염정용 옮김, 동녘, 2007.

 

나는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이 한 간략한 발언의 논지를 논증적으로 따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본주의 붕괴 이론을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는 자본주의가 … ‘내인성(內因性)’ 쇠약에 의해 붕괴될 수는 없다고 확신한다. 외부로부터의 아주 격심한 충격만이 신빙성 있는 대안들과 결합해서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을 것이다 … .” 따라서 우리는 외부로부터 오는 충격 요소들과 사회 내부에서 무르익고 있는 신빙성 있는 대안들을 지적으로 그리고 또한 아주 현실적으로 찾아 나서야만 한다. 그리고 그 대안들을 실현시키는 데도 협력해야 한다. 이것이 서문에서 언급된 ‘집단적 연구’라는 프로젝트의 진정한 의미이며, 이 프로젝트는 실천적 경험과 이론적 성찰이 계속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14).

 

미래는 실제로 야만의 특성들을 대단히 많이 보여줄 것이며, 이 야만은 분명 자본주인 것이 될 것이다(25).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지역적인 생존의 틈바구니가 아니다. 연대의식은 사실 이웃과 소규모의 협동 조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적인 연관 관계, 즉 시공간적으로 미치는 범위를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사회 내부로부터의 대안적인 사회조직과 정치적 참여의 반대 운동들이 형성된다. 어쩌면 여기서 머리로 구상한 모델이 아니라 아래서부터 성장하는 새로운 세계주의가 생겨날지도 모른다(26).

 

신빙성 있는 대안들은 주어져 있는 셈이다. 현행 자본주의를 계속 이어 나가는 것은 파국으로 끝난다. ‘야만의 제국’은 아직 생겨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곧 생겨날 것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 체제에다 거기에 적합한 사회 형태와 연대적으로 조직된 경제가 갖춰지면, 이것이 현행 자본주의의 종말이 된다. 새로운 사회 형태는 만들어질 수 있다. 역사는 종말에 와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열려 있으며 계속 나아간다(27).

 

‘역사의 종말’은 자본주의 생산 방식이 영원하고 무한하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36).

 

대안을 만드는 일은 ‘혁명 전위대’ 뒤에서 대오를 맞추어 질서 정연하게 진행되지 않는 것이 확실하며, 또한 글로벌 공간에서 ‘다중’의 다양한 함성(이 말에서는 홀러웨이가 쓴 ‘절규’라는 비유가 생생하게 와 닿지 않는다)과 더불어 진행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홀러웨이의 말이 옳은 것도 사실이다. “자본주의에서는 … 실제로 또 다른 종류의 사회 체제를 위한 토대들이 놓이지만, 이 토대들은 우리가 생산하는 기계와 물건들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행위 혹은 자본주의적 형태와의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서서히 생겨나는 협력 속에 있다 …”(44)

 

경제가 사회에서 이탈되었다는 점, 사회 이론적인 토대도 확립하지 않은, 수량화되고 형식화되고 생명력 없는 경제가 사회를 이론적으로 성찰한다는 점이 실제의 자본주의 경제를 더 이상 하나의 사회적 체제로 파악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학은 그 개념적 빈곤함 때문에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확산시켰던 이론가들에게조차 그 유용성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된다. 따라서 사회구성체로서의 자본주의를 도외시하고 그 대신 순수한 시장 논리가 주도권을 차지하게 되면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가 생겨난다. 순수한 시장논리는 존재하지 않거나 기껏해야 공허한 모의 세계에서만 존재하지만, 학자들은 이것을 세상에서 가르치고 대중들에게 유포하는 것이다. 사회구성체로서의 자본주의는 실재하고 있고 아무런 대안 없이 글로벌 자본주의로서 존재하고 있지만, ‘현대’ 인간의 개념 세계에서 이미 폐기되어 버렸다(70).

 

