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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2009/6/26~2009/7/2)

  • 등록일
    2009/07/03 01:02
  • 수정일
    2009/07/03 01:02

- 뭐 이런 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일단 피켓을 들고 시청 광장에 선다. 이때 경찰들을 채증할 동지 한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한다. 사진채증을 담당한 동지는 피켓팅하는 동지가 연행될 때 그 장면을 찍는다. 동영상이면 더 좋다. 저들이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고, '불법'에 대한 근거를 대지 못하는 장면을 음성과 함께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이 자료를 근거로 채증된 경찰의 신원을 파악한 후 고소한다. 그리고 소장에, 경찰은 조직의 일원이므로 명령권자의 처벌도 함께 원한다고 쓴다. 만일 경찰 상층이 명령에 복종하기만 한 이 한낱 이경, 일경 등이 처벌되는 것을 수수방관한다면 윤리적인 비난을 받을 것이고, 만약 개입한다 하더라도 비난을 당할 것이다. 너무 순진한 생각인가? 해 볼만 하지 않은가?

 

- 대기업과 신문사 방송진출이 핵심인 미디어법의 노림수가 과연 '여론 분점' 나아가 '부르주아지의 여론 독점'에만 있는 것일까? 내 생각에 이게 일차적 목적이란 건 분명한데, 두 번째 경우의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미디어법이 통과되어 찌라시들과 이건희 일가가 방송을 해댄다면, 기존의 합리적 여론과 이후의 노예적 여론이 극명하게 날을 세울 것이다. 이건 곧 여론 분점을 경유해서 여론 갈등이 촉발될 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중대한 사안마다 사람들의 의견이 뚝뚝 갈라지는 걸 상상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다. 물론 이런 갈등 상황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부르주아지들이 될 게 뻔하다. 사람들은 이 일련의 사태들 속에서 정치적 무관심, 절망감, 냉소주의에 빠질 것이고 말이다. 이 마지막의 사태, 곧 전 인민의 정치적 무기력이 바로 부르주아지들이 노리는 바이기도 하다는 것. 이를 위해서 미디어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다.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를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미디어는 중립적일 수 없고, 그 때문에 더 장악하기 쉬우며, 그 결과 우민을 더 쉽게 양산할 수 있다. 괴벨스는 이 이치를 너무나 잘 꿰뚫어 보고 있었지 않나?

 

- 조정환이 촛불의 폭력을 '절대적 폭력'으로 표현하면서, 그것의 존엄성이 부르주아지의 '선제폭력'이나 촛불들의 '방어폭력'보다 더 높은 권능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그 절대적 폭력은 실재적인 폭력의 잠재성도 함축하고 있다고 해야 정당하다. 혁명적 폭력은 다중의 혁명적 조건의 최상의 성숙, 그 자체를 '증명'하는 것이다. 만약 그 폭력이 부르주아지의 탄압이라는 객관적 정세 하에서 발생하였다면, 그에 뒤이어 나타나는 다중의 실재적 폭력은 무람없이 절대적 폭력의 발현이라고 해야 한다. 이 면에서 조정환은 너무 소심하다.

 

- 흐린 날은 모든 사물이 신비롭다/호남선 고속버스 안/노변에 이제 막 생긴 마을이/경운기를 세워 두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 본다

 

-우선은 이런 것이다. 즉 '대통령 소환제'를 법률적으로 구성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인정하고, 기반으로 잡은 상태에서 그 제도화에서 파생되는 것들을 상상하고, 보완하라는 것이다. 법률적 말단에서 시작하지 말고 제헌적 상상력에서  시작하여 제도화를 완성하는 것, 그것이 꼬뮨이 실물화되는 최초 동력, 부동의 원동력(the unmoved mover)인 게다. 상상하라, 반성하라, 행동하라, 가 아니라, 상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반성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들에게 맡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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