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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16
    단편과 테제
    redbrigade
  2. 2009/07/03
    단편과 테제(2009/6/26~2009/7/2)
    redbrigade
  3. 2009/06/28
    단편과 테제(~2009/6/28)
    redbrigade

단편과 테제

  • 등록일
    2010/07/16 11:00
  • 수정일
    2010/07/16 11:00

주체의 '구성'이라는 과녁은 통상 정치철학의 주제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함축이 어떤 집단성(collectivity)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데카르트에 대한 스콜라적 번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방면에서는 마리옹(Marion)의 기여가 참조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신학적 방식의 주체 구성은 필연적으로 대타자인 '신'의 위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인식론적으로는 주체가 우위를 점할지라도(ratio cognoscendi) 존재론적으로 신의 우위(ratio essendi)를 실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결국 이러한 주체-타자 관계의 비대칭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리꾀르가 마리옹과 더불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정치철학적으로 조우와 교전(encounter)인 것이 이들에게는 타자에 대한 ‘응답’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신학적 방식의 기여가 주체의 정치철학적 구성이 겨냥하는 바를 불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일반적으로 주체의 정치철학적 구성을 프로이트와 맑스를 통해 거듭하는 방식 외에 신학적 매듭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여기에는 물론 프로이트와 맑스도 필요하겠지만, 라캉과 언어철학의 기여를 참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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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2009/6/26~2009/7/2)

  • 등록일
    2009/07/03 01:02
  • 수정일
    2009/07/03 01:02

- 뭐 이런 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일단 피켓을 들고 시청 광장에 선다. 이때 경찰들을 채증할 동지 한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한다. 사진채증을 담당한 동지는 피켓팅하는 동지가 연행될 때 그 장면을 찍는다. 동영상이면 더 좋다. 저들이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고, '불법'에 대한 근거를 대지 못하는 장면을 음성과 함께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이 자료를 근거로 채증된 경찰의 신원을 파악한 후 고소한다. 그리고 소장에, 경찰은 조직의 일원이므로 명령권자의 처벌도 함께 원한다고 쓴다. 만일 경찰 상층이 명령에 복종하기만 한 이 한낱 이경, 일경 등이 처벌되는 것을 수수방관한다면 윤리적인 비난을 받을 것이고, 만약 개입한다 하더라도 비난을 당할 것이다. 너무 순진한 생각인가? 해 볼만 하지 않은가?

 

- 대기업과 신문사 방송진출이 핵심인 미디어법의 노림수가 과연 '여론 분점' 나아가 '부르주아지의 여론 독점'에만 있는 것일까? 내 생각에 이게 일차적 목적이란 건 분명한데, 두 번째 경우의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미디어법이 통과되어 찌라시들과 이건희 일가가 방송을 해댄다면, 기존의 합리적 여론과 이후의 노예적 여론이 극명하게 날을 세울 것이다. 이건 곧 여론 분점을 경유해서 여론 갈등이 촉발될 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중대한 사안마다 사람들의 의견이 뚝뚝 갈라지는 걸 상상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다. 물론 이런 갈등 상황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부르주아지들이 될 게 뻔하다. 사람들은 이 일련의 사태들 속에서 정치적 무관심, 절망감, 냉소주의에 빠질 것이고 말이다. 이 마지막의 사태, 곧 전 인민의 정치적 무기력이 바로 부르주아지들이 노리는 바이기도 하다는 것. 이를 위해서 미디어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다.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를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미디어는 중립적일 수 없고, 그 때문에 더 장악하기 쉬우며, 그 결과 우민을 더 쉽게 양산할 수 있다. 괴벨스는 이 이치를 너무나 잘 꿰뚫어 보고 있었지 않나?

 

- 조정환이 촛불의 폭력을 '절대적 폭력'으로 표현하면서, 그것의 존엄성이 부르주아지의 '선제폭력'이나 촛불들의 '방어폭력'보다 더 높은 권능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그 절대적 폭력은 실재적인 폭력의 잠재성도 함축하고 있다고 해야 정당하다. 혁명적 폭력은 다중의 혁명적 조건의 최상의 성숙, 그 자체를 '증명'하는 것이다. 만약 그 폭력이 부르주아지의 탄압이라는 객관적 정세 하에서 발생하였다면, 그에 뒤이어 나타나는 다중의 실재적 폭력은 무람없이 절대적 폭력의 발현이라고 해야 한다. 이 면에서 조정환은 너무 소심하다.