[사적 전유의 네 가지 형태][1. 가치화]데이비드 하비는 가치화의 방법들을 마르크스의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라는 설명과 밀접하게 연관시켜 열거한다. 이 방법들은 다음과 같다. ①토지의 상품화와 사유화, 그리고 농민들을 강제로 추방하고 임금 노동자로 만들기, ②공동소유지, 공적 재산, 공유지를 개인 독점 재산으로 바꾸기, ③노동력을 상품으로 바꾸고 자연을 전유하는 데 대안이 되는 (자급 자족 경제의) 형태들을 억압하기, ④식민지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약탈, ⑤교역을 화폐 위주로 하고 세금을 부과하기, ⑥노예 매매 ⑦고리대금업. ... (76)자본화란 (대부분 공적이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재산을 사적인 상품으로 바꾸는 과정이며, 탈취하고 (사적으로) 전유하는 이중의 과정이다. 이 때문에 전통적으로 공적 재산이거나 공동재산이었던 (건강을 관리하거나 교육을 하는) 공유지 공간들을 사유화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제국주의는 외향적인 동시에 내향적이다. ... (78)아직 가치화되지 않은 것을 최초로 가치화하는 것을 탈취와 사적 전유의 첫 번째 형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세계를 상품으로 바꾸는 것’, 즉 기능적 공간들과 자본주의적 축적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2. 절대적 잉여가치 창출](79)자본의 가치 증식은 가치화라는 ‘제1막’이 끝난 이후로는 노동력이 자본가들이 전유할 수 있는 초과 이윤을 창출할 대에만 지속적으로 가능하다. ... 마르크스가 말한 이른바 절대적 잉여 가치 형태의 초과 이윤을 창출하는 것 이상의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노동자들은 오히려 자본에 형식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 (80)그렇지만 첫 번째 형태와는 달리 이 절대적 잉여 노동의 전유는 이미 가치 증식 과정의 요인이며 가치화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니다.

 

[3. 상대적 잉여가치의 창출](81)생산자들에게서 탈취할 수 있는(이 때문에 그들이 물질적으로 더 나빠지지 않으면서도) 노동 효율이 더 높아지면, 또한 그것은 자연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자원의 남획과 자연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과도한 유해물질이 침전되기 때문이다.

 

... (83)노동과 자연이 실질적으로 자본에 종속되는 것 ... 우선 근대 자본주의는 산업을 기반으로 하나의 체제로 발전하고, 자본의 축적에 영향을 미치는 이윤율에 의해 방향이 조종되며, 화석 에너지원으로부터 동력을 공급받는다. 이 화석 에너지원은 다른 에너지들(생체 에너지, 목재, 수력, 바람)을 점차 밀어내고 자본주의에 세계사적으로 비길 데 없는 뛰어난 동력을 부여한다. 생산 과정 전반에 재편되고 노동력과 자연은 ‘실질적으로’ 자본에 종속된다. 주관적 그리고 객관적 생산 조건은 자본주의적-합리적 조건으로 변환된다.

 

(86)생명체의 한계는 나노기술과 생명공학을 통해 ‘생명 과학적으로’ 극복된다. 따라서 글로벌화는 전 세계에 걸친 가치화를 목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이것은 ‘사회로부터 시장의 유리’의 이면에 감추어진 원리다. 경제는 자연과 사회의 시공간적인 조절로부터 유리되며 또한 그와 더불어 정치적 원칙과 그 원칙이 명시하는 구속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경제적 합리성이 일단 이런 식으로 모든 사회 문화적 그리고 영토적 굴레에서 유리되고 나면, 반자연적, 반사회적이고 따라서 철저하게 자폐증적인 체제라는 것이 이해된다. 결국 이것은 또한 신자유주의의 대변자들이 신자유주의를 어떤 식으로 소개하든 신자유주의의 결정적으로 중요(87)한 특성이기도 하다.

 

[4. 지정학과 새로운 제국주의](98)이 시대의 제국주의에서는 노동력의 ‘통상적인’ 착취는 전세계적으로 활동하는 투자가들의 수익률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불충분하다. 포드식의 상대적 잉여가치 창출이하는 포지티브섬 게임은 금융계의 높은 수익률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너무 적은 수익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탈취라는 새로운 형태 내지 방법을 통한 전유가 추가된다. 이것은 금융위기의 결과 터무니없는 높은 채무를 떠안는 형태가 된다. ... (100)강대국들의 정치에서는 과거 지정학의 입장을 보여주는 요소들이 오늘날에도 다시 나타난다. 경제의 논리(최대의 이윤 달성)는 영토의 논리(권력과 전유)에 의해 보완된다. 미국이 세계의 핵심 지역에 군사 거점들을 두고 영토상으로 주둔하고 있는 것은 명백히 지리전략적인 편성이다. 그러므로 탈취와 전유는 군사적 수단을 이용해서도 강탈과 불평등한 교환으로 행해진다. 자원, 특히 석유는 자본주의적 가치 증식 공간에 상품으로 나와 있기는 하다. 1배럴의 석유는 걸프 만에서 로테르담의 기착지로 가는 도중에 소유주를 몇 번이나 갈아 치운다. 석유는 현물 시장과 선물 시장에서 거래된다. 따라서 가격 동향은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의 투기의 대상이자 그 결과다. 이 때문에 자원시장과 금융시장의 상호 의존도는 매우 높다.

(101)하지만 이것은 일차적으로 석유라는 자원의 ‘교환 가치 측면’에 관한 것이다. 석유의 사용 가치 측면, 즉 원료의 형태는 자연이며, 오랜 기간(수백만 년)에 걸쳐 생겨났으며, 오늘날 특혜를 받은 영토 공간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자원은 자본주의적 교환 가치 논리와 가치 증식 논리의 대상일 뿐 아니라 영토적인 논리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영토에 대한 지배권은 곧 개별 국가 주권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따라서 네 번째 형태의 전유와 탈취에서 경제적 기능의 메커니즘들뿐 아니라 정치력과 군사력이 중요성을 얻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정치, 경제, 문화, 지경학과 지정학의 이러한 앙상블이 ‘새로운 제국주의’를 형성한다.

 

(107)자본주의, 화석 에너지원, 산업의 목적과 수단 관계에서의 합리성이라는 삼위일치는 인류사에서 유일무이하게 모든 경제, 사회적 과정의 가속화를 불러오며 또한 그렇게 해서 ‘국가의 부’를 크게 증대시킨다. 그러나 가속화의 결과로 자연의 파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는 발전 노선들이 선택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과 정책적으로 적절한 대책을 만들어내기 위해 원인을 밝혀 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것은 원칙상 새로운 자본주의의 동학이 불러온 또 다른 결과, 즉 세계의 불평등이 엄청나게 심화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109)글로벌화의 논리는, 1970년대 중반 이후의 탈규제와 자유화 과정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로 생겨난 역사적 글로벌화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이다. 산업혁명가과 더불어 세계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수단들이 늘어난다. 이렇게 해서 산업 자본주의의 생산 과정은 세계 모든 지역에 뿌리 내리고, 지역적인 저항에도 굴하지 않는다. 결국 경제 상황의 ‘무언의 강제’가 승리한다. 이 강제는 종종 앞 장에서 자세히 설명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형태를 띤 정치적 실력행사와 결합해서 이루어진다.

 

(111)자본주의와 화석 에너지의 결합이 없었다면 가속화를 통한 생산성의 증가는 허사가 되었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가 생산성과 부의 증대를 이루는 토대라고 확인했던 분업의 가속화는 새로운 기계류와 동력 전달 장치, 에너지 변환 시스템(특히 증기 기관)이 없었다면, 따라서 화석 에너지원이 없었다면 거의 진척을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산업 혁명은 화석 혁명이기도 하다.

 

(119)에너지 방화벽은 베를린 장벽처럼 영구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에 적합한 화석 에너지 체제는 태양 에너지 사회에 맞서 지속될 수 없다. ... 화석 에너지 자본주의의 종말에는 재생 가능 에너지 체계만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가 재생 가능 에너지 체계에 적응될 때만 가능하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보다 더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혁명이다. 이 혁명은 또한 18세기 말의 산업혁명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자본주의는 현실사회주의처럼 ‘벨벳’ 혁명을 통해 종말을 맞이하지 않는다. 지배계층들은 자신의 지배권을 움켜쥐고 있으며, 이 지배권은 본질적으로 석유, 천연가스, 핵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국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지배 엘리트층의 기획은 에너지 방화벽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의 종말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민중혁명의 결과가 아니라 (120)끔찍한 혼돈, 지배 계층이 세계를 ‘글로벌 무정부 상태’로 빠뜨리는 것임이 밝혀질 것이다(120).

 

(129)자본주의, 화석 에너지, 합리주의의 일체화는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 재생 가능에너지라는 대안적인 발전도상으로 접어들면 되면, 사회적 변화가 (130)얼마나 철저하게 일어날 것인지를 예감하게 해 준다. 석유, 천연가스, 석탄을 채굴하고 수송하고 사용하기 위해 이전에 만들어진 오일 시대의 인프라 구조, 즉 ‘공간적 고정화’(spatial fix)는 이런 자원들보다 훨씬 더 오래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산업-화석 에너지 체제의 생활 양색이 생겨났지만, 이것은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에너지 체제, 유럽 합리주의, 자본주의라는 세 분야의 일체화에 균열이 일어난다.

 