 

- 흐린 날은 모든 사물이 신비롭다/호남선 고속버스 안/노변에 이제 막 생긴 마을이/경운기를 세워 두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 본다

 

-우선은 이런 것이다. 즉 '대통령 소환제'를 법률적으로 구성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인정하고, 기반으로 잡은 상태에서 그 제도화에서 파생되는 것들을 상상하고, 보완하라는 것이다. 법률적 말단에서 시작하지 말고 제헌적 상상력에서  시작하여 제도화를 완성하는 것, 그것이 꼬뮨이 실물화되는 최초 동력, 부동의 원동력(the unmoved mover)인 게다. 상상하라, 반성하라, 행동하라, 가 아니라, 상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반성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들에게 맡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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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2009/6/28)

  • 등록일
    2009/06/28 14:37
  • 수정일
    2009/06/28 14:37

- 새 검찰총장과 국세청장에 또 정치검찰과 최측근을 앉혔다. 정말 이쯤 되면 막나가자는 것이다. 자, 어떻게 해야 할까? 지방선거와 총선을 통해 한나라당을 압박하는 건 정해진 방법이고, 다른 방법은 없을 것인가? 내 생각에 사람들은 이 정권에 대한 대항마가 등장하는 순간, 정권 퇴진 투쟁을 실질적으로 조직할 것이라는 게다. 소위 '대안'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지독한'(?) 습관이 남한 민중들에게 있으니 말이다. 여튼, 과연 부르주아 정치판에 누가 대항마가 될 것인가? 이명박의 정치력 이 지금보다 더 바닥으로 내려 가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생겨날 것이지만 ... . 간절한 것은 이렇다. 제발, 박근혜는 아니기를. 지금은 여전히 이 여자가 대세라 한다. 재수 없게도 말이다.
 
- 다중과 촛불에 대한 조정환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존재론적으로 다중이 더 심층적인지 촛불이 더 심층적인지 애매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촛불이 존재론적 심층이고, 이때 다중은 이들을 그저 '명명'하는 계기일 뿐이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다중이 더 심층이며 촛불은 그 '영원한 시간'이 현실화된 표면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애매함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 궁극적으로 '정치'는 소멸해야 한다. 오해하지 말자. '소멸'은 억압되어 해체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의식의 층위에서 무의식으로, 제도에서 삶으로, 구조에서 에피스테메(Foucault)로 내려가는 것이다. 소멸이란 여기서, 다시 말해 '대안적 삶'이다. 부르주아적 정치(대문자 정치, 플라톤적 정치)는 애저녁에 사라진 자리, 군사적 대결과 착취가 사라진 자리에 '소멸'의 과정이 들어선다. 여기서 헤겔에 대한 좌파들의 오래된 애증이 실현될 것이다. 현실적인 것이 이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이념이 현실이 될 것이다. 로두스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로두스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이 길은 혁명의 오디세이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한예종 사태에 대응하는 황지우와 진중권을 비롯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이 야비한 정권을 제대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선제저항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걸 잘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단순무식한 2MB정권이 노무현을 정치살인하면서 끌고간 정치공작은 순서가 딱 정해진 것이다.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1차여론공작: 찌라시들이 공격대상에 영점 조준을 하면서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흘린다. 2. 명박이 패거리들이 이 말을 받아 '문제'를 '사실'로 둔갑시킨 후 '조사해 봐야 한다'는 식으로 입장을 밝힌다. 3. 떡검이 조사에 착수한다. 4.  2차여론공작: 다시 찌라시들이 나서는데, 이번에는 강도가 틀리다. 검찰 내부 '빨대'를 동원하여 공격대상을 제대로 사격하기 시작한다. 5. 다시 딴날당과 정권이 이를 받아 표적을 '범죄자' 취급한다. 6. 삼각편대(명박이 패거리+찌라시+떡검)의 모양새가 완벽하게 갖춰지면서, 표적을 둘러싼 파상공세가 매일  전개된다. 7. 결국 표적이 사살된다. 똥물을 뒤집어 쓰고, 인격 살해를 당하거나, 정치생명이 끊어지거나, 또는 이 둘 모두를 당하고 목숨을 끊는다.
한예종 교수들은 이 수순의 맨 처음에 선제저항을 하기 시작한 거다. 황지우는 사표를 던짐으로써, 진중권은 진보신당 탈당을 선언하고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말이다. 내 생각에는 실제로 이 저항 때문에 인초니와 명박이 패거리들이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지 않나 싶다. 대한늬우스나 만들겠다고 지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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