(144)성장이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심화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성장이 질적인 축적을 나타내는 하나의 양적인 특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사회적인 연관 관계들과 정치적 구상들의 복잡성을 단순화시키는 만능열쇠라는 것이 입증된다. 모든 문제들은 너무나 낮은 성장률에 그 원인이 있다는 식이다. 따라서 해결책도 간단하고 (145)명확하고 확실하다. 더 높은 성장이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 노동 생산성과 요소 생산성의 증가율 역시 모두 20세기 후반에는 마이너스였지만, 그럼에도 국민총생산 성장률보다는 높았다. 따라서 축적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 노동력은 해고되는 것이다. 성장은 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인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금융상의 한계, 높은 성장률에서 오는 생태적 결과, 그리고 특히 이미 달성된 높은 수준의 GNP에서의 절대적 증가의 조절에 대한 경제적 장벽도 성장과 함께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149)이러한 ‘시장 실패’는 고전파 이론과 신고전파 이론애서 가장 근본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것 중의 하나다. ... 경제가 역사적 시간과 지리적 공간을 벗어난 체제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이론은 경제적 변환, 즉 에너지와 원료의 소비가 자연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 외부효과들이 내부화되는 것과는 상관없이 -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 (150)경제과정을 단지 가치창출과정으로 뿐만 아니라 원료와 에너지의 변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근본적이고 중대한 오류다. 하나의 오류는 자연과 사회에 동시에 해를 끼치는 생산의 문제가 시장 경제의 수단들과 능률을 높이도록 자극하는 것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환상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여기서 보지 못하는 것은, ‘외부효과들’은 이미 외부화되었기 때문에 경제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효과들은 ‘일반 생산 조건’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160)‘금융주도’의 축적 체제는 금융 시장 활동가들의 지금까지 ‘억압 되어 있던’ 수익률 기대치를 너무 높게 끌어올릴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렇게 되면 실질 자본의 이윤율이 금융의 요구를 지속저으로 충족시키기에 불충분하게 된다. ... 하지만 실질적 이행 능력을 과중하게 요구하는 높은 실질 이자를 불러온 사태는 오늘날 경기에 따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동시에 전 세계적인 문제다.

 

(164)금융 거래 관계와 동떨어진 세계에서도 실물 경제의 성장은 무조건적으로 숭상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실물경제의 성장 없이는 금융 분야의 수익률 요구는 실질적으로 충족되지 않고, 따라서 금융 자본의 가치 잠식이 불가피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따라서 좋은 거버넌스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무원이나 교부금 수입자에게가 아니라, 공공 투자 발주의 혜택을 받는 대부분 초국적 기업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공공 투자 발주의 혜택을 받는 대부분 초국적 기업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초국적 기업들은 또한 한편으로는 공공 수주의 폭넓은 자유화에, 다른 한편으로 ‘좋은 거버넌스’를 통한 수주의 합리화와 신뢰성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173)금융문제와 관련된 어떤 격언에 의하면 한 나라는 외국 자본을 그 나라가 슬기롭게, 즉 투자를 할 수 있고, 이윤을 창출할 수 있을 만큼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만약 그 나라가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채무를 상환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신용능력을 감시하는 신용 평가 기관들은 처음에는 신주하게 그러나 나중에는 위협적으로 경보를 발동할 것이다.

언젠가 자본이 마치 도피하듯이 그리고 대규모로 그 나라에서 다시 빠져나가는 순간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투자된 자본이 멀리 떨어진 해외에 거주하는 ‘투자자들’에게 - 다른 ‘현지들’과 글로벌하게 비교해 볼 때 - 충분한 수익률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다. 충분한 수익률은 영원히 불가능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외국 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는 금융 수익률 조건은 너무나 높아서 실질 자본으로 투자해서는 그 수익률을 전혀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높은 이자를 대가로 도입한 자본은 투자의 형태로 생산 시설에 흡수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경쟁력을 뒤처지게 만든다. 왜냐하면 자본 도입과 함께 통화가 평가 절상되기 때문이다. 이 결과는 적어도 외국에서 도입된 자본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려다가 국가재정과 경상수지에 적자가 발생하면 명확히 드러난다. ... (174)따라서 실질 수익률보다 금융투자의 수익률이 훨씬 높을 때는 무엇보다 금융 분야가 번성하고 글로벌 금융 시장이 걷잡을 수 없이 성장하며, 이와 동시에 실물 경제가 과도하게 넘쳐 나는 금융 분야에 의해 압박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76)오로지 높은 실질이자와 불가피한 금융위기의 고난이 지나고 나면 투자 의욕이 높아지고 그렇게 되면 고용과 소득도 늘어날 것이라는 신자유주의의 희망만이 안정화 정책의 입장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을 뒷받침하는 단 하나의 사례도 찾아볼 수 없다. ... 노동가치는 금융시장의 활동가들이 전유하며, 이 가치의 창출에 대해 이들은 전혀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그것에 관여하지도 않으며, 때로는 이자를 수단으로 하지 않는 한 어떤 식으로든 전혀 관심이 없다. 수익률 요구(금융상의 청구권)라는 형태로 전유하는 것이 이 청구권이 충족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인 초과 이윤의 창출보다 더 중요해진다. 전유방식과 생산방식은 모순 속으로 빠져드는데, 이 모순은 채무자가 자신의 의무를 더 이상 이행할 수 없을 때 갑자기 드러난다. ... (177)금융자산의 실질 이자나 수익률이 높아지면 - 특히 다른 투자와 비교해서, 여전히 위험요인들을 고려하더라도 - 그에 대한 투자는 특별히 매력적인 것이 된다. 여기서 금융시장을 자유화하고, 혁신적인 금융상품과 새로운 경영전략들을 개발하거나, 탈규제로 얻어진 활동의 여지를 크고 작은 거래에, 불법적이거나 탈법적인 혹은 심지어 범죄적인 거래에 이용하려는 아주 결정적인 동인이 생겨난 것이 확실하다. 금융 투자자들에 의해 움직이는 자금은 실로 엄청나다.

 

(201)그러므로 테러리즘은 결코 근본주의에 눈먼 자살 테러범들이 외부에서 가하는 충격이 아니다. 테러리즘은 서방 세력들이 방대한 산유 지역에서 독재 정권을 비호하고 국민들을 억압함으로써 영향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려는 수십 년에 걸친 시도에 대한 대응이다. 또한 ‘테러와의 전쟁’에서 국가적으로 자행되는 테러에 대한 응징이기도 하다. 이 테러와의 전쟁은 결코 승리할 수 없으며, 따라서 끝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어떤 상대가 어떤 조건에서 패배할지 전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205)석유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소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매년 채굴되는 양이 새로 발견되는 매장량보다 더 많아지는 시점이 중요하다.

 

정치력과 군사력 뿐만 아니라 경제적 잠재력도 보유하고 있는 석유 소비국들은 자국의 에너지 안정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에너지 안정 정책은 결코 가난하고 약소한 나라들의 일이 아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평들하게 배분될 수 없는 자원을 장악하는 강대국들의 석유 제국(233)주의다.

 

(235)미국은 중동과 중앙 아시아에서 ‘지배적인 외부세력’이 되어 유럽 연합, 러시아, 중국, 인도에 맞서 자국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여기에는 군사 거점들이 이용되는데 이 거점들은 전 지역에 골고루 배치되어 있고 특히 2001년 9월 11일 사태 이후에 구축되었다.

정권교체 전략도 이 목적을 위해 추구되는데, 이라크에서는 잔혹하게, 그러나 키르기스, 그루지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도 본성을 숨기고 유화적으로 수행된다.

 

(251)그러므로 사회혁명은 사정에 밝은 당 지도부나 운동 엘리트층의 지시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석에서 뿐 아니라 (252) 자신의 희망과 이상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정치적 목표 설정에 있어서도(마르크스에 의해) ‘일반적 지성’으로, 즉 사회 운동과 정치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이라고 불렸던 수준에 도달해야만 한다. 집단 행동의 방향을 정하기 위한 논쟁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사회 혁명은 쿠데타가 아니라 많은 사회적 실험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반복되는 과정이다. ... 여기서 혁명의 구 얼굴이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정치적 전복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구성체의 변화이다. 이 두 가지는 각 특수한 사정에 따라 병행해서, 시간적으로 연이어서, 동시적으로 여러 나라들에서 (영국과 프랑스에서처럼) 진척될 수 있다. 진(253)척되는 속도는 서로 다르지만.

 

(254)우리는 존 홀러웨이가 멕시코 반정부 농민 저항 운동 사파티스타를 설명하면서 넌지시 제안했듯이 “권력을 넘겨 받지 않고서도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이것은 멋진 일이겠지만, 아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255)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은 경제를 연대적으로 만들고, 자연을 지속 가능하도록 다루어야 한다. ... (256)글로벌 시대에는 사회 운동의 많은 활동들이 영토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상수도의 민영화는 철회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물은 식품이지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의 공적 공간들을 점령하고 구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공장들은 폐쇄를 저지하고 점거한 직원들에 의해 채워진다. 이것들은 몇 가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투쟁들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혁명적인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가능한 것이기는 하다.

 

(267)연대의식은 공동체에서부터 생겨나며, 이 공동체는 공동의 가치 체계와 공동의 경험 배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연대의식은 공동의 집단적 기억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것은 정치적 논쟁에서 공동의 선-이해를 매개하며, 이러한 선-이해는 예를 들어 학교 교육 과정을 통해 습득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등가성 관계와 상호성 관계는 배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것들은 시장과 더불어 사회(268)에서 유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귀소된 채’ 남아 있다.

 

(269)여기서 일자리가 비정규화되고 불안정화되는 것은 ‘불안의 글로벌화’를 점차적으로 등급화해서 보여주는 형식으로 풀이될 수 있다. 처음에는 노동조합 측으로부터, 그러나 또한 자발적인 사회 운동 단체들과 정당들로부터도 이러한 현상에 항의하는 아주 요란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항의, 데모, 기업점거로 나타났다.

 

(273)비정규직 분야는 글로벌화의 일종의 충격 흡수장치며, 이 기능은 위로부터의 지배라는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편입되어 있다. 하지만 이 비정규화는 글로벌화의 결과에 당황한 사람들의 대응 방식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들은 확실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아래로부터의 신자유주의’라는 전략을 따른다. 이들은 ‘저절로 얻어지는 수법’, 외부에서부터 주어진 여건에 적응하는 수법, (274)다시 말해 자주성이 결여된 정신 상태를 만들어 낸다. 이 정신 상태는 푸코의 ‘통치성’ 개념의 의미에서, 통치하는 것을 쉽게 한다. ... 왜냐하면 사람들은 아무리 보잘것 없는 시장 기회라도 붙들어서 자신의 생활과 생존을 안정시켜야만 하며 따라서 초국적 대기업 경영자들과 정치 지배자들이 호화롭게 지내는 것과 동일한 행동 논리를 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행동 패턴의 일체화는 사회적으로 분열된 집단을 통합하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요인이다.

 

(276)신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보자면, 불안은 여러 이유에서 단점이라기 보다는 장점이 된다. 불안은 해방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실현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왜냐하면 불안은 끊임없이 경쟁으로 되돌아가게 만들고 연대 의식이 생겨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불안은 신자유주의의 견해에 의하면 혁신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 (279)불안한 여건에서는 연대 의식을 보여주는 행동 패턴이 길러질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신 많은 사람들은 독재적인 정부에 의한 안전을 기대한다.

 

(279)하트와 네그리는 노동자들의 대규모 유랑 생활을 가령 생존에 대한 불안의 표현이 아니라 거부의 표현이며, 기존의 생활을 벗어나 새롭고 더 나은 생활 여건을 추구하는 것의 표현이라고 여긴다. 홀로웨이 (280)역시 이주를 자본을 멀리 하려는 희망에 가득 찬 ‘도피의 한 형태’로 ‘자율성을 얻으려는 투쟁’으로, “이런 저런 형태로 일자리에서 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울려 퍼지는 거부의 목소리”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개별적인 경우에만 그렇다. 일반적으로 이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도피는 자본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인신 매매꾼들과 사악한 착취자들의 품 속으로 데려 간다. 이주는 ‘이탈’(exit)의 한 형태이며, 오히려 따져 보아야 할 것은 왜 이주자들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 홀로웨이가 자신의 실존주의적 역사해석에서 계속해서 표현하는 인간의 ‘절규’(Schrei)는 ‘목소리’(voice)가 아니라 깊은 좌절감의 불명료한 표현이다.

 

(310)유토피아는 막연히 열악한 현실을 황금시대와 대비해서는 안 되며, 과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운동 법칙’을 이끌어 내는 것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316)화석 에너지 체제를 전제로 하는 많은 유토피아들은 구체적이지 못하고 심하게 말하면 관념적이기 때문에 여러 가능한 세계들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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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샀다, 여러 권

  • 등록일
    2008/09/28 20:41
  • 수정일
    2008/09/28 20:41

홍대 앞 '와우 책 페스티발', 에 와서, 무진장 많은 책과 엄청 싼 가격에 놀라서, 당황한다. 마음을 갈앉히고 사야할 책과 빌려 봐도 되는 책들을 머릿속으로 가늠한다. 내 책 구입 습성 상, 인문-사회과학 책은 사지 않는다. 번역서는 빌려 읽는 게 좋기 때문이다. 일단 무조건 원전만 산다, 역서라 하더라도 최소한 같은 언어권 번역서만 산다, 는게 내 똥고집이니까. 그러니 주로 한국문학 쪽 책들을 산다. 그녀가 더 신났다. 상기된 얼굴로 책을 고른다. 조카녀석들 줄 동화책도 산다. 5000원이다. 그리고 시집은 ... 1000원에서 5000원 선이다. 이건 뭐, 공짜나 다름 없지 않은가. 다 샀다고 생각하고 밥 먹으러 내려 오는 길에 또 발견한다.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생각의 나무 출판사 부스에 떡, 하니 [Vincent van Goch]가 있다. 39000원이 정가인데 27000원이란다. 망설이는 그녀에게 말한다. "질러요." ... 결국 샀다.

 

지금 둘 다 커피숍에 앉아서 새로 산 책들을 쓰다 듬고 있다. 서로를 쓰다듬어도 모자를 연애시간에 제각기 눈을 글썽이며 책을 껴안고 있다. 둘 다 말이다. 안타까운 커플이다.

 

먼저 내가 고른 책들 중 일순위,

박상륭. [잡설품]. 이 책은 하마터면 사지 못할 뻔 했다. 하여간 오늘 산 책 중 제일 애정이 간다. 박상륭을 읽은 게 10년 전([죽음의 한 연구])이었다. 그 충격이 얼마나 심했던지 아직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이제 제대로 읽어 보기로 한다.

 

그 다음 시집들. 참고로 말하자면 이 시집들은 예전에 내 서가에 꽂혀 있었다. 2002년 겨울 방학이었을 것이다. 그때 대구 집에 와 보니, 수 백 권이나 되던 내 서가가 완전히 통째, 책꽂이 채로 없어진 것이다. 범인은 울 엄마. 취직할 생각은 안 하고 노상 책만 핥고 있는 외동아들에게 본때(?)를 보이기 위해 몽땅 버린 것이다, 판 것도 아니고 버린 것이다. 한 한 달을 앓아 누웠던 기억이 난다.

 

 

그 다음 그녀가 지금 껴안고 있는 책들,

 

 

 

 

 

한동안 영혼이 풍요로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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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력 백수?

  • 등록일
    2008/09/20 19:40
  • 수정일
    2008/09/20 19:40

아무래도 천성이 어디 나돌아 다니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닌 게 분명하다. 고3 녀석들은 중간고사 시험 준비기간이라 수업이 없고, 덩달아 논술 수업도 이번 주는 펑크다. 시간 당 수업료를 계산하는 학원 방침 상, 이러면 진짜 다음 달 개인 경제가 매우 곤란해 진다. 음, 뭐 그렇다고 굶어 죽기야 하겠냐, 고 늘 생각한다(장가 갈 일이 까마득한데 이러고 있다. 쩝).

 

우리 아가씨는 지금 열심히 돈을 벌고 있고, 난 하루 종일 커피숍에 앉아 영화 보고, 밀린 첨삭하고, 글 쓰고 ... 그야 말로 고학력 백수가 하는 짓은 다 한다.

 

[시대와 철학]을 읽다가, 이번에는 또 다른 책이 눈에 들어 온다. 이러다가 [로마제국 쇠망사]는 포기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다(뭐 한 열 권 정도까지 독서 계획이 밀려도 다 읽은 적이 많으니까 아직 크게 걱정은 안 한다). 하여간 이걸 살까 하다가, 소장할 정도로 중요한 건 아니다 싶어 도서관 대출을 하기로 한다. 다행히 도서관에 두 권이 있고, 한 권이 아직 미대출 상태다.

 

 

표지만 봐도, 내용이 찬란(?)할 것 같다. 일단 기대를 해 본다. [시철]을 화요일 오전까지 다 읽을 수 있을려나 모르겠지만, 일단 대출해야겠다.

 

뱀발: 방금 한 10명 정도의 아줌마들이 커피숍 바깥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난 처음에 깜짝 놀랐 ... 아니 기절할 뻔 했다. 이 정도의 군단이라면 이 작은 커피숍을 초토화시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 저들이 바깥에 진지를 마련했다.

그리고 또 한 무리가 있는데, 이건 좀 취한 것 같다. 한 다섯 명 정도. 다 여자들인 것 같은데, 둘은 굉장히 중성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다. 서로 뽀뽀하고 난리다. 왜 저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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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조 정치양식의 소멸과 정치의 새로운 장소

  • 등록일
    2008/09/10 15:59
  • 수정일
    2008/09/10 15:59

김원 외 지음,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천 권의 책, 2008

 

노동현장이 자본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흉흉한 소문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현장에 있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소문의 출처나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면서도, 때로는 그럴 줄 알았다고, 또 때로는 아무리 그래도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가 있는데 그럴리는 없다고 말한다. 사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편이었지 싶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게 참, 허탈한 절망을 안겨 준 책이다. 김원을 비롯한 '문화연구 시월'의 동인들은 명시적으로 '민주노조 정치양식의 시효소멸'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 선언의 타당함을 입증하는 철저하고, 실증적인 연구결과가 바로 이 한 권의 책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들은 이런 심상한 말을 화두처럼 던져 놓고 사람들에게 불콰한 현실을 목도하게 하는가? 이를테면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현실에 대한 우리들, 꼴좌파들의 현장에 대한 로맨스 따위가 아니다. 그런 건 공산당 선언이 곧 현실이라고 믿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고, 중요한 건 현장의 질곡을 '먼저' 똑바로 보라는 게다. 아니, 사실 두 눈 꼭 감고 운동의 대의니 뭐니 지껄인다고 사정이 더 나아지겠는가.

 

이 책에서 이들은 현장, 특히 현대자동차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하긴 현자야말로 (지금은 완전 어중이떠중이 된) 현중과 더불어 남한사회 노동운동의 현황을 콕콕 짚어 주는 바로메타가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현장 조사, 탐문, 인터뷰 등, 사회과학의 기본 소스를 직접 발로 뛰고, 문서를 뒤지면서 탐색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점이다. 선언에 그치는 요란한 논문 무더기가 아니라는 것.

 

책을 덮으면, 현장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가족주의, 군사주의, 가부장주의. 그리고 공장 밖으로 확산되지 못한 '총회민주주의' 의 전락한 모습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완전 절망 구덩이에 독자를 묻어 버리는 애살찬 짓을 하는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주문했듯이 현장의 문제를 푸는 것은 바로 현장의 동력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즉 '공장 밖으로' 확산시키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여기서 비정규직, 여성 노동의 문제가 놓여 있다.

 

섣불리 해결책을 제시하는 하루걸이 정치문건이 아닌 이상 독자는 한 번 스스로 곰곰히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과연 현재 노동현장은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도대체 지금/여기(hic et nunc) 프롤레타리아트란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프롤레타리아로 호명되는 그곳에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가 설 자리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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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외

  • 등록일
    2008/09/04 18:14
  • 수정일
    2008/09/04 18:14

지금 들고 다니면서, 짬짬이 읽고 있는 책은 이것,

 

 

도서관에 도착하면 으례 그러듯이 새로 들어온 책서가를 살핀다. 이때의 마음이란 뭐랄까 ... 조마조마하다. 좋은 책이 나오면, 그래서 조마조마 ... 안 나오면 그런대로 조마조마 ... 아니나 다를까 오늘 한 권, 아니 두 권이 들어와 있다. 이것,

 

 

이럴 경우에는 잠깐의 망설임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왜냐면, 현재 읽고 있는 책과 그 책 다음에 읽을 책 목록이 이미 잡혀 있으니 말이다. 지금 이 책은 그러니까, 계획에는 없는 '사건'인 셈이다. 사건은 재미나게 받아 들이자, 는게 평소 생각이니까, 덥석 집어 들고 대출대로 가는 것도, 당연하지만, 사람이다 보니 걱정도 된다. 아니, 전공도 아닌데 ... 뭐하러, 라고 분명 말하는 축들도 있을 것이고, 내 생각에도 이건 뭐, 그리 전공이나 논문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기번이 아닌가! 이걸 영문으로 읽어도 시원찮을 판에 고맙게도 전공자분들께서 번역까지 해 주셨는데, 덥석 받아 먹지 않으면 바보가 아니겠는가! 하여, 난 [소크라테스 이전 ... ]을 잠시 걷어 치우고, 기번을 택하기로 한다. 하여간 내 머리 속에는 세 권의 책이 있다. 위의 두 책과 아래 책.

 

 

아니, 한 권 더 있구나.

 

 

 

이건 둘 다, kalavinkaa와 함께 읽는 책 목록에 있다.  [거대한 뿌리여, 괴기한 청년들이여], 이 책에는 심상스런 혐의 같은 것이 있긴 하다. 김수영이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일단의 젊은 시인들이 모이긴 했는데, 이게 또 해괴한 문단 정치 세력이 되지 않을까, 라는 혐의 말이다. 난 그런 걸 너무 많이 봐왔다. 하여간 김수영이 그러한 정치적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최대한 순정한(?) 시선으로 시들을 읽었으면 한다. 훑어 봤을 때, 한 구절 생각 나는 게 있는데, 그건 황병승이 김수영의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었다'라는 구절을 '택시타고 집/ 택시타고 집'이라고 완전, 골계스럽게 바꾼 거다. 한참을 그녀와 웃었다. 그 외에 서동욱 선생의 시도 괜찮았다(이 사람은 날 가르쳤던 사람이라 '시인'이라고 하기 뭐하다).

 

[꽃집에서]는  다시 읽는다. 아마 18살 때 우중충한 누런 표지로 나왔던 최초의 민음 세계 시인선으로 봤을 것이다. 그때도 이런 시인이 있나 싶었다. 유쾌한 저항! 그게 뭔지 그때 처음 알았으니 말이다. 저항이란게 무슨 독립운동 하듯이 비장한 것만이 아니라, 사랑을 하듯 달콤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 

 

하여간 이건 뭐, 정독할 도서목록도 아니고, 들고 다니면서 설렁설렁 읽을거리다. 읽을 때마다 서평을 쓰고 싶지만, 이상한 게 어떤 책은 '악평'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아래와 같은 책.

 

  

 

악평을 쓸 것 같은 느낌으로 보기 시작해서, 악평조차 못 쓸 정도로 날 망가뜨린 책이다. 서사구조는 물론이고, 함축성도 없고, 문체도 심심한데다가 뭐하러 저런 소재를 장편에 이르기까지 써갈겨 놓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책이다. 거 참. 뭐하러 저런 글나부랭이에 5천만원 씩이나 들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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